역사107 약산 김원봉 4명 동생들의 비참한 최후... 이승만의 속셈 약산 김원봉 4명 동생들의 비참한 최후... 이승만의 속셈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청주형무소 학살사건과 김원봉 가족 몰살 사건 20.09.07 14:04l최종 업데이트 20.09.07 14:04l 김성수(wadans) 해방 후 청주형무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탑동에 위치했으며 직원이 140명이었고 재소자 수용가능 인원은 500여 명이었다. 하지만 1948년 정부수립을 전후로 청주형무소는 수용인원을 초과했다. 청주형무소의 수용인원은 계속 증가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약 1600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결국 이들을 모두 감방에 수용할 수 없어 공장 하나를 비워 임시감방을 만들고 그곳에도 재소자들을 수용했다. "40도가 넘는 형무소, 시루에 떡을 찌듯 더웠다" 당시 청주형무소 형무관으로 근무했던 홍아.. 2022. 9. 15. [기획] “조선 민중들이 기뻤던 것은 8월16일뿐이었다” [기획] “조선 민중들이 기뻤던 것은 8월16일뿐이었다” 2020. 8. 15. 등록 :2020-08-14 04:59수정 :2020-08-14 13:05 광복75돌 해방 뒤 운명의 이틀 그날 ‘좌우합작’의 실패 불안한 평화를 낳다 “해방입니다” 기쁨을 뒤로하고 여운형-총독부 2인자 엔도의 만남 ▶75년 전 8월15일. 미-소 냉전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한반도에 갑작스러운 해방이 찾아왔다. 조선인들은 해방 당일부터 독립된 통일국가 건설에 나섰지만, 결국 분단과 전쟁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반도는 다시 미-중 대립이라는 신냉전의 초입에 서 있다.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방 이후 40시간에 걸친 격동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해방 전후 40시간 동안 무슨 일이.. 2022. 9. 15. 임시정부·광복군과 OSS의 ‘독수리 작전’ 계획 임시정부·광복군과 OSS의 ‘독수리 작전’ 계획 2020. 6. 15.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7)-제1부 해방 전야(5)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2020.06.15 00:01:34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 2022. 9. 15. '장군이 나서보시오'... 이승만 하야 직후 미국이 보낸 편지 '장군이 나서보시오'... 이승만 하야 직후 미국이 보낸 편지 [동아시아사 연구가 김종성의 역사 강의] 4.19와 미국 18.04.19 12:15l최종 업데이트 18.04.19 12:15l 글: 김종성(qqqkim2000) 영상: 황지희(nabts) 님의 방 - 오마이뉴스 www.ohmynews.com 2022. 9. 15. [이승만의 두얼굴] 국민 버리고, 거짓말하고... 국민 버리고, 거짓말하고... 이승만에서 시작된 정치혐오2018. 4. 17. 국민 버리고, 거짓말하고... 이승만에서 시작된 정치혐오[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 31]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의 피란 18.04.17 10:35l최종 업데이트 18.04.17 10:35l글: 박도(parkdo45)편집: 김지현(diediedie) 1950년 6월 27일 새벽... 대통령, 서울을 탈출하다1950년 6월 25일 이른 새벽,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날 오전 비원에서 낚시를 즐기다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전방 전투상황 보고를 받았다. 신성모의 첫 보고는 "크게 걱정할 것 없다"였다고 한다.6월 26일 새벽 이승만은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전쟁 발발 사실을 알리고 직접 통화를.. 2022. 9. 15.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 4·3 당시 학살명령 거부한 ‘한국판 쉰들러’ 올해 경찰영웅으로 70여명 총살 거부했다…‘부당 명령 미이행’ 문형순 경찰서장 호국원에전 성산포경찰서장…6·25 때 계엄사령부 명령 거부예비검속자 70여명 목숨 살려…당시 생존자 안장식에기자허호준,허호준수정 2024-05-11 01:04등록 2024-05-10 16:45제주4·3 때 계엄사령부의 총살 명령을 거부하고 주민들을 살린 ‘경찰영웅’ 문형순 전 서장의 안장식이 10일 국립제주호국원에서 열렸다. 허호준 기자 한국전쟁 초기 예비검속된 주민들을 총살하라는 군의 명령을 거부해 무고한 희생을 막은 경찰 간부가 10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고 문형순(1897-1966) 전 성산포경찰서장이다. 일제 강점기 만주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 문 서장은 1947년 5월 제주경찰감찰청 기동경비대장으로 제주에 온 뒤 모슬.. 2022. 9. 15. 산 자와 죽은 자의 함성..광화문에서 제주4·3을 외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함성..광화문에서 제주4·3을 외치다 안채원 입력 2018.04.03. 18:12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제주 4.3사건 70주기인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희생자들의 모습을 한 예술인과 일반인 403명이 '403 광화문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2018.04.03. park7691@newsis.com 70주년 범국민위 주최한 '403 광화문 프로젝트' 100여명 배우·300여명 시민 등 총 403명 참가 광화문광장에 모여 울부짖고 퍼포먼스 선보여 "짓눌렸던 70년 이야기 못한 답답함…광장 분출" 【서울=뉴시스】안채원 기자 = 70년간 변방을 떠돌던 제주4·3의 한 맺힌 이야기가 서울 한복판에서 많은 시민들의 참여 속에 함성과 몸짓으로 표현됐다. 【서울=뉴시스】조.. 2022. 9. 15. [정리뉴스]아이도, 여성도 예외없이 ‘초토화’···70년 전 제주 땅에선 무슨 일이 [정리뉴스]아이도, 여성도 예외없이 ‘초토화’···70년 전 제주 땅에선 무슨 일이 곽희양 기자 huiyang@kyunghyang.com 수정2018-04-02 14:50:02 제주 4·3 사건을 담은 영화 의 한 장면 ‘제주 4·3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제주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숨진 사람만 2만5000명에서 3만명으로 추산됩니다. 70년 전 제주의 땅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1945년 광복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까지, 그날의 역사를 정리해봅니다. ‘제주 4·3 바로알기(제주 4·3평화재단)’를 길잡이 삼았습니다. 함께 보시죠. 1992년 4월3일 제주 4.3 연구소 현장 조사반이 4.3 사건 희생자 유골 .. 2022. 9. 15. [4·3기획] 70년을 침묵한 ‘백비(白碑)’의 한맺힌 사연…‘미완의 역사’ 제주4·3 [4·3기획] 70년을 침묵한 ‘백비(白碑)’의 한맺힌 사연…‘미완의 역사’ 제주4·3 [중앙일보] 입력 2018.04.03 00:01 수정 2018.04.03 08:09 최경호 기자최충일 기자 1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은 추모객들이 지난 70년간 이름조차 짓지 못한 채 누워있는 백비(白碑) 앞에서 참배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달 31일 오후 제주시청 앞. 서예가인 오석훈 전 제주민예총 지회장이 대형 붓으로 백비(白碑) 모형에 ‘4‧3민중항쟁’이란 글씨를 써 내려갔다. 옆에 있던 참석자들은 바닥에 놓여 있던 비석이 세워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하나다’ ‘하나로 이어져 있다’를 연호했다. 70주기를 맞은 제주 4‧3추념일을 기념하기 위한 ‘4‧3민중항쟁 70주년 정신 계승 범국민대회’ 모습이다... 2022. 9. 15. 이전 1 ··· 7 8 9 10 11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