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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리뉴스]아이도, 여성도 예외없이 ‘초토화’···70년 전 제주 땅에선 무슨 일이

by 무궁화9719 2022. 9. 15.

[정리뉴스]아이도, 여성도 예외없이 ‘초토화’···70년 전 제주 땅에선 무슨 일이

 
수정2018-04-02 14:50:02

 

제주 4·3 사건을 담은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의  장면

 

‘제주 4·3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제주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숨진 사람만 2만5000명에서 3만명으로 추산됩니다. 70년 전 제주의 땅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1945년 광복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까지, 그날의 역사를 정리해봅니다. ‘제주 4·3 바로알기(제주 4·3평화재단)’를 길잡이 삼았습니다. 함께 보시죠.

 

1992년 4월3일 제주 4.3 연구소 현장 조사반이 4.3 사건 희생자 유골 11구가 발견된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남서쪽 6km 지점 다랑쉬굴 내부를 조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45년 8월15일|태평양 전쟁 종료

제주도에 있던 7만여명의 일본군이 철수했다. 미군정이 실시됐다.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됐고, 제주도에서도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제주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다. 인민위원회는 치안활동에 주력했다. 제주도는 1945년 11월부터 미 제59군정중대가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해도 미군정은 영향력이 강했던 제주 인민위원회에 협조를 받았다. 동시에 우익인사를 조직화시켰다. 1946년 8월 제주도(島)가 도(道)로 승격되면서, 우익의 입지가 강화됐다. 도 수준에 맞게 경찰 병력은 강화됐고,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시작됐다. 미군정의 정책은 도민의 반대에 부딪혔고, 식량난이 겹쳐 도민의 불만은 높아졌다.

 

제주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1947년 3월1일|경찰 발포로 주민 사망

좌익진영은 3·1절 기념식을 전도민적 행사로 치르기로 준비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3·1절 행사 때 시위를 불허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3·1절 기념식에 3만명이 모였다. 시위대가 행진한 뒤에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발발굽에 치여 다쳤다. 하지만 기마경찰은 아이를 두고 지나갔다.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항의했다. 무장경찰은 이에 대응해 총을 쐈다. 6명이 사망했다. 젖먹이 아이를 안은 여인과 15세 아이도 이에 포함됐다. 3월19일 조병옥 경무부장은 해당 발포가 정당방위였고, 이 사건은 북조선과 공모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1947년 3월10일|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

3월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다. 관공서, 은행, 회사, 학교, 운수업체 등 156개 단체가 동참했다. 미군정은 경찰을 증파, 강경대응했다. 미군정은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민주주의 민족전선 간부 등 500명을 붙잡아, 328명을 재판에 부쳤다. 3·1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군정은 제주도 고위 관리를 극우성향의 인물로 교체했다. 총파업에 가담한 공무원과 경찰도 파면했다. 육지에서 경찰병력을 더 들여오는데, 서북청년회 회원이 대거 제주도에 들어온 것도 이때 이후다.

■1948년 4월3일|4·3봉기

1948년 1월 남한 단독 선거안이 명백해졌다. 남조선노동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2월7일 전국 총파업을 벌였다. 파업을 거치면서 검거 바람이 불었고, 붙잡힌 청년들은 구타당하거나 구타당한 뒤 죽임 당했다. 궁지에 몰린 제주도 내 좌익진영은 결사항쟁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의 350명의 무장대는 경찰서와 서북청년회 숙소 등 우익단체 사람의 집을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경찰 4명이 죽고 2명이 행방불명됐다.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이 죽었다. 무장대도 2명이 죽었다. 미군정청은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경찰병력을 강화했다. 서북청년회 회원도 늘었다.

 

제주 4·3 사건을 담은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의 한 장면

 

■1948년 4월28일|제9연대와 무장대, 평화협상 합의

4월17일 미군정은 모슬포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했다. 9연대장 김익렬은 무장대측과 만나 “72시간안의 전투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뤄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평화협상을 맺었다. 그러나 미군정 하지 사령관은 무력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체포된 무장대 대원의 모습. /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1948년 5월1일|‘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 파기

5월1일 오라리 마을에서 방화사건이 발생하면서, 평화협상은 완전히 깨졌다. 방화는 서북청년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 청년들이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했다. 5월6일 미군정은 김익렬 9연대장을 해임하고 신임 연대장에 박진경을 임명했다.

 

불타는 오라리 마을. 미군 정찰기가 공중에서 촬영한 이 모습은 기록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온다.

1948년5월1일/기록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

 

 

■1948년 5월10일|무장대, 5·10선거 거부 투쟁

무장대는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5월10일 선거를 막기 위해, 5월7일부터 선거사무소를 공격했다. 선거 관련 공무원을 납치해 살해했다. 다수의 주민들은 무장대에 동조해 입산했다. 결국 제주도 선거구 3개 중 남제주군 선거구만 선거를 치렀다. 북제주군 2개 선거구는 투표율이 모자라 무효 처리됐다.

 

5·10선거가 제주에서 열리지 못하게 된 후, 제주군정장관 요청으로 제주 해안에 나타난 미 구축함. 해안 봉쇄작전이 전개됐다.

1948년 5월12일/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1948년 6월18일|박진경 연대장 부하들에게 피살

5·10선거의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경비대 병력은 기존 1개 대대에서 2개 대대가 추가 배치됐다. 이를 지휘하는 이는 박진경 연대장이었다. 토벌이 강해졌다. 5월27일까지 붙잡힌 입산자는 3126명, 6월 중순까지는 6000여명이 넘었다. 경비대의 무리한 토벌에 반대하는 분위기도 커졌다. 병사 41명이 무기를 가지고 경비대를 떠나 산으로 갔다. 6월18일 박진경 연대장은 숙소에서 부하들에게 피살됐다. 이와 관련된 부하들은 처형당했다.

 

제 11연대 본부가 설치된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박진경 연대장 고별식에서 딘 군정장관이 두도사를 하고 있다. 1948년6월18일./제주 주둔 미고문관 출신 웨솔로스키 소장

 

■1948년 8월15일|대한민국 정부수립

1948년 5월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결국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반면 1948년 7월 중순부터 남한 전역에서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지하 선거’가 열렸다. 제주도의 지하선거는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가는 형식이었는데, 무장대의 강요에 의한 경우도 많았다. 강요에 의해 지하 선거에 참여한 이들은 나중에 총살 당했다. 1948년 8월21일 해주에서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 회의’가 열렸는데, 무장대 총책 김달상 등 제주 대표 6명이 이에 참여하면서 제주도는 더욱 강경 진압의 대상자가 됐다.

■1948년 10월11일|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이승만 정부는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해,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보냈다. 10월19일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서, 사태는 더 커졌다.

 

■1948년 10월17일|“해안서 5km 지역 통행자 사살” 포고문

송요찬 9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사람은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고 밝혔다.

 

송요찬 연대장의 포고문에 명기된 적성 지대/‘제주 4·3’ 바로 알기

 

■1948년 11월17일|제주도 계엄령 선포, ‘초토화 작전’ 개시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했다. 1948년 10월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집단 살상이 진행됐다.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기 전인 1948년 9월말까지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이었다. 그러나 이후 희생자는 2만5000명~3만여명으로 추산될만큼 크게 늘었다.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이주시키고, 중산간 마을 100여곳을 불태웠다. 이주명령이 내려졌는데도 병자와 노인, 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주명령이 전달되지 않은 곳도 있었다. 해안 마을로 이주해온 사람일지라도 가족 중 한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고 지목돼 총살당했다. 오히려 이에 반발해 입산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는 결국 더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무장대 역시 무차별 토벌작전이 벌어진 11월 이후에는 무장대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수용자들. 1948년 11월/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1949년 3월2일|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설치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는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선무작전을 펼쳤다. 산에서 내려온 이들은 제주읍내와 서귀포의 임시 수용서에 가둬졌다. 이들 중 일부는 석방됐으나 상당수는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1650여명의 귀순자들은 육지에 있는 형무소로 보내졌다.

■1949년 6월7일|무장대 총책 이덕구 사살

6월7일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 이미 무장대 세력은 와해된 상태지만, 이덕구는 무장대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귀순자들을 집단으로 수용했던 제주항 부근의 주정공장 모습/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1950년 6월25일|한국전쟁 발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와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붙잡혀 처형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됐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됐다.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슬포 양곡창고 에 갇혀있던 250여명이 8월20일 모슬포 섯알오름 기슭 탄약고 터에서 총살된 것이 대표적 예다. 제주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수백명이 산지항 앞 바다에서 수장되거나, 정뜨르 비행장에 끌려가 총살·암매장 됐다.

섯알오름 학살터/정지윤기자

 

1954년 9월21일|한라산 금족구역 해제

한국 전쟁이 일단락 된 뒤 한라산 금족구역이 해제됐다. 그러나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얽맸다. ‘4·3위원회’에서 심사하여 확정된 희생자 중 가해별로 나눠보면,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가 84.3%(1만2000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12.3%(1756명)이다. 10대 이하는 5.4%(770명), 61세 이상은 6.3%(901명), 여성은 21.1%(2990명)이다.

 

제주 4.3사건으로 희생된 가족의 시신앞에서 울고 있는 여인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4·3 생존자인 표선면 가시리 한신화 할머니(98)가 항쟁을 함께 겪었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양달천씨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할머니는 4·3때 잃은 4살 아들을 70년 동안 가슴에 묻고 살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2016년 할머니에게 ‘제주4·3어버이상’을 수여했다./정지윤기자

 

*참고자료: 제주 4·3 바로알기(제주 4·3평화재단, 2016년 10월 발행),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훼복위원회, 2003년12월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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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희양 기자 huiyang@kyunghyang.com>

 

제주 4·3, 토벌대는 사라진 자 대신 그의 아내를 죽였다

무차별 학살의 순간에도 존재했던 차별…가장에 따라 가족의 고통 결정돼, 강제결혼·성폭행 증언도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8년 04월 03일 화요일

 

가장에 따라 가족의 고통이 결정됐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만 봐도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군경과 서북청년단(서청) 등 토벌대는 1949년 1월17일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민 1000여명을 모은 뒤 경찰·군인·공무원 가족을 골라 살려주고 300여명을 살해했다.

 

주민 450여 명이 학살된 북촌리는 피해가 상당히 컸던 마을 가운데 하나다. 제주도는 2007년부터 약 16억 원을 들여 해당 위령비를 비롯해 ‘너븐숭이4·3 공원’ 등을 건립했다. 제주 4·3을 처음으로 기록한 작가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1978년) 문학 기념비도 설치했다. ‘순이삼촌’ 무대는 이 동네다.

 

▲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영위’ 사진=장슬기 기자

 

4·3 이후, 생존 여성의 경우 순경 가족은 보훈청에서 연금 혜택이 뒤따랐지만 나머지 가족에겐 경찰 조사·감시와 연좌제라는 족쇄가 이어졌다.

 

13살 때 4·3을 겪은 김인근씨는 ‘폭도들이 오빠를 데려갔고, 이후 경찰이 가족을 폭도로 규정했다’고 증언했다. 토벌대는 오빠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답한 김씨 가족에게 심한 폭력을 가했다. 군인들은 산달인 올케 언니를 죽였고 어머니에게 총 7발을 쐈다. 가족들은 폭도로 규정됐다. 아버지는 저수지에서 총살됐다.

 

토벌대가 어머니를 잡아가자 오빠가 산에서 내려와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풀려났지만 아픈 몸으로 오래 살지 못했다. 오빠는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김씨는 오빠를 폭도로 규정하지 않았고 폭도와 경찰에 의해 이유 없이 쫓기는 인물로 기억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가족이 오빠로 인해 희생됐다고 이해했다. 물론 억울한 희생이었다고도 생각했다.

 

27살에 4·3을 겪은 현신봉씨는 가해자를 시아주버니로 규정했다. 시아주버니가 폭도였기 때문에 시부모님 등 가족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현씨 남편 정기봉씨는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자수해 약 18년을 철창 안에서 보냈다. 김씨와 현씨 모두 ‘폭도의 가족’이었다.

 

토벌대를 피해 많은 사람이 산으로 도망갔다. 토벌대는 사라진 자 대신 그의 아내를 죽였다. 아내 등 가족을 대신 살해하는 것을 ‘대살(代殺)’이라 부른다. 서귀포시 대정읍에 사는 이형욱씨가 사라진 사이에 토벌대는 이씨 아내를 대살했다. 이씨는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평생 혼자 살았다.


무차별 학살에서도 작동하는 차별
일상의 사소한 차별이 죽음의 기록에서 확대됐다. 평소대로 기록은 가부장과 식솔을 구분했다.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영위’ 위령비에는 1949년 군인에게 학살당한 주민들 명단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김○○ 모(母)’, ‘한○○ 처(妻)’, ‘이○○ 녀(女)’, ‘홍○○ 자(子)’ 위령비를 본 시민들은 희생자들을 남성의 이름으로 기억하게 된다.

 

문아무개씨 두 딸은 4·3 당시 희생됐다. 위령비에 ‘문○○ 녀’가 두 번 등장했다. 기록자가 희생자들을 차별했다고 볼 순 없다. 한국사회가 이름 없는 이들을 호주에 소속시켰을 뿐이다. 위령비에 새겨진 이름들은 국가 폭력의 잔혹함을 나타낸 동시에 학살 상황과 그 이후에 가부장제가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보여준다. 4·3은 제주로 한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 역사다.

 

장기간 대량 학살 사건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겹치며 한 개인의 삶이 결정됐다. 여성들은 가족을 위해 경찰·군인과 정략결혼 했다. 오금숙의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 인권 피해 사례’에는 약혼한 남성 홍경토라는 교사를 살리기 위해 서북청년단원의 결혼 요구를 받은 교사 정아무개씨 이야기가 있다. 정씨는 무장 투쟁과 무관했지만 약혼자라도 살리겠다는 마음에 강제 결혼을 선택했다.

 

성폭력 역시 비일비재했다. 권귀숙 제주대 교수는 “아방도 없고 허난 밥도 없고”란 글에서 “겨울에 여자 옷을 벗기고 성폭행했고 여자와 남자를 강제로 성교시키기도 했다”며 가장 악랄했던 가해자를 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과 서청단장 김재능이라고 전했다.

 

성폭력 원인에 대해 권 교수는 “여성을 괴롭힘으로써 상대편 남자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있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며 “무엇보다 여성 지위가 낮은 문화권에서 여성 몸을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 작가 강요배의 작품 '젖먹이' 사진=제주4·3미술제 홈페이지

 

폭력이 흐르는 방향

 

이처럼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가해졌다. 육지에서 섬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젖을 빨던 아이에게로. 평화와 저항의 움직임은 약자에 집중할 때 기록된다. 4·3 당시 여성들은 여성 해방을 주장했고, 문맹 퇴치 교육, 축첩과 조혼을 반대하는 등 봉건제 타파에도 관심을 뒀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친일 경찰 청산 등을 외쳤던 것 역시 4·3의 저항 정신이다.

 

제주 4·3 당시 토벌대는 양민 학살을 ‘공산주의 소탕’으로 정당화했다. 토벌대는 ‘악(惡)’을 어떻게 규정했을까.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 주민 김현필씨는 1999년 9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토벌대들이) 늙은 남자 노인들은 굽혀서 기어가라고 하고 위에는 아가씨들을 태웠다. 그 당시 이를 피하는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었다. 젊은 아가씨들도 늙은 남자 노인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말했다.)”

 

학살자들이 지키려던 건 남녀나 노소로 대표되는 ‘위계’였다. 전 세계를 둘로 쪼갠 냉전 시대에 대한민국이라는 반공국가에서 가부장적 사회 권위주의 문화가 어떻게 중첩됐는지, 4·3에 녹아있다.

 

※ 참고 문헌

권귀숙, “아방도 없고 허난 밥도 없고”-제주 4·3의 여성사
박경열, 제주 여성 생애담에 나타난 4·3의 상대적 진실-김인근과 현신봉의 생애담을 중심으로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4·3 길을 걷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회 제주 4.3사건, 1999년 9월12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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