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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3기획] 70년을 침묵한 ‘백비(白碑)’의 한맺힌 사연…‘미완의 역사’ 제주4·3

by 무궁화9719 2022. 9. 15.

[4·3기획] 70년을 침묵한 ‘백비(白碑)’의 한맺힌 사연…‘미완의 역사’ 제주4·3

            
 
[중앙일보] 입력 2018.04.03 00:01 수정 2018.04.03 08:09
 
  
 

 

 

1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은 추모객들이 지난 70년간 이름조차 짓지 못한 채 누워있는 백비(白碑) 앞에서 참배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달 31일 오후 제주시청 앞. 서예가인 오석훈 전 제주민예총 지회장이 대형 붓으로 백비(白碑) 모형에 ‘4‧3민중항쟁’이란 글씨를 써 내려갔다. 옆에 있던 참석자들은 바닥에 놓여 있던 비석이 세워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하나다’ ‘하나로 이어져 있다’를 연호했다. 70주기를 맞은 제주 4‧3추념일을 기념하기 위한 ‘4‧3민중항쟁 70주년 정신 계승 범국민대회’ 모습이다.
 

70주기 4·3추념식, 3일 제주서 엄수
좌우익 대립에 이름 없는 백비의 한

4·3, “공산주의 선동” 등 갈등 여전
“진상규명 통해 백비에 글 새길 것”

 

70주기 4‧3을 앞두고 추모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추념일을 하루 앞둔 2일 4‧3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이날 ‘기억 속에 피는 평화의 꽃’을 주제로 전야제를 열었다.
 

1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은 추모객들이 문화해설사로부터 4·3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듣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제70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은 3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엄수된다. 행정안전부가 주최하고 제주도가 주관하는 이번 추념식에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1분간 묵념 사이렌이 울린다. 올해 추념식은 문재인 대통령의 참석 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1만5000여 명이 참석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한다.
 
올해 70주기를 맞은 4·3에 국내·외의 관심이 쏠리면서 제주도민들 사이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제주도민들이 대거 학살당한 지 70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는 회한 때문이다. 4·3은 1948년 4월 3일부터 7년 7개월간 2만5000명 이상이 희생된 현대사의 비극이다.  


     

1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은 추모객들이 4·3 당시 숨진 희생자들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4·3은 1979년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 삼촌』이 나오기 전까지 제주도민들에게조차 언급을 할 수 없는 금어(禁語)였다. 당시 사건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투쟁이 도화선이 된 탓에 봉기·항쟁·폭동 등 구체적인 성격조차 규정하지 못해서다. 

 
현재까지도 제주 지역사회에서는 4·3을 놓고 “잔혹한 국가권력에 맞선 민중 봉기”라는 견해와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한 폭동”이라는 입장이 맞서고 있다. 앞서 ‘제주4‧3 진실규명을 위한 도민연대 준비위원회’는 지난 1월 17일 “4·3의 성격은 남로당의 폭동”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4·3의 성격 규명을 젖혀둔 상황에서 발의된 ‘4‧3특별법 개정안’ 처리에도 반대한다”고 덧붙였다.


 

제주4·3의 참상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 문학비. 현기영 작가가 1979년 이 소설을 발표하기 전까지 4·3은 제주도민들에게 조차 금어(禁語)로 통했다. 프리랜서 장정필

 

이런 제주도민들의 착잡한 심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이 ‘백비’다. 제주의 백비는 아무런 이름이나 문구를 새기지 못한 채 ‘4·3평화기념관’에 누워 있다. 지난 70년간 정명(正名)조차 못한 한을 품은 백비 옆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적혀 있다. 양윤경 4·3유족회장은 “학살과 무장봉기 등 다양한 성격의 사건이 혼재된 탓에 이름 짓는 것이 미뤄져 왔지만, 70주년을 ‘정명’의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70년 만에야 당시 유적지가 처음으로 국가문화재가 된 것도 4·3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29일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수악주둔소’를 국가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 수악주둔소는 4·3 당시 투입된 경찰들이 무장대 토벌작전을 벌인 거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국내 724개의 등록문화재 중 4·3과 관련한 유적이 등록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좌우익의 이념논쟁과 진상규명 지연 등으로 인해 문화재 등록 작업이 순탄치 않았던 것이다.


 

향토사연구가인 한상봉씨가 4·3유적지 중 처음으로 국가문화재로 등록되는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수악주둔소’를 찾아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7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흔적들이 사라지거나 훼손된 것도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한 요인이 됐다. 한상봉(53) 향토사연구가는 “4·3 당시 주둔소나 초소들을 만든 돌들이 한라산 둘레길이나 도로 정비 등으로 대부분 훼손된 상황이어서 이번 문화재 등록이 4·3의 역사적 진실을 보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제주도민과 4·3 관련 전문가들은 특별법 개정을 통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2000년 1월 제정된 4·3특별법을 개정하는 작업이 17년째 제자리를 맴돌고 있어서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4‧3특별법 개정안’은 기본적인 법 성격을 기존의 진상조사법에서 피해구제법으로 전환했다.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과 군법회의 재판 무효화, 추가적인 진상규명 등이 골자다.제주도도 4·3희생자 배·보상과 트라우마치유센터 건립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제주4·3 당시 주민 252명을 학살한 제주 섯알오름 학살터. 프리랜서 장정필

 

이념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진 과거사를 재정립함으로써 평화와 행복의 섬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진행 중인 ‘4370 동백꽃 배지’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도자기와 금속 등 2가지 종류로 제작된 배지는 4·3을 상징하는 동백꽃을 형상화했다. 동백꽃은 강요배 화백이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완성한 제주민중항쟁사 연작 그림집인 ‘동백꽃지다’를 통해 4·3을 상징하는 꽃으로 대중에 알려졌다.
 
동백꽃 배지에는 4·3 당시 희생된 영혼들이 동백꽃처럼 겨울철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쓰러져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붉은색의 동백꽃은 이른 봄에 피어나 생을 다하면 꽃봉오리가 통째로 떨어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번 캠페인에는 정우성과 곽도원·안성기 등 유명 인사들이 속속 동참하면서 4·3을 전국에 알리고 있다. 이들은 ‘4월엔 동백꽃을 달아주세요’라는 주제로 직접 배지를 달고 동참을 권유하는 릴레이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제주 돌담 밑에 떨어진 4·3의 상징 동백꽃. 프리랜서 장정필
 

가수 이효리를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의 4·3 알리기 노력과 함께 학생·청년들의 참여도 확대되고 있다. 남편과 함께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이효리는 3일 4·3 추념식에서 중간 내레이션을 맡는다. 이번 추념식을 주관하는 행정안전부는 4·3을 전국에 알린다는 취지로 이효리를 섭외했다.
 
제주 학생들 역시 4·3교육주간(3월 19일~4월 8일)을 맞아 다양한 추념 행사를 열고 있다. 제주 세화중은 제주 곳곳에 있는 4·3 유적지를 알리기 위해 학교 안에서 ‘우리 동네 4·3유적 관련 사진전’을 진행한다. 제주여고 1학년 학생들은 2~3일 학교에 4·3 분향소를 설치한 뒤 참배와 추모행사를 한다. 김홍국 제주도교육청 학교교육과장은 “학생들이 70년 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다시는 이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4·3 당시 숨진 희생자들의 영정. 프리랜서 장정필

  
4·3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소요사태와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주민이 대거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를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것이 현대사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954년까지 이어진 무력 충돌 과정에서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이르는 2만5000~3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당시 통일독립을 촉구하는 대규모 3·1절 기념집회가 끝날 무렵 경찰의 발포로 젖먹이를 안은 21살 여인과 16살 학생 등 6명이 희생된 것이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경찰은 한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차이는 것을 본 주변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시위대를 향해 총을 쐈다.
 
제주=최경호·최충일 기자 ckhaa@joongang.co.kr         

         

제주4·3평화공원에 전시된 ‘비설(飛雪)’ 조형물. 1949년 1월 초토화 작전이 벌어질 때 당시 25세 였던 변병옥(제주시 봉개동) 여인과 그의 두살난 딸이 거친오름 동쪽 기슭 눈속에서 희생된 시체로 발견된 것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1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은 추모객들이 지난 70년간 이름조차 짓지 못한 채 누워있는 백비(白碑) 앞에서 참배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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