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조선 민중들이 기뻤던 것은 8월16일뿐이었다”
2020. 8. 15.
등록 :2020-08-14 04:59수정 :2020-08-14 13:05
광복75돌 해방 뒤 운명의 이틀
그날 ‘좌우합작’의 실패 불안한 평화를 낳다
“해방입니다” 기쁨을 뒤로하고
여운형-총독부 2인자 엔도의 만남
▶75년 전 8월15일. 미-소 냉전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한반도에 갑작스러운 해방이 찾아왔다. 조선인들은 해방 당일부터 독립된 통일국가 건설에 나섰지만, 결국 분단과 전쟁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반도는 다시 미-중 대립이라는 신냉전의 초입에 서 있다.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방 이후 40시간에 걸친 격동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해방 전후 40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 한겨레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이후 <경성야화>란 회고록을 남기는 조용만(1909~1995)은 15일 새벽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집이 있는 계동으로 향했다. 전날 총독부에 불려 들어간 이성근(1887~?) 사장은 오후 5시쯤 풀이 죽은 얼굴로 신문사로 돌아와 전 사원을 불러모았다. 그는 미국 등 연합군이 포츠담 선언을 통해 요구한 ‘무조건 항복’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신국불패·본토결전을 외쳐대던 일본의 허무한 항복이었다. 조용만은 “여운형씨의 집에 가 인터뷰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날 밤 계동에 들렸다가 허탕을 치고 아침 일찍 다시 여운형을 찾은 것이었다.
해방의 15일은 쾌청한 날이었다. 하루 평균 기온은 27.2도였고, 아침엔 하늘에 80%의 구름이 끼어 있었지만, 정오 일왕의 항복 방송이 나온 뒤인 오후 3시 무렵엔 구름이 걷히고 쾌청해졌다. 조용만은 계동 집 근처에서 이후 여운형이 중심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이강국(1906~1956)·박문규·최용달 등 이른바 ‘성대파(경성제대파) 공산주의자’ 들과 만났다. 경성제대 선배인 이강국은 조용만에게 여운형이 잠시 후 총독부의 2인자인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만나 담판을 짓는다는 사실을 전했다. 잠시 후 계동 골목이 떠들썩해지고 여운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여운형은 언덕 위로 올라와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오늘 정오를 기해 일본 통치로부터 해방됩니다.”
좁은 계동 골목 안에서 많은 이들이 만세를 부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15일 아침, 여운형-엔도 회담이 이뤄진 시각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총독부 관리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일본인 모리타 요시오(1910-1992)의 역작 <조선 종전의 기록>(1964)을 보면, 여운형이 오전 6시 30분께 나가사키 소장, 백윤화 경성지방법원 판사와 함께 야마토정(현재 충무로)의 총감관저를 방문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15일 새벽 여운형과 함께 있던 동생 여운홍은 회고록 <몽양 여운형>에서 아침 7시 당시 조선의 유일한 자동차 정비공장인 을지로 6가 경성서비스 정형묵이 “이런 날이 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 두었던” 차가 도착했고, 여운형이 오전 7시 50분에 출발했다고 적었다. 통감관저에 도착한 여운형은 이제 곧 해방될 조선의 운명을 둘러싸고 엔도와 담판을 시작했다.
엔도의 고민은 해방의 기쁨에 휩싸인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70여만 재조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가하면 어찌하나였다. 엔도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 시절에 발생한 3·1 만세시위를 현장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조선 민중들이 분노할 경우 얼마나 무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지 알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면 서대문 형무소 등 조선 곳곳에 갇혀 있는 정치범·사상범 등을 석방하고 신뢰할 수 있는 조선인 유력자에게 치안 협조를 구해야 했다. 총독부 실무자들은 <동아일보>·경성방직·보성전문 등을 거느리고 조선 내 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송진우(1887~1945)에게도 협력을 요청했다. 하지만, 엔도는 평소 자신과 깊은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여운형을 택했다.
“해방입니다” 기쁨을 뒤로하고
여운형-총독부 2인자 엔도의 만남
치안유지-일본인 안전 보장 ‘담판’
정오 ‘일왕의 항복’ 4분37초 방송
여운형은 ‘정치세력 단합’ 꾀하고
송진우는 “경거망동 삼가라” 거부
미-소는 38도 경계 분할점령 합의
경성서 “독립만세” 거대한 물결에도
분단과 골육상쟁의 비극은
본격적으로 시작될 참이었다
이 만남에서 엔도와 그의 직속 부하인 니시히로 다다오 경무국장(한국의 경찰청장)은 여운형에게 조선인 사상범·정치범을 석방할테니, “이들이 망동을 하지 않게 해달라. 민중 가운데 청년·학생이 폭동의 중심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으니 냉정함을 유지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그 대가로 △3개월간 식량 확보 △치안유지와 (국가)건설사업에 간섭과 구속 배제 △민족해방의 추진력이 될 학생훈련과 청년조직 간섭 배제 등 5대 조건을 내걸었다. 해방을 앞둔 극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 대표 여운형과 총독부 사이에 ‘유혈 충돌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해야 한다’는 합의가 도출된 것이다.
여운형
이날 엔도는 여운형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정세 예측을 전했다. 청진 등 조선 북부에 진입해 있는 소련군이 “적어도 17일 오후 2시까지 경성에 들어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엔도 류사쿠
당시 기준으로 이는 매우 합리적인 예측이었다. 소련이 9일 0시 ‘소일 중립조약’을 일방 파기하고 소-만 국경을 넘어 일본을 향한 공격에 나섰다는 것은 <매일신보>에도 보도된 공개 정보였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여운형은 물론 엔도 역시 미-소가 북위 38도를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이 내용이 담긴 미국의 일반명령 1호에 동의한다는 뜻을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해 온 것은 그 다음날인 16일이었다.
아베 노부유키
여운형은 ‘당연히’ 총독부 2인자의 정세 예측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늦어도 ‘내일 모레’ 소련군이 경성에 진입한다면,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좌파들이 중심이 돼 건국에 나서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해방 직후 한반도 정국을 뒤흔드는 좌익 중심의 건준 결성으로 이어진다.
송진우
그날 정오, 일왕의 항복 방송이 일본과 전 조선에 울려 퍼졌다. 14일 밤 궁내성 내정청사 2층 정무실에서 녹음된 4분37초 길이의 방송이었다. 방송의 핵심 내용은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는 것이었다.
총독부 청사 제1회의실로 모여든 직원들은 기립한 채 방송을 청취했지만, 잡음이 심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이는 일본어 구사능력의 문제는 아니었다. 일본 최고명문인 도쿄제대 법학부 정치학과를 1932년 졸업한 뒤, 이듬해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최하영도 “천황의 목소리가 가늘어”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일왕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들렸다 해도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는 두루뭉술한 표현이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뜻임을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최하영은 일본이 앞서 패전 예고를 했기 때문에 ‘항복한다’는 얘기일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방송이 끝난 총독부 제1회의실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를 깬 것은 아베 노부유키 총독의 통곡소리였다. 회의실에 모인 다른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지도 분개하지도 않았다. 다만, 모두 기진맥진한 표정들이었다.
21살 일본 여성 나가타 가나코는 3-4개월 전부터 총독부에 임시 고용돼 중요 서류를 정리하는 작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나가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느 새 직원들이 방을 오가며 “태워라, 태워라”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내다보니, 벌써 중요문서에 대한 소각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창밖으로 누군가가 파기해야 할 중요 문서를 내던지면, 아래에선 이를 쌓아 놓고 기름을 부어 태웠다. 청명한 여름 하늘에 서류를 태운 재가 눈꽃처럼 휘날렸다.
같은 시각 정국의 중심으로 떠오른 계동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여운형의 딸 여연구(1927-1996)는 회고록 <나의 아버지 여운형>에서 “갑자기 대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방안과 마루, 마당에 사람들이 꽉 차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적었다.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임수의 아들 이란은 방송이 끝난 뒤 몰려든 사람들이 너무 많이 집 안엔 “움직일 틈이 없었”고, 그 인사들은 서로 수근수근대며 “거의 자기 정신들이 아닌 것 같”았다.
해방 전후로 여운형이 온 힘을 기울인 것은 조선 내 정치세력의 ‘단합’이었다. 여운형은 주요 인사들에겐 해방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11일께부터 우파 세력을 대표하던 송진우와 합작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 대해 여운형의 측근이던 이만규는 <여운형 투쟁사>에서 “언제나 송(송진우)만은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 경계하고 해방을 맞이할 준비도 하려 들지 않았다. 15일 (<동아일보> 조사부장 출신인) 이여성을 보내고, 그 다음에 또 사람을 보내고, 그 다음엔 여운형이 친히 가서 ‘그대 보기에 나의 출발이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국가의 큰일이니 허심탄회하게 나와서 대중의 신망을 두텁게 하고, 대사에 차질이 업께 하라고 힘 있게 권하였다. 송은 끝끝내 ‘경거망동을 삼가라. 충칭 정부를 지지해야 된다’ 하고 협동을 끝끝내 거부했다”고 적었다. 송진우의 비협조로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량의 일원화”를 목적으로 내건 건준은 불완전한 출범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당일이던 15일 건준 출범을 위한 실무작업을 담당한 것은 이후 건준 부위원장과 미군정 민정장관에 오르게 되는 안재홍(1891~1956)이었다.
안재홍
안재홍은 15일 오후 경성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계동 서울방송국 편성과 임병현씨 집 2층을 건준을 위한 연락사무소로 써야 하니 전화를 놓아 달라”고 요청했다. 전화 설치를 위해 기술과 직원 심상웅이 사무실을 나서며 신출내기 기자 문제안을 불러냈다. 두 사람이 서둘러 도착한 건물 안에 안재홍이 있었다. 그는 아래층 큰방에 보성전문, 연희전문, 중앙불교전문, 경성제대 학생 40명을 앞에 두고 “드디어 우리들이 국가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때가 왔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조선이 독립됐다! 안재홍의 뜨거운 연설을 들은 문제안의 눈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해방 당일부터 좌파들이 정국 주도권을 잡아가는 모습에 우익 인사들은 말 못할 초조감을 느꼈다. 해방 무렵 양주 덕정에서 몸을 피해 있던 민족 변호사 이인(1896~1979)은 서둘러 경성으로 향했다. 15일 저녁, 우익 인사들은 송진우의 원서동 집에 모여 냉수로 축배를 들고 있었다. 송진우는 모인 이들에게 해방 직전 이쿠타 기요사부로 경기도 지사 등으로부터 협력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인은 “정치는 현실인데 몽양과 민세(안재홍)가 비록 불순하기는 하나, 불과 반일 간에 몽양의 천하가 된 것처럼 그 기세가 충천하는듯하다. 만일 이대로 간다면 전도가 암담하다!”고 말했다. 좌익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빨리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일왕의 항복 연설문이 담긴 1945년 8월16일치 <매일신보>
이인은 일제 치하에서 두 번의 옥고를 치른 여운형과 아홉 차례의 옥고를 치른 안재홍을 변호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중재로 16일 2시 여운형과 송진우는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여운형의 측근 이만규의 기록을 보면, 여운형이 “국가의 큰일이니 허심탄회하게 나와서 대중의 신망을 두텁게 하고 대사의 차질이 없게 하자”고 말했지만 송진우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송진우 쪽의 기록인 동아일보사의 <독립을 향한 집념>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봉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산주의자도 못되면서 공산주의자 노릇을 하게 될 위험성이 없지 않다”고 여운형을 만류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좌파 중심으로 어서 빨리 건국 준비를 하자’는 여운형과 ‘임시정부가 귀국할 때까지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는 송진우의 의견 대립으로 해방 직후 첫 좌우합작 시도가 실패한 것이다. 이때 시작된 좌우갈등의 불씨는 미-소 냉전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제약과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한반도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게 된다.
해방의 소식이 본격적으로 전해진 16일 경성 시내엔 거대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총독부의 약속대로 이날 아침 여운형의 입회 아래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들이 대서 석방되자, 그 환영 인파를 중심으로 불어난 군중이 경성 시내를 휘감아 돌며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이다. 이 열광에 무리에 ‘이제 곧 경성역에 소련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오후 3시10분. 마치 조선인의 독립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선포하는 것 같은 “지금 해내·해외 3000만 우리 민족에게 고합니다”로 시작하는 안재홍 건준 부위원장의 연설이 울러퍼졌다. 하지만, 기대했던 소련군은 오지 않았다고 조선인들은 의아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서울 시민들이 남산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해방을 맞는 조선인들은 머잖아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좌우갈등이라는 거대한 불씨를 품은 한반도는 ‘분할 점령’이라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매일신보>는 24일 “조선에 관하여서는 자유 독립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는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 하에 두고 각각 군정이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 민중들을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해방 당일 밤 조선건준위 긴급 구성
안재홍 부위원장 역사적 대중 연설
갑작스런 해방·무모한 충돌 막으려
처절한 보복 아닌 화해·협력 호소
퇴각 일본에 무력자제 경고 의미도
해방의 감격이 잦아든 1948년 7월 안재홍은 “8·15 이래 실망, 실망에 떨어져 들어가고 있는 민중이 기뻤던 것은 8월16일 뿐이었다고 개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70년 넘게 이어지는 분단과 골육상쟁의 비극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참이었다. 8·15는 일제의 압박 속에 시름하던 조선이 해방된 가장 기쁜 날이 동시에 지금까지 이어지는 질곡의 역사가 시작되는 가장 어두운 날이기도 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참고문헌길윤형, <25년 동안의 광복>동아일보사, <독립을 향한 집념>모리타 요시오, <조선 종전의 기록>문제안 외, <8·15의 기억-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여연구, <나의 아버지 여운형 : 잃어버린 巨星의 재조명>여운홍, <몽양 여운형>이만규, <여운형 투쟁사>이정식, <여운형-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조용만, <경성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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