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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 4·3 당시 학살명령 거부한 ‘한국판 쉰들러’ 올해 경찰영웅으로

by 무궁화9719 2022. 9. 15.

70여명 총살 거부했다…‘부당 명령 미이행’ 문형순 경찰서장 호국원에

전 성산포경찰서장…6·25 때 계엄사령부 명령 거부
예비검속자 70여명 목숨 살려…당시 생존자 안장식에

  • 수정 2024-05-11 01:04
  • 등록 2024-05-10 16:45
제주4·3 때 계엄사령부의 총살 명령을 거부하고 주민들을 살린 ‘경찰영웅’ 문형순 전 서장의 안장식이 10일 국립제주호국원에서 열렸다. 허호준 기자
 
한국전쟁 초기 예비검속된 주민들을 총살하라는 군의 명령을 거부해 무고한 희생을 막은 경찰 간부가 10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고 문형순(1897-1966) 전 성산포경찰서장이다.
 
일제 강점기 만주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 문 서장은 1947년 5월 제주경찰감찰청 기동경비대장으로 제주에 온 뒤 모슬포경찰서장을 거쳐 1949년 10월부터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재직하다 한국전쟁을 맞았다. 전쟁 발발 직후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제주지역에서도 예비검속한 주민들에 대한 학살이 벌어져 1천여명이 넘는 주민들이 총살 뒤 암매장되거나 수장됐다. 계엄사령부가 문 서장에게 문서를 보내기 열흘 전인 8월20일엔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 예비검속된 252명이 모슬포 섯알오름에서 군인들에 의해 총살됐다.
 
그러나 성산포 관내에서 예비검속된 주민들에 대한 총살 명령은 문 서장의 거부로 실행되지 않았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 성산포경찰서 관내 성산·구좌·표선면의 예비검속 총살 대상자 명단이 현존 경찰자료에 남아있다. 계엄사령부가 총살하도록 한 D급 및 C급은 각각 4명과 76명이었는데, 문 서장은 이 지시를 거부하고 이들 가운데 6명만 군에 넘겼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문 서장에게 1950년 8월30일 ‘예비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내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고 지시했으나, 문 서장은 문서에 ‘부당함으로 미이행’이라 적고 총살 집행을 거부해 주민들을 살렸다.
 
제주시 오등동 제주평안도민회 공동묘지에 묻혔던 문 전 서장의 유해는 이날 윤희근 경찰청장 등 경찰 간부들과 4·3유족회 등이 참가한 가운데 국립제주호국원에 안장됐다. 안장 행사는 오전부터 파묘와 화장, 영결식, 안장식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3월 문 서장에 대한 국립제주호국원 안장을 승인했다. 이날 안장식에는 예비검속 당시 성산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가 문 서장의 지시 거부로 생존한 강순주(94)씨도 참석했다.
 
앞서 제주경찰청은 지난해 7월 문 서장의 독립운동 자료를 발굴해 독립유공자 심사를 국가보훈부에 6차례에 걸쳐 요청했으나 입증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이후 경찰은 문 서장이 한국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지리산전투사령부에 근무한 이력을 확인하고 6·25 참전 유공으로 국가보훈부에 서훈을 요청해 지난해 말 국가유공자로 선정됐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진개동산에 ’4·3사건 위령비’와 함께 서 있는 ‘경찰서장 문형순 공덕비’. 허호준 기자
 
제주4·3 때 계엄사령부의 총살 명령을 거부하고 주민들을 살린 ‘경찰영웅’ 문형순 전 서장의 안장식이 10일 국립제주호국원에서 열렸다. 허호준 기자
 
문 서장은 모슬포에 근무할 때도 주민들의 희생을 막은 것으로 전해진다. 문 서장은 1953년 경찰을 그만둔 뒤 혼자 어렵게 살다 1966년 숨졌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진개동산에는 마을주민들이 2005년 7월 세운 ‘경찰서장 문형순 공덕비’가 있다. 4·3 시기 문 서장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경찰청은 2018년 8월 그를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하고, 제주경찰청 앞에 추모 흉상을 건립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 4·3 당시 학살명령 거부한 ‘한국판 쉰들러’ 올해 경찰영웅으로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입력 : 2018.08.27 11:01:00 수정 : 2018.08.27 11:36:29

 

제주 4·3 당시 ‘예비 검속자를 총살 집행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민간인

수백여명의 목숨을 구한 고 문형순 제주 성산포경찰서장.

 

제주 4·3 당시 민간인 총살 명령을 거부하고 수많은 목숨을 살린 고 문형순 전 제주 성산포경찰서장(경감)이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됐다. 

 

27일 경찰에 따르면 경찰청은 지난 23일 위원회를 열어 문 전 서장 등 2명을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해 추모 흉상을 제작하기로 했다. 

 

문형순(1897~1966) 전 서장은 성산포서장으로 재직하던 1950년 8월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계엄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221명의 민간인을 방면한 인물이다. 

 

당시 제주에서는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이듬해 4월3일 무장봉기가 발발해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법적 절차없이 집단 처형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군은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놓는 것)’ 했고, 제주에서도 한 번이라도 군·경에 끌려갔던 적이 있거나 무장대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대거 구금해 집단 사살했다. 

 

1950년 8월30일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중령이 제주경찰국 성산포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 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에는 ‘예비구속 중인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 총살 집행 후 결과를 보고하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당시 초대 성산포경찰서장이었던 문 전 서장은 이 명령서의 상단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한다”라는 글을 써 돌려보내 명령을 거부하고 수많은 민간인의 목숨을 구했다.

 

문 전 서장은 성산포서장으로 부임하기 전 모슬포경찰서에서도 4·3 사건 당시 토벌대의 ‘자수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뻔한 주민들을 살린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29년 4월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에서 중앙호위대장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이승만 "제주4·3 가혹하게 탄압하라" 대한민국박물관엔 누락

미디어오늘 | 입력 2014.04.03 09:29

 

[현장] 말로만 추념일…첫 '선거무효' 결과·초대대통령 첫 계엄령 문서도 없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외눈박이 역사의식"

[미디어오늘조현호 기자] 3일로 66주기를 맞는 제주 4·3 사건이 추념일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국민의 자긍심과 사회통합을 이루겠다'는 목표로 설립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는 이 사건에 대한 유물은커녕 사건의 개요나 설명이 단 한 줄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4·3사건은 이미 11년 전 제주4·3사건 진상규명을 통해 숨겨진 국가기록을 발굴하는 등 참혹했던 학살기록 뿐 아니라 당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선포'와 '탄압' 지시까지 드러났으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는 '없는 역사'가 돼 있는 것이다.

4·3 직전 미군·경찰 "제주도민 70~90% 좌익"

반대로 이런 기록은 제주 4·3평화기념관에만 상세히 보존, 전시되고 있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에 위치한 4·3평화기념관에는 해방 직후 조성된 지역공동체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서북청년단 등 외지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증거와 기록을 담고 있다. 지난 2003년 특별법에 따라 활동한 제주 4·3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는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 규모가 2만5000~3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만 해도 1만4000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 정부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가 86.1%를,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13.9%로 크게 대비된다. 또한 여성(21.3%·2985명)과 10세 이하 어린이(5.8%·814명), 61세 이상 노인(6.1%·860명) 등 약자가 무려 33%가 넘는 등 '살육'의 대상이 무차별적이었음을 드러냈다.

특히 미군과 육지(본토) 사람들이 제주도를 빨갱이 소굴로 규정하면서 마녀사냥을 부추긴 육성도 기념관은 보존하고 있다.

1일 기념관과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4·3 사건의 도화선이 됐던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앞 시위대 발포사건 이후 전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었던 민관합동 총파업(3월 10일)이 벌어지자 미군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다. 3월 1일 시위과정에서 발생한 경찰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희생자 대부분이 시위를 구경하던 시위꾼이었다. 이를 두고 미군은 열흘 뒤 '파업'의 원인에 대해 G2보고서에서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며 "제주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분석했다.

당시 최경진 경무부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체"라고 발언했다고 한성일보가 1947년 3월 13일자에서 전했다.

'제주도만 유일하게 선거무효'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엔 누락


4·3평화기념관에 따르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 4·3사건에서 무장대와 가담자들의 요구사항 가운데 하나는 이승만과 미군이 추진하던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였다. 통일된 조국, 통일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실제로 이 사건과 주민들의 참여로 1948년 5월 10일 남한 내에서만 실시된 총선거에 제주도 선거구 2곳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이듬해 5월 10일 재선거에서 제주도는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엔 이 같은 내용은 물론 4·3사건 자체에 대해 전혀 거론하거나 설명해놓지 않았다. 역사박물관에는 단독선거 자체를 미화하고 반대자를 좌파로 모는 데만 급급했다. 박물관은 단독선거에 대해 "5·10 총선거는 21세 이상의 모든 남녀에게 최초로 선거권이 부여된 직접·평등·비밀·자유 원칙의 민주선거였다"며 "남북한의 좌익은 5·10 총선거를 저지하려 했으며, 중도파는 남북 협상 후 총선거에 불참했다"고 기록했다. 대한민국 박물관은 "그러나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5·10 총선거를 투표율 95.5%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고 주장했다. 4·3사건과 제주도 선거무효를 빼놓고 '성공적인 선거'라고 미화한 것이다.


이승만 "가혹하게 탄압하라" 제주도만 계엄령, 모두 누락

이밖에도 4·3 사건 진행과정에서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4개월은 무차별적으로 학살이 이뤄진 시기로, 이는 이승만 당시 초대 대통령의 지시와 무관치 않았다.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이후 첫 계엄령을 제주도를 대상으로 공포했다. 그해 11월 17일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제주도지구 계엄령 선포에 관한 건'을 대통령령 제31호로 의결했다. 이승만은 회의록에서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해 동지구를 합위지경(계엄지역)으로 정하고 본령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고 썼다.

또한 이승만은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말한 이 대통령의 발언록이 보존돼 있다. 이승만은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를 신설하라는 대통령령도 공포(49년 1월 18일)했으며, 서북청년회 단원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기념관엔 전시돼 있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는 이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첫 계엄령 선포 자료도, 전국적인 소요사태에 대한 지시발언 등 주요 행적을 전혀 전시하지 않았다.

"말로만 추념일 역사의식은 외눈박이로 퇴보"

이 같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전시행태'를 두고 제주지역에서는 외눈박이 역사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희영 제주 4·3연구소 사무국장은 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현 정부는 정부수립 과정에서 자행한 학살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며 "역사에서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겠다는 기득권세력의 외눈박이 현대사인식 태도 때문"이라고 밝혔다.

최 국장은 "국가가 4·3을 추념일로 지정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더 성숙한 사회로 가려면 기득권 갖고 있는 사람들이 좌우이념을 내려놓고 함께 가는 길을 모색해야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황보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운영과장은 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전시하는 과정에서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에 4.3 사건 유물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시가 안된 것 같다"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는 작업을 올해부터 시작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황 과장은 "관련자료를 전시할 필요가 있다면 전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992년 제주4.3연구소 등에 의해 발굴된 제주 다랑쉬굴 내 시신 유해.

사진=(제주4.3평화기념관) 조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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