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제주도에서 은폐되었던 과거 아픔의 역사가 있다.
바로 1947년~ 1954년까지 수많은 희생자가 생긴 4.3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으나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을 경계로 주둔하며 분단이 시작되었다.
1945년 9월 9일 조선 총독부에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대신했다.
일장기에서 성조기로 교체
1945년 6월 일본군은 오키나와섬이 미군에 함락당하자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당시 제주도에는
7만여 명의 일본군을 주둔시켜 제주도를 요새화 했다.
종전이 되며 제주도에서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 11월 9일 군정업무 담당한 59 군정 중대(중대장 스타우트 소령)가
제주도에 도착했다. 미군정은 일제 관리와 경찰을 그대로 적극 등용해 민심은 동요했다.
또한 일본 공장, 전쟁터에 끌려갔던 제주도 청년들 6만 명이 귀향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배워야 한다는
슬로건 아래 마을마다 학교를 세우고 아들, 동생 등을 교육을 시켰다.
3.1절 발포 (4.3 사건의 도화선)
1947년이 되어도 미군과 소련의 냉전 조짐이 보이고 미군정이 통치하고 있어 통일독립정부 수립은 먼 분위기였다.
온 겨레가 1947년 3.1절 기념식 계기로 일어났는데 제주도에도 3.1절 기념식에 3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
기념대회 후 청년들의 가두시위가 벌여지고 관덕정을 벗어난 2시 45분쯤 총성이 울렸다.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치였는데도 기마 경관이 그대로 가려했고 주변 구경꾼들이 돌을 던져 항의하자
경찰들이 발포를 한다. 도망가는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로 6명이 숨지고 8명이 총상을 입게 된다.
(사망자 중 5명은 등 뒤에 총탄이 박히고 갓난아기를 안은 아이, 초등학생도 있었다.)
발포(강요배 작, 군중을 향해 조준하는 경찰)
총격사건을 일으킨 경찰은 육지에서 급파된 응원경찰로 1946년 대구 10월 항쟁에서
좌익폭도들에게 경찰이 당했던 기억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미군정과 경찰(육지에서 급파된 응원경찰)은 사과는커녕 도리어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주동자를 잡고 사람들을 고문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3.10 민ㆍ관 총파업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도민들의 분노로 1947년 3월 10일부터 민ㆍ관 합동 총파업을 시작한다.
파업은 제주도청, 법원, 검찰, 관공서, 운수회사, 금융. 통신기관, 학교로 퍼져 갔다.
(제주출신 경찰 66명도 동참했다.)
미군정의 탄압
미군 보고서에는 총파업이 좌ㆍ우 모두 참가했고 남로당 제주 조직이 선동한 것으로 분석했다.
또한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빨갱이)로 보기 시작했다. 경무부 차장 이경진은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체라고 이념적으로 몰고 갔다. 3월 14일부터 200명 연행, 1년 동안 2,500명의 제주도민이
검속 되고 파업에 참가한 관공서, 교육계 , 경찰들이 파면됐다.
넘치는 유치장(4.3평화기념관 전시모형)
이후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들어와 도민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을 장악하고 테러를 일삼았다. 1947년 8월에 접어들며 미군정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1948년 2월 38도 이남만 총선거 실시에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며 전라지역에 경찰서가 피습당했고
제주 사회 역시 분단 반대 여론이 우세했다.
4월 3일 남로당의 무장봉기
드디어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의 유격대 350명이 '탄압이면 항쟁이다'의 생각으로
제주도내의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통일국가를 막는 5.10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에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 제주주둔 59군, 9 연대 더불어 부산 제5 연대를 제주도에 파병했다.
제주의 유격대 김달삼과 김익령중령이 평화협정을 이루려 했으나 오라리 방화사건
(우익청년단이 폭도로 위장해 자작극이었음)으로 깨지고 만다.
무산된 제주의 5.10 선거
1948년 5월 5일 딘 군정 장관과 군경 수뇌부는 제주에서 비밀회의를 열었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4.3 사건은 계획적인 공산 폭동으로 단정하였고 9 연대 김익렬 장군은
경찰의 실책으로 온건 작전을 역설하였지만 결국 김익렬 장군은 전격 해임되었다.
1948년 5.10 선거에 제주도민은 대거 산에 오르거나 선관위에서 사퇴하여 50%의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달되어 남한에서 5.10 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제주에 파견된 브라운 총사령관
미군정은 전면적인 대응에 나서며 수원 제11연대, 대구 제6연대 1개 대대, 응원경찰 450명을
제주로 보내고 광주 주둔 전투 사령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는 원인보다는 진압에 목표를 두며 강경입장을 보였고 6.23 재선거를 위해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감행한다.
6.23 재선거 무산
무차별 검거 작전으로 1948년 5월 27일까지 검거작전으로 3,126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6월 30일까지 검거된 사람이 5~6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런 작전에도 6.23 재선거는 실패하며 미군정에게 제주는 불편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시작된 초토화와 학살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상황이 못마땅했고 미군정은 제주도 사태를 끝내기를 독촉했다.
4.3의 대량 학살은 10월 17일 송요찬 연대장이 '정부의 최고 지령'을 받들어 '해안선으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며 예고되었다.
표고문이 발표되고 1949년 3월까지 제주도의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중산간 지대에는 1백여 마을에
수만 명이 살며 제주도 면적 80% 이르는 지역에 초토화 작전이 감행되었다.
비설(4.3평화기념관 희생자를 표현한 조형물)
이 지역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비무장 민간인, 가축들이 몰살되었다.
중산간 마을 가옥 4만 여 채도 토벌대의 방화로 불타며 제주도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다.
미군 보고서에는 제9 연대가 중산간 중민들은 게릴라 부대의 편의를 제공한다는 가정 아래 집단학살
계획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11월 17일 제주도 지역의 계엄령은 학살극을 더욱 부채질했다.
천명(강요배 작, 초토화작전으로 불타는 제주도)
초토화 배후, 미군 수뇌부
제주에서의 초토화 작전은 한국군이 집행했지만 그 배후에는 미군 수뇌부가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1948년 한미협정 체결되면서 주한미군 임시 군사고문단장으로 취임한 로버츠 준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미국의 원조를 적극화하기 위해서 제주도 사태 등을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했다.
형무소로 끌려간 사람들
한라산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떨고 있던 1만여 명의 피난민 중 산에서 내려오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사면 계획에 내려온 피난민은 8천 여 명에 이르렀는데 대부분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였으며 여성만 51%에 달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유격대 협력자 색출작업을 벌여 1,660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판결문도 없이 사형,
무기징역, 15년형의 중형을 내려지며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
6.25로 생긴 또 다른 학살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 밀려 남하하자 이승만 정부는 전국 형무소의 수감자 3천여 명과 제주도 내의
4개의 경찰서에 몇 백 명씩 구금된 예비검속자들을 바다에 수장하거나 제주비행장에서 총살 암매장시켰다.
다행히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은 명령서에 부당함으로 불이행을 쓰고 대량 학살을 거부해 수백 명의 목숨을 살렸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은 해제되어 3.1절 발포 이후 7년 7개월 만에 4.3 사건은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남겨진 이들에게 연좌제와 국가보안법 족쇄로 묵혀 시련을 당했다.
대전형무소 수형자들이 집단으로 처형된 '골령골의 학살'
진상규명 운동과 특별법 제정
4.3은 반세기 가까이 이념적 누명을 쓰고 왜곡된 역사(80년대 고등학교 교과서에 북한 공산당의 사주로
일어난 폭동으로 기록됨)로 기록되었다.
4.3을 소재로 시나 소설을 발표하면 잡혀갈 정도로 오랜동안 금기어였다.
1987년 6월 항쟁의 열기로 4.3의 진실을 밖으로 끌어냈다.
1993년 제주도의회에서 4.3 특별위원회가 구성됐고 1998년 4.3의 50주년 맞아 진상규명의 요구로 1999년
4.3 특별법이 본 회의를 통과하며 2000년 1월 12일에 제정 공포됐다.
대통령 사과와 국가기념일 지정
2003년 10월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어 정부의 사과, 추모기념일 지정, 교육자료 활용,
평화공원 조성, 생계비 지원, 유해 발굴, 추가 진상 조사, 기념사업 지원 등 후속 조치가 이루어졌다.
제주공항 4.3발굴 현장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해 제주도민과 4.3 유족들에게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2021년 2월 26일 4.3 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4.3 당시 제주의 인구가 30만여 명이었고 4.3으로 사망한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3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사망자가 6만에서 8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4.3은 좌. 우 이분법적인 이념의 대립으로 벌어진 감추어졌던 그늘진 역사이다.
그늘진 역사일수록 우리는 바로 알고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차라리 악몽이었기를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성/ 서해문집>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시국에 국가가 자행해 국민을 학살한 국가폭력의 전형을 보여준 사건. 제주 4.3 사건.
정부가 공식 사과한 민간인 학살사건.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술한 역사서라서 어른이 학생에게 설명하는 기술방식으로 사건의 발단부터 진행 과정까지 차근히 설명한다. 중간마다 강요배 화백의 작품을 실어 사건을 실감하게 도와준다. 4.3 사건은 근현대사 서적을 통해 일부 한 챕터 정도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전체 사건을 접한 건 처음이었다. 제주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만나봐야 할 책은 아닐까 싶다. 무언가를 사랑하는데 그 흠집과 아픔을 보듬는 마음도 필요한 거니까.
우리나라 해방직후, 미국과 소련은 점령군 형태로 우리나라에 주둔했다. 그들은 편의상(미국은 소련을 견제 중) 38도 선을 그어 통치하기로 한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할 것을 결정한다. 쟁점은 신탁통치였다(이 시점 동아일보 신탁통치 오보 사건이 있다 1945년 12월 27일 ). 해방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강대국의 식민지 생활을 해야 한다는 분노와 두려움이 민족 모두를 불안하게 하게 했다. 신탁통치를 두고 결과적으로 좌익은 찬성으로 우익은 반대로 기울어지는 상황에서 좌우 의견과 이념 대립이 심화된다.
1차 미소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양 극단의 대립 속에 여운형(중도 좌파)과 김규식(중도우파)을 주도로 좌우 합작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와는 반대로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해서 남북분단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세계정세는 냉전시대로 들어서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반복 결렬되면서 미국과 소련은 우리나라 문제를 유엔총회에 넘긴다.
유엔 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이라도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하자고 제안하고 소련은 당연히 거부한다. (북쪽에 인구가 적다) 이후 유엔 소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거를 하자고 5.10 총선거를 제안한다. 사회주의 세력인 좌도 민족주의 세력인 우도 모두 5.10 총선거를 반대했다. 이렇게 되면 조국의 분단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세 속에서 바로 대표적인 우익세력인 김구선생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성명서가 발표된다.
"삼천만 자매형제여!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독립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민족의 百年大計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 번 잊어버려 보자. 甲은 乙을 乙은 甲을 의심하지 말며 唾罵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서울신문, 1948. 2. 13;경향, 조선, 1948. 2. 11)
남한에 있던 좌익의 대표 단체인 남로당 역시 5. 10 총선거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들은 제주에서 큰 세력을 갖고 총선을 반대하며 폭동을 일으키고자 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의 지휘를 받는 빨치산 조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주 주민들이 정부와 미군에 의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위키피디아, 2024. 03. 15)
일의 발단은 제주 역사상 최대 인파가 모인 1947년 3.1절 기념식장이었다. 많은 인파(2만 ~3만 명)가 엉켜있던 가운데 작은 소란이 일어나자 치안 문제에 촉각이 곤두 선 경찰이 총을 쏘게 되고 그 과정에서 6명의 민간인이 죽게 됐다.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3월 10일 제주 전체를 아우를 만한 관민 총파업이 단행됐다. 5.10 총선거 반대 투쟁에 더해져 민간인이 희생된 데에 주민들은 격분했다.
1947년 3월부터 시작해 주민에 대한 학살은 이어졌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의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두산백과 제주4.3사건). 4.3사건 이라 불리게 된 경위이다.
결과적으로 5. 10 총선거는 시행됐고, 그때의 분단은 6.25 전쟁을 거치며 지금까지 이어진다(명확하게 38도선과 군사분계선은 다르지만, 정서적 분단이라는 점에서 '이어진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 같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이제 살았구나 싶었는데, 이젠 한바탕 이념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뭔지 사회주의가 뭔지 그저 살궁리만 했던 제주 주민들은 두 진영의 싸움에 새우등이 터졌다. 제주에 은신하고 있던 남로당세력은 주민들을 선동했고, 정부와 미군은 제주 주민들 대부분을 좌익으로 규정했다.
" 혹시 한바탕 무서운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 지옥에서 홀로 살 아남은 사람들은 그것이 차라리 악몽이었기를 바랐다. 애월읍 봉성리 강한규의 말이다. 그땐 사람들이 다 이레도 붙고 저레도 붙고 했어요. 그 모양으로 약하게 흐름 따라다니던 사람들입니다. 바람 부는 양, 이쪽으로 세게 불면 이쪽으로 붙고, 저리로 세게 불면 저쪽은 로 붙고 했습니다. 산에서 말을 하면 그것도 옳아 보이고, 또 아래서 오는 말 그것도 옳아 보이고... 어느 쪽에 붙어야 좋을지 몰랐어요. " 118
당시 남로당 무장대는 토벌대를 피해 산속으로 은신해 있는 중이었다. 군경과 서북청년단(토벌대)은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피난처와 물자를 공급하고 있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참히 살상했다. 좌익 가족이어서, 좌익과 이름이 같아서... 이런저런 형태로 그저, 죽인 참극이다. 남녀노소 분별없는 학살이었다. 그렇다면 무장대라고 이 참극을 자행한 죄에서 제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장대는 무장대 대로 중산간 마을 주민들에게 협조할 것을 강요하며 비협조적인 주민을 죽이고, 군경에 협조하거나 우익과 관련된 사람들을 보복 살해했다.
2019년 12월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결정한 제주 4.3 사건 민간인 희생자 수는
14,442명이다. 희생자의 80퍼센트 이상이 토벌대(정부와 미군)의 손에 희생되었고, 무장대에게 희생된 사람은 전체 사망자의 약 10분의 1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강요배 화백은 <동백 꽃 지다>라는 화보집을 통해 그 시절의 그 고통을 고스란히 작품으로 표현했다. 닿을 수 있는 한 가장 가까이 그때의 두려움과 서글픔을 느낄 수 있다.
"우리 마을 북촌리에서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능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을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가족, 군인 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 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가족을 불러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네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동백꽃 피다, 118>
가장 마음 아팠던 작품이었다. 엄마를 잃은 줄도 모르니 그저 자기 좋아하는 엄마 젖만 빨아댄다.
제주 4.3 사건은 아직 명확한 정의를 담은 이름을 갖지 못한 상태다.
5 · 18 광주민주화 운동의 경우, 과거에는 신군부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광주사태’, ‘폭동’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역사적 해석과 평가를 마치고 현대는 "5 · 18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정의하게 된 것처럼 제주 4.3 사건은 사회적 논의와 평가가 더 필요한 사안이라고 한다.
4.3 사건에서 이승만정부 개입 여부를 두고 의견의 차가 있다. 학자가 아닌 입장에서야 여타부타 말하긴 어렵지만, 시간 상 제주 4.3 사건이 1947년 3월~ 1954년 9월까지 이어진 것에 비춰보면, 특히 토벌대가 본격적으로 초토화 작전을 펴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곳곳에서 주민학살을 자행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3달 만인 1948년 11월 중 하순쯤부터였다. 대부분 희생자가 이때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에 걸친 초토화 작전 시기에 생겨났다. (동백 꽃 지다, 155.). 이승만 대통령 재위 시작은 1948년 7월 24일. 재위기간으로 따져보면 참담한 학살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을 것 같다.
오로지 자유 민주주의에 반하는 무리를 초토화 해야한다는 일념에 애민정신은 안중에도 없어 보이는 사료로 남겨진 그의 객관적 행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설마 어떻게 이게 사실일까.
"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어린아이부터 70, 80대 노인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주민 집단 학살을 불러온 초토화 작전은 1차적으로는 9 연대 (연대장 송요찬)와 1948년 12월 29일, 9 연대와 교체되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 연대(연대장 함병선)에 있다. 그렇지만 최고책임은 1948년 12월 서청 총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제주 도에 내려온 한 서청(서북청년단) 단원이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한 바가 시사하듯, 이승만 대통령한테 있다. 이 대통령은 1948년 늦가을에 서청 단원을 대거 제주도에 투입해 섬을 초긴장 상태에 몰아넣었고, 1949년 4월 9일 제주도를 방문해 산주 폭도들을 완전히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 동백 꽃 지다 156>
죄없이 목숨과 가족을 잃은 수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을 보노라면 공산당 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핑계가 무색하다.
사람보다 이념이 중요해져 버려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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