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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미 국무부, 제주4·3에 첫 입장…“비극 잊으면 안 돼”

by 무궁화9719 2024. 4. 3.

[단독] 미 국무부, 제주4·3에 첫 입장…“비극 잊으면 안 돼”

한겨레 질의에 사건 76년 만에 입장 밝혀

기자허호준
  • 수정 2024-04-02 20:09
  • 등록 2024-04-02 16:24
1948년 5월15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미군 고문관 대위가 경비대 장교들과 작전 계획을 논의하는 모습이다. 미국국립기록관리청 보관 사진
 
미 국무부가 제주4·3에 대해 “비극적인 사건”으로 “잊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제주4·3 당시 한반도 남쪽을 군정 통치(1945년 9월~1948년 8월)했던 미국은 사건의 발발과 확산에 직간접적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도 지금껏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왔다.
 
미 국무부는 최근 ‘제주4·3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엇이냐’는 한겨레의 이메일 질의에 “1948년의 제주사건은 참혹한 비극(terrible tragedy)이었다. 우리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답신을 지난달 27일 보내왔다. 미 국무부는 답신에서 “미국은 민주적 가치와 인권 증진에 헌신하는 가까운 동맹국으로서, 앞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한국의 결의를 공유한다”고 덧붙였다.
제주4·3에 대한 입장을 묻는 한겨레의 이메일에 미 국무부가 지난달 27일 보내온 답신
 
미국 정부가 제주4·3과 관련해 문서로 입장을 밝힌 것은 사건 발생 76년 만에 처음이다. 그동안 현대사 연구자들과 제주 지역사회는 4·3 문제 해결과 관련해 남아 있는 과제 중 하나는 ‘미국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라고 지적해왔다.
 
실제 제주4·3 시기 미군정이나 군사고문단, 주한미국대사관이 작성한 각종 문서는 미국이 4·3 진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정부가 2003년 10월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고 나와 있다.
 
국내에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4·3항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1988년 무렵부터 미국의 인정과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해왔다. 70주년이었던 2018년 10월에는 제주4·3연구소와 제주4·3희생자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이 4·3에 대해 미국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10만9996명의 서명을 받아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달했다. 하지만 미대사관 쪽은 최근까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군정 당국은 4·3 무장봉기 직후인 1948년 4월 중·하순 미군정장관 딘 소장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진압을 명령하고, 같은 해 5월에는 미 보병 6사단 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브라운 대령은 당시 “나는 사건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며 한국의 군·경을 지휘했고, 그가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5천명이 넘는 제주도민이 무차별 검거됐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사고문단을 통해 토벌작전을 지원하고,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지속해서 제주도 사태와 관련한 진전 상황을 보고받았다.
 
1948년 5월 제주도 최고 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기자회견에서 “사건 원인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언급한 &lt;조선중앙일보&gt;(1948년 6월8일)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네가 오사카에 있다니 기쁘다”…4·3 제주에서 사라진 가족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된
일본 주둔 연합국 최고사령부 문서
제주-일본 오간 그리움 담긴 편지들

기자허호준
  • 수정 2024-04-02 17:27
  • 등록 2024-04-02 14:00
일본 도쿄의 연합국 최고사령부 산하 민간검열대가 제주와 일본을 오간 우편을 검열한 내용의 보고서들이다. 허호준 기자
 

제주4·3항쟁은 제주인들의 삶을 뿌리째 뒤집어놓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던 제주사람들은 죽음을 피해 섬을 탈출했다. 부모 형제를 잃고 기댈 곳이 없어 실의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이들도 섬을 빠져나갔다. 목숨을 걸고 밀항선에 몸을 맡긴 이들이 찾은 곳은 일본 오사카였다. 일본 내 4·3유족은 확인된 숫자만 850여명. 어림잡아 1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낯선 땅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며 뿌리내린 이들은 여전히 4·3을 품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재일’의 삶을 살고 있다.

 

“1948년 8월 형님이 제주를 떠난 이후로 형님의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무사히 오사카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돼 안도하고 있습니다.”

 

제주 표선면 표선리의 고토만(Ko To Man)은 1949년 6월30일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는 형 강대성(Ko Tai Sei)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으로 미뤄 강대성은 4·3항쟁이 한창이던 1948년 8월 제주를 떠났다. 이 시기는 국내 신문에 ‘제주는 울음의 바다’, ‘각지 제주도인 궐기, 평화적 해결을 당국에 진정’, ‘전율할 피의 섬’ 등의 기사가 보도되던 암울한 시기였다. 그의 행방을 몰라 10개월 가까이 애태우던 가족들은 일본에서 온 편지로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표선리의 동생은 형에게 가족들이 안도하고 있다는 답신을 보냈다.

 

제주 4·3항쟁 시기 일본과 제주 사이에 편지 교환이 지속해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발굴됐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된 당시 일본 주둔 연합국 최고사령부(GHQ)의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해방 이후 남한 주둔 미 24군단이 민간인 우편 검열을 했던 것처럼 일본의 연합국 최고사령부 산하 민간검열대(CCD)도 통신과 우편을 검열했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을 오간 우편을 검열했고 이런 내용을 수집해 보고했다.

 

보고서는 편지나 엽서 등 우편 형태, 언어 형태, 발신인과 수취인의 관계, 우편 소인이 찍힌 날짜, 우편의 허가 또는 불허 처분 등과 함께 우편 내용 가운데 한두 문장을 발췌해 영어로 번역한 내용이 들어 있다. 편지는 발신인과 수취인의 주소와 함께 이름을 일본식 발음으로만 표기하거나 한자와 함께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기자가 살펴본 서신 내용은 1949년 4월부터 8월 사이 5개월간 오간 것들로, 당시 제주도와 일본 간 편지 검열 건수는 확인한 것만 40여건에 이르렀다. 편지 내용 중에는 4·3항쟁 이후 학살과 탄압을 피해 일본에 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사연도 있다.

 

“같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온 모든 동료 학생들은 지금 잘 지내고 있습니다.” 1949년 7월22일 오사카 야오시에서 강향원이 서귀면 하효리 강찬분에게 보낸 편지에는 한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온 학생들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 이 시기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밀항뿐이었다. 여러 명의 학생이 집단으로 밀항선을 타고 학살과 검거를 피해 일본에 간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도착한 강향원은 하효리의 지인에게 일본 도착 소식을 알렸다.

 

국내의 다른 지역에 있다고 생각했던 자식이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알게 된 가족도 있다. 7월2일 대정면 무릉리의 아버지가 오사카 센보쿠군에 거주하는 아들 이두평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아버지는 아들이 부산에 있는 것으로만 알았고, 일본으로 밀항한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네가 부산에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일본에서 보낸 너의 편지를 받으니 너무 기쁘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본에 밀항한 남편으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연도 있다. “당신이 집을 떠난 지 2년이 훌쩍 지났지만, 당신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6월20일 안덕면 상천리 고쇼키(Go Sho Ki)는 도쿄 가쓰시카구의 남편 양승필에게 오랜 기간 소식을 듣지 못한 답답함과 남편 없는 삶의 고단함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을 보면, 남편 양씨가 1947년 3·1 사건 이후에 제주도를 벗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재일제주인들이 모여 사는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쓰루하시 시장. 허호준 기자
 

일본으로 밀항한 어머니가 제주도의 딸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7월16일 오사카 기타구에 거주하는 송을생의 모친이 제주읍 도두리 사수동 임만국의 모친을 통해 딸에게 자신의 안부를 적어 보냈다.

 

“사랑하는 딸에게, 나는 일전에 비밀리에 제주도를 떠나 일본으로 왔다. 오사카에 도착했지만 다시 비밀리에 제주도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쨌든 내 걱정은 말고, 고향 친척들에게 내 안부를 전해다오.”

 

1948년 부부가 함께 밀항선에 몸을 실은 사연도 있다. 1949년 7월22일 제주읍 용담2리 수근동의 윤병렬은 오사카 이쿠노구의 며느리 장행옥에게 보낸 편지에는 “너와 네 남편이 고향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지났구나. 그래도 둘 다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돼 매우 기쁘단다.” 부부는 4·3항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제주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재일제주인들은 제주도에서 누가 일본으로 왔다는 소식을 주고받거나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7월25일 오사카 이쿠노구의 아라이 마사코는 홋카이도 기타미에 거주하는 아버지 다카다 사타로에게 편지를 보내 “춘희의 어머니가 23일 제주도에서 왔다”고 전한다.

 

같은 이쿠노구의 박한선은 7월27일 도쿄 아다치구의 마쓰무라 야스노에게 “며칠 전 제주도에 있는 장인으로부터 받은 소식을 보면, 내 아내가 조만간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올 것”이라는 내용의 엽서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에는 친인척을 찾아 밀항한 경우가 많았다. 밀항에 성공해 교토에 정착한 부을생은 건입리 윤우현에게 “일본에 도착한 뒤 친척들을 만났다”고 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곤궁한 제주도에 조금이라도 보내려고 했다. 편지의 상당 부분은 일본에서 친인척을 통해 돈을 보냈고, 이를 받아 사용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제주읍의 김쇼랜(Kin Sho Ren)은 오사카 이쿠노구의 아버지 김선신에게 “지난해 말 한국으로 돌아온 숙모님을 통해 아버님이 보낸 1만엔을 받았다”고 소식을 알렸다.

 

안덕면 상천리 세슌카(Sei Shun Ka)는 7월6일 도쿄 다이토구의 남편 이병현에게 “당신이 보내준 1만원을 받아서 빚을 물었다”는 편지를 보냈다. 4월1일 남원면 위미리의 아들은 고치현 고치시의 아버지 박찬백에게 “아무개를 통해 아버님이 보내주신 돈은 어머님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부족했다”고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도 오사카에 체류하던 제주인 가운데는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8월4일 오사카 후세시의 이옥선은 남원면 위미리의 어머니 안천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언제 이뤄질지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올해 말까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라고 적어 보냈다.

 

4·3 연구자들은 “당시 4·3항쟁의 혼란스러운 와중에 제주인들의 일본 밀항이 지속해서 이뤄지기는 했지만, 일본에 거주하는 이들과 제주도의 가족, 친인척, 지인들 간에 우편을 교환한 사실은 보지 못했다”며 “편지의 원문이 발굴된다면 4·3항쟁 시기 왜 일본으로 떠나야 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등 4·3항쟁과 재일제주인의 관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살려고 제주 떠났건만, 바다가 무덤이 됐다...4·3 밀항 실태

밀항 시도하다가 단속에 걸리기도
“4·3 시기 1만여명 일본 온 듯해”

기자허호준
  • 수정 2024-04-02 17:02
  • 등록 2024-04-02 14:00
일본의 연합국 최고사령부(GHQ)가 작성한 한국에서의 일본 밀항 경로. 1949년 1~6월 밀항한 한국인은 1327명(282척)이며, 이 가운데 제주도민은 69명(3척)으로 나와 있다. 이 지도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소장된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문서를 합성한 것이다.
 

제주4·3항쟁은 제주인들의 삶을 뿌리째 뒤집어놓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던 제주사람들은 죽음을 피해 섬을 탈출했다. 부모 형제를 잃고 기댈 곳이 없어 실의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이들도 섬을 빠져나갔다. 목숨을 걸고 밀항선에 몸을 맡긴 이들이 찾은 곳은 일본 오사카였다. 일본 내 4·3유족은 확인된 숫자만 850여명. 어림잡아 1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낯선 땅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며 뿌리내린 이들은 여전히 4·3을 품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재일’의 삶을 살고 있다.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던 밀항선이 일본 대마도 근처에 이르러서 황파(荒波)에 몰려서 파선되어 승객 40여명 중 20여명이 사망하였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4·3항쟁 당시 제주에서 발행되던 ‘제주신보’(1947년 5월24일)는 쓰시마 근처에서 해난사고를 당해 제주도민 20여명이 사망한 사실을 이렇게 1단짜리 기사로 전했다. ‘밀항선 조난으로 20여명이 희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밀항선은 5월15일 함덕포구를 출항해 일본으로 가다가 20일께 쓰시마 근해에 이르러 폭풍우로 배가 부서지면서 참사가 빚어졌다. 죽음과 빈곤의 덫에서 벗어나려고 떠났던 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됐다.

 

과거 한겨레와 인터뷰했던 현아무개(97·일본 도쿄)씨는 1947년 3·1 사건 직후 경찰을 피해 숨어 지내다 밀항선을 탔다. 어머니는 어느 날 밤 친척 집에 숨어 있는 현씨를 찾아왔다. “내 뒤를 따라와라. 여기 있으면 죽는다. 네 형님이 일본에 있으니 밥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한밤중 아들을 함덕포구에서 밀항선을 태워 보냈다. 더는 어머니와 아들은 만나지 못했다. 그의 형과 조카는 4·3항쟁 때 희생됐다. 현씨가 밀항한 시기는 쓰시마 근처에서 침몰해 20여명의 제주도민이 숨진 때와 비슷하다. 4·3항쟁 시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이들은 자식을 살리려고 재산을 처분한 부모 손에 이끌려 한밤중에 작은 배의 선창에 몸을 맡겼다.

 

일본에 거주하다가 해방 전후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사회적 혼란 속에 경제난이 심각할 때였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부터 남해안의 많은 항포구에서 밀항이 빈번하게 이뤄지자 단속에 나섰고, 이듬해 2월에는 5t 이상의 선박은 모두 미군정에 등록하도록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해방과 독립은 말뿐으로 희망은커녕 살길이 막연하여 먹을 것을 구하나 없으며 직업을 구하나 여의치 않으므로 다시 조국을 등지고 영별한 왜국 땅으로 돌아가려는 비극의 현상’(부산신문, 1946년 8월22일)이 줄을 이었다. ‘밀항으로 도로 건너가는 동포가 매일 20~30명 이상’(조선일보, 1946년 1월30일)이나 됐다.

 

제주 함덕포구를 출항한 밀항선이 쓰시마 부근에서 침몰했다는 제주신보(1947년 5월24일) 기사.
 

그러나 밀항을 시도하던 많은 이들이 단속에 적발됐다. 일본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1946년 4월부터 1947년 3월 사이 일본에 밀항했다가 붙잡혀 송환된 한국인만 2만6415명(독립신보, 1947년 4월24일)에 이르고 붙잡히지 않은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

 

살기 위해 나선 밀항은 그러나 죽음의 길이 되기도 했다. 밀항 도중에도 익사자, 아사자가 속출했고 밀항에 성공해도 단속에 걸려 수용소에 갇힌 뒤 콜레라 등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부산 영도를 출항한 15명이 탄 3t짜리 밀항선이 일본으로 가다가 쓰시마 부근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침몰해 제주도민 등 4명이 숨지고 11명이 구조됐다.

1953년 3월에는 제주 출신 정아무개 소유 춘광호(47t)가 1인당 일본 돈 1만6천엔을 받고 밀항자 45명(남 15명, 여 30명)을 태우고 부산항을 출항했다가 육군 첩보대에 붙잡히기도 했다. 이때 붙잡힌 이들 가운데 절반은 고등학생들이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 문서를 보면, 일본 경찰은 1949년 한해 동안 일본에 도착한 밀항자 수를 검거자 6630명, 미검거자 2807명으로 파악했고 밀항선은 520척이라고 집계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밀항자 수를 포함하면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일본 쓰시마의 경찰 보고서에는 ‘한국 내 정치 및 사상의 영향’ ‘경제적 곤궁’ ‘일본 거주 가족 및 친척과 함께 살기 위해’ ‘밀수로 돈을 벌기 위해’ 등의 이유로 한국인들의 밀항이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쓰시마 경찰은 또 최근 한국 내 밀항 알선업자의 도움을 받아 단체로 밀항이 이뤄지고 있으며, 1인당 5천~1만엔을 내고 있다고 보고했다.

 

문경수 일본 리쓰메이칸대 명예교수는 “재일한국인들 가운데는 남한의 국가폭력이나 전쟁의 현장을 피해 온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4·3 시기에도 제주 사람들이 죽음과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1만여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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