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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3은 한국전쟁 전후 대량학살 서곡…‘위령제’라는 말 마음에 걸려”

by 무궁화9719 2024. 4. 3.

“4·3은 한국전쟁 전후 대량학살 서곡…‘위령제’라는 말 마음에 걸려”

4·3을 쓰는 일본 문단 거목 김시종
제주 4·3 때 활동하고 목숨 잃을까 일본으로
아들 살리려 부모는 급전 마련에 연줄 동원
김시종, 일본 문단 대표 문학상 여럿 받아

기자허호준
  • 수정 2024-04-02 07:27
  • 등록 2024-04-01 14:00
지난달 18일 일본 나라현 이코마시의 자택에서 만난 김시종 시인이 생각에 잠겨 있다. 허호준 기자
 

제주4·3항쟁은 제주인들의 삶을 뿌리째 뒤집어놓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던 제주사람들은 죽음을 피해 섬을 탈출했다. 부모 형제를 잃고 기댈 곳이 없어 실의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이들도 섬을 빠져나갔다. 목숨을 걸고 밀항선에 몸을 맡긴 이들이 찾은 곳은 일본 오사카였다. 일본 내 4·3유족은 확인된 숫자만 850여명. 어림잡아 1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낯선 땅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며 뿌리내린 이들은 여전히 4·3을 품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재일’의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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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은 제주만의 비극, 참극이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게 4·3입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4·3사건 시기에 있었던 미국의 역할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시인의 눈빛은 강렬했고, 음성은 격정적으로 오르내렸다. 75년을 일본에서 살아온 재일동포 시인 김시종(95). 시인에게 ‘4·3항쟁 76년’은 ‘재일 75년’이다. 마이니치출판문화상, 다카미 준 상, 오사라기 지로 상 등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여러 문학상을 받으며 재일동포 사회만이 아니라 일본 문단의 거목이 된 시인.

 

지난달 18일 일본 나라현 이코마시 시인의 집을 찾았다. 재일제주인들이 모여 사는 오사카시 이쿠노구 쓰루하시역에서 전철을 타 30여분 뒤 이코마역에 내렸다. 택시를 타고 10분 남짓 더 갔다. 드문드문 스치는 차와 행인이 보였지만 거리는 조용했다.

“죽더라도 내 눈 닿는 곳에서 죽지 마라”

시인 이름이 적힌 소박한 문패를 확인한 뒤 초인종을 눌렀다. 시인과 아내 강순희(89)씨가 반갑게 맞았다. 시인의 집답게 방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빼곡했다. 재일의 삶과 문학을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으나, 이야기의 줄기는 4·3항쟁으로 옮겨갔다. 그에게 4·3은 과거의 일이 아니기에.

 

“4·3 시기 수많은 제주 사람들이 죽어간 밑바탕에는 한국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한 미국의 극동정책이 있었습니다. 반공이 대의명분이었고, ‘빨갱이’는 없애버려야 할 존재로 여기게 됐습니다.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4·3위령제를 지내고 있지만 그 비극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지요.”

 

김시종 시인. 허호준 기자
 
단호했다. 시인은 4·3항쟁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미국의 대외정책과 제주도에 대한 지방 차별이 빚어낸 비극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4·3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내내 시인은 눈시울을 붉히고, 분노하고, 격정에 사로잡혔다.
 
쫓기는 아들의 목숨을 살리려고 급하게 마련한 돈으로 모든 연줄을 동원하느라 분주했을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견디기 어렵다. 시인이 제주를 떠난 건 1949년 6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던 4·3의 기억은 그날 이후 평생 그를 따라다닌다.
 
“이것이 마지막, 마지막 부탁이다. 비록 죽더라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마라.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제주읍 다끄네포구. 아버지는 속삭이듯 이런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간절했고, 물기가 배어 있었다. 아버지도 시인도 금생에서의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다.
 
어둠의 시간, 많은 이들이 사납고 거친 바다를 건넜다. 새까만 어둠,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어둠이었다. 어떤 이는 자의로 제주를 빠져나갔고, 어떤 이는 한밤중 부모의 손에 이끌려 밀항선에 떠밀렸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 너만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부모들과 자식 간의 영원한 이별은 찰나처럼 짧았고, 꿈꾸는 것만 같았다.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4·3 도피자로서의 부채의식

시인의 아버지도 다시 못 볼 외아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식의 생을 일본에 맡겼다. 포구를 빠져나온 작은 배는 제주 앞바다에 점처럼 떠 있는 무인도 관탈섬(제주시 북쪽 27㎞)에 닿았다. 조선시대 제주로 향하던 유배인들이 이 섬이 보이면 갓을 벗는다고 하여 ‘관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절망의 섬이기도 했다.
 
그는 그 절망의 섬에서 사흘을 보냈다. 이틀 뒤 배가 올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돌투성이 섬에서 홀로 나흘을 엎드려 기다렸다. 하루가 영원 같은 시간이었고, 파도 소리는 부모에 대한 걱정과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불안을 후벼 팠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다 바위에 부딪혀 내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칠흑의 어둠은 시꺼먼 먹물같이 시인의 심장을 타고 내려갔다. 그렇게 밤의 섬은 무자비하게 무서웠다.
 
나흘째 되던 날 밤, 조그만 배가 불빛을 비추며 다가왔다. 배에 올라 선창의 덮개를 열고 들어가자 밑바닥에 6~7명의 남녀가 들어차 있었다. 저마다 사연을 안고 일본으로 가는 이들이었다. 제주도 곳곳에서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그치지 않았던 때, 스무살 청년은 그렇게 제주를 떠났다. 배는 1949년 6월5일 고토열도를 거쳐 기이반도 내해에 다다랐다.

 

김시종 시인이 대화를 나누다 생각에 잠겼다. 허호준 기자
 
‘재일’이 시작됐다.
 
“아버지·어머니가 외아들을 위해 돈이 되는 건 모두 팔아서 일본으로 보냈어. 그러니 아버지 말이 뼛속에 사무친다니까.” 꼿꼿하게 앉아 과거를 술회하는 시인의 눈초리가 렌즈 안쪽에서 가볍게 떨렸다. 홀로 떠나온 자의 부채의식은 그를 꿈속까지 따라다녔다.
 
“나만 살았다니까. 나의 4·3 경험이라는 것은 4·3의 도피자로서 살아온 부채감이라고 할까, 그런 게 있지.”
 
7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4·3항쟁 당시 조직활동 경험자는 시인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기억의 밑바닥에는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오돌토돌 응어리지고 지워지지 않는 회한의 흔적들이 곳곳에 서려 있었다. 시인의 아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1947년 3월1일, 아주 청명했던 그날. 시인은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 앞서 오현중에서 연 학생들의 합동기념집회 연락원으로 활동하다가 관덕정 쪽으로 이동했다.
 
“제주북교에서 열린 28주년 3·1절 기념대회는 아주 평화적이었습니다. 관덕정에서 칠성통과 남문통으로 가는 오거리를 기점으로 서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에 길을 막았어요. 미군들이 서 있었고, 그 앞에는 경찰이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기관총도 2대 설치돼 있었어요. 처음에는 위협적으로 기관총을 허공으로 쏘았는데, 다음에는 직격으로 쏘았습니다. 희생자들은 식산은행 계단에서 시위를 구경하다가 총을 맞았어요. 눈에 생생합니다.”

“불법입국에 강제송환될까…4·3 겪었다 말 못 해”

엊그제 일처럼 당시를 회상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경찰서 정문 근처에서 그날의 장면들을 다큐멘터리 필름 찍듯 빠짐없이 머릿속에 담았다. 시인은 2016년 펴낸 자전적 회상기 ‘조선과 일본에 살다’에 “지금 다시 생각해도 꺼지지 않은 청춘의 잿불처럼 아련하게 달아오른” 그날의 일들 가운데 경찰의 발포에 대해 “생각지 못하게 사상자의 피로 물든 3월1일은 이를 갈며 밤을 지샜다”고 적었다.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3월10일부터 남한 사회에서 전무후무한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다.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은 닥치는 대로 청년 학생들을 검거했다. 유치장은 구금자들로 넘쳤다. 시인도 경찰에 붙잡혔다.
 
“내가 있던 감방은 수용인이 30명이 넘어 마치 감자부대 같았어. 2주 정도 짧은 구류 기간이었지만, 가위에 눌린 듯한 끝없이 어두운 시간이었지. 취조실로부터 유치장 복도를 타고 소가 신음하는 것 같은 소리, 목구멍이 찢어진 것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메아리쳐 울려와.”

 

김시종 시인 2019년 4월2일 제주시 제주주정공장 옛터에서 일본인들이 결성한 ‘제주4·3한라산회’ 등이 주관한 제71주년 제주4·3예비검속 희생자 위령제에서 자신이 목격한 4·3의 기억을 말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시인은 친인척의 처참한 죽음을 이야기하고, 14살 소년이 제주주정공장 마당에서 부모와 형제들이 보는 가운데 공개 처형됐다는 말을 할 때는 울먹이기도 했다. 시인은 “그런 무자비하고 야만스러운 일이 어디 있느냐”며 분노했다. 불덩이 같은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슬픔과 눈물이 범벅이 된 세월이었다. 지금은 흙 속에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들을, 기억은 무자비한 세월의 한편으로 밀어 넣었다가 꺼내곤 한다.
 
4·3항쟁의 직접 체험자였지만, 제주를 탈출한 뒤 오랜 시간을 침묵하며 지냈다.
 
“첫번째 이유는 내가 4·3 체험자라고 나서면 4·3의 정당성을 훼손시킬까 두려워 차마 4·3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어. 두번째는 아주 비겁한 이유야. 4·3을 겪어서 일본에 왔다고 하면 불법입국자가 되고 강제송환을 당하기 때문에 나의 안위를 위해 말을 못 했지.”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언제나 4·3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인은 “4·3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예비검속돼 수십만명이 학살된 사건들의 예고편”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는 또다시 격정적으로 바뀌었다.
 
“4·3은 제주도에 국한된 참극이 아닙니다. 4·3 시기의 학살을 뒤이어 본토에서 일어난 수십만명의 살육과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과오입니다. 전쟁 기간 전후로 본토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의 서곡이 4·3입니다.”

4·3, 한국전쟁 전후 대량학살의 서곡

그는 “이런 사실을 고찰하지 않고 너무 쉽게 위령제를 지낸다”며 “해마다 열리는 ‘4·3사건 희생자 위령제’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희생의 뜻은 대의명분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고, 대의명분에 목숨을 바친 사람이 희생자입니다. 4·3 희생자 위령제라고 하면, 4·3 때 대의명분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그게 아니지 않나요. 시인 윤동주를 말할 때 비명자라고 합니다. 제 목숨을 제때에 마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일이 비명(非命)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4·3사건 피살비명자 위령제’라고 해야 합니다. 피살은 죽음을 받았거나 입었다는 뜻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제주4·3사건 참사비명자 위령제’라고 해야 합니다.”

시인은 “4·3사건을 기억하는 데 희생자 위령제라고 하면 모든 것이 투명화돼버리고 엄숙한 심정만 남게 된다”며 “뜻있는 이들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시종 시인. 허호준 기자
 
해방 전부터 소양을 쌓아온 시인의 문학적 정념은 일본에 온 뒤 분출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시 전문지 ‘진달래’와 ‘조선평론’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1949년에 여기(일본) 와서 이듬해 6·25 사변이 났는데, 그때 벌써 글을 쓸 마당이 꾸며져 있었지. 석간 일간지 ‘국제신문’이 있었고, ‘조선평론’이라는 종합지가 있었어. ‘조선평론’ 1, 2호는 소설가 김석범(4·3소설 ‘화산도’ 작가)이 편집했고, 4호부터 폐간호인 18호까지는 내가 맡아서 했지.”
 
다신 아버지·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는 “쓰이지 않은 소설은 존재하지 않지만, 시는 쓰이지 않아도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시인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랜 기간 구호활동을 하며 ‘아프간의 성자’로 불린 일본인 의사 나카무라 데쓰가 2019년 12월 무장세력의 총격을 받아 숨진 일을 언급하며, “나카무라 선생의 인생은 한없이 아름다운 인생이고, 그 존재 자체가 시”라고 말했다.
 
“글과 말만 시가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모습 자체가 시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둠의 바다를 건넜던 시인이 고향 땅을 밟은 것은 반세기 가까이 지난 뒤였다. 시인은 1998년 10월 김대중 정부의 특별조치로 49년 만에 아내와 함께 처음으로 제주 땅을 밟았다. 시인의 표현대로, 달보다 멀었던 아버지·어머니의 무덤에 절을 하고, 소리 높여 울었다. 시인은 2003년 제주도를 본적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백비’가 누워 있다. 어떤 이들은 하루빨리 백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생각이 다르다.
 
“백비는 그대로 누워계신 게 좋습니다. 누워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말 없는 질책이며, 채찍입니다. 참다운 명분을 찾을 때 세워달라고 해야 합니다. 누워 있는 백비 자체가 그러한 말 없는 압력이 됩니다. 그것이 밝혀질 때 백비는 세워져야 합니다. 내 그런 기도를 해요.”
 
지난해 12월 제주에서 부모의 묘소를 이장한 김시종 시인이 자신이 쓴 비문을 살펴보고 있다. 허호준 기자
 
지난해 12월 부모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해 제주도를 찾은 시인은 부모 산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장을 기념해 세운 묘비에는 이렇게 썼다.
 
“다시는 아버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을 기다려 언제나 기원하고 왔습니다. 저에게는 역시 저세상이 가까이 만나 뵈는 영원한 곳입니다.” 한밤중 어둠 속에 숨죽이며 일본 땅에 스며들어 뿌리내린 지 75년. 시인은 여전히 4·3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옛 사랑이 피를 뚝뚝 떨어뜨린/ 그 길목, 그 모퉁이, 그 구덩이,/ 그곳에 있었을 나는 넘치도록 나이를 먹고/ 개나리 살구꽃 똑같이 흐드러지는 일본에서/ 삐딱하니 살아/ 화창하니 해 비추고/ 사월은 또다시 시야를 물들이며 돌아나간다/ 나무여,/ 스스로 흔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나무여/ 이토록 봄은 그저/ 회오를 흩뿌리며 되살아난다.”(김시종 ‘사월이여, 머언 날이여’ 중에서)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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