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년 전 그날의 염원…해방·민주화의 힘”
충청·대전, 3·1절 기념식…천안 아우내장터에선 봉화제
- 수정 2024-03-01 13:49
- 등록 2024-03-01 13:46
[하루만보 하루천자] 3·1 독립운동 희생정신 '걷기'로 되새겼다
이승진 기자 promotion2@asiae.co.kr
3.1 삼일절 바로알기(역사바로알기)
3.1 삼일절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기리고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공휴일입니다.
이 날은 대한민국의 국경일이기도 합니다.
3.1 삼일절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고 독립을 외치기 위해 만인이 일어난 대한민국 독립운동인 "삼일운동"의 개시 날짜로서 유명합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시작된 것으로 임시정부도 3·1운동 정신을 계승해 4월 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됐다.)
그러나 삼일운동은 한반도 내외로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한국 독립 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열정과 희생 정신으로부터 나온 열사들과 영웅들은 그 후의 독립운동에서 큰 영감과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식으로 인정되었고 그 후 곧바로 재건기를 맞아 국경을 두고 북남으로 나뉘게 되면서, 삼일절은 북한과 남한 모두에서 국경일및 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삼일절은 굳게 닫혀 있는 DMZ(비무장지대)를 넘어 남북 관계 개선 및 평화와 통일의 의미를 상징하는 날로 여겨지며, 다양한 행사와 기념식 등이 개최됩니다. 또한 이날에는 전국적으로 굳게 닫혀있던 DMZ 문턱에서 평화와 화합을 바라는 의미를 가진 "DMZ 평화벚꽃 축제"도 개최됩니다.
2024년 3월1일 삼일절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와 평화적 시위를 통해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족적 자존심을
세계만방에 알린 날로 3·1 독립운동의 숭고한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기미년 삼월 일 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3.1절, 유관순 열사,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영 운동에 기폭제 역활
3.1절, 유관순 열사,
3·1운동은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영 운동에 기폭제 역할 "죽음 두려워 않는 조선인들에 경의" 5·4 선언문 쓴 쉬더헝의 글 첫 공개 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제국주의 운동이며 전국적 항일운동이었다.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영 운동, 베트남의 독립운동 등 아시아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자극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국가기록원 자료사진 "조선인들은 참으로 피를 흘리고 참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조선인에 대해 온몸을 땅바닥에 던질 정도로 경의를 표한다. (쉬더헝, '존경스럽고 탄복할 만한 조선인' 中)" 1919년 일제 치하 한반도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 소식은 곧바로 중국 베이징까지 전해졌다. 중국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식인과 학생들이 모인 베이징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근대적인 국민의 삶을 계몽하고 열강의 간섭에 저항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 앞에서 번뇌하던 중국 지식인·학생들은 식민지배를 받던 이웃나라 조선의 민중투쟁에 주목했다. 3월부터 5월까지 3·1운동의 전개 과정을 낱낱이 보도했고, 기미독립선언서 전문까지 소개하며 높게 평가했다. 두 달 뒤인 5월 4일 베이징에서 5·4운동이 일어났다. 주도 세력은 3·1운동을 찬탄한 지식인·학생들이었다.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학생 3,000여 명이 모여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동맹 휴학과 사상운동인 신문화운동으로 발전했다. 중국 대중이 성장하고 청년·학생 운동이 확산하는 등 민중의 개혁과 각성으로 이어진 5·4운동은 '중국 현대사의 분기점'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중국사에서 의미가 크다(출처/한국일보). 3.1절, 유관순 열사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1일(음력 3월1일) 유관순열사와 김구응 선생 등이 주도해 벌인 비폭력 만세운동으로 당시 일본헌병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19명의 애국지사가 현장에서 순국했으며 3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된 호서지역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다. 1915년 봄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의 보통과에 편입하고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매우 행복한 나날이었다. 이화학당시절 유관순(13세)은 활발하고 씩씩한 여학생이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주리)에서 출생했으며 이화학당 학생의 몸으로 1919년 서울 3.1독립만세 운동(당시 17세)에 참가한후 고향에 돌아와 아우네 기미 독립만세운동 주역으로 선봉에서 강렬한 항쟁을 전개했다. (뒷줄 오른쪽끝 유관순) 1915년 봄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의 보통과에 편입하고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매우 행복한 나날이었다. 이화학당시절 유관순은 활발하고 씩씩한 여학생이었다. (서대문 감옥 수형자기록표)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전문 중 일부)"는 독립에 대한 의지와 희망이 여실히 드러난다. 유관순 열사의 사진은 1919년 삼일운동당시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수감번호 371번이 선명히 찍힌 수의를 입은 채 모진 고문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있다. 충남 천안 유관순 열사 사적지에 조성된 유관순열사의 초혼묘(招魂墓·유골이 없는 분의 혼백을 모신 묘). 초혼묘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9년 10월 봉안됐다. 열사 유관순은 1902년 12월16일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주리)에서 출생 했으며 이화학당 학생의 몸으로 서울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후 고향에 돌아와 아우네 기미 독립만세운동 주역으로 선봉에서 강렬한 항쟁을 전개했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무거운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온갖고문과 악형끝에 숨을거두는 순간까지 항거를 거듭했다. 1920년 9월28일 유관순 열사 나이 18세로 꽃은 피워보지도 못하고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만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순국하시니 고금에 유례없는 구국의 독립투쟁열사 이시다. 유관순 열사의 어록문(語錄文) 나는 대한사람이다.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 너희들은 나에게 죄를 줄 권리도 없고 나는 너희 왜놈들에게 재판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다.(재판을 거부하며) 선생님! 저는 나라를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2천만 동포의 십분의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박인덕 선생님에게...옥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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