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이렇습니다.
오세훈 ˝경복궁 옆 '이승만 기념관'˝..야당 ˝을사오적 기념관까지 만들라˝
"시대착오적" “시민의 피 같은 세금을 역사 쿠데타에 쓰냐" 시민 성토
"이승만 사실상 반민주행위자로 탄핵당한 대통령..정부 지원 안돼"
더불어민주당은 "경복궁 옆 이승만 기념관? 차라리 을사오적 기념관까지 만들라"고 오세훈 서울시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강선우 대변인은 27일 서면브리핑을 통해 "서울시가 경복궁 동편 송현광장 옆에 이승만 기념관 설립을 검토한다는 소식에 국민적 분노가 커지고 있다"라며 이렇게 밝혔다.
“서울시민의 피 같은 세금을 역사 쿠데타에 쓰냐”, “오세훈 시장 집 안방에나 설치해라”
강 대변인은 "비판과 우려를 쏟아내는 국민의 목소리 좀 들으라"며 "오세훈 시장은 그곳을 시민을 위한 녹지공간으로 남겨두겠다더니, 왜 갑자기 독재자의 기념관을 세우려고 하는가?"라며 따져 물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같은 날 오전 "초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부정적인 쪽에만 초점 맞춰져 왔다"라며 '이승만 기념관' 건립 필요성을 또다시 주장했다. 하지만 독재와 부정선거로 하야한 대통령을 영웅화하는 것에 "시대착오적"이라는 시민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오 시장은 이날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서 "건립추진위원회 측에서 그곳(송현광장)을 가장 선호한다. 당초 그 공간은 되도록 비워놓겠다는 입장이었는데, 크기를 보고 층수를 보니까 경관을 해하는 정도가 크지 않다”라며 "시민 여러분의 의견을 묻겠다”라고 했다.
앞서 오 시장은 지난 23일에도 서울시의회 임시회 시정질문에서도 이승만기념관 건립 장소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 경복궁 인근 종로구 송현광장이라며 기념관 건립 추진 의지를 내비쳤다.
오 시장이 공식 석상에서 송현광장을 후보지로 거론한 것은 사실상 기념관 건립 추진을 공식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우리 헌법 전문에 '4·19 민주이념 계승'이 명시돼 있고, 제주 4·3 등 민간인 학살의 책임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죄과는 피하기 어렵다.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는 4.19 혁명과 당시 이어진 후속 조치를 통해 역사적, 사회적 평가가 이미 끝났다. 사실상 탄핵당한 대통령인데 국민 혈세로 기념관을 짓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비판이다.
강선우 대변인은 "오세훈 시장이 받은 역사 교육은 국민과 다른가?"라며 "독재자 이승만에게 무슨 재평가가 필요한가? 이러다 이완용이나 을사오적도 재평가하자고 나서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서울시의 이승만 기념관 건립 시도는 시민을 들러리로 세워 윤석열 정권의 역사 쿠데타 시도에 편승하려는 행태"라며 "윤석열 대통령의 '극우 역사관 코드' 맞춤을 위한 것인가? '용산의 편애'를 얻고자 역사를 팔아넘기지 말라"라고 쏘아붙였다.
아울러 "국민께서 그대로 두라던 홍범도 흉상은 치우고, 시민께서 반대하는 독재자의 기념관은 세우려는 윤석열 정권의 역사관은 우리 국민과 역사에 대한 모욕 그 자체"라며 "참고 앉아서 듣고 있기가 치욕스러울 지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역사를 모르는 이는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라며 "윤석열 정권은 역사적 무식과 무지를 자랑하는 만행을 멈추고, 무도한 역사 쿠데타 시도를 당장 그만두라"고 촉구했다.
오기형 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1960년 12월 31일, 국회는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을 만들어 '1960년 4월 26일이전에 특정지위에 있음을 이용하여 현저한 반민주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을 제한'했다"라고 했다.
이어 "같은 날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을 만들어 3.15부정선거 가담자들에 대한 형사처벌 입법을 했다"라며 "1961년 2월 25일자 관보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공민권 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은 그 무렵 돌연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 이후 살아서 대한민국 땅을 밟지 못했다"라며 "우리 헌법 전문에는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새겨져 있다. 사실상 탄핵당한 대통령을 기념하는 데에, 중앙정부·지방정부의 지원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4·19땐 '부패독재 이승만' 비난하더니
지금 얼굴 바꿔 이승만 미화하고 '건국전쟁' 홍보
당시 사설 "이승만은 3.15부정선거 자유당 상징"
"3·15부정선거는 이승만 위한 것" 외신도 인용
이승만 4·19 수습책·공산당 연루 담화도 비판
하야 발표에 '환호''축하''감격'이라며 지면 도배
조선일보가 전위부대 노릇을 하고 있는 극우·보수 세력은 오래전부터 이승만 미화·영웅화를 통해 친일과 독재라는 썩은 뿌리에 분칠을 해왔다. 이는 지지 세력을 결집시켜 기득권을 영구히 누리려는 이념적·정치적 목적이지 민족주의나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이승만 미화·영웅화는 친일과 독재의 미화, 나아가 역사왜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일보의 이승만 미화와 영웅화는 눈물겹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에도 ‘광복절’ 대신 ‘건국절’을 내세워 나라를 이념전쟁으로 몰아넣더니 윤석열 정권 들어서는 ‘홍범도 장군 흉상제거 파문’과 최근 영화 ‘건국전쟁’ 개봉 이후 더욱 극렬해졌다. 올해 1월1일부터 2월27일까지 ‘이승만’ 키워드로 검색된 조선일보 기사는 무려 90여건이니 이승만 관련 기사를 매일 두 건씩 보도한 꼴이다.
이 신문은 이승만 기념관 건립 모금에도 열심이다. 우파성향 인사나 단체, 교회가 모금에 참여했다는 기사는 크게 보도된다. 지난달 영화 ‘건국전쟁’이 개봉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승만 재조명’ 기사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런 기사 작성에 정치면, 사회면, 문화면, 인물면, 칼럼, 사설을 총동원해 전사적(全社的)으로 뛰고 있다. ‘건국전쟁’을 만든 영화감독 인터뷰 기사는 이 신문에 한달 여 동안 무려 세 번이나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영화 관객이 00명 돌파했다’ ‘미국에서도 상영된다’ ‘속편이 나온다’ 등등 영화 홍보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이승만 관련 기사의 제목을 보면 이승만에 대한 찬양이 낯뜨거울 정도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이승만 미화·영웅화에 역사학계의 반론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조선일보는 이 반론을 반박하느라 다시 역사를 왜곡한다. 유튜브에서 유명한 한국사 일타강사 황현필 씨가 “희대의 민간인 학살자를 찬양하는 영화”라고 비판하자 이 주장을 검증하겠다며 연재기사를 쓰고 있다. ‘건국전쟁’ 이후 개봉된 영화 ‘파묘’가 흥행에 성공하자 이를 ‘좌파들의 분풀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조선일보에서 벌어지고 있는 코미디같은 일이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이승만 미화와 영웅화에는 좀 이상한 점이 있다. 과연 조선일보는 이승만 대통령 집권 당시에도 (최근 열을 올리며 ‘재조명’하는 것처럼) 그를 ‘영웅’으로 취급했을까?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3.15 부정선거 사실이 들통나 전국이 요동치고 4.19혁명이 벌어졌을 당시의 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그렇지 않다!
당시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3.15 선거를 ‘부정선거’ ‘협잡선거’라고 쓰고, 이를 자행한 자유당을 ‘불의’로 규정해 맹렬히 비난했다. 또 4.19혁명이 ‘부패한 강권 독재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데모라고 하고, ‘독재부패한 자유당 정권’을 대신해 ‘청렴하고 혁신적인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조선일보가 말한 ‘보수부패의 강권 독재세력’ 혹은 ‘독재부패한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대통령은 별개의 것인가? 조선일보는 지면에 “이승만 대통령이 창당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적극적 비호 아래 성장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 석자로 상징되던 것이 자유당”이라고도 썼다. ‘보수부패’ ‘강권’ ‘독재세력’의 자유당 정권은 바로 ‘이승만 정권’이라는 말이다. 조선일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환호’ '감격'하는 사설도 썼다. ‘4.19혁명의 학생데모가 공산주의자가 개입한 것’이라는 이승만 대통령 담화를 적극 비난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 지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자유당의 3.15부정선거 직후 ‘해외에 비친 3.15 선거’라는 기사에서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를 가져와 이렇게 소개했다.
“워싱톤 포스트: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 세력은 또 한 번의 선거승리를 ‘부르도자’(불도저)로 밀고 들어가서 타고 앉듯이 차지하였다. 외국인 옵서버들에 의해서 입증되지 않았더라면 강제 억압 탄압의 도가 얼마나 혹심했던지 그 실정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뻔했을 것이다. 살인을 불사하는 구타 경찰의 소위 ‘설득’ 공작, 투명용지투표, 사전투표의 계획극단한 차별적인 법의 적용 등등 갖은 불법부정행위가 이(승만) 박사의 재선과 그의 자유당 런닝메이트 이기붕씨의 당선을 위해서 연출되었다.”(3월24일 기사)
3.15부정선거 이후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4월15일 특별담화문을 발표한다. 이 대통령 담화문의 요지는 ‘공산당이 데모를 조종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공산당과 결부시켜 마치 공산오열분자의 조정에 의해 야기된 사태처럼 선전하기에 바쁜 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우리 정부에서는 마산사건을 공산당과 결부시켜 마치 공산오열분자의 조종에서 의하여 야기된 사태처럼 선전하기에 바쁜 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도 수사의 진전에 따라 실지로 공산오열분자가 적발되었다거나 또는 공산당이 개입한 확실한 증거가 포착되어서 그와 같은 혐의 사실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파고행동의 수법이라든가 시위의 규모나 방법이 수상하다는 막연한 추상론을 가지고 뒤에서 공산당이 조종한 것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4월16일 사설)
조선일보는 4월19일 전후로 사설에서 여러 차례 3.15부정선거를 격렬히 비난하고 이는 ‘자유당 정부의 부정부패와 독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자유당 정부=이승만 정부’라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그에 따른 자유당 해체가 중요하다고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 담화문에 ‘3.15부정선거의 불법·무효화’ ‘책임자 처벌’ ‘대통령 당선 부인’ 등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며 “자유당 정권의 위장연명책을 배격한다”고 강도높게 비난하기도 했다.
“정부는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4월13일 사설)
“학생들의 궐기가 3.15부정선거에서 유래하고 자유당 정부 12년의 누적된 비정에서 연유한 것임을 안다면 3.14선거를 무효로 돌려 재선거를 실시할 만한 과단성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격앙된 민심이 날이 갈수록 험해지고 3.15 선거의 불법무효를 부르짖는 국민 앞에 무슨 면목으로 군림할 수 있겠는가”(4월19일 사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서 창당되고 이 대통령의 적극적인 비호 아래 성장한 자유당이며, 이 대통령의 성명 3자로 상징되던 자유당인 것이니 그 자유당에서 이 대통령이 손을 뗀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자유당의 와해를 초래할 수 있을 만치 중대한 일이라 하겠다.”(4월24일 기사)
“자유당정권의 위장연명책을 배격한다: 표면상 국민의 수습요망에 응하는 것 같이 말하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과연 무엇을 기도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이 담화를 중시하려는 것은 이러한 문면에 나타난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보다 문자로 나타나지 않은 점이 우리를 실망시키는 까닭이다. 하나는 삼일오선거의 불법무효에는 일언반구도 언급된 바가 없고 마치 사일구 데모에서 오늘의 위기가 출발된 것 같이 보고 있는 듯한 점이고 둘째는 이에 따라서 당이나 행정부에서 삼일오부정폭력선거를 기획감행한 정부 및 자유당의 책임자들을 엄벌할 하등의 의도를 표시하지 않은 점, 그리고 3.15선거가 무효이니 대통령 당선을 부인하고 재선거를 단행하겠다는 것은 말끝에도 비치지 않고 있는 것은 거의 절망적인 느낌을 준다.”(4월25일 기사)
이승만 대통령이 결국 사임하겠다고 발표하자 조선일보는 환호성을 질렀다. “축하와 감격의 도가니” “우렁찬 만세소리” 등 기쁨에 들떠 지면을 도배했다. 지금 조선일보가 그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보도를 한 것이다. ‘독립운동가’ ‘건국의 아버지’ ‘독재가 아닌 장기집권’ ‘4.19는 이승만 아닌 자유당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이승만을 감싸고 미화하고 영웅화하고 있는 조선일보가 왜 그의 하야에 이렇게 환호, 축하, 감격한 것인가?
“만세! 민권은 이겼다! 이대통령 드디어 사임, 부정선거 무효화도 지시 특별담화 발표”(4월26일 기사)
“이 소식에 접한 국민들은 홀연 천지를 진통케하는 환호성을 폭발시켜 온거리는 축하와 감격의 도가니로 화하여 누구의 입에서 선창된 것도 모르게 애국가를 드높이 합창했고 우렁찬 대한민국 만세소리는 이 강산을 요동하였다. 삼일오선거를 절정으로 하는 독재부패정권의 강압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거의 절망적인 단계로 몰아넣었었다.”(4월26일 사설)
하야 발표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칠어지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을 ‘독재부패한 정권’ ‘보수부패의 독재세력’으로 부르며 퇴장하라고 요구했다.
“정권담당자들을 그 임기여하에 불구하고 교체하자는 것이니 그 투쟁의 목표와 정신에 있어서는 독재부패한 자유당정권을 대신해 청렴하고 혁신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데 있는 것”(4월27일 사설)
“썩은 선배, 썩은 정치는 물러가라. 드디어 보수부패의 강권 독재세력의 아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삼일정신을 호흡하면서 교실에서 폴리비어를 배운 학도들은 부패한 강권독재정부가 강제한 가두 데모의 조직과 선동방법을 체득하고 있었다. 삼일정신, 폴리비어, 질주가두 데모기술, 이 세가지 요소는 반독재민주항쟁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3.15부정협잡선거의 규탄과 재선거의 요구, 피끓는 젊은 학도들이 선배일반에게 고함친 진정한 소리는 어떤 것이었나”(4월28일 사설)
요컨대 조선일보는 1960년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이 발발할 당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협잡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을 유지하려하고 자유당과 함께 부패정치를 이끌어온 ‘보수부패 독재정권’의 대통령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당시 기사와 사설을 보면 숨길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갑자기 그를 미화하고 영웅으로 띄우고 있는 것이다. 60여년 전 세상을 떠난 이승만의 공개되지 않은 일기장이라도 나왔는가? 그 때의 조선일보는 지금의 조선일보와 다른 신문인가?
사실 조선일보의 말바꾸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두번의 실수도 아니다. 박정희 시절엔 박정희의 ‘말씀’을 받들어 ‘서울 천도설’을 주장하다가 노무현 시절엔 수도 이전을 극렬 반대했다. 노태우 시절엔 우리 군의 전시작전권 반환을 주장하다
노무현 시절엔 또 반대했다. 조선일보가 언론이라면, 왜 말과 입장을 바꾸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 설명하지 않고 다시 사실을 왜곡해 보도한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이 정치적 이득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젠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언론이 발행부수 1위라는 게 우리 언론의 불행이다.
박정희의 이승만 평가 "이승만 노인은 눈이 어두운 부패한 독재자"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부정과 불법의 흉계를 꾸미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했다"
"해방 16년에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부패한 자유당 관권 중심의 '해방 귀족'들이 도량(跳梁)하여 민족의 장래는 어두워만 갔다.… 마침내는 4·19의 반독재 학생혁명을 유발하고 말았다."(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동아출판사, 1962, 125-126쪽)
"부정과 불법의 흉계를 꾸미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향해 전 대통령이라 부르지 않고 씨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 노인은 눈이 어두운 독재자다. 지난날 이승만 씨가 꾸며 놓았던 자유당이야말로 자기 파派만의 수지타산을 제일로 치는 정당의 본보기였으며, 세계 선거 역사 가운데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부정과 불법의 흉계를 꾸미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했던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국민의 기본 권리가 나라법에 규정되긴 했지만 그것은 한갓 종이 위에 적어놓은 글귀에 지나지 않았을 뿐, 자유당 정부는 그것을 지키고 실현시키기는커녕 도리어 그러한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일쑤였다. 이리하여 정부에 의해서 자유를 짓밟히고 시달려게 된 온 국민은 정부의 억눌림에서부터 다시 자유를 되찾으려는 자유 투쟁의 운동을 벌였고 그것이 이른 바 자유당 정치하의 우리 형편이었다.
남한에서는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이 12년 동안 기간 산업의 토대가 되는 전력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짓지 못하는 사치스런 소비경제로 말미암아 농촌은 메말라 갔으며, 메마른 농촌의 피와 살을 깎아서 도시만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썩고 그릇된 일만이 극심해져 갔다.
자유당 독재 12년에 농촌의 경제는 파탄되고 관기는 문란해졌으며, 부정축재자들은 건전한 국가 경제의 성장은 제쳐 놓고, 그릇되고 썩어빠지기만 했다. 해방 16년에,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인의 어두운 독재와 썩어빠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해방 귀족'들이 날뛰어 겨레의 장래는 어려워만 갔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국헌을 준수해야 할 본분을 망각한 채,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은 부패한 독재자이며,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부정과 불법의 흉계를 꾸미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했다"는 게 박정희의 평가였다.
안창호 외손자가 쓴 글 “이승만은 독립운동 방해한 권력자”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던 애국자들을 여러 차례 배신한 것을 과연 알고 있는가?"
"이승만이 1948년 정권을 잡은 이후, 도산의 측근이나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방문할 수 없게 만들어..."
도산의 부인이자 나의 할머니인 이혜련(Helen Ahn)은 도산이 이승만을 한 때나마 지원했던 것을 그의 가장 큰 실수로 여겼다. 이승만은 1890년대 독립협회 시절부터 도산의 반대 입장에 주로 섰고 또한 그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뜨리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 전체 기간 동안 꾸준히 도산과 우리 가족에게 큰 어려움을 끼쳤다. 이승만이 1948년 한국 정부를 손에 쥔 이후, 도산의 측근이나 우리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방문할 수 없게 만든 일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1963년까지 지속되었다.
현재 이승만의 역사적 평가에는 중요한 결함이 있다. 그는 과연 영예로운 독립운동가인가? 일부 한국인들과 한국계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는 예상보다 더 우려스럽다. 독립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의 그는 대한의 이익에 헌신하기보다는 이기적인 권력욕을 품은 지도자에 가까웠다.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던 애국자들을 여러 차례 배신한 것을 그들은 과연 알고 있는가?
이승만은 동지회를 만들어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도산에 대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금을 횡령하며, 상하이 지역 독립운동을 위해 모아진 자금을 빼앗기도 하였다. 재미한족연합회(United Korean Committee)는 1940년대 초부터 한국전쟁 이후에 이르는 기간, 어떻게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방해하였는가에 대한 많은 공식 리포트를 남겼다. 동지회는 임시정부 자금을 훔치려고 한 이유로 재미한족연합회에 참여할 수 없었다.
내가 기부한 이 문서들은 현재 한국의 독립기념관과 하와이 대학에 보관 중이다. 이 외에도 나는 이승만의 혼란스럽고 부정적인 리더십에 관한 원본들을 아직 보유하고 있으며 내가 기부한 것들의 사본도 물론 보관 중이다.
이승만은 1945년 이후 재미한족연합회 회원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가 미군정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성원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한 것처럼 재미한족연합회 또한 공산주의자들이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예로, 1925년 이승만은 미국에 거짓된 보고서를 제출하여 도산이 시카고에서 체포되도록 한 일이 있다. 그는 도산이 볼셰비키(공산주의자)라고 허위로 신고했고,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반미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미국 정부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도산의 집을 압수수색하게 된다. 이승만과 동지회의 이런 주장은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의 폭탄사건 이후 상하이에서 체포된 도산의 처지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도산이 볼셰비키라는 의혹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한국에서 수감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의 주장이 사실이었다면 어떻게 도산의 딸이자 나의 어머니인 수잔 안 커디가 미 해군 정보국에서 일하고 국가안보국에서 최고 분석관이 될 수 있었을까.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는 도산의 가족과 아주 친한 관계였다. 그는 초기 1900년대 도산의 신민회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으며, 한때 도산의 여동생인 안신호와 결혼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김구는 나의 할머니에게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으며, 1941년에는 도산에 대한 찬사가 담긴 대한민국 국기를 보냈었다. 이 국기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있다.
1949년 김구가 암살당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을 때, 도산의 가족은 아무도 이승만이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과거 하와이에서 폭력적인 분쟁과 함께 그 부패한 이념으로도 잘 알려졌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1915년 하와이 분쟁 당시 박용만을 죽이려고 시도한 사실이 있다. 박용만은 당시 대한인국민회에서 일했고, 1897년부터 암살당한 1928년까지 도산의 가까운 동료였다.
이승만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정직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승만을 옆에서 본 도산과 우리 가족이 알고 있는 역사는 현재 한국 미디어에서 나오는 이야기들과는 사뭇 다르다. 나의 할아버지는 잔악한 일제 식민주의자들에게 체포, 감금 그리고 고문을 당한 끝에 죽음에 맞았다. 도산 안창호는 자신의 가족과 삶을 희생하여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했다. 지금의 한국의 존재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도산의 진실한 리더십이지 이승만의 거짓된 행동은 아닐 터이다. 왜곡된 역사를 사실처럼 믿고 있는 일부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들의 인식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필립 안 커디 도산 안창호 외손자>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충격적인 자료' 안중근의사도 살인자로 규정한 '밀고자'
이 기사는 과거 kbs가 방송한 자료를 토대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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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논문은 미국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에 관한 논문으로 미국이 한국을 신탁통치 해달라는 논문이었고, 이에 격분한 임시정부에서는 만장일치로 그를 탄핵 했지만 이승만은 나는 대통령 이므로 너희들의 탄핵은 인정 할 수 없다며 무시하자,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격분했다고 합니다.
또, 전명운 장인환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더 있습니다. 우선 교민들은 전명운 장인환의사를 구명하고자, 당시 하와이 바나나농장 에서 어렵게 일한 동포 들이 정말 목숨 같은 돈을 모으게 됩니다. 애국지사를 죽일 수 없다는 애국심에서 동포애가 발휘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포들 중 아무도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가 없었고, 황색인종을 도와줄 백인은 없었습니다. 다행이 하버드 석사요 프린스턴대 철학박사인 이승만을 찾아갔고, 이승만은 수락합니다.
그러나 1등급 호텔에서 자신이 머물게 해달라는 현실에 맞지 않는 조건을 내세워 교민들은 모금한 그 피 같은 돈으로 그의 조건을 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쓸데없는 곳에 돈만 쓰고 시간만 허비하다, 마지막엔 나는 살인자를 변호하는 통역은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칩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망국의 한을 품은, 교민들을 타국 땅에서 믿었던 이승만 때문에 또 한 번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 없는 절망에 땅을 치며 통곡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그가 천재적 기질을 갖고 애국을 한 사실은 1904년 이전 1898년 정부전복을 꾀한 죄목으로 투옥됐다가 민영환에 의해 미국으로 유학 온 것 외엔 뚜렷한 것이 없다. 1908년 3,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슨을 살해 했을 때 이승만은 이들의 법정통역을 살인재판으로 명명하고 무참히 거절해 버렸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 테러"로 간주하고
살인자라 맹 비난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일까?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그는 교육과 선교활동에 뜻을 밝힌 것으로 보아, 종교적 문제로 거절했을 수 있고, 자신의 외교적 입지를 곤란하게 하므로 통역을 거절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던 거절을 함으로써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자신과 테러를 차별화시키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럼, 그는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어떤 외교활동을 펼쳤을까? 미국 외에 접촉한 나라는 몇 나라나 될까? 전혀, 소득의 결과가 없다. 그는 하와이로 건너와 박용만이 이끄는 국민회를 장악하고 법정투쟁을 벌리는데 이는 나라를 위함이 아니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든든한 친위대 를 양성시키는 수순이었을 뿐이었다.
이승만의 야심과 비열한 욕망
그의 야심이 드러난 것은 1919년 3월 1일 고국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를 따르는 교민들을 규합하여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한인대회의 발언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획책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독립은 국제연맹에 청원서 를 내고 위임통치를 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며, 독립이 된다면, 반드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할 것"이라고 역설을 하며 가장 양심적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처럼 2박 3일간 미국각지에서 모인 교민들을 기만하며 치렀다.
이날 이승만은 미국의 신화 같은 초대대통령 워싱톤이 앉았다는 의자에 앉아 건방을 떨며 새한국의 초대대통령이 자신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며 대통령 취임식 까지 했다.
이때는 이미 임시정부의 직함인 국무총리직을 박탈당하고 퇴출당한 아무것도 아닌 신분인데도 임정의 대통령직함을 그냥 사용했다. 이것은 분명한 사기인 것이다. 마치 그의 행위는 그리스신화의 기회의신 카이로스를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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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국민군단과 박용만 사건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태생으로 일본 동경으로 유학, 1904년, 보안회에 입회하여 일본의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는 운동에 참여, 한성감옥에 투옥됐는데 그는 그 감옥 안에서 이승만과 운명적으로 만나 결의형제가 되었다. 1904년 출옥한 박용만은 이승만과 동일시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1906년 헤이팅스 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고 1909년 네브라스카에서 한인소년병 학교를 설립하였다. 1911년 신한민보의 주필을 거쳐, 1913년 하와이로 와서 신한국보의 주필이 되었다.
그는 군대를 양성해 일본본토를 공격해 독립을 이룩하자 ! 고 외쳐 교포사회에 감동을 일으켰다.교포들의 감동으로 그는 1913년 6월11일 하와이 호놀룰루시의 큰 산 너머 코올라우(Koolau)구역 아후이마누에 위치한 파인애플 농장(1360에이커)에 대조선군단이라는 독립군을 창설하였다. 그는 생도들에게 낮에는 일을, 밤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애국심에 독립이란 감동이 더해져 교포사회의 지원은 상상 이상이었다.
박용만은 1차적으로 하와이 항에 정박 중인 일본함정 츌운호를 격침시키는 목표를 세웠는데, 때를 같이해 이승만은 하와이의 독립운동 자금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백인우월주의에 돈 없는 황색인종이 무슨 방법으로 외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돈의 힘이었다.
그는 미국본토에서 박용만의 대의에 참여와 협조를 빙자해 하와이로 건너와, 그곳에서 교육 사업으로 학교를 세워 역사와 세계사를 가르치고 교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를 기억하는 교포들의 증언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었으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증언 했다.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이 믿고 만든 교회와 감리교중 하나만 선택하라며, 교회를 분열 시켰으며, 이것은 자신이 세운 자신의 우상화 종교를 믿고 자기를 추종하는 사제가 되라고 강압적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는 박용만과 대조선국민군단의 와해를 획책키 위한 고도로 기획된 야비한 이승만 식의 전략이었다. 급기야 이승만파 와 박용만파로 갈리어 분열 됐는데,
하와이 교민 1세대들은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의 상처로 남게 되었고 이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 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KBS에서 어렵잖게 취재한 증언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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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고성 증인이 된 이승만
이승만 이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기 보다는 평화를 빙자해 동족의 피의 대가를 자신의 업적으로 치부하는 비열하고 악랄한 무뢰한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와 외교를 지향한 그가 하나님을 앞세워 행한 일은 종교와 동족분열, 그리고 그토록 증오하던 테러리즘을 손수 자행한 장본인이었다.
또, 그는 증인이 아닌 밀고자 로 전락하는데........
국민군단의 위용이 나날이 높아지자, 주미 일본영사관에선 어찌 알았는지? 미국국무장관에게 한국인의 군사훈련에 항의를 하여 무기불법 소지 문제로 교민의 대표인 박용만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이승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 이승만이 증인으로 나와, 박용만이 미국영토에 군사학교를 설립한 것은 하와이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 츌운호를 격침시키기 위함이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사변을 일으켜 양국 간 외교를 깨려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진술했다.
그로인해 박용만은 유죄판결을 받아 몰락하고 대조선 국민군단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눈엣가시 같은 박용만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하와이 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박용만을 추종하던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동조를 거부하자, 본격적인 테러와 폭행을 감행했으며 총기난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의 증언은 밀고성 고발이며 결의형제의 결속을 배반하고, 교포사회의 애국심을 무참히 짓밟은 반역행위였다. 어떠한 변명과 구실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이었으므로, 굳이 변명을 한다면, 이는 마치 씨저를 살해한 브루터스의 웅변과 같을 것이다. 하와이와 같은 좁은 땅에서 외교를 위한 동족을 범법자로 만든 파렴치한 짓이었고, 개인의 야심에 애국심을 뭉개버린 그의 독선적인 욕망의 극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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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테러행각은 오늘날 잘 포장되어 애국과 한국의 국조로, 모래위에 누각처럼 서게 됐다. 그를 옹립한 뉴라이트의 공로다.
▲사진에 보이는 백속에 야구배트가 있는걸 보아 폭행직후 기념촬영을 한것 같다. © KBS
동시대에 시카고에서 악명을 높이던 이태리계 깽두목 알 카포네와 다를 게 무엇인가? 위사진에 보이는 빽속에 야구배트가 있는걸 보아 폭행직후 기념촬영을 한껏 같다. 누굴 해한 것인지? 기념사진을 찍은걸 보면, 대단한 인물에게 폭력을 가한 것 같다. 대한민국 국부의 경력치곤 너무 소름끼치게 비열하다.
이 분이 박용만 선생님이다. 님은 1928년 베이징에서 흉한의 습격을 받고 살해 되었다. 누가 살해했는지…? 명확치 않다. 1925년 베이징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직을 탄핵한 후 3년 뒤였다. 이들의 결의형제 맹세는 이렇게 끝났다.
이승만과 동지회는 자신의 욕망을 달성키 위해 전명운 장인환 의사 및 안중근 의사까지 살인자로 규명하고 활동시킨 단체다.
▲이승만과 그를 지지했던 동지회다. 이들은 같은 동족에게 테러와 총기난사를 서슴지 않았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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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하와이 교민들을 갈취한 수단들
교민들의 돈으로 귀족처럼 외교에 힘쓴다는 명목하에 호의호식하며 직함(대통령)에 맞게 생활하는 이승만, 그러나 교민들은 사탕수수 밭이나, 파인애플 공장에서 힘들게 벌어 기탁하고 강제로 채권과 공채를 사야만 했다. 그 돈은 몽땅 이승만의 주머니로 입금 됐으며 고생하는 교민들에 비해 아주 핸섬한 젠틀맨이다.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의 효과와 이용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패망하자, 이승만에겐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라디오 방송이었다. 아무런 내막도 몰랐던 고국의 동포들에게 그의 일성은 희망을 넘은 열광의 기쁜 소리였다.
하와이의 사정을 알길 없는 고국의 동포들은 이승만의 라디오 소리에, 이승만은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할 구세주 인양 대단한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그의 외교능력이 포장된 라디오 방송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우매한 국민들은 이승만을 너무 몰랐었다. 예나 지금이나 매스컴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도 이승만을 우상화하며 행적을 포장하는데 열을 올리는 친일사관에 젖은 노예집단들이 우리나라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때 임정에선 총리와 대통령직을 박탈하고 주미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위촉했으나, 그는 '떠들지 말라'며 자칭 대통령직을 고수했다. 우리헌법 전문에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기록됐는데, 이때는 상해임시정부의 법은 절대적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떠들지 말라고 밀어 붙였다. 무법자 의 일방적 추태인데도, 오늘날 추종자들은 한술 더 떠 헌법전문마저 고치려 한다.
그 첫 번째 행태가 1948년을 건국절로 명명하고 이승만을 국조로 옹립, 임시정부 역사를 대한민국과 별개의 고난의 항쟁사로 묶어,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를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라덴과 동격으로 비하시킴을 당연하다고 외치고 있다. 고려대 한승조, 육사22기 지만원, 박효성, 안병직, 류석춘, 복거일, 이명희 등 을사5적 과 같은 맥락의 인사들이다.
전쟁영웅 맥아더의 후광
해방 후 이승만의 귀국은 글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해방직후 신탁통치를 위해 미국에선 하지중장이 우리나라를 통치할때 이므로 제일 높은 사람이 하지 중장 이었는데, 하지가 이승만에게 경례를 붙이자, 한국 사람들은 전부 놀랐다. 하지보다 더 높은 사람 이승만, 그것은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에게 편지와 메모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직위로 인간적 교우를 다졌던 터에, 맥아더의 배려로 하지에게 대통령의 예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와 이승만과의 충분한 교감이 있은 직후의 일이라 이상할 것은 없는 사실이나 그때의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알리가 없었고, 다만 라디오를 통해 독립을 위해 미국에서 열심히 애국한 애국자로 각인되어 있었기에 더욱 이승만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에 충분했다.
귀국한 이승만에게 러브콜을 한 무리들은 친일파 들이었다. 하지중장의 입장에서도 통치의 경험이 있는 친일파들을 처벌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승승장구 남북단일 독립국이 아닌 남한단독정부에 열을 올려 장애물을 제거해 나갔다. 여운형도 암살되고, 김구도 제거하고, 동족상잔 의 비극 6.25, 장기집권에 최대난적 신익희의 돌연사, 조병옥의 위수술중 사망, 죽산 조봉암의 빨갱이 죄목으로 사형집행, 3.15 부정선거, 4.19 혁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 시켰는가? 4.19혁명 중, 하와이로 도주, 망명, 죽은 후 시체로 귀국, 이분을 대한민국의 국조로 모신다니…….
국민이여, 지금은 눈을 부릅뜨고 역사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때 입니다. 자칫하면, 맥아더도 제2의 국조로 섬겨질까 두려워 집니다. 이승만의 등장으로 이득을 본 집단은 친일파 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1%에 해당하는 귀족으로 그들의 권력과 재력은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역사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쳐, 마치 자신들이 애국의 선봉에 희생자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믿는 기독교에 이런 무리들이 선발대라니……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룟유다의 후예들이란 사실 앞에 어이없어 목 놓아 울분의 기도만 할뿐입니다. 과연, 이들의 행위가 성경적일까요? 의문 입니다
오만과 독선의 독재와 종말
우측사진은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야당참관인을 내쫓고 투표함을 교체하여 개표를 하였는데, 여당당선표가 유권자수보다 많아 표를 줄이는 촌극도 연출됐으며, 부정선거가 극명해 지자 마산서 부정선거 반대운동이 벌어진 후 행방불명된 김주열군의 시신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발견됐다. 서울 종로에선 고려대 학생들을 정치깡패들이 집단으로 폭행하여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주동이 된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름하여 4.19혁명 이다.
오른쪽 사진은 경무대(청와대)에서 이화장 으로 피신하는 이승만 일행의 사진이다. 당시 이 신문엔 4.19 혁명을 데모로 표기 했는데, 이때는 일시적 데모로 간주하고 기사를 올렸지만, 날이 갈수록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성공적 혁명이 되었다. 그것도 자랑스러운, 독재를 몰아낸 민주혁명이었다. 그러나 2008년 현재엔 뉴라이트가 혁명이 아닌 데모라고 비하 시킨다. 꼭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다시 이시대로 회귀 하겠단 것인가?
밑에 사진은 부정선거로 당선된 부통령 리(이)기붕이 그의 장남 육군소위 이강석의 총에, 일가족 모두 사살되고 강석은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어찌 보면 이승만 보다는 자신들의 만행을 일찌감치 깨닫고 선택한 용단이라 하겠다. 리기붕의 가족은 이랬다, 父 이기붕, 妻 박 마리아,長 男 이강석, 次男 이강욱 이었다. 원래 이기붕은 국일관 지배인 출신으로 부통령 재목이 아니었다. 항상, 허약한 체질에 용기보다는 YES MAN의 전형이었지만, 그의妻 박마리아는 놀부妻와 같은 기질의 여인으로 한때, 정계를 시끄럽게 한 그녀는 이승만에게 자신의 長男인 이강석을 養子로 입적시키고 李起鵬 의 출세를 진두지휘 한 여인 이었다.
밑에 사진은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다. 그는 경무대 곽영주에게 발탁되어 반공청년단, 화랑동지회, 등 반공이 들어가는 단체는 모두 연관됐으며, 주로 야당 탄압이 그 주목적이었다. 마치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펼쳤던 폭력테러 집단을, 그대로 계승한 것 같다. 옆의 사진은 경무대를 빠져나와 이화장에서 주위동정을 살피는 이승만이다.
그러나 성난 학생과 국민들은 이동상을 두들겨 부숴 버렸다. 목이 떨어져 땅바닥에 뒹군다. 그런데 뉴라이트에선 다시 세종로 복판에 이 영감탱이 동상을 또 세운단다. 경제도 어려운데 그 돈을 헐벗은 서민들한테 사용 할 것이지, 옆의 사진은 사형직전의 경무대 의 작은 왕 곽영주의 사진이다. 이정재, 임화수, 등 깡패는 모두 사형 시켰다.
그러나 국민이 쫓아낸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망친 후 그곳에서 도 교민들에게 그리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하와이를 택했다.
소본능 이랄까? 온갖 만행을 저질렀어도 하와이 는 그를 대통령 의 발판을 만들어 준 곳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교민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것은 대통령이 된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그리고 기획 없는 통치철학을 통해 동족분열과 정적 제거, 제주 4.3사건, 여순반란 사건, 6.25 동란, 44,5입사건, 3.15부정선거, 12년간 그의 정치적 행태가 말해주듯, 철권통치의 교훈이었다. 정권연장에 급급하여 온갖 해선 안 될, 민주주의 의 역행하는 군주식 독재는 그를 파멸로 이끌었고 종당엔 하와이로 도망쳐 1962년 병속에서 자신의 왕국을 회상하며 1965년 시체가 된 뒤에야 조국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 그의 독재로 혼란에 빠졌던 우리민족과 정치적 후퇴를 생각 안할 수 없다. 더욱이 이분을 국조로 섬기기 위해 임정을 무시하고 법과 역사를 바꾼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다. 각성하길 바란다.
불교 탄압했던 이승만 기념관을 조계사 인근에....불교계 “정부 종교편향 도넘었다” 분노
조계종 중앙신도회 이례적 성명
“조계사 인근 이승만 기념관 건립 큰 모욕”
조계종 중앙신도회는 22일 “윤석열 정부의 도를 넘는 종교편향,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국민통합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던 윤석열 정부에겐 불교는 그 대상이 아니었다. 국무총리 및 장•차관에 이어 군장성에 이르기까지 윤석열 정부에는 불교가 없다”고 강하게 질타했다. 정부의 고위급 인사가 개신교를 비롯한 기독교 출신으로 과하게 채워졌다는 비판을 제기한 것이다.
신도회는 이어 “대통령이 직접 ‘헌법정신은 성경에서 나왔다’고 발언했을 뿐 아니라, 한국 불교를 분열시키고 박해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며 “다른 곳도 아닌 조계종 총무원과 태고종 총무원 청사 그 사이에 건립한다는 건 한국불교에 대한 큰 모욕”이라고 반발했다. 또한 “윤석열 정부는 더 이상의 종교편향과 차별을 멈춰야 한다”며 “종교 편향 정책이 계속된다면 한국불교는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기간 기독교 교세 확장을 위해 불교 내부갈등을 조장했으며 당시 농지개혁 명목으로 불교재산을 빼앗았던 인물로 불교계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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