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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주 4·3의 비극, 목숨 걸고 문학에 담아 알린 문인들 있었다

by 무궁화9719 2022. 9. 14.

제주 4·3의 비극, 목숨 걸고 문학에 담아 알린 문인들 있었다

권영미 기자 입력 2018.04.03. 14:07 수정 2018.04.03. 14:47

 

독재 치하에서 제주4·3 알린 현기영·이산하, 재일조선인작가 김석범
"섣부른 화해보다는 진상 규명 더 필요해"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거듭 말하노니 한국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이산하 장편서사시 ‘한라산’ 중에서)

 

 올해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정부, 시민단체, 종교계 등 각계가 민족의 상처를 위로하고 역사의 비극을 넘어서 화해를 모색하려 하는 등 분주하다. 하지만 한때는 '폭동'으로 불렸다가 제주 4·3항쟁, 4·3사건 등 여전히 제대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이 사건을 제일 먼저 목숨 걸고 일반인들에게 알린 것이 독재정권 하의 문인들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1~2살의 어린아이까지 학살되고, 때로 살기 위해 가까운 친구나 친척을 죽여야 했고, 그 후로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마을에서 살아야 했던 참극 속에서 제주도민들은 침묵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드러내지 않았다 해서 그들 가슴 속의 피맺힌 고통과 억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고하게 2만5000명에서 3만명이 사망한 이 사건의 억울함을 제일 먼저 드러낸 것은 언론이나 학술 등이 아닌 문학작품이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문학작품들© News1 방은영 디자이너

 

◇제주 4·3의 진실 드러낸 '순이삼촌'과 '한라산'

 

제주 4·3의 참상을 가장 먼저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현기영 소설가의 '순이삼촌'(창비)이다. 1978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순이삼촌은 1949년 1월16일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모델로 삼아, 학살 현장에서 살아나온 순이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제주에서는 남녀 구별없이 먼 친척어른을 모두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순이삼촌은 (작품 속에서) 30년전 남편이 공비로 몰리는 바람에 수십명씩 옴팡밭에서 총살당하지만 시체 무더기 속에서 까무러쳐있다가 살아돌아온다.

 

그 난리 통에 어린 두 자녀를 잃고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한 순이삼촌은 자신이 일궈먹던 옴팡밭에서 총살당한 시신들을 치운 후 어린 오누이의 무덤을 만들고 그 밭을 30년간 일구며 산다. 하지만 총소리 환청을 듣는 등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밭에서 약을 먹고 자살한다. 현기영은 4·3사건의 참혹상과 그 후유증을 고발함과 동시에 30여 년 동안이나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했지만 이 작품 때문에 고문당했고 책은 금서가 됐다.

 

이산하 시인은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통해 4·3의 참상뿐 아니라 배경과 원인까지 짚어내려 했다. ‘한라산’은 1987년 3월 사회과학 무크지 녹두서평 창간호에 실린 장편 연작시로, 당시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됐던 제주 4·3사건을 '미 제국주의에 맞선 인민들의 무장투쟁'으로 규정했다. 이 작품으로 인해 무크지 필자들은 대부분 수배됐고 고문당했다. 시인 이산하도 "남한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 사회로 규정하고 무장 폭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도민항쟁으로 미화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4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인 1988년 노태우정권 출범 특사로 풀려나왔다.

 

이 작품은 필사본으로 학생들과 문인들 사이에서 읽히다가 16년만인 2003년 단행본 시집으로 출간됐다. 그러다가 최근 다시 "내용이 너무 강하다"면서 인쇄소가 인쇄를 거부해 삭제한 부분까지 모두 되살린 복원판으로 출판사 노마드에서 출간되었다.

 

◇해외에서는 ‘화산도’출간…자료 부족, 금기 때문에 4·3 문학화 여전히 어려워

 

재일조선인작가인 김석범의 ‘화산도’(보고사)는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인 1948년 2월 말부터 이듬해인 1949년 6월 제주 빨치산들의 무장봉기가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의 해방직후를 다룬 장편대하소설이다. 번역판 원고로 2만2000여장, 총 12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제주도뿐만 아니라 서울과 목포, 오사카와 교토, 도쿄 등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렸다. 빨치산들의 무장투쟁 자금의 유입 경로, 재일동포들의 실상과 일본공산당과의 관계 등도 담았다.

 

그간 한국문학은 '순이삼촌'과 '한라산', 그리고 '화산도' 등을 제외하고 4·3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자료가 많지 않고 미국이 배후라는 점이 '금기'로 작용해 작가들에게도 다루기 힘든 소재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고 문학계는 설명한다.

 

그간 국내에서 4·3관련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1980년대 이후 제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해 4·3 피해자 증언을 채록한 김봉현의 '제주도 피의 투쟁사',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의 4·3논문으로 평가받는 존 메릴의 1980년 하버드대 석사학위 논문 '제주도 반란', 김봉현·이민주 공저의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 등이 해외에서 나왔지만 그나마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출간된 제주4·3사건 관련 문학작품들 © News1 이은주 디자이너

 

최근에는 70주년을 맞아 제주 토박이로 오랫동안 4·3을 시로 표현해온 시인 김수열의 시선집 '꽃 진 자리'(걷는사람), 한국작가회의 소속 90명 시인의 시를 모은 '제주 4·3 70주년 기념 시 모음집'인 '검은 돌 숨비소리'(걷는사람)이 나왔다. 4·3 유격대장 김달삼 얘기를 다룬 강기희 소설 ‘위험한 특종’(달아실)도 최근 출간되었다.

 

하지만 문학계에 따르면 문단 내에서도 중간적 입장의 오성찬 소설가, 제주4·3사건을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으로 보는 현길언 소설가 등 여전히 4·3을 바라보는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

 

한 문단 관계자는 "이는 한국근현대사 속 4·3 사건의 양상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그로 인해 개개인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면서 일각에서 시도하고 있는 '화해와 용서'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한다"고 했다. 이산하 시인 역시 "제주4·3은 피해자와 가해자 가릴 것 없이 개인의 인간성과 인간관계, 그리고 제주 공동체까지 파괴했다"면서 ”용서와 화해에 앞서서 진상규명이 더 필요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ungaungae@news1.kr

 

4·3 운명을 바꾼 세 명의 군인

김형민 입력 2018.04.03. 16:19 수정 2018.04.03. 16:22

 

제주 4·3 당시 9연대장이던 김익렬 중령은 인민유격대 사령관을 만나 협상했다.

하지만 평화를 못마땅해하는 미군정은 그를 해임했다.

끝내 제주도민 수만명이 죽고 말았다.

 

오늘은 네게 참 하기 힘든 얘기를 들려줘야겠구나. 올해는 2018년. 1948년 4월3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 반대를 외치는 제주도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4·3 70주년이다. 무장봉기라고 하지만 무장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어. 구식 일제 소총 27자루, 권총 3정과 죽창이 그 ‘무장’의 전부였으니까. 실제 봉기에 참가한 이들도 수백명에 불과했어. 그나마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한 이들은 소수였고 미군정의 그릇된 행정과 경찰들의 만행에 분노한 제주도민이 대부분이었지.

 

이 사태를 꿰뚫어본 사람이 있었어. 제주도 주둔 9연대장 김익렬 중령. 그는 4·3을 이렇게 파악했어. “이는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악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일어난 폭동이다.”

 

4·3 이전부터 미군정은 육지의 경찰대는 물론이고 좌익이라면 이를 갈아붙이는 북한 출신 월남민으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을 제주도에 투입했고 이들은 가혹한 진압으로 제주도민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었거든. 특히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상상을 넘어섰어. 그들에게 ‘빨갱이’란 곧 악마였고 제주도는 악마의 섬 같은 곳이었단다. 대부분 개신교인이었던 서북청년단원들은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사람의 몸에 죽창을 꽂고 산 채로 불태우는 악행을 태연하게 자행했어. 공산주의의 기역자도 모르는 제주도민이라도 그들의 만행 앞에서는 치를 떨 수밖에 없었지.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1948년 4·3 진압을 위해 5·5 최고수뇌회의 참석차 제주에 온 수뇌부들.맨 오른쪽이 김익렬 중령.

 

미군정은 무장봉기를 즉시 진압하라고 명령하지만 김익렬 중령은 제동을 건다. “극렬분자는 200~300명에 불과한 만큼 화평 선무 귀순 공작을 펴보고 그 뒤에 토벌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실로 대담한 ‘선무 귀순’ 공작을 펼친다. ‘인민유격대’ 사령관이라는 김달삼을 직접 만나기로 한 거야. 1948년 4월28일 오후 1시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최고 지휘관 김익렬은 운전병과 장교 한 사람만 거느리고 인민유격대가 지정한 회담 장소로 향해. 5시간의 밀고 당기는 협의 끝에 그들은 즉각적인 전투 중지, 무장해제 및 투항, 범법자 명단의 자발적 제출(명단 외의 사람은 수사와 처벌 대상에서 제외) 등 파격적인 합의를 끌어냈어. 이 약속의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 김익렬 중령은 또 한번 결단을 내린다. “내 가족을 인질로 삼으시오.” 그러자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은 이렇게 대답한다. “노인을 산중에 머물게 할 수는 없으니 우리 무장대가 감시할 수 있는 민가에 머물도록 하시오.”

 

이 협상이 순조롭게 이뤄졌다면 제주 4·3은 소수 희생자를 낳았던 며칠간의 소요 사태로만 역사에 기록됐을지도 몰라. 공권력에 맞서 일어선 이들일망정 궁극적으로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국군 지휘관과, 무기를 들었을망정 최악의 사태는 피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는 인민유격대 사령관은 제주 바다를 바라보며 술잔을 나눴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평화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좌익들과의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그들을 근절해야 진정한 평화가 온다고 믿는 이들이었지.

 

“제주도 서에서 동으로 휩쓸어버리는 작전”

 

5월1일 오라리(里)라는 마을에 방화가 일어나 민가 10여 채가 불탔어. 경찰은 좌익들의 소행이라고 우겼지만 김익렬 중령 측의 조사 결과 우익 청년단이 경찰의 비호 아래 저지른 짓이었지. 또 봉기에 가담했다가 평화 협상에 따라 마을로 복귀하던 이들이 총격을 받는 일도 벌어졌어. 이것도 경찰과 우익의 소행이었는데, 미군정은 이를 무시했어. 미군정은 김익렬 중령을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장에서 해임하고, 9연대도 11연대에 편입해버려. 이 11연대장으로 새로이 부임한 사람이 박진경 중령이라는 군인이었어. 김익렬과는 달리 박진경 중령은 미군정과 공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은 물론 그들에게 동조하는 이들 모두를 적으로 돌려버리는 사람이었지. 그의 취임 훈시는 이랬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명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군인 특유의 과장된 표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말은 엄청난 살기를 띠고 있었지. 그는 행동으로 자기의 취임사가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했어. “폭도와 구분이 애매하기 때문에” 한라산 중턱의 중산간 지역 주민들을 쓸어 담다시피 체포해버렸으니까. 부임한 지 불과 한 달 열흘(1948년 5월6일~6월18일) 만에 10대와 부녀자 그리고 노인들인 ‘포로’가 무려 6000여 명에 달했다고 해. 제주지구 미군 책임자 브라운 대령에 따르면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휩쓸어버리는 작전”이었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박명림, <제주 4·3 민중항쟁 초기 전개 과정에 관한 고찰>).” 미군정은 박진경에게 대령 계급장을 달아주며 공로를 치하해. 박진경 대령은 제주도 유지들과 거창한 진급 축하연을 벌이고 크게 취해서 부대로 돌아와 잠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그는 깨어나지 못했어. 휘하 3대대장 문상길 중위 등 부하들이 그를 암살해버린 거야.

 

ⓒ제주 주둔 미군고문관 출신 위슬로스키 소장 1948년 6월18일 11연대 본부가 설치된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박진경 대령 고별식.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이들은 남로당, 즉 남조선노동당의 조직원들로 알려져 있어. 하지만 주범이라 할 문상길 중위는 독실한 개신교인이었어. 즉 최소한 유물론을 받아들인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얘기지.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국민을 적으로 몰고 그 삶의 터전을 초토화해버린 공로로 승진한 상관을 용서하지 못했어. 그의 최후진술을 들어보자.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나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문상길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다. 대한민국 성립 후 사형 1호였어.

 

4·3의 폭풍이 몰아치던 제주도에 있었던 세 군인의 삶과 죽음을 곱씹어보자. 그들의 행적은 이후 우리나라가 맞닥뜨려야 했던 상황과 얼추 비슷해. 해방 공간을 장악했던 것은 결국 우리 편 아니면 죽여야 할 적이라는 극단적 논리였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불사할 수 있고 그에 반하는 이들을 악마로 몰아 전멸시킬 수도 있다고 살기등등했던 세력과, 그 반대편에서 그들을 타도하자고 부르짖던 세력이 자석의 양극처럼 버티고서 있었어.

 

엉거주춤 주변에 널려 있던 보통 사람들은 자력에 휩쓸리는 쇳가루처럼 양극 주변으로 빨려 들어갔지. 김익렬처럼 양극의 중간에서 조율해보려던 이들은 설 곳을 잃었고 끝내 박진경과 문상길처럼 죽고 죽이는 참극으로 치달았단다. 제주도에서만 수만명이 죽어갔고, 한반도는 전면전이라는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게 됐던 거지. 우리가 4·3을 제주도에 국한된 사건으로 기억해서는 안 되는 이유야. 우리가 4·3을 처절하고도 철저하게 돌아봐야 하는 까닭이란다.

 

이에 더하여 가장 중요한 것. 1948년 4·3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이 돌보고 지켜야 할 국민들을 팽개치고 학살했던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해야 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근간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과거와 마주하고 머리 숙이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야.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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