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외신기자가 본 ‘광주’ “동족을 총칼로...
2차대전보다 충격적이었다

독일 외신기자가 본 ‘광주’ “동족을 총칼로...
2차대전보다 충격적이었다
두동강 난 5.18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식 /연합뉴스
“동족을 총칼로… 2차대전보다 충격적이었다”
독일 외신기자가 본 ‘광주’
직접 목격한 관만 70여개…군 “2명 사살” 발표에 실소
“시민군 미국과 대화 원해…‘희생으로 민주화’ 확인”
힐셔 전 특파원은 자신이 취재한 광주 기사가 실린 1980년 5월28일치 <쉬드도이체 차이퉁> 신문을 아직도 고히 간직하고 있다. 광주를 취재하고 5월27일 서울로 올라온 그는 정보기관 감청 을 우려해, <로이터통신>에서 일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전화로 기사를 불러 송고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13일 뮌헨의 올림픽 경기장앞 아파트에서 만난 게브하르트 힐셔(75) 일간 <쉬드도이체 차이퉁> 전 극동특파원은 “만 30년 전 광주에서 목격했던 장면은 2차대전 막바지인 9살 때 독일의 어느 기차역 앞에서 본 어린이들의 주검들처럼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을 통해 광주에 관한 기사를 쓰던 힐셔 특파원이 광주를 찾은 것은 군의 강제진압 바로 전날인 1980년 5월26일이었다. 힐셔는 25일 부산을 거쳐 화순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시민군이 장악한 ‘해방된 광주’의 마지막날을 취재했다. 그러나 그날이 마지막날인 줄은 몰랐다.
- 1980년 5월 광주를 가게 된 동기와 취재의 어려움은 없었나?
= 일본 도쿄에서 5월17일부터 계속해서 광주에 대한 기사를 <쉬드도이체 차이퉁>에 송고했다. 당시 도쿄는 서울보다 훨씬 빨리 사실에 가까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과 통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매일매일 기사를 송고했다.
21일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이후 독일 본사와 한국취재를 의논했고, 5월 25일(일요일)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화순으로 가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광주에는 26일 도착했다. 광주에 들어가는 너릿재 길목에서 군인들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독일여권에 직업은 써있지 않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지 않고, 한국말로 “독일사람입니다“고 말했더니, 군인들이 “독일“이란 말을 알아듣고 나를 독일 신부쯤으로 생각해 통과시켜준 것 같다. (힐셔는 선천적으로 오른손이 없다. 뱃속에서 탯줄이 오른손목에 감겨 잘려나간 채 태어났다. “아마 불구 손을 가진 사람이 기자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서 쉽게 통과시킨 것 같다며 인생에서 불구가 항상 손해는 아니기”라며 호기롭게 웃었다.)
검문 외에는 어려움은 없었다. 광주 가는 길에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유감스럽게도 그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기자 신분을 밝히고, 통역을 부탁했다. 그분은 하루종일 통역을 해주시면서 취재를 도와주었다.
-5월 광주에서 겪은 일 가운데 특별히 기억되는 일은?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기억나는 사람들은?
= 도청 앞에는 아마 군인들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군차량이 있었다. 도청주변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질서정연했고, 조용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갈 때 1차 계엄군 진입시도 때 죽은 신원미확인의 주검을 담은 13개의 나무관이 있었다. 도청 맞은편의 상무관에 는 60개 관이 흰색천이나 태극기에 뒤덮여 있었다.
상무관에서 본 광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젊은이가 관 앞에 주저앉아 “여기 내 동생이 죽어 있다. 어떻게 한국 군인이 같은 한국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라고 비통하게 절규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한 3개의 관(부모와 7살 소년)이 있었다. 가족이 몰살당했기에 울어줄 사람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꽃만 조용히 놓여 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몇명의 여고생들도 한 반 친구의 관 앞에서 목이 메여 울고 있었다. 한 여고생이 “17살의 앳된 우리 친구(박금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고 절규하며 애국가를 불렀다. 당시 언론들은 광주시민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라고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내 기사에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는 장면을 묘사했다. 시민들의 시위와 항거가 북한의 사주나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질서를 지키려 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열망한다는 느낌을 취재 내내 받았기 때문에 나름의 방법으로 기사에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9살 때 2차대전 막바지를 경험했는데, 그때 독일 한 도시의 기차역에 죽어 널브러져 어린이를 포함한 주검들을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과 함께 광주에서 그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부상자 취재를 위해 조선대학 병원으로 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처음에는 외국인 기자가 취재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한국인끼리 싸우는 것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광주 실정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 이렇게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폭력적 상황을 막는 길이라고 동행했던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의사와 간호사를 설득했다. 결국, 한 의사가 취재를 허락해서 중환자들이 있는 병동을 돌아볼 수 있었다. 병원에는 300명 정도의 환자가 있었다. 총이나 총검으로 눈, 가슴, 배 등에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환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신장 밑부분(독일식 표현으로 성기 부분)을 다친 여성환자도 있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참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시민위원회를 찾아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시민위원회 대변인와 인터뷰를 했다. (힐셔는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고, 졸업생 정도로 보인다고 했다. ‘윤상원이 아닌가’라고 묻는 질문에, 확실히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인터뷰 도중 인상적인 점은 두 가지다. 그 때까지 161명(5월 26일 당시)의 죽음을 확인했다며, 이렇게 많은 희생이 있는데 전두환의 신군부가 물러날 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대변인은 1달간 버틸 식량은 충분하다며 끝까지 가겠다고 결의를 보였다.
= 26일 자정 가까운 시각 광주를 빠져나왔다. 27일 아침 화순의 숙박집에서 라디오방송을 통해 계엄군이 다시 진입했고, 도청에 있던 모든 시민군이 사살되거나 잡혔다는 것을 들었다. 나와 인터뷰를 했던 대변인도 죽은 것이다.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부탁받은 대로 미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려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내가 서울에 가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나와 인터뷰를 마친 몇 시간 뒤에 계엄군은 2차 진압에 들어갔고, 어떤 시도도 도움도 될 수 없도록 모든 것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계엄군 1차 진입 때 161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광주에서 바로 몇 시간 전에 보고듣고 나왔는데, 그 몇 시간 후 아침(27일) 화순 숙박집에 들은 라디오에선 두명이 죽었다는 공식발표를 들어야 했다. 새벽 2~5시경 군경이 2차로 진입해 광주 시내를 다시 접수했고, 200명 이상의 학생들이 투항했고 투항을 거부한 2명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당시 라디오 주변에는 많은 동네사람들이 있어서 함께 들었다. 그 중 한 명이 “2명만 사살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다. 분명히 훨씬 더 많을 것이다“며 비통해 했다.
- 당시 광주에 대한 기억과 인상은?
= 26일 내가 본 광주는 아주 조용했고 질서 정연했다. 상점은 셔터를 내렸지만, 상점 앞에 야채나 필수품을 내놓고 팔고 있었다. 자동차는 다니지 않았고 시민들이 길거리에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경찰서, 전남매일신문, 방송국이 불탄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대로 언론보도를 하지 않은, 혹은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이에 대해 신군부와 언론에서는 공산주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일으킨 것이며, 광주는 무법자의 도시라고 언론플레이를 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 30년이 지난 지금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재평가됐고 희생자들은 국립묘역에 안장됐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외신기자로서 80년 광주를 어떻게 평가하나?
= 내가 보는 광주는 일반시민이 민주화실현을 위해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민주화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게 된 역사적 분기점이다. 즉, 일반시민들이 폭력적인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을 경험하면서, 시민들이 더이상 군사정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대중들의 집단행동과 참여로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광주에서 보았던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9살 때 2차대전 참상을 본 이후 처음 본 폭력적으로 잔인한 상황이다. 광주는 이런 점에서 내게 전쟁과 같았다. 단지 같은 동족이 같은 동족을 총칼로 살해했다는 것과, 취재와 인터뷰중 보았던 아주 용감한 시민들이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었다. 광주를 통해 느낀 것은 이런 희생 없이 결코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역사적 경험이었다. 1987년 대만 민주화시위를 취재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미국 “5·18계엄 2시간전 통보 받았다” 시사 뉴스
미국, 5·18 당시 군투입 반대 안 해 YTN 뉴스
▲ 1989년 광주특위에 보낸 미국 답변서 내용을 보도한 한겨레 신문 기사
광주 시민들은 미국이 설마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를 옹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광주 시민들은 미국을 통한 중재 노력을 시도했습니다.
“학생지도자들이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휴전을 요청했다.” (5월25일 뉴욕타임즈 보도)
그러나 미국은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광주 시민들의 휴전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글라이스틴은 앞서 말했듯이 신군부와 벌써 광주를 진압하기 위해 작전을 승인하고 군대 이동에 관여했기에, 휴전할 마음도 시민을 보호할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지난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신군부가 군대를 투입하는 데 대해 미국 정부는 반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비밀 해제된 미국 국무부 외교전문에서 드러났습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5월9일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면담에서 "한국 정부의 법질서 유지 필요성을 이해하며, 미국은 군대를 투입하는 비상계획 수립을 막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 실장과의 면담에 앞서 같은 날 이뤄진 전두환 보안사령관과의 면담에서도 이같은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최광수 실장은 광주 항쟁 진압 후인 6월25일 글라이스틴 대사를 다시 만나 전두환 사령관이 계엄령 하에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할 계획이며, 대대적인 정치적 숙정을 단행할 계획이라고 사전 통보했습니다.이에 대해 글라이스틴 대사는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돼,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 조치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진압 훈련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과격진압했다. 2011년 5월에는 5·18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권고되었다
1979년 10.26 사태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며 언론을 조종·통제했다. 같은 해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국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하며 집권을 준비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참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신현확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 논의, 개헌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해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의 재야, 야당 인사를 감금하고 군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5월 18일 아침부터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김대중∙김영삼 석방과 신현확∙전두환 퇴진을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 전두환∙노태우 등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는 부마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신군부는 1980년 초부터 전 군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군대를 투입해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쳤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운동권과 무관한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다. 이 날 저녁 광주광역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했으며, 무력으로 도청을 점령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그 결과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이고, 민주정의당과 연관성이 있는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여전히 높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보도를 의무화하도록 해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했는데, 당시 국내 언론이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보도를 쏟아내자 학생운동권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비롯,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생한 각종 민주화 혹은 반미 집회와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신군부 인사를 주축으로 한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 1996년 검찰의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97년 대법원이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전두환 등)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대법원은 전두환·정호용·이희성·황영시·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학생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폭증했고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 일부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 직접 항의를 가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
계엄군학살
5월 21일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 앞에서 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21일 오전 시민 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정부는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자유 민주화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를 방화했다.
광주 시민의 항쟁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이 결성됐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세아자동차에서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이 발표했다.
광주외곽봉쇄작전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을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광주 시민의 자치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준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던 이 기간에 광주 시민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평화집회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 구호는 광주 시민들에 의해 많이 불렀고,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광주 재진입 작전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어졌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피해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29주년을 맞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1994년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5.18의 핵심적인 진상은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안장됐다. (광주광역시가 발표한 통계는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985년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0년 당시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5.18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다
연행자 고문 피해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 부설 ‘고문 정치폭력 피해자를 돕는 모임’은 1980년 5.18 당시 연행 또는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박탈, 복종강요, 지각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해 폭행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된 광주 시민은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계엄군은“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들을 자행했다.
연행자들은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미 짜인 각본에 따라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신군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한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으로부터 폭동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정동년 5.18 30주년 기념행사위원장∙고 홍남순 변호사∙고 조아라 광주 YWCA 회장∙고 명노근 전남대 교수∙송기숙 전 전남대교수 등의 민주인사들은 상무대 지하 조사실에서 보안대 조사관들의 조사를 받았다. 정동년은 “보안대 조사관들이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하면서 무릎 사이에 곤봉을 끼우고 밟고 군홧발로 짓이기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그는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처럼 기술적인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대 조사관들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고문을 했다”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
영향과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을 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해 재고됐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 5공 청문회를 거치고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자유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또한, 계엄군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또한, 이 일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광주항쟁은 이후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생한 각종 반미시위 및 반미주의 확산에도 일부 기여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지역 대학생들에 의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약칭 부미방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구호 중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라는 조항이 제1항 서두에 삽입돼 있다.이후 미국의 광주학살 책임과 전두환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대학생 및 고등학생, 일반 시민들에 의한 반미 시위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됐다. 강원대생 성조기 공개 소각사건(1982년 4월), 광주미문화원 2차 방화사건(1982년 11월),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사건(1985년),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사건(1983년 9월), 부산 미국문화원 투석사건(1985년 4월) 등의 원인이 됐다.
2000년 5월 15일에는 미국의 광주학살 을 규탄하는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 등 서울의 여러 대학교 학생 100여 명이 오전 11시경부터 서울 미국 대사관 앞으로 몰려가 항의 집회를 벌렸다. 그들은 미국이 2000년 6월에 열리는 남북최고위급회담에 간섭하고 있으며, 한국전쟁과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비난하는 프랑카드를 흔들면서 미국 대사관에 기습을 시도, 반미구호를 외쳤다
“동족을 총칼로…2차대전보다 충격적이었다”
한겨레 | 입력 2010.05.18 19:20 | 수정 2010.05.18 20:00
[한겨레] 독일 외신기자가 본 '광주'직접 목격한 관만 70여개…군 "2명 사살" 발표에 실소"시민군 미국과 대화 원해…'희생으로 민주화' 확인""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13일 뮌헨의 올림픽 경기장앞 아파트에서 만난 게브하르트 힐셔(75) 일간 < 쉬드도이체 차이퉁 > 전 극동특파원은 "만 30년 전 광주에서 목격했던 장면은 2차대전 막바지인 9살 때 독일의 어느 기차역 앞에서 본 어린이들의 주검들처럼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을 통해 광주에 관한 기사를 쓰던 힐셔 특파원이 광주를 찾은 것은 군의 강제진압 바로 전날인 1980년 5월26일이었다. 힐셔는 25일 부산을 거쳐 화순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시민군이 장악한 '해방된 광주'의 마지막날을 취재했다. 그러나 그날이 마지막날인 줄은 몰랐다.
- 1980년 5월 광주를 가게 된 동기와 취재의 어려움은 없었나?
= 일본 도쿄에서 5월17일부터 계속해서 광주에 대한 기사를 < 쉬드도이체 차이퉁 > 에 송고했다. 당시 도쿄는 서울보다 훨씬 빨리 사실에 가까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과 통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매일매일 기사를 송고했다.
21일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이후 독일 본사와 한국취재를 의논했고, 5월 25일(일요일)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화순으로 가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광주에는 26일 도착했다. 광주에 들어가는 너릿재 길목에서 군인들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독일여권에 직업은 써있지 않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지 않고, 한국말로 "독일사람입니다"고 말했더니, 군인들이 "독일"이란 말을 알아듣고 나를 독일 신부쯤으로 생각해 통과시켜준 것 같다. (힐셔는 선천적으로 오른손이 없다. 뱃속에서 탯줄이 오른손목에 감겨 잘려나간 채 태어났다. "아마 불구 손을 가진 사람이 기자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서 쉽게 통과시킨 것 같다며 인생에서 불구가 항상 손해는 아니기"라며 호기롭게 웃었다.)
검문 외에는 어려움은 없었다. 광주 가는 길에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유감스럽게도 그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기자 신분을 밝히고, 통역을 부탁했다. 그분은 하루종일 통역을 해주시면서 취재를 도와주었다.
- 5월 광주에서 겪은 일 가운데 특별히 기억되는 일은?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기억나는 사람들은?
= 도청 앞에는 아마 군인들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군차량이 있었다. 도청주변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질서정연했고, 조용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갈 때 1차 계엄군 진입시도 때 죽은 신원미확인의 주검을 담은 13개의 나무관이 있었다. 도청 맞은편의 상무관에 는 60개 관이 흰색천이나 태극기에 뒤덮여 있었다.
상무관에서 본 광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젊은이가 관 앞에 주저앉아 "여기 내 동생이 죽어 있다. 어떻게 한국 군인이 같은 한국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라고 비통하게 절규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한 3개의 관(부모와 7살 소년)이 있었다. 가족이 몰살당했기에 울어줄 사람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꽃만 조용히 놓여 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몇명의 여고생들도 한 반 친구의 관 앞에서 목이 메여 울고 있었다. 한 여고생이 "17살의 앳된 우리 친구(박금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고 절규하며 애국가를 불렀다. 당시 언론들은 광주시민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라고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내 기사에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는 장면을 묘사했다. 시민들의 시위와 항거가 북한의 사주나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질서를 지키려 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열망한다는 느낌을 취재 내내 받았기 때문에 나름의 방법으로 기사에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9살 때 2차대전 막바지를 경험했는데, 그때 독일 한 도시의 기차역에 죽어 널브러져 어린이를 포함한 주검들을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과 함께 광주에서 그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부상자 취재를 위해 조선대학 병원으로 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처음에는 외국인 기자가 취재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한국인끼리 싸우는 것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광주 실정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 이렇게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폭력적 상황을 막는 길이라고 동행했던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의사와 간호사를 설득했다. 결국, 한 의사가 취재를 허락해서 중환자들이 있는 병동을 돌아볼 수 있었다. 병원에는 300명 정도의 환자가 있었다. 총이나 총검으로 눈, 가슴, 배 등에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환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신장 밑부분(독일식 표현으로 성기 부분)을 다친 여성환자도 있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참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시민위원회를 찾아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시민위원회 대변인와 인터뷰를 했다. (힐셔는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고, 졸업생 정도로 보인다고 했다. '윤상원이 아닌가'라고 묻는 질문에, 확실히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인터뷰 도중 인상적인 점은 두 가지다. 그 때까지 161명(5월 26일 당시)의 죽음을 확인했다며, 이렇게 많은 희생이 있는데 전두환의 신군부가 물러날 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대변인은 1달간 버틸 식량은 충분하다며 끝까지 가겠다고 결의를 보였다.
두번째로는 현재 광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모색을 위해 미국과의 대화를 가능한 빠른 시기에 원한다고 한 것이다. 미국과의 대화를 하는 것 외에 광주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해결방법은 없다며 기자인 내가 서울로 가게 되면 이런 시민군의 의사를 미국 대사관 측에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런 시민군의 입장은 내게 놀라웠다. 한편으론 당시 시민군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군들이 어떻게 군인과의 대치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시민군의 부탁대로 미 대사관과 접촉했나?
= 26일 자정 가까운 시각 광주를 빠져나왔다. 27일 아침 화순의 숙박집에서 라디오방송을 통해 계엄군이 다시 진입했고, 도청에 있던 모든 시민군이 사살되거나 잡혔다는 것을 들었다. 나와 인터뷰를 했던 대변인도 죽은 것이다.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부탁받은 대로 미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려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내가 서울에 가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나와 인터뷰를 마친 몇 시간 뒤에 계엄군은 2차 진압에 들어갔고, 어떤 시도도 도움도 될 수 없도록 모든 것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계엄군 1차 진입 때 161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광주에서 바로 몇 시간 전에 보고듣고 나왔는데, 그 몇 시간 후 아침(27일) 화순 숙박집에 들은 라디오에선 두명이 죽었다는 공식발표를 들어야 햤다. 새벽 2~5시경 군경이 2차로 진입해 광주 시내를 다시 접수했고, 200명 이상의 학생들이 투항했고 투항을 거부한 2명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당시 라디오 주변에는 많은 동네사람들이 있어서 함께 들었다. 그 중 한 명이 "2명만 사살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다. 분명히 훨씬 더 많을 것이다"며 비통해 했다.
- 광주항쟁 이후 신군부는 디제이등 재야 인사 20여 명에 대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항쟁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해 디제이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디제이와 광주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 김대중의 체포로 인해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이런 맥락에서 광주 민중항쟁의 여러 계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주 민중항쟁은 궁극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 주동이 된 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에 대한 항거이고, 민주화 실현을 위한 민의의 분출이다. 물론 광주와 김대중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렇다고 김대중 체포만으로 광주민중항쟁의 원인을 찾는 것은 너무 협소한 시각이라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북한 공격시 투입되기로 한 공수부대가 같은 국민인 학생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시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광범위한 참여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1967년 이후 한국을 40여차례 방문했고, 1971년 대선 때도 취재했다. 김대중이 전라도민의 많은 지지를 받은 이유는 물론 고향인 점도 있지만, 그의 농민정책이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던 것 같다. 1971년 이후 한국의 정당 대표는 서울과 경상도에서만 계속 나왔다. 내가 보기에 이중양곡수매제(이중곡가제)를 주장한 김대중은 지방 특히 농촌의 지지를 크게 받았다. 그때까지 어떤 정당지도자도 김대중과 같은 농민정책을 제시하지 않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농민들이 많았던 전라도 지방에서 김대중은 당연히 환영받는 정치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당시 나한테는 흥미로워 1971년 대통령선거유세를 취재했다. 그때 김대중씨에 대한 농민층의 열렬한 지지를 직접 확인했다. 디제이와는 이후로도 계속 친분관계가 유지돼, 일본 시절은 물론 동교동 시절도 집을 방문해서 조찬을 함께하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는 독일에 있어서 문상하지 못했다.
- 당시 광주에 대한 기억과 인상은?
= 26일 내가 본 광주는 아주 조용했고 질서 정연했다. 상점은 셔터를 내렸지만, 상점 앞에 야채나 필수품을 내놓고 팔고 있었다. 자동차는 다니지 않았고 시민들이 길거리에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경찰서, 전남매일신문, 방송국이 불탄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대로 언론보도를 하지 않은, 혹은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이에 대해 신군부와 언론에서는 공산주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일으킨 것이며, 광주는 무법자의 도시라고 언론플레이를 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 30년이 지난 지금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재평가됐고 희생자들은 국립묘역에 안장됐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외신기자로서 80년 광주를 어떻게 평가하나?
= 내가 보는 광주는 일반시민이 민주화실현을 위해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민주화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게 된 역사적 분기점이다. 즉, 일반시민들이 폭력적인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을 경험하면서, 시민들이 더이상 군사정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대중들의 집단행동과 참여로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광주에서 보았던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9살 때 2차대전 참상을 본 이후 처음 본 폭력적으로 잔인한 상황이다. 광주는 이런 점에서 내게 전쟁과 같았다. 단지 같은 동족이 같은 동족을 총칼로 살해했다는 것과, 취재와 인터뷰중 보았던 아주 용감한 시민들이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었다. 광주를 통해 느낀 것은 이런 희생 없이 결코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역사적 경험이었다. 1987년 대만 민주화시위를 취재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 기사 송고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
= 27일 서울로 올라와서, < 로이터 통신 > 의 친구를 찾아 전화로 독일 신문사에 기사를 송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호텔 같은 곳에서 전화연결은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 친구가 다행히 아무것도 묻지 않고 회사규정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전화를 사용하게 해 주었다. 기사는 < 쉬드도이체차이퉁 > 28일자에 실렸다.
- 기자생활을 은퇴한 이후 근황은?
= 2000년 퇴직한 후, 요코하마의 한 대학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강의를 했고,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에서 2005년까지 강제노동과 교과서문제에 대한 심포지엄을 미국, 타이, 일본, 한국의 관계자들과 함께 열었다. 요즘은 우리 가족사에 대한 취재와 글을 쓰고 있다.
- 특파원생활을 시작한 이후 인생의 절반을 일본에서 거주했다. 지난 40년간 한국의 정치 경제적 변화를 지켜본 소감은?
= 한국은 어려운 역사적 시련을 이겨내고 환상적으로 정치·경제적 발전을 이뤘다. 한국의 생활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됐고, 시민의식도 성장했다. 다만,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이 갈라져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에서 인생의 절반을 지냈지만, 한국은 내게 많은 친구가 있고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 가슴에 남는 특별한 나라이다.
** 힐셔는 1935년 동프러시아 틸리트 출생으로 1971년 2000년까지 한국, 일본, 대만을 담당하는 < 쉬드도이체 차이퉁 > 의 극동 특파원으로 일본 도쿄에서 근무했다. < 쉬드도이체 차이퉁 > 은 뮌헨에 본사를 둔 독일의 대표적 좌파성향 전국일간지이다. 1967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래 2007년 한국 정부 초청으로 마지막 방문하기까지 40여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 38번 찾은 한국 > 등 한국 관련 저서도 출간했다.
뮌헨/글·사진 한귀용 통신원 ariguiyo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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