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이어 두 번째 국가보존묘지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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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의 묘역에 대한 국가보존묘지 지정은 이번이 두 번째로 지난 2009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된 바 있다.
이번 국가보존묘지 지정은 노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 등 유족 대표의 신청을 복지부가 받아들이며 이뤄졌다. 국가보존묘지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34조에 의해 국가장·사회장 등으로 국민의 추모 대상이 되는 사람의 묘지 또는 분묘 등을 대상으로 한다.
복지부는 국가장으로 노 전 대통령의 장례가 이뤄진 점에 기반해 파주시와 경기도의 신청 의견, 법무부 등 관계부처 의견, 관계 전문가 자문, 현장 확인 등 종합적인 검토를 거쳐 국가보존묘지 지정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12·12 쿠데타 주도·직선제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종합)
송고시간2021-10-26 15:28
이유미 기자기자 페이지
'육사 동기' 전두환 이은 '5공 2인자'…10·26 박정희 기일에 떠나
3金 누르고 87년 대통령 당선…'12·12, 5·18 단죄·비자금 조성' 옥고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서울=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온 노태우 씨는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의료진의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2021.10.26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이준서 이유미 김잔디 기자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향년 89세.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온 노 전 대통령은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의료진의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이날 오후 1시 40분께 삶을 마감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이후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요양해왔다.
지병으로 희귀병인 소뇌 위축증과 천식까지 더해져 투병 생활을 하면서 공개석상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 장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지난 4월 노 전 대통령이 호흡곤란 증상으로 고비를 겪은 뒤 SNS 글을 통해 "소뇌 위축증이란 희귀병인데 대뇌는 지장이 없어서 의식과 사고는 있다"며 "이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적은 바 있다. 병마와 싸우던 고인은 우연의 일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1979년 10월 26일)과 같은 날 세상을 떠나게 됐다.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현 대구 동구 신용동)에서 면 서기였던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안사령관, 체육부·내무부 장관, 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은 육군 9사단장이던 1979년 12월12일 육사 11기 동기생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다. 쿠데타 성공으로 신군부의 2인자로 떠오른 노 전 대통령은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친 뒤 대장으로 예편, 정무2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어 초대 체육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민정당 대표를 거치면서 군인 이미지를 탈색하고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5공화국 말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을 정권 후계자로 부상, 1987년 6월10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치러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됐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성과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져 야당으로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부상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야권 후보 분열에 따른 '1노(盧)3김(金)' 구도의 반사 이익을 보면서 같은 해 연말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보통사람 노태우'를 슬로건으로 내건 노 전 대통령은 직선 대통령에 선출된 뒤 민주주의 정착과 외교적 지위 향상, 토지공개념 도입 등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인은 1987년 6월 민정당 대선후보 선출 이후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 조치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산하자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이른바 '1987년 체제' 탄생을 가져왔다.
특히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등을 담은 6·29 선언을 통해 신군부의 공포 이미지를 희석하고 '민주주의를 수용한 온건 군부' 이미지를 구축, 위기에 처했던 군사정권을 안정시키고 대선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다.
안으로는 국민통합, 밖으론 북방외교와 남북관계 개선을 기치로 내건 노 전 대통령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88 서울올림픽 개최, 옛 소련·중국과의 공식 수교 등 성과를 내며 외교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퇴임 후 12·12 주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수감됐고 법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천600억여 원을 선고받는 등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한 면을 장식했다.
1997년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지만, 오랫동안 추징금 미납 논란에 시달리다가 지난 2013년 9월에야 뒤늦게 완납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소영, 아들 재헌이 있다. 소영 씨와 이혼 소송 중인 최태원 SK 그룹 회장이 사위이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lkw777@yna.co.kr
전두환 친구에서 후계자까지…‘2인자’ 노태우의 일생
등록 :2021-10-26 15:08수정 :2021-10-26 16:48
노현웅 기자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이었던 노태우가 26일 사망했다. 기관지 질환과 소뇌 위축증 탓에 대외 활동을 삼가며 투병 생활을 이어간 지 10여년 만이다. 향년 89. 노태우는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하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에 관여하면서 신군부의 핵심으로 급부상해, 전두환의 후계자로서 대통령까지 올랐다.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시절 6·29 선언과 대통령 재임 시절 북방·통일정책, 5공 청문회 개최 등은 긍정 평가할 부분이 있지만, 군사반란과 민중학살의 주범이기도 하다. 퇴임 뒤 비자금으로 옥살이를 하고 서훈도 박탈되는 등 말로는 편치 않았다.
전두환 잇는 ‘2인자’로 승승장구
노태우는 1932년 8월14일 팔공산 근처인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현 대구시 동구 신용동)에서 노병수와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통사고로 면서기였던 아버지를 일찍 잃은 노태우는 숙부(노병상) 밑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구 공산국민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를 졸업한 뒤엔 육군사관학교(11기)에 진학해 그곳에서 동기인 전두환, 정호용을 만났다. 1955년 2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미국에 유학해 특수전학교 대인심리전 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육사 11기가 주축인 ‘하나회’에 가입했다. 이후 군사정보대 영어번역 장교, 방첩부대 정보장교, 방첩부 방첩과장을 거쳤고, 육군본부에서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했다. 이어 수도사단 대대장, 보병 연대장, 공수특전여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노태우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자 전두환(당시 국군보안사령관)과 함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 없이 체포하는 12·12 군사쿠데타에 성공하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12·12 이튿날 9사단장에서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노태우는 1980년 5월17일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군부의 정치 개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그해 8월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자 노태우는 국군보안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듬해 7월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고 민정당에 입당했다. 이어 제2정무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하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민정당 대표에 임명되는 등 ‘2인자’로서 승승장구했다.
‘6·29 선언’ 뒤 대통령 당선…‘북방외교’ 성과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에 반발해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6월 항쟁’으로 분출하자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된 ‘6·29 선언’을 발표했다. 6·29선언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지만, 국민 저항으로 정권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태우로서는 ‘2인자’ 이미지를 씻고, 5공 정권과 차별화하면서 대통령 후보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렸으나, 이마저도 전두환의 ‘후계자 관리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태우는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 “보통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출마해 36.6%의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28%·통일민주당)과 김대중(27%·평화민주당)으로 양김이 분열된 구도에서 거둔 승리였다.
노태우는 대통령 당선 직후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성적표를 받았고, ‘5공 청산’이라는 거센 요구에 직면해 11월 5공 청문회를 열게 된다. 전두환은 당시 국회에 나와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친다”며 재산의 사회 헌납을 발표하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 5·18 광주민중항쟁 때의 폭력적 진압과 일해재단 비자금 모금, 언론통폐합 등 ‘5공 비리’가 상당 부분 드러나긴 했지만, 5·18 당시 발포책임자를 밝혀내지 못하는 등 한계도 뚜렷했다. 노태우는 1989년 12월31일 전두환의 국회 답변을 끝으로 ‘5공 청산 종결’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1990년 1월 통합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의 ‘3당 합당’을 이끌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대외적으로 그는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집중했다. 1989년 2월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최초로 헝가리와 국교를 튼 뒤, 같은 해 폴란드(11월), 유고슬라비아(12월) 등 동구권과 수교를 넓혔다. 이어 1990년 9월에는 소련과,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각각 수교를 맺었다. 이런 활발한 북방정책은 1980년대 중반기 이후 진행된 소련의 개방과 동구권의 몰락, 미국의 세계전략 등 ‘외부환경’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노태우는 또 △1988년 7·7 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1990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등 통일정책에서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북방·통일정책은 소련 등 북한 우방과의 수교를 통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남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는 게 중평이다. 노태우는 북방정책을 쓰면서도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민간교류단체들을 이적·용공단체로 탄압했다. 또 국민 의견을 배제하고 박철언에 의존한 비밀외교였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노태우는 수도권 5개 새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KTX),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등 기반시설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전국민 의료보험도 1989년부터 실시됐다. 그러나 노태우 집권기에는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폭등하고 정경유착이 심화됐으며, 수서·한보 등 대형 비리 사건들도 많았다. 수동적이고 자기 중심 없는 행동으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후계자로 박철언을 염두에 뒀으나, 민주계 김영삼의 반발로 성사시키지 못하고 당정 갈등을 빚다가 19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태우는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3천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퇴임 뒤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오랜 투병 끝 타계
노태우가 김영삼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준 지 2년8개월 만인 1995년 10월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은행 잔고조회표를 흔들면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촉발됐다. 당시 신한은행 이사가 서소문지점장 재직 때 300억원이 입금된 차명계좌를 개설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하고, 노태우의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씨가 검찰에 자진 출석해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통치자금”이라고 실토하면서 수사에 속도가 붙었다. 파장이 커지자 노태우는 그해 10월27일 “재임 중 약 5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비자금 실체를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노태우를 소환조사하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총수 36명을 불러 조사했다. 노태우는 구속됐고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중항쟁 진압,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1997년 4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원이 확정됐다.
그해 12월18일 15대 대통령 선거 직후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전두환과 함께 석방됐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만료를 2개월 남긴 시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6년 3월 정부는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관련자 176명의 서훈과 훈장을 모두 박탈했는데, 노태우는 이때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 각종 서훈을 박탈당했다.
노태우는 천식 등 지병이 악화돼 10여년 이상 대외 노출을 삼가며 오랜 투병 생활을 했다. 2011년에는 기관지에서 한방 침이 발견되기도 했고 올해 4월9일에는 호흡곤란을 겪어 119구급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결국 구순이 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16680.html?_fr=mt1#csidx47903caa3aac0fc9846f6e5ab8e38fc
[노태우 별세] 아버지 대신 5·18 사죄한 아들..손녀는 해군 자원입대
김일창 기자 입력 2021. 10. 26. 15:13 수정 2021. 10. 26. 17:52
노 전 대통령, 1남1녀..아들 재헌씨, 매년 광주 찾아 5·18 영령에 사죄
딸 소영씨, SNS서 간간이 근황 알려..손녀 민정씨, 군전역후 회사 근무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지병 악화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대통령기록관 제공)
2021.10.26/뉴스1
(서울=뉴스1) 김일창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지병 악화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9세.
1979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차별 진압하는 데 개입했다. 지난 1995년 모교 경북고 동창모임에서는 "광주사태 별것 아니다"라고 말했다가 국민 지탄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의 과거 언행을 사죄한 사람은 그의 아들 재헌씨다. 두 전직 대통령의 직계가족 중 5·18민주묘지를 찾아 사죄한 사람은 재헌씨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변호사'인 재헌씨는 지난 2019년 8월23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무릎을 꿇었다. 방명록에는 '삼가 옷깃을 여기며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분들 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지난해 5월29일에는 예고 없이 광주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오월어머니집을 찾았다.
재헌씨는 "작년에 다시 오겠다고 했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이렇게 시간이 지나 이제야 오게 됐다"며 "40주년 5·18민주화운동이 지났다. 행사를 많이 준비했을 건데, 모두 건강하시죠"라고 인사했다. 재헌씨의 왼쪽가슴에는 5·18 40주년 기념 배지가 부착돼 있었다.
재헌씨는 오월어머니집 방명록에 '오늘의 대한민국과 광주의 정신을 만들어주신 어머님들과 민주화운동 가족 모든 분들께 경의와 존경을 표합니다'고 적었다.
같은 날 오전 국립5·18민주묘지에 노태우 전 대통령 이름의 조화를 헌화한 것과 관련해서는 "아버님의 입장과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에서 온 것이다. 아버님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가 대신 헌화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장남 재헌씨가 29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무릎 꿇고 김의기 열사를 추모하고 있다. 김 열사는 1980년 5월30일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5·18민주화운동 진상을 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인쇄하다가 추락해 숨졌다. 2020.5.29/뉴스1 © News1 한산 기자
같은해 6월23일에는 CBS라디오와 인터뷰에서 '5·18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치유와 화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100번이고 1000번이고 사과를 해야 되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일어나지 말아야 될 5·18과 관련해 항상 마음의 큰 짐을 가지고 계셨다"며 "특히 병상에 누운 뒤부터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 오면서 참배를 하고 사죄의 행동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고 저한테도 고스란히 마음의 짐이 됐다"고 했다.
올해 5월25일에는 광주 동구에 위치한 한 소극장을 찾아 5·18 연극 '애꾸눈 광대-어느 봄날의 약속'을 관람했다. 이 연극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서 투쟁하다 한쪽 눈을 잃은 이지현씨(가명 이세상)가 기획해 지난 2013년부터 매년 공연 중인 5월 대표 연극이다.
이날 재헌씨의 깜짝스러운 공연 관람에 객석에 앉은 유족과 당사자들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재헌씨는 공연에 앞서 '뉴스1'과 인터뷰에서 "오월 영령에 사죄하겠다고 했는데 아직 피해자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꼈다"며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5·18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듣고자 공연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2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5·18민주묘지를 찾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54)가 '5·18 영령들을 마음깊이 추모하며 광주의 정신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꽃 피우는 대한민국을 염원합니다'라고 방명록을 남겼다. (독자 제공)2021.4.22/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노 전 대통령의 또 다른 자식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이혼 소송 중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다. 소영씨는 본업인 미술 전시일에 집중하면서 간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근황을 알리고 있다.
소영씨는 지난 5월11일 자신의 SNS에 "가족과 가정은 소중하지만 품이 많이 들기에 시간과 노력은 필수"라며 서로 소통하고 공동의 가치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21세기 가족의 의미'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이혼소송 중인 자신이 한 대학 강연에서 가족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 또 말을 할 수 있는지 곤혹스러움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 한달 전인 4월10일에는 페이스북에 노 전 대통령과 어머니 김옥숙 여사의 근황도 전했다.
소영씨는 "아버지는 눈짓으로 의사 표현을 하시기도 하는데, 정말 하고픈 말이 있을 때 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온 얼굴이 무너지며 울상이 되신다"며 "아버지가 우는 모습이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 여사에 대해서는 "한 분은 침대에 누워 말 없이, 다른 한 분은 겨우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매일 아침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듯 서로를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두 분을 보면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일까 싶다"고 했다.
재헌·소영씨보다 언론의 관심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노 전 대통령의 손녀이자 최 회장과 소영씨의 차녀 최민정씨다.
최씨는 지난 2014년 11월 재벌가 자제로서는 파격적인 해군 소위로 임관해 군생활에 나섰다. 중국에서 대학을 다닐 당시 아르바이트를 해 생활비를 충당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2017년 11월 중위로 전영한 최씨는 이듬해 중국 투자회사를 거쳐 지난 2019년 SK하이닉스에 입사해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둘째 딸이자 노 전 대통령의 손녀인 최민정씨가 중위로 전역하는 모습. 최씨는 2014년 9월 재벌가 딸로는 처음으로 해군 사관후보생에 자원입대했다가 이날 전역했다.(인천해역방어사령부 제공)2017.11.30/뉴스1 © News1 주영민 기자
경남 진해 해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열린 제117기 해군 해병대 사관후보생 임관식에서 SK최태원 회장의 차녀 민정씨가 어머니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 재벌가 자제 중 해군 장교로 입대한 이는 최민정 소위가 처음이다. 117기 해군,해병대 소위 임과후보생은 108명이고 이중 여성은 최 소위를 포함해 13명이었다. 2014.11.26/뉴스1 © News1 최재호 기자
노태우 전 대통령 유언 공개… "과오에 대해 깊은 용서 바란다"
"생애 못이룬 남북한 평화통일 꼭 이루어지길"
(광주=뉴스1) 이수민 기자 | 2021-10-26 20:37 송고 | 2021-10-27 01:34 최종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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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지병 악화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집권 민정당(민주정의당) 대선 후보로서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뒤 그해 12월 13대 대선에서 당선된,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첫 대통령이었다. 사진은 1988년 올림픽 담화 발표하는 노 전 대통령 모습.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 캡처) 2021.10.26/뉴스1 |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유언은 생애 과오에 대한 깊은 용서와 사과였다.
아들 노재헌씨가 이날 <뉴스1>에 공개한 메시지에 따르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유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남겼다.
대한민국 국민들에 대한 감사와 생애 과오에 대한 사과도 이어졌다.
재헌씨는 "(아버지는)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이었다"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장례는 국법에 따라 최대한 검소하게 해주시길 바란다"며 "자신의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노재헌씨는 "오랫동안 병환에 계시던 사랑하는 저희 아버지 노태우 전 대통령께서 10월26일 오후 운명했다"며 "장례 절차는 현재 정부와 협의 중이다. 장지는 뜻을 받아들여 재임시에 조성한 통일 동산이 있는 파주로 모시는 것을 논의 중이다"고 전했다.
앞서 이날 오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병 악화로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집권 민정당(민주정의당) 대선 후보로서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뒤 그해 12월 13대 대선에서 당선된,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첫 대통령이었다.
breath@news1.kr
문 대통령 "노태우, 과오 적지 않지만 성과도"..조문은 안가(종합)
안채원 입력 2021. 10. 27. 15:06
"5.18, 12.12 군사쿠데타 등 역사적 과오…88올림픽 등 성과"
고인 명복 빌고 유족 위로…靑 "국가장 결정, 이견 없었다"
오후 다자정상회의, 이튿날 순방으로 유영민 등이 대신 조문
국립묘지 안장은 관련 법령에 따라 하지 않기로…파주 안장
[서울=뉴시스] 전진환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서울 용산구 노들섬다목적홀에서 열린 2050 탄소중립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1.10.18. amin2@newsis.com
[서울=뉴시스] 김태규 안채원 김성진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8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역사적 과오가 적지 않지만 성과도 있었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다만 빈소를 직접 찾지는 않기로 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별세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 운동 강제 진압과 12·12 군사쿠데타 등 역사적 과오가 적지 않지만,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북방정책 추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성과도 있었다"고 평가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앞서 정부는 노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國家葬)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국가장은 행안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국가장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청와대 내부서) 이견은 없었다"며 "(국가장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성명서들을 검토했고, 여러가지를 종합적으로, 복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노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화를 보냈다. 그러나 빈소 조문은 문 대통령 대신 유영민 비서실장과 이철희 정무수석이 하기로 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조문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이날 오후 아세안+3 화상정상회의와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등 중요 다자정상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이튿날인 28일 오전 유럽 순방을 떠나는 일정을 고려했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지 않기로 한 데 대해선 "국립묘지 안장에 대한 유족 측의 요청도 없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어디에 (노 전 대통령을) 모실지는 유족들 중심으로 협의해 나갈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계획안'에 따르면, 장례는 서거일인 26일부터 30일까지 5일간 치러진다. 장례위원장은 김 총리가, 장례집행위원장은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이 각각 맡는다
영결식 및 안장식은 오는 30일에 진행하되, 장소는 장례위원회에서 유족 측과 논의해 결정할 예정이다. 정부가 국립묘지 안장은 관련 법령에 따라 하지 않기로 한 가운데, 유족 측의 요구에 따라 파주 통일동산 안장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국가장을 주관하는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한다. 하지만 조문객의 식사 비용과 노제·삼우제·49일재 비용, 국립묘지가 아닌 묘지 설치를 위한 토지 구입·조성 비용 등은 제외된다.
국가장 기간 동안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국기를 조기(弔旗)로 게양하게 된다.
전직 대통령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진 것은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으로, 최규하·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는 국민장으로 진행됐다. 이승만·윤보선 전 대통령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렀다.
☞공감언론 뉴시스 kyustar@newsis.com, newkid@newsis.com, ksj87@newsis.com
김 총리 "누구도 역사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노태우 명복 빈다"
등록 2021.10.30 11:00:00
올림픽공원서 노태우 前대통령 국가장 영결식 조사
"88올림픽, 북방외교, 토지공개념 도입 등 많은 공적"
"큰 과오는 사실…국가장 반대 마음, 충분히 이해해"
"유언서 사죄 뜻…유족, 직접 못한 사과 이어가달라"
[광주=뉴시스]류형근 기자 = 지난 5월18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우리들의 오월'을 주제로 41주기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김부겸 국무총리가 기념사를 하고 있다. 2021.05.18. hgryu77@newsis.com
[서울=뉴시스] 안채원 기자 = 김부겸 국무총리는 30일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그 누구도 역사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준엄한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며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고 추모했다.
김 총리는 이날 오전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치러진 노 전 대통령의 국가장 영결식 조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김 총리는 "노태우 대통령님은 재임 중에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며 "이념의 대립을 넘어 12년 만에, 세계가 한자리에 모인 사상 최대의 올림픽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북방외교의 새 지평을 여셨다"며 "이를 기반으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 긴장과 대립의 남북관계를 공존과 평화의 관계로 진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토지공개념 도입으로 경제민주화에도 기여하셨다"며 "대규모 주택 공급으로 서민과 중산층의 주거를 안정시키고, 국민연급 등 공적부조를 크게 확대하셨다"고 했다.
김 총리는 "고인께서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많은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애도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며 "노태우 대통령님이 우리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큰 과오를 저지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다만 "우리는 또한 역사 앞에서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에게 이해와 용서를 구할 때 비로소 진정한 화해가 시작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며 "대통령님의 가족께서는 5·18광주민주묘지를 여러 차례 참배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고인께서 병중에 들기 전에 직접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만나 사죄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도 남는다"고도 했다.
김 총리는 노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한 것과 관련해 "재임시에 보여주신 많은 공적보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고인이 유언을 통해 국민들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죄와 용서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국가장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며 "어떤 사죄로도 5.18과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되신 영령들을 다 위로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고, 과거는 묻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역사로 늘 살아있다"며 "오늘의 영결식은 고인을 애도하는 자리이자 새로운 역사, 진실의 역사, 화해와 통합의 역사로 가는 성찰의 자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유족을 향해 "오늘 국가장의 의미와 국민들의 마음을 잊지 말고, 지금처럼 고인이 직접 하지 못했던 사과를 이어가주고, 과거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에도 끝까지 함께 해달라"고 당부하며 "그것이 고인을 위한 길이자, 우리 민족사의 먼 여정에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newkid@newsis.com
노태우 묘, 국유림 용도변경 안된다
등록 :2021-11-15 17:54수정 :2021-11-16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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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019400.html#csidx66331f2a238fb2fbcd9b91881213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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