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1200명 징용 피눈물 '사도광산'…결국 세계유산 등재
日, 1939년부터 강제 동원…"진폐증에 3~5년밖에 못 버텨"
시민단체 "전체 역사 사실대로 반영할지 신뢰하기 어려워"


‘군함도 약속’ 비틀고 어긴 일본, 사도광산은 다를까 [뉴스룸에서]
- 수정 2024-06-18 09:18
- 등록 2024-06-17 17:44


사도광산 근무 일본인 “강제동원은 사실”…한·일 시민이 밝혔다
등록 2023-04-25 05:00수정 2023-04-25 13:48




30년 한·일 시민연대가 찾아낸 일제 강제노동 700명의 기록
등록 2023-04-25 05:00수정 2023-04-25 13:48


'강제 동원' 쏙 빼놓고... 일, 사도광산 신청 강행
(2023.01.21/뉴스투데이/MBC)
우리가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를 반대하는 이유








일본이 조선인 강제 동원 역사를 배제한 채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합니다. 사도 광산이 ‘제2의 군함도’가 되지 않도록 국제사회의 협력을 이끌어 낼 때입니다.
◆ 사도 광산
일본 니가타현에 있는 사도 섬 내의 광산. 일본 에도시대엔 금광으로 유명했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구리, 철 등 채굴. 이 과정에서 12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강제 노역을 강요당함. 현재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중.
◆ 사도 광산? 사도 금산?
일본은 금 광산 유적군으로만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사도 금산’이라 주장합니다. 반면 한국은 광산으로 이용했던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사도 광산’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죠.
◆ 역사,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한국 입장에선 조선인 1200명이 사도 광산에서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한 45년의 역사가 중요합니다. 일본이 교묘히 배제한 역사까지 공식적으로 인정하길 요구하는 셈입니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일본은 ‘난징대학살’ 등재를 막기 위해 ' “등재를 반대하는 국가가 있다면, 심사 중단하고 대화를 촉구한다”라는 세계기록유산 조항을 도입했습니다. 그런 일본이 한국의 반대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네요.
◆ 오죽했으면 일본 내에서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한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세계유산 등재를 강행한다면 '이중 잣대라는 비난은 피하기 어려울 것”
- ’22. 2. 4, 일본 도쿄신문 (東京新聞 동경 신문)
“세계유산은 그 보편적 가치를 국제사회와 공유해 후세에 전하는 데 의의가 있다. 국제기구와의 약속을 완수하지 않은 채로는 일본의 자세를 의심받게 된다.”
- ’22. 2. 2, 일본 아사히신문 (朝日新聞 조일 신문)
“군함도 때와 같은 실수 저질러선 안 돼.. 사도 광산 조선인의 노동·생활 실태를 반드시 사실에 따라 정직한 태도로 설명해야 한다”
- 마쓰우라 고이치로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 ’22. 7.25, 프랑스 AFP
“차별은 존재했다. 사도 광산에서 가장 위험한 업무는 조선인에게 배정됐다.”
- 아사노 도요미 와세다대 교수, ’22. 7.25, 프랑스 AFP
2015년 군함도 등재 이후 강제 노역 사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라는 약속을 일본은 아직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이 올바른 역사를 기술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협력을 이끌어 낼 때입니다.
copyrightⓒ korea.kr
일본, 사도 광산 세계유산 추천서에 '조선인 강제노동' 기간 제외, 군함도에 이어 사도광산까지? 군함도에서의 조선인의 삶, 사도광산(사도섬)은 어떤 곳? 사도광산, 이번에도 역사 왜곡? 한 일..
군함도에 이어 사도광산까지?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대상 기간에서 일제강점기를 사실상 빼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도광산?
일본 니가타현의 사도광산은 에도시대(1603~1867년) 세계 최대 규모의 금 생산지였다고 합니다.
이후 태평양 전쟁 기간(1941~1945년) 동안에는 구리, 철 등의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이용되었는데요.
당시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되어 급료도 받지 못하고 노동했습니다.
1949년 2월 25일에 조선인 1140명에 대한 미지급 임금으로 23만 1059엔 59전이 공탁됐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
2015년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당시, 일본은 ‘군함도에서 한국인이 강제 동원되어 노동한 사실을 인정하고,
해당 시설에 정보센터를 세워 희생자들을 기리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유네스코 조사 결과, 군함도와 관련된 왜곡된 역사를 전시했을 뿐만 아니라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조차 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죠. 의도적으로 역사를 은폐하고 축소했다는 유네스코의 지적을 받았지만 여전히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군함도,
端島하시마 섬, 군칸지마,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현 근처에 위치한 야구장 2개 크기의 섬이다.
1916년 미쓰비시가 세운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있어 멀리서 보면 건물들의 모습이
마치 군함 같다고 해서 군함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범 기업 미쓰비시는 해저탄광이 있는 이 섬에서 조선과 중국 등으로부터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했다.
1943년에서 1945년 사이 약 500~800여 명의 조선인이 징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군함도란?
군함도는 나가사키 현 근처에 위치한 섬으로 일본의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고 불렸습니다.
원래는 무인도였지만 다량의 석탄이 발견되자 1890년 미쓰비시 중공업은 군함도를 매입합니다.

이후 1960년대까지 광업도시로 번영을 누리다가 1974년 폐광된 이후 무인도가 됐습니다.
석탄산업이 절정일 때 일본은 광부 유치를 위해 많은 시설을 세웠습니다.

군함도 크기는 둘레 1.2km, 면적 63,000평방미터로 축구장 두 개 크기에 불과했지만
학교, 병원, 목욕탕, 영화관 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 때 군함도의 인구는 5300명에 달했으며 이는 도쿄의 9배에 달하는 인구밀도였습니다.
1937년, 군함도 강제 징용 시작,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전쟁과 함께 일본의 군수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하였고 일본 기업은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됩니다.

일본 기업은 부족한 노동력을 메꾸기 위해 조선인을 데려올 것을 일본 정부에 요청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대대적인 강제징용을 시작했습니다.

노동 현장에는 성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이나 노인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동원됐습니다.
이렇게 동원된 이들은 탄광·군수공장·건설현장 등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중에서도 군함도는 석탄을 채굴하는 곳으로 지옥섬이라고 불릴 만큼 노동강도가 높았습니다.
군함도에서의 조선인의 삶,
이때 그들이 먹은 것이라곤 콩 찌꺼기로 만든 주먹밥 2개가 전부였습니다.

또한 높은 층의 일본인 숙소와 달리 조선인 숙소는 지하에 위치했습니다.
숙소는 항상 악취가 풍겼고 탈출을 막기 위한 쇠창살 박힌 창문이 밖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아프다고 일을 쉬겠다고 하면 무자비한 폭력을 당했습니다.
군함도가 육지와 떨어진 섬이었기 때문에 탈출을 하다 사망하거나 붙잡혀 고문을 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군함도에서 죽은 조선인들의 화장 인허가 신청서에는 '외상으로 인한 복부 내장 파열', '매몰에 의한 압사',
'자살'과 같은 조선인의 매우 비참한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2015년 군함도 유네스코 등재,
2015년 군함도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습니다.
서구와의 기술 교류를 통해 비서구 국가 최초의 산업화를 이뤘다는 점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를 고려하여 각 시설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고 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한국인과 중국인, 연합국 포로가 강제로 동원됐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관련 내용을 담은 이행경과보고서에 강제노역을 '일본 산업 지원 한반도 출신 노동자'로 표현하는 등
역사 왜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군함도나 군함도 전시관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에 관한 자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과거를 철저히 은폐하고 군함도가 산업혁명의 모습을 간직한 '관광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도 광산,
사도 금광(일본어: 佐渡金山 사도 킨잔[*])은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의 사도 섬에 위치한 금광이다.
광석은 주로 '은흑'(銀黑)이라고 불리는 석영 중에 맥상에 존재하던 휘은광 및 자연 자연금의 미립자였다.
1601년에 금맥이 발견된 이래 에도 시대 기간 동안 중요한 재원으로써 개발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전성기에는 금이 1년 동안 약 400kg, 은이 약 40톤 이상 채굴된 일본 최대의 금광산으로,
은 생산에서도 일본 유수의 광산이어서 은 화폐의 제작을 위한 재료를 공급하는 중요한 광산 구실을 했었다.
그 중 아이카와 광산은 에도 막부가 직할 경영하여, 대량의 금은을 산출한 사도 금광의 중심이었다.
산출하여 제련한 철심과 회취은은 막부에 상납되어, 이를 긴자에 맡겨 화폐를 주조하였다.
또한 은은 특히 생실 등의 수입 대가로써 청나라 등에 대량 수출되어, 사도 산출의 회취은은 세다 은으로도 불렸다.
갱도의 총 연장은 약 400km에 이르지만, 그 중 관광 노선으로 개발된 구간은 300m 정도이다.
일본이 사도광산(사도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2015년 군함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포함시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일본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군함도를 산업화의 흔적을 담고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미화했습니다.
오늘은 제2의 군함도가 될 수 있다는 사도광산(사도섬)에 대해 알아보고 역사 왜곡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철회될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사도광산(사도섬)은 어떤 곳?
사도광산은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섬에 위치한 일본 최대의 금산(金山)입니다.
사도광산의 금광맥은 동서 3,000m, 남북 600m, 깊이 800m에 퍼져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산이 V자 모양으로 크고 깊게 파여있는데 과거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금이 채굴됐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601년 사도광산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양의 금맥이 발견되었고 이후 일본의 가장 중요한 재원으로 개발되었습니다.
1869년에는 조선인 강제징용을 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미쓰비시 합자회사가 사도광산을 인수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자원고갈로 인해 폐광되었습니다. 388년 동안 산출된 금은 78톤, 은은 2,330톤에 달했습니다.
사도광산(사도섬)은 제2의 군함도?
일본은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노동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일본은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했고, 이들은 탄광, 군수공장 등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중에서 사도광산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는 최소 1,20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하지만 군함도와 달리 사도광산과 관련된 연구자료는 국내에 한건밖에 존재하지 않고 영화나 책으로도
알려진 적이 없어 사도섬의 조선인 강제징용 역사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도섬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여수의 사도섬을 떠올리는 분도 있습니다.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
사도광산이 세계문화유산 잠정 후보 목록에 처음 오른 건 2010년입니다.
그동안 4차례나 후보 선정을 노렸지만 번번이 탈락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유네스코에 정식 추천서를 제출하는 2022년 2월 1일을 앞두고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로 선정해 등재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사도광산, 이번에도 역사 왜곡?
10년 넘게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온 일본은 그 시기를 '에도시대'로 한정지었습니다.
조선인 강제징용이 시작된 1930년대 이후 근대는 제외한 것입니다.

한국이 조선인 강제징용을 문제 삼을 것을 대비해 이 같은 조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사도광산의 유네스코등재를 위해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2007년 발행한 제안서에는 '광업의 근대화', '근대 채굴 구성 자산', '조선 유학생이 사도 기술을 배웠다.' 등의 근대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함도 역사 왜곡 논란이 거셌던 2020년에 제출한 추천서에는 근대와 관련된 내용이 모두 삭제됐습니다.
“사도광산 등재 추진은 ‘식민주의 극복 노력’ 역주행”
등록 :2022-02-13 09:05수정 :2022-02-13 09:09
[한겨레S] 기획
일본, 또 역사부정 세계유산 추진
일 NGO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나카타 미쓰노부 사무국장 인터뷰
“조선인 강제동원 한국 주장은 사실
한·일 합의 없는 유산등재도 부적절”


조선인 강제노역 역사 또 부정

―하시마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채, 사도광산 등재 시도가 본격화하고 있다.
“역사부정, 정치적 악용 안돼”
식민주의 극복 ‘역주행’ 우려 커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추진은 한-일 관계에 또 다른 악재가 되고 있다. 지난 3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한 통화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인 강제노역의 아픈 역사를 외면한 채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 추진키로 결정했다. 깊은 실망과 항의의 뜻을 표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저지를 위한 태스크포스(TF)도 꾸렸다. 한-일 간 또 다른 긴장의 끈이 당겨지고 있는 것이다. 10일엔 문재인 대통령이 <연합뉴스> 및 세계 7대 통신사와 한 합동 서면 인터뷰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며 “과거사 문제 해결과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내년 5월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ICOMOS)의 권고 등을 거쳐 같은 해 여름께 결정된다."사도광산, 부의 역사도 외면 말라" 일 언론 양심의 목소리
<도쿄신문> 등 진보 성향 신문들, 약속불이행-역사적 사실 들며 일 정부 비판
![]() |
|
▲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보도하는 NHK 갈무리. | |
ⓒ NHK | 관련사진보기 |
일본 정부는 지난 1일 각의 결정으로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그러나 한국 측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 노동자들의 강제노동 사실을 들며 민관합동TF를 꾸려 이를 강력 저지하고 나선 상황이다.
4일 일본의 진보성향 신문인 <도쿄신문>은 사설에서 "일본 측은 '부(負)의 역사'에도 성실히 마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일본 정부는 (등재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강구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약속했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해 여름 "일본 정부의 대응이 불충분하다"고 결의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정부가 지난 2015년 조선인 징용 현장인 군함도(일본명 하시마)를 비롯한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일부 시설에서 강제노역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명시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도쿄신문>은 또 니가타현이 펴낸 <니가타현사 통사편8>에 "조선인을 강제적으로 연행한 것은 사실"이라고 돼 있고, 차별대우 때문에 탈주와 파업이 일어났던 게 명기돼 있으며 다양한 문헌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추천 내용이 에도시대(1603∼1867)까지이며, 태평양전쟁 중의 일은 무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세계 유산은 등재와 관련된 폭넓은 사회,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며 "역사의 일부를 외면하는 듯한 추천은 국제사회의 이해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역사 전체를 기록하는 것이 오히려 사도광산 평가를 높힐 것"
<도쿄신문>은 따라서 "오히려 그러한 역사 전체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사도광산의 평가를 높힐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 정부의 전향된 자세를 요구하고 나섰다.
신문은 나아가 지난해 일본이 세계기록유산 등록시 반대하는 나라가 있으면 심사를 중단하고 대화를 촉구하도록 규칙을 바꾸도록 주도한 사실을 지적하며 "(이번은 세계문화유산이라서) 분야가 다르다고는 해도 한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절차를 진행시킨다면 '이중잣대'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매체는 마지막으로 "세계유산의 증가로 등재는 좁은 문이 됐는데, 한일 외교문제로 발전되면 등재가 더욱 어려워진다"며 "역사적 가치가 높은 사도광산을 정치의 희생양으로 만들지 말라"고 주장했다.
한편 <아사히신문>은 지난 2일 사설에서 "유네스코의 지적을 경시하지 말고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메이지산업유산' 전시시설을 개선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과의 대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마이니치신문>도 역시 1일 사설에서 '한국으로부터 '역사전쟁'을 도전받고 있다'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말을 들어 "이웃 나라와의 대결 자세를 연출할 생각으로 문화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오히려 국익을 해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원, '사도광산 운영' 전범기업에 수억대 손해배상 명령 (0) | 2024.08.30 |
---|---|
‘사도광산 등재’ 동의한 윤 정부, 일 강제동원 지우기 동참한 꼴 (0) | 2024.07.29 |
일본 전쟁범죄 배상 의무 청구권협정으로도 소멸 안돼 (0) | 2024.07.20 |
“일본, 독일 구청까지 소녀상 철거 로비…구청장도 놀라” (0) | 2024.06.19 |
왜 자위대가 한국땅에 상륙하려 하는가? (0) | 2024.06.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