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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일본 전쟁범죄 배상 의무 청구권협정으로도 소멸 안돼

by 무궁화9719 2024. 7. 20.

일본 전쟁범죄 배상 의무 청구권협정으로도 소멸 안돼

배연홍 시사 저널리스트mindle@mindlenews.com다른 기사 보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 ⑤] 일본 책임과 배상문제
설명 안된 청구권 자금과 “최종적 해결”간의 인과관계
일본 대법원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겐 ’화해‘ 권고
중요한 ’관부 재판‘ 판결...보상과 일본국가 책임 명시
일본정부에 과거범죄 배상할 "‘법적 작위 의무’ 있다"

배연홍 국제분쟁 전문 시사 저널리스트

미완의 '법적 작위 의무’

 

한일은 1965년의 청구권·경제협력협정의 제1조에서, 무상 3억 달러·유상 2억 달러의 공여와 대출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규정한 다음, 제2조 1항에서 “양국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의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에서 다툰 한국인을 원고로 하는 전후 보상소송에서 원고는 '개인의 청구권'은 협정에 따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대해 피고인 일본정부는 실체적 권리를 가리키는 '재산, 권리 및 이익'뿐만 아니라 개인의 청구권도 '외교보호권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권리'이기 때문에 그 협정으로 소멸했다고 반론하고 있다.

 

또한 중국인을 원고로 하는 전후 보상소송에서도 일본 대법원(최고재판소)이 2007년에 원고 청구를 물리치는 결정을 내려, 일본 사법에 의한 구제의 길은 완전히 폐쇄돼 있다. 그때의 대법원 판단은 개인의 청구권을 포함해 전쟁 수행 중에 발생한 모든 청구권을 서로 포기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인의 전후 보상 소송에서도 청구권협정 및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에 따라 원고 패소가 결정되어 개인의 청구권은 재판상 소구할 수 없는 '구제 없는 권리'로 간주된 것이다.

 

1965년에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 제2조 1항 (a)에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학인한다"는 구절이 명기돼 있다.
 

설명되지 않은 청구권협정 자금 제공과 “최종적 해결”간의 인과관계

 

청구권협정은 태평양전쟁 중의 국민징용령과 징병제 시행으로 피해를 입은 한반도 출신의 군인, 군속, 징용공(강제동원 노동자) 등의 대일 청구권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정에 부속된 ‘합의 의사록’은 징용당한 사람들에게 지급되지 않은 자금이나 보상금을 포함해서 청구에 관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 협정 제1조의 경제협력 자금과 제2조에서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되어 있지 않다. .

 

이것은 한일 양측의 사정에 따른 것이었다.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 제2조가 한일병합과 식민지배에 대해 “이미 무효”라고 규정한 것과 관련해, 일본측이 그것은 쌍방의 합의에 의한 합법적인 것이었지만 (한국의 독립으로 비로소) '이미 무효‘가 됐다고 해석한 반면, 한국측은 일방적인 침략행위로 한국 병합은 '(침략 및 식민지배) 당초부터 무효'라고 해석했다.  식민지 지배를 합법이라 주장하는 일본은 배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경제협력이라고 했고. 식민지 지배는 불법이지만 경제건설 자금이 필요했던 한국은 경제협력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배상이어야 했기에, (양국이 각자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도록 한) 그런 애매모호한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국정부가 떠맡은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은 무상 3억 달러 중 5.4%에 그쳤으며 대부분이 국내 인프라 건설에 쓰였다.

 

1965년 청구권협정과 함께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 제2조에 "이미 무효" 구절이 명기돼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 배상 책임, 1965년 협정으로도 소멸 안돼

 

노무현 정권이 발족되면서 청구권협정 당시의 외교문서가 2006년에 공개된 것을 토대로 협정에 관한 한국정부의 공식 해석을 보여주기 위해 국무총리(총리)가 주최하는 '한일회담문서 공개 민관공동위원회'(민관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이 위원회는 무상 3억달러에 대해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고 있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됐다”고 결론지어 한국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보상 조치가 불충분했다고 판단했다. 한편 일본 정부에게는 일정한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

 

반관반민의 '아시아 여성기금'의 보상사업과 정부예산으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의 보상은 모두 '구제 없는 권리'를 보상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그것을 한국의 위안부 지원 단체가 거부한 이유는 명확한 국가배상이 아니면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국가배상이란 전쟁피해에 의한 손해의 보상, 즉 (한국이 참여하지도 못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에 근거한 보상이 아니라 일본이 합법이라 주장하는 식민지 지배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의한 피해에 대한 보상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관공동위원회의 견해와 같다. 협정으로 해결이 끝났다는 입장을 바꿀 수 없는 일본정부와, 식민지 지배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정부의 주장의 격차는 크고, 이대로는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 반대 시위. 2020.10.13. 베를린코리아협의회 제공
 

일본 최고재판소, 중국  피해자들에겐 ’화해‘방식 권고

 

중국인 원고의 호소를 물리친 앞서 얘기한 일본 대법원(최고재판소) 판결은 재판상 소구할 수 없는 '구제 없는 권리'의 해결책으로서 관계자에 의한 '화해'를 암시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에서도 개별 구체적인 청구권에 대해 채무자 측에서 임의의 자발적인 대응을 하는 것은 방해받지 않는 바, 본건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매우 큰 한편으로, 상고인[피고기업]은 앞서 언급한 근무조건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해 상응하는 이익을 얻었고, 나아가 상기의 보상금을 취득하고 있는 등의 제반 사정을 감안하면 상고인을 포함한 관계자들이 본건 피해자들의 피해 구제를 위해 노력할 것으로 기대되는 바이다.

 

판결에 따라 피고기업인 '니시마쓰 건설'이 제안한 ’화해‘가 나중에 성사됐다. 법적 책임에 관하여 원고와 피고 사이에 견해의 일치를 보지는 못했지만 피해자 측이 납득한 형태(배상 아닌 위로 차원의 화해금 지불, 가해 기업의 사죄 및 재발방지 약속)로 문제를 해결한 매우 드문 예이다.

 

'관부 재판' 제1회 구두변론 전날 후쿠오카 시의 하나후사 집 교류회에 온 원고들 모습(1993.9.5.) 왼쪽부터 유모 씨(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박두리 씨, 하순녀 씨 ⓒ하나후사 에미코.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중요한 ’관부 재판‘의 판결…포상과 일본국가 책임 명시

 

조선인 전 위안부 등이 일본에서 제기한 재판에서는 원고가 그나마 일부 승소한 경우도 하나뿐이다. 부산시 등에 사는 전 위안부 3명과 전 정신대 대원 7명이 1992년 야마구치 지방재판소(지법) 시모노세키 지부에 제소한 ‘부산 종군 위안부·여자 근로정신대 공식 사죄 등 청구 사건’(관부 재판)이다. 야마구치 지방재판소는 피고의 나라(일본)에 대해 전 정신대원의 청구는 기각했지만, 전 위안부에 대해서는 30만 엔의 배상을 명했다. (이마저 결국)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가 확정되었지만, 관부재판의 판결은 일본 전후 보상에 엄격한 반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문제해결을 위한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한 획기적인 판결이었다.

 

판결은 먼저 위안부 제도가 철저한 여성 차별, 민족 차별로 여성 인격의 존엄을 근저로부터 침범한 제도였음을 인정하고, “20세기 중반 문명 수준에 비추어도 매우 반인도적이고 추악한 행위였던 것은 명백했으며, 적어도 일류 국가를 표방하는 제국 일본이 그 국가 행위에서 가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고 단언했다. 거기에다 국가에게는 원고에게 추가 피해를 증대시키지 않도록 보증해야 할 '법적 작위 의무', 즉 배상입법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그것을 게을리하고 다년간 원고의 고통을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1993년의 고노 담화와 함께 발표된 일본정부의 조사 결과에 따라, 그로부터 3년이 경과한 1996년에는 법적 작위 의무가 명확해졌음에도, 1998년의 판결 시점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1년여의 법률 제정 지연에 대한 '입법 부작위'의 배상이 30만 엔이고, 본래의 배상은 국가에 특별 입법을 해서 배상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고등재판소는 사실 인정만 확정하고 배상은 기각했으며, 최고재판소는 이를 최종 확정했다)

 

17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전날 한일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요청했다고 교도통신이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2023.3.17. 연합뉴스
 

국가의 법적 작위 의무에 대해 판결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본정부 과거사 범죄 배상할 ‘법적 작위 의무’ 있다

 

일본국 헌법 제정 전의 제국 일본의 국가행위에 의한 것일지라도 이와 동일성이 있는 국가인 피고에게는 그 법적 침해가 실로 중대한 만큼 피해자에게 더 이상의 피해를 증대시키지 않도록 배려, 보증해야 할 조리상의 법적 작위 의무가 부과돼 있다고 해야 하며, 특히 개인의 존중, 인격의 존중에 근원적 가치를 두고 있고 또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에 관하여 부정적 인식을 갖고 반성하는 일본국 헌법을 제정한 뒤에는 점점 그 의무가 무거워져, 피해자에 대한 손해 회복 조치를 어떻게든 취해야 한다.

<끝>

 

참고자료

 

【일본 자료】

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編 「政府調査「従軍慰安婦」関係資料集成①警察庁関係公表資料」、1997年

和田春樹 「政府発表文書にみる「慰安所」と「慰安婦」」『「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財団法人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1999年

浅野豊美 「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同

西野瑠美子 『戦場の「慰安婦」』明石書店、2003年

尹明淑 『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明石書店、2003年

遠藤美幸 「戦場の社会史:ビルマ戦線と拉孟守備隊1944年6月―9月」慶應義塾経済学会、2009年

永井和 「日本軍の慰安所政策について」、2012年

山本晴太 「日韓請求権協定解釈の変遷」、 2014年

永井和 「破綻した「日本軍無実論」」『世界』2015年9月号

 

【한국 자료】

정진성 <일본군 성노예제>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6년

안병직 번역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년

정진성 편저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 자료 ⅠⅡⅢ> 선인 2018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19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미래사 2020년

 

【미국 자료】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 United States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October 1,1944

Interrogation Bulletin No2, South-East Asia Translation and Interrogation Center, November 30,1944

CBI Roundup, November 30,1944, cbi-theater.com

(https://www.cbi-theater.com/roundup/roundup113044.html)

Korean and Japanese Prisoners of War in Kunming,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China Theater, April 28,1945

Research Report No.120, Allied Translation and Interpreter Section, November 15,1945

Chan, Won-Loy, Burma, The Untold Story, Preside Press, 1986

Ravenholt, Betty, West Over the Seas to the Orient, 2009

Cornebise, Alfred Emile, Soldier Extraordinaire, 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19

(https://www.armyupress.army.mil/Portals/7/combat-studies-institute/csi-books/soldier-extraordinaire-the-life-and-career-of-brig-gen-frank-pinkie-dorn.pdf)

“상하이 위안소 작부 3천명 필요, 선금 10% 군이 지급”

배연홍 시사 저널리스트mindle@mindlenews.com다른 기사 보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 ④] 강제동원 논란
상하이 주재 일본군 특무기관이 업자들에 모집 의뢰
“위안소는 군 시설” 경찰도 위안부 모집에 협력
위안부 모집, 이송, 위안소 설치 운영 주체가 일본군
남방에 간 위안부 수천명…위안단’ 6차례 이상 동원
<반일 종족주의>·일본우익 “강제연행 증거 없다”

배연홍 국제분쟁 전문 시사 저널리스트
 

앞에서 잠시 언급한 정진성 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일본군 성노예제>는 첫 출판으로부터 12년이 지난 2016년에 낸 개정판에서, 그 동안에 발굴된 많은 자료들과 함께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경남 출신, 16~17세 가장 많고, 취업 사기, 협박·폭력 피해

 

이 책에 따르면, 한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나선 일본군 위안부 출신자들 중 175명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피해자들 대부분이 빈곤 농가의 가정에서 나서 자랐고 학력도 매우 낮았다. 인신매매 등의 과정을 거쳐 끌려갈 당시의 나이는 16세~17세가 가장 많았다. 지역별로는 남동부 경남(79명)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는 이송 거점인 부산항에 가까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송 도착지는 일본(20명), 대만(12명), 만주(15명), 중국(27명), 남아시아(8명), 남양군도(6명) 등 다양하다. 위안부가 된 경위는 취업 사기(82명)와 협박·폭력(62명)이 압도적으로 많고, 인신매매나 유괴·납치는 별로 없었다. 이상의 실태를 바탕으로 정진성은 위안부 문제에서의 ‘강제동원’이라는 말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44년 8월 14일 버마 미치나에서 미군의 심문을 받는 조선인 위안부들 모습.   위키백과

 

                                                                                 정진성

 

“모두 자신이 위안부가 된다는 사실 몰랐다”

 

강제 동원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리적 폭력에 의한 연행에 한정되는 경우도 있고, 넓게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 끌려가 강제적인 통제로 인해 본인의 의사에 따라 돌아갈 수 없게 된 모든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리적 폭력으로 동원당한 여성뿐만 아니라 인신매매, 유괴, 취업 사기 등으로 위안부가 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위안부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끌려갔고, 끌려가는 도중에도 엄중하게 감시받았으며, 위안소에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게 하는 감시를 받았다는 점에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모두 넓은 의미에서의 강제였다고 규정해야 한다.

 

인신매매든 취업사기든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면 위안소에서의 노동은 강제 매춘이었고, 사실상 성노예로 여겨졌다. 그 위안부 제도에 군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책임은 면할 수 없다. 이것이 한국에 널리 침투된 광의의 강제성을 바탕으로 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라는 생각이다.

 

          

                                                                                     이영훈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일본어판

 

<반일 종족주의>, 일본 우익 “강제연행 증거 없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된 <반일 종족주의>(문예춘추, 2019년)의 편저자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위안부제도는 조선에 있었던 공창제도를 군사적으로 동원하고 편성한 합법적인 제도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강제동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공창제도는 1916년에 시작되어, 1930년대 이후는 매춘업이 대중화했다. 원래 군 주둔지에 매춘 관련 업자들이 모이는 경향이 있어서, 1937년에 군 위안소가 설치되자 거기서 일하는 창녀, 기생(藝妓), 작부(酌婦) 등의 여성들이 위안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군 위안부를 모집하는 주선(알선)업자는, 농촌의 가난한 호주에게 전도금(선금)을 지불하고 취업 승낙서나 호적 등본 등의 서류를 갖춰 합법적으로 딸들을 데려 갔던 것이며,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범죄는 아니었다. 부모에 의해 인신매매를 당하거나 업자의 달콤한 말(감언)에 속은 여성들의 비운은 조선에 악습으로 남은 여성 멸시와 가부장적 사회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고, 취업 사기 등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업자에게 있었다. 군 위안부는 위험한 전투지역에서 일하면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지만, 민간 공창에 비하면 훨씬 수입이 많았다. 여성들이 위안소에서 악착같이 일해 저금을 한 것은 선택의 자유에 근거한 행위이며 성노예의 실상과는 거리가 좀 멀다.

 

                                                         일본에서 출간된 이영훈의 또다른 책

 

이상이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논거로 제시된 것들이다. 이영훈의 주장은 일본 우파 논객들이 주장하는 '일본군 무실론(無實論)'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위안소는 군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민간의 매춘 시설이고, △당시는 공창 제도가 있어 매춘은 합법이었다. △위안소는 전지(戰地)・점령지로 확장된 ‘전지 공창시설’이고, 군은 그 이용자에 지나지 않았다. △군의 관여는 전지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공창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위안부는 성적 노동에 대해 가치를 얻었으며, 평균적으로 고수입이었다. 성노예 등이 아니다. △인신매매된 자도 있었으나 그것은 합법적인 계약이고, ▽범죄행위는 민간업자들이 한 것이며, △조직적인 ‘강제연행’이 있었다면 국가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그것을 보여 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나가이 가즈, <세계> 2015년 9월호).

 

                                                                           윤명숙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것”은 모두 강제

 

이런 주장이 한국에서 받아들여질 리가 없어 미디어나 학회에서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반발이 일거에 퍼졌다. 상투적인 마녀(친일파) 사냥적인 비판 보도가 눈에 띄는 가운데, ‘한국 여성인권 진흥원’의 윤명숙(조사 팀장)은 강제 동원의 실태에 초점을 맞춰 이영훈의 주장에 반박했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은 틀림없이 있었다. 물론 점령지, 특히 전지(戰地)에서 일어난 것처럼 군인이 전면에 나서서 사람들을 데려가는 형태는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식민지 조선에서는 공창제도와 소개업이 법으로 실시되고 있었고, 일본정부는 이런 산업체제를 ‘위안부’ 강제동원에 이용했다. 여기서 우리는 '강제'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국제법이 규정하는 강제란,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것’을 말한다. 군인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데리고 갔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38년 일본 육군성은 위안소 설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위안부의 '모집'에 관한 방침을 세웠다. 본격적인 제도화로 가는 길을 열었다. 게다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지나 전장, 식민지에 설치된 위안소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 ‘위안소’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은 인간이며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침해받고 자유를 빼앗겼다. 그녀들은 국가범죄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한겨레』 2019년 9월 5일자)

 

이영훈은 다양한 반론에 대응하는 형태로 내놓은 속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2020년 5월)에서 윤명숙의 '확대해석된 강제동원설'을 거론하며 나름 철저한 비판을 펼친다. 결론부터 말하면 위안부 문제는 국가범죄의 문제로만 추궁할 수 없고, 당시 조선에서 시행된 법제, 호주제 가족, 가부장 권력, 빈곤 등이 작용한 복합적인 범죄로 파악하지 않으면 하층 극빈층의 딸들에게 강요된 비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특히 조선의 가부장에게는 자신에게 속한 가족의 지위를 바꿀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가 주어져 있었던 실태가 있다고 지적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에 실린 위안부 모집 광고.  위키백과
 
 

위안부 모집, 이송, 위안소 운영 주체는 일본군

 

이 책에 제시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서 뽑아낸 약취·유괴의 검거 및 기소수의 추이(1920년~1943년)에 따르면, 경찰이 검거한 약취·유괴 사건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급격히 증가해 1930년에는 2160건에 달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부터 뚜렷하게 줄어들었고, 1943년에는 347건으로 줄었다. 이는 총독부가 1933년부터 시행한 '자작농지 설정사업'에 따라 작지만 농지를 가진 자소작 농가가 늘어나 농촌 빈곤이 어느 정도 개선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위안부 모집은 1930년대 후반부터 종전까지 이어졌지만, 그 사이의 약취 유괴의 검거수는 매우 적다.

 

게다가 검찰이 사건을 불기소 처분한 비율은 전 기간을 통해 높아, 평균하면 87·5%였다. 그 이유는 위안부 본인의 취업 사유서, 호주의 취업 동의서, 호적 등본, 인감증명서, 경찰서장의 여행 허가서 등의 서류를 업자가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즉 위안부 모집은 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요 서류만 있으면 농촌의 딸을 팔아 넘겨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현장의 경찰은 범죄성을 인식하고 용의자를 검거하고 검찰에 송치했지만 불기소 처분이 돼, 점차 검찰의 생각이 경찰에 침투해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이 통계상 약취 유괴 사건이 줄어든 주요 이유일 수 있다.) 당시 경찰의 판단으로도 약취 유괴의 범죄 혐의는 있었지만, 호주의 취업 동의서 등의 합법적인 서류가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불기소가 됐다. 위안부가 모집되는 전시 체제하에 들어가면, 업자는 적발을 피하기 위해, 더 엄격하게 필요 서류를 갖추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법제나 사회의 현실을 보면 위안부 모집은 확실히 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끌려가고 가혹한 성적 노동을 강요당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위안부 모집, 이송, 위안소 운영을 가능하게 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일본군이었고 민간업자들이 아니었다. 일본군의 위안소를 「전지 공창 시설」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것에 문제는 없는 것인가.

 

1938년 3월 4일 일본군의 위안부 모집에 관한 명령서.  위키백과
 
 

상하이 주재 일본 특무기관이 업자들에 모집 의뢰

 

1990년대 정부 조사에서 발굴된 자료 속에 예전의 내무성 문서군이 있으며, 아시아 여성기금이 이를 공개했다. 군마현 지사가 내무성 대신(장관)에게 보낸 ‘상하이 파견군 내 육군 위안소의 작부 모집에 관한 건’(1937년 1월 19일자)에는 위안부 모집 업자가 마에바시 시의 경찰에서 취조를 받은 사건의 내용이 적혀 있다. 고베 시에서 접객업을 하는 오우치라는 인물은 취조에 대해, “상하이 주재 육군 특무기관의 의뢰”로 “상하이 파견군 내 육군 위안소에 작부업(醜業. 매춘업)을 할 작부 3천 명이 필요”하다고 진술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병이 지나(중국) 매춘부(醜業婦)와 놀다가 병에 걸리는 일이 매우 많아, 군 의무국에서는 전쟁보다 오히려 이 화류병을 더 무섭다고 하는 상황에서, 그 시설문제가 발생해 상하이 주재 특무기관이 우리 업자들에게 의뢰"

 

업자는 합법적인 계약이라고 호소하면서 '계약증', '승낙서', '금원(金員) 차용증서', '[계약] 조건', '파견군 위안소 화권(花券)'을 제시했다. 부녀 유괴 혐의로 조사를 한 현지 경찰은 군의 의뢰로 3천 명의 위안부를 모으고 있다는 업자의 진술을 믿을 수 없어서 내무성에 사실관계를 전하는 가운데,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

 

"공공질서 양속(良俗)에 반하는 것과 같은 사업을 [업자가] 공공연히 퍼뜨리는 것과 같은 것은 황군(일본군)의 위신을 심히 실추시키는 것으로 보고 엄중하게 단속하도록 관할 마에바시 경찰서장에 대해 지휘”

 

모집 전도금(선금) 일부를 일본 군부가 부담

 

고베의 접객업자 오우치는 야마가타현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 현의 소개업자에게 위안부의 모집을 의뢰할 때, 전도금의 일부를 군이 대신 갚겠다고 제안하고 있다.

 

"작부는 연령 16세부터 30세까지. 전도금은 500엔부터 1천엔까지. 영업 연한은 2년. 그 소개 수수료는 전도금의 10%를 군부에서 지급할 것"(‘북지나[북중국] 파견군 위안 작부 모집에 관한 건 ’ 1937년 1월 25일자)

 

위안부 3천명의 모집에 얽힌 사건은 와카야마 현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와카야마 현 지사가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보낸 ‘시국 이용 부녀 유괴 피의 사건에 관한 건’(1937년 2월 7일자)에서는 오사카 시에서 대실(貸席, 貸室)업을 하는 가나자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현 내의 시모타 나베초에서 순사의 취조를 받은 가나자와는 의심스러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다음, ”군부의 명령으로 상하이 황군 위안소에 보낼 작부 모집을 하러 와서, 3천 명 요구에 대해 70명은 쇼와 12년(1937년) 1월 3일 육군의 어용선으로 나가사키 항에서 헌병 호위 아래 송치했다“고 진술했다. 가나자와의 진술에 의하면, 동업의 오사카 대실업자가 육군 어용 상인과 함께 상경해, ‘아라키(荒木. 육군대신 역임) 대장’ 등과 회의를 해서 3천 명의 창부를 보내기로 하고, 오사카 부의 구조(九条) 경찰 서장과 나가사키 현 외사과의 편의를 받았다. 구조 경찰서가 작부의 '공모 증명'을 발부한 사실도 드러나자, 용의자는 풀려났다.

 

"위안소는 군 시설" 경찰도 군의 위안부 모집에 협력

 

이 문서에는, 와카야마 현 경찰의 문의를 받은 나가사키 현 외사 경찰 과장의 회답도 있다. 거기서 나타난 것이,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이 나가사키 현의 미쓰카미 경찰 서장에게 위안부의 모집과 상하이로의 도항에 관한 협력을 요구한 ‘황군 장병 위안 부녀 도래에 대해 편의 제공을 의뢰하는 건’(1936년 12월 21일자)이라는 제목의 의뢰장이다. ‘승낙서’, ‘인감증명서’, ‘호적 등본’, ‘작부업자에 대한 조사서’ 등 필요한 서류를 소지하고, 합법적 고용계약에 따라 도항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받은 자에 대해서는 도항을 허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군이 지시한 위안부 3천 명의 모집에서 당초 범죄성을 인식했던 경찰은 결국 군과 함께 모집과 이송에 관여하게 됐다. 같은 일이 조선에서도 일어났다고 생각해야 하며, 위안부 모집은 경찰 수사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무성 경보국의 문서군을 분석한 나가이 가즈 교토대 교수는 "군의 관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 위안소는, 일본군이 군사상의 필요에서 소속 장병의 성욕 처리를 위해서 설치·관리한 장병 전용의 ‘위안 시설’이며, 군 편성의 일부가 돼 있었다. 그 점에서 민간업자가 불특정 다수의 손님을 위해 영업하고 있던 통상의 공창 시설과는 다르다. 위안소가 군의 시설인 한, 거기에서 이루어진 '위안부'에 대한 강제나 학대의 최종적인 책임이 군에 귀속되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세계』15년 9월호)

 

1990년대 중반에 철거되기 전까지 광화문 안쪽 경복궁에 자리잡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 1993년 촬영
 
 

안병직 "군부의 단순 관여 아닌 일본정부의 전시동원"

 

이영훈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낙성대 경제연구소'의 창설자 안병직 서울대 명예 교수는 버마와 싱가포르 위안소에서 회계 업무를 맡고 있던 박치근이라는 인물이 남긴 일기를 입수해,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이숲, 2013년)를 출판했다. 위안소 경영에 종사한 인물의 기록은 매우 드물어 위안부 문제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다. 그 일기 속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안병직 번역 해제

 

7월 초 랑군의 위안소를 경영하는 가네다 씨는 위안부 모집을 위해 조선에 갔다가, 이번에 위안부 25명을 데리고 버마로 가는 도중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1943년 12월 3일)

[싱가포르의] 생선(生鮮)조합에 가니 재작년 위안대(慰安隊)가 부산을 출발했을 때 제4차 위안단(慰安団) 단장으로 온 쓰무라 씨가 생선조합 요원이 돼 있었다. (1944년 4월 6일)

 

남방에 간 위안부 수천명일 수도...‘위안단’ 6차례 이상

 

쓰무라라는 인물이 단장을 맡은 '제4차 위안단'이란, 버마의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들을 1942년 7월 10일 부산을 출항한 군용선에 태워 남방으로 이송한 일단임이 거의 틀림없다. 미군의 '심문 보고 49호'는 조선인 여성이 703명, 그 인솔자인 포주가 약 90명 승선했다고 기록했다. 라모와 텅위에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여성의 경우 조선을 떠난 것은 다음해인 1943년 7월이었다. 같은 군용선에 약 300명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회계 일을 한 박치근의 일기에서는 1943년 12월에도 위안단이 싱가포르에 도착한 것처럼 돼 있어서, 위안단은 적어도 6회, 아마도 그 이상이 남방으로 이송된 것으로 생각된다. 군에 의한 조직적인 위안부 이송의 실태를 엿볼 수 있는 일기의 내용을 토대로, 안병직은 그 책의 ‘해제: 제4차 위안단’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이 전시 동원체제의 일환으로 수행된 것으로 생각했다.

 

"만약 일본 군부가 조선총독부 및 조선군 사령부의 협력을 얻으면서 위안소 업자들에게 위안부를 모집시켜 당시 풍문으로 떠돈 것과 같은 '제1, 2, 3, 4차 위안단' 등을 조직하고 순차적으로 동원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일본 군부의 단순한 '관여'가 아니라 징용·징병 및 정신대와 같은 '일본 정부에 의한 전시동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비전투지역이었던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투지역에서 빈발한 납치와 같은 강제동원(협의의 강제동원)은 필요없었고, 가난한 농민의 딸들을 노린 유괴와 같은 인신매매나 사기를 통한 위안부 모집이 횡행했다. 설사 당시의 사회에서 합법이었을지라도, 그것은 전시동원의 일환으로 실시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만큼 광의의 강제동원이 있었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에서 위안부의 모집이 총체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행해져,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지적한 것은, 국가에 의한 강제성을 인정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반관반민의 '아시아 여성기금' 보상사업, 그리고 정부가 10억 엔을 출연한 '화해·치유재단'은 담화를 답습한 일본정부가 도의적·법적 책임에 부응하려고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 노력에 정치적 타산이 있었다고 해도 국가권력이 관여한 강제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를 갖다 대더라도 불가능하다.

 

참고자료

 

【일본 자료】

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編 「政府調査「従軍慰安婦」関係資料集成①警察庁関係公表資料」、1997年

和田春樹 「政府発表文書にみる「慰安所」と「慰安婦」」『「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財団法人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1999年

浅野豊美 「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同

西野瑠美子 『戦場の「慰安婦」』明石書店、2003年

尹明淑 『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明石書店、2003年

遠藤美幸 「戦場の社会史:ビルマ戦線と拉孟守備隊1944年6月―9月」慶應義塾経済学会、2009年

永井和 「日本軍の慰安所政策について」、2012年

山本晴太 「日韓請求権協定解釈の変遷」、 2014年

永井和 「破綻した「日本軍無実論」」『世界』2015年9月号

【한국 자료】

정진성 <일본군 성노예제>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6년

안병직 번역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년

정진성 편저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 자료 ⅠⅡⅢ> 선인 2018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19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미래사 2020년

【미국 자료】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 United States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October 1,1944

Interrogation Bulletin No2, South-East Asia Translation and Interrogation Center, November 30,1944

CBI Roundup, November 30,1944, cbi-theater.com

(https://www.cbi-theater.com/roundup/roundup113044.html)

Korean and Japanese Prisoners of War in Kunming,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China Theater, April 28,1945

Research Report No.120, Allied Translation and Interpreter Section, November 15,1945

Chan, Won-Loy, Burma, The Untold Story, Preside Press, 1986

Ravenholt, Betty, West Over the Seas to the Orient, 2009

Cornebise, Alfred Emile, Soldier Extraordinaire, 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19

(https://www.armyupress.army.mil/Portals/7/combat-studies-institute/csi-books/soldier-extraordinaire-the-life-and-career-of-brig-gen-frank-pinkie-dorn.pdf)

일본군 ‘위안부’들은 과연 일본군의 ‘전우’였을까?

배연홍 시사 저널리스트mindle@mindlenews.com다른 기사 보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 ③]
관자놀이에 총 맞은 20구 넘는 ‘위안부’ 시신
모두 스스로 자신들의 관자놀이를 쐈을까?
“일본군이 총살” vs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
버마로 이송된 조선인 ‘위안부’ 1천명 이상
미군 사진 속 만삭의 ‘위안부’는 남포 출신 박영심
“그들의 존재이유는 일본군 ‘성욕 배출구’였을 뿐”

배연홍 국제분쟁 전문 시사 저널리스트

학살인가, 자결인가?

 

그런데 (사망한) 여성들이 일본군에 학살당한 것이라는 중국 쪽 자료가 발견됐다. ‘텅충 전역기간 장군계(騰沖戦役期間 将軍系)’(1981년)라는 자료를 입수한 저널리스트 니시다 루미코가 저서 <전장의 ‘위안부’>(아카시 서점, 2003년)에서 밝혔다. 이 자료에 시신들이 있던 현장 상황에 대해 사진 6의 중앙에 찍힌 중국군 장자오카이 중대장이 회상한 내용이 나온다. 귀중한 자료이므로 니시다가 저서에서 소개한 부분을 인용한다.

 

관자놀이에 총 맞은 20구 넘는 ‘위안부’ 시신

 

일본군을 섬멸하고, 우리 군이 전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서문 성벽의 흙 구덩이에서 3명의 여성을 발견했다. 연령은 20세 전후, 용모 단려(端麗, 단정하고 아름답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들은 마치 활을 본 것만으로도 도망치는 새처럼 너무 놀라고 겁을 먹은 채, 총살당할까 두려워했다.

 

자세히 물어 보니 그녀들은 원래 대만의 동포였는데, 일본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군기(軍妓, 위안부)가 된 여성들이라는 것이었다. '군기원'(軍妓院, 위안소)에 있었던 것은 이 세 사람만이 아니었다.

 

필자(장자오카이)가 텅위에(텅충) 성내에 들어가 전투가 끝난 뒤 성내를 돌고 있었을 때, 인간이 타는 악취가 가득하고, 여기저기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토굴에 큰 구덩이가 있고, 거기에는 20구 이상의 시신이 있었다. 화장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립스틱을 바르고 있고 유행하는 옷을 입은, 가슴이 반쯤 보이는 반나체 상태였다. (그들은) 모두 군기의 시신으로, 구덩이 안에 흩어져 있었다.

 

그녀들의 몸에 총상 흔적은 없었고, 단지, 좌우의 관자놀이에 총에 맞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왼쪽에서 쏜 한 발의 총탄이 오른쪽으로 관통해 생명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은 일본군이 전멸하는 마지막 날에 탈출·돌파를 결정했을 때, 군기의 생명을 지켜 주려 하지 않고 한 사람씩 그 자리에서 총살해 서둘러 구덩이에 유기했지만, 흙을 덮어씌울 여유도 없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흙 구덩이에 숨어 있던 세 명의 여성은 아마 일본병이 혼란스러워한 나머지 잊어 버리는 바람에 목숨을 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들 세 명은 행운이었다. 세 명은 우리가 대만으로 돌려 보냈다.

 

일본군 ‘위안부’에 소속된 중국인 소녀가 미얀마 랑군(양곤)의 한 캠프에서 들것에 앉아 심문을 기다리고 있다. (1945년 8월 8일)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일본군의 텅위에 전멸 다음날인 1944년 9월 15일에 찍힌 여성들의 시신. 중앙 안쪽에 있는 사람이 중국군의 장자오카이 중대장으로 생각된다. 제164통신 사진중대 프랭크 맨워런 기능 5등병 촬영.
 

모두 스스로 자신들의 관자놀이를 쐈을까?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시신들을 토굴에서 참호로 운반한 뒤 찍은 것이 사진 6이었던 것 같다. 텅위에에는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등 모두 50명 정도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한다.

 

시신이 조선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명이나 되는 여성들 모두가 왼손잡이로 스스로 자신들을 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일본군 병사가 지근 거리에서 관자놀이를 쏘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당시 텅위에에 있던 중국인 신문 기자가 위안부에 관한 기사를 쓰고, 나중에 <텅위에 일보>에도 전재된 '텅위에에서의 전지(戰地) 기자의 보고'(1946년 9월 14일자)라는 기사에도 학살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었다.

 

저널리스트 니시다 “자결이 아니라 일본군이 총살”

 

학살을 면한 10세 전후의 1명의 중국인 소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멸하기 직전의 새벽, “갑자기 한 명의 일본 군인이 와서 총으로 13명의 영기(營妓, 위안부) 생명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이들 중국측 자료를 토대로 위안부들은 “자결한 것이 아니라 일본 군인에게 총살당했다”고 니시다는 결론을 내렸다.

 

라모와 텅위에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들은 중국군 사령부가 있는 쿤밍의 시설에 수용돼 조사를 받았고, 미군도 각서 형태로 기록을 남겼다. ‘전략 정보국(OSS)’(CIA의 전신)의 중국 전역(戰域) 관련 문서 ‘쿤밍의 조선인 및 일본인 포로(KOREAN AND JAPANESE PRISONER OF WAR IN KUNMING)’(1945년 4월 28일자)에 따르면, 포로가 된 사람은 조선인 25명(여성 23명, 남성 2명), 대만인 1명(남성), 일본인 81명(여성 4명, 남성 77명)이었다. 장자오카이의 회상 속에 있는 대만인 위안부 3명의 기록은 빠져 있었다. 조선인 여성의 경우 23명 가운데 10명이 라모, 13명이 텅위에에서 포로가 되었고, 포주 1명을 제외한 22명이 위안부였다.

 

중국군 보병 리시후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

 

돈 준장의 평전에 등장하는 중국군 보병 '리시후'는 “여성들은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고 증언했으나, 장자오카이 중대장은 “군기들의 생명을 지켜 주려 하지 않고 한 사람씩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고 회상했다. 중국측 자료가 사실이라면 확실히 그녀들의 자결은 물리적으로 어렵고, 사살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사람씩 총살했다는 장면을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들이 방공호 속에 숨어 있었다면, 수류탄으로 한꺼번에 죽이면 되는데, 왜 한 사람씩 총살했을까. 그리고 관자놀이를 관통당한 그녀들은 왜 가만히 죽임을 당했을까. 무엇보다도 무엇 때문에 그녀들을 처형해야 했는지…

 

중국군의 총공격을 받고 있던 수비대에 20명 이상의 위안부를 학살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식사나 세탁, 탄약 운반까지 하고 있던 위안부들을 마치 “전우”처럼 생각했던 일본군 병사는 많았다고 한다. 위안소의 정보가 적에게 누설되는 것이 두려워 처형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아마 여성들은 중국군에게 붙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도 상상일 뿐이지만, 일본군이 옥쇄하는 가운데, 군인이 시키는 대로 함께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미군은 위안부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겼으며, 사진 촬영까지 했다. 현장에서 학살 정보를 얻었다면, 대일 심리전에 좋은 재료가 됐을 테니 상세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미군은 앞서 언급한 문서에서,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한 조선인 여성들의 성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만약 학살 조짐이 있었다면, 같은 처지에 있던 그녀들이 뭐든 증언을 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위안소 입구.  오른쪽에 "성전 대승의 용사 대환영", 왼쪽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야마토 나데시코의 서비스"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야마토 나데시코'는 패랭이꽃인데, 일본여성에 대한 미칭이다.   위키백과 
 

2018년 3.1절 공개 ‘학살당한 위안부’ 사진은 그 20년 전 이미 공개

 

아사노가 논문을 발표한 지 약 20년 뒤인 2018년, 서울시가 ‘3·1절’(1919년 3월 1일의 독립 운동을 기념하는 날) 99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국제회의 회의장에서 텅위에에서 학살당한 위안부의 흑백 필름 영상(사진 7. KBS 화면에서 캡처)이 공개돼 한국 언론이 크게 보도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영상(19초)을 발견한 것은 서울시의 지원을 받은 서울대 정진성 교수의 연구팀이었다. 연합뉴스(2018년 2월 27일자)에 따르면 일본군에 의한 학살을 입증하는 최초의 영상이며, “조선인 여성 30명이 총살당했다”고 전하는 연합군의 문서도 함께 공개됐다.

 

이 연구팀은 그 행사 2년 전에 같은 현장을 찍은 사진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찾아냈고, 그 뒤의 조사에서 관련 영상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1년에 걸쳐 분석한 뒤 공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조사를 주도한 정진성은 “일본정부가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을 부정하고 있는 가운데, 전쟁 말기에 조선인 위안부들이 놓여져 있던 상황과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그 2년 전에 발견됐다는 그 사진은 20년 전 아사노의 논문에서 공개된 시신들의 현장 사진과 동일한 것이었다. 앞서 얘기한 <전장의 '위안부'>에도 실려 있어서 연구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사진이다.

 

영상 공개에 맞춰 출판된 <일본군 '위안부'관계 미국자료(ⅠⅡⅢ)>(정진성 편저, 2018년 선인)에 서울대 연구팀이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미군 자료가 함께 공개됐다. “30명을 총살”했다고 기록한 문서는, Y군의 보고 일지 ‘G-3 Daily Diary’의 1944년 9월 15일자에 들어 있었다. 증언자는 미치나에서 그 몇 개월 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텅위에로 이송된 버마인 저격수였다. 영국군 포로가 일본군 손에 처형당한 정보와 아울러 “(텅위에 함락 전날 밤인 1944년 9월) 13일 밤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고만 증언하고 있다. 목격담인지 전문(傳聞. 전해 들은 말)인지는 모른다. 전문이라면 돈 준장의 평전에 등장하는 중국군 보병 '리시후'가 증언한 “여성들은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는 내용 쪽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1944년 10월 1일 미군이 작성한 버마 미치나의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보고서    위키백과
 

최초의 기록 발견자는 재미 역사학자 방선주

 

정진성이 영상을 공개하기 2년 전에 출판한 <일본군 성노예제>(서울대출판문화원, 2016년)를 읽어 보니, 이 책에 이 기록의 존재가 이미 지적돼 있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이 기록을 발견한 것은 재미 역사학자 방선주로, 1997년 8월에 한국의 민방 MBC에서 소개했다고 한다. 사진도 기록도 20년 전에 발견된 것이고, 단지 그 관련 영상이 발견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자결을 강요했다고 해도 전쟁범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자결과 학살은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이러한 영상들이나 문서를 학살의 증거로 삼는다면 좀 더 설득력 있는 논증이 되어야 했다. 더욱이 문제는 한국 언론의 센세이셔널한 보도로 '학살'이 기정 사실로 혼자 앞질러 가 버린 것이다.

 

조사를 주도한 정진성은 '한국정신대 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현재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공동대표를 맡은 운동가로도 알려져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의 자문위원을 맡아 이 영상이 공표되기 전 해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위원(임기 3년)으로 선출됐다. 영상을 공개한 지 반년 뒤에는 제네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회의에서 사용된 '성노예'라는 표현을 둘러싸고 일본정부 대표와 설전을 벌이며 주목을 받았다. 성노예라는 말에 집착하는 데에는 예사롭지 않은 점이 있는데, 이는 당시 정대협의 영어 명칭이 ‘일본군 성노예제도에 의해 끌려간 여성들을 위한 한국위원회」였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위안부들이 성노예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단정적인 견해는 실상을 왜곡하고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버마로 이송된 조선인 ’위안부‘는 1천 명 이상

 

라모와 텅위에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여성들의 출신지는 북쪽의 평안도에서 중부 경기도, 남쪽 경상도까지 다양하다. 미 전략정보국 문서에 따르면, 그녀들 중 15명이 조선을 떠난 것은 1943년 7월이었기 때문에 징집 당시 평균 연령은 23세 정도였다. 싱가포르 공장에서 일한다는 신문의 모집 광고에 응하는 등 여기에서도 속아서 이끌려 온 여성들이 많아, 같은 배로 적어도 300명의 여성이 남방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녀들보다 1년 먼저 버마에 보내진 미치나 위안부의 경우, 같은 배에 약 700명의 여성들이 타고 있었다. 전황(戰況) 악화 때문인지 위안부 동원 규모가 (그 1년 전보다) 조금 축소된 것처럼 보인다.

 

북버마의 전장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는 모두 42명으로, 이름이나 출신지 등 개인정보에다 사진까지 발견됐지만, 신원은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미치나의 포로들을 추적한 KBS가 그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은 여성을 제시했지만 이미 사망했다. 그 여성은 종전 뒤 계속 중국에 남아 10년 정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종전 무렵에 출산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도 있는 것 같다.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 중에는 자신이 임신 초기였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인도에서 구류생활을 하던 중에 출산한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라모에서 포로가 된 만삭의 위안부는 반세기 이상 지나도록 북한에서 생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김학순이라는 피해여성이 처음으로 공개 증언에 나선 이듬해(1992년)에 북한에 '종군위안부·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나중에 '조선일본군 성적 노예 및 강제연행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조대위]로 개칭)가 발족해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호소했다. 1998년까지 신고자 수는 218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43명이 공개 증언에 응했다. 이 시기에 도쿄에서 결성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가 예전 일본군의 '위안부 제도의 책임자'를 심판하는 민간법정 '여성 국제전범 법정'을 여는 것을 제창했고 북한도 호응했다.

 

지난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1655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2024.7.3. 연합뉴스
 

미군 사진 속 만삭의 ‘위안부’는 남포 출신 박영심

 

텅위에의 중국측 자료를 발굴한 니시다가 전 일본군 병사의 증언이나 전기(전쟁기록)의 기술과 북한의 신고자 정보를 대조하고 확인해, 미군의 사진에 찍힌 만삭의 위안부가 박영심(2006년 사망)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박영심은 포로가 되자마자 사산한 뒤 쿤밍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종전 직후 포로가 된 조선인 여성들은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인도돼 종전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위안부가 된 지 7년 뒤(1950년) 박영심은 마침내 조선 북부에 있는 고향 남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00년 8월 평양을 찾은 니시다와 면회한 박영심은 "지금까지 임신한 것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일본군의 아이를 뱄다는 게 너무 굴욕적인 일이어서 도저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 (<전장의 ‘위안부’>)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같은 해 말 도쿄에서 열린 여성 국제전범 법정에 참여하기 위해 박영심은 태어나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일본행을 결심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심판받는지 이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쇼와 천황(히로히토)에 유죄 판결을 내린 이 민간 법정은 보수 측으로부터 ‘극좌 프로파간다’라는 비난을 받은 파란의 이벤트가 됐다. 라모의 전멸전에서 살아남은 박영심은 반세기 뒤의 일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1655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일본 시민 사회단체 활동가 등이 참여하고 있다. 2024.7.3. 연합뉴스
 

‘위안부’는 과연 일본군의 ‘전우’였을까?

 

라모에서 살아남은 일본병사들의 청취 조사를 한 작가 엔도 미유키가 2009년에 발표한 ‘전장의 사회사: 버마 전선과 라모 수비대의 1944년 6월-9월’에 따르면, 라모와 텅위에의 포로가 수용된 쿤밍의 수용소 생활은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박영심을 잘 아는 일본군 상병 출신의 하야미 마사노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쿤밍의 수용소에서) 와카하루 [박영심의 위안소에서의 이름] 씨는 잘 챙겨 주었고, 세탁 등을 하러 자주 와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니 유스케 하사관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와카하루 씨는 일본어도 잘 하고, 일본 노래도 잘 불렀으며, 자주 유행가를 불러 주었습니다. 매우 쾌활하고 기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재회한 병사와 위안부들이 오랫동안 힘들었던 라모의 나날들을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생사를 함께 한 일본군 병사들과 위안부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과 관련한 생각을 나눈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위안부' 소녀상
 

작가 엔도 ”그들은 일본군 ‘성욕 배출구’였을 뿐“

 

하지만 일본군 병사 출신자들을 청취 조사한 엔도는 그들이 위안부를 '전우'라고 부르고 있던 것에 위화감을 느끼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녀들의 존재 이유는 장병들의 성욕 배출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여성들의 치욕과 고통, 원한은 몸과 마음에서 평생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들은 모두 식민지에서 태어나 열등의식에 시달리며 자랐다. 거기에다 위안부를 강제당한 신세였다. 병사들의 전우였을 리가 없다. 적군의 손에 구출됐지만 긴 위안소 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들의 몸에 스며든 당시의 행동이나 언동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굴욕적인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매춘의 실태라고 주장해도,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군이 관여한 사실이 밝혀져 있는 이상, 여성들의 인권을 짓밟은 국가범죄라는 비난과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참고자료

 

【일본 자료】

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編 「政府調査「従軍慰安婦」関係資料集成①警察庁関係公表資料」、1997年

和田春樹 「政府発表文書にみる「慰安所」と「慰安婦」」『「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財団法人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1999年

浅野豊美 「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同

西野瑠美子 『戦場の「慰安婦」』明石書店、2003年

尹明淑 『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明石書店、2003年

遠藤美幸 「戦場の社会史:ビルマ戦線と拉孟守備隊1944年6月―9月」慶應義塾経済学会、2009年

永井和 「日本軍の慰安所政策について」、2012年

山本晴太 「日韓請求権協定解釈の変遷」、 2014年

永井和 「破綻した「日本軍無実論」」『世界』2015年9月号

【한국 자료】

정진성 <일본군 성노예제>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6년

안병직 번역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년

정진성 편저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 자료 ⅠⅡⅢ> 선인 2018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19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미래사 2020년

【미국 자료】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 United States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October 1,1944

Interrogation Bulletin No2, South-East Asia Translation and Interrogation Center, November 30,1944

CBI Roundup, November 30,1944, cbi-theater.com

(https://www.cbi-theater.com/roundup/roundup113044.html)

Korean and Japanese Prisoners of War in Kunming,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China Theater, April 28,1945

Research Report No.120, Allied Translation and Interpreter Section, November 15,1945

Chan, Won-Loy, Burma, The Untold Story, Preside Press, 1986

Ravenholt, Betty, West Over the Seas to the Orient, 2009

Cornebise, Alfred Emile, Soldier Extraordinaire, 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19

(https://www.armyupress.army.mil/Portals/7/combat-studies-institute/csi-books/soldier-extraordinaire-the-life-and-career-of-brig-gen-frank-pinkie-dorn.pdf)

미군 일등병이 찍은 역사적 특종사진-만삭의 ‘위안부’

배연홍 시사 저널리스트mindle@mindlenews.com다른 기사 보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 ②]
구출된 위안부들을 세계에 처음 알린 UP 특종 보도
숭산의 위안부 24명, 보수도 고향 편지도 받지 못해
잊혀진 2차 세계대전 참극 윈난성 ‘라모 공방전’
여성들은 모두 권총으로 자결?
텅위에 전투 때 숨진 위안부들, 학살일까 자결일까

배연홍 국제분쟁 전문 시사 저널리스트

미군 병사들이 촬영한 위안부들

 

미치나 수비대가 결사적인 탈출을 시도할 무렵, 중국 국민당군과 대치하던 윈난성의 라모(拉孟)에서도, 일본군은 전멸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본군은 앞서 말한 ‘원장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1942년 5월 버마에서 윈난성의 누장(살윈강)까지 공격해 들어가 이 루트상의 라모에 최전선 진지를 구축했다. 누장 서안에 있는 해발 1500~2000m의 산들에 여러 방어진지를 구축해 진지와 토치카를 잇는 교통호(참호)를 둘러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진지는 중국 측에서 숭산(松山)으로 불렸으며, 깊은 계곡을 흐르는 누장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계속 마주보는 형세였다.

 

잊혀진 2차 세계대전 참극 윈난성 ‘라모 공방전’

 

일본군이 라모를 점령한 지 2년째인 1944년 6월 초, 중국군 제8군은 7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누장을 건너 총 공격을 개시했다. 보병 제113연대를 주력으로 하는 일본군 약 1200명의 고립 무원의 싸움이 그로부터 백일이나 계속된다. 소년병들이 많이 포함된 오합지졸의 중국군은 초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내지만, 8월이 되면 진지의 지하까지 갱도를 파고 들어가 총 6000파운드의 TNT 폭약을 설치했다. 폭파(8월 20일)는 진지의 언덕을 칼데라 분화구처럼 함몰시킨 엄청난 위력이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일본군의 저항은 계속되지만, 9월 7일, 결국 전멸했다.

 

연합군과의 공방전 끝에 일본군이 전멸한 라모 전투가 벌어진 중국 남단 윈난성. 버마(미얀마)와 긴 국경을 접하고 있다.   위키백과
 

한편 인해전술을 취한 중국 측의 희생도 커서, 전사자가 7000명이 넘었다. 그리고 1주일 뒤인 9월 14일에는 80㎞ 떨어진 텅위에의 일본군도 전멸해, 북버마에 있던 일본군은 완전히 소탕됐다.

 

라모 공방전은 제2차 대전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곳에서 벌어져 중일 양쪽이 엄청난 희생자를 낸 처참하기 짝이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전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민당의 대일전 승리를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중국·버마·인도(CBI)' 전역(戰域)은 '제2차 대전의 잊혀진 전역'으로 불리며 양군이 명운을 건 라모의 사투 등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전멸한 일본군 쪽은 살아남은 병사들의 회상록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 라모가 다시 각광받게 된 것도 1990년대 초의 조사로 위안부의 존재가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사진 2

라모 수비대 전멸 뒤인 1944년 9월 7일 중국군의 포로가 된 4명의 조선인 위안부. 오른쪽 끝 만삭의 여성이 박영심.(제164통신 사진중대 찰스 해트필드 일등병 촬영)
 

미군 일등병이 찍은, ‘위안부’ 문제 상징 역사적 사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된 라모의 사진(사진 2)에 찍힌 것은 더러워진 옷을 입은 맨발의 위안부 4명과 이들을 구출했던 한 명의 중국인 병사다. 여성 중 한 명은 임신부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촬영한 것은 미 육군의 ‘제164 통신(시그널) 사진중대’ 소속의 해트필드 일등병. 구출 직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 설명은 숭산에서 중국 제8군의 포로가 된 4명의 조선인 여성, 촬영일은 '9월 3일'로 돼 있다. 이것이 나중에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진이 되리라고는, 촬영자인 일등병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3

1944년 9월 8일, 중국인 장교의 심문을 받는 라모의 조선인 위안부.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미군 연락팀의 아서 빅슬러 하사관(제164통신 사진중대 G.L. 코크렉 5등 기능병 촬영).

 

사진 4

라모 수비대 전멸 후인 1944년 9월 7일 중국군에 의해 구출된 직후로 보이는 박영심이 만세를 부르는 장면. 제164통신 사진중대의 에드워즈 페이 하사관 촬영(KBS 화면에서 캡처).

 

사진 5

라모 수비대 전멸 뒤인 1944년 9월 7일, 중국군에 구출된 직후로 보이는 조선인 위안부들. 사진 2에서는 왼쪽에서 두 번째 여성,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여성은 오른쪽에서 두 번째. 제164통신 사진중대의 에드워즈 페이 하사관 촬영(KBS 화면서 캡처).
 

또 한 장의 사진(사진 3)에는 4명의 여성이 중국군 제8군 장교(신카이 대위)의 심문을 받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촬영일은 5일 뒤인 9월 8일. 신 대위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미군 연락팀의 아서 빅슬러 하사관이라고 설명에 적혀 있다. 라모에는 위안부가 24명 있었다고 하며,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의 일본인 위안부를 포함해 10명이었다. 그러나 라모 수비대의 전멸은 9월 7일이므로 사진 2의 촬영일이 9월 3일이라면 중국군의 포탄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구출된 셈이 된다.  또 9월 3일이라면 구출되고 나서 5일이 지나서야 심문이 이뤄졌다는 얘기여서, 이 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구출된 위안부들을 세계에 처음 알린 UP 특종 보도

 

이 사진들을 찍은 미군의 '사진 중대'는 보통 스틸 카메라맨 1명과 무비 카메라맨 2명으로 팀을 짜 전장을 기록했다. 2020년 KBS가 이 사진 중대가 촬영한 필름 영상을 발굴해 구출 당시 생생한 상황을 메인 뉴스 프로그램(2020년 5월 28일)으로 보도했다. 사진 2에 찍힌 만삭의 위안부가 같은 사진에 찍힌 중국군 병사의 손을 잡고 카메라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장면(사진 4. KBS 화면에서 캡처)이 비춰졌다. 웃고 있지만 그 표정은 어딘가 어색하다. 다른 여성들의 표정도 굳어 있고 불안해 보인다(사진 5). 중국군에 붙잡히면 강간당한 뒤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상(사진 5)에서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여성은, 사진 2에서는 만삭의 위안부 옆에 있는 여성인데, 거기에서는 피가 닦여져 있다. 구출 직후 만세를 부른 뒤 어딘가에서 쉬고 있을 때 찍힌 것이 사진 2였던 것 같다. KBS도 영상 촬영일을 9월 7일로 추정하고 있으며, 포격 종료 뒤 잔존병 소탕작전에서 발견됐다면 다음날 심문(사진3)이 있었던 것도 납득이 간다. 사진 2의 촬영일 '9월 3일'은 기재 실수로, 일본군이 전멸한 9월 7일 찍은 것이었다.

 

숭산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들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귀중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다. CBI(중국 버마 인도) 전역의 미군 병사들 사이에서 읽혀진 '라운드업'(1944년 11월 30일자)이라는 주간신문에 게재된 '잽(일본) 컴포트 걸즈'라는 특종 기사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위안부 보도다. 기자는 UP 통신사(나중에 UPI 통신사)의 월터 랜들. 당시 충칭에 있던 UP의 중국 지국장이었다. 살윈강(누장) 전선발로 여겨지는 기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숭산의 위안부 24명, 보수도 고향 편지도 받지 못해

 

일본은 살윈 전선에 있는 숭산, 그밖의 큰 요새에 여성들을 데려갔다. 중국군 부대와 함께 행동한 미군의 연락 장교는 텅위에에서 이 일본 만행의 증거와 처음으로 마주쳤는데, 한 명의 조선인 여성이 근처의 폭격으로 일본군의 무기 더미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만주를 탈출한 뒤 지금은 미군을 위해 일하는, 일본어를 구사하는 중국인 학생의 도움으로 숭산의 5명의 불쌍한 여성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중 4명은 농민의 딸로 24세부터 27세 나이였다. 그녀들이 입은 서양식 면 옷은 싱가포르에서 샀다고 한다.

 

낮은 걸상에 앉은 그녀들은 미국제 담배를 게걸스레 피우면서 몇 달에 걸친 포격의 충격에서 점차 벗어나 안정돼 갔다.

1942년 이른 봄에 일본의 관헌들이 그녀들이 사는 평양의 마을에 왔다고 한다. 선전 포스터를 붙이거나 강연을 열어, 일본인들은 WAC(미 육군 부인부대)와 같은 조직을 통한 모집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것은 싱가포르에 가서 후방에 있는 비전투지역 기지에서 일본군 병사를 돌보거나 병원에서 오락 등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4명 모두 돈이 어떻게든 필요했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은 농민인 아버지가 무릎을 다쳤기 때문에, 그녀가 모집에 응하는 대가로 1500엔(약 12달러)이 주어져 아버지의 치료비로 지불됐다. 18명으로 구성된 그녀들 일행은 1942년 6월 조선을 출항했다.

 

[중략] 일행이 살윈 전선의 숭산에 도착하자, 그녀들 4명은 같은 소탕 작전으로 포로가 된 35세의 일반적인 일본인 매춘부인 5번째 여성의 감독 아래로 들어갔다. 숭산에는 모두 24명이 있었다. 그녀들은 병사의 세탁, 요리, 살았던 참호의 청소도 했다. 보수, 고향에서 보내 온 편지는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군 상층부가 중시했던 구출 위안부들 조사

 

이 기사에는 그녀들이 구출된 직후의 내용이 씌어져 있지만, 인터뷰의 일자나 장소가 특정되어 있지 않다. 읽어 보면 만주를 탈출한 중국인 학생으로부터 들은 전문인 것 같기도 하다. 또 검열이 있었기 때문인지, 기사는 구출 3개월 후에 게재됐다.

 

랜들 기자에 대해서 조사해 보니, 같은 시기의 UP 중국 지국에 앨버트 레이븐홀트라는 다른 기자가 있었는데, 관련 서적(<바다를 서쪽으로 건너가 동양에>)의 기술을 통해 그도 라모 공방전을 취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븐홀트는 1945년 4월 랜들로부터 중국 지국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라모 수비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한 8월 20일의 대폭파 현장은 뉴스위크 특파원인 해럴드 이서크와 함께 취재했다. 라모 수비대가 전멸한 뒤 레이븐홀트 기자는 통역의 도움으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의 인터뷰에 성공했지만, 돈 장군의 강한 압력으로 기사로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돈 장군이 누구인지 조사를 해 보니, 미 육군 CBI(중국 버마 인도) 전역 사령관 조지프 스틸웰 장군의 최측근 프랭크 돈 준장이었다. 레도 공로의 구상자이기도 한 스틸웰 장군은 버마 탈환을 위해 인도로 불러들인 중국군 병사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해 미치나 공략에서 활약하는 'X군'을 창설한다. 동시에 윈난성에서도 'Y군'을 만들고 북버마에서 일본군을 사이에 끼워 넣어 협공했다. Y군은 중국군의 총공격이 시작될 무렵부터 '중국 원정군(CEF)'이라 불리며 숭산과 텅위에의 탈환에 성공한다. 중국 유학 경험이 있는 돈 준장은 쿤밍을 거점으로 한 Y군을 지휘한 인물이었다. 교착 상태의 라모 공방전에서 일본군을 몰아붙였고, 그 대폭파도 그의 지휘 아래 미군이 대량의 폭약을 운반해서 실시한 것이다.

 

아마도 돈 준장은, 사진 3에 찍힌 미군 병사(미군 연락팀의 아서 빅서 하사관)로부터 위안부의 심문 내용과 UP 기자의 취재 사실을 알고, 기사의 보도 금지를 요구했을 것이다. 바로 그 무렵, 인도의 레도에서는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의 심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선에서 잇따라 포로가 된 위안부들을 미군 상층부에서 중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심문 보고 49호'가 제출된 10월 이후에 엠바고(보도 유예)가 해제되자 랜들 지국장이 다시 작성해서 전달했던 것일까.

 

1944년 6월의 텅위에 전투에서 연합군의 피해를 시찰하는 미 육군 CBI 전역의 프랭크 돈 준장(돈 준장 평전에서)..
 
누장(살윈강)을 건너 라모로 진군하는 Y군(돈 준장 평전에서)
 

발목이 사슬로 연결된 채 전멸한 일본군 병사들

 

돈 준장의 평전 <비범한 병사>(미 육군 전투사 연구소 [CSI] 출판, 2019년)라는 책에 알려지지 않은 CBI 전역에서의 Y군의 형성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하지만, 돈 준장 자신이 관여한 숭산의 위안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기술이 하나 있었다. 라모에 이어 텅위에가 중국군에 점령된 9월 15일, 일본군의 대부분은 자결했거나 부상자도 그들의 전우 손에 살해당한 것으로 전한 뒤, 현장을 목격한 중국군 보병 리시후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컴포트 우먼[위안부](일본군이 이송한 매춘부)들이 있던 장소가 있었는데, 여성들은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 때때로 성내의 다른 장소에서 일본군 병사들이 아직 총격을 가해 오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압도적인 병력으로 즉시 그들을 포위해 죽였다. 적이 있던 장소를 점령해 보니 일본군 병사들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발목이 족쇄로 연결되어 한쪽 끝에 있는 큰 바위와 건물의 석재 기초에 고정되어 있었다. 병사들 근처에 소량의 캔과 식량이 있었고, 모든 병사들에겐 남아 있던 약간의 탄약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사슬로 연결된 군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놀라고 또 놀랐다! 전장에 사슬로 묶이다니! 도대체 어떤 적과 우리는 싸워 온 것인가?

 

텅위에 전투 때 숨진 위안부들, 학살일까 자결일까

 

라모와 텅위에의 위안부 실태는, 1990년대 후반 아사노 도요미 와세다대 교수의 조사로 처음으로 밝혀졌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이하 '아시아 여성기금') 자료위원회의 위원으로 정리한 '윈난·버마 최전선에서의 위안부들-죽은 자는 말한다‘(이 재단 홈페이지에서 공개)에는 아사노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한, 텅위에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복수의 위안부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텅위에의 성내와 성외의 2컷 있는데, (일본군) 전멸 다음날인 1944년 9월 15일에 ’사진 중대‘의 프랭크 맨워런(기능 5등병)이 찍었다. 그 중 성 밖의 사진(사진 6)에는 포격으로 불에 타 들판이 된 곳에 참호와 같은 구덩이가 있고, 몇 구의 시신이 방치돼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을 3명의 중국군 병사가 내려다보고 있는데, 시신의 부패가 진행돼 악취가 났던지 수건 같은 것으로 코를 싸맨 병사도 보인다. 사진설명에는 "미심쩍어 하며 주춤거리고 있는 중국 병사", "대부분의 여성은 일본군 기지에 있던 여성들"이라고 적혀 있다. 이 여성들이 자결한 위안부들이었을까.

 

사진 6

일본군의 텅위에 전멸 다음날인 1944년 9월 15일에 찍힌 여성들의 시신. 중앙 안쪽에 있는 사람이 중국군의 장자오카이 중대장으로 생각된다. 제164통신 사진중대 프랭크 맨워런 기능 5등병 촬영.

 

사진 7

같은 장면을 찍은 흑백 영상. 제164통신 사진중대 볼드윈 1등병 촬영(KBS 화면에서 캡처).

 

참고자료

【일본 자료】

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編 「政府調査「従軍慰安婦」関係資料集成①警察庁関係公表資料」、1997年

和田春樹 「政府発表文書にみる「慰安所」と「慰安婦」」『「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財団法人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1999年

浅野豊美 「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同

西野瑠美子 『戦場の「慰安婦」』明石書店、2003年

尹明淑 『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明石書店、2003年

遠藤美幸 「戦場の社会史:ビルマ戦線と拉孟守備隊1944年6月―9月」慶應義塾経済学会、2009年

永井和 「日本軍の慰安所政策について」、2012年

山本晴太 「日韓請求権協定解釈の変遷」、 2014年

永井和 「破綻した「日本軍無実論」」『世界』2015年9月号

 

【한국 자료】

정진성 <일본군 성노예제>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6년

안병직 번역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년

정진성 편저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 자료 ⅠⅡⅢ> 선인 2018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19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미래사 2020년

 

【미국 자료】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 United States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October 1, 1944

Interrogation Bulletin No2, South-East Asia Translation and Interrogation Center, November 30, 1944

CBI Roundup, November 30, 1944, cbi-theater.com

(https://www.cbi-theater.com/roundup/roundup113044.html)

Korean and Japanese Prisoners of War in Kunming,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China Theater, April 28, 1945

Research Report No.120, Allied Translation and Interpreter Section, November 15, 1945

Chan, Won-Loy, Burma, The Untold Story, Preside Press, 1986

Ravenholt, Betty, West Over the Seas to the Orient, 2009

Cornebise, Alfred Emile, Soldier Extraordinaire, 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19

(https://www.armyupress.army.mil/Portals/7/combat-studies-institute/csi-books/soldier-extraordinaire-the-life-and-career-of-brig-gen-frank-pinkie-dorn.pdf)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반 이상이 10대 “하루 30명 상대”

2024-07-17 12:21 (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 ①]
미군이 작성한 조사 보고서로 드러난 일본군 만행
동남아 최전선에 끌려간, 주로 경상도 출신 어린 여성들
취업 거짓말에 속고 빚에 팔려 “매춘은 생각도 못해”
포주들, 일본군의 조직적 관여 아래 위안소 운영
보수 많았다지만 절반 이상 착취당하고 결국은 맨손

 

편집자 주

일제 강점기의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들은 끌려간 것인가, 가해자들의 주장대로 돈벌이를 위한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인가? 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모집’된 사람들이며, 모집 당시 몇 살들이었나? 그렇게 동원당한 그들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됐나? 그들은 어디에 배속돼 어떤 생활을 했으며, 얼마의 보수를 받아 어떻게 썼나? 실제로 그 돈을 소유하기는 했나?

일본 패전 뒤에도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먼 이역 땅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그들 ‘위안부’는 일본군에 학살당한 것인가, 자결한 것인가?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동지적 전우애’가 형성됐다는 일부 주장, 일본군의 위안부 모집, 이송, 위탁운영은 강제동원이 아니라 당시의 공창제도를 활용한 합법적 사업이었고 위안부들은 많은 돈을 벌었다는 일본 우익 논자들과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반일 종족주의> 필자들을 비롯한 한국 내 ‘뉴라이트’들의 주장은 사실인가?

 

많은 세월과 논란을 거쳤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일제 강점기의 가장 처절한 피해자들인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들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사실조차 거의 모른다.

 

재일동포 출신 저널리스트 배연홍은 <민들레>에 기고한 이 글을 통해 그들의 그런 ‘진실’에 더 깊숙이 접근한다. 침략자 일본군 병사들의 ‘성욕 배출구’로 철저히 착취당한 ‘위안부’들에 관한 일본정부와 군부 등 가해자들의 주장이 왜 뻔뻔한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지, 배연홍은 일본과 미국, 한국의 여러 증거자료들을 추적해 살피고 취재한 사실들을 토대로 냉정하고 차분하게 기술한다.

 

1955년 도쿄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 한국인 2세인 배연홍은 오랜 세월 ‘한반도 문제’를 비롯한 국제분쟁을 중심으로 일본의 신문 잡지와 TV 프로에 기고하고 협업해 온 시사 저널리스트다. 이 기고문은 2021년 하반기에 작성해 개인 블로그 ‘전쟁과 기억’에 올린 글을 토대로 한 것으로, 일본어 원문을 한글로 옮겼다. 그와는 1990년대 말 도쿄 특파원 시절에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 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을 모두 5차례로 나눠 연재한다.

 

한승동 에디터

 

배연홍 국제분쟁 전문 시사 저널리스트

 

1944년 미군이 작성한 조사 보고서

 

1944년 7월 31일, 버마(현 미얀마) 북부의 미치나에 틀어박혀 있던 1천 명 이상의 일본군이 야음을 틈타 진지 탈출을 감행했다. 같은 해 5월에 시작된 연합군의 맹공격으로 옥쇄 직전 상황에 처해 있던 미치나 수비대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탈출한 일본군 가운데 200명 가까운 병사들이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에 20명의 젊은 조선인 여성과 중년 나이의 2명의 일본인 남녀가 있었다. 그 머나 먼 최전선의 전장에 왜 민간인이 가 있었을까. 연합군의 포로가 된 여성들은 8월 15일 미치나에서 군용기로 인도 북동부의 레도 수용소로 이송돼 20일간에 걸쳐 심문을 받게 된다.

 

심문한 것은 미 육군 전쟁정보국(OWI) 심리작전반의 알렉스 요리치(3등 기능병)였다. 미 육군정보부(MIS)가 창설한 정보·프로파간다 기관인 OWI에는 일본계 2세 병사 중에서도 일본에 유학한 뒤 미국으로 돌아간 ‘귀국 2세’ 병사들이 많았다. 여성들은 요리치가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 제49호(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1944년 10월 1일자. 이하 「심문 보고 49호」)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위안부’라는 말을 번역한 ‘컴포트 걸즈’(comfort girls)로 소개됐다. 이미 태평양 전역에서도 확인됐던 일본군 위안부 실태를 처음 밝힌 미군 조사 보고서다.

 

1990년대 초에 이 보고서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발견돼, 그 해석을 둘러싸고 찬반양론의 논쟁이 벌어졌다. (일제에 동원당한 사람들의) 피해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문서인 동시에 가해 사실을 부정하는 쪽(일본) 주장의 근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찬반 어느쪽이든, 제3자인 미군 병사의 눈을 통해 위안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자료가 돼 있다.

 

주로 경상도 출신 ‘위안부’, 평균 22세, 절반 이상이 10대

 

「심문 보고 49호」의 표에는 포로가 된 20명의 위안부, 그리고 포주로 여겨지는 2명의 일본인 남녀의 성명, 연령, 주소가 알파벳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미군이 조선어의 발음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던 사정도 있어서, 부정확한 이름 표기가 많고 주소도 대략적인 지역을 나타내는 것 뿐이어서 인물들이 각기 제대로 식별돼 있진 않았다. 명부에서 특징적인 것은 20명 중에 15명이 한반도 남동부 경상도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진주(5명)와 대구(5명)에 집중돼 있었다. 포주의 이름은 남자가 '기타무라 에이분'(41세), 그 아내는 '기타무라 도미코'(38세), 주소는 경기도 경성(지금의 서울)으로 돼 있었다. 일행이 버마에 상륙한 것은 그 2년 전(1942년 8월)으로, 조선을 출발했던 당시 여성들의 평균 나이는 22세였다. 20세 미만의 여성이 절반이 넘는 11명이나 있었다. 최연소자는 경상북도 대구 출신의 17세로, 생존하고 있으면 현재 98세가 된다. 보고서는 그녀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42년 5월 초 (일본군이) 새로 정복한 동남아시아 영토에 조선인 여성들을 ‘위안 서비스’에 동원하기 위해 징집하는 일본 주선업자가 조선에 왔다. ‘서비스’의 성격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부상병을 위문하고 붕대를 감아주는 등 일반적으로 병사들을 기쁘게 하는 일로 여겨졌다. 주선업자의 권유방식은 많은 보수, 가족의 빚을 상환할 기회, 편한 일, 싱가포르에서의 새로운 생활 전망이었다. 이런 거짓 설명으로 많은 여성들이 해외 근무 징집에 응해 수백 엔의 선금을 받았다. 많은 여성들은 무지, 무교육 상태였으며,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매매춘)을 하고 있던 사람도 몇명 있었다.

 

업자의 감언에 속고 빚에 팔려 “매춘은 생각도 못해”

 

업자의 감언에 속아 빚으로 묶여 있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들 가운데 도시(경성과 평양) 출신자가 4명이어서 그중 몇 명이 매춘부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교육받지 못한 시골 여성으로, 전장에서 매춘을 강요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관헌에 의한 강제적인 징집, 이른바 (폭력적으로 끌고가는) '강제연행'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주선업자와 연결돼 있는 경성의 기타무라가 어떤 경로로 여성들을 모집했는지 상세한 설명이 없다.

 

연합군 ‘동남아시아 번역·심문 센터’(SEATIC)가 작성한 ‘심문 보고 제2호(INTERROGATION BULLETIN No2)’
 

「심문 보고 49호」가 작성된 다음 달, OWI와는 별도로 연합군의 ‘동남아시아 번역·심문 센터’(SEATIC)가 작성한 ‘심문 보고 제2호(INTERROGATION BULLETIN No2)’(이하 ‘보고 2호’)에 기타무라 에이분이 포로 번호 ‘M 739’로 등장한다. 기타무라는 레도(Ledo) 수용소로 이송된 뒤 개별 심문센터(CSDIC(I))가 있던 인도 델리로 이송돼 거기서 본격적인 심문을 받았다. '보고 2호'는 그때 기타무라의 심문조서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보고 2호’에 따르면, 기타무라 부부와 기타무라 도미코의 언니(또는 여동생)는 경성에서 요리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장사가 잘 안 되자 돈벌이 기회를 찾아 버마에 위안부를 데려가려고 경성의 (조선군) 육군사령부에 허가를 신청했다고 한다. 같은 장사를 하는 복수의 일본인들이 육군 사령부로부터 허가를 받으라는 시사를 받았다. 기타무라는 여성들의 성격, 외모, 연령에 따라 그들의 부모에게 전도금(선금)을 300엔에서 1000엔씩 지불하고 22명을 뽑았다. 여성들의 '소유자'가 된 기타무라에게 조선군 사령부는 각 육군 사령부 앞으로 서면(문서)을 보내 모든 편의를 도모해 주도록 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조직적 관여 아래 위안부 모집 위안소 운영

 

즉 민간업자인 기타무라는 군의 시사를 받아 위안부를 모으고, 군의 주선으로 위안부들을 남방으로 이송해서, 전선의 부대에 부속된 위안소를 경영했다. 발안(發案)부터 배치에 이르는 조직적인 '군의 관여'가 없으면 불가능해, 사실상 '동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안소를 필요로 한 것은 다름 아닌 군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집된 조선인 여성은 703명. 그 인솔자인 포주들 약 90명과 함께 조선의 부산을 출항한 것은 1942년 7월 10일이었다. (버마) 수도 랑군에 도착하자(그해 8월 20일), 그녀들은 20명에서 30명의 그룹으로 나뉘어 버마 각지의 부대로 보내졌다. 기타무라가 이끄는 22명(그중 2명은 현지에서 사망)은 북버마의 미치나를 수비하는 보병 제114연대에 할당됐다. 미치나에는 '긴수이'(나중에 다른 위안소 '박신로'와 합병, 조선인 위안부 20명), '모모야'(중국인 위안부 21명), 그리고 기타무라의 '교에이'(조선인 위안부 22명) 등 3개의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배속된 일본군 보병 제114연대가 주둔한 버마(미얀마) 북부 미치나.
 
일본군 전멸 뒤 버마 미치나에서 미군 등 연합군에 의해 구출된 일부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들이 이송된 인도 아삼주의 레도(Ledo)(빨간 표지)
 

‘심문 보고 49호’에는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판단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일상 생활과 노동 실태도 기록돼 있다.

 

그녀들의 버마에서의 생활은 다른 곳에 비해 사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버마에서의 생활 2년째(1943년)가 특히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식량이나 물자의 배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들은 원하는 것을 구입할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형편이 좋았다. [중략] 버마 체류 중에 병사들과 함께 스포츠 이벤트에 참가하거나 피크닉, 연회, 저녁식사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녀들에게는 축음기가 있었고, 도시에서는 쇼핑하러 나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위안소의 '포주'는 각 여성들이 계약할 때 얼마나 빚을 지고 있었는지에 따라 그녀들이 번 돈 총액의 50%에서 60%를 받았다. 이는 그녀들의 평균적인 월별 벌이가 약 1500엔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들은 '포주'에게 750엔을 지불했던 것이다. 많은 '포주'들이 고액의 식비와 물품 대금을 청구해 그녀들의 삶을 괴롭혔다. 1943년 후반에 군은 부채 상환을 마친 특정 여성들에게 귀국을 인정하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까지 일부 여성들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됐다.

 

보수 많았다지만 절반 이상 착취-‘자발적 응모’ 주장의 근거

 

이 인용문에 ‘성 노예’의 인상은 없으며, 이는 위안부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쪽 주장의 근거가 되어 왔다. 일본군이 전장에 매춘부를 데리고 다녔던 전대미문의 정보를 조사한 요리치는 이 문장에서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성매매를 강요받은 여성들이 의외로 편한 생활을 했던 시기가 있었고, 게다가 빚만 갚으면 자신의 의지로 귀국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악덕업자인 포주가, 고액 보수를 받는 그녀들을 착취하고 있었던 실상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생활형편이 좋았다"고 하고, 아래 인용문에서는 "삶을 괴롭혔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는 그녀들이 놓여 있던 상황을 짐작하기 어렵다. 당시 버마의 전황(戰況)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41년 12월,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 공격과 말레이 반도의 기습 상륙으로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파죽의 기세로 동남아시아에 침공한 일본군은 1942년 전반에 신속하게 버마 전토를 장악해 영국군을 인도로 패주시킨다. 1943년 3월에는 동남아시아 방면을 통괄하는 '남방군' 산하에 '버마 방면군'이 신설돼 버마 지배는 비교적 안정된다. 그런데, 태평양 전역(戰域)에서는 같은 해인 1943년부터 전황이 악화됐고, 인도를 거점으로 한 영국군도 버마 탈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미치나에서 서북쪽으로 약 250㎞를 가면 영국령 인도의 아삼주 레도, 반대로 동쪽으로 100㎞를 가면 중국 윈난성의 일본군 거점 성벽 도시 텅위에(騰越. 현재 중국에서는 텅충騰沖)가 나타난다. 이 텅위에의 동쪽을 흐르는 누장(怒江, 버마령에 들어가면 살윈강)을 넘으면 윈난 성도인 쿤밍, 그리고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있던 중국 남서부의 충칭으로 통한다. 텅위에는 (일본군이) 중국 국민당군과 대치하는 최전선이었다.

 

일본군의 북버마 점령에는 연합군이 중국군에 무기나 물자를 공급하는 '버마 공로', 이른바 '원장(援蒋. 장제스 지원) 루트'를 끊겠다는 노림수가 있었다. 이에 대해 연합군은 북버마의 정글을 꿰뚫는 ‘레도 공로’를 건설해 인도→북버마→윈난성을 연결하는 새로운 ‘원장 루트’를 구축함으로써 중국에 진주하는 일본군을 배후에서 압박하려고 했다. 비행장이 있는 미치나가 양쪽의 명운을 가르는 결전장이 된 것이다.

 

전황은 날로 일본군에게 불리해졌다. 대략 3만 명의 일본병사들이 목숨을 잃은 악명 높은 '임팔 작전'이 결행된 것은 미치나에서 위안부들이 포로가 되기 5개월 전인 1944년 3월이었다. 위안부들이 “생활형편이 좋았다”고 대답한 시기는 버마 도착 후 1년 정도로, 그 시기에 잠깐의 평화를 느낀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용문의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위안부가 고액의 보수를 받고 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당시 1000엔은 조선 공장 노동자의 3년치 연봉에 상당하는 액수였다고 하니, 포주가 절반을 떼어가고 남은 월 750엔도 대단한 보수다.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었던 식민지 조선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벌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성들이 위안부가 된 경위는 부조리 그 자체지만, 그것이 매춘의 실상이며 범죄의 주체는 포주, 즉 뚜쟁이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 이 위안부의 보수다.

 

속았다고는 해도, 그녀들은 몸이 팔린 신세였다. 전장인 버마까지 끌려간 이상 거기에서 저항해 봤자 들어줄 리 없었다. 가난한 가족을 구하기 위해 진 빚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기구한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녀들에게 어떤 자발성이 있었다고 해도, 그러한 종류의 자발성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기록대로라면 빚을 갚아 귀국이 허용된 경우도 있었던 것 같지만, 앞의 '보고 2호'에는 기타무라의 위안소에서는 한 사람도 귀국할 수 없었다고 적혀 있다.

 

부대별로 줄을 선 하루 30명 이상의 군인들 상대

 

사정이 어쨌든 일련의 상황을 만들어낸 일본군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녀들이 강요당한 노동의 실태는 너무 가혹하다. '교에이'에서는 이용자가 너무 많아 혼잡했기 때문에 월요일은 기병대, 화요일은 공병대 등으로 각 부대에 이용일을 할당하는 윤번제를 실시했다. 이용 요금은 병사가 1엔 50전, 하사관 3엔, 장교 5엔이었다. 위안부 1명의 매월 벌이는 1500엔 정도였다고 하니, 이용자의 80%가 병사, 20%가 하사관이었다면, 대략적인 계산으로 매월 800명 이상, 하루에 30명 이상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한다. 전쟁만 나지 않았다면 보통 사람들이었을 장병들이 위안소 앞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광경은 너무 삭막하다.

 

그녀들이 피 토하는 심정으로 모은 돈도 (결국) 종이 쓰레기가 된다. 미치나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함께 찍힌 20명의 위안부 사진(사진 1)을 보면 왼쪽에 동양계 미군 병사 4명도 나와 있다. 가장 앞에서 쪼그리고 있는 것이 중국계 원로이 창 대위고, 뒤의 3명은 일본계 2세 병사다. 창은 1980년대에 회고록 <버마-알 수 없는 이야기>를 출간해 그때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진 1

1944년 8월 14일 미치나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20명의 조선인 위안부. 왼쪽 끝이 원로이 창 대위, 오른쪽 끝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포주인 '기타무라 도미코'로 보인다.(제164통신 사진중대 프랭크 조지프 시어러 4등 기능병 촬영)
 

창 대위가 처음으로 그녀들을 방문했을 때, 반항적인 태도의 여성도 한 두명 있었으나 모두 겁을 먹고 있었고, 눈물을 흘리거나 절을 하며 무언가를 간원하는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사진 왼쪽 열 앞에서 세 번째에 있는 일본어가 능통한 그랜트 히라바야시 하사관이 통역을 했다. 그녀들은 서툰 일본어와 조선어를 섞어 말했는데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 중의 한 여성이 리더로 보이는 다른 중년 여성에게 말을 걸자,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여성들이 갑자기 히스테리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들은 돈을 몰수당하는 것을 걱정했던 것 같다.

 

리더 여성은 포주인 기타무라 도미코인데, 그녀가 미군 병사들에게 앞으로의 처우에 대해 묻자 히라바야시 하사관은 “억류는 단기적인 것이니 인도로 이송된 뒤에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기타무라가 조선어로 다시 그녀들에게 그 얘기를 전하자, 모두가 조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오직 일본군에 즐거움을 안겨 주기 위한” 존재

 

기타무라는 양복에 기모노 띠를 감은 기묘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띠 안에 뭔가를 잔뜩 집어넣어 임신부처럼 배가 부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창 대위가 띠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묻자 기타무라는 마지못해 띠를 풀고 종이 다발을 꺼냈다. 그것은 일본군이 발행하는 10(버마)루피짜리 군표 다발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그것들이 아무 가치가 없어졌다고 가르쳐 주어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미군 병사들은 안쓰러워져서 군표 일부를 담배나 캔디와 교환하자고 했더니 기타무라는 그것을 '삥땅 뜯기'라고 생각해 2다발만 내밀었다. 그 순간 여성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고, 어떤 사람은 불평하듯 웃었으며, 어떤 사람은 울었다고 한다.

 

창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조선 벽촌의 농가에서 이런 머나 먼 곳까지 억지로 끌려 온 그녀들은, 오직 제국 일본 병사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기 위해 여기에 와 있었다.”

 

그래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미치나에 있던 다른 위안소 ‘긴수이’의 위안부들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른다. (‘긴수이’의) 그녀들은 탈주하는 일본병 뒤를 쫓아 미치나를 흐르는 이라와디 강을 뗏목으로 탈출하려고 했으나 대부분 사망한 것 같다. 창은 회고록에서 “(탈출한 위안부의) 대부분은 일본군 병사들과 함께 강변에서 대기 중이던 연합군의 저격병에 사살당했음이 분명하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굶어 죽었거나 북버마의 정글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썼다.

 

조선어를 구사하는 기타무라 도미코는 아마도 경성 거주 일본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편인 에이분은 일본인 같지 않은 이름이다. 추측일 뿐이지만, 조선인 에이분이 일본인 도미코와 결혼해 아내의 기타무라 성을 갖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공영방송 KBS 시사 프로(2018년 8월 21일 방영)가 인도 이송 뒤의 그녀들을 추적했다. 중요한 발견은 없었지만, 기타무라 에이분에 대한 조사에서 정확한 주소가 기재되어 있는 것을 알아내 소개했다. 영문을 한자로 바꾸면 ‘경성부 아오바마치(青葉町) 2가 64번지(모리 다로)’다. 아버지의 이름은 '기타무라 니타로'로 돼 있었다. 현재의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2가 66번지에 해당해, 실제로 찾아가 보니 개발로 토지 구획이 크게 바뀌어 기타무라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없었다.

 

전쟁 전의 아오바마치에는 조선총독부 '조선철도국'의 관사가 늘어서 있었고, 완만한 언덕 위에서 경성역(현 서울역)과 남대문이 내려다 보였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현 신세계 백화점) 등이 있었던 번화가와도 가까웠다. 당시에는 경성에서도 유수의 ​​일본인 거주지역이었다고 한다. 어딘가에서 큰 돈이었던 전도금을 조달해 지방에서 위안부를 모집하고, 군 당국의 허가를 얻어 위안소를 경영했을 정도라면, 기타무라 부부는 유명한 뚜쟁이였음에 틀림없다.

 

참고자료

【일본 자료】

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編 「政府調査「従軍慰安婦」関係資料集成①警察庁関係公表資料」、1997年

和田春樹 「政府発表文書にみる「慰安所」と「慰安婦」」『「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財団法人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1999年

浅野豊美 「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同

西野瑠美子 『戦場の「慰安婦」』明石書店、2003年

尹明淑 『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明石書店、2003年

遠藤美幸 「戦場の社会史:ビルマ戦線と拉孟守備隊1944年6月―9月」慶應義塾経済学会、2009年

永井和 「日本軍の慰安所政策について」、201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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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19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미래사 2020년

【미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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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rogation Bulletin No2, South-East Asia Translation and Interrogation Center, November 30,1944

CBI Roundup, November 30,1944, cbi-theater.com

(https://www.cbi-theater.com/roundup/roundup113044.html)

Korean and Japanese Prisoners of War in Kunming,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China Theater, April 28,1945

Research Report No.120, Allied Translation and Interpreter Section, November 15,1945

Chan, Won-Loy, Burma, The Untold Story, Preside Press, 1986

Ravenholt, Betty, West Over the Seas to the Orient, 2009

Cornebise, Alfred Emile, Soldier Extraordinaire, 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19

(https://www.armyupress.army.mil/Portals/7/combat-studies-institute/csi-books/soldier-extraordinaire-the-life-and-career-of-brig-gen-frank-pinkie-dor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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