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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문화

총칼의 폭력 부순 '펜의 힘' "너에 대한 글로.." 눈물

by 무궁화9719 2024. 10. 11.

소년이 온다

총칼의 폭력 부순 '펜의 힘' "너에 대한 글로.." 눈물 [뉴스.zip/MBC뉴스]

https://youtu.be/R2DDDP32czA

노벨문학상 한강 '공식 기자회견 고사'해 설득 중…"전쟁으로 고통받는 분들 많다"

2024. 10. 11. 15:51

https://tv.kakao.com/v/450111247

 

[편상욱의 뉴스브리핑]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SBS <편상욱의 뉴스브리핑>'을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SBS에 있습니다.

■ 방송 : SBS <편상욱의 뉴스브리핑> 월~금 (14:00~16:00)
■ 진행 : 편상욱 앵커
■ 대담 : 이광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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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이광호 / 문학평론가
"한강, 언젠가 노벨문학상 탈 것 예상…올해 탈 줄은 생각 못해"
"한강, 시로 데뷔…소설 속에 시적 문체·시적 상상력 흘러"
"한강, 끔찍한 고통 시적으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고통 깊게 감각하게 해"
"채식주의자, 세계에 한강 알린 작품…인간 고통·가부장제 등 표현"
"'소년이 온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혁신적 화법으로 보여줘"

※ 자세한 내용은 동영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SBS 디지털뉴스편집부)

한강 부친 “딸이 전쟁으로 사람 죽는데 노벨상 잔치 안 된다고 해”

[인터뷰] 한승원 작가

기자정대하
  • 수정 2024-10-11 20:10
  • 등록 2024-10-11 14:39

소설가 한강. 노벨위원회“강이도
 
진즉 (문학으로) 홀로서기를 한 사람인데, 계속해서 한승원의 딸이라고 하면 어색하지.”
 
11일 오전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율산마을 ‘해산토굴’에서 만난 한승원(85) 작가는 “아버지보다 더 잘되는 게 효도”라고 말했다. 해산토굴은 한 작가가 귀촌해 살면서 글을 쓰는 집필실이다. 2016년 딸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전에는 ‘한승원의 딸’ 한강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이 되어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이들 부녀는 ‘이상문학상’과 ‘김동리문학상’를 2대가 수상했다. 아버지는 전날 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어 “내 딸이 최고다”라고 축하했다.

마을 잔치를 취소하며

한 작가는 처음엔 “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게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 신문사 기자가 내게 전화를 해서 딸의 수상에 대해 이야기하길래, ‘당신 가짜 뉴스 보고 그런 거 아니야’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기사가 떴다고 그러더라고. 굉장히 당황했지. 딸이 그러더만. 이 상은 후보작을 결정해 놓고 정하는 상이 아니라고. 수상자한테도 발표 직전에 통보한 거야. 딸이 통보받은 게 저녁 7시50분.“ 한 작가는 “딸이 통보를 받았지만, 기대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대책도 없어 당황했겠죠”라고 덧붙였다.
 
 
전남 장흥군 안양면 한승원 작가의 집필실에 걸린 가족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딸 한강. 정대하 기자
 
한 작가는 이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돼지를 잡아 마을잔치를 열려고 했다가 취소했다. 한강 작가가 “지금 세계 2곳(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축하 잔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한 작가는 “장흥 회진 고향 마을에서 열려던 잔치도 취소했어. 딸이 완전히 ‘글로벌 지식인’이 됐어. 양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서 사람이 쓰러지고 있는데, (노벨문학상 수상을) 즐겨서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나는 (잔치를) 하고 싶은데.”
 
한 작가는 1970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기찻길 옆 블록집에서 딸을 얻었다. 그는 아들과 딸의 이름을 모두 ‘크게’ 지었다. 한 작가는 “큰아들은 ‘한국인’이고, 딸은 한국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으로 지었다. 장남은 이름 때문에 고생하다가 개명했다. 어렸을 때 강이를 한강, 낙동강, 대동강이라고 놀렸다더라”고 덧붙였다. 한 작가가 한번은 제 방에 누워있던 딸에게 “너 거기서 뭐 하고 있니?”라고 물었더니, 딸은 “공상이요! 왜요, 공상하면 안 돼요?”라고 반문했다.

 

11일 전남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한승원 작가 집필실 해산토굴. 정대하 기자
 
5·18항쟁을 다룬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소설적 영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강 작가에게 1980년 5·18은 ‘폭력’을 알려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한 작가는 “그때(1980년 5월) 초등학교 4학년 막 (서울로) 이사 왔을 때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아이들한테 이야기 안 했지. (만약 들었다면) 당시 광주에서 온 외가 친척들이 (5·18) 이야기를 한 것을 들었겠지”라고 회고했다.

“저항소설로 접근하기보다 함께 아파한 소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광주는 들썩였다. 고립된 섬 같았던 광주의 오월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 때문이었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과) “기적이다. 문학과 예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한강 작가가 가장 고통받은 존재들의 고통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섬세하게 귀 기울여 온 것을 세계 문학계가 높이 평가한 것이다. 5·18도 한강과 함께 세계인들이 공감하고 아파하는 사건이 됐다”고 말했다.
 
한강 작가가 4·3, 5·18 등 국가폭력 문제를 저항소설로 접근하지 않은 점을 한 작가는 높게 평가했다. 한 작가는 “딸이 5·18을 소재로 고발·저항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사람들의 비극적인 상황을 그대로 슬프게 그리려 인간의 실존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지. (이젠 그 트라우마를) 함께 아파해야지”라고 덧붙였다. “견뎌내야 하는 트라우마에다가 인간 실존의 문제를 표현했으니까, 강의 소설을 (수상작으로) 선택했겠지. 우리 세대 작가들하고 강의 세대의 작가들이 소설을 쓰는 시각 자체가 깊이가 다른 것이지.” 
 
11일 오전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율산마을 ‘해산토굴’에서 만난 한승원 작가. 정대하 기자
 
11일 오전 전남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한승원 작가의 집필실 해산토굴에 가을빛이 쏟아지고 있다. 정대하 기자
 
한강 작가에게 장흥은 ‘제2의 고향’이다. 한 작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있으니까 그러지. 원적은 장흥 회진면이지만, 호적은 편리하게 하려고 서울로 올렸다”고 했다. 한 작가는 1997년 고향인 전남 장흥에 집필실을 짓고, 28년째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한강 작가는 2022년 장흥에서 열린 청년문학제에 참석해 아버지 한 작가와 문인, 청년 문학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한강 작가의 아버지 고향인 장흥은 문향이다. 소설가 송기숙,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 등이 장흥 출신이다. 한 작가는 “(장흥이 소설가가 많이 나온 이유는) 역사를 더듬어 보면 민중들의 삶과 맞물려 있다”고 말했다. 19세기 중순부터 장흥은 수탈을 많이 받은 땅이어서 동학의 세력이 컸고, 동학농민혁명 때 석대들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공간이다. 한 작가는 “동학 후예들의 뿌리가 뽑혀 버린 곳에서 개화는 빨랐다. 저항적인 인물이 많았는데 일제의 감시가 워낙 심해 좌절됐고, 그 좌절이 문학 쪽으로 많이 나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39년 장흥 태생인 한승원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목선’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로서 활동했다. 고향 장흥에서 3년 동안 김 양식을 한 경험을 살린 작품이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해산 가는 길’ 등 많은 작품을 썼던 그는 1980년 ‘구름의 벽’으로 한국소설문학상 받았으며, 이후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노벨문학상 한강의 언어들, 어디서 헤엄쳐 왔나

기자임인택
  • 수정 2024-10-11 20:12
  • 등록 2024-10-11 19:15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한강(54). 역대 수상자 가운데 20세기 출생 작가로는 알베르 카뮈(1957년, 44살에 수상)에 이어 두 번째로 젊은 작가다. ⓒ김병관, 창비 제공
 
한국문학이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펼쳐진다. 언젠간 걷게 되리라 다들 열망하긴 했다. ‘변방의 언어’였던 한글의 공표 기념일 이튿날인 10일 밤(한국시각) 작가 한강(54)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알려왔다. “한국 문학작품과 함께 자랐다”고 스웨덴 한림원에 공표한 한강이 막을 올린 세계는 일단 이런 것이다.
 
국내 최초 노벨 문학상, 아시아 최초 여성 노벨 문학상, 121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다섯번째로 젊은 작가….
 
그건 일부의 결과일 뿐, 한강이 독보적으로 열어 보인 문학의 길은 집요한 ‘시적 언어’요, 지독한 ‘겨울의 언어’다. 한림원의 “인간 삶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이란 평가와 닿아 있지만 부족하다. 노벨 문학상을 받기까지 한강의 문학적 발원을 좇다 보면 마주치는 ‘시린 겨울’이 평가에선 적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의 언어

작가 한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시와 소설로 아울러 등단(1993·1994년)했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출간한 때가 불과 스물다섯 나이인 1995년이었다. 첫 책에 수록된 단편들 대개가 어둡다. 당시 한겨레와 인터뷰한 작가는 ‘젊은 작가가 왜 그리 슬픈 이야기만 쓰냐’는 질문에 웃으며 답했다. “슬픈 게 좋지 않아요?” 시로 등단한 지 20년 만인 2013년 내놓은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속 12편의 연작시 ‘거울 저편의 겨울’의 지배적 정서다. 인간 사회, 인류 보편의 ‘추위’에 휩싸인 곡진한 공감.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특히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어떤 소설도 아래 시들의 감성을 지울 수 없다.
 
“추운 곳/ 오래 추운 곳// 너무 추워/ 눈동자들은 흔들리지 못해/ 눈꺼풀들은/ (함께) 감기는 법을 모르고//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거울 속에서/ 네 눈을 나는 피하지 못하고// 너는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거울 저편의 겨울’ 부분)
 
그로부터 20년 전인 대학 4학년(연세대 국어국문과) 때 학보에 쓴 시를 외어본다.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편지’ 부분)

아버지와 세계의 한

천성의 시적 공감은 작가의 음악성과도 결부될 것이다. 소싯적부터 한강은 노래를 좋아했다. 부모에게 뭔가 요구해본 적 없다던 그가 단 한번 매달린 것이 피아노 교습 기회였다. 가정 형편에 학원을 보낼 수 없던 어머니가, 10원짜리 종이 건반을 사 두드리는 초등생 한강을 볼 때가 “그 시절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회고한다고 한다. 학원을 허락한 건 중3 때다. 한강이 다닌 피아노 교습소에서 강사 제안으로 문득 음표를 그려보게 됐다. 말하자면 첫 작곡인데, 강사가 감탄했다. “이런 불협화음은 무척 세련된 거야. 보통 네 나이 땐 이 느낌을 알기 어려운데.”
 
조금이라도 더 건반을 만지고자 늘 5분 전 학원에 도착했던 열다섯살 그 시절을 한강은 소중히 기억한다. 사실 처음에는 학원을 마다했다. 중3이 되어서야 학원을? 늦은 거 아닌가? 고교 입시도 준비해야 했다. “괜찮다”고 답한 딸을 보고 어머니는 울었고, 아버지 한승원(85)은 말했다. “네가 배우기 싫어도,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도 1년만 다녀줘라. 안 그러면 한이 돼서.”
 
그 아버지 한승원을 빼고 한강을 말하긴 어렵다. 한때 낮 교사 밤 작가로, 새벽 4시부터 아침 8시까지 자명종도 없이 깨어 글을 쓰던 이다. ‘늘 피곤하시다’는 인상으로 딸에게 각인될 만큼 성실했음에도, 초등생 한강은 한 반 정원 60명 중 급식비를 내지 못해 도시락을 싸간 3명 중 하나였다. 전남 장흥 출신 한승원은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대하소설 ‘동학제’, 비구니를 주인공 삼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구도 소설 ‘아제아제바라아제’ 등으로도 알려졌지만, 다수의 작품은 바닷가 마을에 사는 민초들의 한과 생명력을 그리고 있다.
 
한강 작가의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가 11일 오전 전남 장흥군 안양면 해산토굴(한승원문학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문학관 현판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그가 광주에서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한 때가 1980년이다. 5·18 군홧발은 피했으나, 1982∼83년께 교사 신분으로 광주에서 가져온 사진집과 비디오테이프가 결국 한강을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려는 “증언 문학”(노벨 문학상 심사위원회 평가)으로까지 떠밀 것을 아버지는 예상하지 못했겠다. 책장 안쪽에 책등이 안 보이도록 뒤집어 꽂아둔 사진집을 13살 즈음의 한강은 밤 몰래 꺼내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에는 그 장면이 이렇게 쓰여 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소년이 온다’가 쓰이기 전인 2011년 한강은 “꼭 그 영향만은 아닐 테지만 그후 오랫동안 ―어쩌면 지금까지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지울 수 없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내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작품이 ‘소년이 온다’와 짝을 이루는 것이라며,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저도 변형되었고, 그 소설을 쓰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첫 소설집에서부터 보였던 회색빛의 서사 기조는,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거치며 한국 현대사를 할퀸 공동체의 상처에 적극 응답하는 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나아가 폭력과 학살의 지역 역사는 보편의 주제로서 전세계 독자들과 공감하고 있다. ‘나’의 겨울로 ‘당신’의 겨울을 감각하고, 당신이 겨울이기에 나 또한 겨울인 셈이다. 제주 4·3을 소재로 한 ‘작별하지 않는다’로 지난해 말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기자들에게 작가가 말한 대로다. “프랑스 독자들에게 제주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추가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감각을 통해 끝끝내 작별하지 않는 마음에 닿게 하고 싶었다.”
 
작가 한강이 2016년 5월 부커상 수상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수상작 ‘채식주의자’와 신간 ‘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독자와 슬럼프

제아무리 ‘한강’이라도 슬럼프가 없을 리 없다. 고백한 일화가 있다. ‘이젠 정말 글을 못 쓰려는가’ 회의하며 오래 글을 쓰지 못하던 때, 서울 광화문 대형 서점에 들렀다가 수천권 소설들이 쌓아 올려진 서고를 본다. 마음속에 작은 소요가 일었던 모양이다. “집에서 유일하게 풍족했던 것은 책”이었다는 유년의 기억을 소환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핍을 채워주는 양식의 장정들.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 인터뷰에서 “한국 문학과 함께 자랐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의 문학과 자라왔다. 노벨 문학상 쪽에서 주요하게 언급한 작품만 보더라도, ‘채식주의자’(2007)가 110만부, ‘소년이 온다’(2014)가 60만부, ‘작별하지 않는다’(2021)가 20만부 가까이 독자와 만났다. 페이스북엔 “읽은 책이 노벨상을 타다니, 보통은 노벨상 수상작이라 읽는데… 감격”과 같은 글이 적잖다. 광주 출신 30대 이승우씨는 한겨레에 “한강 작가의 수상과 함께 전세계적으로 그의 글이 주목받는 게 고맙다. 5·18은 광주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모두의 이야기이고, 또한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전세계 모든 시민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인정받을 수 있어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그가, ‘소년이 온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억해주는 것, 잊지 않는 것, 몇년이 흘렀지만 같이 분노해주고 슬퍼해주는 것, 이것뿐이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저는 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와 같은 독후감과 다를 게 없다.
 
정여울 문학평론가는 한겨레에 “나도 아픈 사람인데, 죽음과 삶이 그토록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것, 그런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며 “단지 국제 문학상이 쌓여 인지도가 올라갔다기보다는 작품 자체가 훌륭하다”고 한강과 독자의 접점을 설명한다.
 
당시 광화문 대형 서점 내 소설이 켜켜이 쌓인 벽면을 마주한 한강은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하나같이 독자를 기다리는 책들 앞에서 말이다.
 
시민들이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전날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한강 작가의 책을 구매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10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에 작가 한강의 책이 나란히 놓여 있다. 스톡홀름/AFP 연합뉴스

번역과 세계 독자

통상의 노벨 문학상 수상 결과가 신선할망정, 감동적이진 않았다. 대중은 작가보다 더 감격하고, 더 감동하는 모양새다. 국외에서도 그러하다. 이 과정에 번역의 내공이 작동한다. 한강은 한국 작가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국외에 소개하고 있다. 한강 작가가 작품에 내재시킨 문학성, 대중성이 기본값이겠으나, 공공 영역에서의 번역 지원과 성장세가 더해지지 않았다면 노벨상은 조금 더 늦어졌을지 모른다.
 
한국문학번역원을 통해 국외 번역된 작품이 프랑스 번역본 ‘작별하지 않는다’(메디치상 등 수상) 등 28개 언어권 76종, 대산문화재단을 통해 소개된 작품이 영어본 ‘채식주의자’(부커상 등 수상) 등 4개 언어권, 6종이다. 한림원의 평가대로, 한강을 국제 무대에 본격 알린 ‘채식주의자’(2016)의 경우, “한강의 소설을 번역한 일은 내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멋진 일 중 하나”라고 말했던 영어 번역자 데버라 스미스의 존재는 거듭 기록될 만하다. 2010년 한국어를 독학으로 익히기 시작했고, 런던대에서 한국학 박사 과정을 전공한 재원이다. “내가 번역한 책이 영국 독자가 처음 접하는 한국 문화가 될 수 있다”는 태세로 작품을 옮겼다지만, 사후 국내에서 거칠게 일었던 번역 오류 논란을 감당해야 했다. 나라 밖은 달랐다. 원작에 대한 ‘충실성’보다 창의적인 현지화 번역을 방향 삼아 서구 독자와 감응했고,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탁월한 번역”이라고 평가했다.
 
‘소년이 온다’ 등 한강의 소설을 접한 60대 미국인은 한겨레에 “우리 뉴스들도 정말 신난다는 듯이 소식을 알리고 있다. 내가 아는 작가라서 정말 흐뭇하고 반갑다”고 말했다. 독서 블로그 렉투라필라를 운영하는 스페인 독자 안토니오 가모네다는 2017년 ‘채식주의자’를 서점 매대에서 보고 꼼짝없이 붙들려 읽었다고 했다. “채식주의자는 용감한 책이다. 우리를 가두고 개인주의를 막는 자본주의 사회, 이 전체 시스템을 비판한다”고 말한다.
 
일본에는 한강의 거의 전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 2011년 일본에서 한국 문학을 알리는 시리즈 ‘새로운 한국 문학’의 1권이 ‘채식주의자’였다. 시리즈를 기획한 쿠온의 김승복 대표는 한겨레에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마음을 뺏길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첫 책으로 골랐다고 했다. 쿠온은 한강의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등 한국에서 절판된 책들도 일본에서 부활시켰다.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는 이제 일본어판만 구매할 수 있다. 번역의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의 공감 사례가 그렇게 널려 있다.

두번째 계절의 한강

그럼에도 이번 노벨 문학상은 실상 ‘1기 한강’에 대한 평가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한 계절의 한강이 상을 받은 것이다. 이제 작가는 겨울에서 여름, 나아가 봄으로 자신을 전개시키고자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이후 “이젠 봄으로 들어가고 싶다. 역사적 소설은 그만 쓰겠다”며 “좀 더 개인적인, 생명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한다”고 말한 대로다.
 
한강이 열어젖힌 진짜 길은 그것이리라. “나이를 먹을수록 더 따뜻한 기억들이 떠오른다”고 작가가 되어 말한 한강이 대학 4학년 때 학보에 발표한 시 ‘편지’의 말미는 이랬다.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이 바람이 붑니다/ 더운 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두번째 계절의 한강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그 길에서 독자와 만날 것이다.
임인택 구둘래 기자, 최재봉 선임기자 imit@hani.co.kr

"이곳이 노벨문학상 키운 아버지의 공간"…'해산토굴' 각광

박영래 기자 이승현 기자2024. 10. 12. 07:06

집필실·문학산책로·생가 등 장흥 곳곳 관심
김산 장흥군수 "부녀 작가 기념관 건립 약속"

11일 관광객들이 전남 장흥군 안양면에 위치한 한승원 작가의 작업실 해산토굴을 둘러보고 있다. 2024.10.11/뉴스1 ⓒ News1 이승현 기자
 
(장흥=뉴스1) 박영래 이승현 기자 =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우리나라의 영광이죠. 부녀의 좋은 기운을 받아가고 싶어요."
 
11일 오후 찾은 소설가 한강의 부친인 한승원 작가의 작업실 '해산토굴'이 위치한 전남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언덕배기에 자리잡아 마을 풍경과 여다지 해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고즈넉했던 이곳에 낯선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함께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고향에서 농사를 짓거나 김 양식일을 도우며 시골에 대한 정겨운 정서들을 배웠단 소식이 알려지면서다.
 
덩달아 한강의 선배이자 부친인 한승원 작가의 집필실 등 관련 시설도 주목받으면서다.
해산토굴은 한승원 작가의 호인 '해산'에 집을 낮추는 의미인 토굴을 붙여 이름 지었다.
사람들은 '이곳이 노벨문학상을 키운 아버지의 공간'이라며 집필실을 찾아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나주 빛가람혁신도시에서 왔다는 유미업 씨(65·여)는 "채식주의자 등 한강 작가의 소설을 감명깊게 읽었다"며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너무 축하드릴 일이라 한달음에 달려왔다. 부친 명의로 만들어진 문학산책길까지 둘러보고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해산토굴 바로 아래 위치한 '한승원 문학학교'에 전시된 소설집 등도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관람객들은 한켠에 마련된 한 작가의 대표작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책 조형물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김향미 씨(63·여)는 "한강 작가의 수상은 대한민국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며 "그가 어릴 적 찾곤 했던 곳이기도 하고 아버지도 워낙 훌륭한 분이라 부녀의 좋은 기운을 받아가고 싶어 이곳을 찾게됐다"고 설명했다.

 

장흥군에 위치한 한승원문학산책길의 모습. 2024.10.11/뉴스1 ⓒ News1 이승현 기자
 
집필실에서 3㎞ 남짓 거리에 위치한 한승원 문학산책로는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인부 수십명은 여다지 해변에 자리잡은 600m 산책로의 나무들을 다듬고 풀을 베며 깔끔한 모습으로 가꾸는 등 새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이곳은 지난 2006년 20m 간격으로 한승원 작가의 시비 30기가 세워져 뛰어난 풍광과 함께 낭만있는 문학산책로로 주목 받았다.
 
인근의 회진면에 위치한 작은 어촌 마을에는 한승원 작가의 생가도 자리잡고 있다.
마을길 곳곳에 알록달록한 벽화와 함께 한 작가의 작품 속 문구가 더해져 꾸며져 있다.
 
한승원 작가의 작품 '목선', '포구의 달' 등에는 바다 이야기가 많은데 어촌마을에서 생활한 그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
 
1995년 4월 15일 전남 목포문학관 뜰의 김현 기념비를 찾은 한승원(왼쪽)과 한강(가운데) 부녀의 모습. (한승원 작가 제공) 2024.10.11/뉴스1
 
김성 장흥군수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승원·한강 부녀 작가 기념관' 건립 추진에도 나서기로 했다.
 
이들 부녀는 이상문학상과 김동리문학상을 2대가 수상하는 이색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김 군수는 "어린 시절은 감수성이 가장 풍부할 때이고 감수성이 사람의 성격 등을 형성한다"며 "한강 작가가 방학마다 장흥을 찾아와 지낸 것은 시골에 대한 정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기반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한승원·한강 부녀작가의 기념관을 건립해 문림의향의 고장을 드높이는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다.
peppe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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