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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하늘도 눈물 거둔 4·3추념식…대통령·여당 대표 ‘2년 연속 불참’

by 무궁화9719 2024. 4. 3.

 

하늘도 눈물 거둔 4·3추념식…대통령·여당 대표 ‘2년 연속 불참’

윤 대통령·한동훈 위원장 추도식 불참
한덕수 총리, 본인 명의 추념사 읽어

궂은 날씨에도 평화공원 찾은 유족들
“아버지 목숨값으로 보상…좋을 리 있나”

기자허호준
  • 수정 2024-04-03 17:43
  • 등록 2024-04-03 14:57
제주시 연동 양두남씨 부부가 3일 제76주년 4·3희생자추념식이 열린 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을 찾아 아버지의 표석 앞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허호준 기자
 
“저는 아버지 얼굴을 모릅니다. 그래도 매년 제물을 만들고 추념식에 옵니다. 젊은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는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만난 양두남(76, 제주시 연동)씨가 말했다. 양씨는 이날 아내와 함께 매(밥)와 갱(국), 고기적, 과일 등을 아버지(양석호) 표석 앞에 차려놓고 절을 했다. 4·3 당시 남원면 신례리에 살았던 양씨는 “내가 7월생인데 아버지는 10월에 끌려가셨다. 지금의 제주공항 자리에서 행방불명됐는데, 하늘의 도움으로 2011년 3월 유해를 찾아 유해봉안관에 모셨다”고 말했다.
 
제주4·3희생자 유족들과 도민들이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6주년 4·3희생자추념식장에서 헌화·분향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허호준 기자
 
제76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이 이날 오전 10시 제주시 제주4·3평화공원에서 유족과 도민 등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는 지난해 행사에도 불참했다. 추념식은 오전 10시 정각 제주도 전역에 1분간 울려 퍼진 추모사이렌을 시작으로 4·3 경과보고와 추념사 낭독, 유족 사연, 추모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제주4·3 유족들이 3일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찾고 있다. 허호준 기자
 
한덕수 국무총리는 추념사를 통해 “4·3 희생자와 유가족들은 기나긴 세월 동안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받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왔다”며 “4·3사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라며 유족들을 위로했다. 한 총리는 이어 “정부는 4·3사건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여 화합과 통합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2025년까지 추가 진상조사를 빈틈없이 마무리하겠다. 트라우마치유센터 설립과 국제평화문화센터 건립,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등도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해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추념사를 한 총리가 대독했지만, 올해는 한 총리가 자기 명의로 된 추념사를 읽었다.
 
오영훈 제주지사는 인사말에서 “내년 4·3 역사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통해 국가폭력에 의한 통한의 역사를 화해와 상생, 해원으로 극복해 낸 제주인들의 고귀한 평화정신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그동안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채혈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추념식에는 야당 쪽에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참석했다. 국민의힘에선 윤재옥 원내대표가 나왔다. 광역자치단체장 중에선 김동연 경기지사와 강기정 광주시장이 참석했다. 전국 13개 시·도 교육감도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이날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과 행방불명인 표석에는 궂은 날씨에도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위패봉안실에서 만난 안덕면 서광리 조금옥(76)씨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희생됐다. 집에 있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운동장으로 끌고가 세워놓고 총을 쐈다고 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보상은 받았지만 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대가로 받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안 좋고 슬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남원면 수망리 출신으로 당시 5살이던 고춘자(81)씨는 “가시덤불 속에 피해있었는데 군인 2명에게 들켜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갔다.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 갔다. 다음날 집에 돌려보내 준다고 했는데 아버지를 죽였다”며 “아버지의 목숨 값으로 받은 보상이 좋을 리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제주4·3과 이승만 [전국 프리즘]

기자허호준
  • 수정 2024-04-03 07:47
  • 등록 2024-04-03 07:00
지난 2월20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4·3평화교육센터에서 신원이 확인된 4·3 희생자 유해 2구에 대한 신원확인 보고회가 열렸다. 허호준 기자
 

허호준 | 전국부 선임기자

 

“이승만을 ‘대통령’이라고 하면 될거우꽈? (그냥) 이승만이라고만 하면 될거우꽈? 지금도 가장 원한이 남는 게 그 사람이 몇 년형을 내렸으면 기간이 되면 남편을 내쳐야지(석방해야지) 자기네 모음냥(마음대로) 죽일 수가 이수과?”

 

올해 104살이 된 한 할머니는 2021년 4월2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직권재심 재판이 열린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할머니가 내뱉은 최대의 분노 표출이었다. 할머니는 4·3 시기 집이 불타고 어린 자식들과 피난길에 나섰다가 남편과 헤어졌다. 100살이 훌쩍 넘도록 남편을 기다리지만, 20대의 남편은 돌아올 줄을 모른다.

 

제주의 유학자 김경종(1888~1962) 선생은 1950년 ‘이승만 성토문’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옛날 항적은 진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을 살해하였다. 만세에 모두 무도하다고 일컫는다. 지금 이승만이 나라 안 죄수 수십만을 죽였으니 그 포학무도함이 항적과 더불어 과연 어떠한가. (중략) 승만의 죄는 천 번 참수하고 만 번 도륙을 내어도 오히려 남은 죄가 있다. 감히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예와 같이 백성의 위에 거한다. (중략) 남한의 수십의 형무소는 차고 넘치어 수십만에 이르고 있다. 북(한)군의 입성에 이르러 ‘부화뇌동할 염려가 있다’고 말하고 급히 학살령을 내렸으니 (중략) 승만의 포학무도가 이에 여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수십만명이 예비검속으로 죽고, 형무소 수감자들이 집단학살되던 때였다. 그의 아들은 4·3 시기 육지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됐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2003년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집단 인명피해’ 지휘체계와 관련해 “최종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4·3 항쟁 시기 숱한 제주도민의 죽음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다는 말이다.

 

대통령 이승만은 1948년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은 시민권의 제한만이 아니라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무기로 이용됐다. 이 시기 이후 초토화가 가속화됐고, 수많은 비명이 제주섬을 덮쳤다.

 

군경과 서북청년단은 ‘빨갱이 소탕’을 명분으로 자신들이 규정한 ‘빨갱이’를 없애는 데 용감했다.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이웃들끼리 죽이도록 하고, 그 장면을 보도록 강요했다. ‘반인륜적'이라는 표현 이상의 일들이 벌어진 곳이 1948년과 1949년 제주였다.

 

당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보고서를 보면, 1948년 11월24일부터 닷새 동안 9연대는 제주도에서 사살한 인원만 337명이고, 332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이들이 노획한 총은 7정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13일 토벌대는 경찰과 민간인 등 3천여명을 동원해 하루에만 105명을 ‘사살'했다. 무차별 학살이 펼쳐졌다. 그해 말 9연대의 뒤를 이어 진주한 2연대도 마찬가지로 가혹했다.

 

숱한 제주도민이 죽임을 당하는데도, 이 대통령은 토벌을 재촉했다. 그는 1949년 1월21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미국이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시하지만 제주도와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같은 해 10월2일 제주비행장(현 제주공항)에서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249명이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에 따라 집단처형됐다. 제주도 사건이 사실상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249명을 한꺼번에 대규모 처형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언론에는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제주도는 외부와 단절된 고립의 섬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승만이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이승만기념관을 만들고, 이승만 동상을 세운다고 한다. 수많은 제주의 영혼이 울고 있다.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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