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두려워 않고 “내 목을 베라”…녹두장군 호통이 열도에 퍼졌다
[한겨레S] 커버스토리
일본 신문 속 전봉준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 취재진 150여명, 동학농민혁명 보도 67건
체포 뒤 한성 압송되자 “위대한 인물 보려는 인파가 검은 산 이뤄”
“내가 죽은 뒤 의로운 선비 있어 일본 병탄 벗어나기를” 마지막 소망
기자정대하
- 수정 2024-05-04 12:38
- 등록 2024-05-04 07:00
그날, 비가 질척거렸다. 죽음도 고독했다. 1895년 4월24일 새벽 2시 녹두장군 전봉준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모든 재판을 2심으로 한다”는 형법 조항이 시행되기 하루 전이었다. 전봉준의 죄목은 ‘군복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대항해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죄’였다. 전봉준과 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한은 판결이 나오자마자 곧바로 처형됐다. 이들이 최후의 순간을 맞은 법무아문 감옥서(옛 의금부 전옥서) 터인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앞엔 2018년 전봉준 동상이 들어섰다.
전봉준의 마지막 순간을 일본 기자들이 기록했다. “나는 바른길을 걷다가 죽는 자인데 역률(역적의 죄)로써 다스린다 하니 그것이 실로 천고의 유감이라고 탄식하며 아리(옥리)에게 부축을 받아 법정을 나갔다.” 일본 지지신보 특파원은 1895년 5월7일치 3면에 또 이렇게 적었다. “사형을 선고받으면 놀라 정신이 없어지고 사지가 떨리며 얼굴빛이 변하게 되는데 (…) 조선 사람은 담력이 좋아 특히 동학의 거괴라고 자임하는 전(全), 손(孫), 최(崔), 성(成) 같은 사람은 자못 대담한 데가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일본 언론은 조선과 청나라, 일본군 최고통수기관(대본영)이 있던 히로시마 등지로 특파원과 기자를 보냈다.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원불교학과)가 1894~1895년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조선에 온 일본 신문·통신·잡지사 언론인을 조사했더니, 66개사 129명에 달했다. 129명 중 114명은 기자였고, 11명은 삽화를 그리는 화공, 사진사는 4명이었다. 박 교수는 “1894년 이전과 1895년 초에 조선에 왔던 통신원까지 합하면 150명 이상이 취재했다”고 전했다.
조선에 온 기자들의 주된 관심은 청일전쟁 전황 보도였지만, 동학농민혁명과 동학농민군 지도자에 대해서도 앞다퉈 보도를 쏟아냈다. 일본 언론이 가장 주목했던 지도자는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과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1856~1895)이었다. 박 교수는 “두 지도자 가운데 동학농민혁명 기간에 일본인과 여러차례 접촉한 적이 있는 전봉준을 향한 관심이 더 높았다”고 말했다. 1차 봉기로 전주성을 점령한 전봉준이 1894년 9월10일(음력 8월11일) 전라도 전주에서 ‘일본인 모’(낭인)를 면담한 내용을 담은 ‘동학당여문’(일본군이 히로시마 대본영으로 특별보고한 문건)을 도쿄아사히신문 등 10개 이상의 신문이 보도했다.
특히 일본 신문들은 전봉준의 체포와 한성 일본영사관 압송, 법무아문(개화정부에서 의금부 대신 설치한 사법행정기관) ‘권설(임시) 재판소’ 재판, 사형 판결과 교수형 집행 과정 등을 보도했다. 박 교수는 “전봉준의 체포, 재판, 사형 판결, 집행 등 최후를 보도한 일본 신문 기사는 그간 부분적으로 번역·인용됐지만,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1895년 1~6월 일본 신문이 보도한 전봉준 관련 기사 67건을 찾아 번역했다.
“위독한 병증에도 강건한 모습”
전봉준 장군 하면 떠올리는 사진은 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이다. 무라카미는 조선으로 와 사진관을 개업한 일본인 사진사 중 한명으로 알려졌다. 그는 1895년 2월27일 한성 일본영사관(현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조선 법무아문 권설 재판소로 이송되기 직전이었던 전봉준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전봉준은 가마를 타고 있다. 체포 당시 폭행으로 걷기가 힘들 정도로 다쳤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일본 잡지 사진화보 14권(1895년 5월10일 발행)에 “동학당 수령 전녹두 및 조선 순사”라는 설명과 함께 실렸다.
재판소로 이송되기 전 일본 영사관에 머물던 전봉준을 묘사한 기록도 있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은 1895년 3월12일치 3면에 ‘전봉준을 보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는 총검 때문에 발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안색과 팔다리도 창백했으며, 숨도 거칠어 몹시 위독한 병증이었지만 그 기력은 상당히 강건한 듯하였다. 나이 37~38살. 그 용모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으나 수염이 약간 있고 안광은 날카로우며, 눈썹 위에는 겹쳐진 일종의 잔주름이 있어 이마를 횡단하고 있는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전봉준은 1894년 12월28일 전라도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 옛 부하의 집을 찾아갔다가 밀고로 붙잡혔다. 금구(현 김제)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한 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은신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쿄니치니치신문은 1895년 1월15일치 3면에 ‘동도의 대수령을 체포하다’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일본 신문 최초로 보도했다.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 총지휘관 미나미 고시로는 관군을 압박해 그해 12월30일 전봉준을 인계받았다. 그리고 나주 호남초토영(현 나주초등학교)으로 끌고 가 한달간 가둔 뒤 한성으로 끌고 왔다. 전봉준은 1895년 2월18일 한성 일본영사관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전봉준을 끊임없이 회유했고 운현궁 문객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온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궁했다.
도쿄아사히신문(1895년 3월5일치 5면)은 일본 후비보병 제19대대 총지휘관 미나미 고시로 소좌가 전봉준을 취조한 내용을 보도했다. 이 기사를 보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 반외세 기치를 내건 동학군 2차 봉기의 원인이 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난을 일으킨 이유를 상세하게 말하라”는 질문에 전봉준은 “올해 6월(양력 7월) 이래 일본병이 그치지 않고 계속 우리나라에 침입해 들어온 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를 병탄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한다.
또 전봉준은 대원군의 밀사가 찾아온 사실은 인정했지만 밀지는 없었다며 비밀(대원군이 재봉기를 주문)을 지켰다. 그는 “병을 일으키도록 따로 사주한 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동되지도 않았고 사주받지도 않았다”고 답변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간악한 관리 없애고 보국안민”
일본군과 조선 정부는 동학과 전봉준의 관계를 상세하게 캐물었다. 동학은 경주 용담 출신 수운 최제우(1824~1864)가 1860년 ‘사람이 하늘’이라며 창도한 종교다. 인간평등을 강조했던 최제우는 동학을 깨친 뒤 여자 노비 2명을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았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30여년간 숨어 다니며 동학 재건운동을 했다. 전봉준은 동학의 ‘보국안민’(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해내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이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다.
도쿄아사히신문은 1895년 3월6일치 2면에 재판부가 전봉준을 심문한 내용을 실었다.
―동학에는 언제부터 관계했는가.
“3년 전부터다.”
―어떤 것을 느껴서인가.
“‘보국안민’이라는 동학당의 주의에 느낀 바가 있었는데 동학인 김치도가 동학의 서물(‘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 동학 경전)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중에 ‘경천수심’(敬天守心)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그 속에 ‘대체정심’(大体正心)이라는 것에 감동해서 입당했다.”
―정심(마음을 바르게 함)이라는 것은 동학당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따로 그대의 입당을 촉구했던 이유는 없었는가.
“마음을 바르게 하는 자들의 일치는 간악한 관리를 없애고 보국안민의 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혁명 후 귀향을 꿈꿨다. 도쿄아사히신문(1895년 3월6일치 2면)의 ‘동학 수령과 합의정치’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한성으로 쳐들어온 후에 누구를 추대할 생각이었느냐”는 질문에 전봉준은 “일본병을 물리치고 악간의 관리를 몰아내어 임금 곁을 깨끗하게 한 다음에 몇 사람인가 주석의 선비를 내세워 정치하게 하고, 우리들은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상직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고 답변했다.
전봉준은 재판을 앞두고도 의연했다. 도쿄아사히신문 특파원 아오야마 고노미는 일본 영사관 뜰에 앉아 있는 녹두장군을 본 느낌을 기사(1895년 3월5일치 2면)로 남겼다. “나는 얼핏 그의 참한 용모에서 동학 수령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았다. 그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또 그 후 다른 병도 생겨서 지금은 매우 위독한 듯 들것에 실려 와서 그대로 영사관 앞뜰에 앉아 있었다.” 도쿄니치니치신문(1895년 3월3일치 2면)도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며 (…) 심문에 대답하기를 ‘빨리 내 목을 베라’고 수없이 말할 정도로 스스로 호걸의 기풍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갇혔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영사관 앞으로 몰려든 인파가 산을 이뤘다고 한다. 도쿄아사히신문은 ‘동학당 대거괴와 그 구공(죄를 자백함)’이라는 기사(1895년 3월5일치 5면)로 현장 상황을 전한다. 일본 신문에선 어렸을 적부터 키가 작지만 몸이 다부졌던 전봉준을 이르는 별명인 녹두를 성과 함께 붙여 지칭하기도 했다.
“어제(2월18일) 전녹두가 불가사의하게도 생포되어 일본공사관까지 호송돼 마침내는 영사관으로 넘겨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온 성안에 서로 전해져서 요란하게 떠들며 귀하고 위대한 인물을 보려고 바깥으로 나오는 자 끊임이 없어 한때는 일본영사관 문 앞에 검은 산을 이루었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단심 직후 교수형…좌절된 혁명
전봉준은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라는 권유에도 호통을 쳤다. 도쿄아사히신문은 1895년 3월12일치 5면에 “동학당 대거괴 전녹두가 오늘(2월27일) 법무아문으로 인도될 예정”이라며 ‘동학당 대거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선 “이미 법무아문의 심판에 부쳐진 이상은 사형을 모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어떤 사람이 슬그머니 전녹두에게 ‘일본 공사에게 청원해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라’고 하자 그는 분연히 그 말을 듣지 않고 말하기를 ‘여기까지 이르러 어찌 그와 같은 비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죽음을 기다린 지 오래다’라고 하였다”고 전했다.
도쿄아사히신문(1895년 3월21일치 2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의 마지막 고뇌를 기록하고 있다. “나의 죽음은 평소부터 각오한 바이지만 내가 죽은 뒤에 (조선) 팔도에서 한명이라도 의로운 선비가 있어서 능히 나의 뜻을 이어 우리 조선이라는 국가가 영원히 일본의 병탄 아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하는 데 이르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다.”
전봉준과 한날한시에 처형당한 손화중·최경선·김덕명은 전봉준·김개남과 함께 농민군 5대 지도자로 꼽힌다. 전북 정읍 출신 손화중(1861~1895)도 죽음 앞에서 당당했다. 일본 지지신보는 “사형 선고를 받은 손화중은 법정을 나가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인민을 위해 진력했는데 어찌 사형에 처하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사발통문 때부터 참여했던 최경선(1859~1895)의 최후 모습도 기록했다. 이 신문은 “최경선은 선고를 받자 불평하는 말 한마디 없이 유유히 활보하며 법정을 나갔다”고 했다. 성두한은 충북 충주에서 혁명에 참여한 접주였다. 이 신문은 “성두한도 육형(사형) 선고를 받자 개의치 않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법정을 걸어나갔다”고 보도했다.
김개남(1853~1894)은 1894년 12월 전주에서 참형으로 즉결 처분됐다. 유생과 벼슬아치들은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을 참형이 아닌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하자 반발했고 조선 정부는 이들을 달래고자 김개남의 목을 한성으로 가져와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했다. 해월 최시형은 1898년에 붙잡혀 그해 7월2일 교수형을 받았다. 해월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부 배석판사가 고부 봉기의 단초를 제공했던 전 고부군수이자 탐학의 상징인 조병갑(1844~1912)이었다. 그렇게 혁명은 좌절됐다.
오는 11일은 동학농민혁명 법정 기념일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전북 정읍 황토재에서 관군과 처음 싸워 크게 이겼다. 불의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항거하는 혁명 정신을 130년 뒤 다시 떠올리게 하는 날이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극적 최후... 이 사람이 왜 독립운동가가 아니란 말인가 [김종성의 '히, 스토리'] (0) | 2024.06.23 |
---|---|
화형당한 저항세력, 개들이 시체 뜯어먹어…외적들에 수시로 점령당한 한양, 참혹했던 그때 [서울지리지] (0) | 2024.06.16 |
세 번의 죽음 문턱, 94살에야 4·3 무죄…“날 증명하고 싶었다” (0) | 2024.05.01 |
하늘도 눈물 거둔 4·3추념식…대통령·여당 대표 ‘2년 연속 불참’ (0) | 2024.04.03 |
[단독] 미 국무부, 제주4·3에 첫 입장…“비극 잊으면 안 돼” (0) | 2024.04.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