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19
1949년 백범 김구 흉탄에 스러지다
역사 공부 <오늘> 2016/06/23 19:13 낮달
▲ 총일이 지나간 유리창을 통해 본 경교장 앞뜰. ⓒ 백범김구사진자료집. 아래도 같음.
1949년 6월 26일은 일요일이었다. 백범 김구(1876~1949)는 경교장 집무실에서 창암학원 여교사와 담소 중이었다.
비서실에서는 경교장에 여러 차례 다녀간 바 있는 육군 소위 안두희가 비서들을 상대로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안두희는 광복군 출신의 김학규(1900~1967) 장군의 소개로 백범을 만났던 인물이었다.
[관련 기사 : "탕! 탕! 탕! 탕!... 내레 금방 선생님을 쏴시오" 참조]
창암학원 여교사가 떠난 후 선우진 비서는 안두희를 백범의 집무실로 안내해 주고 지하 부엌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백범의 집무실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렸고 경교장 정문 경호실의 경호순경들이 카빈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황급히 본관으로 뛰어 올라왔다.
현장에서 안두희는 체포되었고, 이내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주치의는 과다 출혈로 백범이 이미 운명했음을 알렸다. 오후 1시였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주석으로 일생을 조국 광복과 독립에 바친 위대한 민족지도자의 최후는 너무나 어이없이, 그리고 허망하게 왔다. 향년 73세.
▲ 백범이 피격될 때 입었던 피묻은 저고리.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백범은 경교장에서 생활하면서 건국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미군정과 함께 여러 정치세력들의 각축이 이어지던 해방 공간에서 백범의 거처였던 ‘서대문 경교장’은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였다.
반탁운동 이후, 백범은 1948년 2월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란 제목의,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그는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에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
▲ 남북협상 출발 직전의 경교장, 이때 청년학생들의 반대가 많아서 백범은 이들을 피해 나가야 했다.
▲ 남북협상차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여 축사를 하고 있는 백범. 평양 모란봉 극장
백범이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행을 결정하고 북행길에 오른 것은 1948년 4월 19일이었다. 그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이 협상은 애당초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5월 10일, 백범은 빈손으로 38선을 넘어 귀환하였다.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조국을 영원히 분단시킬 것이며, 결국은 군사대결로 치달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1948. 11.)한 뒤 이듬해 ‘백범학원’과 ‘창암학교’를 세우는 등 정치적 칩거에 들어갔다.
백범,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지다
한편 백범은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지만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직업군인이긴 했지만 권총을 소지한 안두희가 경교장을 출입할 수 있었을 만큼 경호 시스템도 허술했다고 할 수 있다.
당일, 평소와는 다른 낌새를 느낀 이들의 경고가 몇 차례 있었다. 군복 청년들과 헌병들이 경교장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고, 이를 예사롭게 여기지 않은 지인들이 전화를 걸어왔지만 비서실에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안두희는 결국 비서의 안내로 집무실에 들어가 아주 마음 놓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안두희가 쏜 네 발의 총알 가운데 첫 번째 총알은 김구의 코 밑을 뚫고 오른쪽 볼을 빠져나와 유리창을 뚫었고, 두 번째 총알은 김구의 목을 정면으로 뚫은 뒤 유리창에 맞았다. 세 번째 총알은 김구의 오른쪽 가슴을 지나 폐를 뚫었고, 네 번째 총알은 김구의 아랫배를 관통했다.
- 박도, 위 ‘기사’ 중에서
평북 용천 출신의 월남 청년 안두희(1917~1996)는 우익단체 서북청년회를 거쳐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하고 이듬해 졸업하여 포병사령부 연락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백범의 측근이었던 김학규의 소개로 한국독립당에 입당했으나 실제 활동은 하지 않았다.
안두희는 범행 뒤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1950. 6. 27.)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하였다. 안두희가 완전 복권된 것은 1953년 2월 15일이었으니 범행 후 4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의 죄는 지워졌다.
대통령 이승만의 정적이었고, 중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민족 지도자의 살해범이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데 걸린 시간은 4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이는 이 범행이 권력의 비호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혹을 정당화해 주는 것이었다.
김구의 남북 협상에 반대하고 단정을 지지하여 백범과 갈등했던 김학규는 암살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 그는 암살범 안두희의 한국독립당 입당을 주선한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에야 석방되었다. 정작 암살범보다 그를 백범에게 소개했던 김학규가 더 오래 복역한 이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안두희는 강원도에서 군납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일생 동안 백범 살해범의 죄를 벗지 못한 채 도피생활을 거듭해야 했다. 4·19혁명 이후 김구 선생 살해진상 규명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하였고 여러 차례 그를 추적해 온 사람들로부터 칼에 찔리거나 폭행을 당했다.
쫓기는 삶, 안두희의 최후
1980년대 이후 그는 이미 도피를 포기한 상태였으나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했다. 1996년 10월 23일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안두희는 자신을 추적해 온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당시 46세)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사망했다. 향년 80세.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안두희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그러나 백범 김구 시해범 안두희는 끝내 역사적 진실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심증은 있으나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백범 사후 70년이 가까워오지만 여전히 김구 시해의 배후는 의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결국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정치적 타살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 백범 김구의 빈소 앞에 줄지어 선 조문 행렬
▲ 백범의 국민장에 참여한 대한부인회(위)와 지방에서의 조문(아래)
▲ 성대하게 베풀어진 백범 김구의 국민장 행렬. 이는 1948년 정부 수립 후 첫 국민장이었다.
▲ 공주 마곡사에서 베풀어진 백범 김구의 49재를 마치고 관계자들이 찍은 기념촬영 사진.
백범 김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애당초 국장이 결정되었으나 한독당 쪽에서 민족장을 고집하자 김규식의 중재로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김구의 장례는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열흘 간 거행되었다.
10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았고 장례일에도 4, 5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전국 각 도시에도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그를 배웅하였으니 ‘남한이 통곡 속에 싸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고 한다. 백범의 삶은 조국 광복을 위한 풍찬노숙의 역사 그 자체였음을 이 땅의 무지렁이 백성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국민장, 온 겨레가 상주가 되었다
그의 장례는 온 국민이 상복을 입고, 스스로 상주가 되었던 역사였다. 7월 5일, 그의 유해는 효창공원의, 그가 몸소 이장한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택 근처에 안장되었다. 백범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그의 아내 최준례는 일찍이 중국에서 병사(1924)했고, 맏이 인도 해방을 보지 못하고 충칭에서 죽었다.(1945) 백범은 독립투쟁의 여정에서 아내와 맏아들을 잃은 것이다. 맏며느리 안미생은 미국으로 떠난 뒤 소식이 끊어졌다. 손녀 효자도 어머니를 뒤를 따랐다.[관련 기사 : 갑자기 김구 곁을 떠난 며느리, 지금껏 '수수께끼']
▲ 효창공원 안장된 김구의 묘소. 백범이 몸소 이장한 3의사 묘역 가까이에 있다.
다행히 둘째 신(1922~2016)은 공군 참모총장과 교통부 장관을 지냈고 그의 3남 1녀 자녀들도 공기업이나 정부기관 등에서 요직을 지냈다. 신의 아들들은 각각 주택공사 사장, 보훈처장을 역임하고 기업체 대표로 있다. 딸은 재벌기업 '빙그레' 회장의 부인이 되었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대물림되는 가난 속에 잊히고 있는 대다수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과 비기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속설은 적어도 백범의 후손들에겐 해당되지 않았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김구의 집안은 그나마 사회적으로 대접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본인은 흉탄에 쓰러졌지만 후손은 비교적 교육도 잘 받았고 정부의 배려와 기념사업회의 지원이 뒤따르면서 순탄하고 안정적인 삶과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백범은 살아 있다
백범 사후 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안두희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지만 여전히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63년 서울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고 2002년에는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임정 마지막 주석이었던 백범은 임시정부와 동의어로 늘 기억되는 존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오는 2019년에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이에 맞추어 임시정부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종찬)는 2019년까지 3·1운동 100주년 기념 조형물과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특별법 제정, 부지와 예산 확보, 전시 자료 준비, 연구 작업 등을 본격적으로 수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임정기념관 건립이 순조로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해방 2주년 기념식(서울운동장)에서의 김구와 이승만. 둘은 사후에도 진보와 보수의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보수 반공주의자였던 백범이 이 땅에서 좌파의 원조쯤으로 인식되는 것은 ‘보수’의 본분이 변질되어 버린 우리 뒤틀린 현대사 탓이다. 이는 반일 민족주의자였던 백범이 친일파들을 중용하고 독재 끝에 국민들에게 쫓겨난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방 70년이 넘었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조국을 영원히 분단시킬 것이며, 결국은 군사대결로 치달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던 백범의 전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는 분단 70년을 넘기며 우리가 일흔둘의 노구를 이끌고 남북협상을 위해 삼팔선을 넘었던 백범의 진정성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승만을 국부로 옹립하지 못해 안달하는 보수 우익들의 역사 왜곡은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1948년 정부수립을 건국이라고 강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마침내 백범을 ‘테러리스트’로까지 폄훼하는 까닭과 겹쳐 보인다. 노욕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에게 여전히 그는 강력한 정적인 것이다.
2007년에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백범이 선정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이 집권하면서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과 무관하게 사후에도 보수-진보의 대립을 통해 백범과 이승만은 여전히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2016. 6. 25.>
백범 김구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증인으로서는 더 말할 것 없다"며 법정 떠난 백범의 기개
백범 김구 선생의 이력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백범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적이 한번 있다. 한민당 수석총무 설산 장덕수(張德秀) 암살사건과 관련해서였다.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에 이어 설산 장덕수가 1947년 12월 7일 서울 제기동 자택에서 암살되었다. 당시 설산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문제를 두고 백범과 갈등을 빚고 있었으며,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도 앞장서서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백범이 암살 배후인물로 오해를 사게 됐다.
5차 공판이 열린 4월 8일, 미군정 군사법정은 백범 앞으로 12일 오전 9시 증인으로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보냈다. 백범에게 소환장을 보낸 사람은 재판장이 아니라 미합중국 대통령 트루먼이었다. 일개 살인사건에 증인 소환 요청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 명의로 소환장을 발부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증인 출석을 하루 앞둔 4월 11일 백범은 자신이 이 사건과 무관함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금번 군율(軍律)재판소에 출정함은 나를 미국대통령 트루만씨의 명의로 불렀으므로 국제 예의를 존중하고자 함이지 내가 증인이 될 만한 사실이나 자료를 가진 까닭은 아니다. 내가 장씨 사건에 관련이 있는 것처럼 발표된 데 대해서는 나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 그것은 담화를 발표한 그 부문의 모략이며, 따라서 그 부문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두 차례 증인으로 법정 출석한 백범 김구
▲ 백범 김구 임시정부 주석 | |
ⓒ 백범기념관 제공 | 관련사진보기 |
8차 공판이 열린 3월 12일, 백범이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9시 45분 미군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백범이 입정했다. 검은 두루마기 차림에 검은 구두, 굵은 검은 테 안경에 자주색 토시를 끼고 검은 색 중절모를 손에 든 백범이 법정 한복판에 놓인 증인석으로 가 조용히 앉았다. 통역은 김용식(金溶植·전 외무장관). 곧이어 검사의 인정신문이 시작되자 검사가 그에게 물었다.
"직업은 무엇이오?"
그러자 백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당시 법정에서 취재를 하고 있던 조선통신사 사회부 기자 조덕송(趙德松·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이 장면을 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는 순간 가슴이 뻑뻑해지도록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격에 자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정말 명답이 아닌가! 나는 눈시울까지 뜨거워짐을 의식했다"고 썼다. (필자는 반민특위 관련 증언 청취 차 조덕송 선생을 여러 번 만났는데 조 선생은 반민특위 출입기자로도 활동했다.)
이어 강거복 변호인과 검사의 증인신문이 시작됐다. 몇 군데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변호인 : 장덕수씨를 아십니까?
증 인 : 잘 알지요.
변호인 : 언제부터 아십니까?
증 인 : 장덕수씨가 일곱 살 때부터 아는 사이요.
변호인 : 김석황이나 신일준이나 기타 사람에게 장덕수 사건에 대해서 무슨 명령을 하신 일은 전혀 없습니까?
증 인 : 전혀 없소.
검 사 : 1947년 8월이나 혹은 9월쯤 장덕수씨가 선생을 찾아간 일이 있습니까?
증 인 : 종종 찾아왔소.
검사 :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었습니까?
증 인 : 사제 간이니까…… 혹 병문안으로 온 적도 있겠고 하니 그 목적이란 것을 명백히 지적할 기억은 없소.
검 사 : 장씨가 찾아간 목적은 선생이 임시정부로 하여금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니었소?
증 인 : 원 답답하구려…… 임시정부는 기능이 없는데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겠소?
검 사 : 직접 본인이 장씨에게 불만하다고 말한 적은 있소?
증 인 : 없소.
검 사 : 작년 8월이나 9월 중에 김석황, 조상항, 손정수, 신일준 4명이 찾아왔을 때 장 씨를 없애버리라고 말한 적은 없소?
증 인 : 없소.
검 사 : 확실하오?
증 인 : 확실하오.
검 사 ; 다른 것은 기억이 없다면서 이 기억만은 확실합니까?
증 인 : 사람을 죽이라니 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니만치 확실치 않을 수 없소.
검 사 : 내가 장시간에 걸쳐서 질문하는 목적은 선생의 본심을 혹 오해해 가지고 아랫사람들이 그런 사건을 일으키지나 않았는가 싶어서 그러는 것인데 어찌 생각하오?
증 인 : 나는 동족과 조국을 사랑하오. 그러한 나로서 어느 좌석에서든지 그놈 죽일 놈이니 마니 함부로 말할 리가 없소.
검 사 : 그렇다면 선생의 제자 격인 피고인들이 진술한 것마다 왜 한결같이 선생과 관련된 내용으로 부합 일치될까요?
증 인 : 알 수 없지요.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하오.
검 사 : 누구의 모략이란 말이오?
증 인 : 그것을 이루 다 말하자면 모 단체 등의 나 개인에 관한 것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나는 왜놈 이외에 죽일 리가 없소.
검 사 : 그러면 김석황은 선생을 두고 거짓말을 한 셈이오?
증 인 : 그렇소. 거짓말을 안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그리 된 것 같소.
검 사 : 무슨 환경으로 그랬을까요?
증 인 : 그야 경찰에서 고문도 했다고 합디다.
검 사 : 경찰에서 고문을 했다는 말은 확실히 보고 하는 말이오? 짐작으로 하는 말이오?
증 인 : 내 눈으로 고문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소만 고문했다는 소문을 들었소.
백범이 장덕수 암살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나온 것은 범인 김석황(金錫璜)의 기소장 내용 때문이었다. 당시 한독당 중앙위원으로 있던 김석황은 조사과정에서 자신이 백범을 찾아갔을 때 백범이 장덕수 등을 두고 "이놈들은 나쁜 놈이야"라고 말했으며, 그 후 살해계획을 백범에게 알렸더니 "아, 그런가"라고 말하더라고 진술했다. 검사는 이 점을 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나 별다른 애초에 관련이 없었으니 성과나 나올 리 만무했다.
증인신문은 무려 네 시간 반 만에야 끝이 났다. 재판장은 15일 아침 9시부터 공판을 속개하며 백범에게 다시 증인으로 출두해 줄 것을 요청하고 폐정을 선언하였다. 3월 15일 9차 공판에 백범이 증인으로 다시 출석하였다. 그런데 이날 재판정에서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증언 도중에 백범이 퇴정하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오전 9시, 백범이 공판정에 나와 증인석에 앉자 검사가 곧바로 신문을 시작했다.
검 사 : 지난 금요일(12일) 내가 신문한 데 대하여 선생이 답변한 내용 중에서 피고인들이 진술하기를 모두 선생의 명령을 받아서 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물었던바 선생은 모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답변한 바 있는데 그러면 그 모략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증 인 : 대답을 못 하겠소.
검 사 : 대답을 못 한다는 것은 그 답변이 혹 피고인들에게 대하여 유죄가 되든 무죄가 되든 하여간 무슨 영향을 줄까 싶어 그러는 것입니까?
검사의 질문에 백범은 즉답을 하지 않은 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검사 대신 재판위원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할 말은 이미 다 했소. 내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미국 대통령의 요청이 있어 국제 예양(禮讓)을 존중해서 증인으로 여기 나온 바인데 마치 나를 죄인처럼 취급하는 듯하니 나로서는 매우 불만이오. 내가 지도자는 못되더라도 일개 선배요, 나라를 사랑하는 내게 대해서 법정에서 이렇듯 죄인취급을 함에는 나로서 이 이상 말 할 것이 없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종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으니 만일 나를 죄인이라 보면 기소를 하여 체포령을 띄워 잡아넣도록 하시오. 증인으로서는 더 말 할 것이 없으니 나는 가겠소."
말을 마친 백범은 모자를 한 손에 들고 뚜벅뚜벅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누구도 백범을 제지하지 못했다. 방청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채 법정 문을 나서기 전에 강거복 변호인이 급히 백범에게 다가와 뭐라고 귓속말을 하자 백범이 다시 증인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그 때 피고석에 앉아 있던 주범 박광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사형을 받아도 좋지만 저분(백범)은 왜 붙들어다 놓고 들볶는 거요?"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장내가 수습되자 강거복 변호인이 재판장에게 증인신문 종결을 요청했다. 재판장은 검사 측과 상의한 후 증인신문 종결을 선언했다. 백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을 빠져나왔다. 두 차례에 걸친 백범의 증인 출석은 이걸로 모두 끝이 났다. 나중에 재판부는 백범이 장덕수 암살사건과 무관함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미묘한 시기에 백범이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석함으로써 세간의 오해를 사는 등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 이는 당시 미군정과 한민당, 이승만 등이 노리던 바였다.
오늘은 백범 서거 68주기다. 일제하에서는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고, 해방 후에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심초사하였으나 끝내 극우세력의 하수인인 안두희가 쏜 총탄에 생을 마감했다. 백범인들 티끌만한 오점이나 허물도 없을까마는 그만하면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이 묻힌 효창공원이 국립묘지로 성역화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선생의 안식을 기원한다.
2017.6.26. 백범 선생 68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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