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8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1)-노근리 사건
<연재>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33)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현재 한국과 미국은 ‘동맹관계’지만 대등하지 않다. 한국은 외교,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미국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다. ‘절대적’이라고까지 말하기에는 약간 어폐가 있지만 미국이 한국에 ‘큰’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때는 ‘종속국’이나 ‘신식민지’와 같은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은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미관계에서 가장 불균형이 심한 곳은 군사와 관련된 부문이다. 아직도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은 미군이 갖고 있다.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한류가 세계를 누빈다며 자랑하지만, 자기나라 군대의 작전통제권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창피한’차원을 넘어서는 매우 심각한 국가주권의 흠결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국가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고 있는 꼴이니 이를 두고 어떻게 제대로 된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국과 미국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이니 135년이나 되는 오랜 관계를 갖고 있다. 미국과의 공식 관계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끊어졌다. 하지만 일제시기에도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미주지역 동포들은 임시정부 재정지원의 중추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미국과 한국은 정치, 문화, 종교적으로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 후 미군이 남한지역을 점령하면서부터 미국은 한국에게 가장 가까운 ‘우방(友邦)’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는 미국과의 관계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미국은 미군정을 통해 남한지역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평정하였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미국은 남한 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고, 6.25전쟁으로 남한 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직접 군대를 보내 구해주었다. 또한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이 제공한 원조물자로 전시의 어려운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미국은 한국인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와 같은 미국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씩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성조기를 휘날리며 미국의 은덕을 찬양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곤 한다.
그러나 앞으로 대한민국을 짊어지고 나갈 세대에게는 미국에 대한 부채가 없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미국에 빚진 게 없으니 비굴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조부모들 세대가 신세를 좀 졌다고 그들까지 채무자가 돼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 중에도 미국의 은덕에 대해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미국이 한국을 지원해준 것은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지 한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미국은 그동안 한국에 준 것 이상으로 가져갔다. 한국은 60년 이상 미국에 헐값으로 군사기지를 제공해왔다. 지금은 한국이 주한미군의 주둔비용을 50%나 분담하고 있다. 미국의 새 대통령 트럼프는 한국에 주둔비용을 더 내놓으라고 요구할 태세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어디 주한미군이 한국의 안보만을 위해 주둔하는 군대인가 말이다. 냉전시대에는 그런 주장이 먹혀들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주한미군의 주된 역할은 사실상 미국의 세계패권을 위협할 잠재적 적국인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지위 변화’다. 그런데도 남한의 친미주의자들은 주한미군의 주둔에 거저 감읍할 따름이다.
반미의 무풍지대에서 대중적 반미로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은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미국의 요구를 거의 맹목적으로 추종해왔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미국의 의도와 배치되는 행위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국은 어떤 동맹국도 거부한 베트남 전쟁 파견을 수용하여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하며 ‘자유의 십자군’노릇을 하였다. 이라크에도 미국·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병했다. 베트남과 이라크에 파병한 것은 한국의 국익과도 관련이 있지만 굳이 군대까지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이 그러한 일을 한 것은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본, 영국과는 차원이 다른 ‘하위동맹자’이지만 지금까지 미국의 훌륭한 동맹자 노릇을 해온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자세하게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경제적으로도 한국은 미국에 받은 만큼 돌려주었다. 게다가 한국은 미국식 제도와 문화,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하다. 양적 균형이 맞는지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렵지만 한국도 미국에게 줄 만큼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한국민은 미국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21세기에 들어와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상당히 바뀐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과거 한국에서는 미국에 대한 비판을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남한 사회는 누구 말처럼 ‘멸균실’수준의 반공(反共)국가였고, 그에 버금갈 정도로 ‘반미의 무풍지대’였다. 1980년대가 되어서야 이른바 ‘반미운동권’이 겨우 선도적인 미국비판을 내놓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래봐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대학생들의 서울 문화원 점거사건, 농민들의 미국산 농산물 수입 반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1세기 한국민의 의식이 많이 달라졌다. 미국이 불합리한 태도를 보이면 거침없이 반미의식을 표현한다.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한 여중생 효순과 미순을 위한 촛불시위도 그랬다. 여기에는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적극 참여했다. 2016년부터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사드 반대투쟁이 반미투쟁으로 나아가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위안부 협상의 배후에서 압력을 행사한 것과 함께 한반도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성역이 아니다. 한국민의 이해관계와 배치될 경우 언제든지 대중적인 반미투쟁도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이 같은 한국인의 대미인식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한국 현대사를 통해 오랫동안 쌓여온 역사의식의 발전 결과라 할 수 있다. 역사의식은 역사의 고비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60년 4.19, 1980년 5.18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2016년 11월 촛불혁명과 같은 혁명적 사건들을 통해서다. 하지만 한편으로 역사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유연적인 사건, 작은 일들이 역사의 변화에, 사람들의 의식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노근리 사건도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근리 사건은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하순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이 한국 민간인을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랫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44년 동안 역사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던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한국전쟁 시기 미군에 의한 한국 민간인 학살의 단초가 드러났고, 이를 통해 그동안 ‘인권과 정의의 보루’로 포장되었던 미군의 실체가 폭로되었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미군의 모습은 자유․인권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향해 기총소사와 총질을 해댄 학살자였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미군의 실상을 드러내는 데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미국과 한국 두 나라 정부는 오랫동안 노근리 사건의 진실을 은폐해 왔으나 영원히 감출 수는 없었다. 나아가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벌인 학살 행위에 대해서도 다시 조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노근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950년 7월 25일 전후한 시점에서 영동 일대는 대전을 점령하고 남하를 시도하는 인민군과 패주하는 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은 7월 19일 대전공략에 들어가 7월 24일 대전을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대전이 함락 후 인민군 주력부대의 다음 공격 목표로 영동 지역이 들어왔다. 전선이 가까워지자 대전에서 김천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위치한 영동읍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들은 근처 산속으로 피란을 갔다.
▲ 노근리 사건 현장 1960년대 쌍굴다리 전경(노근리 사건 자료집) |
그런데 그때 미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피란을 시켜준다면서 모두들 산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미군은 일본인 통역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주민들을 모았다. 당시 임계리는 60호 정도의 마을로, 평균 4인 가족으로 계산을 해도 2백여 명이 넘었다. 임계리 보다 큰, 바로 옆 동네 주곡리 주민 3백여 명도 미군의 권유로 피란길에 올랐다. 거기에 대전 등지에서 피란을 오다가 합세한 2백여 명의 타지 사람들까지 합류해 대략 7백여 명의 피란민 대열이 형성됐다. 이들은 미군의 재촉을 받으며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해거름 무렵에 출발한 7백여 명의 피란민 행렬은 미군의 재촉에도 속도를 내지 못했다. 보리쌀 자루와 솥, 이불보따리를 짊어진 대다가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함께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가지 못해 밤이 되었다. 미군들은 피란을 중지시켰다. 모두 도로 밑의 강변으로 내몬 뒤 모두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고개를 들면 총을 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날 밤 가까운 곳에서 인민군과 교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알이 날아가고 포격소리도 요란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악몽처럼 밤을 지샜다.
다음날 아침 미군의 명령에 따라 피란민들이 다시 출발했다. 강변에서 도로로 올라온 피란민 행렬이 4킬로미터 가량 나아가 노근리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미군들은 탱크로 도로를 차단하고 정지 명령을 내린 다음, 도로와 인접한 철로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피란민들은 미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7, 8명의 미군들이 철길 위로 올라온 7백여 명의 피란 짐들을 앞쪽에서부터 검사하기 시작했다. 검사를 기다리는 행렬이 2백미터는 되었다. 전날 저녁부터 밥을 못 먹은 피란민들은 차례를 기다리면서 가족끼리 둘러앉아 미숫가루 등으로 허기를 달랬다. 일부는 앞가슴을 풀어헤친 채 소 그늘에 앉아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피란민들의 짐보따리에는 이불이나 보리쌀 따위밖에 없었다. 피란민들의 짐 검사를 끝낸 미군들은 어딘가에 무전기로 연락을 하더니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곧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피란민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렸다. 미군 폭격기는 20여 분간 폭격과 함께 기총소사를 했다. 현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 상태가 되었다.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었고 여기저기서 사람과 소가 쓰러졌다. 이때 철로 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최소한 1백여 명은 죽었을 것이라고들 증언하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철로 밑에 있는 수로용 굴로 모여들었다. 굴의 폭은 2미터가 될까 했다. 폭격이 멈추자 폭격 직전 어디론가 달아났던 미군 3~4명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이제 진짜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켜 주겠으니 모두 나오라”고 말했다. 미군들 가운데 위생병 한 명은 부상자들에게 약도 발라주고 붕대도 감아주었다. 사람들은 치료까지 해주는 것을 보고는 아까는 뭔가 잘못돼 폭격을 했지만, 이제 정말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미군은 피란민들을 바로 1백여 미터 떨어진 쌍굴다리로 몰아넣었다. 철로 밑에 나란히 뚫린 쌍굴다리 밑에 약 4백여 명의 피란민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그런 상태에서 미군은 굴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양쪽 야산에 기관총을 설치하고는 굴다리에서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을 쏘아 죽였다. 한 여름철인데다가 폭격에 놀라 허둥대느라 목이 말랐다. 사람들은 굴다리 바로 아래쪽 물이 좀 고여 있는 웅덩이로 슬금슬금 내려가 물을 마시려 했지만 나가는 족족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미군은 밖으로 나간 사람뿐만 아니라 굴다리 안까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총에 맞지 않으려고 더 안쪽으로 밀착했다.
하루 종일 총질을 해댄 다음날 아침, 위생병을 앞세우고 미군 2~3명이 굴다리로 와서는 전날처럼 부상자를 치료해주었다. 미군 두세 명이 굴다리 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살펴보기도 했다. 국민학교 처녀교사 정구임(당시 20세)이 일본어로 “제발 우리를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 남쪽으로 피란시켜 달라”고 했더니 미군은 “여기가 안전하다”고 말했다. 정구임은 그날 저녁 미군이 쏜 총에 사망했다.
굴다리에는 미군과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연희전문 사학과에 다니던 정구일이었다. 그는 마을에서 피란 오기 직전 약 일주일간 마을 근처에 진지를 구축한 미군들의 통역관 노릇을 하기도 했다. 정구일이 굴다리 근처에 온 미군에게 “왜 아무 죄 없는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지 그 이유나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그 미군은 “피란민이라 할지라도 의심나는 사람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고 답했다. 그래서 정구일이 “우리는 총은커녕 칼 한 자루도 가진 것 없는 양민들인데 무엇이 의심스럽기에 죽이려는가”라고 했더니 미군은 그냥 냉랭한 표정만 짓고 가버렸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그때서야 사람들은 ‘미군들이 우리를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작전상 죽이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날 밤부터 남자들을 중심으로 필사의 탈출이 시작됐다. 하지만 탈출을 시도한 사람 가운데 절반가량은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 속에 떨어야 했고, 허기와 목마름으로 극한상황을 맞았다. 사람들은 예의나 격식을 잊어버렸다. 전쟁이 어떻게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를 그 굴다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실감했다. 전쟁은 이웃이나 친척뿐만 아니라 가족간의 본능적 사랑마저도 파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양해찬은 그 처절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 마을 조남일 씨 부인이 하필이면 그 굴다리에서 둘째 날 애를 낳았어요. 조남일 씨가 부인에게 말하더군요. ‘여기 있으며 죽는다, 탈출해야 한다.’부인이 ‘애는 어떡하고요’하니까 ‘애를 데리고 가면 가다 울어 미군에게 발각돼 우리 모두 죽는다, 여기 그냥 버려두고 가자’고 해요. 부인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탯줄도 끊지 않은 애를 버려두고 남편과 탈출하더군요. 그걸 말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버려진 아이에게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전쟁은 부부간의 사랑도 파괴하더군요. 부인하고 함께 달아나면 부인 발걸음이 늦어 미군에게 당할 가능성이 많으니까 부인에게 아무 말도 없이 슬그머니 도망친 남편들이 많았으니까요.”
굴다리에서 사흘째. 남자 청장년들은 대부분 탈출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고 굴다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친 아녀자들과 어린이, 아기들이었다. 그런데 미군들은 이제 굴다리 바로 앞에까지 와서 총을 난사했다. 인민군들에게 패주하면서 마지막 살육을 한 것이다. 그때까지 굴다리 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1백여 명 정도였는데 이 총질로 절반가량이 죽었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은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햇빛 아래 역사 속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정은용이었다. 당시 경찰관으로 가족들을 두고 피난을 떠났던 정은용은 나중에야 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됐다. 그는 이 사건으로 다섯 살 난 아들과 두 살배기 딸을 잃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이 소식을 들은 후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시들 써 아픔을 토로했다.
정은용은 1960년 10월 27일 노근리 사건을 상세히 기록해 미합중국 정부 앞으로 손해배상청구서를 보냈지만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 후 1994년 봄 다시 사건의 진상을 정리한 실록소설 그대, 우리 아픔을 아는가(도서출판 다리)를 펴냈다. 그런데 이 책자는 노근리 사건을 햇볕 아래로 나오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국내의 각 언론사들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여론화 작업을 시도했다. <한겨레> 신문의 황순구 기자가 유족들의 증언을 취재해 1994년 5월 4일 처음으로 기사를 썼지만 전국판이 아니라 충청판에만 실렸다.
이 사건을 보다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것은 월간 <말>이었다. <말>지 기자였던 오연호는 우연히 서점에서 정은용이 쓴 책을 접하게 된다. 그는 책을 읽는 순간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사실이다’라고 직감했다. 그는 즉각 취재에 들어갔고, 1994년 7월호에 「최초 증언-6.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백여명 학살사건」이란 기사를 실었다. 노근리 사건에 대한 최초의 심층취재였다. <말>은 1998년 9월호, 1999년 6월호에서 미군 작전일지 등을 통해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다루었다. 1999년 6월호에서는 “피란민을 포위하라”는 내용이 담긴 작전일지까지 공개했다.
한편, <말>이 사건을 계속 보도하고 있던 1999년 봄부터 AP통신도 가해자들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AP가 <한겨레>와 <말>의 기존보도를 보고 본격취재에 들어간 것이다. 그 후 9월 29일 드디어 AP통신이 보도하면서 이 사건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AP는 사건 당시 노근리에 배치됐던 미군 병사 10여 명의 인터뷰 기사와 제1기갑사단 명령서, 미8군본부 통신문, 미군 25사단 명령서 2종 등 4가지의 문서를 입수 보도함으로써 그동안 국내 언론이 보도한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AP통신의 보도 이후 국내 소위 메이저 언론들이 보인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사대주의였다. 정은용 등 피해자들이 국내 언론의 찾아다니면서 여론화를 시도할 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겨레>에 보도되고 <말>이 심층취재를 했지만 국내 주요 언론들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국의 영향력 있는 통신사가 보도하니까 그때서야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AP통신의 보도가 아니었다면 국내의 보수 신문들은 절대로 보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에 눈감고 반공주의와 사대주의에 찌든 한국 보수언론의 치부를 그대로 볼 수 있다.
노근리 사건의 원인은?
그렇다면 미군의 노근리 학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왜 미군은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것일까? 50년 동안 이런 의문을 품고 살아온 정은용은 그 해답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로 인민군에 패퇴를 계속한 미군이 겁에 질려 이성을 잃었을 경우, 또는 질이 나쁜 ‘예외적인’한 부대였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피란시켜 주겠다고 동네사람들을 목적의식적으로 모은 점, 폭격기와 공동작전을 펼친 점, 굴다리에서 사흘간 계속 총질을 해댄 점 등을 볼 때 그와 같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나는 ‘작전’과 ‘복수’가 함께 이뤄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미군이 대전에서 피란민으로 가장한 인민군 유격대에 크게 당한 직후였거든요. 그래서 현장의 미군이 말했다는 것처럼 미군은 실제로 ‘의심나면 피란민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피란민 조사를 통해 그들이 비무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살인을 계속한 것은 대전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과 피란민을 살려 둘 경우 언제 인민군들과 합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일단 학살을 시작했으니 ‘전멸’시켜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의심나면 피란민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라는 판단은 평생을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 같은 생각을 뒷받침해줄 중요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 무초가 미 국무부 딘 러스크 차관보에게 보낸 비밀서한이다. 2006년 5월 30일 미 AP통신은 1950년 7월 26일 존 무초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미 국무부 딘 러스크 차관보에게 보낸 비밀 서한 전문을 공개했는데 여기에 미군 방위선을 향해 접근하는 한국인 난민들에 대한 발포정책이 채택됐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무초는 “미군 방위선을 향해 접근하는 한국인 난민들에 대한 발포정책이 채택됐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이 문서를 보면 미군이 피난민 문제를 중대한 군사적 문제로 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인민군이 피난민으로 위장한 뒤 전선을 돌파하거나 배후에서 아군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7월 25일 피난민 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미8군 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한국정부 내무부 장관실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작전(G-1), 정보(G-2), 헌병대, 방첩대(CIC), 내무부와 사회부, 경찰 등의 관련 책임자가 모두 참가했다.
이때 “주민들의 남쪽으로의 이동을 금지하며, 만일 그럴 경우 총격을 받을 위험이 있음을 알리는 전단을 미군 라인 북쪽에 살포”하고, “만일 난민들이 미군 라인 북쪽으로 출현한 경우 그들은 경고 사격을 받을 것이며, 그래도 계속 전진하면 총격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아무도 명령 없이 남쪽으로 이동할 수 없으며, 이동은 경찰의 통제하에서만 가능하며, 모든 한국 민간인의 이동은 해가 지면 중단해야 하고, 그렇지 않고 어두워지면 총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고 결정했다. 이 문서에 의하면 “피난민이 미군의 작전에 장애가 될 경우 발포할 것”이 분명했다.
이 문서는 2006년 5월 AP통신이 발굴해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은 이 자료를 보고서 작성 이전에 확보했으면서도 이 내용을 보고서에 반영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 서한이 조사보고서 내용을 바꿀 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지극히 자의적인 판단이며 변명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서한을 비롯한 모든 자료와 정황 근거는 노근리 사건이 미군이 상부의 명령에 따라 조직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은폐된 진실이 드러나다
2001년 1월 12일 한국과 미국 두 나라는 노근리 사건에 대한 공동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때 양국은 ‘노근리 사건은 철수 중이던 미군에 의해 피란민 다수가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은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조사결과 발표 직후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미국을 대표해 1950년 7월 하순 노근리에서 한국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그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거듭 유감을 표명했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민을 향해 공식사과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숱한 주한미군의 범죄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주한미군사령관조차 공식사과 성명을 발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9년 용산 미군부대에 의한 한강 독극물 사건이 폭로되자 주한미군사령관이 공식사과를 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때도 사과 대상은 한국 국민이 아니라 서울 시민이었으니 국민을 향한 공식사과는 아닌 셈이다. 그렇게 보면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표명은 한미관계에서 상당히 새로운 변화를 알리는 신호라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냥 두었다가는 한국민의 반미감정이 격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사태를 마무리 짓기 위한 선제적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인 유감 표명에도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은 만천하에 명백히 드러나 아무리 해도 감출 수 없는 사실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단편적인 일부 사실만을 인정하겠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동안의 미군범죄사건에 대한 미국의 행동양식 그대로였다.
미군이 1945년 9월 7일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이래 주한미군의 범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났다. 주한미군의 역사는 곧 미군의 범죄 역사이기도 하다. 미군의 범죄는 여러 형태였다. 민간인 학살과 같이 명령계통을 따라 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한 집단 범죄 행위도 있고, 개별 사병들에 의한 개인 범죄 사건도 있었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진실을 밝히기보다 은폐하고 무마하기에 급급했다. 노근리 사건도 그런 경우의 하나였다.
1999년 9월 29일 미국의 AP통신이 그 사건을 보도하기 전까지 노근리 사건은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물론 AP통신의 보도 이전에도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들은 있었다. 사건 피해자의 한 사람인 정은용은 오랫동안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에 사건의 진실을 밝혀 달라는 탄원서를 내기도 했고, 1994년에는 실록 소설까지 써서 세상에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우연히 이 책을 읽은<말>지의 오연호 기자 또한 1994년 7월호에 사건을 심층 취재해 보도했다. 이보다 앞서 1994년 5월 4일 <한겨레> 충청판에 '6.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이란 제목의 특집기사가 실렸다. 이 같은 노력으로 이 사건의 실체가 상당 부분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미국이 꿈쩍도 안했다. 한국 정부도 미국 눈치나 보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1999년 9월 29일 AP통신이 보도하고, 이를 뉴욕타임스 등 미국의 유력지들이 받아 보도하게 되면서 이 사건은 세계적인 조명을 받게 됐다. 역시 외국(미국) 통신사나 신문에 실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워낙 민감한 문제여서 AP통신도 기사를 보도하는데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AP통신도 이 사건을 취재하고 1년 2개월 후에야 보도할 수 있었다. AP통신 내부에서 미국 정부(군부)의 눈치를 보면서 뭉그적거렸던 것이다. 노근리 사건 취재팀의 한 명이었던 찰스 J. 핸리 탐사전문 대기자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첫 기사가 작성된 것은 98년 7월이었습니다. 하지만 AP지휘부가 기사 출고에 거부감을 보여 1년 2개월 뒤인 99년 9월에야 첫 기사가 나갔습니다. 회사의 핵심 간부들이 보도를 망설였던 것은 기사가 너무나 폭발적이었고, 그들은 미군이 세계 각국에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미군에 대한 기존의 믿음을 깨뜨리면서 미군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또한 탐사 보도에 관해 깊은 이해를 갖지 못했습니다. 어려움을 가중시켰던 외부 요인도 있습니다. AP가 첫 기사를 작성하기 몇 달 전부터 CNN이 ‘테일윈드 작전(Operation Tailwind)’을 보도해 미 군부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테일윈드 작전 기사는 미군이 베트남전 동안 베트남 파견 미군의 탈주를 막기 위해 신경성 가스를 살포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논란을 일으켜 군사문제 보도가 엄청나게 위축돼 있었고, AP 지휘부는 이것을 이유로 탐사보도, 특히 군사 문제 보도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AP통신의 취재 내용을 파악한 다수의 가맹 회원사들이 AP간부진에 문의를 하는 등 압력을 가하자 AP통신은 어쩔 수 없이 그 사건을 보도하게 됐다. AP통신은 미국 내 1,600여개의 일간지들이 가담해 만든 일종의 비영리조합 형태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진실의 단면만 드러낸 두 나라 정부
AP통신의 보도 이후 반응은 뜨거웠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자 공격이 들어왔다. 일부 증언자의 증언이 1차적 경험이 아니라 간접 경험이라며 공격했다. 부분적인 착오를 전체로 확대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국방부는 ‘민간인에 총격을 가한 것은 고의성이 없었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전투경험이 없고 훈련이 덜 된 나이어린 병사들이 전장에 급히 투입되는 바람에 두려움에 떨다가 실수로 총격을 가한 것’이라고 변명했다.(26) 언제는 세계 최강이라고 자랑하던 미군이 한 순간 오합지졸로 바뀌었다.
더욱이 미 국방부는 사건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감추려 했다. 미 공군 전투·폭격기 등이 명백히 민간인을 공격목표를 삼았음을 보여주는 ‘임무보고서’라든지 ‘조종사의 증언’같은 것들을 은폐하려 했다. 이 같은 주장에 사건 피해자들은 진실을 은폐하는 행위라며 분개했다. 한미조사단의 공동 발표 뒤 정은용 노근리미군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장은 “산간 외딴 마을의 주민들을 미군이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주겠다며 끌어내 폭격과 기총소사, 소총으로 400여명을 마구 학살한 사건, 이게 노근리의 진실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발표는 이런 진실을 허구로 가리면서 생색만 내려는 짓입니다”라고 비판했다.
노근리 피해자들과 대책위원회는 미국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표문은 ‘일어난 사실’만은 인정하고 있을 뿐 ‘학살’이란 점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노근리 사건은 절박한 한국전쟁 초기의 수세적인 전투상황 하에서 강요에 의해 철수 중이던 미군이 노근리 주변에서 수 미상의 피란민을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힌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미군에 의해 사람이 죽은 사실은 인정하겠는데 고의는 아니라는 주장인 것이다.
발표문에서는 “사건의 가장 핵심 사안 가운데 하나인 사격명령 하달 여부에 대해서는 ‘증언자들의 증언이 엇갈려’결론에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이 문제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부분이었다. 한국과 미국은 각기 조사를 따로 진행했고, 조사결과보고서도 각기 따로 내놓았다. 미국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미국 측 보고서는 참전군인 175명에 대한 증언 청취 결과 일관되게 “사격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면서 사격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미국은 명확한 물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부의 명령에 따라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것이 아니라 경황없이 후퇴하는 와중에 일선 사병들이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주장했던 것이다. 도의적인 책임은 인정하더라도 군과 정부의 직접적인 책임만은 어떻게든 피해가려 했다.
미국 보고서는 발포 명령 책임 등의 주요쟁점에 대해 죄다 물음표를 달고 있다. 곳곳에서 ‘결정적 증거(hard evidence)’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사격명령은 없었다는 ‘단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고의적인 학살이 아니라는 증언들만을 골라서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 조사단 자문위원인 버나드 트레이너 예비역 해병중장은 “사격명령이 없었더라도 미군 지휘부가 최소한 부대와 사병을 제지하거나 통솔하지 못한 책임이 있으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발포 명령이 내려졌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정은용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들이 (민간인을 집단으로 사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정부의 책임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책임이 없다면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유감’을 밝힌 것은 또 뭡니까?”라고 비판했다.
미국 정부는 관련 자료들을 샅샅이 뒤지는 성의를 보이긴 했으나, 노근리 피해대책위는 미국쪽이 문건을 빼돌린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을 정도로 문제도 있었다. 실제로 미국쪽이 갖고 있는 미 1기갑사단 예하 각 연대와 대대의 전통보고문(커뮤니케이션 로그)은 몇월 며칠 몇시에 날씨가 어땠는지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문제의 노근리 지역 7연대 2대대 기록만 빠져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참전장병들의 증언을 이끌어 내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특히 루이스 칼데라 육군부 장관은 조사과정에서 “전쟁범죄자로 밝혀지면 처벌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참전군인들의 증언을 막았다.
자칫 잘못 증언했다가는 전쟁범죄자로 기소될 수도 있는데 면책특권이 없는 상황에서 누가 50년 전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나서겠는가?
AP통신에 보도됐던 주요 증언자 가운데 “나와 같이 있던 병력의 절반 정도는 민간인에게 사격을 했다”고 증언한 델로 플린트 소총수, “중대장 챈들러 대위가 상부와 무전통화 후에 터널 입구 쪽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발포할 것을 명령했다”
(36)고 한 유진 헤셀만 서기병, “우리는 그들을 완전히 전멸시켰다”고 증언한 노만 팅클러 기관총 사수 등이 정부의 공식적인 진상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론 인터뷰에는 응하면서도 ‘면책특권’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칫 전쟁범죄자로 처벌될 지도 모르는 정식 조사에는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한국 측 보고서에서는 문제의 제1기병사단 제7연대 2대대 전령과 무전병의 ‘피란민에 대한 사격명령이 반드시 있었을 것으로 믿고 있다’는 증언 등 학살명령과 관련된 사실을 중요하게 취급했다. 내용적으로 보면 사격명령이 있었다고 판단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한국 보고서 역시 학살 명령을 내렸다는 증언과 반대되는 내용의 증언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함으로써 학살명령에 대한 사실을 희석시켰다.
공동발표문은 이 외에도 공중공격에 대해서는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모호하게 기술했다. 결국 1999년 10월부터 시작된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15개월간에 걸친 노근리 진상조사 결과 발표는 “분명히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핵심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양쪽 주장을 병렬적으로 기술하는 선에서”끝났다.(38)
노근리 사건 공동 발표 이후
노근리 사건에 대한 미국측 보고서와 한국측 보고서 모두 공통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밝히기보다 미군의 책임을 가급적 최소화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미국측 보고서는 무수히 많은 사실 가운데 미군의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증언과 자료만을 주로 취급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어서 보고서로서의 객관성과 신뢰성이 부족하다. 노근리 미국 보고서에서는 잘못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 시정하겠다는 세계 최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당당한 자세나 면모를 전혀 읽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책임을 떠넘기고 회피, 왜곡하려는 입장이 그대로 드러날 뿐이다. 미국 보고서에 드러난 미군 병사들은 세계 최강의 무적군대를 보유한 자유의 십자군의 일원이 아니라 인민군의 진격에 겁먹고 두려움에 떨다가 실수를 연발하면서 ‘의도적이지 않게’한국 민간인을 살상한 불쌍한 군인들이다.
한국측 보고서 또한 계속해서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객관적 사실을 기초로 독자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미국의 입장을 배려하거나 이해하려는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고나 할까? ‘상부의 명령에 의한 명백한 학살 행위’라는 점을 명확히 드러내는 여러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와 반대되는 증언을 병렬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그러한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는 ‘기회주의적 서술’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랫동안 미국을 섬기며 살아온 사람들의 기회주의, 사대주의 근성이 드러난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9년 9월 30일 AP통신이 노근리 사건 유족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노근리 문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였다. AP통신의 보도로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은 세계적인 이슈로 부각되었다. 10월 1일과 2일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노근리 사건의 진상규명을 지시함으로써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대책반이 구성되었고, 10월 22일부터 노근리사건 피해자 신고 접수가 시작되었다. 2000년 1월 10일에는 미국 육군성 장관이 현장을 답사하고 대책위 및 생존피해자들과 면담했으며, 2001년 1월 12일 1년 동안의 피해자 면담, 피해현장 조사, 가해자 면담, 문서 연구 등을 거쳐 양국정부는 노근리 사건에 관한 진상조사 결과를 공동 발표했다. 그리고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깊은 유감을(deeply regret)’표명하였다.
2001년 한미 양국의 진상조사 결과 발표 후에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유족회는 사건의 재조사를 촉구하며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한 활동과 함께 시민사회의 노력도 있고 해서 2004년 2월 9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노근리 사건 희생자 및 유족 심사와 명예회복을 위한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만장일치로 통과될 수 있었다. 노근리 특별법에 따라 노근리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심사를 진행하였고, 218명을 희생자로 2,170명을 유족으로 최종 결정하였다.(39)
이와 함께 2005년에는 노근리 역사공원 조성 기본계획이 수립되어 노근리 사건을 역사 현장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2008년 6월 11일 오후 2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에서 노근리 역사공원 기공식이 열렸다. 그리고 2009년 9월과 10월에는 청주 MBC는 <노근리는 살아 있다>는 3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영하였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노근리 사건의 진실, 진실규명을 위한 주민들의 노력, 반전에서 평화로 나가야 하는 당위성 등이 자세히 그려졌다.
또한 2009년 노근리 역사공원이 평화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와 함께 노근리 사건 또한 반전과 인권에서 평화로 어젠다(Agenda)가 넘어가게 되었다. 2011년 10월 27일 노근리 쌍굴다리 건너편 4만평의 부지 위에 평화공원이 조성됨으로써, 노근리 학살 현장은 평화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평화공원에는 평화기념관, 위령탑, 조각공원, 평화기원 마당, 야외전시장, 교육관 등이 만들어졌다. 노근리 평화공원은 노근리에서 희생된 영혼을 추모하는 공간이자 살아남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여주는 역사관, 평화의 전당이 되고 있다.(40)
그러나 평화는 평화공원이나 기념관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아픔, 전쟁의 고통과 상처를 잊지 않고 평화를 지키려는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는 절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노근리 사건의 피해유족들을 중심으로 ‘노근리 국제평화재단’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전쟁기념관>이 아니라 <평화박물관>을 지어야 하고, 전쟁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노근리 사건의 최종적인 교훈은 평화를 위해서는 그걸 지키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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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2일 이승만대통령과 맥아더 사이에 임시수도 대전에서 맺어진 협정(‘대전협정’)에 의해 미군에게 넘어갔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작전통제권 회수를 위한 협상이 2년 넘게 진행되어 합의를 보았고, 그 결과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12월 1일 0시를 기해 평시작전권이 44년 만에 한국군으로 이양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작전권 이양협상 과정에서 전시작전권도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반환하기로 합의하였지만, 북한 핵 문제가 터지면서 무기 연기되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 문제가 다시 중요 현안문제로 떠올랐고, 논의 끝에 2007년 2월 23일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 전시작전권 환수시기를 2012년 4월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문제는 다시 후퇴를 거듭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2010년 6월 2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시작전권 이양시기를 2015년 12월로 연기하였고, 박근혜 정부는 2014년 10월 23일 제46차 한미 안보협의회의(SCM)에서 전시작전권 환수를 무기한 연기하였다.
2) 오연호,『노근리 그 후』, 월간 말, 1999, 18~19쪽
3) 오연호, 위의 책, 20쪽
4) 오연호, .25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 <월간 말>, 1994년 7월호, 38쪽; 강준만,『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1권』, 2004, 96쪽
5) 오연호, 위의 책, 25쪽
6) 임영태, 『거꾸로 읽는 한국사』, 푸른나무, 2002, 108쪽
7) 오연호, 위의 책, 27쪽
8) 정은용,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다리미디어, 2000(2판), 185쪽
9) 오연호, 위의 책, 59~60쪽
10) 오연호, 위의 책, 61~65쪽
11) 오연호, 위의 책, 66~67쪽
12) 오연호, 위의 책, 67쪽
13) 임영태, 위의 책, 111쪽
14) <연합뉴스>, 2006. 5. 30.>
15) 「한국전 당시 난민 관련 무초 대사 서한 전문」1950년 7월 26일, 무초 대사가 미 국무부 딘 러스크 차관에게 보낸 비밀 서한」, <연합뉴스> 2006. 5. 30
16) 서울신문, 2006. 10. 31
17) 정영주, “노근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2)”, <통일뉴스>, 2006. 7. 25
18) 정은용,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다리미디어, 1994) 참고
19) .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 <한겨레 충청판>, 1994.5.4일자; 오연호, “최초 증언-6.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백여명 학살사건”, 월간 말, 1994년 7월호
20) 이수열, “노근리 사건에서 본 인권”, <오마이뉴스>, 2000.11.16; 오연호, 『노근리 그 후』, 월간 말, 1999; 한홍구, “주미대사도 외면한, 아아 노근리”, <한겨레21>, 제618호(2006년 8월 12일)
21)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 <AP통신>, 9월 29일자. 이 기사에서 1950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동안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일어난 주민의 떼죽음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미군이 이 마을사람 500여명을 피난시켜주겠다는 구실로 꾀어 철길에 모아놓고, 공군기를 띄워 포탄과 기관총을 퍼부어 살상했고, 심지어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 다리 밑으로 달아나던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향해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백명을 사살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AP통신은 이 같은 만행이 1기갑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조직적으로 저질러진 것임을 입증하는 문건도 입수, 공개했다(<한겨레>, 1999.10.01.자 기사[사설]).
22) 뉴욕타임스는 노근리 사건에 관한 AP통신 기사를 1면에 크게 다루면서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인 노스웨스턴대학교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말을 인용, “미군에 의해 수십에서 수백명의 한국 양민이 살해됐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도 10월 1일자 신문에서 「육군이 노근리 사건을 무시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고, “클린턴 행정부 출범 이후 희생자 유족들이 여러차례 문제를 제기했으나 주한미군측은 이를 무시했다”고 보도했다.(경향신문, 1999. 10. 02)
23) 손봉석, “AP도 ‘노근리학살’기사 1년간 보도 못했다”, <경향신문>, 2008. 11. 13. 한편, 이 사건을 취재, 폭로한 AP통신의 최상훈 기자는 “한미 특수관계가 진상을 묻은 주범”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정부가 비겁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한겨레, 1999. 10. 02).
24) 설원태, “AP지휘부가 노근리 기사 1년간 묵살 미 국방부선 정보누락 등 은폐 시도”, <경향신문>, 2008. 12. 11.
25) <경향신문>, 2008. 11. 13일자
26) <경향신문>, 2008. 12. 11일자
27) 임영태,『거꾸로 읽는 한국사』, 푸른나무, 2002, 103쪽
28) 「한미 노근리사건 공동발표문」, <연합뉴스>, 2001. 01. 12; <통일뉴스>, 2001, 01. 12
29) 노근리사건조사반, 『노근리사건 조사결과보고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조사부(2001. 1.) 참고
30) 미국 입장은『노근리사건 미측최종보고서(DEPARTMENT OF THE ARMY INSPECTOR GENERAL NO GUN RI REVIEW, January 2001)』(군사편찬연구소, 2001)를 참고할 수 있다.
31) 조계완, “작은 성과, 큰 실망 ... 한미 양국 노근리 진상조사반 결과 발표... 양민학살 인정, 그러나 책임회피 의도 역력”, <한겨레21>, 343호, 2001-01-16
32) “뉴스인물/노근리대책위 정은용 위원장/진실가린 ‘유감’표명 유감”, 한겨레, 2001.01.13(빅카인즈검색일: 2017.1.15.)
33) <한겨레21>, 343호, 2001-01-16
34) <한겨레21>, 343호, 2001-01-16
35) 임영태, 『거꾸로 읽는 한국사』(2002), 103~104쪽;
36) 한겨레, 1999.10.01일자/10.04일자; 동아일보, 1999.10.04.일자
37) 노근리사건조사반, 『노근리사건 조사결과보고서(2001.1.)』, 176~179쪽
38) 정영주, “노근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통일뉴스>, 2006. 07. 24;
39) 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및명예회복위원회는 최종적으로 신고된 희생자 235명 중 218명을 노근리 사건 희생자로 인정하고 17명은 불인정하였다. 또 신고된 희생자의 유족 2,414명 중 2,170명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유족으로 인정하고 244명은 불인정하였다.(노근리 평화공원 홈페이지: http://nogunri.yd21.go.kr/html/kr/nogunri/nogunri_04_03.html)
40) 노근리 평화공원 홈페이지(http://nogunri.yd21.go.kr/html/kr/intro/intro_02.html)
2015. 5. 8
핏물 마셔가며 죽음 이겨낸 그들... 노근리 비극 아시나요
14.10.10 11:41l최종 업데이트 14.10.10 14:09l
고 김근태 전 국회의원의 야만적인 고문 이야기를 그린 <짐승의 시간>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만화가 박건웅이 또 한 권의 묵직한 그래픽 노블(만화소설)을 들고 나왔다.
1950년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충북 영동에서 일어난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아래 '노근리 사건')을 그린 <노근리 이야기 1부 - 그 여름날의 기억>이 그것이다.
책 말미에 실린 노근리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부산을 향해 절반쯤 가다 보면 충북 영동에 한 굴다리를 지나게 된다. 노근리 마을로 가는 쌍굴 다리이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다.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만 3일 동안, 미군은 하가리와 노근리 일대에서 피난 가던 사람들을 폭격, 기총소사로 대량 학살했다.
생존자들이 희생자 명단을 영동군청에 접수한 것에 따르면, 사망자는 약 180여 명이고, 실종자는 20여 명, 부상자는 50명쯤이다. 그러나 산산이 바스러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신들, 학살 이후 부상과 후유증으로 죽은 피난민들까지 더하면 피해자는 400명이 넘는다. 지금까지 미국 AP 통신 기자나 미 국방성 조사반에게 미군이 노근리에서 민간인을 공격한 사실을 증언한 참전 미군은 확인된 사람만 25명이다. 1950년 노근리 사건 발생 직후 <조선인민보>는 사망자만 약 400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620쪽)
흑백 수묵화풍으로 담아낸 미군의 노근리 학살 만행
만화의 원작은 정은용씨가 1994년에 쓴 실화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정씨는 노근리 사건에서 어린 아들과 딸을 잃었다.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 국무총리 직속 노근리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과 미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 진상을 밝히는 데 앞장섰다. 그래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만화의 서술자도 '은용'으로 되어 있다.
흑백 목판화풍의 강렬한 대비감이 돋보였던 <짐승의 시간>에서와 달리 이번 만화에서는 전체적으로 흑백 수묵화풍의 여유와 부드러움이 특징적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특징이 한결같지는 않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나 그림 속에 전해지는 사건의 극적 비중 여하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야기가 야만적인 학살의 한복판을 향해 갈수록 그림의 여유 공간은 점점 줄어든다. 담묵(옅은 묵색)에서 시작된 만화 컷은 학살의 절정부로 다가갈수록 어지러운 배경 무늬들이 함께하는 농묵(짙은 묵색)으로 처리된다. 수묵화풍의 그림이 주는 은은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는 그 안에 담긴 비극적인 학살의 이야기와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정서적으로 강렬한 자극을 준다.
노근리 사건은 영동읍 임계리에 한 무리의 미군이 일본어 통역을 앞세우고 들이닥치면서 시작된다. 통역은 미군이 사람들을 후방에 있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줄 것이라며 사람들을 집합시킨다. 미군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수색해 200명을 모은다. 미군은 옆 동네 주곡리에서도 사람들을 모아 모두 500~700명의 피난민 대열을 만든다.
본격적인 학살은 피난민들이 노근리 쌍굴 근처에 이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은 철로 위에서 피난민들의 짐을 샅샅이 검사했다. 그러다 어디론가 무전을 친 뒤, 짐 검사를 멈추고 사라진다. 얼마쯤 지나자 남쪽 하늘에 폭격기 두 대가 날아와 철로 주변에 있던 피난민들을 향해 폭탄을 투하한다. 지상의 미군들도 기관총을 쏘며 가세했다. 그 첫 번째 학살로 100명 가까운 피난민들이 죽는다.
미군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비행기 폭격이 끝나자 미군들은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확인 사살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쌍굴로 몰아넣었다. 그때부터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할 일들이 벌어졌다.
미군은 굴 안에서 사람들이 조금만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도 총격을 가했다. 사람들은 우는 아기들을 타박했다. 전춘자(당시 10세) 아버지는 아기를 조용히 시키라는 사람들의 성화에 자신의 어린 외아들을 굴 속 개울물에 밀어 넣어 죽였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갈증을 못 이긴 사람들은 핏물 범벅이 된 개울물을 퍼마시기도 했다.
서쪽 굴에 졸졸 흐르던 물은 시체 더미에 막혀 핏물 웅덩이를 이루었다.
"난 그때 목마름을 못 이겨, 시체가 둥둥 떠 있는 핏물을 쭉쭉 빨아 먹었습니다." - 김학중 당시 19세
"엄마한테 물을 떠 드리려고 가 보니까 웅덩이 물 위에 피인지 기름인지 두꺼운 막이 생겨 있었어요. 그걸 밀치자 핏덩이가 마치 마른 진흙덩이처럼 갈라졌고 그 밑으로 흐르는 핏물을 뜰 수 있었어요." - 양해찬 당시 10세 (464~465쪽)
쌍굴에는 모두 400~500명의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미군은 그곳을 향해 시도 때도 없이 기관총을 쏘아댔다. 더위와 갈증,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굴 밖으로 기어나오는 사람은 가차없이 사살했다. 동맹국 군인이 주둔국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그 모순적인 상황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일일까.
그때 대학 2학년이던 정구일이 미군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양민이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이는 것이오?"
"대전에서 피난민을 가장한 인민군에게 우리 미군이 엄청나게 당했다. 따라서 의심스러운 피난민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엄명이 떨어졌다."
"우리가 어딜 봐서 의심스럽다는 거요? 우리는 양민이오. 제발 상부에 잘 얘기해서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가게 해 주시오. 부탁이오." (356~359쪽)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길....
부록으로 실린 '노근리 학살 사건 상황도'의 설명에 따르면 노근리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미 제1 기갑사단과 인근 미 제25 보병사단은 피난민 속에 적군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 전선을 지나가는 모든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해 총격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노근리 사건이 미군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작전 수행 과정에서 일어났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미국은 노근리 사건에 대해 계속 발뺌만 하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자신의 책 <대한민국史>(4권)에서 미국이 노근리 사건을,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겁에 질리고 혼란에 빠진 병사들이 상부의 명령 없이 피난민들에게 발포한 '불행한 비극'으로, '비계획적인 살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000년에 노근리 민간인 학살 진상조사를 수행한 우리 정부도 그러한 미국의 주장에 동의해 같은 내용으로 한미공동발표문을 완성해 발표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교수는 예의 저서에서 당시 주한대사인 존 무초가 본국에 보낸 편지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한국 피난민에 대한 미군의 발포 방침이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무초 대사는 편지에서 주한미군 최고위 간부들이 모여 "주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고 만일 난민들이 미군 방어선 북쪽에서 출현할 경우 그들은 경고 사격을 받을 것이며, 그래도 계속 전진하면 총격을 당할 것"이라고 썼다고 한다.
노근리에서 일어난 야만적인 학살의 이야기는 정은용이라는 탁월한 기록자와 몇몇 생존자들, 그리고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양심적인 국내외 기자들의 노력 덕분에 고스란히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조만간 나올 2부를 통해 전해진다고 한다. 이 책과 함께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혀,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노근리사건(老斤里事件)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26~29일 충북 영동군 주곡·임계리 주민들이 황간면 노근리 인근 경부선 철로와 수로·쌍굴에서 미군 항공기의 폭격과 기관총 등으로 학살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주민들은 대전 전투에서 패퇴한 미군의 인도하에 국도를 따라 대구방면으로 피란 중이었다.
26일 낮 12시 일본에서 긴급투입된 미군 1기병사단 7연대 2대대 H중대원들은 노근리에서 피란민을 가로막고 모두 철교 위로 올라갈 것을 요구했고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지시를 따랐다. 이때 미군 항공기가 나타나 피란민들에게 공중폭격을 가했고 놀란 주민들은 노근리 쌍굴로 피했다. 하지만 미군 항공기는 계속해 기총소사를 가했으며 지상에 있던 미군들도 26일부터 29일까지 쌍굴 안에 주민들을 가둬놓고 기관총 등으로 사격을 가했다. 피란민 대부분은 현장에서 사망 또는 실종됐고 10여명만 달아났다.
영동군청에 접수된 피해신고자는 248명으로 사망 177명, 부상 51명, 행방불명 20명 등이지만
정부에 접수된 피해상황과 다소 차이가 난다. 주민들은 매년 7월 말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 아무것도 모른채
미군과 일본군인의 말만 믿고
우왕좌왕 피난을 고민하는 노근리 사람들..
그저 미군들이 우리를 지켜준다고만 생각했겠지요..
갑자기 길을 가로막는 미군
그리고는 터져버리는 폭탄들과 날아오는 총알
▲ 이게 바로 4박 5일동안 노근리 주민들이 숨어지냈던
쌍굴다리예요~ 영화속에서는 당시의 모습을 CG로 재현했지만
아직도 문화재로써 존재한다고 합니다~
노근리양민학살사건 [老斤里良民虐殺事件]
1950년 7월 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양민 300여 명을 사살한 사건.
=>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노근리의 철교 밑 터널 속칭 쌍굴다리 속에 피신하고 있던 인근 마을 주민 수백 명을 향하여 미군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300여 명이 살해되었다.
1999년 9월 미국 AP통신은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명령에 따라 학살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AP 통신의 보도는 비밀해제된 당시 군 작전명령 중에서 '그들(피난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라는 명령의 원문(原文), 미군 제1기갑사단과 미군 육군 25사단 사령부의 명령서 등 미군의 공식문건 2건과 참전미군 병사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이 외부에 처음 드러난 것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면서였다. 당시 미군측은 소청을 기각하였고, 이 사건은 그대로 역사의 미궁 속에 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4년 4월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이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이 책에 주목한 《한겨레》은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그해 5월 4일자로 싣고, 7월 20일자에는 다시 집집마다 '떼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스케치기사로 실었다.
그후 월간지 《말》이 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하여 그해 7월호에 <6·25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한 내막을 기사화하였다. 1996년 MBC는 《말》지의 취재내용을 바탕으로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다시 이 사건을 재조명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내 어떤 언론도 이 사건을 주목하지 않았다. 다만 《말》지가 1999년 6월호에서 <미 제1기병사단 병사들 마침내 입 열다> 제하의 기사로 다시 속보기사를 실었을 뿐이다.
1999년 말 유족들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미육군성은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한국측과 협의할 예정임을 밝혔다. 2000년 1월 9일 미국측 대책단장인 루이스 칼데라 미육군성 장관과 민간전문가 7명을 포함한 18명의 미국측 자문위원단이 내한하여 12일까지 한국측 조사반으로부터 사건개요 및 조사상황을 청취한 뒤 충청북도 영동의 사건현장을 찾아 피해 주민들의 증언과 요구사항을 들었다.
6.25때 비극의 현장..노근리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노근리의 철교 밑 터널 속칭 쌍굴다리 속에 피신하고 있던 인근 마을 주민 수백 명을 향하여 미군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300여 명이 살해되었다.
1999년 9월 미국 AP통신은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명령에 따라 학살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AP 통신의 보도는 비밀해제된 당시 군 작전명령 중에서 '그들(피난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라는 명령의 원문(原文), 미군 제1기갑사단과 미군 육군 25사단 사령부의 명령서 등 미군의 공식문건 2건과 참전미군 병사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이 외부에 처음 드러난 것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면서였다. 당시 미군측은 소청을 기각하였고, 이 사건은 그대로 역사의 미궁 속에 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4년 4월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이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이 책에 주목한 《한겨레》은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그해 5월 4일자로 싣고, 7월 20일자에는 다시 집집마다 '떼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스케치기사로 실었다.
그후 월간지 《말》이 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하여 그해 7월호에 <6·25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한 내막을 기사화하였다. 1996년 MBC는 《말》지의 취재내용을 바탕으로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다시 이 사건을 재조명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내 어떤 언론도 이 사건을 주목하지 않았다. 다만 《말》지가 1999년 6월호에서 <미 제1기병사단 병사들 마침내 입 열다> 제하의 기사로 다시 속보기사를 실었을 뿐이다.
1999년 말 유족들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미육군성은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한국측과 협의할 예정임을 밝혔다. 2000년 1월 9일 미국측 대책단장인 루이스 칼데라 미육군성 장관과 민간전문가 7명을 포함한 18명의 미국측 자문위원단이 내한하여 12일까지 한국측 조사반으로부터 사건개요 및 조사상황을 청취한 뒤 충청북도 영동의 사건현장을 찾아 피해 주민들의 증언과 요구사항을 들었다.
[어제의 오늘]1950년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어린이 등 농촌 주민에 기관총 쏴
경향신문 | 엄민용 기자 | 입력 2011.07.25 21:39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사슴이 숨어 있는 부락이라 하여 녹은(鹿隱)으로 불리다 일제강점기 때 부락 이름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노근(老斤)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에서 맨 처음 목화를 재배했다고 해서 목화실(목화곡)로도 불린다.
사슴이 숨어 살 만큼 아늑한 이 마을에서 1950년 7월26일 끔찍한 범죄가 벌어졌다. 6·25전쟁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때, 노근리 인근 마을 주민 수백명은 노근리 철교 밑 '쌍굴다리' 속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공격을 피해 몸을 숨긴 그곳이 지옥이 되고 말았다.
당시 이곳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려던 미군 1기갑사단 예하부대는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무조건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긴다"는 명령을 받고,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의 가슴에 기관총을 쏘아댔다. 머리 위로 포격을 퍼붓기도 했다. 그야말로 학살이었다. 29일까지 3일간 계속된 만행으로 135명이 숨을 거두고 47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것은 신원이 확인된 '공식' 희생자일 뿐이고, 실제 희생자는 4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는 한동안 세월 속에 묻혀 있었다. 진급 누락을 우려한 가해자들이 진실을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데만 급급해한 우리나라 정치꾼들의 잘못도 컸다.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했다가 기각되면서 미궁에 빠질 뻔한 범죄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것은 <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 라는 제목의 '실록 소설'이다.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씨가 유족들의 비극을 묶어 1994년 4월에 출간한 이 책으로 '노근리 범죄'는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 "미군은 노근리에 주둔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던 미국 정부도 미군 제1기갑사단과 육군 25사단 사령부의 명령서, 참전미군 병사들의 증언 등이 쏟아지자 진실을 고백했다. 하지만 '고의적 살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부정한다.
그러나 당시 참전군인이던 조지 얼리는 "소대장은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 모두 쏴 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 엄민용 기자 margeul@khan.co.kr >
[기고] 노근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6/07/26 11:01
7월 26일은 미군이 노근리 인근의 마을 주민을 무차별 사격으로 학살한지 56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은 1999년 9월 미국 AP통신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국제사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한미 양국 정부는 성의를 다해 노근리 양민학살문제를 해결할 대신 기만적인 유감성명과 추모비 건립놀음을 벌이면서 부산을 떨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진상규명과 사죄보상,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올해 5월 말 AP통신에 의해 당시 무초 주한미대사의 서한이 공개되면서 노근리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무초의 서한으로 노근리 양민학살이 상부의 명령에 의해 조직적으로 진행됐음이 밝혀졌다. 그로인해 지난 2001년 미국 국방부의 최종보고서에서 밝힌 ‘개별적 병사들에 의한 우발적 사고’였다는 결론은 미군의 공식 지휘체계를 통한 발포명령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축소 은폐한 것임이 드러났다.
사회 각계에서는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의 전면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고 노근리대책위는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며 유엔을 상대로 미 조사단을 고소하고 유엔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노근리 사건에 대해선 철저한 조사가 이뤄졌고 무초 전 주한 미 대사의 서한은 새로운 사실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재조사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한국정부는 이렇다 할 입장도 없이 미온적이다.
노근리 양민학살을 되돌아보면서 무초 전 대사의 서한으로 하여 다시금 불거진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만행’ 공방에 이제는 마침표를 찍자.
1. 노근리 양민학살은 비무장 무저항 피난민에게 4일 동안 무차별 폭격과 사격을 가한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
세상에 알려져 있듯이 노근리 양민학살은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1개월만인 7월 26일부터 3박 4일 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일대에서 미 제1기갑사단이 영동-황간 도로선상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피난민들에게 공중폭격을 감행하고 지상사격을 가한 민간인 대학살이다.
개전 초기 북한군의 남하에 밀려 국군과 미 24사단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로 되어 부대가 궤멸했고, 영동에 새로 투입된 미 제1기갑사단도 후퇴해야 했다. 당시 미 제1기갑사단은 영동면에서 후방의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준다며 인근 마을사람들을 집합시켰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까지 합쳐 500-700여 명이 모였다. 피난민들이 통제가 잘 안되자 겨우 1.5km 쯤 와서 하천 바닥으로 밀어 넣고는 총격을 가해 7명을 살해하고 사라져버렸다.
피난민들은 4번 국도를 따라 5km 가량 남하하다가 탱크와 포를 겨누며 철로를 따라 남하하라는 미군의 지시에 따라 길을 바꿨다. 피난민들이 노근리 쌍굴다리에 왔을 때 미군 7-8명이 짐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딘가 무전연락을 한뒤 검사를 중단하고 사라졌고 얼마뒤 비행기 두 대와 미군이 나타나 20여 분간 폭탄을 투하하고 총을 쏘았다. 여기서 100여명 정도 죽었다.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배수로나 나무숲에 숨었다. 얼마뒤 미군은 살아남은 400-500여명의 피난민을 모아 쌍굴다리로 밀어넣고는 그 앞 야산에서 사흘 밤낮 동안 기관총을 쏘아댔다. 젊은 남자들은 밤에 탈출을 시도하다 대다수가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으며 쌍굴 안에서는 시체로 바리케이트를 치며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쌍굴에 들어선 북한군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라는 생존자 양해찬씨의 증언처럼 북한군이 노근리까지 남하하여 미군이 후퇴할 때까지 학살은 계속되었다. 미군의 사격놀음에서 어린이와 여성, 노인들 100여명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2. 빨갱이가 된 희생자와 유가족, 그리고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진상규명과 사죄보상을 위한 힘겨운 싸움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힐 날만을 학수고대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노근리 희생자 유가족들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1960년 10월 미군이 설치한 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소청사무소는 증거가 불충분하고 접수기한이 지나 배상을 심의할 권한이 없다며 소청을 기각했다. 그리고 미국정부에도 손해배상청구서를 보냈지만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유가족들은 20여 차례나 한국 정부에 진상조사와 미국 정부에 공식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아무 답변도 받을 수 없었다.
그 후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90년대 초엽까지는 노근리 사건을 세상에 밝히지 못했다.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유가족들은 빨갱이로 몰리거나 징역을 살았다. 그리고 언론도 희생자를 빨갱이로 몰아세우며 미군의 공로와 한미동맹을 강조했다.
피해자 유가족인 정은용씨는 진상을 밝힐 날을 기다리다가 1994년 6월 유가족들과 함께 노근리대책위를 결성하였고,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소설을 출간했다. 그러면서 노근리 사건은 점차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진보언론인 말과 한겨레가 노근리 양민학살을 심층보도 하였다. 그 후 1996년에도 MBC 시사프로에서 노근리 사건을 재조명하였으나 정부와 주류언론들은 외면하였다.
그리고 1997년 9월 대책위는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 미 의회에 각각 진정서를 전달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1999년 6월에는 피해자들과 함께 노근리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진상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가시적인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가 그해 9월 AP통신이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실을 뒷받침하는 공식문서와 당시 미군병사의 증언을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미국과 한국의 언론들이 뒤이어 1면 머릿기사로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 문제는 국제적 사안으로 되었다.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증인과 증거물이 나오자 미국과 한국정부도 진상조사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3. 미국과 한국 정부의 지지부진한 조사놀음과 기만적인 결과발표, 이에 대항한 싸움
한국과 미국 양국정부의 1년 3개월간의 진상조사기간은 사건의 진상을 축소 왜곡하려는 미국정부와 한미동맹 운운하며 이를 묵인하는 한국정부, 그리고 이를바로 잡으려는 노근리대책위를 비롯한 많은 반미단체 간의 치열한 싸움의 기간이었다.
노근리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자 철저한 진상규명과 공식사과,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의 활동도 활발히 벌어졌다. 클린턴 전대통령에게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건의문을 보냈으며 한국정부에게도 피해자 접수창구를 설치운영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한 미 양국정부에 합동조사를 요구하였다.
한미 양국정부는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노근리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한국과 미국 양국 정부는 철저한 진상규명과 적절한 배상을 할 것이며 최선을 다해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학살사건이 발견되면 추가 조사를 할 방침이라고도 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자문위원단과 실무조사단을 구성하였고 한국정부도 자문위원회와 진상규명대책반을 구성하였다. 미국 측의 거부로 한미 양국은 공동조사반은 구성하지 않기로 하고 양자 조정회의를 하면서 양측이 조사한 내용을 공유하고 공동조사결과를 마련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과 한국 조사단은 각자 노근리를 방문하여 사건현장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증언을 청취하였다. 그리고 한국 조사단은 미국과 함께 미국립자료보관소를 방문하여 문서를 확인하고 필요한 자료를 인수하였으며 당시 미군장병을 상대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또한 미 국방장관, 동아태 담당 차관보 등이 방한하거나 양국 조사단이 3차례 만나면서 한미 간의 공조방안을 협의하였다.
조사기간 동안 노근리 대책위는 미측 조사반장에게 정확한 진상조사를 위한 요청서를 전달하였고 대표들이 미 국방성을 방문하여 정확한 진상규명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2000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정부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조사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끌고 있다가 노근리 사건은 ‘우발적인 사고였으며, 미국의 법적책임은 없다’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 되도록 중간조사결과를 축소, 왜곡하였다.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한 내용을 보면,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사고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AP 통신에 증언을 한 데일리 참전미군은 옆 부대에 있었으므로 그의 증언은 허위이며 언론과 인터뷰한 참전군인은 형사처벌도 받을 수 있다며 ‘입단속’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그때 미군의 임무는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을 색출하는 것이었다며 불가피함을 내세웠다.
또한 미국의 일부 언론들은 AP통신의 노근리 기사를 신뢰할 수 없다며 허위증언을 문제삼았다. 그리고 미 국방부 대변인은 참전군인 100여명의 증언과 한국인 생존자의 진술이 엇갈린다며 2000년 6월 25일로 설정했던 조사 시한을 올 연말까지로 연장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한국정부도 철저히 미국의 입장과 조사내용을 대변하였다.
국방부 조사단의 중간 조사결과 내부문건을 보면 당시 북한군의 영동 진격으로 미군은 철수하다 긴박한 교전상황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이었고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에 대응하기 위한 전술적 조치였다며 불가피하다고 잠정결론을 내렸다. 또한 항공사격은 피난민을 적으로 오인한 것이며 지상군의 기관총 사격도 위장한 북한군을 없애기 위한 작전상의 전술로 보고하고 있다. 더군다나 피해자들이 보상금 때문에 미군의 고의성을 강조한다며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역할과 고충, 북한군의 위협과 책임을 집중 부각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노근리 대책위는 각계반미단체들과 함께 미국의 기한연장 반대와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항의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으며 방한한 미 관료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 2001년 1월 한국과 미국의 조사단은 공동발표문과 진상조사결과보고서, 사후대책을 발표하였다. 공동발표문과 진사조사결과 보고서는 미국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을 기본바탕으로 한국과 미국 양국이 조율하여 정리한 것이다.
미국 측의 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은 3가지로 노근리에서 수 미상의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중폭격과 지상공격으로 사망과 부상을 당했다. 공중폭격 임무를 수행한 당시 조종사들은 노근리의 피난민을 쏘라는 상부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 지상군의 경우 일부 부대에 사격지침을 내렸다는 문서가 있으나 다른 부대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고, 증언자들의 증언 불일치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공동조사결과에서 노근리 사건은 미군에 의한 고의적인 양민학살이 아니라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한 비극이라고 결론내렸다. 당연히 보상 문제는 배제되었다.
그리고 클린턴 전 대통령은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성명을 보면, 노근리에서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데 “깊은 유감”을 포명하면서 “사건의 경과를 정확히 가려낼 수 없었으나”, “인원을 확인할 수 없는” 무고한 피난민이 죽었다면서 조의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한미 참전군인들이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 결국 승리했고 지금의 친밀감은 “50년 전 함께 치른 희생을 입증”한다며 한미동맹을 강조하였다.
후속대책으로 양국은 미국정부 예산으로 충북 영동군에 100만 달러 규모의 추모비를 건립하고 우선 2001년 75만 달러를 조성하기로 하였으며, 하반기부터 국내 및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노근리 유족 자녀학생 30여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공동발표문은 마지못해 대충 덮고 넘어가려는 미국의 속셈이 뻔히 보이는 조사놀음이었다.
처음부터 미국은 노근리 문제에 정확한 진상조사와 사죄 보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말로는 “가능한 빨리, 그리고 철저하고 투명하게 조사할 방침”이며 “진실을 은폐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한국정부와 공동조사를 하지는 않겠다는 미국의 입장을 보면성실한 조사를 원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사해야 할 대부분의 군사기록문서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있고 가해자인 참전군인도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조사를 위해서는 미국정부와의 긴밀한 공조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과 미국의 조사단이 각기 조사를 하고 취합하며, 미 측의 문서자료와 미군 면담은 이후에 자료로 넘겨받으니 미국이 의도적으로 자료를 짜깁기 하거나 누락시켜도 한국 측은 진상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최근 보도된 무초대사의 서한도 미국이 의도적으로 누락시켜 한국 측 조사단은 서한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공동발표와 특별성명은 한국인을 무시하는 미국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근리 사건의 존재자체를 부인하던 미국이 사실의 존재와 미군의 살상에 대해 인정한 것은 그나마 성과이다. 그러나 클린턴 전 대통령의 유감표명은 사죄가 아닌 그대로 ‘유감’일뿐이다. 특별성명의 내용도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용감히 싸워 민주주의와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으로 이만큼 성장했으니 그만한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상식과 예의가 있는 인간이라면 설사 조직된 양민학살 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더라도 ‘미군에 의한 살상’이 사실로 드러난 이상 그 자체로 사과를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또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보상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은 것은 미국의 일방적인 입장일 뿐이다. 결국 미국은 사죄의 마음은 고사하고 한국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노근리 대책위와 각계 시민사회단체들은 미국의 기만적인 조사결과 발표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미 정부의 재조사를 촉구하였다. 특히 노근리를 비롯해 미군에 의한 학살의혹이 있는 모든 지역에 대해 피해자 가족들과 공동으로 조사하고 공식사죄와 배상을 촉구했다. 그리고 대책위는 피해보상 등을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고 미국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법적 대응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남과 북은 2000년 미군학살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전쟁시기 한반도 전역에서 자행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을 모두 조사하고 국제 민간법정과 백서편찬 등 다양한 사업을 하면서 미국을 압박하는 국제 여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매년 수많은 시민, 학생들과 외국의 청년학생들이 노근리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미군의 학살만행을 가슴에 새겼다. 청주에서는 극단 새벽이 연극 ‘노근리’를 공연하였다. 특히 미국의 미시건 대학 학생들이 부시대통령에게 진상조사와 조속한 해결을 우한 청원서를 보내고 서명운동을 벌렸다. 이처럼 노근리 진상규명 투쟁은 평화애호 민중과 미국의 싸움으로 되었다.
한미 양국의 공동조사발표가 있은 후 3년 만인 2004년 10월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발효되었고 정부청사에 명예회복위원회가 조직되었으나 형식적인 추모사업으로 예산낭비만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미국은 추모사업이나 하면서 대충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도 문제이다. 조사기간에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기에 급급하였고 추모사업도 생색내기 식이다.
노근리 양민학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확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상급의 발포명령에 의한 조직적 살상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리고 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생존자, 유가족들에게 적절한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 보상은 노근리 양민학살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표시이다. 그뿐 아니라 진실을 고위적으로 은폐한 경위와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자.
앞에서 노근리 양민학살의 과정과 유가족들의 투쟁, 그리고 미국과 한국 정부의 기만적인 조사놀음을 살펴보았다. ‘미군의 계획된 학살’을 입증할 수 있는 문서와 자료들이 공개된 지금, 미국과 한국 정부의 노근리 조사과정이 얼마나 기만과 왜곡으로 일관되었는지 밝혀보고 우리의 과제를 찾아보자.
4.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은폐 축소하고, 기만적인 추모사업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미국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서 중요한 것은 ‘상부명령’의 여부이다. 왜냐하면 이에 따라 조직적으로 감행된 계획적인 학살이냐, 개별적 병사에 의한 우발적 사고냐하는 사건의 성격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의 성격에 따라 사죄와 보상, 명예회복 문제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군의 진격으로 퇴각하는 도중 벌어진 개별적 병사들의 우발적 사고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2005년 미국립문서보관소와 미공군역사연구소 등에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고의적으로 피난민 살상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 19건과 올해 5월 말 AP 통신에 의해 당시 무초 대사의 서한이 공개되면서 노근리 양민학살이 상부의 명령에 의해 진행됐음이 밝혀졌다.
문서와 증언 자료를 의도적으로 축소, 누락, 무시하여 ‘노근리 학살’ 조직적 은폐
미국은 노근리 학살에 대한 조사를 위해 기밀해제된 1950년 7월 25~29일 사이 미군의 한국전쟁 관련 문건들과 미국의 최종보고서를 비교 분석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2001년 노근리 사건 최종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피난민 대응방침과 발포명령에 관한 내용은 누락시키거나 일부분만 인용하여 의도적으로 학살 사실을 은폐했음이 드러났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워커 장군의 전문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미8군단 워커 장군이 도쿄 극동사령부에 보낸 7월 26일자 전문을 보면 “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란민들의 어떤 움직임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군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명령에 따라 피난민에 대한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다.
제1기갑사단의 통신기록도 의도적으로 축소시켰다.
당시 통신에는 “피란민을 포함한 전선을 넘으려는 모두에게 발포하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최종보고서에는 미군의 피란민 정책을 잘못 이해한 연락장교의 전달실수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제8기갑 연대를 제외한 제1기갑사단 내의 다른 연대에는 위의 내용이 전달됐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만 설명하고 있다.
킨 장군의 통신기록의 일부를 누락시켰다.
당시 제25보병사단의 킨 장군이 1950년 7월 26일, 27일 예하부대 지휘관들에게 보낸 3건의 작전명령과 통신기록 중 “사살하라”는 명령이 담긴 7월 26일자 오후 10시의 통신기록은 최종보고서에서는 빠졌다.
제1기갑사단 제7기갑연대의 통신기록은 분실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노근리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던 제7연대의 7월 통신기록은 피란민에 대한 지상공격 명령의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미 문서보관소에 다른 시기의 통신기록은 모두 보관되어 있으나 7월 통신기록만 없다. 그러나 최종보고서에서는 분실을 밝히지 않고 “총격명령이 전달됐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로저스 대령의 메모를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다.
로저스 대령이 1950년 7월 25일 직속상관인 팀버레이크 장군에게 보낸 메모에서 “육군은 미군진지로 접근하고 있는 모든 민간 피난민들을 항공기로 기총공격할 것을 요청”했다면서 “현재까지 공군은 육군의 이러한 요청에 응해왔음”이라고 되어 있으나 최종보고서에서는 “육군의 요구가 있었다”는 부분만 언급하면서 공중폭격이 실제 실행된 핵심내용은 일부러 제외시켰다. 그리고 공동발표문에서는 노근리라는 지명이 없다는 이유로 이 문건을 학살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미 제5공군 제35전폭편대의 임무수행보고서의 존재조차 부정했다.
노근리에서 학살 기간 동안 미 제5공군 제35전폭편대, 제8대대가 작성한 출격, 총격 임무수행보고서에는 26일, 27일 노근리에서 불과 1~2㎞ 떨어진 “용산리 남쪽 3마일 지점”에서 50~100명이 사상을 입었고, “용암리 남동쪽 3마일 지점” 등에서도 공습이 있었다며 미 공군이 노근리 인근 지역을 공중 공격해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국측의 조사단에는 임무수행보고서가 없다며 자료제공을 거부했다.
당시 전쟁일지를 직접 기록한 미군병사도 미군이 “길을 따라 내려오는 300여명의 민간인에게 사격을 가했다”고 증언했다. 노근리 주둔 부대의 전쟁일지가 없다는 주장은 미국 측의 고의적인 거짓말일 수도 있다. 분실이 사실인 경우에도 미국의 민사소송법상 “증거가 없으면 증거 작성자의 증언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으므로 참전군인들의 증언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상부의 발포명령을 가릴 수 없다는 결론은 증인을 채택하지 않는 것으로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피난민 대응방침을 결정한 무초의 서한도 고의로 은폐
당시 주한대사였던 무초가 미국무부 차관보에게 보낸 서한은 노근리 사건 전날 열린 피난민대책회의 내용 가운데 총격지침 결정 사실을 담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이다. 그러나 미국측 조사단이 조사과정에서 무초서한의 마이크로필름을 검토했음에도 최종보고서에서는 내용조차 없었다. 이 서한은 피난민에 대한 총격명령이 미군의 지휘체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미국 정부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로 보고서에 담지 않은 것은 의도적인 은폐로 밖에 볼 수 없다.
무초의 서한을 보면, 북한군이 피난민을 남하하도록 만들어 미군의 이동을 방해하고 피난민 대열을 침투경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피난민으로 위장해 후방에서 미군을 공격한다며 피난민 문제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대응방침을 마련했다. 피난민은 경찰의 통제 하에서만 이동이 가능하며 일몰부터 아침해가 밝을 때까지 이동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미 방어선 북쪽에 나타날 경우 경고사격을 하고 계속 전진하면 총격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무초의 서한은 북한군의 위장침투를 막기 위해 피난민에게 총격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한국 측 진상조사단의 노근리 관련 자료열람을 고의로 제한한 미국
한국측 진상조사단은 미 국방부로부터 열람을 요청한 관련자료의 상당수를 받지 못했다. 국방부 내부 문건에 따르면 미측에 요청했지만 받지 못한 자료가 2000년 9월 기준으로 35건이나 된다. 이중에는 두 번씩이나 요청했음에도 제공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공동조사단을 꾸리자는 한국측의 요구를 거부하고 필요에 따라 실무회의를 진행하면서 조사내용을 취합하고, 공동보고서를 내오자는 미국의 요구는 기만이었다. 미측은 자체보고서에 미 제5공군 제35전폭편대의 임무수행보고서를 검토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한국 측에는 “관련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경우를 보더라도 미국이 고의로 한국 측에 자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은 사건의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한다고 했지만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노근리 양민학살 책임을 회피하고 한국전쟁 시 유사사건을 일괄처리하려는 기만적인 추모사업
2003년 미국은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벌이고 있는 추모탑 건립 사업을 한국 정부와 노근리 대책위와의 협의도 없이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내부지침을 무시하고 한국 외교통상부와 대책위를 배제한 가운데 추모탑 작가까지 선정했다. 더구나 미국 정부는 내부적으로 노근리 추모탑에 새길 비문안까지 확정했다.
비문안은 “1950년 7월 이곳에서 희생되신 분들을 추모”하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위대한 투쟁을 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희생되신 분들을 기억”하면서 “미합중국 정부가 변함없는 한-미동맹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위령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비문안은 기만으로 일관되어 있다. 우선 가해자가 없다. 미군에 의해 노근리의 피난민이 희생됐다는 말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노근리라는 단어도 없다. 미국이 노근리 이외 한국전쟁 시 발생한 유사한 사건을 어물쩍 포함시키려는 의도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또 한미동맹을 운운한 것은 이쯤해서 서로 좋게 정리하자는 얘기다.
이처럼 추모비건립사업은 사죄와 보상 책임은 철저히 외면하고 허울좋은 추모사업만 독자적으로 추진하면서 진실을 은폐하고 도덕적 예의를 다하는 인상을 주려는 미국의 계략인 것이다.
더욱 분격스러운 것은 얼마전 미국은 대책위의 반대로 기만적인 추모사업이 중단되자 2001년 추모사업 기금 400만 달러의 예산이 올해 9월 30일로 사용 만료된다고 외교부에 통보하였다. 한마디로 두 달 후에 추모 예산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이 추모사업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그 속셈을 여실히 보여주는 태도이다.
또한 장학금사업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과 미국은 공동발표문을 통해 75만 달러를 조성해 빠르면 하반기부터 노근리 유족자녀 대학생과 지방대학생 등 30여명을 선정, 장학금을 전달키로 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은 장학사업을 노근리 사건 희생자와 유족들을 대상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추모장학금 또한 추모비 건립놀음과 마찬가지로 보상 문제를 희석시키고 전쟁 시 발생한 유사사건을 포함시키려는 기만적인 책동이었다.
철저한 방관자 한국정부
한국측 진상조사반은 내부지침까지 마련해 미국의 책임을 적절한 선에서 무마하려고 하였다. 1999년 12월에 작성한 노근리 사건 진상조사 진행상황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피난민 대열에 게릴라를 잠입시킨 북한의 책임도 재조명할 것”이라며 노근리 양민학살의 책임을 북한에 떠넘기고 미군의 불가피한 전술적 조치를 강조하려고 했다.
또 2000년 3월 6.25기념사업단장에게 노근리 사건 보도관련 협조라는 공문을 보내면서 6.25 기념사업에서 “노근리 사건의 궁극적 책임은 북한의 전쟁도발”이라는 점을 주요 내용으로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2000년 11월 진상조사반 기획총괄과장이 작성한 홍보 기본계획 문건에서는 “미국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할 것”, “미군의 숭고한 희생을 재강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정부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기에 급급하였다.
공동발표문 이후 3년이 지난 2004년이 돼서야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특별법은 입법 취지에 맞게 시행령을 만들어야 하고 위원회가 내실 있는 피해자 심사와 추모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위원회는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사무역량도 마련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회의조차 열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회에서 희생자 위령사업부지 구입예산을 확보했지만 아직 유골발굴도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인원확충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보상대책도 생색내기식이다.
명예회복 위원회는 치료비, 간병비용, 보조장구 구입비 등 세 가지 성격의 돈만을 지급하기로 명시된 특별법의 보상대책대로 노근리 양민학살 피해자 가운데 후유 장애를 앓고 있는 30명에게 4억 1800만원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이 금액은 전문의 5명에게 피해 장애 진단을 맡겨 향후 3~5년 동안의 치료비를 산정한 액수다. 그러나 치료비 지원금 마련안은 기획예산처에서 “건강보험공단이 지급해야 할 돈까지 정부가 지급하는 것은 치료비 과다책정”이라며 퇴짜를 맞았다.
정부가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 보상금 성격의 돈은 의료지원금이 전부이다. 그나마 이번 지원금 이후의 지원계획은 없다. 더구나 정신적 보상이나 사망한 희생자에 대한 보상대책은 전혀 없다. 피해자 30명에게 5년 동안의 치료비 4억 1800만원은 아깝고 치료비 지원금과 맞먹는 명예회복 위원회의 1년 운영비로 들어간 3억 9300만원은 당연하게 여기는 한국정부의 사업태도를 보면 진심으로 노근리 문제를 해결할 마음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5. 노근리 사건은 미군에 의한 조직적, 계획적으로 일어난 대규모 양민학살사건
노근리 사건은 상부명령에 의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일어난 학살
2001년 한미 공동발표문에서는 4일 동안 피난민을 학살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우발적 사고로 결론 내렸다. 공중폭격은 한 차례 진행되었으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며 증거는 찾을 수 없고, 지상명령은 제8기갑연대를 제외한 제1기갑사단의 모든 연대에 명령을 내린 증거가 없고 증언자들의 불일치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최종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2001년 공개된 미 제5공군 제35전폭대대의 임무수행보고서에서는 당시 노근리에서 공중폭격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6일 “용산리 남방 3마일 지점에서 미공군 비행기에 의해”, “용암리 남동쪽 3마일 지점 도로를 명중”, 27일 “황간의 서쪽 1마일 지점을 공습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라고 밝히고 있다. 쌍굴다리는 황간의 남서쪽 1.5마일에 위치하고 있다. 임무수행보고서에 나온 것처럼 미 제35 전폭대대는 26일, 27일 노근리 지역에서 공중폭격을 하였다.
최종보고서에서는 지상사격은 증거가 없고 증언자들의 불일치로 상부명령은 없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무초대사의 서한에서 피난민 대응방침을 밝혔듯이 전투지역 내의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발포를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피난민에 대한 발포는 미군 전체의 지침이었다.
그리고 제1기갑사단이 미8군의 타켄톤 대령에게 한 전화통화기록을 보면 제1기갑사단이 피난민들에게 북쪽으로 이동하라며 전투지역에서 발견되면 적으로 취급된다는 전단을 살포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제1기갑연대의 통신기록을 보면 제1기갑사단의 제8기갑 연대는 24일 오전 10시에 제1기갑사단 사령부로부터 피난민이 전선을 넘으면 “모든 사람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무전 및 통신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크럼과 르바인은 민간인들에 대한 발포명령은 사단 또는 더 상급의 지휘본부로부터 지휘계통을 따라 하급부대에 까지 전달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로보아 명백한 결론은 미군 전체의 피난민 대응 방침에 의해 상급에서 하급부대까지 명령체계에 의해 공중폭격과 지상사격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전쟁 상황이 낳은 어쩔 수 없는 비극이 아니라 고의적 살인
공동발표문을 서두를 보면 전쟁 초기 미군들은 지휘관과 병사 모두 미숙하였고 장비도 부족하였다고 밝히면서 “절박한 한국전쟁 초기의 수세적인 전투상황 하에서 강요에 의해 철수 중이던 미군”이라며 후퇴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사고로 주장하고 있다.
당시 영동지역에서 북한군과 미군이 전투가 시작된 22일부터 보면, 노근리로부터 서울 쪽으로 14km 이상 떨어진 영동읍을 중심으로 북한 제3사단과 미 제1기갑사단의 전투가 있었고 미 제25보병사단 제27연대도 노근리에서 2km 동쪽으로 떨어진 황간에서 전투중이었다. 노근리 쌍굴다리 근처에서 북한군과 미군의 교전은 없었다.
그리고 전투 기간 동안 제7기갑연대의 임무는 북한군과 싸우는 전투가 아니라 후방에서 적들의 잠입을 막기 위해 공격적이고 지속적인 순찰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또한 노근리 쌍굴다리의 총탄 조사에서도 모두 미군의 총알로 확인되어 쌍굴다리 근처에서 북한군과의 전투는 없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북한군과의 교전에서 피난민을 적으로 오인한 전쟁 상황이 낳은 불행한 비극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에 의해 제1기갑사단 제 7기갑연대가 피난민들에게 공격적이고 지속적인 학살을 벌인 것이다.
비무장 무저항 피난민에게 무차별 공중폭격과 지상사격을 감행한 대규모 양민학살
미국은 노근리 사건이 북한군이 게릴라 침투를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피난민 대열에 섞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피난민들이 노근리 쌍굴다리에 다다랐을 때 미군 7-8명이 짐을 검사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한국 정부의 조사단이 밝힌 사망자 분석에서 “전체 사망자 중 83%가 노약자와 부녀자”라고 한 내용을 볼 때 북한군이 피난민으로 가장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미국은 공동발표문에서 “수 미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학살한 양민의 수는 심각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생존자들은 300-400명가량 희생당했다고 증언하고 있고, 당시 특파원이었던 그루즈너 기자는 미군장교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군의 한 연대가 7월말 “수 백명의 한국인 양민”을 학살했다는 기사를 섰다. 정부가 영동군청에 설치한 피해자 신고접수 창구에 정식 신고된 사상자 숫자만도 248명이다.
미국은 공동발표문에서 양민학살의 수는 “미상”이라고 밝힘으로써 의도적으로 양민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려고 하였다.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은 개별적 병사들의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당시 미 정부도 알고 있었던 상부명령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피난민 학살사건이다. 또한 비무장 무저항 피난민이라도 작전수행에 방해가 되면 언제든지 학살한 야만적인 사건인 것이다.
6. 한미 공동조사로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규명과 사죄보상, 은폐 축소 조작에 대한 진상과 책임자 처벌 필요
미국은 노근리 학살 뿐 아니라 한국전쟁 전 기간에 한반도 전역에 걸쳐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양민을 학살하였다. 노근리 조사과정에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피해가 60건이나 접수되었다. 전민특위에서 밝혀진 것만 120여건이나 된다. 우발적인 사고가 전국 도처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무초대사의 서한에서 밝혔듯이 피난민 대책은 미군의 모든 부대에 하달되고 한국전쟁 전 기간에 걸쳐 집행되었을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시 발생한 모든 양민학살은 미군의 상부에 의해 계획된 ‘피난민 학살방침’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근리에서 조직적이고 계획된 학살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는 말이 되지 않는다. 노근리 양민학살은 전쟁범죄로 마땅히 미 정부가 공식 사죄해야 하며 응당 희생자와 생존자, 그리고 유가족에게 충분한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
한국 정부도 동맹이라는 그늘아래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것이 아니라 당당히 미군이 저지른 노근리 양민학살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무고한 죽음을 당한 자국민의 한을 달래주지 않으면 그건 더 이상 한국정부가 아니다. 지금 무초대사의 서한으로 재조사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고 있지만 한국정부는 이렇다 할 입장도 없다. 한국정부는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도 미국은 추잡한 방법으로 노근리 양민학살의 진실을 왜곡하였다. 무초대사의 서한이 공개되었음에도 미국은 재조사는 없다고 버티고 있다.
역사를 바로잡자면 우리 국민들이 노근리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에 적극 떨쳐나서야 한다. 이 투쟁은 희생자들의 혼을 달래는 투쟁일 뿐 아니라 한국민을 뭐같이 보는 미국의 편견과 친근한 벗 운운하며 한국의 상전노릇을 하는 미국의 오만을 꺾는 투쟁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한미동맹 강화의 그늘 아래 묻힌 수많은 야만적인 미군범죄의 진실과 처벌을 위한 첫 단추이다.
노근리 56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 국민들은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며, 오리발을 내밀며 동맹 운운하는 미국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새기며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에 다시금 떨쳐나서자.
이를 위해서, 우선 한국과 미국 양국정부 그리고 민간 전문가와 노근리 대책위가 함께 공동조사위를 구성해야 한다. 미국과 한국 양 정부가 사건을 축소, 은폐, 왜곡한 것이 밝혀진 이상 공동조사위를 구성하는 문제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노근리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통해 정확한 진상규명과 미국 정부의 공식사죄와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또한 노근리 양민학살 조사 과정에서 미군자료와 참전 미군의 증언을 고의로 은폐, 누락, 왜곡하였던 경위를 낱낱이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
[출처] [기고] 노근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작성자 하나가 좋아
노근리양민학살사건
老斤里良民虐殺事件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老斤里良民虐殺事件, 영어: No Gun Ri Massacre)은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 기병 사단 7 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한 전쟁 범죄이다. 노근리 학살사건을 실제 경험했던 생존피해자와 유족들인 정은용, 정구도, 양해찬, 정구호, 서정구씨 등으로 1994년에 구성된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 정은용)에서는 사망자 135명,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20여명이다.
민간조사
군인신분이라 진급실패를 우려한 가해자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덮여 있었지만,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대책위원회 대변인이자 기획위원인 정구도씨가 내외신언론기관을 대상으로 노근리사건 홍보를 적극 전개했다.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정구도 대변인은 진실규명을 피해자 증언채록, 노근리 학살이 있었던 기간의 조선인민보 신문기사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하고 있는 미군작전기록을 수집하여 노근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이 노근리학살을 일으켰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확보하고 노근리사건에 대한 역사학 논문과 국제법 논문도 발표하였다
AP통신의 탐사보도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사건 대책위원회 정구도 대변인이 중심이 되어 노근리사건 홍보를 4년간 끈질기게 펼친 결과 문화방송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 CNN방송 등에서 보도되고 사건이 점점 알려졌다. 그 결과 노근리사건에 관심을 갖게된 AP취재팀이 1998년 4월에 취재에 착수했고, AP통신의 최상훈 기자, 멘도자 기자 등이 "노근리 학살사건은 진상규명이 되지 않으면 진실이 알려질 수 없는 사건이므로 반드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현장취재, 가해자들과의 인터뷰등의 탐사보도를 시행하여 1999년 9월, 미 제1기병사단이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긴다." 라는 지시에 의해 노근리 피난민들을 살상한 전쟁범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주한미군이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지금도 노근리학살이 고의적 살인임을 부정하고 있다.
노근리사건 피해자들은 끈질긴 노력으로 2004년에는 사건의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인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의회에 참여한 국회의원169명 전원의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2
이 사건이 일어났던 경부선 노근리 쌍굴다리는 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충청북도에서도 노근리 학살 사건 희생자들의 신원을 위해 2008년 역사공원 건립을 시작하였다. 역사공원은 2010년 6월까지 191억원을 들여 쌍굴다리 앞 옛 노송초등학교 터를 포함한 13만2240㎡에 조성되어 미군 총격으로 숨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 사건 관련 기록·문서·사진·증언 등을 담을 역사 평화 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숙박 기능을 갖춘 문화의 집도 건립되어 청소년 인권·평화·역사 교육장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유가족들도 매년 미군의 폭력으로 죽은 민간인들의 한을 위로하는 제사를 노근리 학살이 일어난 쌍굴에서 지내고 있는데, 미군의 노근리에서의 민간인 학살로 다섯날난 아들과 세살배기 딸을 잃고 부인마저 중상을 입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정은용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장은 2000년 제사에서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발표하였다.
저곳 철로 위에서 폭격과 기총소사와 지상군의 소총사격으로 님들은 마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곳, 쌍굴 안에서 60시간을 갇힌 채 기관총 사격으로 님들은 처참하게 숨져 갔습니다.… 우리를 돕겠다고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이 땅에 올라온 미군들이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님들을 |
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
|
할머니:왜 눈이 그렇게 되신 거예요? 생존자 할머니(당시 11세): 미군의 폭격으로 눈을 잃었지. 거울을 본 적이 없어. |
그 외에도 다른 생존자는 미군의 폭력으로 얼굴의 반을 잃어 바깥출입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노근리 '양민' 학살이 아닌 '민간인' 학살인 이유
어떤 사람의 선량, 불량을 누가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일제 때 일본은 독립운동가들을 '불령선인', 즉, '영혼이 불량한 조선인'이라고 했습니다. 일제의 시각으로 보면 독립운동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친일파, 매국노들이 '양민'인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든, 않든, 전쟁이나 미국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국제법이 금하는 전쟁범죄입니다. 즉 '양민'이 아닌 '민간인'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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