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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간 사악함의 극한을 보여준 ‘만주 731부대’

by 무궁화9719 2022. 9. 14.

24년 전 오늘, 일본군 731부대 생체실험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2018. 6. 20.

등록 :2018-08-14 14:34수정 :2018-08-14 15:59

[역사 속 오늘] 24년 전인 1994년 8월14일
일본군 731부대 생체실험 장면 국내 첫 공개 보도
‘끝나지 않은’ 일본군 731부대 인간생체실험 잔혹사
 

 

<한겨레> 1992년 4월 15일 치.
 

일본(관동)군 731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중국 전쟁 포로 등을 대상으로 인간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아울러 해당 지역 주민에게는 콜레라, 티푸스, 페스트 등 강력한 전염세균 폭탄 투하 실험도 벌였다.

 

당시 731부대가 잡아들인 전쟁 포로는 세균전용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실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731부대는 생체실험 대상자를 가리켜 이른바 ‘마루타’라고 불렀다. ‘마루타’는 일본말로 ‘껍질 벗긴 통나무’라는 뜻이다. 이 섬뜩한 단어는 이들에게 일종의 암호로 통했다.

 
일본은 만주지방에 특수세균전을 위한 731부대를 세웠다. 이때 전쟁포로 등을 대상으로 각종 생물무기 인체실험을 벌였다. <한겨레> 자료 사진.
 
 

731부대의 잔학한 만행은 194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5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희생된 ‘마루타’만 3000명. 이들 가운데 살아나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공중에서 살포한 세균전으로 인한 피해자도 수만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31부대의 만행이 알려지기까지는 4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마저도 일부만 밝혀졌다. 여기에는 731부대를 비롯한 일본군 관계자와 일본 정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들의 조직적인 증거 은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의 책임 회피는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회피할 수 없는 증거들

 

<경향신문> 1994년 8월 14일 치.

 

‘731 부대원들이 페스트균을 사람 몸에 주입한 뒤 해부하고 있다.’

 

마침내 눈으로 확인한 전쟁 범죄의 만행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혹했다. 오늘로부터 24년 전인 1994년 8월14일, 일본군 731부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생체실험을 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국 하얼빈에 남아 있는 옛 731부대 동력실 건물 잔해. <한겨레> 자료 사진.

 

이 사진은 중국 하얼빈 옛 731부대 터에 자리 잡은 <죄증 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일부다. 박물관 쪽의 협조를 얻어 국내에 반입됐다. 공개된 사진에는 하얀색 방호복을 갖춰 입은 731부대원들이 무리 지어 있다. 이들은 ‘마루타’를 수북이 쌓아놓고 페스트균과 콜레라균 등을 주입하거나 인체 장기를 해부하는 등 온갖 만행을 일삼은 장면도 담겼다. 특히 임신부와 아기를 해부하고 있는 사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는 그동안 야사처럼 떠돌던 ‘생체실험 전체의 과정이 일체의 마취 없이 이뤄졌다’던 일부 가해자의 증언과 폭로 수기 문서의 기록이 사실로 입증되었다는 걸 뜻한다.

 

731부대 이시이 시로 군의중장. <한겨레> 자료 사진.

 

공개된 사진에는 731부대를 시찰 나온 일본군 사령관의 모습과 함께 ‘731부대의 실험 대상으로 전쟁 포로들을 잡아들이라’는 공식 작전 명령서도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자료는 그동안 가해자들의 철저한 증거인멸 작업으로 구체적 물증이 공개된 적 없었던 731부대의 인체실험 실상을 밝혀줄 유력한 증거가 됐다. 아울러 국제 소송에서 일본의 전쟁 범죄 책임을 묻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731부대의 만행, 어떻게 알려졌나

 

<경향신문> 1981년 5월 26일 치.

 

731부대의 만행이 처음 드러난 발단은 1981년 일본 교수가 쓴 논문이었다. 일본 국립 나가사키 장기대학의 쓰네이시 케이이치 조교수는 1981년 5월 <사라진 세균전 부대>란 제목의 연구서를 통해 731부대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밝혀냈다. 쓰네이시 교수는 “세균전 전문부대인 731부대가 유행성출혈열을 세균전에 이용하기 위해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까지 한 뒤 이들을 모두 독살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731부대의 인체실험 방법까지 상세히 기술했다. 보고서가 밝힌 실험 방법은 아래와 같다.

 

“건강한 인간에 병원체를 보유한 진드기를 빻아 넣어 만든 식염수유제를 주사해 , 유행성출혈열에 감염시킨다. 발병으로부터 5일 이내에 산사람으로부터 내장을 적출, (중략) 병원체가 남아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결국은 산 채로 해부한다. (중략) 패전 직전에는 증거인멸을 위해 이 실험에 이용한 포로들에게 밥에 청산가리를 타 죽이거나 권총으로 모두 사살했다.”

 

731부대에서 이뤄진 생체실험. <한겨레> 자료 사진.

 

731부대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밝힌 쓰네이시 교수의 보고서는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그동안 일본 내에서 731부대는 ‘일본(관동)군 방역급수부’란 이름으로 창설돼 표면적으로는 전염병 예방이나 전쟁 중 음료수의 공급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연구 보고서는 추후 731부대의 연구 결과가 미군의 세균전 연구에도 사용되었고, 여기에 731부대 생존 간부들이 협력했다는 사실도 폭로했다.

 

쓰네이시 교수의 연구 보고서에 이어 731부대의 실상을 폭로한 추리소설도 출간됐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1982년 <악마의 포식>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한다. 모리무라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키겠다”고 서약한 731부대 소속의 전직 요원 60여 명으로부터 정보를 얻는 데 애를 먹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이 책은 출간한 지 4개월 만에 70만 부나 판매됐다.

 

731부대 야외 동사 실험 재현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이런 가운데 당시 731부대원들이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기는커녕 일본 사회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하나씩 밝혀졌다. 731부대의 생체 실험책임자였던 의학자는 당시의 실험 결과를 일본의 의학지에 자랑스럽게 소개했음이 밝혀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문제의 의학자는 <국소내한성의 비교민족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731부대의 연구 결과 발표에서 8살~84살의 일본인, 중국인, 몽골인 등 500명을 대상으로 동상에 대한 업종별 저항성을 조사했다고 밝혔다. 이 의학자는 “생후 3일된 신생아에 대해서도 한랭에 대한 피부혈관의 반응이 관찰됐다”고 말해 충격을 안겼다.

 

일본의 범죄와 미국의 은폐

일본에서 731부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무렵, 관련자들의 폭로와 생체실험을 입증할 만한 증거들이 쏟아졌다. 옛 731부대 관계자 6명이 당시의 만행을 폭로한 책도 출간됐다. 이들 가운데 여러 건의 해부를 목격했다는 부대원은 “나는 수술용 칼로 생체의 가슴을 절개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대부분의 절개 수술은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시됐다”며 “실험 대상자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 비명은 곧 사라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한겨레> 1993년 8월 15일 치.

 

1992년 4월에는 일본군 731부대의 인체실험 자료가 공개됐고, 1993년 8월에는 731부대 세균전 자료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1995년 7월에는 ’1940년 당시 일본군 731부대의 세균전은 육군참모본부의 지시와 당시 일왕 히로히토의 승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문서도 발견됐다. 1998년에는 731부대의 생체실험에 이용된 사람들의 이름과 실험 시간, 장소, 체포 경위, 심문 내용, 생체실험 결과 및 인적사항이 기록된 문서와 이를 촬영한 사진 원본이 연이어 발견됐다.

 

하지만 731부대원 일부의 폭로와 계속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은 책임지지 않았다. 일본군부와 정부는 731부대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전쟁 범죄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731부대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국제 재판에서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군 731부대의 각종 생체실험 자료들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이들의 만행을 은폐해왔기 때문이다.

 

<한겨레> 2010년 3월 20일 치.

 

1945년 10월, 731부대장의 오른팔이었던 대령과 곤충학자인 소령, 전 육군참모 등 3명을 미 육군의 생물전연구 기관 캠프 데트릭의 샌더스 중령이 신문한 기록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전쟁범죄자의 적발과는 별개의 문제이니 안심하고 얘기해주기 바란다 . (중략 ) 대통령에 제출하는 비밀 보고 자료를 작성하기 때문에...”

 

샌더스 중령은 731부대의 신문 보고서를 1947년 12월 12일 미 국방부에 제출한다. 그가 제시한 최종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일본인 과학자들이 수백만 달러의 비용과 오랜 세월을 거쳐 얻은 자료다. 이런 정보를 우리 쪽 연구소에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체실험은 양심의 가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를 총액 25만엔 정도로 얻었다. 연구에 투입된 비용을 따져보면 이는 미미한 금액이 될 것이다. 스스로 이런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731부대, 생체실험의 비밀. <한겨레> 자료 사진.

 

불완전한 과거 청산은 또 다른 전쟁 범죄를 양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일왕과 군국주의자들에 대한 처벌과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참고문헌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장 일본군 전쟁범죄 관련 ‘Interagency Working Group(IWG)’문서군 중 한국 관련 자료

<제 731 부대: 일본관동군 세균전부대> 송소석 
 신동아 2005년 8월 호, <패전 60년, 다시 불거진 일왕 전쟁책임론> 이창위
<역사를 개작하는 우파세력의 최근 동향> 타와라 요시후미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아카하타신문> 편집국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2011. 10. 21

[하성봉의 중국이야기 19] 3000여명 산 채로 실험… 세균무기 등 연구개발 ‘식인마굴’

 

하성봉·언론인 | sungbongh@gmail.com

 

전쟁은 인간을 미치광이로 만든다. 총칼앞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은 쓰레기처럼 취급된다. 만주땅에서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지옥보다 더한 처참하고도 잔혹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만주제731부대’에서 진행된 세균무기 제작과 생체실험장이다. 이곳은 일본제국주의의 잔악함을 낱낱이 보여준다. 현재는 당시의 현장을 일부 복원시킨 ‘침화일군 제731부대유적지’(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遺跡地)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위치는 하얼빈(哈爾賓) 핑팡취(平房區) 신장다제(新疆大街) 25호로 하얼빈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5㎞떨어진 곳에 있다. 731부대는 원래 건물 80여 곳에 총면적이 6.1㎢였으나 현재는 당시의 본부건물을 유적지로 되살려 놓았다. 이곳 건축면적은 2000㎡로 냉동실험실, 시체소각로, 세균보존실 등 19곳의 보호유적이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지’, 그 극한을 보여준다. 731부대는 탄저균, 페스트균, 콜레라균 등 20여 종류의 병원체를 세균병기로 개발했다.

 

일본은 1931년 9.18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으로 확대한다. 일본은 중국대륙을 삼킨 뒤 동남아 나아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망상을 품었다. 시대는 영웅을 낳지만 또한 악마도 만들 수 있다. ‘악마’인 731부대는 바로 이때 탄생했다. 일본은 하얼빈외에 창춘(長春), 난징(南京), 베이징(北京), 광저우(廣州)와 싱가포르 등지로 세균부대를 늘려나갔다.

 

일본 국왕의 칙령으로 만든 특수부대…살아있는 3천여명을 생체연구 재료로 삼아

 

만주731부대는 일본 국왕의 칙령을 받아 만든 특수부대로 일제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만주국 영토내에 자리잡았다. 만주731부대는 확장을 계속해 1942년에는 부대원 총수가 3천명에 달했으며 헤이룽장성(黑龍江省)내 하이린(海林), 쑨우(孫吳), 린커우(林口), 하이라얼(海拉爾) 등지에 지부를 둘 정도였다. 1939년이후 대규모의 세균 생산을 시작하면서 매달 최대 장티푸스균 800~900㎏, 흑사병균 300~400㎏, 콜레라균 1000㎏중에서 선택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은 살아있는 사람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세균무기를 연구개발한 ‘식인마굴’(食人魔窟)이었다. 실험에 사용된 인간들은 ‘마루타’(丸太,’통나무’란 의미)로 불렸다. 지역당국에 이곳 시설을 제재소라고 신고했기 때문에 농담삼아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곳의 제1대 부대장은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이었다. 그는 유학기간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생물의학이 발전된 상황을 살펴본 뒤 세균화생전을 주창한 끝에 육군상층 인물의 지지를 얻게된다. 이시이는 1931년 도쿄 일본육군군의학교내에 방역연구실을 창립하고 세균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는 대량의 생체실험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1932년 하얼빈시에서 남쪽으로 70㎞떨어진 얼베이인허전(二背蔭河鎭)으로 옮겨온뒤 1935년 만주731부대가 위치한 핑팡(平房)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생체실험에 들어간다. 이시이는 야전용 음용수여과기를 만든뒤 대량생산을 위해 군상층부앞에서 자신의 오줌을 여과기로 걸러 마신뒤 예산지원 허락을 받아낼 정도로 철저한 파시스트였다. 

 

731부대는 1939년부터 패망하던 1945년까지 중국인, 몽골인, 러시아인, 조선인과 미국인 등 인종별로 3천여명을 산 채로 생체실험을 했다.

 

처참하고 잔악한 생체실험의 현장…임산부에 3살 어린이까지 처참하게 살해

생체실험은 더 이상 잔악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속에는 3살짜리 어린이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군은 대량의 세균배양과 실험을 위해 쥐와 파리, 모기, 빈대, 이 등 전염병을 옮기는 여러 곤충을 번식시켰다. 인간 생체실험을 위한 혈액재료를 얻기 위해 말, 소, 낙타, 원숭이 등도 사육했다.

 

일본군은 배양한 대량의 세균을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으며 그 방법이 수십 가지가 됐다. 세균액을 주사기로 인체에 주입하고, 입에 들이붓거나, 음식에 섞어 식용이라고 속여서 먹게 한뒤 그 변화를 관찰해 기록했다.

 

731부대원들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일본이 패망을 앞둔 말기인 1944년 3월에서 1945년 5월까지 9개월동안에 세균에 강제주입당해 죽은 사람이 190여명이었다. 동상실험은 더욱 잔인했는데 옷을 벗긴 사람을 동상실험실 내에 집어 넣고 영하 30~40도 혹은 그 이하의 온도로 낮춘 실험실 내에 넣은 뒤 각종변화를 관찰했으며 신체가 얼어굳은 뒤에는 찬물, 더운물 심지어 펄펄끓는 물에 넣고 가장 ‘이상적인’ 해동방법을 찾는 끔찍한 실험을 했다. 실험대상자는 극도의 고통속에서 현장에서 죽거나 피부와 살이 썩어서 흰뼈가 드러나기도 했다.

 

생체실험은 임산부에게도 시행이 되었다. 어떤 때는 의사에 의해 수태되고 그 태아는 꺼내어 졌다. 이외에 사람과 말의 피를 서로 수혈하거나 공기로 정맥주사를 놓고 반응을 보기도 했다. 또 소장과 식도를 접합하고 팔과 다리를 절단해 교차 접합하는 실험도 했다.  고속회전기에 넣어 돌리는 실험과 폐에 담배연기를 주사하는 실험도 했다.

 

두개골을 열고 뇌를 바늘로 찔러 인체의 다른 부위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는 실험이 진행됐다.

 

중국에서 1988년에 상영한 영화 ‘흑태양731’(黑太陽731)속의 생체실험 장면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냉동실험에서는 영하 50도의 혹한에서 얼음이 언 손을 뜨거운 물에 담궈 해동시켜 살과 뼈의 결합상태를 확인하고, 영하 200도에 가까운 냉동실에 손을 얼려 손가락을 막대기로 두들겨 고드름처럼 부러뜨리는 실험을 한다.

 

천진한 어린이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해부대 위에서 여지없이 심장과 간 등 장기가 도려져 알코올 보관병에 담긴다. 두 모녀가 의자와 나무 기둥에 묶인 채 독가스실로 넣어진 뒤 질식사하는 장면을 일본군인들이 눈을 빤히 뜨고 지켜본다. 진공실험에서는 온몸이 팽창하고 내장이 항문으로 탈장하면서 죽게 된다. 731부대원들은 초시계로 모든 상황을 기록한다.

 

‘흑태양731’(黑太陽731) 영화보기→http://www.tudou.com/programs/view/ln3i-JUNvpM

 

실험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행됐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없이 이뤄졌고, 이는 실험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페스트 균을 인체의 각 부위별로 주사한 뒤 신체변화를 관찰하고 즉시 해부해 세균의 침투정도를 기록으로 남겼다. 2012년 초에는 731부대가 종군위안부를 자식이 보는 앞에서 해부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백신연구를 위한 혈청을 얻기 위해 산 사람의 몸에서 피를 뽑아 죽였다.

 

 

 
731부대는 수십가지의 세균을 생체의 각 부위에 주사기로 주입한 뒤 해부해 세포의 변화를 관찰했다.출처=중국포털 바이두

 

731부대원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이들은 마치 인간을 ‘표본실의 개구리’같이 능멸했다.

 

개발된 세균무기는 실전에 사용되기전 야외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성능실험을 했다. ‘마루타’들은 나무말뚝에 묶여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해 심장과 폐가 찢어지고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 피를 뿌린 채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731부대는 실험폭탄 투하를 위해 자체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부대원들은 생환자들을 끌고와 바로 해부해 독검사에 들어갔다. 야외실험장은 731부대본부 건물에서 서남쪽으로 4㎞떨어진 핑팡취(平房區) 핑신전(平新鎭) 핑러춘(平樂村)내 9만㎡ 규모로 원래 요(遼), 금(金)시대 고성이 있던 지역이었다.

 

세균폭탄 투하로 중국인민 30만명 피해…패망뒤 폭파 도주로 인근주민들 집단으로 숨져

 

일본군들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아무 지역에서나 세균실험을 임의로 진행했기 때문에 하얼빈, 눙안(農安), 퉁랴오(通遼) 등지에서 흑사병이 발생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일본군이 중국침략을 위한 전면전인 전쟁을 시작한뒤 731부대는 ‘원정대’를 조직해 여러 차례 중국내에 세균폭탄을 투하하고 세균을 풀어 중국인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일본은 닝보(寧波), 진화(金華), 이우(義烏), 인셴(鄞縣), 취저우(衢州), 창더(常德) 등에 세균전을 벌였다. 이들은 죄상을 숨기기위해 ‘방역급수’(防疫給水)라는 이름으로 하얼빈과 난징(南京)에서 세균전을 펼쳤다.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세균부대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연구소 설비를 폭파하고 생존해있던 마루타 400명을 독가스로 독살해 불을 지르거나 마대에 담아 쑹화장(松花江)에 버리는 방식으로 모두 살해해 병균이 확산됐다. 731부대가 있던 하얼빈의 핑팡취(平房區)는 흑사병 전염병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했다. 하얼빈 핑팡의 농민인 류중(劉忠)의 부모는 731부대의 세균배양 상자를 주워 사용하다 세균에 감염돼 사망했다. 얼다오거우(二道溝) 주민인 징푸(靖福) 일가 13명중 12명이 흑사병에 감염돼 사망했다. 731부대 유적지에는 일본 세균부대가 당시 세균배양과 번식, 실험에 사용한 용기의 일부가 그대로 진열돼 있는데 일본세균부대의 죄상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조선인 항일투사들도 붙들려 참상…심득룡 등 조선인 6명으로 유적지에 한글이름 남아 있어

 

일본군은 체포한 항일투사, 애국지사와 무고한 백성들을 생체실험대상으로 삼았다. 잡혀온 민간인들의 대부분은 항일운동을 하던 지하정보원들로 일본 관헌에 의해 연행된 사람들이었다. 조선인 희생자는 6명으로 심득룡, 이청천, 이기수, 한성진, 김성서, 고창률씨로 731유적지에 한글로 름이 남아있다.

 

일본은 항일투사들을 소탕하고 이들을 무기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실험도구로 삼는 이중의 효과를 노렸다. 심득룡은 1943년 대련(大連)사건으로 체포당한 항일투사로 관동군에 잡혀 731부대에서 생체실험 당했다.

 

731부대원들 고학력의 인텔리들로 충격…전후 일본 고위직과 대학총장 등으로 천수 누려

 

731부대 세균전연구 인원은 최대 3000명이었고 그중에 장군급이 5명, 그 아래 장교급이 30여명, 중대위급이 300여명이었다. 1936년부터 1942년 7월까지 이시이 시로(石井四郞)가 초대 부대장을 맡았고 1942년 8월-1945년 2월까지는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 소장이 부대장을 맡았다. 1945년 3-8월까지는 이시이가 다시 부대장을 맡았다. 731부대는 8개부와 4개지부로 나눠져 있었다. 군의관들은 모두 당시 대학 출신의 의학자와 과학자 등이었다.

 

부대원들중 이시이 시로, 기요시, 기요사마 등은 도쿄의과대 출신이다. 이들은 전범재판을 받지 않고 전후 일본 후생성 등에서 고위관직에 올라 천수(天壽)를 누렸다.


미국은 실험 자료 교환조건으로 범죄 묵인…부대간부들 한국전쟁때 인공혈액 팔아 갑부가 돼

 

미국은 731부대의 실험 자료를 건네받는 조건으로 관련자들의 범죄를 묵인한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군은 병사들이 유행성출열혈에 걸려 치료방법을 찾을 길이 없자 일본에 있던 731부대 출신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731부대는 1938년 세균무기개발을 위해 쥐의 배설물을 통해 감염되는 유행성출열혈을 연구했고 1942년에 이미 연구 성과를 확보한 상태였다 유행성출열혈은 휴전까지 계속됐는데 미군 감염자수는 2600여명으로 사망률은 5%에 달했다. 1951년에 731부대 제1대대장인 이시이 시로와 제2대대장인 기타노 마사지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기타노는 유행성출열혈 전문가였다. 이는 731부대원들이 미국과 협력관계를 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시이 시로는 50년대에 한국전쟁의 지원을 위해 한국을 2차례 극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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