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19.
김기철 기자
입력 : 2013.03.01 03:06
[오늘 3·1절 94주년]
이극로·김준연… 3개 국어로 관동대학살 실태 알려
'유덕고려학우회 독립운동' 당시 獨 경찰보고서 공개
在獨유학생, 안중근 의거 기념일 맞춰 日만행 폭로
'일제는 독립투사를 교묘하게 고문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그 잔인성은 중세 때 종교재판소를 훨씬 능가했다.… 남녀의 몸에 대나무 못을 박기도 하고 피부를 찢거나 비트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
국어학자 이극로,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김준연 등이 1920년대 독일 유학 당시 일제의 3·1운동 탄압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진상을 고발하는 선언문을 배포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실이 독일 외교부 소장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경찰국장 보고서(1924년 1월 24일자)에 따르면, 1923년 10월 26일 독일 유학생 단체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는 베를린에서 '일본의 잔인한 한국 지배'라는 선언문을 독일어와 영어, 한문으로 각각 5000장, 2000장, 수백 장 배포했다.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기념일이다.
◇학살 소식 퍼질까봐 통신 차단
선언문 가운데 관동대지진 학살은 '유덕고려학우회'가 당시 일본에서 현장을 목격한 독일인 부르크하르트 박사를 면담하고, 그가 독일 신문에 기고한 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일본 군인들은 한인들이 도시에 방화하고, 우물에 독약을 넣고,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 한인들은 보이는 대로 짐승 같은 폭도 군중에게 짓밟혔다.' 학살 소식이 퍼져나갈까 봐 외부 통신 수단을 차단한 데서 일본 정부의 죄(罪)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유덕고려학우회'가 이끈 관동대지진 학살 고발은 독일 외교부·내무부·재외공관이 긴밀하게 문서를 주고받으며 실태 파악에 나서고, 현지 언론이 소개할 만큼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일간지 '베를리너 폴크스차이퉁'은 1923년 11월 24일자에 한국 유학생들이 일본 식민 통치를 비판한 자료를 보내온 것을 소개한다며 관련 기사를 실었다. 당시 독일엔 베를린 40명을 포함, 한국인 6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독일 각계에 일제 만행 비판
재독 한인 대회를 주도한 것은 당시 베를린대에 유학하던 이극로(1893~1978)와 김준연(1895~1971)이었다.
이극로는 1922년 4월부터 베를린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무보수로 한국어 강의를 하다 한글 연구로 방향을 돌렸다. 1927년 '중국의 생사(生絲) 공업'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극로는 귀국 후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쓰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됐다. 이극로는 1893년 경남 의령 출생이지만, 경찰국장 보고서는 1896년 만주 선양(瀋陽) 출생으로 적었다.
보고서를 입수한 정상수 명지대 연구교수는 "비자를 받기 쉽게 나이를 줄이면서 출생지도 중국으로 행세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파독 광부·간호사 이전에 항일 유학생 있었다
이극로의 독립운동은 유학 기간 내내 계속됐다. 재독 한인 대회 직후 독일 각계에 편지와 선언서를 보내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독일 외교부에 소장된 1923년 12월 7일자 슐츠 베를린대 교수에게 보낸 편지가 그중 하나다. '한국의 독립과 일본의 침략 정책'(1924)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한국과 한국의 독립운동'(1927) 등의 책자를 펴내 독일 정부와 각국 외교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김준연은 1925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활약하다 귀국,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필을 지냈다.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유덕고려학우회는 유럽의 첫 한인 유학생 단체로 이극로가 재독 한인 대회를 주도하고 선언문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1960년대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이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면, 일제강점기 독일 유학생들은 나라를 되찾고자 몸을 바쳤다"고 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923년 9월 1일 낮 도쿄와 요코하마 등 일본 관동(關東) 지방에 대지진이 발생, 사망·실종자만 14만 명 가까이 나왔다. 일본 정부는 흉흉한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뜨려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자경단(自警團)과 경찰, 군대까지 개입, 조선인 학살 희생자는 7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오늘의 세상] "1923년 의열단, 일본인 암살 위한 폭탄 100개를 한국에…"
재준 기자
입력 : 2013.03.01 03:06 | 수정 : 2013.03.01 07:36
英정보국 비밀문서 공개… 베일 쌓인 의열단 활동 밝혀져
-1923년 8월 英 SIS 보고서
"한국인 비밀결사체 의열단 도쿄서도 50여명 활동"
-1919년 10월 보고서엔
"상해 임시정부, 본국·美서 상당한 자금 받고 있다"
1919년 3·1운동 직후 김원봉을 주축으로 무장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義烈團)이 만들어졌다. 무력 수단에 의한 독립을 목표로 했던 의열단은 1921년 9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며 이름을 알렸으나 비밀결사 조직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활동상은 지금껏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의열단의 규모와 활동 방식을 기록한 영국 정보국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의 비밀문서가 28일 공개됐다. 문서는 영국 국가기록원이 관리하던 것을 우리 국가기록원이 수집해 2010년부터 보관해오던 것이다.
영국 본국에 보고된 SIS 극동지부의 1923년 8월 보고서는 의열단에 대해 "약 200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한국인 비밀결사체로, 한국과 일본에 있는 일본인 관리들을 암살하는 것이 (의열단의) 목적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는 "한 달 전에 이 단체 회원 한 명이 중국 청도에 있는 독일인이 만든 폭탄 160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100개가 한국으로 반입되었다. 현재 50여명의 회원이 도쿄에서 활동 중이다"라는 등 상세하게 기록했다.
SIS 문서는 임시정부의 활동상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다. 1919년 10월에 작성된 SIS '대한민국 임시정부' 보고서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본국과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받았다. 임시정부는 현지 한국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했고, 대부분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세금을 냈다.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이 일본인을 달래기 위해 프랑스(당시 상해를 조차했음) 당국에 의해 폐간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록했다.
1923년에 작성된 '한국 독립운동 초기 전개 과정'이라는 SIS 문서엔 3·1운동과 관련해 "서울의 한 식당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독립선언을 발표한 후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신들을 체포하도록 요청했다. 모든 주요 도시와 읍내의 독립투사들이 시위를 조직했다. 수많은 젊은 여학생이 적극적으로 운동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박사는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관심을 반영하는 문서"라며 "SIS 극동지부는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첩보 내용을 본국에 지속적으로 보고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3·1운동이 전 세계에 전해지면서 영국 내에서도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이 하원 의원들을 중심으로 나타났다"며 "동시에 독립운동을 탄압한 일본에 대해선 비난 여론이 생겼다"고 말했다.
“여학생들 적극 가담·임시정부 자발적 성금 인상적”
英·美 정보기관에 비친 ‘조선의 독립운동’
영국 정보국(SIS)이 한국의 3·1운동과 독립운동에 대해 젊은 여학생들의 적극적인 가담과 자발적인 자금 마련 등이 인상적이었고,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까지 이어진 독립운동의 도화선이었다고 평가한 문서가공개됐다.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영국 정보국 극동지부가 1923년 7월 27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한국 독립운동 초기 전개과정’ 보고서 등 영국 국가기록원과 미국 국가기록관리청이 수집한 3·1운동 관련 일제강점기 기록물 3건을 28일 공개했다. 이들 기록물은 최근 비밀이 해제됐다. 1912년 창설된 영국 정보국은 당시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소련 KGB 등과 함께 대표적인 정보기관으로 꼽힌다.
‘한국 독립운동 초기 전개과정’ 보고서에는 “독립선언 발표 후 모든 주요 도시와 읍내의 독립투사들이 시위를 조직했고, 수많은 젊은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운동에 가담해 열렬한 반일운동을 시작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19년 10월 23일 작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보고서에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본국과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받았는데 한국인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냈다”고 적었다.
‘회원은 2000여명으로 구성됐고, 일본인 관리를 암살하려는 목적’ 등의 내용도 기록하고 있어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의열단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국가기록관리청 기록물은 1945년 일제에 의해 태평양 중부 타라와 섬으로 끌려간 한국인 노동자의 비참한 모습을 담은 사진 등 8점이다. 타라와 섬은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과 일본군의 격전지로 군사시설을 세우기 위해 일본이 한국인 800여명을 징용해간 곳이다. 70여명만이 살아서 돌아온 생지옥이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영국 정보국 “3·1운동 때 젊은 여학생들 적극 가담”
본국에 보고한 문건 3건 공개… 1차대전 후 첫 독립투쟁 관심
경향신문|이상호 기자|입력2013.02.28 23:00
영국 정보국(SIS)이 3·1운동과 독립투사들의 활동 등에 대해 본국 외무부로 보낸 보고서가 공개됐다. 1912년 창설된 SIS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등과 함께 대표적인 세계 정보기관으로 꼽힌다.
국가기록원은 28일 영국 국가기록원과 미국 국가기록관리청으로부터 수집한 일제강점기 기록물을 공개했다.
미국 국가기록관리청이 수집한 일제강점기 사진 공개
일제강점기 농촌지역 어린이들과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인천 제물포항 부두에 쌓여 있는 미곡. 맨 아래는 일제에 의해 태평양 중부 타라와섬에 강제동원됐다가 부상을 입은 한 한국인 노동자를 옮기는 장면(위부터). 이 사진물은 미국 국가기록관리청이 수집한 것이며, 국가기록원이 28일 공개했다. | 국가기록원 제공
1919~1923년 작성된 보고서는 "3·1운동에 수많은 젊은 여학생들이 적극 가담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본국과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받았는데 대부분의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냈다. 의열단은 한국인 비밀결사체로 국내외 지부를 두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 있는 일본인 관리들을 암살하는 게 목적이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독립기념관 김도형 박사는 "세계 최고의 정보국 가운데 하나인 영국 정보국 극동지부에서 당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첩보 내용을 본국에 지속적으로 보고했다는 점과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관점을 살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미국 국가기록관리청에서 입수한 기록물은 일제에 의해 태평양 중부 타라와섬으로 끌려가 부상한 한국인 노동자의 모습 등을 담은 사진 8점이다. 타라와섬에는 한국인 노동자 800명이 일본의 군사시설 등을 구축하기 위해 끌려갔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70여명에 불과하다. 타라와섬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과 일본군의 격전지로 1945년 미군에 의해 점령됐다.
< 이상호 기자 shle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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