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2022년 10월26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주간 일반 알현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바티칸/AF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21일 바티칸에서 선종했다. 향년 88.
에이피(AP) 통신은 이날 교황청 궁무처장인 케빈 페럴 추기경이 “오늘 아침 7시 35분 로마의 주교 프란치스코가 성부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생애는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데 헌신하셨다”고 교황의 선종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그는 우리에게 복음의 가치에 따라 충실함, 용기, 그리고 보편적인 사랑으로 특히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라고 가르치셨다”고 덧붙였다.
선종 전날인 20일 교황은 부활절을 맞아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 부활절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성베드로 성당 발코니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수천명 신자들 앞에서 “형제 자매들, 즐거운 부활절입니다”고 천천히 말했다. 이어지는 교황의 메시지는 디에고 라벨리 신부가 대독했다고 로이터 통신 등이 전했다.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이 없이 평화는 없다”는 메시지가 낭독되는 것을 교황은 옆에서 지켜봤다.
교황은 또 전날 남긴 생전 마지막 부활절 강론에서는 “가자지구의 상황이 개탄스럽다”며 “전쟁 당사자들에게 휴전을 촉구하고 인질을 석방해 평화의 미래를 열망하는 굶주린 이를 도와줄 것을 호소한다”는 반전 메시지를 남겼다. 교황이 세상에 전한 마지막 메시지였다. 이날 바티칸을 방문한 제이디(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생전 그가 맞은 ‘마지막 손님’이 됐다.
기관지염으로 지난 2월 14일 로마 제멜리 종합병원에 입원한 교황은 ‘다균성 호흡기 감염’ 진단받은 뒤 나흘 뒤 양쪽 폐에 폐렴이 발생했다. 이후 병세가 계속 악화해 한때 위중했던 교황은 38일간 입원 치료 뒤 지난달 23일 퇴원했다. 교황청은 이튿날 병세가 다소 호전돼 일부 업무를 재개했다고 발표했으나 계속 부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으나, 1969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빈민 사목을 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축구를 즐겼다.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하면서 2013년 3월19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즉위했다. 최초의 예수회 교황이며,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과 남반구 출신의 교황이었다. 가난한 이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어 청빈과 순명의 상징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을 교황의 명칭으로 처음 사용했으며 역대 교황 중 손꼽히게 인기가 높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전에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지난 2013년 9월 “사회 체제의 중심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발언하는 등 교황이 된 이후에도 가난한 이들의 삶에 대해 큰 관심을 보여왔다.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2014년 8월14~18일 한국을 방문해 북핵 문제를 대화로 풀어달라며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발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두번째 임기를 시작하자 “증오 없는 사회를 이끌어달라”고 호소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순간까지도 평화를 호소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3주년을 앞둔 2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건강 악화로 말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글로 써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전 세계 분쟁 지역의 평화를 기원했다고 비비시(BBC) 방송은 전했다. “내일은 전 인류에게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사건인 우크라이나 대규모 전쟁 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국민과의 친밀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모든 무력 분쟁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중동 전역, 미얀마, (콩고) 키부, 수단에서 평화의 선물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고 호소했다고 전했다.
새 교황은 ‘콘클라베’라고 불리는 비밀회의에서 선출된다. 교황 궐위 시 20일 내에 시스티나 성당에서 80살 이하 추기경이 참석하는 콘클라베가 열리고 이 회의에서 다음 교황을 뽑도록 되어 있다. 콘클라베는 `열쇠로 잠근다'는 뜻의 라틴어로, 회의가 시작되면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추기경들이 모인 건물의 청동문이 봉쇄되고 모든 문과 창문도 납으로 봉인하던 관행에서 비롯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2년 10월26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주간 일반 알현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바티칸/AFP 연합뉴스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가 21일 오전(현지시각) 선종했다. 향년 88.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월 14일부터 이탈리아 로마의 제멜리 병원에 입원해 폐렴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다 지난달 23일 퇴원했다. 교황은 선종 전날인 20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야외 미사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로, 1969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빈민 사목을 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축구를 즐겼다. 교황의 이름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알려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따왔다. 서민적인 소탈한 모습으로 많은 신자가 따랐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을 지낼 당시 일상적으로 버스를 타고 다녔고, 대주교 관저 대신 작은 아파트에서 살며 직접 음식을 해 먹는 등 청빈한 삶을 살았다.
교황 즉위 뒤 그의 첫 ‘명령’은 “내 즉위 축하 미사에 참석하지 말라”였다. 그는 고국 아르헨티나 신자들에게 로마에서 열리는 자신의 즉위 축하 미사에 참석할 여행 경비를 차라리 자선 단체에 기부하라며 방문 자제령을 내렸다. 2001년 추기경에 임명됐을 때도 그는 신자들에게 “비행기 삯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며 임명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권했다.
젊은 시절 프란치스코 교황 모습. AFP 연합뉴스
바티칸에 입성한 첫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 망토를 걸치지 않고 흰 가운 차림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나타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콘클라베 기간 동안 머문 숙소에서 나올 때에도 짐을 직접 챙기고 자기 돈으로 숙박비를 계산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왼쪽 둘째)이 200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지하철을 타고 있다. 교황 즉위명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한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평소 지하철을 타거나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AP 연합뉴스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가 2013년 3월19일 오전 9시30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즉위 미사에서 공식 취임하고 있다. 이날 바티칸에는 100만명이 넘는 축하객이 모였고, 2년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150만명) 이후 최대 인파를 이뤘다. 바티칸/AF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왼쪽)과 베네딕토 16세 명예 교황이 2013년 3월23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로마 인근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의 여름 별장에서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 베네딕토 16세가 598년 만에 처음으로 살아 있을 때 사임해, 전·현직 교황이 함께한 역사적인 사진이 남았다. 이날 별장에는 역사적 장면을 직접 보기 위해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몰려들었다. 카스텔간돌포/A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14일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해 영접 나온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날 교황은 유가족에게 “꼭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2016년 4월16일(현지시각)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리스 레스보스섬 방문 일정을 마치고 함께 비행기에 오른 12명이 시리아 난민들과 로마 피암치노 공항에 도착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교황은 그리스 레스보스섬에서 시리아 난민 12명을 데리고 바티칸으로 돌아왔다. 로마/A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9월8일(현지시각) 파푸아뉴기니 바니모에서 주민들이 선물한 깃털 모자를 쓰고 신자들을 만나고 있다. 바니모/EPA 연합뉴스
지난해 11월13일(현지시각)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주간 일반 알현에서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바티칸/AFP 연합뉴스
지난 2월 12일(현지시각)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주간 일반 알현에 참석한 어린이의 손을 잡고 있다. 바티칸/A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활절인 20일(현지시각)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발코니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수천명 신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바티칸 미디어 제공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11월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바티칸/AFP 연합뉴스
“(나의) 무덤은 특별한 장식 없이, 단순해야 할 것입니다. 비문엔 ‘프란치스코(라틴어 Franciscus)’만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교황청이 21일(현지시각) 공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유언 일부다. 이날 오전 선종한 교황은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바티칸 바깥에 있는 성당의 지하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원한 비문은 자신의 라틴어 이름 한 단어뿐이었다. 교황이 안장되길 원한 장소는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으로, 그는 생전에도 이곳에 묻히길 바란다는 뜻을 밝혀 왔다.
베네딕토 16세와 요한 바로오 2세 교황 등 많은 전임 교황들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안장됐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택은 이러한 최근의 전통을 깨는 것이기도 하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교황은 지난 2023년 한 인터뷰에서도 언젠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묻히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20일(현지시각)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미사 말미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중앙 단상에 나와 축복을 내리고 있다. AP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는 평생 동안 사제이자 주교로서 언제나 주님의 어머니, 복된 성모 마리아께 스스로를 맡겨왔다”며 “그렇기에 나는 육신의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안식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교황은 또 안장 장소가 이미 준비됐다고 밝히며 성당의 파올리나 경당과 스포르차 경당 사이 통로에 묘소를 마련해 줄 것을 당부했다. 266대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에도 바티칸 밖에 안장된 교황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리아 대성전에 묻힌 교황은 모두 7명으로, 가장 마지막에 안장된 이는 1669년 클레멘트 9세였다.
이날 교황청은 성명을 내어 프란치스코 교황의 직접 사인은 뇌졸중과 그에 따른 심부전이라고도 공식 발표했다.
급성 호흡부전과 고혈압, 제2형 당뇨 등 다른 질환도 영향을 미쳤다. 교황은 앞서 중증 호흡기 감염으로 지난 2월부터 약 5주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당시 교황은 위중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점차 증상이 호전되며 지난달 23일 퇴원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교황은 경북 지역에서 대규모 산불을 겪은 한국 국민에게 위로 메시지를 보내고, 성 베드로 성당을 깜짝 방문하는 등 신자들을 만났다. 선종 전날인 20일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미사에 참석하고, 제이디 밴스 미국 부통령과 비공개를 만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진이 21일(현지시각) 멕시코시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에서 놓여 있다. A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21일(현지시각), 세계 곳곳에선 늦은 밤까지 교황을 위한 묵주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기도회가 열린 이탈리아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은 밤 11시가 넘도록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붙잡은 촛불로 어둠이 잦아들었다.
교황청은 21일 저녁 8시(한국시간 22일 새벽 3시) 바티칸에 있는 교황의 거처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입관식을 거행했다. 교황청 궁무처장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을 처음 공표했던 케빈 패럴 추기경이 교황의 주검을 관에 안치하는 의식을 주재했다.
패럴 추기경은 애도 기간의 시작을 상징하는 교황 관저 봉쇄 의식을 치르며 관저 출입문에 빨간 리본을 달고 문을 묶어 리본에 밀랍 인장을 찍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위가 공식적으로 종료됐음을 알리는 의식이기도 하다.
봉인된 건물은 교황의 전통적인 거주지인 사도궁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곳을 사용하지 않고 교황청 사제들의 기숙사인 산타 마르타의 집에 거주하는 소박함을 보였다. 교황청은 이곳도 봉인했다고 밝혔다.
21일(현지시각)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을 발표했던 케빈 패럴 추기경이 애도 기간의 시작을 상징하는 교황 관저 봉쇄 의식을 치르며 관저 출입문에 빨간 리본을 달고 있다. AP연합뉴스
교황의 시신은 오는 23일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져 일반인 조문객을 받을 예정이다. 교황청은 현재까지 구체적인 장례 일정을 공개하진 않았지만, 22일엔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이 기간 전 세계 추기경과 각국의 정상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이 대성당을 찾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는 선종 후 4∼6일 사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1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부인 멜라니아 여사와 로마에서 열릴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취임한 뒤 첫 외국 방문이 될 전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수 세기 동안 전통에 따라 정교함을 더한 교황의 장례 의식을 간소화하는 작업도 나선 바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교황 장례 규칙을 담은 ‘교황 장례 예식서’ 개정판을 승인해 장례 절차를 대폭 줄였다. 개정 전 교황의 시신을 안치하는 관은 과거 측백나무와 아연, 느릅나무로 된 세 겹의 관으로 제작됐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연으로 내부만 덧댄 목관을 선택했다. 교황의 시신도 원래는 ‘카타팔케’ 라고 부르는 허리 높이의 단상에 안치됐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대한 장식 없이 개방형 관에 누운 채 조문을 받게 된다.
21일(현지시각)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선종 후 프란치스코 교황을 위한 묵주기도를 마친 신도들이 포옹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종 후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다른 곳에 안장될 수 있도록 규정도 개정했다. 그에 따라 교황은 바티칸에서 떨어진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묻히길 바란다는 유언을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식이 끝난 뒤 2∼3주가 지나면 전 세계 추기경단은 사도궁 안에 있는 시스티나 경당에 모여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를 개최한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 오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게 되어, 또 무엇보다 한국 국민들과 그 풍요로운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 민족의 유산은 오랜 세월 폭력과 박해와 전쟁의 시련을 거쳤습니다.”
2014년 8월 14일 대한민국 서울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교황(이하 교황)이 한국인에게 공식적으로 남긴 첫 말씀이다. 첫 말씀은 첫사랑처럼 언제나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한다.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 폭력과 박해와 전쟁의 시련이 한반도 전체를 빛과 어둠처럼 교차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시작과 중심과 끝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몸 없는 마음 없듯이, 가난한 사람들 없는 복음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잊는다면, 복음도 없고 그리스도교도 없다.
2014년 8월 14일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한 뒤 영접나온 내빈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교황 모습. 2025.4.21 연합뉴스 자료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세요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왜 행복하다고 선포했을까. 부자는 자신을 믿고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이다. 부자는 하느님이 필요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자는 하느님과 멀리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인류에게 하느님을 선물했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인류에게 하느님을 알려준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와 인류에 축복이요 보물이다.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가난한 사람들은 알려주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처럼, “우리는 가난과 싸워야지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면 안 된다.” “가난 문제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신학 문제다.” 그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회의 속살이 드러난다. 가난한 사람들의 가치를 모르면, 하느님을 알 수 없다.
한반도 평화를 진심으로 바랐던 프란치스코 교황
내 생각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생에 한국인이었다. 교황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한반도의 평화를 진심으로 바랐다. “북한의 우리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들은 같은 언어를 말합니다. 가족 간에 같은 언어를 쓸 때에는 인간적으로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아시아 대륙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아시아 인구의 겨우 1%만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교황은 평양도 방문하고 싶었고, 중국도 방문하고 싶었다. 서울에서 로마로 향하는 비행기가 중국 상공을 지날 때, 교황은 그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이 아시아에서 복음 전파에 해야 할 몫이 분명히 있다.
2005년 4월 교황선거에서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되었고,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2위 득표를 했다. 베네딕토 16세가 자진 사임하여 열린 2013년 3월 교황선거에서 나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남미 출신의 진보 교황이 탄생하기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탄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지금, 나는 또 이런 소망이 있다. “곧 있을 콘클라베에서 아시아 출신의 진보 교황이 탄생하기를.”)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배려와 관심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인의 마음을 울렸다. “세월호 리본을 달고 있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세월호 리본을 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교황님은 중립을 지켜야 하십니다’ 말했어요. 그러나,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이듬해인 2014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아 평화와 위로 그리고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4년 8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있다. 2025.4.21. 연합뉴스
인간의 모든 언어가 다 사라지고, 성서 말씀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나는 교황의 그 말씀만은 기억하고 싶다. “고통 앞에 중립 없다.” 그래서 교황은 “참으로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질적으로 기여했는가 점검해보라”는 말씀을 한국인에게 남겼다.
1973년 37세 젊은 나이에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이 된 베르골리오 신부는 3년 뒤 끔찍한 군사 쿠데타를 만났다. 비델라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 정권 치하에서 약 3만 명이 수거되어 목숨을 잃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쿠데타 소식을 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심정은 끔찍했을 것이다. 2025년 3월 중순, 헌법재판소의 시급한 판결을 촉구하는 유흥식 추기경의 담화문을 교황이 몰랐을 리 없다. “고통 앞에 중립 없다”고 교황은 말했고, 유흥식 추기경은 “정의 앞에 중립 없다”고 말한 것이다.
하느님의 희망은 인간
교황 말씀처럼, 하느님의 희망은 인간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찾기 전에 하느님이 먼저 인간을 찾으셨다.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을 그리워한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다.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하느님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 우주 역사에서 하느님이 사라질지라도,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느님 심정이 그렇다.
하느님 없는 인간은 공허하고, 인간 없는 하느님은 맹목적이다. 하느님 곁에서 인간은 비로소 안식을 찾지만, 인간 곁에서 하느님은 비로소 평화를 찾는다. 인간은 하느님을 찾는데 게으르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찾는데 게으르지 않다.
교황 방한 전 직접 전달한 세월호 소식
2014년 6월 하순, 나는 경향신문 통신원 자격으로 로마를 방문했다. 두 달 후 교황의 방한을 준비하는 교황청 움직임을 취재하는 목적보다 세월호 소식을 교황께 전달하는 임무가 내게 더 중요하고 시급했다. 신학생 시절의 교황에게 문학과 그리스어를 가르쳤던, 교황님의 스승 스칸노네 신부를 기적적으로 만나 두 시간 이야기했다. 스칸노네 신부는 신학생 시절부터 교황 선출까지 교황의 60년 역사를 자세히 보았고 그만큼 교황을 잘 아는 분이다.
하느님 도움으로, 내가 가지고 간 세월호 관련 자료들이 교황에게 무사히 전해졌다. 8월 18일 아침 8시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교황님을 알현한 나는 방한 직전 출간된 내 책 <교황과 나>를 헌정했다. 로마에서 스칸노네 신부를 만난 이야기, 내 스승 소브리노 신부와 인연을 나는 교황님께 말씀드렸다. 교황님과 나는 스페인어로 통역 없이 단 둘이 대화했다. 교황님은 내게 세 마디 말씀하셨다. “네가 전해준 자료를 잘 읽었다. 책을 계속 쓰라. 너를 위해 기도한다.”
나는 교황님과 연결된 책 두 권을 썼다. 교황 선출까지 역사를 다룬 <교황과 나>는 2014년에 나왔다. 교황 재임 12년간 설교 약 600편에서 명언을 발췌하여 번역한 <프란치스코 교황 어록>은 며칠 뒤 나온다. 해외 방문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는 기내에서 했던 기자회견에도 주목할 내용이 풍부하다. 교황 말씀을 개신교 성도와 일반 독자들에게도 기쁘게 소개하고 싶다.
하느님 오른편에 앉은 예수, 예수 오른편에 앉은 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께서 로메로 대주교와 함께 엘살바도르를 다녀가셨다고 내 스승 소브리노 신부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지구별을 다녀가셨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예수가 부활하여 하느님 오른편에 앉았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활하여 예수 오른편에 앉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오른편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마땅히 앉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린 왕자 되어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 옛날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걸으며 아기 예수 찾았다면, 오늘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고 걸으며 예수 찾아 나선다. 2025년 4월 20일 부활절 주일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상에서 마지막 설교를 남겼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더 이상 죽음의 포로가 아니시며, 수의에 감싸여 계시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옛 이야기 속의 인물로, 고대의 영웅으로, 박물관 속 조각상으로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일어나서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삶 속에서, 우리 이웃의 얼굴 속에서, 일상적인 일 속에서, 무덤이 아닌 모든 곳에서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통해 함께 하시고, 우리 각자가 행하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활 신앙은 안락한 ‘종교적 위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활은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항상 우리 곁에 살아계실 교황
“자매 형제 여러분, 부활 믿음의 신비 안에서, 평화와 해방에 대한 모든 기대를 마음에 품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살아 있고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교황은 내 삶에,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영원히 살아 있다. 교황이 또 다른 예수라면, 우리는 또 다른 교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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