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형당한 저항세력, 개들이 시체 뜯어먹어…외적들에 수시로 점령당한 한양, 참혹했던 그때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2024. 6. 15. 13:09
끊임없는 외국의 침입과 수도 서울의 수난史
낯선 이를 경계하는 어린이들(20세기초). 조선의 수도 서울은 사변 때마다 적군에 의해 점령돼 막대한 인명, 재산피해가 되풀이됐다.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컬렉션)]
낯선 이의 카메라를 불안하게 쳐다보는 조선인들(20세기초).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컬렉션)]
임진왜란때 일본의 서울 점령기간이 1년도 안 됐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일본풍이 유행했다.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 음력(이하 음력) 10월 2일 기사에서 국왕 선조는 다음과 같이 명한다. “도성 백성들이 오랜기간 왜적에게 점령되어 있어 왜어에 물든 자가 없지 아니하다. 각별히 방을 내걸어 사용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금지하라.”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와 제16대 인조(재위 1623~1649)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초유의 국가적 환란을 자초해 무능한 왕이라는 오명이 붙었다. 적군이 쳐들어오자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 것도 공통점이다. 적치하의 서울은 약탈과 살육이 난무하는 지상지옥이었을까, 아니면 엄격한 신분질서에 짓눌려 살았던 조선 백성의 억눌린 욕구가 분출된 해방구였을까.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 일본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7년간 벌인 국제전이다. 조선은 전국토가 전쟁터로 변해 거의 모든 주거지가 파괴됐고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서도 수도 서울이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명가도(征明假道·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 외교 교섭이 실패하자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1592년(선조 25) 3월 13일 수륙 침공군을 편성하고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육군은 9개 부대로 총병력이 15만 8700명, 수군은 9200명이었다. 4월 13일 오후 5시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군 1만8700명을 태운 700여 척의 일본군 선박이 부산진 앞바다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의 서막이 올랐다.
임진왜란때 왜군 파죽지세로 북상해 20일만에 서울 입성, 이후 1년 동안 점령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침략도.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전쟁발발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급박한 상황은 4월 17일 침략의 급보 서울 도착, 순변사 이일(1538~1601) 파견, 4월 20일 삼도 도순변사 신립(1546~1592) 임명, 4월 25일 이일 패주, 4월 28일 신립 패배, 4월 30일 선조 파천, 5월 3일 왜군 서울 입성, 1593년 4월 18일 왜군 서울에서 퇴각, 4월 20일 서울 수복, 10월 4일 선조 환도 등으로 전개됐다. 상주, 충주 전투의 패배가 잇달아 알려지고 국왕마저 피난길에 오르자 서울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흥분한 난민들은 궁궐과 관청을 약탈하고 장예원(掌隸院)과 형조에 보관 중이던 노비 문서를 불살랐다. 이로 인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소실됐고, 춘추관의 역대 실록, 다른 창고에 보관했던 고려사의 사초,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역대의 전적, 보물이 모조리 불타거나 도난당했다. 이기(1522~1600)의 <송와잡설>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서 한 달이 넘도록 계속해서 불탔다. 그들의 마음이 흉적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다”고 했다.
창신동 일원에서 바라본 흥인지문(1894년 이전).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 군대가 흥인지문을 통해 입성했다. 가토 군대는 처음에는 성문이 활짝 열렸고 성안도 텅 비어 매복이 있다고 여겨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마펫 한
국 컬렉션)]
흥인지문에서 바라본 종로 일대(1894년 이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마펫 한국 컬렉션)]
적의 기병이 한강 남쪽 언덕에 나타나자 도성을 지키던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1526~1592), 도원수 김명원(1534~1602), 부원수 신각(?~1592)이 모두 달아나 성이 텅비었다. 고니시가 지휘하는 일본군 1군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군 2만2280명이 도성으로 진입한 것은 5월 3일 새벽 무렵. <선조실록> 1592년 5월 3일 기사는 “적이 흥인문 밖에 이르러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시설이 모두 철거된 것을 보고 미심쩍어 선뜻 들어오지 못하였다. 먼저 십수명의 군사를 뽑아 수십 번을 탐지하고 종루까지 와 군병이 한 사람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입성하였다”고 했다. 이후 일본군의 후속 부대도 속속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경기지역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7월 16일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우키다는 종묘에 거주했으나 밤만 되면 괴이한 일이 생기고 군사들이 급사하자 종묘를 방화하고 진을 남별궁(南別宮·소공동 조선호텔)으로 옮겼다. 예하 지휘관들도 화재를 면한 남촌에 자리잡았다. 소공주동(조선호텔 등 중구 소공동), 정사룡 가옥(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주변), 정릉동(정동), 서학동(西學洞·서울시의회 부근), 계림군 이유 가옥(덕수궁), 미장동(美墻洞·을지로입구 롯데호텔), 명례동(명동), 묵사동(묵정동), 호현동(회현동), 장흥고동(남대문1가·충무로1가) 등에 분산주둔했다.
적치하의 서울 모습, 평소처럼 시장 열리고 상거래 활발···부역자 속출, 저항세력 밀고
남촌 일본인 거주지역(20세기초).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방화피해를 입지않은 남촌(명동, 을지로, 남산 북쪽 일원)에 주로 주둔했고 경술국치 전후로 일본인들도 주로 남촌에 거주했다. [국립민속박물관(헤르만 산더 기증사진)]
일본은 조선을 명나라 침략 전진기지로 삼고 이에 필요한 인력, 물자, 군량, 병력 등을 조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서울 백성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고니시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전 시가지에 자신의 깃발을 세우고 무법행위를 금지했다.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조선임금의 실정을 부각시키며 자신들이 점령군이 아니라 선정의 시혜자임을 강조했다. 굶주림과 피난 생활에 지친 도성민들은 일본군의 회유에 점차 서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통행증을 휴대하면 도성 출입도 제한하지 않았다. 시장 기능이 회복되고 상거래도 활발해졌다. <송와잡설>은 “삼의사(의료기관 3곳)와 각 관청의 서리, 전복(典僕·노복) 및 잡색(雜色·천역) 무리도 모두 왜적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시장을 벌이고 물자를 교역하기를 평시와 다름없이 하였다. 날마다 왜적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서로 방문하고 도박도 하였다”고 했다.
대신 저항의 움직임은 철저히 탄압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서로 모여 말을 하거나 거동이 수상한 자는 모두 불태워 죽여 동대문 밖에 해골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했다. 참수가 아닌 화형을 선택한 것은 적대행위에 대한 엄벌 의지를 각인시키려는 조치였다. 의병활동이 본격화하자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경기감사 심대(1546~1592)가 도성 안팎의 군사를 규합해 서울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다가 삭녕(연천과 철원 일부)에서 일본군 습격을 받고 전사했다. 일본군은 심대의 머리를 종루에 60일 동안 효수했다.
점령이 장기화되면서 부역자도 속출했다. <서정일기(西征日記)>는 이효인이라는 부역자를 소개한다. <서정일기>는 고니시를 수행한 종군승려 텐케이(天期)가 기록한 일기다. 이효인은 술파는 상인으로 장사의 편의를 보장받으려고 텐케이에 접근했다. 은은 물론 융복(군복), 내외관안(內外官案·관직명, 품계, 관장사무를 수록한 책) 등 값진 선물을 수시로 바쳤고 일본군에 저항하려는 조선인 명단을 밀고했다. <서정일기> 6월 5~6일 기사는 “조선인 이효인이 반란자 9명의 이름을 적어 내게 보여주었다. 이를 군영을 지키는 자에게 고하니 그가 즉시 9명을 잡아 우키다 히데이에 공에게 보냈고, 공은 즉시 법을 집행하였다”고 했다.
조명 연합군 평양수복후 상황급변, 왜군 도성백성 대량 학살하고 남쪽으로 퇴각
1593년(선조 26) 1월 9일 조명 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조선조정이 도성의 내응을 장려하자 도성민들이 동요했다. 위기를 느낀 일본군은 1월 24일 도성민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선조수정실록>은 “고니시 등이 평양 패전을 분하게 여긴데다가 조선사람이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한다고 의심하여 도성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 가옥도 거의 불태웠다”고 했다. 평양성 탈환이후 조·명 연합군이 계속 남하했고, 경기도 일대 관군과 의병도 서울수복을 목표로 일본군을 압박했다. 결정적으로 일본은 2월 행주산성 패전으로 사기가 크게 떨어져 서울 철군과 남해안 지역으로의 재배치를 요토미에게 건의해 3월 중순 승인을 얻었다. 때마침 명과의 강화협상이 급진전되며 4월 18~19일 서울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왜군이 빠져나간 서울은 폐허 그자체였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26일 기사에 의하면, 도체찰사 유성룡이 도성을 들어가 그 참상을 파악해 보고했다. 유성룡은 “모화관에는 백골이 쌓여 있었고 성중에도 인마가 죽어 있는데 죽은 자의 수효를 헤아리기 힘들다. 악취가 길에 가득해 사람이 근접할 수 없었으며 인가도 4~5분의 1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했다. 선조는 치안과 방어가 불안하다는 이유 등으로 1593년 10월 4일에서야 서울로 돌아왔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재위기간 무려 3번이나 서울을 비우고 달아났다. 처음은 1624년(인조 2) 1월 22일 평안병사 이괄(1587~1624)의 반란으로 인한 2월 8일부터 2월 22일까지 공주지역으로의 파천이다. 난민들에 의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소실됐지만 인명피해는 외침의 경우보다 비교적 경미한 편이었다. <인조실록> 1624년(인조 2) 2월 22일 기사는 “적이 패하여 성으로 들어간 뒤 도성 백성 80여 인을 죽였다. 또 적이 처음 와서 성안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에 들어간 자가 매우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현저한 자를 여러 (관군) 장수들이 처치한 것이 200인이다”고 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세번이나 서울 비우고 도주, 인명·재산피해 막심
텅빈 조선인 마을(1904년).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컬렉션]
인조의 두 번째 파천은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발발하면서 1월 26일부터 4월 12일까지 강화도로 피난간 것이다. 요동을 두고 명과 대치하던 후금은 배후지원을 차단하고자 조선을 선제 공격한다. 1월 13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도하한 3만6000명의 후금군은 의주성, 창성부, 능한산성(평북 곽산), 안주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1월 26일 황주에 이어 2월 7일 황해도 평산까지 진군했다. 인조는 강화도 피신을 결정하고 1월 26일 도성을 빠져나갔다. 김포를 경유해 장릉(인조 부모의 묘)에 참배하고 1월 29일 저녁에 강화도 행궁에 도착했다. 유도대장 김상용(1561~1637)은 적병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강화도로 도망쳤다. 그는 비축된 양곡을 적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어고를 비롯한 각 관청의 양곡을 불질렀고 혼란에 빠진 난민들도 선혜청, 호조 창고를 방화했다. 정묘호란은 조선의 정복을 목적으로 한 전쟁은 아니었다. 조선을 겁줘 명나라편에 서지 않도록 경고하려고 했다. 1627년 3월 3일 양국이 강화도에서 정묘조약을 체결하면서 후금 군대는 철수했다. 조약은 양국이 형제관계를 맺고 조선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내용을 담았다. 인조는 3월 12일 경덕궁으로 환궁했다.
마지막 파천은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것이다. 그해 4월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대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명과의 관계 단절, 군신의 맹약을 요구했다. 조선은 거부했다. 12월 2일 청 태종은 12만8000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직접 친정에 나섰다. 마푸타(馬夫大)가 이끄는 청군 선발대가 안주, 평양을 지나 이미 개성까지 도달한 사실을 접한 조정은 14일 강화도 파천을 결정했다. 이때는 이미 청군 일부가 강화도로 가는 길목인 양천강(강서 가양동 공암나루)에 도달한 상태였다. 인조 일행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가 행렬이 구리개(을지로 1·2가 사이 고개)를 넘어 수구문을 나서자 울부짖는 도성민의 피난 행렬과 어지럽게 섞였다. 인조는 신천과 송파강을 건너 초경(저녁 8시 전후)이 지나서야 겨우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청군 선봉은 12월 27일 임진강을 건넜고 29일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 서쪽에 도착했다. 후발대도 쇄도했다. 인조가 떠난 서울은 곧바로 청군 선발대의 수중에 들어갔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급한 대로 백악산과 삼각산 일대로 숨어들었으며 유도대장 심기원도 27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 근교 산지에 잠복했다. 청군도 처음에는 약탈을 자제했다. 조경남(1570~1641)의 <속잡록>은 “적병이 모화관(서대문독립공원)에서 남관왕묘(남산 힐튼호텔)로 와서 주둔하였다. 5~6진영은 성 안에 머무르다가 동대문 밖에 나와 주둔하며 깃발과 칼을 휘두르고 군악으로 떠들어대 사람들을 놀라 당황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중의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침해하지 아니하고 출입 내왕을 전혀 금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소, 말을 보면 빼앗고 어여쁜 여자는 잡아갔다”고 했다.
병자호란때 굶주린 개들이 서울백성들 시신 뜯어먹어···다시는 같은 불행 되풀이 말아야
12월 29일 청 태종이 서울 부근에 도착해 휘하 장수들에게 서울의 조선 군사들을 수색하고, 재물과 가축 등을 약탈하도록 지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 때부터 약탈과 방화, 살육이 본격화됐다.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이 전하는 당시 참상이다. “여염집들은 무너지고 향교동(종로 경운동) 어귀에서부터 좌우에 있는 붓 가게의 행랑과 광통교 주변의 크고 작은 인가들이 모두 타버렸다. 닭, 돼지, 거위, 오리도 전혀 볼 수가 없었고, 단지 개 짖는 소리만이 있었다. (개들이) 사람고기를 먹으며 미쳐서 날뛰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환도직후 호조의 보고에 따르면, 도성에 남은 백성은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70세 이상의 노인뿐이었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굴복시키기 위해 인조의 가족이 피신한 강화도를 친다. 1637년(인조 15) 1월 21일 강화도는 도르곤(多爾袞)이 지휘하는 3만여명의 청군에 의해 단 하루만에 함락된다. 그리고 1월 30일 남염의(監染衣) 차림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면서 고통스러운 전쟁도 막을 내렸다.
우리는 불과 70여년 전에도 서울을 적에게 내준 바 있다. 이제 정말 똑같은 불행이 다시는 없어야겠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송와잡설(이기). 서정일기(西征日記·텐케이). 속잡록(조경남)
2. 조선시대 정치와 한양.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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