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후반의 경북 항일운동에서 인상적인 발자취를 남긴 세 명의 동년배가 있다. 1906년과 1907년에 태어난 박상희·황태성·임종업이 그들이다. 동년배이며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 외에, 세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최후가 비극적이라는 점이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1906~1946)는 20대 초반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선산지부를 이끌었다. 해방 직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구미지부를 책임지게 된 그는 미군정의 친일청산 훼방과 경제정책 실패에 맞서 '대구 10월 항쟁'에 참여했다. 이 일로 인해 경찰의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박상희의 동지이자 조귀분·박상희 부부의 중매자인 황태성(1906~1963)은 구미 서쪽인 김천에서 신간회 지부를 무대로 항일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을 벌였다. 그런 뒤, 건준을 계승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경북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이 됐다.
황태성은 대구 10월 항쟁 때 검거를 피해 월북했다. 이북에서 차관급인 부상(副相)을 지낸 그는 1961년 5·16 쿠데타 뒤에 남하했다. 옛 동지의 동생을 만나 통일 방안을 논의할 목적이었다. 결국 그는 체포돼 사형 집행을 받았다.
임종업(1907~1950)은 황태성의 동생인 독립운동가 황경임(1910~1994)과 결혼했다. 6·10만세운동과 김천 지역 민족운동을 주도한 그는 광복 뒤에 건준 김천군 인민위원장이 됐다. 10월 항쟁 때문에 박상희는 세상을 떠나고 황태성은 북으로 갔지만, 임종업은 남한에 남았다. 그에게는 징역 5년이 선고됐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가석방된 뒤에는 이승만 정권의 사상개조 조직인 국민보도연맹에 억지로 가입했고, 얼마 안 있어 한국전쟁 중에 학살을 당했다.
세 사람은 가까운 데 사는 동년배 항일투사인 데다가 혼맥으로 연결된 사이였다. 그런 이들이 해방 이후에 세 정권에 의해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박상희는 미군정에, 임종업은 이승만 정권에, 황태성은 박정희 정권에 목숨을 빼앗겼다. 일제에 맞섰던 세 사람의 목숨을 미군정·이승만·박정희가 지운 것이다.
임종업은 일제와 어떻게 맞서 싸웠나
▲ 1935년 12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조선공산당 김천그룹 재건협의회 사건 관계인으로 보도된 임종업 (빨간색 박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세 사람 중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임종업은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2년 뒤에 지금의 김천읍 황금동에서 출생했다. 그가 항일운동에서 두각을 보인 것은 열여섯 살 때다.
3·1운동 5년 뒤인 1924년에 중학교급인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3·1운동 뒤에 하나의 현상처럼 번져나간 동맹휴학은 이 시기 학생 항일운동의 주된 방식이었다. 배재고보에서 이 운동을 주도한 일로 인해 임종업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일제 때문에 퇴학을 당한 임종업은 반격을 가했다. 일제를 퇴장시키기 위한 투쟁에 착수한다. 퇴학 2년 뒤인 1926년에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이 되어 있었다. 이때 열여덟 살인 그는 순종황제의 장례일을 기한 6·10만세운동에 참여한다. 국장 행렬이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그는 격문을 배포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훗날 '남부군 사령관'으로 알려질 중앙고보생 이현상(1905~1953)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날 임종업이 배포한 격문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반가워할 단어가 있었다. 윤 대통령이 틈만 나면 강조하는 '자유'가 그 종이에 박혀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중앙고보생 이선호·이병립·이천진·박두종이 작성한 그 격문에 "2천만 동포여, 원수를 구축(驅逐)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알려준다.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된 사람이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임종업은 온몸으로 보여줬다.
임종업은 자유를 알게 됐지만 자유를 수시로 억압당하는 사람이 됐다. 6·10을 계기로 감옥을 수시 출입하게 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집행유예를 받은 그는 1930년에 또다시 검거돼 징역 10개월을 받고, 1932년에도 검거돼 징역 2년을 받고, 1935년 이후에 또 검거돼 징역 2년을 받았다. 감옥을 나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들어가는 일이 되풀이됐다.
23세 때인 1930년에 징역 10월을 받은 일은 그가 무슨 이유로 독립운동을 했는지를 웅변한다. 단순히 일본을 거부하고자 벌인 게 아니었다. 그가 거부한 것은 사상 최악의 인간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였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제국주의를 그냥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위 조사보고서는 그해 1월 10일에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파업한 일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부산 조선방직주식회사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임종업은 신간회 부산지회와 부산합동노동조합에서 활동하던 김시엽 등과 함께 '우리들은 일어섰다', '일본제국주의에 반항하고 그 식민지 착취 정책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격문 200여 장을 작성하여 1.13에 부산 및 조선 각지의 사상단체에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임종업은 부산경찰서에 검거되었고, 1930.2.5에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법원과 검찰청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에 임종업은 제국주의에 맞서 조선방직 파업에 개입했다가 부산지법 검사국에 송치되고 뒤이어 징역형을 받았다.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노동자·농민의 편에 섰던 이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그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항일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그가 1931년에 백낙도·나정운·김창식 등과 함께 결성한 김천그룹은 지역 농민·노동자·청년 운동의 확산에 기여했다. 김천그룹은 1932년의 대대적 검거 작전으로 타격을 받았지만, 1933년에 황태성의 아이디어로 김천그룹재건협의회로 거듭났다. 일제는 1935년에 300여 명의 관련자를 파악한 뒤에야 김천그룹과 김천그룹재건협의회의 존재를 인지하게 됐다. 임종업의 영향력을 가늠케 하는 일이다.
임종업은 해방을 경찰서에서 맞이했다. 일제를 향한 그의 싸움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해방과 함께 남북이 분단된 데다가 친일파의 지배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구 10월항쟁에 나섰다가 징역 5년을 받은 뒤, 1948년에 가석방으로 나오게 됐다.
그의 싸움은 1945년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상만 달라졌을 뿐, 싸움의 성격은 거의 같았다. 그런데 그가 받은 타격은 그 이전과 이후에 크게 달라졌다.
학살당한 독립운동가
▲ 경북 김천 지역 보도연맹 학살지 중 한 곳으로 2003년 5월 유골 등이 발굴된 김천 구성면 돌고개 계곡 입구
ⓒ 오마이뉴스 이승욱
미군정은 그에게 5년 형을 선고했다. 이승만 정권은 한술 더 그를 전향자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시킨 뒤 한국전쟁 직후에 집단 학살을 당하게 만들었다. 1950년 7월 14일, 그는 학살 희생자가 됐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6권은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김천 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의 한 장면을 묘사한다.
"끌려온 보도연맹원들은 5~6명씩 묶여진 채 구덩이 앞에 앉혀진 다음, 헌병이 쏜 총에 맞아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학살이 진행되어 각 구덩이 50여 명, 총 1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경북 지역 항일운동을 이끈 임종업은 일제 지배를 벗어난 뒤 이승만 정권하에서 참변을 당했다. 동년배 동지들인 박상희와 황태성은 각각 미군정과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다.
세 사람은 자신들이 일제가 아닌 다른 권력에 의해 그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강점의 모순이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이처럼 오래 계속되리라고는 예견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들은 공통점이 많다. 위에 언급되지 않은 또 다른 공통분모가 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부가 이들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 사람을 빼놓으면 일제강점기 후반의 경북 항일운동이 제대로 이해되기 힘든데도 국가보훈부는 이를 방치하고 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정확히 구현해 내야 할 책임을 보훈부가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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