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중독된 미국과 힘 잃은 반전평화 운동
'전쟁 기계' 고삐 잡을 수 있는 두 가지 길
민주당 배신으로 정치연대는 물 건너가고
남은 건 반전평화운동인데, 시위·집회 위주
이제는 미래의 큰 그림 그리며 말해야 할 때

“전쟁 밖엔 난 몰라”
미국은 늘 전쟁을 기다리거나 일으키는 국가다. 지난 달 7일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미국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지난 50년 이래 최대 규모의 함대를 지중해 일대로 몰아넣었다. 또 국제적 여론조성을 포함해, 이스라엘에 거액의 돈과 대량 살상무기까지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사실상 하마스와 교전 당사국이다. 한편,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 미군은 지금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이슬람 무장단체와 산발적이지만 자칫 중동 전체로—심지어 3차 세계대전까지도—확대될 수 있는 전투를 벌이는 중이다. 이에 더해 지중해로 집결한 함대 중 일부는 최근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이란 인근 해역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 사이 우크라이나를 내세워 미국이 벌이는 대 러시아 전쟁은 벌써 1년 9개월째다. 바이든이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상을 무산시키지 않았다면 작년 4월에 끝났을 전쟁이다. 한편 미국은 지구적 범위의 대재앙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대만을 이용해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시나리오를 오랫동안 연습해오고 있다. 이 와중에 미 국방장관은 ‘제2의 한국전쟁 대비’라는 명분을 내세워 지난 주 서울에서 6·25 참전국 국방장관 회의를 열고 유엔사령부를 전쟁기구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종합하면 미국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칼을 휘두르거나 벼리는 중이다. 익숙한 전쟁국가 미국의 모습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무수히 많은 국제분쟁에 거의 예외 없이 군사적 방식으로 개입해왔다. 외교는 군사개입을 위한 명분 쌓기인 경우가 더 많았다. 또 15년 정도를 제외하고 건국이후 지금까지 250여 년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크고 작은 전쟁을 해온 나라가 미국이라는 것, 그리고 그 전쟁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잔인한 살육으로 점철되었다는 것 역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나라의 역사다.
전쟁에 중독된 나라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전쟁으로 질주하는 싸움꾼의 정체
지난 2011년 4월, S. 월트 하버드 국제관계학(international relations) 교수는 ‘전쟁에 중독된 미국? Is America Addicted to War?’이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글을 <포린 폴리시>에 발표했다. 깊이 있는 분석이라기보다는 화두를 던지는 차원의 칼럼이다. 비교적 균형 잡힌 현실주의 정치학자인 그가 진단한 다섯 가지 원인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1. Because We Can(우리가 힘이 세거든) 2. The U.S. Has No Serious Enemies(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쟎아) 3. The All-Volunteer Force(우린 싸우려고 군대온 사람들이야) 4. It’s the Establishment, Stupid(군산정언학 복합체, 몰라?) 5. Congress Has Checked Out(의회는 이제 신경 끊었어)”
경제와 군사 두 측면에서 미국은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최강이다. 미국이 품고 있는 패권적 사고방식은, 누구든 우리를 따라야 하고, 누구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는 태도로 이어진다. 뜻대로 하는데 거리낌이 없으니, 전략적 판단, 지정학적 계산, 외교적 역풍 같은 것을 부차적 요소로 취급한다. 특히 막강한 군사력은 마치 ‘망치를 쥐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속담처럼 분쟁이 벌어질 때, 상대를 과녁으로 보게끔 만든다. 둘째, 지원병제 국가 미국에서 정부의 군대운용은 징병제보다 수월하다. 전쟁 선포권 같은 무력동원의 권한도 의회가 사실상 손을 떼면서 대통령의 전결사항처럼 다룬다. 행정부에 대한 견제장치라고는 전쟁에 대한 일반여론 정도뿐이다. 한편, 안보나 국방 분야는 전문영역으로 보수성향 엘리트들이 정책과 여론지형을 주도하고 있다.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사회복지 예산은 까다롭게 다루면서, ‘펜타곤 자본주의(Pentagon capitalism)’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쟁에 쏟아 붓는 예산에는 한없이 관대하다. 전쟁이라는 엄중한 정책이 폐쇄적인 군산정언학 복합체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요약하면, 첫째, 미국이 최강 패권국가라는 인식, 둘째, 폐쇄적인 군사 및 대외정책 결정구조, 즉 군산정언학 복합체, 두 가지로 정리된다.

고장 난 브레이크-취약한 평화운동
미국을 전쟁으로 이끄는 패권국가라는 인식과 군산정언학 복합체, 이 문제를 관통하는 요체는 전쟁을 견제하는 사회적 장치, 즉 반전평화 운동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다. 정리하면 반전평화 운동의 취약성과 패권국 군산정언학 복합체의 힘이 문제의 핵심이다. 패권국가 미국, 그리고 군산정언학 복합체의 힘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고, 여기서는 미국 평화운동의 취약성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베트남 전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전평화 운동은 미국 내 진보적 사회운동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지와 연대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부시정부의 이라크 전쟁 시절에는 제2의 베트남 반전시위라고 할 만큼, 십여만이 넘는 대규모의 시위가 미국 주요 도시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졌었다. 60년대 베트남 반전운동에 비하면 규모의 차이는 크지만 반전평화 운동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영구전쟁 국가’, ‘전쟁기계’, ‘전쟁경제’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사회는 전쟁에 중독돼 가는데 반전평화 운동은 사후적이고 산발적이며, 실제 정책을 바꾸기에는 힘이 모자란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군과 안보 관련 언론통제의 강화, 반전평화 운동의 대응역량 미흡, 반전평화 정치세력의 부재,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 등을 주요인으로 꼽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전쟁여론 조작 문제나 신자유주의 시대 진보운동 전반의 침체 같은 것은 운동의 확산에 부정적인 외부요인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 중독의 요인, 즉 패권국가라는 인식과 군산정언학 복합체에 대한 운동의 대응 역량, 실질적 정책변화를 이뤄내기 위한 정치와의 연대방안, 두 가지로 좁혀진다. 달리 말하면 패권 논리에 맞서는 대안 제시, 복합체에 맞서는 반전평화 정치세력의 활동이다.
이라크 반전운동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당시 운동진영이 제시한 논리는, 이라크 전쟁이 거대한 사기로 시작됐다는 것, 이슬람을 테러집단 정도로 바라보는 고질적 편견, 막대한 민간인 피해라는 비인도적 재난 등이었다. 그러나 대안과 관련하여 보다 본질적인 질문은 ‘미국이 중동(예: 이라크)에서 물러나고 기존의 이슬람 세력(예: 사담 후세인)이 권력을 유지토록 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베트남 반전 운동진영은 미국이 패배하더라도 결과는 (북)베트남으로의 통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승리라는 대안을 당당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라크 반전운동의 경우, 대안의 제시라는 어려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좀 더 부연하면, 반전평화 운동의 문제는 전쟁보다 나은 대안을 대중에게 잘 전달치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이라크의 예를 들면, 후세인 독재타도라는 부시의 전쟁 명분에 맞서, 이라크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이라크의 변화를 왜 미국이 이끌어야 하는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은 일단 차치하고—다른 방법을 제시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부시 정부의 방안과 반전평화 진영의 방안을 상호 명료하게 대비시켜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토록 의제를 설정했어야 했다. 그런데 운동은 전쟁 아니면 평화라는 이분법적 메시지 전달에 치중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의구심을 자아냈다는 것이다. 실천방안이 부족한 조직으로 보일 때 운동이 진전할 수 없음은 불문가지이다.
배신의 정치 또는 반전 정치세력 부재의 문제
이라크 반전운동이 당면했던 또 다른 문제는 미국 사회 진보세력의 현실적 중추(?)인 민주당의 배신, 그리고 반전평화 세력이 당내에 사실상 없다는 것이었다. 반전여론에 힘입어 민주당은 2006년 다수당이 되었다. 2008년 선거에서는 전쟁종식을 내건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의회에서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운동조직은 환호성을 올렸다. 그런데 정작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아프간 전쟁은 오히려 격화됐으며 심지어 리비아 공습까지 이어졌다. 이젠 민주당이 오히려 반전평화 운동의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자 운동은 오바마-민주당 지지와 반대의 딜레마에 빠졌다. 딜레마가 일깨우는 환멸과 배신의 분노 속에서 운동은 길을 잃고 약해졌다. 반전평화 운동은 공화당 반대를 위한 선거전술에 지나지 않았다는 냉소적 비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나 의회가 반전평화 운동을 대하는 행태는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다르지 않다. 선거 국면에서의 전술적 고려 정도를 제외하면, 역대 대통령이나 의원들은 반전평화 시위나 집회의 영향력을 거의 믿지 않았고 그리 큰 관심도 두지 않았다. 반전여론 때문에 존슨은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정작 전쟁 지속파인 H. 험프리가 그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베트남 반전 시위대에 대해 닉슨은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고 응수했고, 부시는 이라크 반전운동에 맞서 ‘지도자는 시위 규모로 정책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전쟁종식 공약을 어겼다는 비판에 대해 ‘현지 상황이 악화되었다’라는 설명으로 답을 회피했다. 지금 미국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스라엘 지원 중단, 가자 지구 정전요구 여론을 바이든은—이 글을 쓰는 11월 22일 현재 시점까지—보란 듯이 외면하고 있다.
전쟁에 중독된 미국 현실정치의 오래고 굳건한 실상이다. 이는 반전평화를 기치로 내걸고 실천하는 체제 내의 정치세력이 미약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아가 인민의 뜻과 유리된 채 작동하는 미국 정치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반전평화 운동은 대중적 지지와 여론형성을 제일 목표로 두고, 시위나 집회와 같은 거리의 정치에 집중해왔다. 그러나 새겨야 할 것은, 반전평화 운동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획이라는 점이다. 전쟁을 피하지 못해온 인류의 역사를 짚어보면 그 의미는 자못 심중하다. 그런 뜻에서 전쟁에 중독된 미국에서 반전평화 운동이 짊어진 과제는 막중하다. 특히 하강국면의 전쟁국가는 위험한 존재이다. 바이든 정부 내의 관리들조차 그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지금은 반전평화 운동이 미국은 물론 세계의 미래에 대해 더 큰 그림을 그리고 말해야 할 시점이다.
오바마의 한계와 실패

지도자가 없는 듯해도 잘 되는 국가. 요순시대의 이상이다. 현실은 그럴 수 없다. 지도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빈곤한 자질과 저급한 품성의 지도자, 또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 유권자의 잘못은 사회를 퇴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다. 다른 경우도 있다. 나름의 역량과 식견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기대와 희망을 감당치 못한 지도자의 한계와 개혁의 실패가 그것이다. 이 역시 반동의 정치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사회를 후퇴시키는 요소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다. 미국은 어떨까? 트럼프가 앞이라면 오바마는 후자에 속하는 가장 최근의 사례이다.
전 세계적 기대 속에 등장한 오바마의 세 가지 실패
“내 생전에 흑인이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2008년 11월. 오바마의 당선에 대해 많은 미국 시민들과 진보인사들은 그렇게 말했다. 당선이 확정된 5일, 기대와 희망을 담은 축하의 집회가 동부에서 서부에 이르는 미국 곳곳의 도시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그날을 ‘희망의 밤’이라고 불렀다. 가수 밥 딜런은 미니애폴리스 공연 중에 오바마의 당선 소식을 전하면서 “이제야 세상이 조금은 달라지리라는 희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부인 미쉘은 흑인을 당선시킨 미국이라는 나라에 드디어 자부심과 애국심을 가지게 됐다고 고백했다.
오바마 지지 열기는 국내적 현상만이 아니었다. 그해 7월 중동에서 유럽까지, 대통령 후보자로 대순방 길에 나선 그에 대한 국제적 환대는 유명 연예인급이었다. 베를린 집회에는 20여 만 명의 군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전쟁과 패권적 일방주의 미국’이 아니라 ‘신뢰와 협력의 미국과 세계’를 외치는 장래 지도자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취임식이 열린 2009년 1월 20일, 의사당에서 워싱턴 모뉴먼트를 지나 링컨 기념관에 이르는 내셔널 몰은 200여 만의 군중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러나 2017년 1월 퇴임하기까지 두 번의 임기를 거치는 동안, 변화와 희망의 기수로 나섰던 오바마는 국내외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대통령 당선뿐 아니라 하원과 상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으로 올라선 2008년 선거의 정치적 대반전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당선 이후 2010, 2012, 2014, 2016년 이어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것을 제외하면, 민주당은 하원에서는 매번 졌고-패배의 규모 또한 역대급-2014년과 2016년에는 상원의 다수당 지위마저 잃었으며, 정권은 결국 트럼프로 넘어갔다. 같은 기간 연방뿐 아니라 주지사와 주 의회 선거를 합할 경우 낙선한 민주당 정치인은 무려 1000여 명이 넘었다. 50년대 아이젠하워 정부 이래 역대 어느 대통령 임기 중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트럼프의 등장에 오바마의 책임은 결코 작지 않다.” 2017년 1월,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학 교수를 역임한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C. 웨스트는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그렇게 탄식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와 관련, 오바마의 한계 또는 실패를 드러내주는 세 가지 대표적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는 유권자들이 오바마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첫 번째이자 결정적 계기인 금융공황사태 대처, 두 번째는 본인 스스로 가장 큰 대외정책 실패라고 말한 리비아 군사개입. 세 번째는 인종갈등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소극적 대처.
1. 양쪽으로부터 비판받은 금융위기 대책
20세기의 대공황에 버금가는 금융공황이 80여 년의 시차를 두고 21세기에 터졌다. 2007-8년 부시 정부 말기에 벌어지면서 대책의 실질적 집행과 추가조처는 오바마 정부의 몫이 됐다. 공황은 부동산 시장에서 시작했다. 1998년부터 10여 년간 부동산 가격이 연이어 급등했다. 개인도, 국내외 은행도, 투자회사도 뛰어들었다. 2007년 들어 집값이 폭락하자 담보 이자율은 치솟았고 대출상환 불능 및 주택 압류사태가 폭증했다. 담보증권의 가치 역시 끝 모르게 추락했다. 개인이든 기관이든 투자자는 모두 파산했거나 파산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부채에 시달리던 유럽의 몇몇 나라(예: 그리스)는 국가부도 위기까지 몰렸다.
정부의 대책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구제금융을 통한 금융기관 파산위기 해소와 개인 피해자 구제, 둘째는 경기 활성화, 셋째는 금융규제 개혁. 모두 긴급입법을 통해 마련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구제금융 조처는 사태의 주범인 대형은행에 집중됐다. 중소지역 은행과 개인 투자자들은 사실상 배제됐다. 돈을 쏟아부었으나 경기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투기행위를 금지하는 금융개혁 법안은 은행의 반발과 소송에 부딪치면서 거의 사문화됐다. 금융기업인 누구도 체포되지 않았고 부시 정부의 부자감세 정책도 그대로 유지했다. 여론의 반발은 극심해졌다. 2010년 8월, 오바마의 지지율은 취임 시점 대비 절반 정도인 41%로 추락했다. 좌파는 오큐파이 운동으로, 우파는 티파티 운동으로 뭉쳤다. 오큐파이로부터는 ‘1%를 위한 정부’라는 비판을, 티파티로부터는 투자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다. 오바마에 대한 지지자들의 실망과 배신감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2. 대책없이 중동 혼란만 키운 리비아 개입
리비아 개입 실패: 2016년 4월, 오바마는 Fox뉴스와의 인터뷰에서 2011년의 리비아 군사개입이 자신이 저지른 최악의 실책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가다피 이후의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2010년 12월부터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빈곤과 부패,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는 시위사태가 벌어졌다.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투쟁이었다. 봄은 2011년 2월 리비아로도 확산되었다. 40여 년 독재체제를 이어온 가다피 정부도 흔들렸지만, 이집트나 튀니지처럼 정권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고,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시위대와 정부 간의 대립도 다른 나라에 비해 소규모였다. 반군은 사태해결을 위한 가다피의 대화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자 미국과 나토는 ‘민간인 학살’ 방지를 명분으로 2011년 3월 UN 안보리의 제재조처를 끌어냈고 리비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전쟁도 채 끝나기 전이었다.
가다피는 미국과 서방에 사태해결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다시 거절당했다. 미국과 서방의 목표는 ‘인명보호 차원의 개입’이 아니라 실은 ‘가디피 축출’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습과 반군을 피해 달아나던 가다피는 결국 그해 10월 자신의 고향 시르테에서 체포됐고 잔혹하게 처형됐다. 가다피 정권은 몰락했다. 이후 들어선 것은 새 정부가 아니었다. 무정부상태의 혼란과 지역 반군 간의 분쟁, 이슬람 테러집단의 조직과 확산이었다. 민간인 살상도 멈추지 않았다. 국제앰네스티는 민간인 살상은 공습과 함께 반군에 더 큰 책임이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후 리비아는 두 번에 걸친 참혹한 내전을 치렀고 결국 동서로 나뉜 분단국가가 되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개입할 이유가 없는 나라에 거짓 명분으로 개입, 국가를 망가뜨린 것, 그것이 오바마의 실책이었다.

3. 더 깊어진 미국의 인종갈등
2009년 4월, 오바마 취임 100일을 맞아 인종관계의 분위기를 묻는 뉴욕타임스/CBS 여론조사에서 긍정적 답변이 2/3 이상이었다. 그러나 2016년의 같은 조사에서는 반대로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악화되었다고 답했다. 흑인 대통령 시대에 인종갈등이 오히려 심해진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경찰폭력 사태이다. 총이나 기타 물리력에 의한 경찰의 ‘인명살해(police killing)’는 매년 평균 1000건이 넘는다. 사망자의 절대 수로는 백인이 많지만 인구 비율로 볼 때 흑인은 백인보다 3배 이상 더 많이 죽는다. 그럼에도 정당방위라거나 공무집행 중이었다는 이유로 98%의 경찰은 무죄처분을 받는다. 흑인의 입장에서 경찰폭력은 ‘백인경찰의 흑인살해’ 사태인 셈이다. ‘흑인 편들기’라는 비난을 원치 않는 오바마 정부의 소극적 대처도 갈등을 키웠다.
2012년부터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경찰에 의한 흑인살해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고 주요 도시에서는 그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와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언론은 1992년 LA 폭동사태 이후 흑인사회의 분노가 이토록 살벌한 것은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우리의 소중한 목숨’이라는 뜻을 담은 ‘Black Lives Matter(약칭 BLM)’라는 사회운동 조직이 이즈음 만들어졌다. 앞서 인용한 뉴욕타임스/CBS 조사에서 ‘인종관계가 실제로 좋아졌는가’라는 물음에 백인의 23%, 흑인의 32%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음울한 징후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사회통합을 강조해온 오바마는 모두에게 흑백 간의 대립적 사고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깊게 뿌리내린 백인종주의 미국의 현실 앞에서 구체적 대책이 결여된 통합의 논리는 매우 순진한 관점이었다.

‘개혁의 실천’에 취약한 정치인
2008년의 선거는 오바마에게 정치적 반대를 넘어설 수 있는 제도적, 사회적 환경을 확보해주었다. 그런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존의 워싱턴 당파정치를 넘어설 진정성과 열정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의 가슴을 흔든 ‘희망과 변화’라는 오바마 선거공약의 핵심은 그것이었다. 그는 한 사람의 정치인을 넘어 거대한 사회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오바마와 민주당은 그 열망을 받아 안지 못했다. 물론 무조건 반대로 일관한 극우 공화당의 방해전술에 기인한 바도 크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볼 때, 오바마는 ‘개혁의 언어’에는 강하지만 ‘개혁의 실천’에는 취약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초선 상원의원으로 대선에 출마 당선됐다. 워싱턴의 경험은 물론 정치적 자산이 일천하다. 오바마의 선거조직도 선거에 집중하면서 그와 당의 외연을 확장하는 정치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내각구성에서도 그는 상당 부분 클린턴 인맥에 의존했다. 참모들은 ‘클린턴 관료(apparatchik)’라고 불릴 정도였다. 왜 클린턴(국무장관 H. 클린턴)을 기용했는가라는 질문에 ‘최선의 인물이라는 자신의 믿음’이라고 답했다. 바이든 부통령에 대해서도 ‘전쟁을 누구보다 잘 마무리할 것 같은 생각에서’라고 답했다. 경제노선에 대해서도 오바마는 중도 나아가 중도우파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경제자문이나 각료들은 월가의 인물이었고 금융기업들은 그의 주요한 정치후원 집단이었다. 오바마가 금융개혁 과제에 대해 ‘자칫 자본시장의 균열과 붕괴를 가져오고 경제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소극적이었던 배경의 하나였다.

한편 민주당의 이념은 자유주의라고 볼 수 있으며 그만큼 사회복지 정책을 공화당보다는 중시하는 정당이다. 그 때문에 종종 ‘인민의 당(party of the people)’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좌-우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유럽의 정치지형에 비하면 중도우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공화당과도 국내 사회정책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에서는 자본-기업 친화적 보수정당이다. 대외정책에서도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앞선 이라크 전쟁이 보여주듯, 민주당과 공화당은 방점의 차이일 뿐, 모두 미국 우선주의 정당이다. 사실 민주당의 이미지, 즉 뉴딜 루스벨트 시대의 리버럴이 상징하는 강한 자유주의적 개혁정당으로서의 민주당은 신보수-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세력이 주도하는 1980년 레이건 치세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후 민주당(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은 신보수·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지배 속에서 지속적으로 우경화의 길을 걸어왔다.
‘선량한 의지와 지성’이 우경화된 정치지형에서 무얼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바마는 흑인 정치인으로 최고의 도전과 성취를 이뤄냈다. 실제보다 이미지가 더 부각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재임 기간 달성한 의료보험의 확대, 쿠바 이란과 이룬 외교적 성과 등은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통령으로서의 전반적 평가도 높은 편이다. 공영 케이블 방송사 C-SPAN의 2022년 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10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도 그를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정치가 스스로와 소속 정당의 보수적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나름의 역량과 품격, 선량한 의지와 지성을 겸비한 오바마 같은 정치인의 한계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한계-보수적, 자본주의적, 친기업적, 미국 중심의 제국적 전통-를 드러내 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미국의 미래를 현재의 정치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년의 대선과 총선도 연례행사 수준에 그칠 것이다. 새롭고 역량 있는 지도자의 배출은커녕 비슷한 과거의 반복이거나 더 악화될 가능성도 크다. 안타깝지만, 미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지금과 같은 불안한-아니 더 불안한-정세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우크라이나 딜레마에 빠진 바이든의 군사주의

지금 미국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큰 이유 중 하나는 바이든이 취해온 대러시아 군사주의 노선의 부정적 파장, 즉 우크라이나(이하 우크라) 전쟁의 지정·지경학적 역풍 때문이다.
전쟁 1년 반여. 러시아의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우세가 가시화하고 있다. 바그너 용병대장 프리고진의 난동이 있었지만, 하루 만에 정리됐다. 서방의 바람(?)과 달리 국내정세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미국의 전쟁 대리인 우크라는 병참부터 전술, 전략에서 내려앉는 중이다. 오래전부터 예고했던 반격은 4주 차 만에 자신의 더 큰 피해로 이어졌고 지금은 사실상 중단상태다. 미국이 동원한 경제제재는 오히려 러시아 국내산업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또 이전보다 에너지 교역 루트를 확장하면서 러시아 경제는 그만큼 안정화되었다. 한편 다른 나라들은 브릭스나 상하이 협력기구 등의 조직을 키우고 협력을 강화하면서 미국을 건너뛰는 국제 질서를 조직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이들 간의 독자적 금융결제 시스템을 가동하거나 확대방안을 논의하면서 미국의 버팀목이던 달러패권도 점차 약해지고 있다.

이 같은 국제 질서의 변동상황에서 위축·고립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쪽은 러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다. 최근 인도에 거의 모든 것을 내어준 미국 외교가 그것을 보여준다. 바이든의 대러시아 군사주의 전략이 위기에 빠진 것이다. 이는 그의 재선 가도뿐 아니라 미국으로서도 위험신호다. 그 때문에 바이든이 더 큰 군사적 도박을 감행할 우려도 적지 않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위태로운 지경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계속 지도자 노릇을 하겠다며 나섰다. 민주당은 그를 내년의 대선 후보로 이미 굳혔다. 이런 사정은 트럼프가 가장 앞서가는 공화당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민주, 공화 양당 모두 다른 지도자를 내세우지 못한다. 유권자도 미국 사회도 다른 정치적 선택지 없이 대내외적 모순을 격화시킨 인물들을 다시 맞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바이든의 군사주의
군사주의는 ‘국제문제를 군사적 관점 위주로 해석하면서 무력개입 이외의 외교적 해결노선을 폄하하거나 외면하는 사고’를 뜻한다. 바이든은 이미지와 달리 수십 년 정치경력 동안 강경노선에 기울어 있었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대외정책팀은 네오콘과 강경 자유주의자 일색이다. 바이든은 특히 우크라 상황에도 직접 연결되어 있다. 2014년 오바마 정부 시절, 마이단 쿠데타에 국무부의 뉼란드 차관이 직접 개입했고 거기에 바이든이 관련돼 있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난 바 있다. 마이단 쿠데타는 이후 우크라가 벌인 돈바스 내전의 시작점이고, 돈바스 내전은 러시아와의 전쟁까지도 염두에 둔 도발이었다. 이 모든 과정에 미국의 직·간접적 지원이 크게 작용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바이든의 우크라 개입 논리는 무엇일까? 요약하면 ‘도미노 이론’이다.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이라거나, 규칙질서·가치동맹에 대한 도전이니 말하지만 쉽게 말하면 도미노 이론이다. ‘우크라에서 러시아를 막지 않는다면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이 유럽은 물론 세계정복에 나선다는 것’이다. 냉전시대에나 통할 법한, 아니 그 시대에서조차 허황한 논리로 판명된 낡은 사고방식이다.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미국은 우크라에 엄청난 규모의 재정 및 군사 무기를 지원했다. 그런데도 상황은 더 나빠졌다. 그러자 미국은 열화 우라늄탄(소형 핵폭탄)에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지원까지 언급하고 나섰다. 이젠 아예 F-16 전투기까지 제공하겠다고 한다. 제대로 된 공항도 없고 훈련된 조종사도, 유지보수 인력도 사실상 없는 우크라가 F-16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미국산 전투기가—조종사가 누가 될진 모르지만—나토 공군기지에서 출격, 러시아군과 영토를 공격하는 양상으로 전개될 텐데, 바이든은 그것이 나토의 대러 선전포고이고, 곧 3차대전을 의미한다며 스스로 불가하다고 했었다. 그 말은 이제 뒤집혔다. 바이든의 군사적 도박이 이렇게 실행된다면 그 파장은 인류 전체의 생존과 직결될 수도 있다.
미국이 우크라에 개입한 이유 중 하나는 우크라를 나토 회원국으로 만들고 거기에 미군을 주둔시켜 러시아를 전략적으로 억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풍부하게 매장돼 있는 우크라의 천연가스, 철광석, 석탄, 희귀금속 자원 등도 노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우크라 전황이 드러내 준 것은 현재 미국의 역량과 전략으로는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 물러서기에 미국은 너무 멀리 지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강경 네오콘 국무부와 현실주의 국방부 사이의 대립 이야기가 나오는 지금 바이든의 미국은 진퇴양난이다.
군사주의의 기원과 교조화
그러나 적대적 군사주의 노선의 책임을 바이든과 주변의 강경파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왜? 바이든이나 네오콘은 군사주의 국가 미국의 역사 중 최근에 나타난 인물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나라’라는 카터 대통령의 자기비판이 말해주듯 미국은 본래부터 그런 뿌리에서 성장한 나라이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미국엔 강한 반군사주의 전통도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건국 당시 미국에서는 군의 성격과 규모, 구성을 규정한 헌법 조항을 두고 큰 논란이 벌어졌었다. 논란의 요체는 필요할 때 군을 조직하고 늘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평화기에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폭군을 불러올 우려가 있으므로 의회의 견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남북전쟁이 끝나자 백만 병력에 이르던 연방군은 1년 만에 5만 7000명 수준으로 대폭 축소되었고 이후 3만 규모로 다시 낮아졌다. 480만 규모의 1차대전 시기 미군도 전후 75만으로 줄었으며, 800만에 이르던 2차대전의 미군 역시 전후 2년 만에 90만으로 감축되었다.
그러나 전후 대소련 봉쇄를 핵심 노선으로 하는 냉전 경쟁체제에 들어서면서 이런 전통은 사라졌다. 봉쇄정책의 구체적 실천방안은 해외 곳곳에 미군을 ‘전진배치(Forward Strategy)’, 즉 기지를 건설하고 소련과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 안보라는 개념은 이제 법이 정한 영토의 방위 차원을 넘어, 지구적 범위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군대를 유지하고 최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압도적 군사력 추구의 논리로 확장되었다. 상비조직으로서의 군은 더욱 커졌고 그와 함께 군산복합체도 성장했다.

194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 대략 800여 개의 미군기지가 퍼져있다. 지구적 범위로 이뤄지는 힘의 투사는 소련 억제라는 좁은 명분을 넘어, ‘세계의 경찰’ 또는 ‘팍스 아메리카나’로 치장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필요할 때 언제 어느 곳에든 신속하게 무장병력을 배치, 미국식 질서와 가치를 강제하는 제국의 구현이었다.
이런 군사주의 노선은 냉전 이후 오히려 강화된다. 예전의 전통이라면 냉전의 종식은 군 규모와 기지의 대폭 축소, 냉전조직(예: 나토, 안보조약 체제 등)의 재구성, 다자주의적 평화의 길로 이어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1990년 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미군은 7개월여 만에 압도적이고 신속한 승리를 거둔다. 미국의 힘과 미군의 역량, 그리고 강력한 군대의 효과가 입증된(?) 것이다. 연이어 아프간, 보스니아, 소말리아,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했고 2001년 9/11 테러사태는 무질서한 세계의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런 배경에서 세계 유일의 강자인 미국에 책임과 사명이 주어졌다는 논리가 힘을 얻기 시작한다. 일극패권 유지와 확대라는 노선은 드디어 탄탄대로를 걷는다. 네오콘 지배시대가 온 것이다.
냉전체제가 종막을 고할 무렵, 레이건은 미국은 이제 “세계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권력”이라고 외쳤다. 이후 클린턴은 “민주적 자본주의라는 미국의 비전 이외에 더 이상의 대안은 없다”고 기염을 토했다. 전체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승리로 역사는 막을 내렸으며 이제 지향해야 할 목표는 미국이 지도하는 ‘자유, 민주, 그리고 자본주의의 세계’이다. 미군의 사명은 그 비전을 따르지 않거나 방해하는 집단을 막아내고 필요하다면 가혹한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바이든은 이를 이어받아 ‘규칙질서’니 ‘가치동맹’을 내세우면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중국과 갈등을 일으키는 중이다.
군사주의 판타지

1999년 11월, 아들 부시는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강한 패권 대신 위대함을, 화려한 영광 대신 정의의 길을 택한 나라이다.” 미국이 정의로운 나라인가? 역사는 부시의 발언을 반박할 무수한 증거와 사례로 차고 넘친다. 2022년 3월, 바이든은 우크라 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자유와 억압, 규칙질서와 힘의 질서 사이의 격돌이다.” 기원과 배경을 따져보면 우크라 전쟁은 자유와 민주를 위한 투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전쟁은 미국의 도발과 러시아의 대응이 맞선 지정학적 갈등의 산물이다.
사실을 벗어난 수사는 판타지다. 부시의 발언이 ‘미국 판타지’라면 바이든의 주장은 ‘우크라 판타지’이다. 바이든 정부와 군대, 주류 정치인과 정당, 로비조직, 이익단체, 군수기업, 씽크탱크, 주류 언론, 이들은 모두 그런 판타지를 생산하고 유통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판타지는 ‘러시아 가해자—우크라 피해자’, ‘푸틴 악마—젤렌스키 용사’, ‘러시아 패배—우크라 승리’ 같은 내러티브다. 가짜와 거짓이 사실과 진실을 압도한다. 문제는 타자를 대상으로 하는 판타지에 자신들도 속아 넘어간다는 것이다. 자기기만의 최정점 중 하나는 발트해 가스관 폭파 테러 책임을 우크라에 전가한 작태다. 미국과 유럽국가 주류사회의 누구도 진실을 묻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도 진실을 모르게 되거나 자기가 만든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게 된다.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 미로 속에서 이들은 길을 잃고 해결의 경로는 멀어진다.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의로운 나라 미국이라는 판타지의 바탕에는 ‘미국과 반미국’이라는 적대적 세계관이 놓여있다. 반미국의 세계에는 국가(예: 러시아, 중국)부터 테러조직(예: 알카에다), 이데올로기(예: 공산주의, 사회주의), 종교(예: 이슬람)까지 존재한다. 적대적 세계관은 냉전 시기부터 본격화되고 90년대를 지나며 매우 급진화한다. 예방전쟁을 통해 반미국 분자들을 제거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강제이식하는 것이 세계의 평화와 번영, 자유를 앞당기는 길이라는 부시 네오콘의 논리가 그것이다. 바이든의 군사주의는 여기에 맞닿아 있다. 그것이 지금 우크라 전쟁이라는 암초를 만난 것이다. 적대적 세계관에 기초한 군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미국은 딜레마에서 헤어나오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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