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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점령군을 점령군이라 부르지 못하는 비극

by 무궁화9719 2022. 9. 15.
 

점령군을 점령군이라 부르지 못하는 비극

[점령군 논란에 부쳐] 75년 지나도 반복되는 오해... 미 국립문서보관소 뒤진 학자로서 말하자면

21.07.08 07:25l최종 업데이트 21.07.08 07:25l

이길상(leegs510)

 

세상의 많은 비극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1945년 9월 8일 오전 인천에 상륙하는 미 육군과 조선인 사이의 오해에서 시작된 비극은 75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반복되고 있다. 75년 전엔 미국과 한국 사이의 오해였다면, 지금은 대한민국 사람들 사이의 오해라는 것이 차이면 차이다. 오해의 당사자는 변했지만 비극의 양과 질에서는 차이가 없다. 점령군을 점령군이라 인식하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려 하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선언, 9월 2일 항복문서 서명에 이어 9월 7일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태평양 사령관 이름으로 '조선주민에 포고함'이라는 제목의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한다. 포고령 제1조는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거해 본관 휘하의 군대는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이라고 명기했다. 같은 날 발표된 포고령 제2호는 "점령군의 보존을 도모하고 점령지역의 공중치안,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점령군의 목적이며 이를 위반하거나 "적대 행위를 하는 자"는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할 것을 준엄하게 알렸다.

점령군, 점령지
 

  미 육군 24군단 선발대가 서울에 입성하자 시민들이환영하고 있다(1945. 9.)
ⓒ NARA/박도 관련사진보기

 
미군 스스로 자신들을 점령군(occuppying force)으로, 자신들이 지배할 곳을 점령지(occupied area)로 불렀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마지막 3년 동안 적이었던 일본의 지배 지역 중 하나인 조선 땅에 들어오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인식이었다. 비록 항복은 이뤄졌으나 조선 땅에는 여전히 일본군과 경찰이 존재했고, 일본인 공무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듬해 2월까지 일본인들 중 일부가 미군정을 돕기 위해 남아 있었던 것도, 해방된 나라의 관보가 여전히 패전국 일본어로 발행된 것 또한 미국의 결정이었다.

 

미 24군은 인천 상륙에 앞서서 어떤 군중집회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렸다. 그들에게 순수 일본인이나 일본의 지배 아래 일본의 신민으로 연합국에 대항했던 조선인들은, 적대국의 일부였다. 비록 조선인들 중 일본에 대항하던 저항단체나 임시정부가 있었지만 그들은 이들의 존재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조선 사람들의 오해였다. 조선 사람들은 비록 해방 직전 몇 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 요청을 지속적으로 거부했던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지속적으로 반대했던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개항 이후 늘 조선보다는 일본을 중요시하던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을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으로 생각했다. 미군 스스로는 점령군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공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이들을 해방군으로 여겼다.
  
1945년 9월 8일 오전 8시 30분 존 하지 미국 제10군 제24군단이 상륙하는 인천에 환영 인파가 몰려들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었다. 최근 목격한 태극기부대의 모습이었다. 환영 인파 중 일부가 당시 미국의 위탁으로 한반도 남쪽의 치안을 맞고 있던 일본 군경이 설정해 놓은 경계선을 넘었다. 일본 군경의 발포로 2명의 조선인이 사망하고 9명이 총상을 입었다. 해방된 지 23일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진 비극이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발포에 대해 어떤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채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로 진군했고, 이튿날 하지장군은 총독부 건물에 걸려 있던 일장기를 성조기로 바꾸어 다는 동시에 조선반도 남쪽에 대한 미국 군대에 의한 직접통치(군정) 실시를 발표했다.

유식과 무식
 

▲  1일 대선출마 선언 후 고향인 경북 안동을 방문한 이재명 경기지사가 안동시 도산면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해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가 선물한 이육사 시집을 들어 보이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점령군은 스스로를 점령군이라 부르고, 그렇게 행동했지만 우리는 그들을 해방군이라 오해하고 환영했던 75년 전의 비극은 당시에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이후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당시에는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상호 오해를 했다면 지금은 우리 혼자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작지만 의미 있는 차이이기는 하다. 반복되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반복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 몇 가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1945년 종전과 동시에 남쪽과 북쪽에 들어온 미군도 소련군도 '점령군'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이미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보다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일정 기간의 군사적 지배를 합의하고 들어왔다는 측면에서, 스스로를 점령군이라고 솔직하게 부르든, 해방군이라고 미화화든, 점령군이란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명칭이 아니라 본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점령군이었다는 것은 이후에 이들이 남과 북에서 취한 행동을 보면 명약관화하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신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친미, 친소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측면에서 이들 두 나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본질에 충실했다. 세상에 더 나은 제국주의, 더 나쁜 제국주의는 없다. 힘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타민족을 지배하는 제국주의는 그냥 제국주의일 뿐 거기에 선한 제국주의와 악한 제국주의의 구분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피식민지 민족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둘째, 점령 뒤 이들 군대의 성격이 점령군에서 주둔군으로의 전환했다는 것(미국)과 점령군에서 군사자문단(소련)으로 변환했다는 것 사이에도 큰 차이는 없다. 미국은 섣부른 군대 철수로 야기한 한국전쟁을 겪으며 주둔을 장기화해 현재에 이르고 있고, 소련은 미국의 방심을 틈타 시도한 한반도 공산화 시도가 실패한 뒤 중국 등 경쟁국 등장으로 군사적 영향을 유보해 왔다는 정도의 차이뿐이다. 침략을 당한 대한민국은 전시에 대비해 작전권을 포기한 반면, 침략을 감행한 북한은 여전히 전쟁에 대비해 전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셋째, 역사 이야기에서 관점의 차이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무식이 존중받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역사에서 사실과 해석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무식과 유식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인정해야 할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유식이라면, 인정해야 할 사실에 눈감은 채 자신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무식이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던 민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한반도를 분할해 남과 북에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군이었던 것은 그들도 인정하는 사실이고, 당시 모든 문서에 표기된 역사적 사실 기록이다. 이렇게 들어온 점령군 미군과 소련군이 이후에 남과 북의 발전과 한반도 평화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역사 해석의 다양성은 최대한 인정돼야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해석을 강요하는 것은 존경받지 못할 무식일 뿐이다.

안타까운 착각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오찬 회동을 위해 7일 서울 종로구 한 중식당에 들어서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관련사진보기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 점령을 해방으로 보는 그릇된 시각을 만들어낸 것은 종전 당시 미국과 소련이 이타적 국가라는 착각, 이들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게 불가피했다는 착각, 이들의 점령이 선의의 결과였다는 남쪽의 친미 정치인들-북쪽의 친소 정치인들이 갖고 있던 착각의 결과였다. 미국과 소련은 이미 2차 세계대전 중에 이뤄진 몇 차례의 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한 즉각적인 독립을 인정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으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국가들이다.

잘 알려진 대로 1943년의 카이로회담에서 선언한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독립시키겠다는 약속 자체가 즉각적인 독립의 불가함을 선언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능한 한 빠른 시일에" 혹은 "즉시" 독립을 시킨다는 착한 뜻으로 오해한 것이 당시 한국의 정치인들이었다. 좌와 우의 구분이 없었다. 사실에 기반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희망에 매달린 확증편향이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과 북 분할 점령 의지를 명확하게 선언했던 1945년 2월 얄타회담 이전에도 분할 점령은 이미 정해진 방향이었다. 전쟁 중에 전후 패전국 지배 영토에 대한 통치 방향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에서 만든 다양한 비밀 정책 보고서들에는 분할 점령의 의도가 이미 명료히 드러나 있었다. 그 한 예가 미국의 대외관계심의위(Council on Foreign Relations)가 수행한 한국 정책보고서 'The Problem of Constituting an Independent Political Regime in Korea(한국의 독립 정치 체제 구축 문제)'이다.

1944년 5월 22일 자로 발표한 이 보고서는 미국 등 연합국이 종전 1년 3개월 전인 당시 일본의 조기 항복 가능성을 인지하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고서에는 명확하게 "한국에 어떤 형태의 독립정부도 세워져서는 안 되며, 한반도는 전후 일본 관리의 목적을 위해 군사지대화시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점령군의 구성에 관해서 이 보고서는 한 나라의 단독 점령은 연합국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불가능하고, 연합국 군대의 공동 지배는 연합국 간의 협조체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려움이 예상되고, 가장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것은 두 나라에 의한 분할 점령이라는 것과 소련과의 분할 점령이 미국의 국익이나 조선인들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정책 방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이미 점령을 준비 중이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수년간 자료를 찾아 연구했던 필자 경험에 의하면, 이 보고서 이외에도 미국은 종전 훨씬 이전부터 점령 예정지역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한국도 당연히 대상 지역 중 하나였다. 대표적 문서로써 카이로회담 전인 1943년 6월 전쟁성 일반참모부 군정보처에서 'Survey of Korea'라는 한국 통치 준비자료를 만들었고,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에는 한국에 관한 육군과 해군 공동종합보고서 '한반도의 군사적, 전술적 자료를 담은 정보조사서(JANIS 75)'를 완성해 점령 준비를 체계적으로 한 바 있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미군 장교와 군정 관계자들은 이들 문서로 군정 훈련을 받은 후에 입국을 했다. 이들 문서에서는 공통적으로 한국인들의 교육 수준이 높고, 사회 현실은 안정적이어서 충분히 자치능력이 있다는 점과 이들이 자치와 독립을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의 통치자들이나 외교전문가 집단은 즉각적인 자치나 독립의 부여는 미국의 이익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36년간 제국주의 지배로 신음한 한국인들의 기대나 희망보다는 자국 이익을 위해 군사적 점령을 선택한 미국, 그 이익을 힘으로 관철하려 들어온 미군이 점령군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군정은 점령군이 펴는 통치 형태이지 해방군이 주는 시혜의 결과일 수는 없다. 두 번째 한국 주재 미군정 장관이던 러치가 당시 한국 언론인들과 한 기자회견에서, 민주적 의사결정을 요구하는 한국 기자에게 "세상에 민주적인 군정은 없다"고 대답한 것은 곱씹어볼 만하다.

군정에 민주주의를 기대하던 군정 당시의 한국 기자와, 점령군을 '해방군'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현 정치인들이 다르지 않다. 역사적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알고도 외면하고 싶은 심리가 동일한 것이다.

제대로 모르거나, 알고도 외면하고 싶거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장에서 맥아더와 나란히 선 이승만 대통령(1948. 8. 15.).
ⓒ NARA(미국 국립문서보관청) / 박도 관련사진보기

 
한때 대한민국 교과서나 언론에서 대한민국을 '중진국'이라고 표현했다. 없는 표현이지만 우리 스스로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작위적 표현이었다. 현실은 개발도상국이었지만 중진국이라고 칭하고 싶은 욕구가 크던 시절이었다. 그 욕구가 현실과 충돌하며 생긴 것이 1990년대 말 경제위기였다. 여러 해 전부터 많은 나라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불렀고, 최근에는 국제기구(유엔무역개발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긍정적 변화를 외면하거나, 그 의미를 폄훼하고자 하는 심리를 내보이는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있고, 이들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는 반복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75년 전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착각한 무식함과 의존 심리가 비극적인 전쟁을 무방비 상태에서 맞이하게 했다. 지금도 한국 안에는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자랑하면서도, 독립국의 필요조건인 전시작전권의 부재를 당연한 것처럼 착각하는 무식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75년 전에 점령군으로 나타났던 미군이다. 이들이 5년 후에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도왔다. 이들이 주둔해 안보를 책임진 덕에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임과 마찬가지로, 이들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이 땅에 들어왔었다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이는 되새겨야 할 역사, 반복하지 말아야 할 역사이지 숨기거나 외면하거나 부끄러워해야 할 역사는 아니다. 이 땅에서 벌어졌던 비극도 희극도, 수치도 영광도 모두 함께 되새기고 책임져야 할 우리 역사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길상씨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leegs@aks.ac.kr).

 

해방군·점령군의 역사적 사실

등록 :2021-07-07 16:13수정 :2021-07-08 02:04

 

왜냐면

 

박종수 ㅣ 전 주러시아 공사

 

김원웅 광복회장과 이재명 경기지사의 ‘미군은 점령군’ 발언이 일파만파다. 대선주자들은 ‘황당무계 망언’, ‘통진당식 역사 왜곡’이라며 쟁점화하고 있다. 대선정국으로 접어들면서 구태의연한 이념논쟁과 낯뜨거운 색깔론이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소련군은 해방군이었는가? 역사의 시계추를 76년 전으로 돌려본다. 소련은 1945년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8월9일 두만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8월16일 서울에 당도했다. 시민들이 그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이것이 광복이었다.

 

미국은 당황했다. 소련군이 그렇게 빨리 내려올 줄 몰랐다. 서둘러 38선 분할을 제안했다. 소련은 흔쾌히 동의하고 다시 북으로 퇴각했다. 미국은 남한지역 점령을 보장받은 상태에서 소련보다 1개월 늦게 한반도에 진주했다. 이것이 분단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외교전략은 소련을 끌어들여 일본을 협공하는 것이었다. 일본 본토 상륙작전보다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희생이 더 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미국의 끈질긴 설득으로 대일전에 참전했다. 1963명이 희생된 소련군은 일제로부터 한반도 해방을 위해 피 흘린 유일한 외국군대로 기록됐다.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일제 잔재 청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일본군, 경찰과 고위관리들을 모두 억류하고 철저한 일본 세력 일소를 꾀했다.

 

소련은 해방의 은인이었지만 미국과 함께 분단의 장본국이었다. 초기에 그들은 마치 점령군처럼 행세했다. 여성들을 겁탈하고 주민 재산을 약탈했다. 발전설비도 뜯어갔다. 조만식은 치스차코프에게 “점령군이요, 해방군이요?” 따졌다. 마침내 스탈린은 “주민들을 괴롭히는 군인을 즉시 총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원산과 함흥에서만 소련군 20여명이 총살됐다. 짐승처럼 날뛰던 소련 병사들은 사령부에서 발급한 구매전표를 들고 정당한 고객으로 변신했다.

 

미국은 점령군이었는가? 남한지역에서 맥아더는 9월7일자 포고령에서 38선 이남을 점령할 것(will occupy)이라고 기술했고 스스로도 ‘점령군’(the occupying forces)이라 칭했다. 하지는 진주 후 일제 총독부의 행정권을 그대로 인정했다. 미 군정장관 아널드도 “한국은 앞으로 약 15년간 자치가 불가능하며, 한국 내 일본인들에게 한국인과 동일한 주민권을 주고 재산도 몰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9월22일 평양 도착 직후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에게 “빨치산부대도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레베데프는 “조선을 해방시킨 것은 소련군뿐이다. 빨치산부대는 단 한명도 참전하지 않았고 총 한번 쏘지 않았다.” “절대로 역사를 바꿀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해방 직후 한반도 역사는 남이나 북이나, 과거나 현재나, 미국이나 러시아나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진실이다. 대권 주자들은 역사적 진실을 가감 없이 수용하고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정책 대결로 승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002565.html#csidx399d5c832681e658bcaf07224cbfc78

 

이재명 말고, "미군은 점령군" 말한 사람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언론도, 이승만도, 김대중도

21.07.06 12:35l최종 업데이트 21.07.06 12:35l

김종성(qqqkim2000)

 

  이재명 경기지사가 대선출마선언 후 1일 오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해 이육사 시인 외동딸 이옥비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차담회가 열린 곳은 이육사 생가를 복원한 육우당이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정치권에 대단한 후폭풍을 낳고 있는 말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말이다. 
 

친일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지 않나.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되지 못해서 이육사 시인 같은 경우도 독립운동 하다가 옥사하셨다. - 2021년 7월 1일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에서


일파만파

'미 점령군'이라는 표현은 학술적 규명을 시도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해방 25일 뒤인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주둔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미 제24군단 하지 중장은 당일자로 한국인들에게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인민 제군이여! 태평양방면 육군사령관이요 연합국총사령관 맥아더 대장을 대신하여 나는 오늘 남조선 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주한미군사령관으로서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조선의 경제 상태를 앙양시키며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기타 국제법에 의하여 점령군에게 과하여진 기타 제(諸)의무를 이행하노니, 점령 지역에 있는 제군도 또한 의무를 다하여라.

 
하지는 일본군을 제압하고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자신의 부대를 '점령군'으로 지칭했다. 또 한국인들을 '점령 지역에 있는 제군'으로 불렀다. 점령군이니 점령이니 하는 용어는 하지가 독단적으로 사용한 게 아니었다. 9월 7일 발포된 미국 태평양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호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연합군은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함.

 
그런 뒤 맥아더는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했다. 이 조건 제4조에서 그는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 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함"이라고 선포했다.
 
'미군은 점령군'이란 말은 미군 자신만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해방 당시의 한국인들도 그렇게 말하곤 했다.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언론도, 이승만도, 보수 정치인도 
 

  대한민국정부수립경축식에 참석한 이승만(맨 오른쪽)과 하지(왼쪽), 맥아더(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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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 보도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김구와 이승만에 관한 기사인 1948년 2월 11일 치 <경향신문> '김구씨 의견을 돌변'은 AP통신 보도를 인용해 "당초 양씨(兩氏)는 조속한 독립 급(及, 및) 미·소 양군의 철퇴에 찬성하였으나, 그러나 소련이 북조선 군대를 건설하고 양(兩) 점령군대가 철퇴하는 경우에는 북조선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은 용이히 남조선을 접수하리라는 것이 명백히 되자 이 박사와 김구 양씨는 태도를 변경"했다고 보도했다.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김구·이승만의 입장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미·소 두 군대가 '양 점령군대'로 지칭됐다.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직후의 최대 보수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송진우 총무는 1945년 12월 21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한 정견 방송에서 '점령'이란 용어를 썼다. 다음날 <조선일보> 기사 '민족의 균등한 생성 발전'에 실린 방송 연설문에 따르면, 송진우는 한민당의 입장을 이렇게 천명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기(期, 기약)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로부터 이탈하엿지마는 아직 자주독립이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북위 삼십팔도를 계선(界線, 경계)으로 그 이북은 소군(蘇軍)이, 그 이남은 미군이 보장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로바삐 전 민족이 일치단결하야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므로써 완전한 독립국가로 승인을 밧지 안흐면 안이 되겠습니다.

 
송진우는 미소 두 군대가 일본의 항복을 보장받기 위한 보장 점령을 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런데 '미군이 38도선 이남을 점령하고 있다'는 그의 발언은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했다는 것은 이념적 억측의 결과가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당시의 다른 정치인들도 다 그랬지만, '미군 점령군'을 특히 많이 언급한 정치인이 있었다. 친미 정치인의 선두주자, 이승만이다. 위의 <경향신문> 기사에도 그가 백범 김구와 함께 미군 점령을 운운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승만이 '점령' 용어를 쓴 다른 사례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당시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이승만은 그런 언급을 자주 했다. 일례로, 1947년 2월 21일 치 <조선일보> '남조선에 임정 수립 요망'에 따르면, 그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재차 촉구하면서 "남조선과도정부에 대하여는 점령 기타 중요 문제에 관하여 소련 급(及) 미국과 교섭할 권리를 부여"할 것을 촉구했다. 미군정 하의 한국인 기관인 남조선과도정부가 '점령' 문제를 놓고 미국과 교섭할 권리를 언급했던 것이다.
 
그는 미군정이 끝난 뒤에도 '미군 점령군' 발언을 계속했다. 1949년 5월 18일 치 <동아일보> '한국 방위 서약 요구'에 따르면, 미국을 겨냥한 담화에서 미국이 한국을 책임져야 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남한을 미국이, 북한을 소련이 점령하여 한국을 분할한 것은 한국이 알지도 못하게 양국 간에 행하여진 것이오. 이 분할의 책임을 양국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며, 자연 미국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우리들을 계속 원조할 것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우리는 이를 비평하려는 정신에서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며, 한·미 양국민의 상호의 입장을 서로 정당히 이해시키고저 말한 것이다.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하고 미군은 남한을 점령했다'는 점은 해방 당시의 국민들이 상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보수 친미파인 이승만도 대수롭지 않게 '미군 점령군'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는 '미군이 우리를 점령했으니 책임져라'는 위와 같은 담화문까지 발표했다.

역사적 사실일 뿐인데도... 공격 또 공격 
 

  1945년 9월 9일, 미군의 경례를 받으면서 조선총독부 광장 국기게양대에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는 모습.
ⓒ NARA/박도 관련사진보기

 
사실, 미군이 점령군이 아니었다고 말하면, 그게 되레 이상하다. 점령군이 아닌데도 일본 식민지인 한국에 주둔했다면, 이는 미군이 일본의 연합군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군에 패배해 항복하러 들어왔거나 포로가 돼 끌려온 패잔병 군대였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미군이 점령군이었다는 지적은 미군을 욕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재명 지사의 발언에 대해 매우 신랄한 공격과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인 양 몰아세웠다. 지난 5일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에서 그는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을 하든지 하라"는 발언까지 퍼부었다. 지리산 빨치산들을 빨갱이로 욕하던 당시 사람들도 '미군 점령군'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공격이다.
 
맥아더는 포고문에서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 행동을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하겠다'고 경고했다. 맥아더가 경고한 것은 점령군에 대항하는 것이지 점령군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군의 남한 점령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맥아더의 포고문을 따를 것 같으면, 미군의 점령을 현실로 받아들인 이재명 지사의 발언은 엄벌 대상과는 거리가 멀다.
 
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그는 '셀프 역사왜곡,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제목의 글을 지난 4일 페이스북에 실었다. 그는 "요즘 저를 포함해 많은 국민들께서 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라면서 이재명 지사의  '미 점령군' 발언을 꼬집었다.

보수 정치권에서만 이런 공격이 나오는 건 아니다. 같은 당에서 대선 경선을 치르고 있는 정세균 전 총리는 5일 "민주당 대통령들은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불안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라고, 이낙연 의원 역시 "정치인은 어떤 말이 미칠 파장까지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25일 '6.25 50주년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6.25라는 동족 상잔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수백만의 사람이 희생되었고, 국토가 초토화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전쟁이 일어나야만 했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서로 총칼로 대립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원인은 일제 지배에 있었습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우리가 일제의 영토였다는 이유로 소련군과 미군이 각각 한반도의 남과 북을 점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미국이 한국보다 위에 있는 것을, 한미관계가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것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자주 취한다. 그들은 한미관계를 평등하고 합리적으로 재조정하려는 노력을 위험시한다. 그러면서도 '미군이 한국을 점령했다'는 객관적 사실은 부정하려 한다. '점령'이 풍기는 뉘앙스로 인해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조장되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관계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서술하는 게 바람직하다.

 

미군은 점령군이다’라는 말, 뭐가 문제인가.

문해청 | 기사입력 2021/07/06 [06:05]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이라고 맥아드사령관이 공포했다. 조선 땅에서 2차대전 전범국 일본군은 쫒겨났다. 미군은 2차대전 전범국 일본땅을 분단 시키지 않았다. 일본 천황제를 보장 했고 미군부대 토지임대료를 주며 일본을 예우했다. 오히려 일제 식민지 피해국 조선 땅을 북측 남측 갈라 놓았다. 당시 소련이 일본 만주국을 멸망 시키고 일본 본토 침공 이전 일본은 미국에게 먼저 항복할 것을 밝히며 일본 미국이 밀약했다. 그 결과 조선 땅 분단과 친일매국노 관료집단의 직위역할을 계승할 것을 보장했다.   


 [국민뉴스=문해청 기자] 송필경 원장(범어 송 치과, 건치 공동대표)은 


 최근 경기도 이재명 지사가 대선출마선언 후 행보로 고향 경북 안동 방문 당시 자주독립운동 중 옥사한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 등 독립운동가에 대한 과거 처우가 부족했다고 밝혔다.  


 발언의 경과는 1945. 8. 15. 이후 미군정시기, 이승만 독재정부시기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 대동세상을 펼쳐 나갈 것을 밝혔다.  


 허나 이를 색칼론으로 왜곡 시킨 조선일보가 미군을 점령군으로 취급했다며 부정적 이미지로 기사화하자 이어 대선출마를 선언한 윤 전 총장이 점령군 해방군 타령하며 국우수구보수 특유 이념공세 반북이데올르기로 확대해석의 화장을 한 것이다. 이를 송필경 원장은 과거 역사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것을 비판하는 글을 SNS정보관계통신서비스지원망 페이스북에 올렸다 


 다음은 송필경 원장의 비판 전문  


 위대한 민족시인 이육사(1904〜1944)는 일본에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40년이란 짧은 생애에 17번이나 투옥 당했다.

육사는 1944년에 감옥에서 옥사를 했지만, 웅혼한 시 <광야>에서 조국의 해방을 목놓아 기다렸다. 


 『...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렇게 고대했던 해방은 이육사 사후 1년 7개월 뒤인 1945년 8월에 찾아왔다.


 해방 정국에는 이육사와 같은 조국 해방에 열정을 지닌 사람이 많았다. 여운형 같은 광복을 준비한 사람들은 8월 15일 이후 즉시 ‘건국준비위워회(건준)’로 시작하여 9월에는 지방으로 광범위하게 정착하려 했다. 1945년 9월 7일, 맥아더는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할 때 미군이 직접 남한을 통치하겠다는 미군정 포고령을 선포했다. “내(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은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건준’은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무시하면서 남한의 자주적 정부 수립을 부정했다. 대신 미군정은 친일 관료, 경찰, 군인 출신 등 반민족인사들을 대거 고용해서 미군정에 편입했다. 친일 친미 반민족 세력은 미군정을 따르지 않는 여운형과 같은 자주독립건국지사를 암살했다.  


자, 이런 미군정의 역할에 어떤 정당성이 있는가?


철저히 단죄당해야 할 친일파가 미군정의 등에 올라타고 오히려 항일 건국 지사를 모질게 탄압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오늘날의 모든 갈등은 이때 시작했고, 이때 일어난 갈등의 근원적인 문제를 우리 사회는 아직 한 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한 정치인이 ‘미군은 점령군이다.’라고 하자, 이에 친일파 후손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구차한 권력을 누리는 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왁자지껄 색깔론 돌팔매질을 한다. 


중국 철학자 위원(魏源, 1794~1857)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라에 하나의 바른 의론이 있다면 반드시 이런 저런 용렬한 주장이 나와 그와 대항하고, 위대한 책략이 있다면 또 반드시 이런 저런 용렬한 책략이 나와 이를 방해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점령한다(occupy)’란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한 말이었다.


이 명료한 사실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미군이 점령한 식민지 체제에 살고 있다가 증거가 아닐까?  


 마치 어항의 물고기가 어항에 갇혀 있다는 걸 모르듯이!

 

미 점령국’ 부인하는 정치인, 역사 까막눈?

[기고] 2차 대전 종전 당시의 미국 동북아 전략과 20세기 초 이후 미일 야합의 역사 직시하면 해답 자명

 

역사는 누가 기술하느냐에 따라 그 평가 내용이 달라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관계에 입각해서 이뤄져야 한다. 충실하고 객관적인 사실 관계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평가의 부분은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이 부정확하거나 왜곡된 것일 경우 그것을 바탕으로 한 평가는 존중받을 수 없다.

 

최근 정치권에서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남한에 들어온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오고 친일 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느냐를 놓고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왜 논란이 빚어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미군태평양사령부가 공표한 포고령을 살피면 그 해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동시에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점검하면 왜 점령군으로 등장하는지 그 이유가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남에 진군한 미군의 성격은 1945년 당시 미국의 동북아 전략 수행의 과정에서 확정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 미일 두 나라가 비밀리에 맺은 카스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강점과 미국의 필리핀 점령에 대해 양해하고 합의한 역사적 범죄행각이 자행되었다.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소련이 최대의 군사강국으로 떠오르자 미국은 크게 경계하게 되고 이는 1950년대 초 미국 내의 공산주의자 사냥인 매카시 선풍으로 확대된다. 미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이 커지는 상황이 극동 전략에 반영되고 그것은 조선반도 남쪽과 일본에 대한 미군정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한편 미국은 일본과 맺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중시하는데 이는 미국이 병술국치, 3·1 독립운동을 외면하고 이승만 등 독립운동가의 독립 청원을 철저히 묵살하는데서 확인된다. 미국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남긴 것도 카스라 태프트 밀약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1905년 7월29일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와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근현대사에서 한국이 경험한 대외관계에 대한 분석에서 특정 국가에 대해 지고지선이나 무결점, 악마 또는 천사라는 식의 맹종 적, 비이성적 태도는 금물이다. 국제관계는 흔히 그렇듯 힘이나 이해관계로 압축되는 경우가 많은데 과거의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냉철한 고찰과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대선에 출마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미국과의 관계, 그 역사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정략적 차원에서 가짜뉴스를 발설하거나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이념 감정 선을 자극하는 비이성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한심하다. 정보화 시대에 잠깐의 검색으로 사실관계가 확인되는데도 가짜뉴스를 발설하거나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식의 혼란스런 논리를 내놓는 것은 색깔 공세 또는 역사 까막눈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한미관계는 오늘날에도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정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냉철한 역사 인식과 공정하고 생산적인 평가가 요구된다.

 

2차 대전 종전과 맥아더 포고령에 담겨 있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는 시점이 가까워진 1945년 8월 초 미국은 유럽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독일 심장부로 진격한 소련의 동북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수립에 고심했다. 그 결과 일본의 항복이 기정사실화 되었는데도 일본에 두 번에 걸쳐 원폭을 투하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태평양 전쟁은 끝났다(James F. Schnabel,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Washington, 1971, 811)).

 

미군 주력부대는 일본이 항복했을 때 오키나와 부근에 주둔해 있어 일본 본토나 한반도 진출은 단기간에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의 관동군 항복을 받아내면서 북한 최북단까지 단숨에 진격했다. 소련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본토를 점령한다는 기세였다. 당황한 미국은 1945년 8월13일 소련에게 한반도 주둔 전체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한반도 전역 점령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해, 소련에 통고했다. 미국은 원자탄이라는 신형 무기가 일본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보인 것을 소련에게 과시하면서 제안한 것이다.

 

“한반도의 절반인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분할 점령하자.” 소련은 미국의 원자탄에 기가 꺾여 미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연합군의 사령부로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하는 기구인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만들고 초대 사령관에 더글러스 맥아더를 임명했다. 이 사령부는 1945년 10월2일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는 1952년 4월28일까지 존속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 남부에서 이루어진 미군정도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209342&cid=40942&categoryId=34560).

 

소련은 1945년  8월21일 해방군의 기치를 들고 원산에 상륙, 평양에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였고 미국은 9월 8일에는 점령군의 위상을 앞세워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진주했다. 소련은 북한 지역에 진주한 뒤 미국처럼 무장 독립군 부대가 북한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등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점령군 행세를 했다. 하지만 그 포고령에서 해방군의 위상을 강조하면서 조선인의 자치를 허용하면서 미군정과는 차별성을 보였다(https://blog.daum.net/skxogkswhl/17956442).

 

미국은 존 하지 장군이 지휘하는 제24군단 휘하의 제7사단이 1945년 9월8일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의 일본군에게 항복문서에 서명토록 했다. 그 다음 날 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가 내려진 뒤 조선에서 게양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 그러나 일장기는 태극기가 아닌 미국의 국기 성조기로 대체되었을 뿐이었다.

 

미국은 한반도 남쪽에 군대를 진주시킨 뒤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 제1호에서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임을 분명히 밝히고 북위 38도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과 대치했다. 미국의 군사통치 체제인 미군정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해방직후 독립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선포된 여운형 중심의 인민공화국 등 모든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의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령 제1호는 1945년 9월, 미군정의 남한 통치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다. 이 포고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제 2-4조에서 미군정은 일제 치하에서 통감부의 행정 관리 등으로 부역했던 친일 인사들을 전원 업무복귀 하도록 명령하는 등 아래와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https://ko.wikipedia.org/wiki/%EB%A7%A5%EC%95%84%EB%8D%94_%ED%8F%AC%EA%B3%A0%EB%A0%B9).

 

제2조-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 및 의무 수행을 계속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제3조-모든 사람은 신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 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을 방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제군의 재산권을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라.

 

미군정은 공공기관 등에 근무했던 사람들의 복귀를 명령하고 조선인의 재산권 보호와 정상적인 취업을 보장하면서 일체의 정치적 행위를 불허했다. 이는 일본 본토에서 맥아더가 발표한 통치 내용과 동일하다. 맥아더가 일제의 행정 조직과 그 구성원 등을 기용하는 방침을 세운 것은 미군정에 대한 일본인의 저항이나 반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행정 집행을 미군이 직접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이후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극동 확장을 두려워했고 사회주의를 강력 탄압했던 일본 기득권 세력의 계속 집권을 유도하기 위해 천황제 유지를 보장하고 전범 처벌을 최소화 했다(https://nationalinterest.org/blog/reboot/operation-blacklist-what-macarthurs-japan-occupation-teaches-us-about-counterinsurgency).

 

서울의 미 군정청은 일제의 통치기구와 친일파 행정관리들을 접수해 군정을 선포한 뒤 일본총독부 소속 일본 간부들을 미군정의 고문으로 위촉하고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근무를 하게 했다. 미군정은 이어 한국인으로 일제 치하에서 공공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켰다. 이는 맥아더가 일본에서 전범세력의 일부를 미군정체제에서 등용한 것과 동일한 조치였다. 맥아더는 일본과 남한을 소련의 동북아 진출을 저지할 교두보로 만들기 위한 미국 정부의 전략을 수행한 것이다. 미국이 남한에서 친일파 득세를 조장한 것은 이런 목표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한반도에 입성한 미군. 사진=위키백과

 

1948년 이승만 정권 등장까지 지속된 미군정의 친일파 중용 조치로 한국에서는 친일파가 해방정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미국은 철저하게 미국의 의도대로 군정을 실시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것은 엄벌한다고 밝히고 실제 그렇게 했다.

 

미국은 1946~1947년 남한에서 발생한 독립 요구 시위, 총파업이나 폭동 등이 공산주의자나 좌파가 공작한 결과라며 강력 대처했다.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1947년 9월 좌파 신문이 조선노동당의 하부 기구라면서 미 헌병들을 동원해 그 사무실을 폐쇄하고 언론인들을 체포해 언론자유도 탄압했다(New York limes, September 7, 1946, p.16). 이런 과정을 통해 친일파들이 대거 미군정에 편입되어 해방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기구가 되었고 결국 일제 잔재를 청산치 못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조미 외교관계 수립이후 미 정부의 한반도 대형 사태에 대한 태도 – 철저한 자국이기주의의 연속

 

미국이 2차 대전 종전 후 남한에서 미군정을 통해 집행한 전략은 미국이 19세기 말 조선과 수교한 뒤 보인 행태를 보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들어난다. 미국은 후발 제국주의 입장에서 청나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충돌하지 않으려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필리핀을 놓고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지 말고 서로 나눠 먹기를 하는 식의 야합을 벌였다. 미국이 조선을 무대로 보인 탐욕스럽고 비도덕적인 국가 이기주의 행태는 조선과 미국의 수교 이후 만들어진 미국 외교 비밀문서에서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주요한 계기에 확인된 미국의 행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미 정부, 민비 시해 사건에 대해 미 공관은 중립 입장 지켜라 공문 보내>

 

미국은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청나라는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막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조선과 수교하도록 주선했다. 조선 조정은 미국과 통상조약 체결 이후 미국이 조선을 다른 강대국의 간섭과 압박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는데 이는 어리석은 태도였다.

 

조선은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한 뒤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조약의 내용은 불평등한 내용으로 이들 외국에게 치외 법권, 최혜국 대우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열강의 침입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Drake, op. ciL, 96-108. Documents pertaining to Shufeldt's enterprise may be found in Despatches from United States Ministers to China, File Microcopies, no.92, rolls 59-61, National Archives. For the Treaty of Chemulp'o, see U.S. Department of State, Theaties and Other International Agreem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776-1949, Charles I. Bevans, comp., IX, 470-76).

 

일본이 1894 7월~1895년 4월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한 뒤 미국은 엄격한 중립을 유지했다. 일본을 견제하거나 한반도 침략을 제어할 어떤 의지나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다(For documents pertaining to the Washington government's response to the Sino-Japanese confrontation of 1894-95, see FRUS, 1894, Appendix, I, 5-106). 1895년 10월8일 새벽 일본의 자객들이 명성황후의 침소인 경복궁 옥호루로 쳐들어가 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공관이 미국 공사에게 일본에게 고종황제를 보호하고 그 지위를 유지하도록 촉구하자고 제의했을 때 미국무부는 그에 반대하면서 중립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당시 리처드 올네이 국무장관은 서울 공관에 전문을 보내 엄하게 질책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공사의 업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고 미 국법에 따르면 불법이다. 공사는 자신의 업무가 미국 시민과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타국의 내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민비가 시해된 수개월 뒤인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고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접근 책을 강하게 펴면서 고종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고종은 러시아를 움직여 일본을 견제하고 싶어 했다. 고종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자 미 국무장관 존 셔먼은 서울의 미국 공사에게 중립을 지키라는 전문을 다시 발송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공사는 러시아와 일본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에 유의해 처신에 신중을 기하라. 공사는 어떤 경우에도 충고나 제안 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고 최대한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

 

고종황제는 1899년 미국에게 서구 세력이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윌리엄 매킨리 미 대통령과 존 헤이 국무장관은 서울의 미국 공사 호레이스 알랜에게 고종의 요청을 거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1900년 일본주재 조선 공사가 동경의 미국 공사 알프레드 버크에게 미국이 서구 열강들이 조선의 독립과 중립을 보장하는데 앞장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버크 공사의 답변은 냉담했고 종래의 내용을 반복했을 뿐이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그런 요구는 워싱턴에 주재하는 조선 공사가 미국 정부에 직접 보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존 헤이 국무장관의 승인을 받은 답변이다.”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 을사늑약 후 미 공관 철수>

 

미국은 1903년 조선에게 중국 동북부에 있는 단둥 항의 부근에 있는 압록강의 의주항을 미국에게 개항할 것을 제안했다. 영국과 일본, 러시아는 각각 다른 항구의 개항을 요구했다. 미국은 조선이 거부했지만 계속 요구를 굽히지 않다가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교섭은 더 진행되지 못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1904~1905년 동안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기 전 1905년 7월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는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승인한다'는 내용의 ‘가쓰라 · 태프트 비밀협약’을 맺었다. 이어 그해 8월 12일 일본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하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일본은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얻어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1905년 9월5일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러시아는 조선에서 일본이 최상의 이익을 보장받는데 동의했다. 1905년 11월17일 조선은 을사늑약을 강요받아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미국무부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 서울 주재 공사에게 서울의 미영사관을 폐쇄하고 한국에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서울의 미영사관은 11월28일 폐쇄하고 모든 영사업무는 동경에서 대행하라고 지시했다. 워싱턴 주재 조선 공사관은 1905년 12월16일 폐쇄됐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 실질적으로 주권을 빼앗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해 식민지에 준하는 통치와 수탈을 자행했다.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는 노일전쟁이 나기 4년 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었다(Roosevelt to Hermann Speck von Sternberg, 8 August 1900, The Letters of Theodore Roosevelt, Elting E. Morison, ed., II, The Years of Preparation, 1898-1900 (Cambridge, Massachusetts, 1951), 1394)).

 

“나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야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미 대통령, 고종황제의 일본 제어 간청 거절>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진 뒤 일본은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과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배권을 미국 등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Roosevelt to Taft, M July 1905, Morison, op. cit., IV, The Square Deal, 1903-1905, 1293. The full text of the Taft-Katsura memorandum, with an introductory note, may be found in John Gilbert Reid, "Taft's Telegram to Root, July, 1905," Pacific Historical Review, IX, 1 (March 1940): 66-70). 이 조약으로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패전국 러시아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지배가 국제적으로 확인되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 주의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1905년 8월부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릴 즈음 고종황제가 워싱턴에 특사를 보내 루스벨트에게 아래와 같이 간청했다(Willard D. Straight to "Whitey," 30 November 1905, Willard D. Straight Papers, microfilm edition, reel 11, John M. Olin Library, Cornell University, Ithaca, New York).

 

“조선과 미국이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 1조가 ‘두 나라가 제 3국으로부터 불공경모(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거나 모욕을 받았을 때)한 일이 있을 때 필수상조(필히 서로를 돕는다)를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이 조선을 자국의 보호국으로 만들려 하니 조미수호통상조약 제 1조에 근거해 일본을 제어해 달라.”

 

루스벨트는 조선 황제의 요구를 접수하기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에게 서울에 주재하던 대사관을 철수를 요구하자 그에 응했다. 미국이 앞장서 공관을 철수하자 다른 열강들도 뒤따라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

 

당시 서울 주재 미국 영사관 부영사 윌리엄 스트레이트는 서울의 외국 공관 철수 모습을 신랄하게 묘사했다(Willard D. Straight to "Whitey," 30 November 1905, Willard D. Straight Papers, microfilm edition, reel 11, John M. Olin Library, Cornell University, Ithaca, New York).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외국 공관의 외교관들이 서울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쥐들이 도망가는 모습과 흡사했다.”

 

또한 미국의 유명한 논객이며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하던 조지 케난은 당시 조선에 대해 쓴  기행문에서 고종황제를 혹평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철이 없고 가부장적인 유목민 보어인처럼 완강하며, 무식하고 우쭐대기만 하는 인물이다.”

 

케난의 기행문을 읽고 난 루스벨트는 “당신의 그런 통찰력은 훌륭하다”라는 편지를 보냈다(Roosevelt to Kennan, 15 October 1905, Morison, op. cit., V, The Big Stick, 1905-1907, 56).

 

루스벨트와 미국 정부가 1901년부터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묵인했다는 것은 1900년대 초 한·중·일에서 근무했던 미국 공사가 루스벨트 대통령 및 국무장관과 한국 정책을 협의한 편지와 문서, 보도 문건 등에서 드러났다(경향신문 2007년 4월26일).

 

“일본이 1904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 루스벨트 대통령 주선으로 미·영의 대기업들로부터 전비 차관을 받았다. 당시 루즈벨트는 앞장서서 앤드류 카네기의 철강회사, 제이피 모건 등 미 대기업을 통해 일본의 전쟁비용 약 7억엔(현재 14조원 상당)을 조달했다. 미국은 1905년 러·일 전쟁 처리를 위한 포츠머스 회담에서 조선과 중국을 배제하는 전략을 썼다.”

 

미국과 일본은 1908년 조선에서의 상표와 저작권 보호 협정을 맺고 조선 거주 미국 시민은 일본 법원의 관할에 속한다는 것에 동의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미국과 일본은 1908년 조선에서의 상표와 저작권 보호 협정을 맺고 조선 거주 미국 시민은 일본 법원의 관할에 속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 고종 황제. 사진=위키백과

 

<미국, 일본 조선 강제 병합 승인한 뒤 3·1 만세 운동 철저히 외면>

 

일본은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 병합해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 해 9월 미국은 이를 승인했다(Theodore Roosevelt, Fear God and Take Your Own Part (New York, 1916), 294-97. 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일제는 국권을 강탈한 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하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또한 조선민족 고유의 문화를 파괴하고 조선인들을 일본인들에게 복종하는 충실한 피지배자로 만들려 했다.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진행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등 경제적 폭압을 일삼아, 한국 사회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밝힌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10월 혁명 성공 후 레닌이 발표한 ‘민족 자결 원칙’, 만주 지린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 선언)에 이어 1919년 도쿄에서 일본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해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결과 1919년 3월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운동인 3·1 만세 운동 또는 3·1 혁명이 일어났다.

 

미 국무부는 3·1 운동이 발생하자 그 다음 달인 4월 일본주재 미 대사에게 “서울주재 미 영사에게 조선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미국이 도우리라는 믿음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할 것과 일본 정부당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미국이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Frank Baldwin, "Participatory Anti-Imperialism: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Journal of Korean Studies, 1(1979): 123-61; Dae-Yoel (Tae-yol) Ku, Korea Under Colonialism: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Anglo-Japanese Relations (Seoul, 1985), 37-303). 약 3개월가량 전국적으로 발생한 독립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일제는 화성 제암리 사건과 같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고 유관순 열사 등 숱한 이가 이 과정에서 순국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사람이 4만7000여 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을 앞세운 강경탄압정책에서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 기조를 바꿔, 조선어로 된 일간신문 발생을 허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3·1운동은 집회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3089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투쟁했던 거대한 독립운동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피맺힌 외침은 중국의 5·4 운동, 간디의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주었다(https://blog.naver.com/sencecool71/221477491277).

 

▲ 1919년 3·1 운동. 사진=위키백과

 

<조선의 독립은 외면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19년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에서 열린 강화 회의에서 민족 자결주의를 비롯한 14개 조 평화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러나 조선의 독립만세 운동에 대해 지지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Frank Baldwin, "Participatory Anti-Imperialism: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Journal of Korean Studies, 1(1979): 123-61; Dae-Yoel (Tae-yol) Ku, Korea Under Colonialism: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Anglo-Japanese Relations (Seoul, 1985), 37-303).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당시 유럽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을 뿐 전승국들이 보유한 식민지에 대해서는 이 원칙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지만 당시 국제적인 지배구조에 문제를 제기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특히 당시 일본이 전승국이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여서 조선 독립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그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식민지로 국한한다고 수정했다.

윌슨은 최종적으로 강화회의에 제출할 국제연맹 규약에서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를 아예 삭제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장을 본 조선인들은 그 속셈을 모르고 큰 기대를 했고 오늘날에도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얼빠진 역사왜곡은 당시 상황을 정확히 살펴 시급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3·1 운동은 비록 제국주의 세력이 외면하고 침묵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제국주의 운동이면서 민족적인 항일 운동으로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 정부는 1920년 이후 1930년대 말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표한 적이 없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미국과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반을 하면서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조선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7 February 1942, FRUS, 1942, I, General,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859-60;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1 May 1942, Ibid., 873-75).

 

그러다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 지도자들이 만나 조선을 적절한 조치를 통해 독립하도록 할 것을 선언했고 소련의 스탈린 수상도 이에 동의했다(FRU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ran, 1943, 448-49). 당시 열강 지도자들의 마음속에서는 조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조선인들이 희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것은 역시 제국주의적 국가이지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면 승전국들이 조선에 대해 조선인이 독립할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까지 수년 또는 더 긴 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독립 운동가들은 일본이 패퇴하면 즉시 독립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미국, 소련 견제 위해 친일파 집권세력으로 등용>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태평양 전쟁은 끝났다. 원자탄 두 발에 일본은 갑작스럽고 극적인 모습으로 무릎을 꿇었다(James F. Schnabel,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Washington, 1971), 811). 소련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일주일 전에 만주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개시했다. 소련은 파죽지세로 일본군을 무찔렀으며 그 기세는 미국이 당도하기 전에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고도 남았다.

 

미국은 오키나와에서 한반도로 군대를 이동하고 있어서 아무리 서둘러도 소련보다 앞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원자탄이라는 신형 무기가 일본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보인 것을 소련에게 과시하면서 제안을 했다.

 

“한반도의 절반인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분할 점령하자.”

 

소련은 미국의 원자탄에 기가 꺾여 미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미국은 일제가 항복한 이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 문제를 제외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제공했다. 종전 후 남한에서 취한 미국의 태도는 가쓰라 ‧ 태프트 밀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미국이 점령군으로 진주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은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로 여기면서 조선의 독립을 외면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그런 태도는 일본의 항복 이후 취해진 남한에 대한 미군정의 조치에서도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그런 태도는 이승만이 친일세력과 야합해 집권하는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제 미 청산과 이승만 이후 독재의 뿌리가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비롯된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이유다.

 

미국 정부는 1947년 여름 소련의 팽창주의가 유럽에서 다수의 위성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주목하면서 조선반도의 남북한이 자유롭게 선출된 정부를 세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1947년 가을 남한에서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우는 방안을 유엔을 통해 추진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Memorandum, Assistant Chief of the Division of Eastern European Affairs (Stevens), 9 September 1947, FRUS, 1947, VI, The Far East, 784-85. The present section of this essay is drawn extensively from a paper entitled "The Making of Mr. Truman's War" that was delivered by the author during a conference in Seoul in June of 1990. Commemorating the fortieth anniversary of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e conference was sponsored by the War Memorial Service-Korea. The paper was subsequently published in The Historical illumination of the Korean War (Seoul: Korean War Research Conference Committee (a division of the War Memorial Service-Korea), 1990). The War Memorial Service-Korea, headed by Lieutenant General Lee Mm Young (retired), has granted permission to the author to incorporate the paper in the present essay). 이에 대해 남한 일부에서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면서 1948년 5.10 선거를 한 달 여 앞 둔 4월 3일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미국의 점령 정책이 군정 통치로 집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제주 4·3은 미국식 정권을 남한에 수립해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두고자 했던 시도에 대한 조직적인 항거였다. 특히 2차 대전 종전 후에 전승국의 점령에 대해 강력한 저항이 발생해 장기간의 무장투쟁으로 비화한 것은 남한의 제주도가 유일했다. 미국 정부의 지침을 받는 미군정은 제주 4·3이 발생하자 종래의 남한 정책에 따라 소련의 공산주의 침투를 봉쇄한다면서 강력한 진압작전을 폈다.

 

미군정의 통제 하에 남한 국방수비대와 경찰, 우익단체가 앞장서서 벌인 토벌작전의 대가는 컸다. 많은 제주도민은 교전 중 사망한 것이 아닌 집단 학살이라는 형식 속에 변을 당했다. 미군정 관계자들은 살해 현장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배후에 숨는 식으로 지휘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분명했다. 소련의 공산주의 영향력이 남한에까지 확산되는 것을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 목적을 위해 군사작전을 전개했고 그 과정에서 내놓은 제주 4·3에 대한 원인 분석이나 대처 방식은 가짜뉴스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제가 심각했다. 미국은 소련 개입설 등을 언론에 유포하면서 집단학살 사태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

 

제주 4·3 발생을 전후 해 미국은 소련이 중국을 통해 사회주의를 확산하지 못하도록 중국 내전에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은 1947년 10월 장개석 군을 지원하는 군사고문단을 만들었고 장개석 군에 2천770만 달러를 지원하고 추후 4억 달러를 추가로 지원했다. 그러나 1948년 미국은 장개석 군의 부정부패가 자심하자 신뢰감을 상실하고 지원 정책 중단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모택동 군은 장개석 군을 계속 공격해 1948년 9월 만주 일대를 점령하면서 장개석 군의 탄약 등을 빼앗았고 중국 중부와 남부 주요 도시도 지배도 목적에 두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1948년 12월 모택동 군의 승리가 임박한 것으로 판단했고 투르먼 대통령은 장개석 군에 대한 추가 지원을 거부했다. 미국 정부는 1949년 4월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5월 미국 공관원 전원을 중국에서 철수하되 미국 대사에게 대만으로 패퇴하는 장개석 군을 따라가지 말고 난징에 남아 모택동 군과 협상하라고 지시했다(https://www.encyclopedia.com/history/encyclopedias-almanacs-transcripts-and-maps/chinese-civil-war-us-involvement).

 

<미국, 제주 4·3 비극과 한국전쟁 기간 민간인 학살 등에 모르쇠 일관>

 

미국은 1945년 미군정 개시 이후 발생한 학살 사건 등에 대해 일체 책임을 지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남한정부도 침묵하고 있다. 미군정 기간에 발생한 제주 4·3 참극은 미군정이 최고 지휘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제주 4·3의 진상 규명은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조사 없이는 불가능한 실정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수립된 뒤 실시한 미군 철수 후에는 미 군사고문단을 남겨 한국군이나 경찰을 지휘하게 했다. 이어 6·25 전쟁이 발생한 직후 미국은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넘겨받아 전쟁을 총지휘하면서 발생한 한국군경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직접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미국은 침묵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 전쟁이 정전협정으로 중단 된 1953년 뒤 조인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슈퍼 갑이 되면서 남한의 군사 주권을 장악했다. 미국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편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 수준이 되게 만들었다. 미국은 5·16 군사 쿠데타, 80년 신군부의 광주학살을 실질적으로 승인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저지했다.

 

미국 정부는 오늘날 미군장성 한사람이 한미연합사, 주한미군, 유엔군사령관 등을 겸직케 하고 북한 선제타격권, 주한미군의 전략적 순환배치, 유엔사의 남북교류협력 저지 등을 통해 한국에서 군사적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군사개입 장치를 겹겹으로 만들어 놓고 유사시 전면전 수행을 공언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전시작전지휘권을 임기 이전인 2022년 3월 이전에 환수하겠다고 밝혔지만 미국은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로 강행의 뜻을 공개하고 있다.

 

일부 대선 후보, 근현대사 속의 미국 실체 직시하며 지피지기해야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되고 동북아에서 신 냉전이 벌어져 한반도가 위태롭게 될 지경이다. 그런데도 국내 정치권이나 언론이 미국이나 미군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 해석하지 않고 친미 일색인 관행이 유지되는 것은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국가보안법의 뒷받침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미국이 21세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특권적 지위를 한국에서 누리는 것은 미국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확인해야 한다. 미국이 상식에 부합하는 정상국가의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작업이 국내 여러 부문에서 전개되어야 할 때이고 그것이 성공할 경우 동북아는 물론 세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이다.

 

최근 1945년 해방정국에서 미군의 점령군 진군에 대해 일부 여야 대선후보나 정치인들이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낯 뜨거운 친미적 태도로 올인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미국조차 손사래를 칠만큼 몰상식한 정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과거와 현실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치장하는 정치적 광대짓에 불과하다. 그것은 결국 미국이 주장하는 편협한 이익에 봉사하고 유엔 회원국인 한국의 자주권을 스스로 부정하는 태도라는 비판을 자초할 뿐이다.

 

일부 대선 후보 등 정치인들이 미국을 절대 선, 무결점의 존재로 부각시키는 모습은 일제 강점기 천황폐화 만세를 외치던 무뇌아적 친일세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 후안무치한 태도는 국제사회의 손가락질을 받는 치욕스럽고 개탄스런 행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근현대사에서 확인되는 미국의 실체를 직시하면서 지피지기할 때 21세기에 걸 맞는 정치적 식견과 비전을 가진 정치가 실천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일부 정치권이 정상에서 벗어난 구조를 지닌 것은 심각한 적폐다. 정치적 적폐는 선거를 통해 청산할 수 있다. 정치적 머슴을 자임하는 인물 다수가 기본적인 자질도 갖추지 못한 채 날뛰고 있는 현실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통일이 가능하다. 유권자들은 정치 머슴들의 자질과 도덕성을 살펴 심판해야 한다. 그래야 주권자인 국민에게 무한 봉사하는 정치 머슴들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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