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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한일협정은 美작품…미군감축카드로 朴압박

by 무궁화9719 2022. 9. 15.

[단독]한일협정은 美작품…미군감축카드로 朴압박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①
NSC 보고서 "한일협정 체결은 최우선 과제"
"한국은 돈 지원 받고도 불안한 의붓아들"
경제 군사적 지원 감축 카드로 한국 압박
일본을 한국 원조국으로 참여시키려 기획

1965년 5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린든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환담하고 있다. 출처:LBJ도서관

 

오늘(6월 22일)은 일본과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은 지 56년이 되는 날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후유증을 낳고 있는 잘못된 한일협정. 그것이 실행되도록 뒤에서 기획한 측은 일본도, 한국도 아닌 미국이었다. 한일 두 나라는 협정에 부담스러워했지만, 미국은 이를 집요하게 밀어붙였던 사실이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미국 기밀문서 다운로드]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 글 싣는 순서
①한일협정은 美작품…미군감축카드로 朴압박
②美 한일협정 회유…韓여론용 차관 미끼 고안
③한일협정은 2:1싸움…日총리 "생큐 미국"
④美 뒷탈많은 한일협정 밀어붙인 이유

 

미국 비밀문서로 드러난 한일협정의 진실

한일협정은 1964년 국내에서 뜨거웠던 반대시위(6.3항쟁)가 보여줬듯 대한민국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죄에 대한 아무런 반성이나 사과도 없이, 우리 국민들의 피해에 대한 배상 문제나 영토 문제 등에 대한 언급도 없이 지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완전히 최종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일본도 당초에는 협정 체결에 나설 의지가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패전국의 책임을 다한 만큼 한국에 따로 과거사를 논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한일협정은 당시로써는 두 나라 모두 피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1965년 6월 22일 두 나라는 합의문에 마침내 서명한다.

CBS노컷뉴스가 미국 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이길주 교수를 통해 확보한 당시 백악관과 국무부의 기밀해제 문서들에는 협정 체결 전후 미국의 생생한 암약상이 수두룩하게 기록돼 있다.

美, 주한미군 감축 카드로 한국정부 압박

64년 7월 29일 맥조지 번디 NSC특보가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올린 기밀결재 전문. "신임 주한미국대사에게 5분 간의 격려말씀을 하실 필요가 큽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1) 일본이 한국에 차관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한일협상의 조기타결을 굉장히 심각하게 원하고 있다. (2) 원칙적으로 주한미군의 부분 철수를 원한다. 그렇게 한번 철수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면전서 퇴각으로 비춰지진 않는다. 브라운 대사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일협정 타결을 단호하게 밀고 나가라고 촉구하는 구두 메시지를 보내시기를 제안 드립니다." 존슨 대통령은 이를 결재(V표시)한 것으로 돼 있다. 출처:LBJ도서관

 

1964년 7월 29일.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한 장짜리 기밀보고가 올라왔다. 백악관 NSC(국가안보회의) 맥조지 번디 특보의 보고인 이 문서는 주한미국대사로 새로 임명한 윈스롭 브라운 대사를 면담하시라는 제안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해 한국에서 발생한 6.3항쟁 이후 주한미국대사를 교체했다.

보고서엔 존슨 대통령의 면담 말씀 내용이 숫자와 함께 두 가지가 열거됐다. (1)한일협상 조기 타결을 강력히 원한다. (2)주한미군 부분 철수를 희망한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일협정을 단호하게 밀고 나가라는 구두 메시지를 전하라는 내용은 별도로 적시됐다.


병렬적으로 나열된 내용이지만, 맥락상 한일협상을 조기 타결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뺄 터이니 국민저항에도 굴하지 말고 한일협정을 관철시키라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64년 7월 31일 로버트 코머(NSC)가 존슨 대통령에게 올린 기밀보고. 주요 내용을 번역하면 이렇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에 66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퍼부었다. 우리의 모든 원조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여전히 불안정한 미국의 의붓자식이다. 일본 점령 기간의 리더십 부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잘못된 계획과 소홀 때문이기도 하다."(두 번째 문단)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지연되어 온 한일 간의 합의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일본이 부담을 나누기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타결될 일본의 원조금 6억 달러 외에, 우리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자연스러운 경제적 유대를 재개발하고 싶다. 브라운 대사는 가는 길에 주일미국 대사에게 이런 견해를 말해 주어야 한다."(2항) "개인적으로 한국에 있는 5만 명의 미군 병력을 감축하고 싶다. 우리의 요구는 동남아시아에 더 있다. 한국 방위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더 적은 수의 병력으로 그것을 할 수 없을까? 이 같은 대규모 병력(55만 명)도 가난한 나라 경제의 심각한 발목을 잡고 있다. 이러한 감군을 시작하지는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장은 중국 공산당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라운 대사는 그것이 언제 실현 가능한지 예의주시해야 한다."(5항). 출처:LBJ도서관

 

존슨 대통령은 번디 특보의 제안에 따라 이틀 후인 7월 31일 브라운 대사를 면담한다. 면담 직전 이번엔 NSC 참모인 로버트 코머가 존슨 대통령에게 더 긴 기밀보고를 올렸다. 브라운 대사에게 하달할 두 가지 지시사항의 배경을 일목요연하게 담고 있다.

보고서는 먼저 미국 정부가 한일협정 조기 체결을 '최우선(top priority)'으로 두고 있는 이유로 미국 정부의 한국 원조 정책 실패를 꼽았다. 광복 이후 한국에 66억 달러를 퍼부었지만, 성과는 좌절스러웠다, 원조를 이대로 지속할 수는 없다, 이제 일본이 원조의 부담을 나눠지도록 한일 간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 대목에서 한국을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정한 미국의 의붓자식(stepchild)"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어 주한미군 감축과 한국군의 축소 필요성을 언급했다. 주한미군은 줄여서 대신 동남아에 배치해야 한다, 가난한 한국이 대군을 유지하느라 경제발전에 힘을 못 쓰고 있으므로 군대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대 감축 문제는 중국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며 결행 시점에 대해서는 여지를 두고 있다.

朴, 협정체결 약속하며 버리지 말라 간청

65년 3월 16일 체스터 쿠퍼(NSC)가 이동원 외무장관의 존슨 대통령 예방을 앞두고 상관들인 마빈 왓슨 고문, 맥조지 번디 특보에게 올린 비밀메모. 존슨 대통령이 이 장관을 15분간 면담하며 나누게 될 대화 내용을 보고했다. 이 장관과 존슨 대통령의 예상 메시지들 가운데 핵심적인 항목을 옮기면 이렇다. 1)"이 장관은 한국정부가 희망컨대 박정희의 미국 방문 전에 일본과 합의에 이르게 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일본과의 합의가 미국의 한국 지원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확약을 구할 것으로 예상된다.(합의에 따라 일본은 한국에 6억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할 것이다)." 2)"존슨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기본적인 군사적, 경제적 원조 확대 정책은 한일협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한다고 밝힐 것이다.(주의: 한국은 현재 경제원조로 세계원조의 9%에 해당하는 1억 8500만 달러를, 군사원조로 세계원조의 14%에 해당하는 1억 4700만 달러를 받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이 숫자에 영원히 매일 순 없다." 출처:LBJ도서관

 

미국의 지속적인 압박 이후 한일 정부는 이듬해 1965년 2월 22일 협상에 원칙적인 합의에 이른다. 이어 3월 17일 한국의 이동원 외무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해 그 경과를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 장관의 사전 보고 내용은 전날인 3월 16일 체스터 쿠퍼(NSC)가 마빈 왓슨(NSC고문) 및 맥조지 번디(NSC특보)에게 올린 2페이지짜리 비밀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보고서는 이 장관이 존슨 대통령에게 전할 메시지 3개 항과 반대로 존슨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전할 메시지 5개 항을 담고 있다.

먼저 이 장관이 전할 3개 메시지 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일본과 합의에 이르겠다는 한국 정부의 결의를 밝히고, 일본과의 합의가 미국의 한국 지원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확약을 구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는 존슨 대통령이 앞서 신임 브라운 주한미국 대사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한 미국의 원조 축소와 주한미군 감축 입장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한일협정을 체결할 테니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줄이지 말아 달라는 간청인 셈이다.

보고서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존슨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전할 메시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항목을 "한국에 대한 기본적인 군사적, 경제적 원조 확대 정책은 한일협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 대화록. 1페이지 두 문단을 옮기면 이렇다.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에 대한 모든 가능한 지원을 확대할 계획이다. 미국은 군대를 그곳에 계속 주둔시킬 계획이었고, 병력 감축은 고려되지 않았다. 다만 조정이 있다면 박 대통령이 가장 먼저 알게 될 것이다. 사전에 충분한 협의가 이뤄질 것이다'고 말했다. 존슨 대통령은 '한일협상의 행복한 진전을 축하하며 박 대통령이 이번 협상 성공의 주요 요소로 생각한다. 일이 잘 풀린 것은 박 전 대통령의 리더십 때문이라고 느꼈다. 그것이 매우 힘들고 민감한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일협정 체결이 베트남에서의 우리의 상호 노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한일협상이 6월 초나 중순쯤 한 달 안에 타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협상을 막으려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나의 홍보와 다른 노력들이 합의의 타결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출처:LBJ도서관

 

이어 그해 5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 두 정상은 2개월 전 이 장관을 통해 주고받은 상호 간의 약속을 재확인한다.

백악관이 정상 간의 대화를 정리한 3페이지짜리 기밀대화록에 따르면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에 대한 모든 가능한 지원을 확대할 계획이다. 미국은 군대를 그곳에 계속 주둔시킬 계획이었고, 병력 감축은 고려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한일협상이 6월 초나 중순쯤 한 달 안에 타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1페이지)고 다짐해 보이면서 "1967년은 첫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이고 2차 계획도 수립 중이므로 이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지원이 필요하다"(3페이지)고 호소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존슨 대통령 앞에서 확약한 대로 6월 중순에 해당하는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문에 서명한다.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단독]美 한일협정 회유…韓여론용 차관 미끼 고안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②
65년 공동성명에 차관 1.5억불 명시 '고안'
실제 원조는 사정에 따라 달라져 '조건'
"美, 한국 버리려 해" 韓공포심 대처 카드
박정희 '왜소콤플렉스' 적시한 보고서도

1965년 5월 17일 한일정상환영 리셉션에 참석 중인 박정희, 린든 존슨 대통령 부부. 신장 190cm가 넘는 존슨 대통령이 박 대통령의 '왜소콤플렉스'를 배려해 계단에서 포즈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LBJ도서관

 

미국 정부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체결을 앞두고 한국 정부에 거액의 지원금을 제시하며 협정 체결을 회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기밀문서 다운로드]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 글 싣는 순서
①한일협정은 美작품…미군감축카드로 朴압박
②美 한일협정 회유…韓여론용 차관 미끼 고안
③한일협정은 2:1싸움…日총리 "생큐 미국"
④美 뒷탈많은 한일협정 밀어붙인 이유

 

CBS노컷뉴스가 미국 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이길주 교수를 통해 확보한 당시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들을 살펴보면 미국 정부는 막바지에 이른 한일 간 협의에 쐐기를 박기 위한 묘수를 찾는 데 힘을 쏟았다.

협정 체결의 최대 변수인 한국 내 반발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맞춰 거액의 한국 원조금 지불 방안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을 나흘을 앞둔 1965년 5월 13일 G 벨 국무장관 대행은 존슨 대통령에게 2페이지짜리 기밀결재를 올린다.

정상회담 이후 발표할 공동성명 내용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문구에 대한 재가를 요청한 것이다.

65년 5월 13일 G 볼 국무장관 대행이 존슨 대통령에게 올린 결재문서 전문.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대한 작업이 상당히 진전되고 있다. 우리와 한국 모두는 이번 방문이 박 대통령이 귀국할 때 한일 합의를 위한 국민의 수용과 입법 비준을 확보하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합의는 한국에서 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는데 야당은 미국이 기본적으로 한국에 대한 경제적, 안보적 부담을 일본으로 전가하기 위해 합의를 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님의 재가는 미국 정부가 향후 몇 년 동안 관련 법률과 규정에 명시된 조건에 따라 미국 정부가 동의한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에 대해 개발 차관 1억 5천만 달러를 한국에 제공할 계획이라는 문구를 공동성명에 포함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자금을 사용한 후에도 우리가 추가적인 개발 대출 자금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표될 것이다. 이 약속은 한국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계속하겠다는 우리의 의도에 대한 공개적인 진술의 일부가 될 것이며, 그 중 개발 차관 부분만 수량화될 것이다. 1억 5천만 달러의 개발 차관과 다른 계획된 원조는 향후 3년간 지원할 액수를 넘지 않지만 이번 기회에 이를 공표하는 것은 한일 관계 정상화에 결정적일 것이다." 출처:LBJ도서관

 

결재안은 "이번 방문은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 간 과거사 청산에 대한 한국 국민적 수용과 국회 비준을 확보하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에 중대하게 기여할 것"이라며 "미국이 향후 수년간 한국에 1억 5천만 달러의 개발 차관 지원 계획 문구를 공동성명에 포함시켜 주실 것을 요청 드린다"고 적고 있다.

이어 "1억 5천만 달러의 개발 차관과 계획된 다른 원조는 향후 3년간 지원할 액수를 넘지 않지만 이번 기회에 이를 공표하는 것은 한일 관계 정상화에 결정적"이라고 강조했다.

다음날 이번에는 NSC가 움직였다.

65년 5월 14일 제임스 톰슨(NSC)과 맥조지 번디(국가안보특보)가 존슨 대통령에게 올린 기밀보고서 전문. "국무부의 첨부 서류는 다음 주 화요일 박 대통령과의 공동성명에 향후 몇 년 동안 1억 5천만 달러의 개발 융자 약속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한 대통령님의 승인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항목은 한일 간의 합의가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속적인 지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안된 일반화된 지원책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문제의 총액은 우리가 보통 향후 3년 동안 제공할 계획보다 많지 않다. 더욱이, 공동성명은 당연히 그러한 자금의 제공이 '적용 가능한 법률과 책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규정한다. 비록 이번과 같은 방문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숫자를 인용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서울과 워싱턴의 여러 기관들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 지배하에 버리려고 한다는 한국의 야당과 많은 국민들의 심각한 공포에 박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계량화된 약속이 시급하다고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그 같은 숫자를 피하는 일반적인 관습에 이 예외를 두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출처:LBJ도서관

 

제임스 톰슨(NSC)과 맥조지 번디(국가안보특보)가 존슨 대통령에게 올린 1페이지짜리 보고서에도 같은 제안이 들어있다.

이 문건에는 1억 5천만 달러 지원 문구에 대한 노골적인 의도가 담겨있다.


NSC는 전날 국무부의 결재 서류에 대해 "한일 간의 합의가 임박했지만, 우리의 지속적인 지지를 재확인 시켜 주기 위해 고안된 일반화된 지원책의 한 부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문제의 총액은 우리가 보통 향후 3년 동안 제공할 계획보다 많지 않다. 더욱이, 공동성명은 물론 그러한 자금의 제공이 '적용 가능한 법률과 책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규정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미국이 한국을 일본 지배하에 버리려고 한다는 한국 내 심각한 공포에 박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계량화된 약속이 시급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결국 1억 5천만 달러는 한일협정에 대한 한국 내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며 실제 집행 여부는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조건까지 붙인 것이다. 언론플레이를 위한 위장술임을 자인한 것이다.

존슨 대통령은 국무부가 올린 해당 결재서류에 결국 서명했다.

1억 5천만 달러 지원은 정상회담이 열리기 1시간 전 NSC에서 존슨 대통령에게 올린 최종 보고서에서 다시 한번 강조된다.

65년 5월 17일 제임스 톰슨(NSC)이 존슨 대통령에게 올린 3 페이지 짜리 기밀보고. 정상회담이 열리기 1시간 전에 오후 4시에 올린 것으로 표기돼 있다. 보고서는 '우리는 한국을 일본 지배하에 버릴 의도가 없다'는 전문과 박정희가 자신의 작은 키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고 승마를 좋아한다는 '개인 특징', '한미 협상', '베트남 참전', '한국에 대한 원조', '한국 내 병력', '군사원조 프로그램', '기타' 항목에 밑줄을 그어가며 현안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LBJ도서관

 

보고서는 우선 "박정희 대통령은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이유로 워싱턴에 왔다. 그는 자신에 대한 우리의 호의와 지속적인 미국의 원조를 통해 우리가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일본의 지배에 내맡길 의사가 없다는 가장 강력한 암시를 받기를 원한다. 우리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어떤 확신이라도 그러한 합의의 비준과 수용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있어 그가 마주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완화시킬 것이다"고 적고 있다.

이어 (1)'한미 협상'이라는 소제목으로 "우리는 이러한 (한일 협상의) 발전에 깊이 만족하고 있으며, 박 대통령의 결심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협정은 두 개의 상호 보완적인 경제와 두 개의 자연스런 동맹국 사이에 새롭고 상호 생산적인 관계를 가져다 줄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길주 교수는 '상호 보완적인 경제'에 대해 "당시 한국의 수출 품목은 해산물 같은 1차 상품, 일본의 주력 수출 품목은 공산품이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한국과 일본은 상호 보완적인 경제관계로 한일협정은 양국에 윈윈이라고 믿었다"고 설명했다.

'자연스런 동맹국'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한국과 일본이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나라들이기 때문에 우호적인 이웃국가로 발전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라고 보고 한일협정 체결에 힘을 쏟았다"고 설명했다.

NSC 보고서는 또 (3)'한국에 대한 원조'라는 소제목에서는 "박 대통령은 우리의 지속적인 경제적 지원에 대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확신을 원할 것이다. 우리는 공동성명에 한국의 필수 수입품에 대한 자금 조달, 향후 몇 년간 1억 5천만 달러의 개발 차관 자금을 조달하고 기술 지원과 훈련을 지속하며, '평화를 위한 식량 원조'를 지속하겠다는 일반적인 원조 공약을 포함시킬 것을 제안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미국 국무부와 NSC의 공조로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1억 5천만 달러 개발 차관 제공'이 포함됐다.

이런 의도에 따라 한국 언론도 당시 이 금액을 제목으로 뽑으며 비중 있게 보도했다.

1965년 5월 19일 조선일보 1면. 1억 5천만 달러 차관이 부제목으로 달렸다.

 

물론 1억 5천만 달러 지원 문구를 공동성명에 넣자는 안을 박정희 정부가 요구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이 금액이 한국 국민들의 한일협정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로 고안됐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단독]한일협정은 2:1싸움…日총리 "생큐 미국"

워싱턴=CBS노컷뉴스 권민철 특파원메일보내기

2021-06-22 05:00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③
한일협정 체결 당시 미·일은 끈끈한 동맹 관계
협상 사전교감 가능성, '오프 더 레코드' 서신도

  • 1965년 1월 13일 열린 미·일정상회담. 사토 총리(왼쪽)가 존슨 대통령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출처:LBJ도서관
  •  
  •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들은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협정이 미국의 주도하에 체결됐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미국 기밀문서 다운로드]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 글 싣는 순서
    ①한일협정은 美작품…미군감축카드로 朴압박
    ②美 한일협정 회유…韓여론용 차관 미끼 고안
    ③한일협정은 2:1싸움…日총리 "생큐 미국"
    ④美 뒷탈많은 한일협정 밀어붙인 이유

    그런데 CBS노컷뉴스가 미국 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이길주 교수를 통해 확보한 또 다른 당시 여러 기밀문서들을 보면 한일협정 전에 미국과 일본은 '단일팀'으로 움직인 정황이 다수 발견된다.

    우선 미국은 1964년 6월 26일 미국 정부의 종합적인 대(對) 일본정책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의 미래에 관한 국무부 정책 보고서'를 펴낸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미국의 기본적인 국가 안보 차원에서 바라보고 미국과 일본의 관계 설정, 미국이 일본에 취할 접근법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보고서다.

  • 64년 6월 26일 '일본의 미래' 보고서를 펴내면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펴낸 발간사. 발간 과정을 짧게 설명한 뒤 이 보고서 검토 결과로서 취해지고 있는 향후 조치들을 열거했다. 두 조치를 옮기면 이렇다. "a)국무부와 국방부는 미국이 추구하는 일본 군대의 적절한 임무를 보다 정확히 정의할 합동 연구를 수행한다. b)국무부는 미국의 외교당국과 일본 정부 사이의 보다 긴밀한 관계를 구축할 가능성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대서양정책조언그룹(APAG)에 비견할 만한 처리방식을 통해, 일본과 함께 탐구한다." 출처:LBJ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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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고서는 일본을 아시아의 지도자국으로 만든 뒤 중국에 대항마로 키우기 위한 여러 방책들을 담고 있다.

    특히 서문에는 "미일 사이의 보다 긴밀한 관계 구축을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조직처럼 과제를 탐구한다"는 향후 과제까지 명시돼 있다.

    미일 동맹을 나토 동맹처럼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65년 6월 한일협정 체결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미국은 미일동맹의 청사진을 마련해 움직이고 있던 셈이다.

    더욱이 1965년 1월 22일 백악관 NSC의 비밀메모는 미국이 일본에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 65년 1월 7일 NSC 참모인 체스터 쿠퍼, 제임스 토마스가 상관인 백조지 번디 특보에게 올린 비밀메모.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미일정상회담을 앞두고 NSC가 에이사쿠 사토 일본총리의 의중을 정리했다. 결론적으로 일본을 영국과 같은 동맹으로 삼아야 한다는 제안을 담고 있다. 출처:LBJ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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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메모는 메모 작성자들이 주일미국대사와 면담을 통해 사토 총리의 의중을 NSC상관에 보고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주일미국대사는 1965년을 미일 관계를 위한 결단의 해로 간주하고 있다"며 사토 총리를 실권을 장악한 지도자로 묘사한 뒤 "미국이 그의 요구를 허심탄회하게 들어준다면 그는 일본을 영국처럼 장기적으로 종속적인 미국의 동맹으로 이끌 것이지만 만약 우리가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일본을 (미국의) 동맹에서 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어 중국 공산당 문제에 대해 사토 총리가 미국과 보조를 맞추기를 원하며, 미국이 속마음을 털어놔 준다면 중국과 대만을 향해 조율된 접근을 할 수도 있다고도 제안했다.

    또 다른 기밀문서에서는 미일 양국이 당시 한일협상 진행 과정에서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1964년 2월 29일 미국 국무부와 주미일본대사관 사이의 만남을 기록한 대화록이 그것이다.

  • 64년 2월 29일 국무부와 주미일본대사관 사이의 대화록. 3 페이지짜리 대화록은 상당 부분이 삭제된 채 비밀문서에서 해제됐다. 삭제된 부분은 주로 타케우치 대사의 발언록이다. 출처:LBJ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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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만남에는 미국에서는 딘 러스크 국무장관, 로버트 바넷 차관보, 로버트 피어리 동아시아국장 대리가, 일본에서는 류지 타케우치 주미일본대사, 마사오 가나자와 정치고문이 참석했다.

    국무부가 이날 만남을 정리한 비밀 대화록에는 러스크 국무장관이 "한일 정부는 미국이 강력히 압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과거사) 청산의 이득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막대해서 협상 타결이 눈에 보이면 누구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고 독려하면서 협상 진행 과정에 대한 정보를 묻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다케우치 대사의 발언록은 삭제(sanitized)돼 있어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케우치 대사의 답변을 받은 러스크 장관은 "서로 관련해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논의를 모두 일정화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지, 그래서 양 당사자들이 원하는 종류의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다"고 대화록에는 적혀 있다.

    이어 자신의 경험담을 전하며 협상에 훈수를 두는 듯한 말을 하면서 "오히라 외무장관에게 미국의 조기 타결 바람을 전달해 달라"는 말로 만남을 마친 것으로 돼 있다.

    물론 미국 국무부가 주미한국대사관 측과도 만나 한일 협상 관련한 진행 과정을 공유받았을 가능성도 있는 만큼 미국이 일본에 경도됐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한일협상이 체결된 이후 작성된 비밀문서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 65년 6월 24일(한일협정 체결 이틀 뒤) 주일 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 일본 사토 총리가 주일 미국대사관을 통해 존슨 대통령에게 보낸 '오프 더 레코드' 메시지가 적혀있다. 출처:LBJ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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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미국대사관에서 국무부로 보낸 비밀 전문이다.

    전문은 "내각 비서실장인 하시모토 장관이 나(주일미국대사)에게 전화를 걸어와 사토 총리가 다케우치 대사를 통해 일본과 한국 간 합의에 대해 축하의 메시지를 담은 서신을 존슨 대통령에게 보내라고 했지만 나를 통해서도 존슨 대통령에게 추가로 아래와 같은 '오프더 레코드' 메시지를 보내 달라고 했다"고 적으면서 해당 메시지를 인용했다.

    "대통령 각하와 미국 국민들에게, 이번 협상 과정에서 우리에게 제공해준 도의적 지원에 대해 우리의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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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美 뒷탈많은 한일협정 밀어붙인 이유

 폰트사이즈인쇄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④

뉴욕 이길주 교수 "日은 美에게 만병통치약"
中 핵실험 성공하자, 日을 통해 中 팽창 저지
한일협정, 日 정치적·경제적 욕구 충족시켜

  • 65년 5월 17일 정상회담 이후 린든 존슨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과 사교춤을 추고 있다.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한일협정 조기 체결을 강하게 요구하며 당근과 채찍 전략을 구사했다. 출처:LBJ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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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될 때 까지 미국은 노심초사했다.

    미국이 국민여론 등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피하려했던 박정희 정권을 때로는 겁박하고 때로는 회유하며 협상을 부추겼던 사실이 백악관과 국무부 비밀문서들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국 기밀문서 다운로드]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 글 싣는 순서
    ①한일협정은 美작품…미군감축카드로 朴압박
    ②美 한일협정 회유…韓여론용 차관 미끼 고안
    ③한일협정은 2:1싸움…日총리 "생큐 미국"
    ④美 뒷탈많은 한일협정 밀어붙인 이유

    해당 비밀문서들은 미국 뉴욕의 이길주 교수(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역사학과)가 텍사스 오스틴의 린든 B 존슨 라이브러리(LBJ 도서관)에서 발굴한 것들이다. 이 교수는 존슨 대통령 시기 한미일 관계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는 존슨 대통령 시기 일본은 미국에게 '만병통치약'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만큼 일본은 미국에게 쓰임새가 많은 나라였다는 뜻이다. 이 교수는 뉴욕에서 진행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일본이 미국의 '만병통치약'이었던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당시 존슨 대통령은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를 표방하며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배가하는데 경주했다고 한다. 특히 핵실험에 성공한 중국의 아시아 팽창을 막는데 주력했다고 한다. 중국발 공산화의 도미노를 막기 위해 베트남전쟁에 화력을 본격적으로 투입한 것도 존슨 대통령이었다.

    미국으로선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대리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일본이었다.

    이 교수는 "일본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기 때문에 여차하면 중국과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나라였다.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일본은 미국보다는 중국에 경도될 수 있는 나라였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일본을 흔들림 없는 반공산주의 국가로 다져 중국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을 보루로 삼기위한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 이길주 교수(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권민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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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이 아시아에서 중국을 방어하는 첨병 역할을 떠맡기 위해서는 먼저 아시아에서 존경받는 나라로 입지를 다녀야했다. 그러나 일본의 과거사가 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이 과거사를 청산하고 일본제국주의 피해 국가들과 관계도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바로 그 상징적인 대상 국가가 한국이었다. 한일간 국교 정상화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정치적 위상을 세우는 목표를 위해 반드시 탈환해야할 고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교수는 당시 일본이 "울타리 위에 앉아있는(sitting on the fence) 형국"이었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1965년 1월 7일 NSC의 내부 기밀보고서를 보면, 일본 사토 총리는 13일 예정된 존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자신의 의중을 미국측에 전달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은 미국에 영국과 같은 동맹국이 될 수 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생각과 계획을 허심탄회하게 공유하지 않으면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에서 발을 뺄 수 도 있다.'(체스터 쿠퍼, 제임스 토마스가 맥조지 번디 NSC특보에게 올린 보고서)

    일본이 경제적으로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도 미국은 경계했다.

    이 교수는 "일본의 경제가 팽창함에 따라 더 큰 시장이 필요했다. 중공은 일본에 매력적인 시장이 될 수 있었다. 경제적인 목적에 따라 일본이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일본을 중국에서 떼어내야 할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따라서 일본이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도 경제적인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특히 경제력이 커진 일본이 미국시장까지도 침공해올 수 있는 불안감도 해소해야 했다.

    1964년 6월 미국 국무부가 마련한 '일본의 미래에 대한 국무부의 정책 보고서'는 이 같은 일본의 경제적 갈증을 풀어주기 위한 방안을 담고 있다.

  • 이길주 교수(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권민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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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방안의 핵심 논리는 원기왕성해지고 있는 일본의 공급력을 받아 줄 시장은 동아시아이며, 그 같은 시장을 마련하기위해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이 필요하고, 다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일본의 대외 원조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으로서 일본의 이 같은 경제적, 정치적 욕구를 동시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첫 단추가 바로 한일간의 관계정상화였다.

    이 교수는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확실히 자유진영 속에 머물게 하려면, 일본에게 역할 줘야했다. 남한과 일본이 손을 잡으면 일본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 주면서 동아시아 자유진영의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지역에서 한미일 삼각편대가 확실해지는 것이었다"며 "중국과 일본 사이에 확실한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한일협정이었다"고 말했다.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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