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민주당 연구] 3당합당 배후는 미국?
김삼웅 입력 2021. 11. 27. 16:483당합당 아이디어 창출에 미정보기관이 개입한 과정
▲ 1995년 12월 5일 민자당이 새당명을 '신한국당'으로 사용함에 따라 중앙당사 현관에 설치됐던 민주자유당 입간판이 철거되고 있다. |
ⓒ 연합뉴스 |
느닷없이 이루어진 3당통합은 어떤 배경에서 가능했을까.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의 자의였을까, 아니면 달리 배후가 있었을까. 당시 문익환ㆍ서경원ㆍ임수경의 방북(밀입북) 사건이 일어나고, 대륙세력 중국과 소련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3당합당 직전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측근이었던 김아무개씨는 이런 말을 했다.
"3당합당이 성사되기 몇 달 전 나는 미국에서 CIA요원을 만났다. 그는 '평민당이 민정당과 합치는 방향으로 노력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 기반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런 합당은 도저히 성사될 수 없다면서 노(NO)했다. 그랬었기 때문에 나는 통일민주당을 주요 상대로 한 3당합당이 성사됐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고 3당합당의 배후에 CIA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직감했다."
미정보기관 소식에 밝은 한 소식통은 3당합당 아이디어 창출에 미정보기관이 개입한 과정은 이렇다고 주장했다.
"3당합당 아이디어의 시원이 어디였는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시원은 서울의 한 호텔에 모인 세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 3인은 김아무개 예비역 장군, 차 아무개 목사, 그리고 전중앙정보부 감찰과장 김 아무개씨다. 이들은 모두 각각 워싱턴 정계와 손을 잡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3당합당 아이디어는 어떤 라인을 타고 워싱턴 정보기관으로 들어갔고, 그것이 다시 청와대로 들어간 것이다. 김예비역 장군은 노대통령과 절친한 사이였고, 차목사는 김영삼통일민주당 총재의 대미창구의 하나였으며, 중앙정보부 출신 김씨는 친CIA 거두인 이후락 전중앙정보부장의 직계로 정보정치에 밝았다." (주석 11)
▲ 1990년의 민자당 3당합당 |
ⓒ 연합뉴스 |
제1야당 총재로서 5공청산과 정치개혁을 주도했던 김대중과 평민당은 하루아침에 군소야당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5공청산과 정치개혁에 대한 리더십과 동력은 크게 떨어지고, 세상은 민자당의 천하가 되었다.
3당합당 뒤 2월 20일부터 제148회 국회가 열렸다. 김대중은 대표연설을 통해 3당합당을 비판하고 정치개혁의 추진을 역설했다.
3당통합은 반민주적 쿠데타로 총선을 실시, 이에 대한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총선은 다가오는 지방의회 선거와 함께 치를 것을 제안하며 민자당이 이러한 제안을 수용하지 않을 때는 1,000만인 서명운동 등 국민적 투쟁을 전개하겠다. 누가 야당으로 당선된 사람이 마음대로 여당이 되어도 좋다고 했는가. 국민심판을 받아야 한다. 최근의 심각한 민생치안 문제는 부익부 빈익빈의 불공정분배, 힘의 정치영향 등에 그 원인이 있다. 노정권이 다가오는 가을까지 민생문제를 해결 못하면 정권퇴진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 12)
한국 전통(정통) 야당의 뿌리는 1954년 11월 29일 이승만이 시사오입 개헌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하자 신익희ㆍ장면ㆍ곽상훈ㆍ백남훈ㆍ조병옥 등 민국당계열, 흥사단계ㆍ자유당 탈당파ㆍ무소속의원들이 결집하여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 경남에서 한나라당(옛 민자당)의 20년 독주 계기가 되었던 3당 합당 |
ⓒ 이윤기 |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중심의 5ㆍ16쿠데타로 정당이 해산되고, 1963년 7월 박순천을 총재로 하는 민주당이 창당, 1965년 야권통합으로 민중당 창당(총재 박순천), 1965년 한일협정 비준문제로 민중당 강경파가 탈당하여 신한당을 창당했다.(윤보선 총재)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의 합당으로 신민당 창당(총재 유진오), 1971년 김대중 대통령후보 지명, 1972년 유신쿠데타로 정당활동 중지, 1978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선출, 1980년 신군부에 의한 정치활동금지, 신민당 해산, 1981년 민주한국당창당(총재 유치송),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1985년 신한민주당 창당(총재 이민우), 1987년 통일민주당창당(총재 김영삼),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총재 김대중)으로 이어졌다.
정통야당의 큰 산맥이었던 통일민주당이 군사독재의 후계정당과 합당함으로써 한국의 전통야당의 맥은 평민당이 승계하게 되었다. 평민당은 정통야당의 위치와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주석
11> 오연호, 「김영삼시대 자주의 빈곤」, 『우리 현대사의 숨은그림찾기』, 245~246쪽,『월간 말』, 1994.
12> 『국회본회의 속기록』, 1990년 2월 27일.
▲ 경남에서 한나라당(옛 민자당)의 20년 독주 계기가 되었던 3당 합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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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권은 차츰 평민당이 강경하게 주장한 5공핵심 6인의 사법처리를 비롯하여 청문회에서 드러난 각종 비리처리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 문익환ㆍ황석영ㆍ서경원 등의 방북사건, 울산사태 등 잇단 시국사건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면서 5공청산 작업을 크게 위축시켰다.
여기에 5공핵심 6인의 사법처리 문제에 관해 김영삼ㆍ김종필 측이 3야 간의 합의선에서 후퇴, 민정당 쪽에 기욺으로써 야3당 공조체제를 흔들고 5공청산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평민당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권공조체제가 무너지면서 5공청산작업은 지지부진해졌고, 1989년 12월 15일 청와대 여야 영수회담 끝에 ① 전두환의 1회 국회증언 및 녹화중계 ② 정호용ㆍ이희성의 공직사퇴, 이원조의 고발 ③ 광주시민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입법추진 등 11개항의 타협안에 합의했다.
1990년 1월 22일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청와대에서 회동, 3당통합에 의한 신당 창당 및 각당에서 5인씩 15명으로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키로 한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평민당 김총재는 노태우로부터 합당 제안을 받았으나, 국민의 뜻에 따라 정해진 정당구도를 임의로 바꿔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날 노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양옆에 김영삼과 김종필을 세워놓고 3당통합 사실을 발표하여 그야말로 정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들 3인은 회담을 끝낸 뒤 청와대 접견실에서 〈새로운 역사창조를 위한 공동선언〉을 발표, 통합신당은 온건중도의 민족 민주세력의 통합을 통한 새로운 국민정당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88년 4ㆍ26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로 출범한 지 2년여 만에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여대야소'로 탈바꿈시킨 3당통합은 많은 곡절을 겪으면서 90년대 정국의 돌연변수로 등장했다. 3당통합을 선언한 민정ㆍ민주ㆍ공화당은 합당을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신당창당으로 가는 3당의 15인통합추진위원회는 1월 24일 첫 회의에서 '민자당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통합에 박차를 가해 2월 9일 민주자유당(민자당) 합당대회를 열었다.
민자당은 지도체제를 총재 노태우, 대표최고위원 김영삼, 최고위원 김종필로 선정하고, 강령으로 ①성숙한 민주정치 구현 ②지속적인 경제성장, 복지경제 실현 ③공동체사회 구축 ④교육의 자율성과 기회균등의 보장 ⑤평화적 민족통일과 자주적 외교노력 등 5개항을 채택했다.
민자당은 3당합당으로 총의석수 221석을 확보, 개헌선인 원내 3분의 2 의석 이상이 되었다. 여소야대 원내구도가 거대한 여당과 왜소한 야당으로 뒤바뀌게 된 것이다. 3당야합에는 민주당 소속의 노무현ㆍ이기택ㆍ김정길ㆍ김광일 의원 등이 불참을 선언했다.
전격적인 3당야합과 공룡 같은 여당의 등장에 제1야당 평민당은 거센 반발을 보였다. 평민당은 1월 23일 의원총회 및 당무지도위원 연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의 위약과 두 야당총재의 정치적 변신을 신랄히 규탄했다.
3당통합은 총선민의를 저버린 정치적 야합행위이기 때문에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하고 총선에서 다시 국민의사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평민당은 이와함께 내각제 개헌을 반대하기 위한 1천만 명 서명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는 등 강경한 대여투쟁에 나섰다.
단시일 내에 거대여당으로 돌변한 민자당은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세평대로 사사건건 계파별로 집안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특히 내각제 합의각서 유출사건을 계기로 심각한 대립상을 보였다. 그리고 국회에서는 다수의 힘으로 변칙과 날치기를 자행하여 여야의 물리적인 대치상태를 불러왔다.
3당야합은 상도동계의 정통야당 일각이 군사정권의 본류에 편승하고, 부산ㆍ경남의 전통적인 야당세력이 보수화현상을 가져오게 되면서 한국민주화에 크게 역행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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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민자당 불참을 선언한 민주당 노무현 의원 등 5명과 무소속의 박찬종ㆍ이철 의원 및 1987년 대통령 후보 단일화 운동에 앞장섰던 홍사덕ㆍ장기욱ㆍ조순형 전 의원 등은 새 야당 창당을 선언하고 가칭 민주당창당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또한 '진보적 대중정당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은 3당합당에 대한 성명을 발표, "3당합당을 통한 신당 창당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여망을 배신하고 당리당략만을 위해 군사파쇼세력조차 보수세력으로 위장시켜 정치적 수명 연장을 노리는 파렴치한 정치 쿠데타"라고 비난했다.
검찰, 평민당 김대중 총재 강제 구인
[평화민주당 연구 38] 헌정사상 제1야당 총재가 강제 구인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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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4월 20일 김총재는 산업계에서 노동자들의 강경투쟁이 제기되는 등 사회혼란의 분위기가 나타나자 노동자들의 자제를 요청하는 등 경색정국에서 온건처방책을 제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었다. 김총재는 회견에서 △5월 초 파업 자제 △정부의 반공과 체제수호 명분아래 탄압국면 조성 배제 △5공 청산 △문목사 석방 등을 요구, 비교적 온건한 시국 대처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런데도 정부가 검찰과 안기부를 통해 소환장을 발부하고 김총재가 이를 거부하자 8월 27일 검찰은 여의도 평민당사에서 김총재를 강제구인, 3일 새벽까지 15시간 동안 조사했다. 헌정사상 제1야당 총재가 강제 구인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평민당은 이에 대해 서동권 안기부장 등을 고발하고, 8월 8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시국강연회 형식의 대중집회를 열어 정부의 탄압과 공안정국을 강력히 성토했다. 이날 평민당 연사들은 "노정권은 5공청산과 민주화를 할 것인가. 아니면 중간평가를 받을 것인가 양자 택일을 하라"고 강조하면서 "지금 시국이 정치없이 5공시대로 역진하고 있다."고 정부의 공안통치를 비난했다.
이 당시 나는 정말 위험한 상황에 봉착했던 것이다. 나와 평민당은 결연히 싸웠다. 그러나 이 싸움의 방법이 문제였다. 나는 당원과 시민들의 흥분을 달래면서 검찰에 의해 강제연행 당했다. 그리고 철야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서의원을 사흘이나 재우지 않고 고문을 해서 허위증언을 받아냈다. 서의원은 사흘째엔 바닥에 쓰러지며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맘대로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안당국의 행위는 마치 일제시대의 순사들이 하는 짓 같았다. (주석 6)
서울지검 공안1부는 8월 26일 김총재를 국가보안법상 불고지 혐의,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기소하고, 김총재와 평민당은 이에 맞서 노정권의 공안통치에 따른 원내외 및 법정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5공청산과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1990년 2월 민정당ㆍ민주당ㆍ공화당의 3당 합당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고, 3당 총재는 김대중의 기소중지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기소중지가 시혜가 될수 없고 오히려 불법무도한 탄압에 사과해야 한다."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이로 미루어 김 총재에 대한 강제구인과 기소 등은 3당합당을 위한 '장애물 제거' 차원의 정치공작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 <공안통치 저지 및 민주정치 회복을 위한 시국대강연회> 소식을 알리는 한겨레신문 1989년 평민당의 김대중은 보라매공원에서 수십만이 참석하는 시국대강연회를 개최하여 노태우정권의 공안통치에 맞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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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의 정치 생명이 끊어지고 말 것 같았다. 당국은 이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갈 결심인 듯 했다. 한편으로 우리당은 보라매공원에서 안기부의 날조공작에 항의하는 공안통치 분쇄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8월 8일 삼복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30만여 명이 웃도는 시민과 학생들이 모인 이 집회는 정부에 큰 압력을 가했다. 검찰측은 나에 대해 불고지죄, 즉 내가 서의원이 북한 방문 사실을 2개월 전에 알고 있으면서 은폐하려 했다고 기소했지만, 서의원이 법정에서 "내가 자백한 것은 고문에 의한 것이지 사실이 아니다"라며 그 유일한 증거를 깨뜨렸다. 이로 인해 재판을 할 수 없게 된 당국은 결국 이 사건을 포기했다. 범죄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밀고하지 않은 자를 처벌한다는 불고지죄란 세계 어디에도 없는 부끄러운 죄명이었다. (주석 7)
당의 총재와 평민당에 1990년에도 거대한 정치적 격랑이 몰려오고 있었다. 1988년과 1989년 2년여 동안 5공청산과 국정개혁을 리드해 온 평민당에 노태우 정권과 수구세력, 그리고 김영삼ㆍ김종필 두 야당 총재가 이끄는 정당은 위기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안기부와 검찰이 사법적 올가미를 동원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사법적 올가미 씌우기에 성공하지 못한 수구세력은 방법을 달리하여 정치적으로 김총재와 평민당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1990년 1월 22일의 야합적인 3당합당이 그것이었다.
주석
6> 『김대중자서전(2)』, 229~230쪽.
7> 앞의 책, 230쪽.
▲ 3김의 만남(1980. 왼쪽부터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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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총재는 89년 4월 26일 회담을 갖고 합의문을 채택했다. 합의문과 함께 '당면과제'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5공청산과 민주화 = △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처리를 포함한 5공청산과 민주화 없이는 현시국의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없으며 정국을 안정시킬 수 없다 △ 5공청산은 최ㆍ전 전직대통령의 국회증언을 통한 진상규명과 이에 따른 책임소재가 밝혀지고 5공비리와 광주민주화운동 학살자들의 핵심 책임자들에 대한 처리가 이루어질 때 마무리되기 때문에 정부여당의 이에 대한 결단을 촉구한다 △ 또한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정부는 국민에게 사과하고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며 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에 필요한 입법예산 조치가 행하여지고 민주화 영령을 위한 기념사업도 마무리되어야 한다.
▲ 1노 3김의 유세 현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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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 총재는 이외에도 △ 노사 및 학원문제 △ 남북통일문제와 북방정책 △ 좌익세력과 민주인사문제 △ 경제문제 △ 악법개폐와 거부권행사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합의를 보고 공동투쟁을 다짐했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은 88년 3월 31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비리와 관련, 전두환의 친동생 전경환을 구속한 것을 시발로, △ 전두환 일가 비리조사 착수, 그리고 12월 13일 검찰에 5공비리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여 차규헌 전 교통장관, 김종호 전 건설장관, 이민하 전 동양고속회장을 구속하고, 이어 전두환 처삼촌 이규승, 손재석 전 문교장관, 이학봉 민정당 의원, 정주영 현대명예회장, 김인배 일해재단 사무처장,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을 구속 또는 조사하여 사법조처했다. 검찰은 5공비리사건에 대한 수사를 통해 47명을 구속했고 2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 1노 3김 제13대 대선 벽보(198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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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야당은 검찰수사를 '축소지향'이라고 비판하면서, 5공핵심 6인, 즉 정호용(광주항쟁 당시 특전사령관), 이원조(5공시절 은행감독원장) 의원 및 이희성 주공이사장(광주항쟁 당시계엄사령관)의 공직사퇴와 장세동, 허문도(언론탄압), 안무혁(양대선거 당시 안기부장으로 선거부정 관련) 3인의 사법처리를 강력히 요구했다.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일해재단청문회'는 장세동과 정주영 등을 증인으로 소환, 기금모금의 강제성, 정경유착의 실태, 청와대경호실과 보안사 등 권력촉수의 전횡 등을 폭로 했다. 11월 18일부터 광주학살 피해자를 비롯, 김대중ㆍ이희성ㆍ정호용 등 65명의 증인을 출석시켜 6차례에 걸쳐 진행된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는 5ㆍ17비상계엄확대 조치의 불법성, 공수부대 지휘책임, 발포책임자, 정확한 사망자 수 등은 끝내 밝히지 못했다. '언론청문회'는 11월 21일부터 허문도ㆍ이상재ㆍ허삼수 등을 소환, 언론인 숙정ㆍ언론통폐합 등이 신군부의 언론장악 음모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냈다.
청문회를 통해 각종 비리가 폭로되는 한편 전두환 친형 전기환, 처남 이창식 등 친인척이 잇따라 구속됨으로써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전두환은 11월 23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 정치자금 139억 원과 연희동 사저 등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밝히고 강원도 백담사로 쫓겨가듯이 은둔했다.
그러나 노 정권은 야당 주장의 5공핵심 6인의 사법처리를 비롯하여 청문회에서 드러난 각종 비리의 처리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 문익환ㆍ황석영ㆍ서경원 등의 방북사건, 울산사태 등 잇단 사건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5공청산 작업을 크게 위축시켰다. 특히 5공 핵심 6인 처리문제에 관해 김영삼ㆍ김종필이 3야 총재의 합의선에서 후퇴, 민정당 쪽에 기욺으로써 야 3당 공조를 흔들고 5공청산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야권공조체제가 무너지면서 5공청산작업은 지지부진해졌고, 89년 12월 15일 청와대 영수회담 끝에 ① 전두환의 1회 국회증언 및 녹화중계 ②정호용ㆍ이희성의 공직사퇴, 이원조의 고발 ③광주시민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입법추진 등 11개항의 타협안에 여야가 합의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12월 31일의 전두환 국회증언은 광주의 발포를 '자위권발동'이라고 강변하는 등 변명으로 일관, 야당의원들의 야유와 폭언 속에 파행적으로 끝났다. 이로써 국민의 여망을 담은 5공청산작업은 큰 성과 없이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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