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6.10.4.19(민주화운동)외 형제복지원.실미도 등 등..56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22대 국회서 실현되나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22대 국회서 실현되나김호경 에디터haojing610@mindlenews.com다른 기사 보기 22대 국회에 바란다입력 2024.05.18 16:10수정 2024.05.20 20:20192석 거대 야권, 이구동성 다짐…여당도 찬성 표명'제7공화국' 개헌안 포함, 또는 '원포인트 개헌' 가능윤석열, 대선 공약이었지만 기념식서 한마디 안 해이재명 "약속 이행해야…더 이상 5‧18 폄훼 안 돼"87년 개헌 땐 민정당, 2018년 발의 땐 자한당 반대이번엔 '헌법의 얼굴'에 숭고한 의미 명확히 담아야제44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18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등 지도부가 유족 및 피해 당사자에게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전해듣고.. 2024. 5. 20. "무기를 모두 옮겨라"... 5·18 이튿날 전두환 거품물게 한 경찰이 있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무기를 모두 옮겨라"... 5·18 이튿날 전두환 거품물게 한 경찰이 있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김종성2024. 5. 17. 20:33 [김종성의 히,스토리] 전라남도경찰국 안병하 도경국장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 ▲ 전남지방경찰청이 세운 안병하 치안감 흉상ⓒ 연합뉴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실정법 준수가 큰 의미가 없었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실정법을 뛰어넘는 저항권 행사가 용인될 수 있었다. 광주시민들이 전두환과 신군부를 향해 총을 들고 무장한 것은 정당한 권리행사였다. 그런데 또 다른 형태의 저항으로 볼 만한 상황이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다. 이른바 준법투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안병하 도경국장이 이끄는 전라남도경찰국에 의해 전개됐다. 신군부.. 2024. 5. 18. [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⑥]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거리 위 언론인의 노래 [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⑦] 이근안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2024년 05월 03일 18시 00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일곱번째 글은 박종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이 썼습니다. - 편집자주 .. 2024. 5. 1. '내가 귀한 우리 아들 죽였다' 아내마저 떠나버리고 '내가 귀한 우리 아들 죽였다' 아내마저 떠나버리고 [민병래의 사수만보] 민병래입력 2024. 3. 2. 15:09 [사수만보] 87년 9월 8일 7327부대에서 숨진 최우혁 이병의 아버지 최봉규, 형 최종순 ②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 [글쓴이: 민병래(작가)] - 1편 에서 이어집니다. 부검은 9월 9일 오후 4시에 진행되었다. 최봉규는 산부인과 의사인 친구, 아들 최종순, 처조카, 우혁이 친구 용석이와 함께 부검장으로 들어갔다. 이기범이라는 대위가 우혁이의 군복을 벗기고 가슴에 칼을 대는 순간 최봉규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휘청대는 몸, 땅이 꺼지고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두 시간이 지났을까. 군검찰관은 "기관지.. 2024. 3. 2. ‘서울의 봄’ 이후 5·18…“발포 명령 실질 결정권자는 전두환” ‘서울의 봄’ 이후 5·18…“발포 명령 실질 결정권자는 전두환” 5·18진상조사위 조사 결과 요약문 발표 “최세창, 윗선과 통화 후 ‘위급하면 발포’” 기자정대하 수정 2024-01-13 00:31 등록 2024-01-12 15:12 영화 ‘서울의 봄’ 한 장면.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윗선에 통화를 한 후 ‘위급상황에는 발포하라’는 명령을 했다.” 지난 11일 광주에서 열린 ‘오월의 대화’ 시민토론회에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가 발표한 조사활동 요약문의 내용이다. 조사위는 1980년 5월20일 광주역 앞 첫 집단발포와 관련한 김길수 3공수여단 16대대장의 진술을 확보했다. 진술 내용은 “(1980년 5월20일) 이날 밤 실탄 배분과 발포 명령은 최 여단장.. 2023. 12. 9. 실화 영화 ‘서울의 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 사건 아던트뉴스 2023.11.02 11:20:56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기 위한 9시간의 일촉즉발을 그린 영화다.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계기인 12.12 군사 반란은 노태우, 전두환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 중심이던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 반란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면서 군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김성수 감독은 12.12 군사 반란 이야기를 모티브로 영화를 제작했다. 그는 서울의 봄을 영화로 만들게 된 이유는 실제로 자신이 그날 밤 직접 들었던 총성을 꼽았다. 김성수 감독은 "그때 당시 한남동에 살았다. 육군참모총장 공관.. 2023. 12. 2. 6월10일 민주항쟁 6월10일 민주항쟁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로부터 6월 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의 '6·29특별선언'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총인원 400~500만 명이 참여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민주헌법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을 요구했던 국민들의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시위였다. 1980년대 들어 정부의 자율·민영화 정책, 부실기업 정리를 통한 대기업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등은 대기업의 자본 축적을 강화시켰다. 한편 경제개방의 일환으로 추구되었던 개방농정(開放農政)은 농촌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결과 자본가와 근로자·농민 간의 사회적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나아가 1985~87년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호황 아래에서 이룩한.. 2023. 11. 13. 주먹밥과 사람대접... '서방의 주먹'은 왜 광주를 지켰나 주먹밥과 사람대접... '서방의 주먹'은 왜 광주를 지켰나 [황광우의 역사산책21]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살아 있는 자의 증언 23.09.23 19:18l최종 업데이트 23.09.23 19:18l 황광우(madox58) ▲ 김태찬씨 광주를 지킨 이유로 주먹밥을 해 주며 등을 토닥여준 아주머니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살아 생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았다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총을 쥐고 광주를 지킨 것은 어찌 보면 주먹밥을 해 주며 등을 토닥여 준 아주머니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살아생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았어요." 2021년, 나는 를 작업하고 있었다. 그 무렵 어느 선배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어이, 광우. 항.. 2023. 9. 23. [기자수첩] 5·18 광주 앞에 부끄러운 1980년의 지면, 2013년의 화면 JTBC와 김명국(가명)/정명운(실명)의 인터뷰https://youtu.be/vtL77i1lGTYJTBC와의 추가 인터뷰를 통해 탈북 군인 출신인 김명국(가명)은 기존의 5.18 북한 개입설을 지어낸 이유와 배경들을 설명했다. 이후 김명국은 스스로 얼굴과 실명의 공개를 요청했고 JTBC는 그의 동의 아래 공개했다. 공개된 실명은 정명운이다. 유튜버 등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다.[기자수첩] 5·18 광주 앞에 부끄러운 1980년의 지면, 2013년의 화면기자명 정철운 기자 입력 2023.05.19 11:34 수정 2023.05.24 14:59반성 없으면 언론의 잘못은 반복되고 치러야 할 대가는 늘어난다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지난 16일 ‘북한 특수군 투입설’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980년 5.. 2023. 5. 25. 이전 1 2 3 4 5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