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22대 국회서 실현되나
192석 거대 야권, 이구동성 다짐…여당도 찬성 표명
'제7공화국' 개헌안 포함, 또는 '원포인트 개헌' 가능
윤석열, 대선 공약이었지만 기념식서 한마디 안 해
이재명 "약속 이행해야…더 이상 5‧18 폄훼 안 돼"
87년 개헌 땐 민정당, 2018년 발의 땐 자한당 반대
이번엔 '헌법의 얼굴'에 숭고한 의미 명확히 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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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제기됐다가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곤 했던 5·18 정신의 헌법 전문(前文) 수록 과제가 22대 국회에서는 실현될지 주목된다.
지난 총선을 통해 개헌선(재적의원 3분의 2인 200석)에 근접한 192석을 확보한 거대 야권에서 4년 중임제 도입, 대통령 거부권 행사 제한 등 '제7공화국' 개헌 추진을 위해 이미 군불을 때고 있는 가운데 특히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은 반드시 이행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다짐하는 상황이다. 여당에서도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거듭 찬성 입장을 표명해 왔기 때문에 '원포인트 개헌' 등을 통한 실현 가능성을 두고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44주년인 18일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대선 공약이었던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이 대표는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기념식 참석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개인들은 돈 10만 원을 빌릴 때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받는데 국민 주권을 위임받는 대신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사기죄보다도 더 엄중한 범죄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어 "윤 대통령께서 오늘 기념식에 참석해준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나 한편으로 아쉬운 것은 대선 때 명백하게 공약했고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공약한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해서 한마디 말씀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천과 행동으로 그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면서 "반드시 헌법 전문에 수록해 다시는 국민이 준 총칼로 국민을 집단 대량 살상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 약속을 지키실 수 있도록 국회 차원에서 저희가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앞서 이 대표는 이날 오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역사의 법정에 시효란 없고 온전한 진상규명만큼 완전한 치유는 없다. 민주당은 5‧18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는 데 앞장서고 국가폭력 범죄는 반드시 단죄 받는다는 상식과 원칙을 바로 세우겠다"며 "더 이상의 5‧18 폄훼와 왜곡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또한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 그것이 '산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오월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라 믿는다"고 밝혔다.
이날 제44주년 기념식에서도 그 같은 요구가 표출됐다. 내빈으로 앉아 있던 광주시의회 5·18 특별위원회 소속 시의원 8명은 윤석열 대통령의 기념사가 시작되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5·18 헌법 전문 수록'이라는 문구가 한 글자씩 적힌 손팻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이들은 그렇게 기념사 내내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5분 18초간 기념사를 낭독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집권 3년 차에 들어섰음에도 자신의 공약을 이행할 의지가 없음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돼 야권의 비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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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슬러 올라가자면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은 이미 37년 전에 정치권에서 구체적으로 시도된 적이 있다. 1987년 민정당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 직후 여야 핵심 인사들로 구성된 8인 정치회담에서 헌법 개정안을 협상할 당시 현 민주당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민주당의 개헌 시안에 다음과 같은 헌법 전문 개정안이 포함돼 있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독립정신 위에 건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제1공화국을 재건하였으며 4·19의거와 5·18광주의거로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하여서는 단호히 거부하는 국민의 권리를 극명히 하였고…."
그러나 8인 정치회담 협상에서 민정당 측은 "역사적 평가나 가치가 확립되지 않은 일부의 주장을 전 국민적 합의가 담긴 전문에 넣는 것은 곤란하다"고 극력 반발해 결국 '5·18광주의거' 삽입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개헌 논의가 수시로 불거질 때도 이 부분은 거의 재론되지 않았고 주로 대통령 연임제냐 내각제냐 등 권력구조 개편 이슈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야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의 헌법 전문 수록을 포함한 정부 개헌안을 2018년 3월 직접 발의했지만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이 개헌 자체에 반대해 또 다시 물거품이 된 바 있다.
헌법 전문은 국가의 기본 원리와 추구하는 가치, 건국이념 등을 담고 있어 '헌법의 얼굴'이라고도 표현된다. 이를 통해 그 국가의 정신을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가령 미국 헌법의 전문에는 "우리들 합중국 국민은 보다 완벽한 연맹을 형성하고, 정의를 확립하고, 국내의 평화를 보장하고, 국민복지를 증진하고, (중략) 우리들과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유의 축복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 아메리카합중국 헌법을 제정한다"라고 돼 있다. 프랑스 헌법 전문은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최상위법이자 기본법이며 모든 법질서의 정점에 위치한 헌법의 전문에 5·18 정신을 명기함으로써 지금도 계속되는 '폭도' '빨갱이' '북한군' 운운의 반역사적 왜곡과 퇴행을 막고 숭고한 민주화 운동으로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국민들 인식 속에 명확하게 자리 잡도록 하자는 게 헌법 전문 수록의 취지다. 불법 쿠데타 세력인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와 국가폭력에 맞서 민중이 사회적·정치적 주체로서 저항권을 행사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고 민주적·법치주의적 국가질서를 회복하려 한 '시민혁명'이자 '주권혁명'으로서 5·18 민주화운동의 의미와 성격을 헌법적 가치로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개정할 수 있다. 문구 자체가 어렵거나 복잡한 것은 아니다. 다만 결단의 문제일 뿐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과 국가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한 5·18민중항쟁정신(또는 5·18민주화운동정신)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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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해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진보당은 물론 개혁신당도 22대 국회에서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는 전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내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며 "윤석열 대통령도 약속했던 바이고 국민의힘 지도부도 여러 차례 동의했던 만큼 더 이상 미루지 말고 22대 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도록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헌법개정특위 위원장인 윤호중 의원은 지난 13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을 제한하고 대통령도 국회의장처럼 당적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개헌을 제안하면서 5·18 수록도 함께 언급했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18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불행하게도 현행 헌법이 만들어진 1987년에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판단이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 법률과 판례로 5·18민주화 운동이 불법한 국가권력에 맞서 싸웠다는 정당성이 확인됐다. 법률적 복권이 이뤄진 것"이라며 "이제 헌법 전문에 수록되는 일은 마땅한 일이다. 저희 조국혁신당이 앞장서겠다"고 천명했다. 조 대표는 전날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을 통해 "2026년 6월 지방선거 전에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대선을 지방선거와 함께 실시하자"며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하는 동시에 4년 중임제로 바꾸는 '7공화국 7대 개헌안'을 제시하면서 5·18 수록도 포함시켰다.
진보당 윤희숙 상임대표와 전종덕 당선자도 이날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그 당위성을 역설했다. 22대 국회에 첫 입성하게 된 전종덕 당선자는 "5·18 영령들과 민족민주열사들 앞에서 결의를 다진다. 5·18민중항쟁 헌법 전문 수록으로 5·18 역사 왜곡과 폄훼에 종지부를 찍겠다"면서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말만 하지 말고 5·18민중항쟁 헌법 전문 수록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이주영·천하람 비례대표 당선자와 함께 지난 15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면서 총 7시간 30분에 걸쳐 전체 995기 묘의 비석을 일일이 닦고 헌화한 뒤 절을 올린 바 있다. 헌화에 쓰인 꽃은 경남 김해에서 재배된 국화 1000송이로 이날 새벽 이 대표가 김해에서 차를 직접 운전해 5·18 묘역까지 운반한 것이다. 이 대표 역시 이 자리에서 "개헌할 때 5·18 정신을 헌법에 담는 부분은 정당 간 반대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원포인트 개헌보다는 포괄적으로 (개헌 논의를 해서) 5·18 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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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당인데, 일단 공개적으로는 동참 의사를 누차 공언해왔다. 국민의힘 윤희석 선임대변인은 18일 논평에서 "5·18 정신은 더 이상 특정 정치세력의 상징이 아닌 온전한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국민의힘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한다는 입장을 이미 밝혔다"며 "여야 간 초당적 협의를 기반으로 5·18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될 수 있도록 적극 나서겠다. 집권 여당의 무거운 책임감으로 5·18 정신이 온전하게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지난 16일 5·18 관련 단체들과 간담회를 갖는 자리에서 같은 입장을 밝혔었다.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은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획을 그은 5월 정신 그 자체가 헌법 정신이란 점에서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은 매우 마땅하다. 제반 여건이 무르익으면 여야 간 초당적 협의를 토대로 개헌을 통해 반드시 담아내야 한다"고 했고, 추경호 원내대표도 "5·18 민주화운동 관련 취지와 앞으로 당의 방향성에 대한 비대위원장의 말씀에 전적으로 궤를 같이한다"고 말했다. 성일종 사무총장은 기자들에게 "헌법 전문에 들어가야 한다는 건 국민 사이에 어느 정도 컨센서스가 있고 많이 동의하고 있다"면서 "개헌은 국가 틀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원포인트'로 할 수 있는지는 여야 원내 전체적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전했다.
“5·18 진압작전 종료 후에도 민간인 사살”
YMCA 건물에 숨어있다가 나온 김종연씨 총격
도움 요청하는 김씨 재사격, 현장사망
43년만에 프랑스 사진작가 증언·사진으로 확인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시민군. 1980년 5월 22일 기관총 뒤의 시민군은 근년에 신원이 확인된 차복환씨다. 눈빛출판사 제공
철모와 카빈총으로 무장한 시민군 모습. 눈빛출판사 제공
1980년 5월 5·18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이 진압작전이 종료됐는데도 민간인을 총격으로 쓰러뜨리고 부상한 상태에도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는 16일 대국민보고회를 통해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인근에서 진압작전이 종료된 직후 진압군이 민간인을 사살한 사실을 프랑스 사진작가의 연속사진과 증언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사위에 따르면, 진압군은 전남도청 인근에 있는 YMCA 건물에 은신해 있다 밖으로 나온 김종연씨를 가까운 거리에서 총격했다. 진압군은 이어 쓰러진 채 전일빌딩 8층에서 취재하던 파트리크 쇼벨을 향해 손을 들어 “헬프 미”라고 소리치며 도움을 요청하는 김씨에게 다시 총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진압군은 이때 YMCA 앞을 지나가던 장갑차 위에서 전일빌딩 8층에 있는 쇼벨을 향해서도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쇼벨이 몸을 숨겼다가 다시 창밖을 내다보니 김종연은 쓰러져 있었고, 한참 후 김씨가 쓰러져 있는 현장에 가보았으나 그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는 것이다. 김씨의 검시 보고서에는 ‘전신 다발성 총상에 의한 사망’으로 적혀 있다.
쇼벨은 지난 6일 43년만에 광주를 방문해 이같은 사실을 증언했으며, 당시 그는 김씨의 모습을 연속 사진으로 촬영하였다.
조사위는 쇼벨을 향해 총격을 가한 장갑차 사진 속의 진압군을 특정해 현장 상황을 종합적으로 재확인하는 조사도 이어가고 있다. 또 쇼벨이 27일 진압작전 종료 후 전남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에서 윤상원 열사 시신을 촬영할 당시 다른 사망자들이 더 있었다고 밝혀, 조사위는 이에 대한 조사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전두환, 5·18 당시부터 북한 개입설 유포
22일 "공수단 복장 괴한들 광주 탈출 시도"
한달 뒤 "미확인 시신들 북한 간첩일 수도"
경찰·언론, '이창용 간첩 사건' 광주와 연계
80위원회, 육군대책위, 511위 일부 인사 왜곡조작 확인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27일 광주 북구 망월묘지공원 인근 도로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풍자한 작품 518점을 실은 트럭이 줄지어 달리고 있다. 작품은 5·18 40주년 저항의 밤 문화제가 열리는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으로 집결한다. 2020.6.27. 연합뉴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과 조작이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일부 확인됐다.
16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대국민 보고회를 통해 밝힌 조사 내용에 따르면, 전두환씨는 5월 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2일 언론사주들과 간담회에서 “지금 공수단 복장 괴한들이 광주를 빠져나가려 하고 있어 해안선 등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다”라고 발언했다.
전씨는 같은 해 6월 14일 미국상공회의소 관계자 면담에서도 “미확인 시신 22구가 있는데 이들이 전부 북한 간첩일 수 있다”라고 언급하는 등 전씨가 5·18 당시부터 광주 상황을 북한과 연계시키는 발언을 한 사실이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
또 5월 24일 서울시경찰국이 ‘광주 시위선동 임무를 띠고 남파된 간첩’ 이창용을 검거했다고 발표하자, 언론 역시 일제히 같은 제목으로 보도함으로써 5·18민주화운동이 북한 간첩의 선동으로 조종된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간첩 이창용은 5월 16일 전남 보성 해안으로 침투 후 서울, 부산, 순천 등을 전전하였고, 광주는 잠입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검거 기자회견은 제대로 수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광주 상황을 북한의 사주와 선동으로 왜곡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급조된 것으로 조사위는 판단하였다.
조사위는 정보기관과 군이 전씨와 신군부 세력의 집권 정당성을 확보하고 불법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기록을 조작하고 왜곡을 일삼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확인하고 있다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5년 5·18 진상규명 요구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자 범정부 차원의 광주사태진상구명 실무위원회(일명 80위원회)를 조직해 대응했다.
이어 1988년 국회 청문회를 앞둔 상황에서는 국방부 차원의 511위원회, 보안사의 511 대책반을 결성했는데 조사위는 이들이 군 기록을 변경하고 계엄군 체험수기 내용을 변조했는지 등을 확인하고 있다. 특히 ‘육군대책위원회’ 관련 계엄관리 장교 한모 외 3명, ‘511위원회’ 관련 전담실무위원 서모 외 4명, ‘511분석반’ 관련 분석반장 조모 외 2명을 조사하여 이들이 일부 왜곡 및 조작에 관여한 사실을 확인했다.
조사위 관계자는 "기록 조작, 변조에 직·간접으로 개입된 인사들에 대한 대인 조사에 중점을 두고 조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진압군, 20여곳에서 50여회 시민 상대 발포
5·18 조사위 발표, 135명 사망·300여명 부상
머리, 가슴 등 치명적 부위 총격 많아
도청 앞 발포 때 인근 건물에 망원 저격수 배치
희생자 166명 중 25명 미성년 여성 장애인 노인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전남 일원에서 20곳 이상에서 50여 차례에 걸쳐 진압군이 시민을 향해 발포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발표했다.
조사위는 16일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대국민 보고회를 갖고서 광주 전남 지역의 계엄군 진압 작전을 재구성한 결과 이같이 집계됐으며, 병원진료 기록과 보상심의 서류를 분석한 결과, 총상에 의한 사망자는 총 135명이고 총상에 의한 부상자는 300명 이상이라고 말했다. 특히 많은 피해자가 두부 및 흉부 등 치명적 부위에 총격을 당했다고 조사위는 덧붙여, 총격이 매우 공격적으로 자행된 것으로 확인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16일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대국민 보고회를 갖고 있다. 가운데가 송선태 위원장, 오른쪽이 안종철 부위원장.
조사위에 따르면 계엄군의 첫 발포는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께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시작됐다. 이어 20일 오후 11시께 광주역 인근에서 발포가 이뤄졌고, 21일에는 11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이 배치된 전남도청 일원과 3공수여단이 배치된 전남대 일원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대 앞, 학동, 지원동, 송암동 등 계엄군이 배치된 대부분 작전지역에서 발포와 그에 따른 피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도청 앞 집단 발포 상황에서 공수부대는 흩어져 횡대로 ‘앉아 쏴’와 ‘서서 쏴’ 자세로 동시에 여러 곳에서 사격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조사위는 말했다. 나아가 공수부대는 망원조준경을 장착한 저격수를 전남도청 인근의 주요 건물(전남도청 본관, 민원실, 수협 도지부, 전일빌딩 등)에 배치한 후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고, 이 저격 사격으로 여러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도청 앞 집단 발포는 우발적인 총격이 아닌 의도적인 발포였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43년이 지난 지금도 몸 안에 박힌 총탄을 제거하지 못한 채 후유증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다수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진압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사망자 166명 가운데 14세 이하의 미성년자가 8명, 여성이 12명, 장애인 및 60세 이상의 노령자가 5명이었다. 조사위는 저항 능력이 없거나 시위와 무관한 다수의 민간인이 계엄군의 폭력적 진압과정에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장애 9등급 이상의 중증 피해자들을 분석한 결과 5월 18일 이후 날짜가 지날수록 시위 진압은 갈수록 폭력성이 심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5월 18일 부상자 442명 중 44명(10%), 19일 부상자 431명 중 58명(13%), 20일 부상자 308명 중 59명(19%), 21일 부상자 346명 중 108명(31%)이 장애 9등급 이상의 중증 장애를 얻었다. 상해의 유형을 분석한 결과, 전체 피해자의 70% 이상이 상체에 피해를 입었으며, 사상자들을 방치하거나 응급처치 등의 과정 없이 트럭에 실어 연행하면서 피해가 더 심해졌다는 사실도 발견했다는 것이다. 진료기록과 보상심의서류로 분석 가능한 상해 피해는 2617명으로 집계됐다.
조사위는 또 발포 지휘계통과 연관된 중요인물 70여 명을 조사한 결과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발포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며 첨단 조사기법을 동원해 책임 소재를 명료하게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김모 대령은 “10·26 후 이희성은 실권이 없는 사람이었고, 참모차장 황영시가 광주 진압작전의 실질적 사령관이었는데 황영시를 움직인 사람은 전두환 사령관”이라고 조사위에 밝혔다.
아울러 코브라 공격헬기에서 20㎜ 벌컨 연습탄 사격이 이뤄진 정황이 발견됐다. 조사위는 2022년 3월 헬기 사격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 조선대 절토지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20㎜ 벌컨 연습탄두 1개를 발견했다. 벌컨포 특성상 단발 사격은 불가능해 주변을 수 차례 추가 조사했지만 탄두를 더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조사위는 밝혔다.
조사위는 2018년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2019년 12월 26일 시행됨에 따라 만들어졌다. 조사는 오는 12월 26일에 종료되며, 조사위는 내년 6월 종합보고서를 채택해 대정부 권고안을 제시하게 된다.
"금남로, 너의 붉은 피" 역사의 뒷것이 남긴 '오월의 노래'
1980년 광주 참상과 살아남은 자들의 각오 담아
민주화 한 세대 지나도 모습 드러내지 않는 작사가
멜로디는 폴나레프 샹송과 박인희 번안곡서 따와
"그날 장군들 금빛 훈장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다"
붉은 피 솟는 우리들의 오월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의 부릅뜬 눈 /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자들아 동지들아 /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 역사 /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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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오월이 오면 이 노래를 부른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가장 널리 불린 곡 가운데 하나다.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은 강렬했다. 이 노래 가사 1절과 2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몽둥이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쏘았다. 젊은이들을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갔다. 여고생은 대검으로 가슴이 잘렸다. 계엄군의 폭력에 턱이 깨지고 머리가 함몰된 주검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5월 광주였다.
그러나 군사정권과 주구들은 광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했고 계엄군의 폭력을 고발하면 유언비어로 날조했다. 진실을 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쳤다. 그 결과 1995년 전두환, 노태우는 감옥에 갔고 1997년부터 ‘5·18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됐다. 망월묘역은 5.18 국립묘역이 됐다.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제자리를 잡기까지 17년이 걸렸다.
'축하' 화환과 '방아타령'
그렇지만 오월 광주에 대한 모욕과 조롱은 여전하다. 잊을만하면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이라고 이야기하는 자가 나타났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광주 타령이냐며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정부 공식기념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하고 <방아타령>으로 대신했다. 기념식장에 축하 화환을 보낸 정치인도 있었다. 가짜 민주화유공자가 있다며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는 주장도 끊이지 않는다. 오월 광주를 비하하고 욕보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망동은 멈추지 않는다.
오월의 노래
김원중의 '바위섬'
어둔 시대 광주의 아픔을 노래한 <바윗돌> <바위섬>
반면, 오월 광주를 소재로 한 노래는 정오차의 <바윗돌>과 김원중의 <바위섬> 정도로 몇 편 안 된다. 이마저도 은유와 상징으로 슬픔과 아픔, 분노를 삼키는 특징이 나타난다. 정오차는 <바윗돌>로 1981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뒤 TV 인터뷰에서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말하자 바로 금지곡으로 묶였다. 광주의 아픔을 다룬 노래가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했으니 정권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김원중은 "세상 사람들 하나둘 모여들더니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라는 노랫말에 나타나듯 광주항쟁에 모인 시민들과 폭압적 진압을 폭풍우에 비유하며 고립된 광주를 '바위섬'에 빗대어 노래했다. 사실 이 노래는 배경을 모르면 <등대지기>처럼 서정적인 노래로 들리지만, 속뜻을 알고 들으면 그렇지 않다. 특히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 아무도 없지만 /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는 대목은 더 이상 서정적이지 않게 들린다. 슬픔을 딛고 살아남은 자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역사의 ’뒷것‘으로 남은 작사가
<오월의 노래>는 앞의 노래와는 다르다. 멜로디는 기존 곡을 빌렸지만, 가사는 사실적이고 직설적이다. 특히 1, 2절과 3, 4절 가사의 결이 다르다. 1, 2절은 광주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3, 4절은 산 자의 결의를 담고 있다. 이 노래 덕분에 많은 이가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되었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한길을 갈 수 있었다.
미셀 폴나레프(Michel Polnareff) -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Qui a tué grand maman?). 2007년 라이브
그런데 이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처음 불렀는지는 모호하다. 광주항쟁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노래치곤 의외다. 대략 1983-4년경 이 노래가 나온 것으로 추정한다. 1, 2절이 먼저 나오고 3, 4절은 덧붙여졌다고 생각된다. 5공 당시 엄혹한 분위기에서 만든 이가 자신을 드러내기는 어려웠음은 이해하지만, 4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퍼뜨렸는지 공백으로 남아 있다.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지났으니 만든 이가 나타날 법한데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알면서도 입 다문 이들도 마찬가지다. 소임을 다했으니 역사의 ’뒷것‘으로 남겠다는 생각이었으리라.
미셀 폴나레프의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와 박인희의 번안곡에 가사 붙여
<오월의 노래> 멜로디는 늘 라이방 선글라스를 써서 이른바 '라이방 가수'로 알려진 미셸 폴나레프의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Qui a tué grand maman?)>에서 따왔으나 원곡과 약간 다르다. 1974년 박인희가 이 노래를 번안한 <사랑의 추억>에 더 가깝다. 아마도 <오월의 노래>를 만든 이는 박인희 노래를 꽤 좋아했나 보다. 폴나레프 노래에 가사를 붙였다기보다 전형적인 사랑 노래인 박인희의 번안곡을 개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단조인 멜로디와 가사가 잘 어울렸다.
박인희의 '사랑의 추억' (1974)
원곡으로 알려진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는 1971년작으로 재개발에 저항하다 죽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다. <오월의 노래>와 맞닿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 노래는 미셸이 자신을 데뷔시킨 프로듀서 뤼시앙 모리스가 자살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다. 왜 미셸이 남자인 뤼시앙을 할머니로 표현하면서 이 노래를 추모곡으로 삼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태춘은 <5.18>에서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고 노래한다.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고 소년들의 무덤 앞에,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말이다. 그날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은 죽었어도 아직 땅에 묻히지 못했다. 유골함에 담겨 연희동 집에 있다. 지은 죄가 크니 편히 쉬지 못한다. 업보다.
정태춘의 '5.18' (1995)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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