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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캐네디 대통령 암살

by 무궁화9719 2021. 8. 5.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내리라.

Mankind must put an end to war, or war will put an end to mankind

존 F. 케네디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중인 달라스 국정 교과서 저장 창고 건물.

                                       저격장소인 6층의 창문을 열어놨고  아스팔트에는 저격된 장소를 표시해놨다.)

 

과거 올리버스톤 감독의 다큐영화인 <JFK>에서 영부인 제클린이 옆에 앉아있던 케네디의 두개골 총상으로 뇌가 튀어나오자 혼비백산해서 차 뒤쪽으로 간줄 알았는데 이번에 다큐멘터리를 보니 깨져서 차 뒤쪽으로 튀어간 남편의 두개골 조각들을 줍고 곧바로 다시 남편 옆으로 가서 앉는 장면을 보게되었다. 이성을 잃어버릴 만한 공포스런 상황에도 남편을 떠나지 않는 고귀한 책임감과 사랑이 존경스럽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에서 암살된 후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남편 케네디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재클린 여사를 바로 옆에 세워놓고 부통령이던 린든 B.존슨(Lyndon Bainson johnson)이 취임식선서를 하는 모습이다. 오른쪽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있는 재클린 케네디 옷에는 아직도 죽은 남편의 피가 묻어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비행기 안에서 대통령 선서를 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겁니다.

 

 

https://youtu.be/9TwJzRASxJQ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1963년 11월 22일 리 하비 오즈월드가 제35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를 살해한 사건.

 

미국 역사상 4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일어난 미국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매킨리 대통령 암살 이후 62년만에 일어난 암살 사건이자 암살 사건 중 유일하게 현대에 일어난 데다 수많은 관중들과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 도중에 암살당했기에 그만큼 사회적 파장과 충격이 큰 사건이었다. 거기다 용의자로 추정되는 오스왈드 또한 연행되는 과정에서 암살되어 동기와 배후에 대해 알 수 없게 되어 수많은 음모론으로까지 이어진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댈러스에 살던 에이브러햄 저프루더라는 시민이 홈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퍼레이드를 촬영하러 나왔다가 암살 장면을 녹화했다. 이후 저프루더 필름은 케네디 암살을 담은 가장 유명한 영상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첫 발은 빗나가 길바닥을 맞혔으나 또 다시 총성이 울려퍼졌고 두 번째 총탄이 케네디의 목을 관통한 후 앞좌석에 있던 존 코널리 주지사까지 부상을 입혔다. 옆좌석에 앉아 있던 재클린 케네디 여사는 남편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남편에게 손을 뻗는데 이때 3번째 총탄이 발사되어 목을 부여잡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해 버렸다. 병원 도착 당시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쓰러진 케네디 대통령을 태운 차 내부는 피로 흥건했다고 한다. 링컨 컨티넨탈은 특수 제작된 차량으로 방탄 기능이 있었지만 퍼레이드를 위해 지붕을 열어 둔 상태였기 때문에 방탄 기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머리를 저격당한 직후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차량의 후방 보닛으로 올라타는 장면이 있는데 뇌조각을 줍고, 뒤에서 올라타는 경호원을 잡아주기 위함이라는 의견이 정론이다.

 

사망 후, 케네디 대통령의 시신은 영부인 및 존슨 부통령과 함께 에어 포스 원으로 이동, 워싱턴 D.C.로 향했다. 존슨 부통령은 법적 절차에 따라 기내에서 선서를 하고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미국 정부는 사건이 벌어진 지 약 1시간 후인 오후 1시 30분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것을 알렸고 경찰과 FBI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엘름가 교과서 건물을 포위해 건물 6층에서 탄피 3개와 암살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 총기를 발견했다.

 

경찰은 대대적으로 암살범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사건 발생으로부터 2시간쯤 뒤 근처 극장에 숨어있던 교과서 보관 직원이었던 미합중국 해병대 출신의 리 하비 오즈월드(Lee Harvey Oswald)를 암살 혐의로 체포했다. 그러나 오즈월드는 자신의 범행 사실을 부인함과 동시에 "나는 봉(patsy)이다."라고 주장했다.

 

암살자도, 그 배후나 목적에도 불분명한 점이 많고 암살자로 여겨지는 자가 적절한 동기도 없이 살해되었고, 암살자를 살해한 범인의 동기마저 매우 의심스러운 가운데 이후 마틴 루터 킹로버트 케네디 암살 등이 이어져 9.11 테러와 함께 음모론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마법 총알 등의 상당수 의혹들은 여전히 의심을 사고 있다. 2017년 이후 의회가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된 기밀 서류를 해제할 것을 명령했으나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 모두 이를 거부했다. "모든 음모론의 어머니"라고도 불린다.

 

사실 총알이 몇 발이 날아왔는지, 어디서 날아왔는지조차 논란이 분분했기 때문에 이러한 음모론이 생긴 것은 불가피했다. 무엇보다도 황당한 것은 중요한 단서가 될 케네디 대통령의 를 현재 잃어버린 상태다. 뇌 조각을 짜맞춰서 총알이 날아온 궤도 및 각도 등을 알 수 있는데 이걸 잃어버린 바람에 암살자의 위치 및 공모자 여부가 전부 미지수로 남아 버렸다. 중요한 건 사건 당일 파크랜드 병원 의사들이 본 케네디의 상처와 워싱턴 베세다 해군병원에서 의사들이 본 케네디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이다. 오랜 동안 공식 기록은 파크랜드 병원 의사들이 본 것을 외면해왔다.

 

텍사스주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기에 텍사스에서 부검을 해야 했다. 비밀경호국이 물리력을 써서 워싱턴 베세다 해군병원으로 이송했다. 부검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이들에게 부검을 맡겼고 시신과 뇌는 비밀경호국에 의해 병원에서 강제로 이동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리고 정말 오즈월드 혼자 벌인 일인지, 아니면 배후가 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심지어 오즈월드는 실제 총격을 하지도 않았으며(그리고 가명으로 총기를 우편 구매하는 건 추적이 될 수 있기에 매우 위험한 방법이다) 오즈월드가 총을 쏘았다는 지문, 화약 잔사 등도 없고 경찰서에서 심문을 한 기록도 없다. 오즈월드가 너무나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해 아내 마리나는 러시아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제럴드 포즈너는 Case Closed에서 오즈월드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고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대다수는 숨겨진 배후가 있다고 믿는다.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책들도 여전히 출간 중이다.

 

케네디라는 전 세계 초강대국의 대통령이 고작 단독 암살범 한 명이 일으킨 사건에 허무하게 죽을 리 없다는 등의 인식 때문에 그렇게 믿는 듯 하다. 표현을 약간 바꾸자면 음모론이 너무 신빙성 있기도 하고. 수수께끼에 접근할 때 유용한 법칙이자 도구인 이득을 본 사람과 그 이득의 양을 탐색하는 데 다다르면 일종의 이득의 발생량이 정서불안자의 우연한 한 방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크다(심지어 오즈월드가 교과서 창고 빌딩에서 목격되었을 때, 살인을 저지른 이 치고는 너무 차분한 표정이었다).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대강의 정황이 아주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는 이상 군소문이 끊일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배후 지목도 결국 누구에게 어느 정도의 이득이 발생했는지가 핵심 용의 중 하나다.

이러한 음모론 때문에 영화나 게임을 비롯한 매체에서는 사실 오스왈드는 연막이고 케네디 암살은 "XXX 세력의 배후로 이루어진 것이다!"라는 소재를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암살 사건 당시 총성을 들었다는 제보가 여럿이다 보니 지금도 존재하는 딜리 광장(Dealey Plaza)의 '푸른 언덕(grassy knoll)'은 총성이 들린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시 놀의 펜스 뒤에서 뱃지를 단 이가 총격을 가했다는 '배지맨' 가설 등을 믿는 이들이 있다. 케네디가 총격을 받은 뒤 케네디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기 때문이다. 뒤에서(교과서 창고 빌딩) 쐈다면 케네디 고개는 앞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참고로 미국인의 80% 이상이 1964년 워런 위원회에서 내린 리 하비 오즈월드의 단독범행이라는 공식 결론보다는 외부세력이 개입했거나 사건이 은폐됐다는 음모론을 더 믿고 있다고 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도 공식 결론보다 음모론을 더 많이 믿고 있다. 심지어 마틴 루터 킹,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을 재조사하기 위해 1976년 미국 의회에서 발족한 하원 암살 위원회(HSCA)에서도 일부 하원의원들이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는 소수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음모론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도 케네디 암살 사건은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으로 믿지 않는 경우가 많기도 한 음모론이기도 하다. 그만큼 여러가지 의혹들이 많았던 사건이었다.

 

사실 케네디 암살 사건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는 린든 B. 존슨의 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진 대통령 취임선서였다. 이 취임선서에는 영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참석했는데 케네디 일가와 케네디의 측근들은 남편의 암살로 큰 충격을 받은 재클린 여사를 굳이 참석시켜야 했냐고 불만을 토해냈다. 이에 존슨은 케네디의 친동생이자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와의 협의 하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이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결국 두 사람의 주장 중 어느 쪽이 맞는 지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다음은 음모론에서 케네디 암살의 주체로 거론되는 것들이다. 2003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이 "암살 배후"로 꼽은 순서는 FBI/CIA 25%, 마피아 25%, 린든 B. 존슨 18%, 소련 15%, 쿠바 15% 순서였다.
 
  • FBI: FBI의 종신직으로 재직한 존 에드거 후버 국장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허풍 좀 보태서 불구대천의 원수 지간이었고 케네디가 그를 조만간 해임하려 하여서 죽였다는 설.
  • CIA: 존 F. 케네디는 CIA가 제3세계 서유럽에서 반공 극우파들을 지원하고 사회민주주의, 비동맹주의 성향 정치인들을 낙선시키려는 정책에 대해 평소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여기 관련된 사업가 클레이 쇼 는 짐 개리슨에게 CIA와 함께 배후 인물로 지목되었는데 그는 얼마 뒤에 급사했다. 조금 나간 주장 중에는 조지 H. W. 부시가 CIA 요원으로 연루되어있다는 주장도 있다. 린든 B. 존슨 암살 사주설이 미국 우파에게 지지를 받는다면 이쪽은 미국 좌파 쪽에서 지지받는 가설이다.
  • 군산복합체: 냉전 시대에 소련과의 갈등을 이용해서 무기를 팔아 이득을 얻어야 하는데 소련과 평화적 제스처를 내보이고 군비를 감축하려는 케네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케네디를 암살했다는 설. 실제로 아이젠하워 시기에 군비가 급격히 증가했고 후임자인 케네디는 너무 비대하다며 군비감축 움직임을 보여서 군부와 마찰이 상당히 심했다. 음모론에서 주로 미군 강경파와 엮여 있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아이젠하워의 군산복합체에 대한 경고 연설이 필수요소로 들어간다.

1963년 11월22일 미국 댈러스를 방문중인 존F.케네디 대통령이 낮 12시30분 무개차를 타고 재클린 케네디와

도심퍼레이드를 벌이든 중 암살범이 쏜 총탄 2발을 목과 머리에 맞고 숨졌다. 암살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46세의

젊은 나이로 대통령직을 3년을 재직한 후, 재선을 1년정도 남긴 당시, 젊고 유능한 대통령으로 재선이 확실시 되던

대통령의 죽음은 큰충격과 슬픔이였습니다. 그런데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지 48년 후인 2011년도에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여사가 증언한 충격적인 자료가 공개됐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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