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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9·11 테러

by 무궁화9719 2021. 8. 8.

9·11 테러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에 벌어진 항공기 자살 테러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3000명이 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테러 공격을 받은 세계무역센터 ⓒ Robert on Flickr ❘ CC BY-SA

 

 

 

 

 

 

 

테러 공격을 받은 펜타곤 건물 ⓒ TSGT CEDRIC H. RUDISILL, USAF ❘ Public Domain AA11편은 오전 8시 46분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의 93층과 99층 사이에 충돌했다. 승무원과 탑승객 전원(테러범 제외 87명)이 사망했다. 이어 9시 3분 UA175편이 남쪽 건물의 77층과 85층 사이로 충돌했다. 두번째 충돌 당시 첫번째 사고를 보도하기 위해 방송사 카메라들이 세계무역센터를 촬영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CNN 등 방송 채널을 통해 UA175편의 충격적인 충돌 현장은 전세계에 생생하게 중계됐다. 언론사들은 첫번째 충돌까지만 해도 끔찍한 항공 사고 정도로 보도했으나, 두번째 충돌로 계획적인 테러임이 명확해졌다. 여객기가 건물에 충돌하자 10만 리터 가량의 항공유가 타면서 격렬한 화재가 발생했다. 충돌 지점보다 상층에 있던 사람들은 계단이 붕괴되어 대피로를 찾지 못했고 수많은 이들이 열기와 연기를 못이겨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이러한 상황도 카메라를 통해 생중계됐다. 오전 9시 59분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먼저 무너졌다. 이어 10시 28분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고 이 잔해에 맞아 47층 높이인 세계무역센터 부속건물인 제7세계 무역센터 빌딩이 오후 5시 20분 33초경 붕괴됐다. 이외에도 주변의 다른 건물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수많은 소방대원과 의료진이 세계무역센터로 모여 수십층을 걸어 올라가 영웅적인 구조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수가 화재와 소음 등으로 붕괴 전 "건물이 붕괴되니 대피하라"는 무전을 듣지 못했고 343명이 목숨을 잃었다.

관타나모 수용소 인권 유린 논란

관타나모 수용소

ⓒ Kathleen T. Rhem | Public Domain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알 카에다와 아프가니스탄의 전 탈레반 정권에 연루된 외국인들을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관타나모 수용소에 구금했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쿠바 남동부 관타나무 만의 미 해군기지에 설치된 수용소다. 이 수용소에 가장 사람이 많았을 때는 700명 이상이 수감되기도 했다.

 

수용된 사람들은 재판과 같은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못하고 감금에 대해 항변하지도 못한 채 테러조직과의 연관 여부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또 이곳에서 심각한 고문행위가 자행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인권을 침해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당선 시부터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를 공언하고 자국 내 대체시설을 지을 부지를 선정하겠다는 구상을 밝혀왔으나, 공화당과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현실화시키지 못했다.

 

조지 부시 '테러와의 전쟁' 선언

미국 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 체류 중일 것으로 추정했으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을 넘겨주길 거부했다. 2001년 9월 20일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어 10월 7일 '항구적 자유(Operation Enduring Freedom)'라는 작전명으로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훈련캠프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군사시설에 첫 공습을 실시했다. 폭격을 받은 아프간 수도 카불의 모습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됐다.

 

전쟁 개시 후 2개월 남짓 지난 11월 13일,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12월 7일 핵심 거점이었던 칸다하르가 함락돼 탈레반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와 오사마 빈 라덴이 도주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점령한 미국은 과도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조지 부시 정부는 빈 라덴을 잡고 알 카에다를 뿌리 뽑는데 실패했고, 아프간 전쟁은 장장 13년 간 계속되어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 됐다. 2014년 12월 28일 미국이 철군할 때까지 1조 달러의 세금이 소요됐고, 2300여명의 미군이 숨졌다. 전쟁 중 희생된 아프간 민간인은 2만 명이 넘는다.

 

이라크 전쟁

2003년 3월 미국 정부는 전선을 이라크로 확대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테러리스트와 연루돼어 있고, 핵무기·생화학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주장했다. 2003년 3월 20일 바그다드에 '이라크 자유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이라는 작전명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침공 2주 만인 4월 9일 바그다드는 함락됐고, 사담 후세인 정부는 붕괴했다. 2003년 5월 1일 조지 부시 대통령은 종전을 선언했지만, 이라크 정부 붕괴 이후 치안 상황은 극도로 악화됐고, 폭탄 테러와 게릴라전이 10년 넘게 계속됐다.

 

부시 정부는 점령 직후 이라크 전역에서 대량살상무기 보유 의혹을 조사했으나 증거를 발견하는데 실패했다. 9·11테러위원회 역시 "9·11의 주모자로 알려진 알카에다와 사담 후세인의 협조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직후 2011년 말까지 이라크의 모든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03년 3월부터 2010년 9월까지 미국은 7년 5개월 여의 전쟁 동안 약 8000억 달러의 전쟁비용을 지불했다. 미군 4469명이 전사했고, 3만 2213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철군 이후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라크에는 이슬람국가(IS)가 등장했고 미국은 철군 3년 만에 다시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는 2003년 4월 미군이 이라크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불신검문 등으로 체포한 이라크인들을 수용했던 곳이다. 후세인 정권 시절 이라크 최대의 정치범 수용소로 지어졌고, 2004년 5월 미군이 수감된 이라크인들을 상대로 각종 고문과 성적 학대를 자행한 사실이 사진 등을 통해 드러나면서 미국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9·11 테러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또 그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

911이란 뼈아픈 사건을 통해 인류가 얻은 교훈이다.


미국정부는 곧 테러의 배후로 알카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했고

미국의회도 테러와의 전쟁 결의안을 하원 상원 100% 승인으로 통과시켰다.


미국은 첫 상대국으로 중앙아시아 아프카니스탄을 지목했다.
아프카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얼른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라고 살기로 가득한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탈레반 정부는 " 오사마 빈 라덴이 관련되었다는 증거를 제시" 하라고 요구했고,
오사마 빈 라덴도 자신은 9.11 테러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성을 잃고 전쟁만을 생각한 미국은 증거고 뭐고 무조건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치 않자

(당시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카니스탄에 은거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그리고 그가 911의 직접적인 배후였는지도 미국은 밝혀내지 못했다.)

 

암튼 미국의 네오콘들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해

단 2개월만에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친미 과도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좀더 가열찬 테러와의 전쟁을 진행하면서 다시 이라크를 타켓으로 삼았다.


2002년 1월 대한민국이 월드컵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무렵

아들 부시는 작정한듯 악의 축 국가를 발표한다.
이라크, 이란, 북한이 대량살상 무기를 확산시키는 세계의 악의 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나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응징할 것을 천명하면서

현대판 십자군 전쟁을 부추겼다.

 

1. 쌍둥이 빌딩 사이에 있는 철근이 녹아내렸다 

쌍둥이 빌딩 사이에 있는 철골은 1000도 이상에서만 녹는데

제트엔진의 온도는 최고로 높이 올라가봤자 600도를 넘지 않음 그런데 이 철골이 모두 녹아내림

 

2. 목격자의 증언

비행기는 1대만 충돌했지만 폭팔음은 2번이 들렸다고함

비행기는 건물의 위쪽에 충돌했지만 지하가 먼저 폭팔했다고함

 

3. 건물이 붕괴하는 모습

건물의 위쪽에 비행기가 충돌했는데 전체적으로 무너짐.

이러한 붕괴모습은 아파트 재건축시 아파트를 폭파시킬때 보이는 모양임

 

4. 쌍둥이 빌딩의 20%를 렌트하고 있는 유대인은 한 명도 죽지 않았음

그리고 부시 정권이 테러직후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시작한 것을 비추어 보아

유대인과 부시 정부의 합작 테러사건이라는 음모론도 제기됨.

 

5. 이건 근거가 없는 이야기긴 한데...

쌍둥이 빌딩의 지하에는 부자들의 미술품,금, 등등의 재산이 보관되있었다고함

근데 911전달 그 재산의 80% 이상이 다 빠져나갔다고함.

 

6. 빈라덴이 자신이 용의자라고 자백해서 긴급공개수배자 명단에 까지 올랐으면서도

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2주간이나 입원해 있었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
 
비단 힘없이 무너져버린 빌딩들의 어마어마한 잔해와 3,500명에 육박하는 사망자 명단뿐만은 아닐 것이다. 911 테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1차 십자군 전쟁 이후 천 년이 지났음에도 기독교-이슬람 문명간 충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그 충돌의 피해는 더욱 참혹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무수하게 양산된 음모론들도 911테러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이래 처음으로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은 911은 미국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테러 사건의 발단서부터 결과까지 모든 것이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교통수단중 가장 보안 검색이 까다롭다는 여객기가 무려 네 대나 동시에 납치되었고, 미국 경제력의 상징인 WTC 쌍둥이 빌딩이 백주 대낮에 붕괴됐으며, 미국 군사력의 핵심인 국방부 건물이 피폭되는 동안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어떤 기관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11 사태시 제때 대응한 국가 기관은 소방서밖에 없다는 자조섞인 비아냥은 빈 말이 아니다. 냉전 종식이후 Super power로 세계를 호령하던 미국의 자존심은 그들 기준에 찌질한 테러리스트 몇몇에 의해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911 테러 일주일만에 뭉게 뭉게 의혹이 피어났다. 그들의 충격과 공포가 컸던 만큼 알 카에다보다 더 크고 더 거대한 조직에 의해 911이 기획되고 실행됬을 것이라는 의심이 생겨났다. 미국이 허접한 테러리스트들에게 처참히 당한 사실을 믿기 어려운, 아니 믿고 싶지 않았던 여론과 맞물려 음모론은 빠른 속도로 확산됬다. 그리고 여기 저기서 미심쩍은 정황증거들이 근거자료로 제시됬다. 미국 정부에 의한 911 테러 자작극 혹은 테러 유도설로 요약되는 이들 음모론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맞물려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미국 정부가 공식 반론 사이트를 개설할 정도로 911 테러 음론론은 많은 공감을 얻었다. 
 
대표적인 음모론인 Loose Change를 중심으로 911 테러 음모론이 어떤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고 미국 정부는 그 주장에 대해 어떻게 반박을 하고 있는 지 그 주요 내용을 옮겨본다. 
 
주장)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은 항공기 충돌로 붕괴된 것이 아니다. 미리 설치해둔 폭약에 의해 순서대로 기둥이 폭발하면서 무너져내린 것이다. 실제 촬영된 건물의 붕괴 모습을 보면 건물 중간 중간 작은 폭발들이 먼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문을 뚫고 밖으로 터져나오는 폭발 장면들이 그 증거다. 건물에 투입된 소방관들 역시 건물 내부에서 연속적인 폭발음을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반박) 건물 폭파 전문가들은 건물을 폭파할 때 상부가 아닌 하부를 먼저 폭파시킨다. WTC 붕괴시 아래쪽 층에서 계속 감지되는 작은 폭발 모습들은 건물이 내려앉으면서 압축된 하단부의 공기가 사무집기들과 함께 창밖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당시 맨해턴에는 지진측정기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사전 폭발로 인한 어떠한 충격도 감지되지 않았다. 만일 폭약으로 건물 기둥을 폭파하는 경우라면 해당층의 일부 창문뿐만 아니라 전 유리가 폭발했을 것이다. 건물 붕괴후 잔해를 치우는 과정에서도 어떤 폭약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주장) 9월 11일 당시 펜타곤(국방부 건물)에 충돌한 비행기는 없었다. 펜타곤에 발생한 흔적을 살펴보면 비행기가 아닌 미사일에 의해 피격당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펜타곤에 충돌로 발생한 구멍도 직경이 5m에 불과하다. 높이 13m, 길이 47m의 항공기가 부딪친 흔적으로 보기에 너무 작으며 발견된 엔진또한 민항기용이 아닌 미 공군 전투기가 사용하는 터보젯 엔진이었다. 무엇보다도 충돌한 비행기의 잔해가 상식밖으로 없다. 자작극이라는 강력한 근거다.  
 


반박) 사고 현장에서 아메리칸 항공 77호기에 탑승했던 승무원 및 승객들의 시체 일부가 발견되었으며 DNA 검사로 그 신원이 밝혀졌다. 항공기 블랙박스도 사고 현장에서 수거되었고 비행기가 펜타곤에 충돌하는 것을 목격한 목격자도 적지 않다. 여러 사진에서 사고 현장의 비행기 잔해를 확인할 수 있으며 펜타곤의 생존자와 구급요원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펜타곤 벽에 생긴 구멍의 크기와 항공기 높이가 다른 이유는 비행기가 충돌시 분해되면서 충격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주장) 펜실베니아에 추락한 유나이티드 항공 93호기는 승객들과 납치범간의 격투때문이 아니라 미사일로 격추된 것이다. 실제 승객이 탑승하지 않은 비행기를 격추시켜 테러로 위장한 것이다.    
 

반박) 복구된 조종석 대화내용을 분석한 결과, 승객들이 범인들과 격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추락한 것이 확인되었다. 마지막 충돌 순간까지 조종석은 납치범들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미 공군은 사고 순간까지도 UA93의 납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승무원으로 탑승하고 있었던 씨씨 라일리(CeeCee Lyles)씨가 자신의 집 자동 응답기에 남겨놓은 핸드폰 통화기록이 정부 발표와 일치하며 당시 상황을 증명해준다.
 
주장) 세계 무역 센터 부속건물인 WTC building 7은 쌍둥이 빌딩에서 9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않은 이 47층짜리 건물마저 화재후 붕괴된 이유는 건물내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최고의 증거다. 또한 이 건물의 소유주 래리 실버스테인(Larry Silverstein)이 사고 6주전 35억달러에 보험을 들었다는 점 또한 테러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반박) 당시 현장을 찍은 비디오를 봐도 WTC 별관 7번 건물의 붕괴시 폭발음이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진계에도 어떤 폭발진동이 잡히지 않았다. 미국 국립 기관 NIST에 의해 진행된 조사에서 WTC 7번 건물의 붕괴는 WTC 북쪽 타워의 붕괴시 옮겨붙은 화재에 의한 것으로 결론났다. 이 화재로 강철 빔이 녹아서 변형되었고 이로 인해서 건물 붕괴로 연결된 것이다. 사고 전 보험의 갱신은 만기도래에 따른 자연스런 행위였다. (음..결국 WTC 7번 건물의 붕괴가 옆 건물에서 옮겨붙은 단순 화재로 야기된 것이라는 반박인데...화재 안전 검사를 마친 건물이 외부충격도 없이 그렇게 무너졌다는 건 의문이다.)

 
주장) 세계 무역 센터 빌딩에 충돌한 비행기에 실제 탑승한 사람은 없었다. 항공기 역시 원격 조정된 것이다. 과거 쿠바 침공 시나리오에서 밝혀진 것처럼 비행기를 이용한 테러 자작극은 미국 정보국 CIA가 종종 써먹는 수법이다.   
 
반박) 보잉사 내부 자료에 의하면 보잉사가 제작하는 모든 상업용 항공기는 원격 조정 기능자체가 없다. 조종석을 제외한 어느 곳에서도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당시 탑승하고 있었던 승객들의 전화 통화들이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실제 희생자가 있고 관련 증언들이 있기 때문에 조작은 불가능하다.
 
주장) 911 직전 사고 항공기가 속한 유나이티드 항공사와 아메리카나 항공사의 주식 거래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징후가 포착되었다. 유나이티드 항공사에서는 평소 거래 물량보다 4배~11배 많은 4,744건의 put option이 거래되었고 아메리카나 항공사는 4,516건의 put option이 거래되었다. 두 항공사 모두 911 이후 사전에 구매한 put option으로 주가 하락시 막대한 차익을 벌어들였다. 사전에 테러 계획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9월 11일 이전 급증한 Put option 거래량)
 
       

               (사고 이후 급락한 UA, AA사 주가 그래프)
 
반박) 911 조사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분명 이들 항공사 주식거래에서 비 정상적인 거래가 발생한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들 거래는 모두 정상적인 범위내에서 이루어진 거래이다. 아메리칸 항공사 주식에 대한 대규모  put option 계약은 수일전에 팩스로 보내진 금융전문가들의 투자 조언대로 한 것임이 밝혀졌다. 사고 수일전 급증한 옵션 계약은 우연의 일치로 봐야 한다. (UA사의 Put option 급증에 대한 설명은 ? 이 부분이 가장 의혹을 남기는 대목이다)
 
주장) 세계 무역 센터 빌딩에는 4천명에 달하는 유태인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911 테러 당일 그들 대부분이 출근하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사전에 그들에게 테러 공격을 경고하거나 출근하지 말것을 지시한 배후가 있다.  
 
   

(Ground Zero에 뉴 타운 건립을 계획중인 WTC 소유주, 래리, 왼쪽에서 두번째) 
 
반박) 이 음모론은 얼토 당토없는 이야기이다. 실제 희생자 중 10~15%가 유대인이었으며 사고전 유대인들의 이상 행동은 없었다. 사고 당일 이스라엘 정부가 밝힌 뉴욕, 워싱턴에 체류중인것으로 파악된 유대인 4,000명에 대한 기사내용이 와전된 것이다.
 
주장) 알 카에다가 배후라는 정부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 알 카에다가 아닌 실제 배후세력이 존재한다. 알 카에다는 미국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누명을 쓴 것이다. 실제 배후는 미국 정부 혹은 범 세계적 보수집단 내지는 유대인 단체일 것이다.  
 

(사망전까지 FBI 지명 수배 명단에서 Top 10에 선정되 있었던 오사마 빈 라덴)
 
반박) 알 카에다가 911 테러를 기획했다는 점은 여러차례 확인되었다. 특히 2001년 11월 빈 라덴의 비디오 녹음에서도 이 점은 밝혀졌고, 2006년 5월 23일 공개된 육성 녹음에서도 알 카에다가 이번 테러를 배후 조종했다는 점이 확인됬다. 그는 이런 육성 녹음을 남겼다. "나는 이번 공격을 주도한 19명의 동지들이 성공해 낼 것이라 믿었다." "우리는 예상되는 희생자수를 계산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비추어볼때 비행기가 WTC 빌딩에 충돌하면 항공유가 연소되면서 발생한 고열로 빌딩의 철근 구조물이 녹을 것이고 결국 비행기가 충돌한 층 위쪽이 전부 붕괴될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 벌어진 일은 기대 이상이었다"
 
911 테러가 알 카에다의 소행인지 중동의 정치적 개입 명분을 확보하려던 미국의 자작극인지 그도 아님 이슬람권에 대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유대인 집단의 테러인지 여부는 여전히 결론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현재 정설인 미 정부의 조사 결과 발표내용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상 공백들이 있음을 감안할 때 911 음모론은 앞으로도 한동안 흥미로운 화젯거리로 남을 듯 싶다.   
 
참고사이트 :
Debunking 9/11 Conspiracy theories and Controlled Demolition Myths
http://www.debunking91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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