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난의 행군’ 북에 손을 내밀다
등록 :2022-02-07 15:31수정 :2022-02-08 02:31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 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남북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1991년 12월13일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선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의합니다.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대북 3원칙’도 발표했다. “첫째,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셋째,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갈 것입니다.” 북을 “고장 난 비행기”에 비유하던 전임 김영삼 대통령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접근법이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남북기본합의서의 원칙대로 상호불가침을 전제로 화해·협력의 물꼬를 트자는 제안이다.
사회주의 협력 체제의 와해에 경제·식량·에너지난이라는 ‘3중 재난’이 겹쳐 적어도 수십만명이 굶어 죽을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고립무원의 북을 향해 ‘농성을 풀고 화해협력으로 공존공생의 길을 도모하자’고 손을 내민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선거를 통한 첫 정권교체의 역사적 무게만큼이나 중대한 대북정책의 방향 전환 선언이다. 다만 김대중 대통령은 전임 김영삼 정부의 ‘북한 붕괴론’에 기댄 대북 대결 정책과 결별하는 정책 전환의 역사적 근거를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찾음으로써 이 방향 전환이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초당파적 합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애써 강조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정세현 통일부 차관과 전금철 정무원 책임참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만났다. ‘대북 비료 지원’과 ‘이산가족상봉’을 핵심 안건으로 일주일간 협상(1998년 4월11~17일)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 5년간 쌓인 불신의 벽이 두터웠다.
1992년 대선, 그리고 남북회담 ‘훈령 조작’ 사건
등록 :2022-01-17 17:55수정 :2022-01-18 02:31

남북기본합의서, 김일성이 만세 부른 까닭은?
등록 :2022-01-03 15:53수정 :2022-01-04 02:31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협상에 성공한 고위급회담 대표단을 편하고 빠르게 평양으로 모셔 오라고 개성으로 헬기를 띄웠다. 1991년 12월13일 오전 9시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서명식을 하고 오후 4시40분 판문점을 통과한 고위급회담 대표단은 개성에서 헬기로 갈아타고 평양으로 직행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들을 ‘주석궁’(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불러 만찬을 함께 했다. 김 주석이 연형묵 정무원 총리 등 고위급회담 대표단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은 다음날치 <노동신문> 1면 머리로, 그 밑엔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이 크게 실렸다. 김일성은 “대표단 성원들이 조국통일의 밝은 전망을 열어놓은 데 큰 기여를 하고 돌아온 데 대하여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셨으며 그들의 성과를 축하하셨다”고 <노동신문>은 전했다.
‘번역기’를 돌려보자. 김일성은 연형묵 등 대표단을 만나 “이 문서는 천군만마보다 위력하다. 이로써 적들의 발목을 잡았다”고 평가했다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정세현의 통일토크>에 적었다. ‘적들의 발목을 잡았다’는 김일성의 표현을, 정세현은 흡수통일의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남북교류협력법의 탄생, 분단사의 분수령
등록 :2021-12-20 15:15수정 :2021-12-21 02:31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교류협력법)의 탄생은 남북 분단사에 분수령적인 사건이다. “이 법은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이하 ‘남한’이라 한다)과 그 이북지역(이하 ‘북한’이라 한다) 간의 상호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1조)
‘애걔, 이게 무슨 분수령?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되묻고 싶더라도 잠깐 참아주시길. 이 법은 노태우 정부 3년차인 1990년 8월1일 제정·시행됐다. 이 법 시행 이전 대한민국에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법은 국가보안법뿐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실상 “반국가단체”로 규정한다. 북을 오가거나 북쪽 사람과 만나는 행위는 물론이고 말을 섞기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됐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1일 제정·시행됐고, 오랜 세월 ‘헌법 위의 법률’이자 ‘실질적 헌법’이라 불렸다. 국가보안법의 관점에서 ‘반국가단체’와 교류·협력 촉진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교류협력법은 남과 북 사이의 “상호 교류와 협력 촉진”을 목적으로 한다고 1조에 명시했다.
평양축전의 임수경과 박철언, 그리고 국가보안법
등록 :2021-12-06 16:58수정 :2021-12-07 02:32

“임수경은 (평양)축전의 주인공이었다.”1989년 7월1~8일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하 평양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3학년)과 관련한, 당시 ‘평양시민’이던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의 회고다. 주 기자는 그때 평양 사람들이 임수경한테서 받은 ‘문화충격’을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에 이렇게 적어놨다.
“북한에서 금기시하는 청바지를 입고 면티를 입은 이 아가씨는 너무나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 그녀가 남한 정부를 마구 비판하는 모습에 북한 사람들은 ‘어구구, 용감하긴 한데 쟤네 집은 이제 3대가 몽땅 망했다’ 하면서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그해 8월15일,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분단선 위에 섰다. … 우리는 모두 슬펐다. 한 달 반 동안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우리의 여주인공이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끌려갔으니. … 1990년대 초반, 남북총리급회담(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자 서울을 방문한 북한 기자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으로 들이닥친 일이 생겼다. 진짜 가족들이 피해 없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장면도 티브이(조선중앙텔레비전)로 방영됐다. 이 장면이 특히 충격이었다. 가족이 아무 문제 없이 살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놀라운 일인데, 그 ‘역적’의 집안에 그토록 귀한 천연색텔레비전(컬러TV), 소파, 냉장고 등 없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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