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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김대중, ‘고난의 행군’ 북에 손을 내밀다

by 무궁화9719 2022. 9. 29.

김대중, ‘고난의 행군’ 북에 손을 내밀다

등록 :2022-02-07 15:31수정 :2022-02-08 02:31

이제훈 기자
 
이제훈의 1991~2021 _21
 
 
1998년 2월25일 국회에서 열린 15대 대통령 취임식 때의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 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남북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1991년 12월13일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선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의합니다.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1998년 2월25일 15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에 담긴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관계 구상이다. 취임사(5748자)의 13.4%(770자)가 남북관계에 할애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대북 3원칙’도 발표했다. “첫째,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셋째,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갈 것입니다.” 북을 “고장 난 비행기”에 비유하던 전임 김영삼 대통령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접근법이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남북기본합의서의 원칙대로 상호불가침을 전제로 화해·협력의 물꼬를 트자는 제안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발짝 더 나아가 “정경분리에 입각한 경제교류”를 제안했다. 정치·군사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그를 빌미로 경제교류를 중단하는 행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대북 요구다. ‘고난의 행군’ 중이던 북에 “식량도 정부와 민간이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지원하는 데 인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아울러 “새 정부는 (IMF 외환위기라는) 현재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북한의 경수로 건설과 관련한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남북 간에 교류협력이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의 우방국가나 국제기구와 교류협력을 추진해도 이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사회주의 협력 체제의 와해에 경제·식량·에너지난이라는 ‘3중 재난’이 겹쳐 적어도 수십만명이 굶어 죽을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고립무원의 북을 향해 ‘농성을 풀고 화해협력으로 공존공생의 길을 도모하자’고 손을 내민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선거를 통한 첫 정권교체의 역사적 무게만큼이나 중대한 대북정책의 방향 전환 선언이다. 다만 김대중 대통령은 전임 김영삼 정부의 ‘북한 붕괴론’에 기댄 대북 대결 정책과 결별하는 정책 전환의 역사적 근거를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찾음으로써 이 방향 전환이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초당파적 합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애써 강조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정세현 통일부 차관과 전금철 정무원 책임참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만났다. ‘대북 비료 지원’과 ‘이산가족상봉’을 핵심 안건으로 일주일간 협상(1998년 4월11~17일)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 5년간 쌓인 불신의 벽이 두터웠다.

 
김대중 정부는 교류협력의 숨구멍을 대폭 넓혔다. 베이징 차관급 회담 결렬 직후인 1998년 4월30일, ‘500만달러’로 묶여 있던 민간기업의 대북 투자 상한선을 없앤 게 대표적이다. 굴레가 벗겨지자 가장 먼저 치고 나간 이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1989년 김일성 주석과 합의했으나 대북 강경파의 반발로 무산된 금강산관광 사업을 되살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1998년 6월16일 500마리의 ‘통일소’를 끌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사분계선을 넘어 방북한 정주영은 금강산관광 사업을 포함한 ‘경제협력합의서’를 북쪽과 새로 썼다. 그해 11월18일 강원도 동해항에서 1418명을 태운 첫 금강산관광선 현대금강호가 출항했다. 분단사 최대·최장 교류협력 사업인 금강산관광의 시작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첫해인 1998년에만 민간인 3317명이 북에 다녀왔다. 정부 사전 승인을 전제로 민간인 방북이 허용된 1989~1997년 9년간 방북 민간인 2059명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그렇게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첫해부터 임동원 외교안보수석과 함께 남북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을 뚫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허리를 가른 냉전의 빙벽에 평화의 봄바람길을 내는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너희가 진정 평화와 정상회담을 바라느냐’고 되묻듯 난제와 악재가 줄을 이었다. ‘3년 전쟁’을 치른 남과 북 사이의 첫 정상회담은 로또처럼 어쩌다 손에 쥔 횡재가 아니다. 어떤 난관에도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은 경이로운 뚝심과 일관성의 열매다. 신뢰는 말이 아닌 실천의 자식이다. 심장에 새겨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1998년 8월31일 북이 장거리 로켓 ‘대포동 1호’를 일본 하늘을 가로질러 태평양 쪽으로 쏘아 올렸다. 북은 “공화국 창건 50돌을 즈음하여 다단계 운반 로케트로 첫 인공지구위성을 발사해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조선중앙통신>으로 발표했다. 동북아 주변국이 뒤집어졌다. ‘인공위성’ 발사 로켓이라는 북의 주장이 사실이든 아니든, ‘탄도미사일’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와 전략적 의미가 다르지 않아서다. 그 한달여 전 ‘북의 장거리 미사일이 애리조나 등 미국 서부 지역을 타격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1998년 7월15일)한 도널드 럼스펠드 등 미국의 대북 강경파들이 ‘봐라, 우리 말이 맞지 않냐’고 환호작약했다. 더구나 그해 8월2일 시사 주간지 <타임>과 8월17일 <뉴욕 타임스>가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 기사를 내보낸 터였다. 북이 영변 말고 금창리의 지하 동굴에서도 핵 활동을 하는 정황이 있다는 것이다. 첩보의 신빙성을 문제 삼은 중앙정보국(CIA)을 따돌리고 국방정보국(DIA)이 ‘작업’한 기사였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의 강경세력이 ‘북한발 안보 위기’를 띄우려 행동에 나선 바로 그 시점에 ‘대포동 1호’가 일본 하늘을 가른 것이다. ‘대포동 1호’ 발사는 북으로선 김일성 주석 사망 뒤 지속되던 ‘3년 유훈통치’를 끝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를 공식 선포하는 ‘축포’이자, 북 특유의 ‘힘에는 힘으로’ 식 맞대응이었다. 워싱턴에서 ‘북한’의 우선순위가 높아졌고, 북-미 사이 팽팽한 긴장과 함께 한반도에 짙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그에 앞서 6월22일엔 동해 속초에서 북의 잠수정이 그물에 걸린 채 발견됐다. 한국의 대북 여론이 나빠졌음은 물론이다.
 
안팎의 어려움에도 ‘김대중-임동원’ 짝은 첫 금강산관광선을 띄웠다. “금융위기에 안보위기까지 겹친 이중적 도전”에 맞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하고 “남과 북이 모두 경제 회생의 전기”를 열려는 “일종의 모험”이었다고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적었다.
 
‘김대중-임동원’ 짝은 남과 북 사이엔 신뢰를 쌓으려, 미국을 상대론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공동 목표로 삼으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서해교전’(1999년 6월15일)과 북의 금강산관광객 억류 사건(1999년 6월20일)에도 ‘햇볕정책’의 기조를 바꾸지 않았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초대 대북정책조정관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설득해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을 핵심으로 한 ‘페리 보고서’(1999년 10월12일 미 상원 제출)를 이끌어냈다. 1994년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의 입안자인 페리를 설득해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전략)과 사실상 같은 인식이 미국의 대북정책에 담기도록 한 것이다. 페리는 1999년 5월25~28일 방북해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회담했고, 그에 앞서 미국 정부 조사단이 ‘지하 핵 의혹 시설’로 지목된 금창리 지하동굴을 방문(1999년 5월20~22일)해 ‘핵 활동’과 무관함을 확인했다.
 
그렇게 남·북·미 사이에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염두에 둔 북-미 적대관계 해소와 비핵화, 남북화해협력 추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말싸움과 무력시위를 앞세운 위기의 격화라는 익숙한 과거에서 벗어나 협상과 실천을 통한 위기 해소라는 낯선 경험을 쌓아가게 된 것이다. “냉전적 남북관계는 하루빨리 청산돼야 합니다”라며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 정착”을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사가 비수를 감춘 거짓 미소가 아님을, ‘두려움과 의심’에서라면 지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북이 믿어볼 만한 상황 전개였다.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답’을 할 환경이 무르익어갔다.
 

1992년 대선, 그리고 남북회담 ‘훈령 조작’ 사건

등록 :2022-01-17 17:55수정 :2022-01-18 02:31

이제훈 기자
 
이제훈의 1991~2021 _20
 
이동복은 정원식 총리를 포함해 회담 대표단의 그 누구한테도 서울에서 새 훈령이 왔다는 사실을 회담이 사실상 끝났을 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다고 뒷날 사건 조사에 관여한 김영삼 정부 초대 통일부총리 한완상은 회고록 <한반도는 아프다>에 적었다. 이동복은 회담을 깨려고 ‘가짜 훈령’ 조작도 모자라 ‘진짜 훈령’까지 묵살한 것이다.
 
1992년 9월15~18일 평양에서 열린 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전대미문의 ‘훈령 조작·묵살 사건’이 터졌다. 이로 인해 남과 북은 서로 바라던 ‘이산가족 상봉과 판문점 면회소 설치’-‘리인모 송환’의 맞교환 합의에 실패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사흘째인 1992년 9월17일 아침 7시15분 평양의 회담 대표단에 서울발 ‘훈령’이 도착했다. “리인모씨 건에 관하여 3개 조항이 동시에 충족되지 않을 경우 협의하지 말 것”. 북쪽과 이틀에 걸친 줄다리기 끝에 사실상 합의에 이르렀다고 느긋해하던 대표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경한 훈령에 당혹스러워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꿔 ‘무조건 3개항 관철’을 되뇔 궁색한 처지로 몰려서다. ‘훈령’은 회담 대표단의 언행과 협상 목표·전략을 구속하는 절대지침이다(대다수 남북 당국회담에선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전달된다). 화창하던 평양의 회담장에 짙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 강경한 서울발 훈령은 ‘가짜’였다. 남북 회담사에 전무후무한 ‘훈령 조작·묵살’ 사건의 시작이다. 사실 노태우 대통령은 8차 고위급회담 직전에 수석대표인 정원식 국무총리를 불러 “연말연시에 맞춰서 이산가족 상봉이 꼭 이뤄질 수 있게 하라”고 직접 지시한 터다. ‘이산가족 상봉 성사’를 최우선순위로 두고 협상하라는 ‘대통령 훈령’이다. 대표단은 회담 전날인 9월14일 고위전략회의를 열어 회담전략을 다듬었다. 이 회의에서 이동복 회담 대표가 북쪽이 바라는 ‘리인모 송환’을 대가로 ‘이산가족 고향 방문 사업 실시 정례화,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운영, 1987년 1월 어로 중 납북된 동진27호 선원 12명 송환’ 등 3개항을 “협상기법상 조건”으로 내걸자고 제안했다. 정 총리가 주재한 이 회의에선 ‘리인모 송환 대 3개항’의 협상을 벌이되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처”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사실상 ‘이산가족 상봉’ 성사를 전제로 ‘면회소’ 또는 ‘동진호’ 가운데 하나만 더 북쪽이 받아들이면 ‘리인모 송환’과 맞바꾸는 합의를 하기로 한 셈이다. “이산가족 상봉이 꼭 이뤄질 수 있게 하라”던 노태우 대통령의 지침에 따른 전략이다.
 
그러던 대통령이 돌변해 ‘3개항 절대 고수’ 훈령을 보냈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그런데 ‘리인모’는 누구인가?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지리산에서 붙잡혀 두 차례에 걸쳐 34년간 옥살이를 한 ‘비전향 장기수’로, 김영삼 정부 첫해인 1993년 3월19일 가족 방문 목적의 ‘장기방북’ 형식으로 북쪽으로 돌아가 89살이던 2007년 6월16일 숨졌다. 북쪽은 7차 고위급회담(1992년 5월5~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의 첫 선물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방문단을 상호 교환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는, “리인모 선생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자”고 연형묵 총리 기조연설로 공개 거론했다. 사실상 ‘이산가족 상봉’과 ‘리인모 송환’을 맞바꾸자는 제안이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7차 회담 직후인 1992년 5월22일 “이인모의 송환을 전향적으로 조처할 것과 비전향 좌익수 175명 중 귀향 희망자를 모두 송환하는 문제도 전향적으로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고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적었다. 그러므로 8차 고위급회담 이전에 남북 사이에 이미 ‘이산가족 상봉-리인모 송환’ 거래는 사실상 성사된 셈이고, 남쪽으로선 ‘리인모 송환’을 고리로 ‘면회소’ 또는 ‘동진호’ 문제에서 북쪽의 추가 양보를 타진해보기로 한 정도다. 사정이 이러하니 ‘3개항 절대 고수’는 너무도 생뚱맞은 훈령이 아닐 수 없다.
 
‘가짜 훈령’의 기획·실행자는 회담 대표인 ‘이동복’.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보인 이동복이 안기부 통신망으로 엄삼탁 안기부 기조실장한테 “청훈(훈령 요청) 전문을 묵살하고 ‘이인모 건에 관하여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달라. 전문을 보고 난 후 파기하라”고 부탁했고, 엄삼탁은 이동복의 부탁대로 회신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정부 내부 논의나 대통령 보고·재가는 없었다. 이동복-엄삼탁이 조작한 ‘3개항 고수’ 가짜 훈령이 평양 회담 대표단에 도착한 시점까지 정식 청훈의 수신인으로 지정된 이상연 안기부장, 최영철 통일원 장관,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누구도 평양에서 보고·청훈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애초 평양의 회담 대표단이 1992년 9월17일 0시30분에 서울로 발송한 ‘협상 중간 보고 겸 청훈’ 전문은, 이동복-엄삼탁의 ‘가짜 훈령’이 평양 회담 대표단에 도착하고도 한참 더 지난 9월17일 오후 2시께에야 안기부장→외교안보수석’ 라인으로 전화 통보됐고, 한시간 뒤인 오후 3시께 노태우 대통령한테 보고됐다. 엄삼탁 등 안기부 일부 세력이 안기부장도 따돌리고 평양 대표단의 청훈 전문을 13시간30분 동안 깔아뭉갠 것이다.
 
대통령한테 청훈이 보고되고 한시간여 만인 그날 오후 4시15분 평양 회담 대표단에 대통령 재가를 받은 ‘진짜 훈령’이 전달됐다. “3가지 조건의 동시 관철이 바람직하나 불가할 때는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 또는 첫째와 셋째만 관철돼도 리인모씨 북송을 허용할 수 있음”. 요컨대 “이산가족 가족 방문단 사업 정례화”는 필수이고 여기에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및 우편물 교환소 설치와 상설 운영” 또는 “동진호 선원 12명 귀환” 가운데 하나만 더 북한테서 얻어내면 합의하라는 지침이다. 북이 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과 면회소 설치에 동의한 만큼, 추가 협상 없이 최종 타결해도 좋다는 훈령이다.
 
그런데 이 훈령을 전달받은 이동복은 정원식 총리를 포함해 회담 대표단의 그 누구한테도 서울에서 새 훈령이 왔다는 사실을 회담이 사실상 끝났을 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다고 뒷날 사건 조사에 관여한 김영삼 정부 초대 통일부총리 한완상은 회고록 <한반도는 아프다>에 적었다. 이동복은 회담을 깨려고 ‘가짜 훈령’ 조작도 모자라 ‘진짜 훈령’까지 묵살한 것이다. 결국 남과 북은 서로 바라던 ‘이산가족 상봉과 판문점 면회소 설치’와 ‘리인모 송환’의 맞교환 합의에 실패했고, 탈냉전 초기 남북 공존의 로드맵을 짜던 남북고위급회담도 8차를 끝으로 더는 열리지 못했다.
 
노태우 정부는 8차 고위급회담 직후인 1992년 9월23일 청와대 근처 궁정동 안가(안전가옥)에서 정원식 총리 주재로 고위급전략회의를 열고, 이후 정부 내부 조사를 거쳐 이동복의 ‘훈령 조작·묵살 사건’의 실체를 파악했다. 회담 대표인 임동원 통일원 차관의 ‘이산가족 문제 협상 경위와 내용’(1992년 9월23일), 최영철 통일원 장관의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청훈 관련 통일부총리 입장’(1992년 9월23일),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이 자체 조사를 거쳐 노태우 대통령한테 보고한 비밀문건인 ‘훈령 조작·묵살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1992년 9월25일)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아무런 징계·처벌·발표 없이 묻혔다.
 
이듬해 이부영 민주당 의원이 생매장된 ‘훈령 조작 사건’을 폭로(1993년 11월12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했고, 이를 계기로 감사원이 감사를 벌였다. 이회창 감사원장은 그해 12월21일 ‘청훈 차단-훈령 조작-처리 지연-훈령 묵살’이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감사원의 공식 발표 뒤에도 형사 처벌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동복이 ‘안기부 특보’직을 잃었을 뿐이다. 어찌됐든 진실을 영원히 숨길 순 없다.
 
이동복 등의 ‘훈령 조작·묵살’이 명백히 사실임을 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두 차례나 확인하고 사실상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은 건 14대 대통령 선거(1992년 12월18일)와 관련이 있다. 1992년 5월19일 민주자유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공동대표가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된 일을 계기로 청와대 수석비서관 다수의 “충성선언이 이어졌고, 이때부터 노태우 정부에서 권력누수 현상(레임덕)이 일어났”으며 “국내정치가 남북대화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고 임동원은 <피스메이커>와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뷰(<고위 관료들, ‘북핵위기’를 말하다>)를 통해 증언했다.
 
이동복 등이 전대미문의 ‘훈령 조작·묵살’을 감행한 배경엔,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자 남북 화해협력 주창자인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상대로 김영삼 후보가 경쟁·승리하려면 남과 북 사이에 ‘화해협력’이 아닌 ‘긴장·갈등’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대선 셈법’이 깔려 있었다. 어떤 이들한테는 한반도 8천만 시민·인민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보다 당장의 권력·이권이 중요하다. 분단의 지속, 남과 북의 갈등·대립을 기회로 여기는 ‘분단 정치 세력’의 어두운 민낯이다. ‘그들’의 숨소리는 아직도 멎지 않았다.
 

남북기본합의서, 김일성이 만세 부른 까닭은?

등록 :2022-01-03 15:53수정 :2022-01-04 02:31

이제훈 기자
 
이제훈의 1991~2021 _19
 
역대 남북 합의문서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합의’가 바로 기본합의서다. 두 세기에 걸친 분단사에 남과 북이 합의한 유일무이한 남북관계 규정인 기본합의서 서문의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한 ‘통일 지향 특수관계’론이 핵심이다.

 

1992년 2월 6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정원식 수석대표(당시 국무총리) 등 남쪽 대표단이 김일성 주석(오른쪽)을 예방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은 통일부가 2021년에 펴낸 <남북대화 50년>에 실린 것이다.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협상에 성공한 고위급회담 대표단을 편하고 빠르게 평양으로 모셔 오라고 개성으로 헬기를 띄웠다. 1991년 12월13일 오전 9시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서명식을 하고 오후 4시40분 판문점을 통과한 고위급회담 대표단은 개성에서 헬기로 갈아타고 평양으로 직행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들을 ‘주석궁’(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불러 만찬을 함께 했다. 김 주석이 연형묵 정무원 총리 등 고위급회담 대표단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은 다음날치 <노동신문> 1면 머리로, 그 밑엔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이 크게 실렸다. 김일성은 “대표단 성원들이 조국통일의 밝은 전망을 열어놓은 데 큰 기여를 하고 돌아온 데 대하여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셨으며 그들의 성과를 축하하셨다”고 <노동신문>은 전했다.

 
한·소 수교(1990년 9월30일)로 대외환경이 크게 나빠진데다 유엔에 ‘떠밀려’ 가입(1991년 9월17일)한 지 석달 만인 1991년 12월의 김일성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손에 쥐고 왜 이리 좋아했을까?

 

‘번역기’를 돌려보자. 김일성은 연형묵 등 대표단을 만나 “이 문서는 천군만마보다 위력하다. 이로써 적들의 발목을 잡았다”고 평가했다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정세현의 통일토크>에 적었다. ‘적들의 발목을 잡았다’는 김일성의 표현을, 정세현은 흡수통일의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서문과 본문 25개 조로 이뤄진 남북기본합의서의 1~4조가 ‘흡수통일 배제’를 가리키며, 이 4개 조항이 북이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을 통해 진정으로 얻으려 한 것이라고 정세현은 풀이했다. 고위급회담 남쪽 대표였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기본합의서 1~4조를 두고 “이걸 지키는 건 남과 북이 상당 기간 평화공존한다는 뜻이어서 대단히 중요한 조항”이라고 짚었다.
 
기본합의서 1~4조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1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한다”(2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을 하지 아니한다”(3조), “남과 북은 상대방을 파괴·전복하려는 일체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4조)가 그것이다. 요약하면 ‘체제 인정·존중’(1조), ‘내정 불간섭’(2조), ‘비방·중상 금지’(3조), ‘파괴·전복 행위 금지’(4조)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 폭파(2020년 6월16일)라는 비극으로 이어진 ‘대북전단 사태’가 웅변하듯, 북이 지금도 매우 중시하는 내용이다.
 
사실 당시 북한 당국은 동서독 통일, 소비에트연방(소련) 해체,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연쇄 체제 전환에 맞닥뜨려 체제붕괴와 흡수통일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북은 여덟 차례의 예비회담과 1~5차 고위급회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흡수통일’ 우려를 제기했다. “통일은 절대로 어느 일방에 의한 통일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1차 회담 기조연설, 1990년 9월5일), “동서독식의 통일과정을 모방하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것…”(2차 회담 기조연설, 1990년 10월17일), “무슨 ‘승공’이니 ‘흡수통합’이니 하는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대결만을 추구한다면…”(4차 회담 기조연설, 1991년 10월23일) 따위가 대표적이다. 통일부는 당시 북의 대남정책이 “남한에 흡수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따른 “수세적 체제생존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됐다고 <하늘길 땅길 바닷길 열어 통일로>(통일노력60년 발간위원회, 2005년)에서 평가했다. 고위급회담 북쪽 단장인 연형묵 정무원 총리는 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열린 6~8차 회담에선 ‘흡수통일 우려’를 제기하지 않았다.
 
동북아 냉전질서의 비대칭적 해소에 따른 치명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려 ‘흡수통일 배제’라는 전략 목표를 설정한 북은 기본합의서 협의 과정에서 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화해·불가침·교류협력) 3대 부속 합의서 내용의 90% 이상은 남쪽이 제안한 내용이라고 고위급회담 남쪽 대표였던 이동복은 회고록 <통일의 숲길을 열어가며>에 적었다. 예컨대 남과 북이 기본합의서에 합의·서명한 5차 고위급회담 직전까지 이견을 좁히지 못한 ‘미합의 8대 쟁점’은 모두 남쪽이 제안한 것이다. ‘미합의 8대 쟁점’은 “정전상태의 평화상태로의 전환, 해상 불가침 경계선, 불가침의 이행보장장치, 서울·평양 상설연락사무소 설치, 언론·출판물의 상호 개방, 통행·통신·통상의 3통위원회 설치, 유엔헌장에 따른 분쟁의 평화적 해결, 남북 양쪽이 각각 체결한 기존 협정과의 관계” 등이다.
 
이는 남과 북의 협의와 그 결과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음을 방증한다. ‘흡수통일을 막으려다 너무 많은 것을 내줬다’는 반발·불만이 북 내부에서 나올 만한 상황이었고,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고위급회담 북쪽 대표였던 김영철 조선인민군 소장은 남쪽 대표인 박용옥 육군 소장한테 “이것은 당신네 협정이지 우리 협정이 아니다”라고 불평했다고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에 적었다.(이 ‘김영철’이 2018~2019년 남북·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리인 구실을 한 그 ‘김영철’이다.) 이런 ‘아픔’ 탓인지 북은 지금껏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일을 기념하지 않으며, 당국회담 합의문서에 ‘기본합의서’를 언급하기를 조심스레 피해왔다.
 
그래서 기본합의서는 화려한 말잔치에 불과한 ‘죽은 문서’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역대 남북 합의문서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합의’가 바로 기본합의서다. 두 세기에 걸친 분단사에 남과 북이 합의한 유일무이한 남북관계 규정인 기본합의서 서문의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한 ‘통일 지향 특수관계’론이 핵심이다.
 
기본합의서 서문의 “통일 지향 특수관계” 규정은 힘이 세다. 남과 북의 당국은 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이 규정을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다. 남북교류와 관련한 것이라면 민관 불문하고 압도적 규정력을 발휘한다. 전쟁과 분단으로 점철된 남과 북의 간난신고의 ‘따로 또 같이’ 여정을 비추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다. 이런 식이다.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남북왕래에 ‘여권’을 신분증명서로 쓰지 않는다. 남북교역에 ‘국경통과세’라 할 관세를 물리지 않는다. 남북교역은 수출입 통계에 넣지 않는다. 대북 인도적 지원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적개발원조’(ODA)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대한민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유럽연합(EU) 등이 개성공단에서 만든 물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나, 올림픽 등 국제스포츠경기에서 별개의 유엔 회원국인 남과 북이 ‘단일팀’을 꾸려 참가하는 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이 허용·환영하는 건 기본합의서 서문 규정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지지를 웅변한다. 남과 북이 서로를 ‘외국’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통일 지향 특수관계” 규정을 30년째 일관되게 견지·적용해온 덕분이다.
 
그런데 이 귀중한 기본합의서를 두고 대한민국은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비준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1992년 2월17일 기본합의서에 노태우 대통령이 서명하고 국무총리와 모든 국무위원이 부서해 대통령령으로 관보에 싣는 걸로 공식 절차를 마무리했다. 결과적으로 기본합의서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북쪽이 조선노동당 중앙위 6기19차 전원회의(1991년 12월24일)와 중앙인민위원회·최고인민회의상설회의 연합회의(1991년 12월26일)를 거쳐 김일성 주석의 비준을 마친 사실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대한민국이 남북 정상회담 합의(6·15 공동선언, 10·4 정상선언, 4·27 판문점선언, 9·19 평양공동선언)를 국회 동의를 거쳐 비준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악습’의 선례다. 정권교체 때마다 대북정책의 승계·단절을 둘러싼 논란과 ‘남남갈등’ 격화의 불쏘시개 구실을 하는 중대한 ‘입법 미비’ 상황의 지속이다. ‘적이자 동반자’라는 형용모순 관계인 북을 대하는 대북정책과 관련한 최소한의 합의 기반이자 기준선 구실을 할 남북 정상선언 비준동의 등 제도화 절차를 더는 미루지 말아야 할 까닭이다.
 

남북교류협력법의 탄생, 분단사의 분수령

등록 :2021-12-20 15:15수정 :2021-12-21 02:31

이제훈 기자
 
이제훈의 1991~2021 _18
 
노태우 정부는 ‘무슨 근거로, 왜 정주영의 방북만 승인했냐’는 물음에 답해야 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통치권을 뒤흔든 내분을 빠르게 수습할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잇단 고위 당정 협의 뒤 1989년 2월11일 노태우 정부는 남북교류협력특별법안 단 한 건을 심의하려고 임시 국무회의를 열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0월2~4일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하러 가기에 앞서 발급받은 ‘북한 방문 증명서’. 대통령도 북한에 가려면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1990년 8월1일 제정·시행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른 절차다. <한겨레> 자료사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교류협력법)의 탄생은 남북 분단사에 분수령적인 사건이다. “이 법은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이하 ‘남한’이라 한다)과 그 이북지역(이하 ‘북한’이라 한다) 간의 상호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1조)

 

‘애걔, 이게 무슨 분수령?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되묻고 싶더라도 잠깐 참아주시길. 이 법은 노태우 정부 3년차인 1990년 8월1일 제정·시행됐다. 이 법 시행 이전 대한민국에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법은 국가보안법뿐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실상 “반국가단체”로 규정한다. 북을 오가거나 북쪽 사람과 만나는 행위는 물론이고 말을 섞기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됐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1일 제정·시행됐고, 오랜 세월 ‘헌법 위의 법률’이자 ‘실질적 헌법’이라 불렸다. 국가보안법의 관점에서 ‘반국가단체’와 교류·협력 촉진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교류협력법은 남과 북 사이의 “상호 교류와 협력 촉진”을 목적으로 한다고 1조에 명시했다.
 
교류협력법의 제정으로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국내 법체계는 국가보안법과 교류협력법으로 이원화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보안법이 ‘순전한 적’으로 간주한다면, 교류협력법은 “함께 번영을 이룩하는 민족공동체”로 관계를 발전시키려 “상호 교류협력”해야 할 ‘동반자’로 여긴다. 국가보안법이 북의 실체성과 교류협력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면, 교류협력법은 북을 대화와 협력의 상대로 인식해 ‘정부 승인’을 전제로 교류협력에 합법성을 부여한다. ‘1948년생’ 국가보안법과 ‘1990년생’ 교류협력법의 ‘북한 인식’은 티끌만큼의 공통점도 없다.
 
교류협력법의 탄생을 두고 당시 통일원은 “남북 간 교류협력을 우리 헌정사상 최초로 법적으로 보장”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자평했다. “헌정사상 최초 법적 보장”의 의미는 넓고 깊다. 먼저 통일 문제를 대통령의 통치 행위로 여기던 관행이 법치 행정으로 전환됐다. 둘째, 남북관계에서 “교류협력”이라는 법적 영역이 새로 만들어졌다. 셋째, 교류협력 과정에서 ‘비국가행위자’(시민사회, 기업/자본)의 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넷째, 대북정책이 ‘말’을 넘어 ‘실천’으로 도약할 법적 디딤돌이 마련됐다.
 
교류협력법은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4조 ‘평화통일 원칙’ 조항을 근거로 삼아, 1988년 7월7일 집권 첫해의 노태우 대통령이 24회 여름올림픽(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안팎에 천명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을 구체화할 수단으로 마련된 법이다. 하지만 7·7선언 당시 노태우 정부는 선언 내용의 실천을 가능케 할 새로운 법률 제정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선언 전후로 구체적인 입법 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교류협력법이 세상에 나오느라 겪어야 할 산통은 1989년 ‘비국가행위자’의 잇단 방북, 특히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방북의 후폭풍과 함께 왔다. 그해 1월 정주영의 방북은 노태우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이뤄졌다. 정부(상공부)의 방북 승인 공식 발표도 있었다. 그런데도 ‘불법 방북’ 논란에 휩싸였다. 정주영이 서울에 돌아온 다다음날인 2월4일 박세직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언론사 정치부장들을 안기부로 불러 정주영이 평양에서 “위대한 김일성 장군”이라 추임새를 넣는 장면이 담긴 영상물을 보여줘 ‘정주영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을 부추겼다. 노재봉 대통령 특보는 대통령 면전에서 정주영의 방북을 ‘불법 방북’이라 공격했다. 박세직은 정주영의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을 “잘 추진되도록 하라”는 대통령의 공식 지시에도, “사문서로 법적 효력이 없다”며 깔아뭉갰다. 정치적으론 변화를 거부하는 강경파의 반발·저항에 따른 권력의 내분이자, 근본적으론 “교류협력”을 규율하며 합법성을 부여할 법률의 부재, 곧 입법 미비에 따른 과도기의 혼란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무슨 근거로, 왜 정주영의 방북만 승인했냐’는 물음에 답해야 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통치권을 뒤흔든 내분을 빠르게 수습할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잇단 고위 당정 협의 뒤 1989년 2월11일 노태우 정부는 남북교류협력특별법안 단 한 건을 심의하려고 임시 국무회의를 열었다. 이틀 뒤인 2월13일 이홍구 국토통일원 장관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특별법안’을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 냈다. 정주영의 귀환일인 2월2일 법률 제정 방침 잠정 결정에서 2월13일 법안 제출까지 열하루밖에 걸리지 않은 속전속결이었다고 당시 법률 제정 작업에 실무자로 참여한 김천식 전 통일부 차관은 회고했다.
 
노태우 정부가 국회에 낸 법안의 내용은 교류협력을 정부가 관리·통제하려는 “창구 단일화”를 전제로 한 “국가중심주의적 접근”이었지만, 적대 일변도의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으로 방향 전환시킬 안내도를 담고 있었다. 첫째 “이 법에 따른 행위에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지 아니함”, 둘째 통일원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 설치, 셋째 인적 왕래에 통일원 장관의 승인권, 넷째 남북 교역을 민족내부거래로 간주해 무관세 적용, 다섯째 남북 교역은 국가기관·지자체·정부투자기관과 무역업 허가를 받은 자로 한정 등이다. 이 법은 1969년 3월1일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개원 이래 21년 만에 처음으로 국회에 낸 법률안이라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그 와중에 1989년 3월25일~4월3일 문익환 목사 ‘미승인 방북’의 후폭풍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노태우 정부는 정주영과 달리 문 목사를 구속하고 ‘공안정국’을 조성해 87년 6월항쟁 이후 목소리를 높여온 노동자 등 민중운동을 탄압했다. 영화로도 익숙한 ‘범죄와의 전쟁’은 노동자·민중 탄압에 쏠릴 시선을 흩트리려는 성동격서였다. 그해 7월1일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이 열린 평양 능라도경기장에 있던 ‘전대협 대표 임수경’은 구속됐는데 ‘박철언 대통령 정책특보’는 멀쩡한 내로남불 사태가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정주영 때 권력 내부 분열로 시작된 방북 논란이 문익환·박철언·임수경을 거치며 사회적 논란으로 확산한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자의적 적용 등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논란을 ‘통치행위’ 논리로 무마하는 데 한계가 분명했다.
 
노태우 정부는 잇단 방북과 관련한 내로남불 논란과 권력 내분이 대통령의 통치권을 뒤흔들지 않도록 신속하게 수습해야 했다. 방향은 정부가 통제·관리하는 남북 교류협력의 합법화였다. 7·7선언으로 이미 물꼬를 터놓은 터라 국회의 입법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6월12일 ‘대통령특별지침 1호’의 형식을 빌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기본지침’을, 그해 7월21일 ‘남북교류협력 세부시행지침’을 제정·시행했다. 이 지침은 1990년 8월1일 교류협력법이 제정·시행·공포될 때까지 1년 넘게 남북교류협력과 관련한 법률 구실을 했다. 국회에서 이를 두고 위헌 논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사실상 ‘입법’인 ‘대통령 특별지시’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정부 행위였다.
 
안타깝게도 교류협력법은 국가보안법에 포획된 채로 세상에 나왔다. 애초에 노태우 정부는 “이 법에 따라 행하여지는 행위에 대하여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해, 교류협력법을 국가보안법과 동급의 법률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초거대 보수당’인 민주자유당의 압박 탓에 최종 제정 법률은 “…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로 바뀌었다. 교류협력법에 근거를 둔 행위라도 ‘정당하다’고 인정받지 못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이다. 교류협력법은 사실상 국가보안법의 하위법으로 세상에 나온 셈이다.
 
30여년이 흐른 지금 “다른 법률과의 관계”를 규정한 현행 교류협력법 3조는 “이 법률의 목적 범위에서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라는 주관적 표현이 ‘법률의 목적 범위’라는 법률 용어로 개선됐지만, 아직도 국가보안법의 어두운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갈 길이 멀다.
 

평양축전의 임수경과 박철언, 그리고 국가보안법

등록 :2021-12-06 16:58수정 :2021-12-07 02:32

이제훈 기자
 
이제훈의 1991~2021 _17
 
임수경은 평양축전 참가를 계기로 남과 북 모두에서 “통일의 꽃”이라 불렸다. 2001년 8·15 민족공동행사의 남쪽 대표단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북쪽의 환영 인파가 특별기에서 내린 임수경을 보고는 대열을 무너뜨리며 다들 가까이 다가서서 손을 만지고 말을 걸려 했다. 그 모습은 남쪽의 아이돌 스타를 대하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은 그해 8월15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으로 돌아왔다. 임수경의 ‘무사귀환’을 도우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손을 맞잡고. <한겨레> 자료사진
 
 

“임수경은 (평양)축전의 주인공이었다.”1989년 7월1~8일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하 평양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3학년)과 관련한, 당시 ‘평양시민’이던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의 회고다. 주 기자는 그때 평양 사람들이 임수경한테서 받은 ‘문화충격’을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에 이렇게 적어놨다.

 

“북한에서 금기시하는 청바지를 입고 면티를 입은 이 아가씨는 너무나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 그녀가 남한 정부를 마구 비판하는 모습에 북한 사람들은 ‘어구구, 용감하긴 한데 쟤네 집은 이제 3대가 몽땅 망했다’ 하면서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그해 8월15일,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분단선 위에 섰다. … 우리는 모두 슬펐다. 한 달 반 동안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우리의 여주인공이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끌려갔으니. … 1990년대 초반, 남북총리급회담(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자 서울을 방문한 북한 기자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으로 들이닥친 일이 생겼다. 진짜 가족들이 피해 없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장면도 티브이(조선중앙텔레비전)로 방영됐다. 이 장면이 특히 충격이었다. 가족이 아무 문제 없이 살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놀라운 일인데, 그 ‘역적’의 집안에 그토록 귀한 천연색텔레비전(컬러TV), 소파, 냉장고 등 없는 게 없었다.
 
”임수경이 북한에 머문 1989년 6월30일부터 8월15일까지 <노동신문> <조선중앙텔레비전> 등 북녘의 주요 매체는 임수경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하게 보도했다. 북녘 인민들의 안방까지 여과 없이 전달된 임수경의 거침없는 언행과 ‘낯설지만 멋진 복장과 머리 스타일’의 영향은 컸다. 북쪽 당국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결과적으로 북쪽 지배집단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던 인민의 의식에 균열이 생기는 계기가 됐고, 남쪽 사회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무엇보다 북쪽의 삶을 남쪽의 삶과 비교하는 시각을 촉발시켰다.
 
임수경은 평양축전 참가를 계기로 남과 북 모두에서 “통일의 꽃”이라 불렸다. 이런 일이 있었다. 2001년 8·15 민족공동행사의 남쪽 대표단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북쪽의 환영 인파가 특별기에서 내린 임수경을 보고는 대열을 무너뜨리며 다들 가까이 다가서서 손을 만지고 말을 걸려 했다. 북에 장기 체류하며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펴낸 소설가 황석영을 포함해 남쪽의 내로라하는 각계 유명 인사들 앞에선 아무런 감정 변화도 없이 꽃과 손을 기계적으로 흔들던 이들이 ‘임수경’한테만 반응했다. 공동취재단의 일원으로 현장에 있던 기자한테 그 모습은 남쪽의 아이돌 스타를 대하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임수경은 분단사를 통틀어 남북 모두에서 대중의 ‘사랑’을 얻은 사실상 유일한 인물에 가깝다. ‘1989년 평양의 임수경’은 남녘 시민과 북녘 인민의 마음을 잇는 “새로운 주체의 출현”이었다. 남과 북을 가른 심연을 건너는 다리 놓기는 남북 당국 관계만으론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임수경은 남쪽으로 돌아온 뒤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임수경한테 적용된 ‘국가보안법 위반죄’는 여러모로 문제적이었다.
 
우선 노태우 정부가 ‘평양축전 참가’를 애초부터 금지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1월17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평양축전’을 “반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전위 역할을 하는 집회”라면서도 “그러나 남북 간에 어떤 형태든, 어떤 분야든 교류를 해야 되겠다 하는 입장과 정책에 따라서 문교부에서 이 학생교류 방침을 지금 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것이든 교류 성사의 기회로 활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열흘 뒤 ‘남북학생교류추진위원회’(1989년 1월27일)가 발족했고, 다시 보름여 뒤 노태우 정부는 평양축전에 대학생 200명을 파견하기로 결정(1989년 2월13일)했다. 그러던 노태우 정부가 문익환 목사의 ‘미승인’ 방북(1989년 3월25일~4월3일)을 빌미로 ‘공안정국’을 조성하고는 평양축전 참가 관련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꿨다. 그해 6월6일 정원식 문교부 장관은 평양축전을 “반한·반미 투쟁을 부추기는 북한의 선전장”으로 규정하고, 전대협의 방북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둘째, 1989년 7월1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평양축전 개막식에 참가한 ‘대한민국 국민’은 임수경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김정일 등 북한 최고 수뇌부가 자리한 중앙 주석단에 박철언 대통령 정책특별보좌관과 그 수행원인 강재섭 당시 민주정의당 의원이 앉아 “임수경양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속에 영웅처럼 손을 흔들어대며 입장하여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모습을 지켜봤다.(박철언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 노태우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임수경은 1989년 6월21일 서울 김포공항을 떠나 일본 도쿄, 서독 서베를린, 동독 동베를린을 거쳐 열흘 만인 6월30일 오후 1시30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임수경은 공항에서 “자동차로 불과 네 시간이면 올 거리를 저는 240시간이 걸려 도착했다”고 밝혔다. 박철언은 6월30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까지 직행했다. 박철언은 평양축전 개막식장에서 “초청받은 해외 거주 동포 브이아이피(VIP)인 것처럼 처신”했다고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에 적었다. 박철언은 허담 조선노동당 대남 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한시해 조평통 부위원장 등과 회담을 하고는, 7월2일 백두산에 올랐다. ‘박철언-한시해’ 창구는 전두환·노태우와 김일성을 잇는 비밀 협상 통로로 ‘88 비밀 회담’ 창구라 불렸다. 박철언은 한시해와 1985년 7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남과 북, 제3국을 오가며 모두 42차례 비밀 회담을 했다고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밝혔다. 그런데 1989년 7월31일 야권 성향의 무소속 국회의원인 박찬종·이철이 ‘박철언 7월 방북설’을 제기했다.
 
박철언과 임수경의 방북을 대하는 노태우 정부의 ‘이중잣대’를 두고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들끓었다. 1989년은 정주영(1월23일~2월2일)·문익환 등 각계 인사의 방북을 둘러싼 논란이 특히 심했다. 문익환과 임수경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에 갇혔고, 정주영은 논란 끝에 ‘무사’했으며, 박철언은 방북 사실 자체를 당시엔 인정하지 않았다.
 
방북 논란은 노태우 대통령과 정부의 누군 되고 누군 안 된다는 고무줄 잣대가 논란을 키운 측면이 있지만, 방북과 관련한 법·제도가 정비돼 있지 않은 현실이 근본적 문제였다. 시민사회는 방북 인사한테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고 비판했는데, 군부 등 노태우 정부 강경 세력은 방북과 교류협력 자체를 불온시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정주영 방북 허용을 “적성국가와의 외교과정에서 불법성을 노출한 문제”라고 비난한 노재봉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박철언 방북’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국회의원한테 흘린 이가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권력 내부와 외부로부터 서로 다른 방향의 공격을 받은 노태우 대통령은 ‘통치행위’라는 논리로 가까스로 버텼다. 노태우 대통령은 정주영의 방북은 자신이 시킨 “심부름”이라고, 박철언의 방북은 “나의 허가를 받은, 정부 관리의 자격에서였으므로 (임수경 처벌과) 별개의 문제”라고 둘러댔다.(<노태우 회고록> 하권, 361쪽)
 
하지만 이른바 ‘통치행위론’은, “현재의 국가보안법은 정주영, 박철언 등이 북한 땅을 밟으면 죄가 되지 않고, 한 시대의 보편성을 짊어진 작가가 북녘땅을 밟으면 ‘이적행위’이자 ‘반국가단체로의 잠입탈출’이 되는 등 도무지 기준과 형평성이 없고, 또한 적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악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분단시대 최후의 악법”(작가 황석영 석방대책위 결성취지문)이라는 비판 앞에 옹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노태우 대통령은 “남과 북이 민족공동체”이므로 “자유 왕래”와 “교역 문호”를 개방한다고 선언(7·7 특별선언)한 터다.
 
북한 방문과 교류협력에 ‘질서’를 부여할 입법이 불가피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남북 교류협력을 법으로 보장하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1990년 8월1일 제정)이 세상에 나온 까닭이다.

 

이제훈ㅣ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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