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정전협정 68년, 평화협정이 시급하다
[기고] 미중 패권 경쟁 더 심화되기 전에 한국 한반도 조정자 위상 확보해야
-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media@mediatoday.co.kr 이메일 바로가기
- 승인 2021.07.27 06:15
7월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68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전쟁은 정전협정으로 일단 총성이 멈추고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정전협정은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국제 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와 북한군 최고 사령관 김일성(金日成), 중공 인민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최종적으로 서명해 체결되면서 한반도에서 전투 행위가 중단됐다. 정전협정은 한반도의 전쟁을 완전 종식시키고 정치적으로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킬 평화협정을 추진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지만 아직껏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2차 대전 종전 5년 만인 1950년 6월25일 한반도 전면전 형태로 발생해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군이 개입하는 국제전으로 비화되어 엄청난 인명 피해 등이 발생했다. 3년 3개월간 지속된 한반도 전쟁에는 21개국이 전투병과 의료진을 보내 참전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장이 되었으며, 대략 6백여 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남북한이나 미국, 중국 등의 집계가 서로 달라 혼란스런 가운데 남한의 인적 손실은 모두 230만여명, 북한의 인적 손실은 292만여명으로 추정됐다. 또한 1천만명의 결핵환자, 1천만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참전국 군대의 인적 손실은 한국군 75만명 사상, 북한군 50만명 사상, UN군 18만명 사상, 중공군 95만명 사상으로 추정된다. 남북한 전역이 초토화되고 주요시설 파괴는 52%에 달했다. 남북한 전 지역에서 학교·교회·사찰·병원 및 민가를 비롯, 공장·도로·교량 등이 무수히 파괴되었다. 특히 민족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이 커지면서 남북 간의 분단의 벽이 더욱 높고 견고해졌다.
정전협정이 68년 지속되는 경우는 세계역사상 그 유례가 없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으면서 한반도가 세계에서 가장 전쟁 발생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가 되었다. 남북은 물론 미국 등이 정전협정을 위반했다고 지적받는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남북 양쪽에서 군비 증강이 가속화되었으며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 공격 전략 상시화, 북한의 핵 개발 맞대응이 현실화되었다.
미국, 1956년 핵무기 한국 배치 공식화 정전협정 일방적 위배
정전협정 60항은 이 협정 조인 후 3개월 이내에 정치적 협상을 벌여 평화협정을 추진하도록 촉구하고 있어 1954년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관련회의가 열렸지만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협상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여 다른 참가국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미국은 이 협정 13항에 규정된 새 무기 도입 금지 규정을 어기고 1956~1957년 남한에 핵무기 배치를 공식화하면서 정전협정을 일방적으로 위배했다. 미국은 정전협정 이후 최초로 이 협정문의 일부를 공식 폐기할 의사를 밝힌 것이다(https://en.wikipedia.org/wiki/Korean_Armistice_Agreement).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도 대표하는 미군은 1957년 6월21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유엔군 사령부는 정전협정 13항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북측에 통보했다. 미국은 이런 통보를 하기 전에 북한이 이 조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미국은 그 다음해인 1958년 1월 단거리 핵미사일과 280mm 핵 발사 대포를 주한미군에 배치하고 이어 1959년 중국과 소련을 사정권 안에 둔 크루즈 핵미사일을 반입했다.
북한은 미국의 핵무기 사용에 대비해 군사력을 휴전선 부근에 밀착해 배치하고 1963년 소련과 중국에 핵무기 개발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당시 북한은 핵전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전방에 배치해 미국이 북에 대해 핵무기 사용 시 미군이나 한국군도 동시에 핵 피해를 입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1963년 소련과 중국에 핵무기 개발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남측에서 논란이 된 전방지역의 땅굴도 북한이 핵전에 대비하기 위해 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정전협정과 관련해 남북이나 유엔 등은 70년대 이래 이런저런 움직임을 보였지만 평화협정 추진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남북은 1972년 7·4공동성명과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상호간 불가침을 선언했지만 이는 정식 조약이나 평화조약이 아닌 것으로 북측이 주장하고 있다.
▲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조인하는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측 대표. 사진=위키백과
유엔 총회는 1975년 유엔사령부를 해체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1996년 유엔안보리는 의장성명을 통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기 전에 정전협정이 철저히 준수될 것을 강조했다.
북한은 정전협정 무용론을 오래전부터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준수치 않을 것이라고 1994, 1996, 2003, 2006, 2009, 2013년에 최소 6차례 발표했고, 미국이 남한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면서 실질적인 정전협정이 파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북한과 함께 1994년 군사정전위원회 참가를 중단하고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판문점에서 연락관을 통해 접촉하는 등 정전협정의 일반적 조건은 유지하고 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탄한 뒤 북한은 2006년 10월 첫 핵실험 실시했고 미국은 2010년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는 불가역적 조치를 취할 경우 평화협정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은 2013년 3월 남북 간의 불가침 협정을 폐기한다고 발표하면서 핵 선제공격을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한국 전쟁은 승패가 가려지지 않으면서 그 전쟁의 책임이나 보·배상 문제 등은 전면 보류된 상태다. 이 전쟁은 여전히 논란이 많아 앞으로 여러 각도에서 점검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역사적 과제로 방치되어 있다. 특히 국가보안법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전쟁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과 해석 등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인명피해가 막대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2차 대전과 태평양전쟁부터 본격화된, 민간인을 군인과 가리지 않는 전면전 형태로 전개되면서 피해가 컸다. 인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점에서 당시 연합군 공군력에 의한 북한 공습 부분을 집중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이 북한의 소규모 도회지는 물론 제방과 같은 기간 시설 등을 철저히 파괴한 것은 세계 2차 대전보다 더 심각했던 것으로 규명되어 있다. 국보법 등에 의해 국내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미 공군을 주력으로 했던 북한공습에 대한 피해 상황을 통해 향후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 안 된다는 지상명제를 모두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북한 공습, 2차 대전 독일, 일본 도시 피해보다 심각
한국전쟁은 미국이 1945년 세계 2차 대전 종전이후 승리하지 않고 휴전했던 최초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당시 북한의 도시들이 입은 공습피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 도시가 공습으로 입은 피해보다 더 심각했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 3년 동안 평양 등 북한의 주요 도시들 대부분을 네이팜탄과 소이탄 등을 투하해 철저히 파괴했다(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7/aug/13/america-carpet-bombed-north-korea-remember-that-past). 미 공군의 B-29 폭격기 등은 1950~1953년 한국 전쟁 기간 동안 북한 전역의 대 중 소도시를 폭격해 모든 건물의 85%를 파괴했고 주요 댐도 파괴해 주민들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만들었다(https://en.wikipedia.org/wiki/Bombing_of_North_Korea).
극동공군(FEAF) 소속 폭격기들은 한국 전쟁 개전 초 전쟁 수행에 긴요한 산업 시설이나 철도와 같은 교통 통신 수단 등에 대해 정밀폭격을 실시했다고 했지만 실제 거의 무차별적인 폭격이 이뤄졌다. 정밀폭격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유럽에서 융단폭격으로 일컬어지는 식으로 야만적인 폭격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어 대규모의 민간인 살상 등이 초래되자 비도덕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미 공군이 채택한 공격 원칙은 정밀폭격이었다. 이 원칙은 중공군 참전이전 까지 유효했다고 하자만 북한의 군수시설 등이 인구밀도가 높은 주요 도시에 세워져 있어 미군 폭격 시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중공군 참전이후에는 이 원칙이 실질적으로 폐기되었다.
1950년 11월 맥아더 사령관은 강계, 신의주와 수 개의 작은 도회지를 화염 공격하는 방안에 동의했다. 그 당시 북한의 모든 도시와 부락, 공장, 건물, 통신 시설 등은 파괴하라는 명령을 미 공군은 하달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따라 11월5일 22대의 B-29가 출동해 강계에 출동해 이 도시의 75%를 파괴했고 그 후에도 여러 도시에 대한 공격이 실시됐다. 1951년 8월 한 종군기자는 ‘압록강과 평양 사이는 철저히 파괴되어 도회지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살았던 곳은 철저히 파괴되고 굴뚝만 남아 있어서 마치 달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았다’라고 썼다. 종전 당시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는 대부분 60~95% 정도 파괴된 것으로 미 공군은 평가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하자 중국과 북한의 접경인 만주 부근에 34개의 핵폭탄을 투하해 최소 60년 동안 북한의 남침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미 정부에 요구하다가 경질되었다(https://en.wikipedia.org/wiki/Bombing_of_North_Korea).
1953년 5월 미군 폭격기들은 정전협정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북한 지역에 있는 수력발전 시설이나 관개용 댐을 공격해 농지에 홍수가 나거나 작물을 파괴했다. 특히 독산댐, 자산댐, 구원가댐, 남시댐 등을 공격해 수 백 만 명의 북한 주민이 굶주리게 만들었다. 북한에 대한 화염 폭격을 멈출 즈음에는 미군 폭격기들이 목표물을 찾기 어려워 개천에 놓인 작은 다리를 폭격하거나 바다에 폭탄을 버리기도 했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에서 3만2557t의 네이팜탄을 포함해 모두 63만5000t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미국이 2차 대전 당시 유럽에 106만t을,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 투하한 16만t을 포함해 총 50만t을 투하한 것과 비교된다. 참고로 미국이 참전해 폭탄을 가장 많이 투하했던 국가는 캄보디아 50만t, 라오스 200만t, 남부 베트남 400만t이었다.
한국전쟁 중 남한 민간인 피해는 모두 99만968명으로 이 가운데 37.7%인 37만3599명이 사망했다. 북한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150만명인데 북한 당국은 사망자를 별도로 밝힌 바가 없다. 그러나 미 국방부 등이 추정한 북한군 사망자는 21만~31만명이다(Bethany Lacina and Nils Petter Gleditsch, 2005. ―Monitoring Trends in Global Combat: A New Dataset of Battle Deaths.‖ European Journal of Population: 21(2–3): 145–166. Korean data available at "The PRIO Battle Deaths Dataset, 1946-2008, Version 3.0," pp. 359–362).
미국이 1950~1953년까지의 한국전쟁 때 실시한 북한 지역에 대한 화염공습으로 북한 민간인 99만5천명(최저 64만5천~150만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세계 전사에서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초래한 것으로 일부 국제기구나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https://www.mintpressnews.com/state-of-fear-how-historys-deadliest-bombing-campaign-created-todays-crisis-in-korea/235349/).
▲ 네이팜탄 폭발 사진. 사진=나무위키
북한 민간인 사망자를 99만5천명으로 추정할 경우에도 세계 주요 전쟁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를 능가한다. 즉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대해 연합군이 실시한 화염공습으로 민간인 40만~60만명이, 일본에 대한 화염공습과 핵무기 투하로 33만~90만명이 각각 사망했다. 미국은 1945년 3월 9~10일 도쿄에 화영공습을 실시해 민간인 10만명이 죽고 1백만 명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인도차이나에서 1964~1973 년 동안 실시된 여러 작전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는 12만1천~36만1천명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 수는 그 비극이 발생할 당시 전체 인구와 비교하면 북한 경우가 가장 심각했다. 즉 북한은 1950년 당시 전체 인구가 970만명이었고 2차 대전 종전 당시 독일 전체 인구는 6500만명, 일본은 7200만명이었다.
미 공군이 북한 지역에 실시한 화염공습은 2차 대전 당시 유럽과 일본에서 자행된 방식이다. 단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행해지는 공습으로 전체 도시가 약 1500~2000°C의 고온 속에 불타는 화재폭풍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즉 강력한 폭약으로 건물을 파괴하고 네이팜탄과 다른 소이탄으로 거대한 화염을 일으켜 소방관들이 불길을 진화하지 못하도록 질식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종전 후 화염공습 방식이 민간인에게도 사용되는 것은 군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전후 활용 가능한 자원을 불태워 비생산적이고 세계 보편적 개념인 도덕률에 반하는 것이란 비판을 받았다.
전쟁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2차 대전이후에는 잠시 부각되었고 한국 전쟁 발발 초기에 미국은 민간인도 살상하는 전면전 형태인 화염공격을 금지했었지만 개전 5개월 만에 중공군이 참전해 미군 등이 철수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번복했다. 미 공군은 북한 지역에서 군대, 보급, 군수공장과 통신 시설, 은신처로 사용 가능한 모든 건물을 포함한 모든 목표물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후 독일에 대한 화염공습에 대해서는 1천 명에 달하는 조사단을 현지 파견에 정밀 조사해 미국의 독일 현지 공장 피해 등에는 배상을 했지만 일본과 북한 지역에 실시한 동일한 공습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사 등을 실시하지 않았다(https://www.mintpressnews.com/state-of-fear-how-historys-deadliest-bombing-campaign-created-todays-crisis-in-korea/235349).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강행된 북한에 대한 공습은 미국이 타 민족에게 가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하나이면서 미국인들이 그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군은 1958~1990년까지 남한에 수백 개의 핵폭탄을 배치하고 북한의 침공 초기에 사용한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겪은 공습에 대한 피해와 공포는 결국 북한이 핵보유를 시도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는 식의 견해도 있다.
미국 대통령 등이 북한 선제공격을 위협하는 발언을 하면서 한반도에서 전쟁 수행 권을 미국이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한반도의 특성 상 남북한 주민들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대단히 부적절한 일이다. 남한 주민 5000만명, 북한 2500만명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상정한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고 한미동맹 관계가 엄존한다 해도 한국 정부가 그런 발언이 나오지 않도록 안전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멈추기로 합의한 협정에 불과하다. 정치적으로 전쟁을 종식하는 평화협정이 아직 맺어지지 않아 불안한 평화가 한반도에서 지속되고 있다. 한반도는 만신창이가 된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형식 속에서 평화협정이 언제 어떻게 맺어질지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는 상태다. 정전협정 당사국인 미국은 평화협정 추진을 외면하고 중국도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상황인데 비해 북한은 적극적이다. 한국은 정전협정 서명국이 아니어서 한반도 준전시 상황 청산에 제 목소리를 거의 내지 못하고 주로 미국 입장을 추종했지만 국력 신장에 따라 발언권을 높이려 시도하고 있다.
정전협정, 평화협정으로 전환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한반도의 위기는 껍데기만 남은 정전협정을 실효적인 군사, 정치적 협정으로 대체하지 않는 한 해소될 수 없다. 한국은 군의 전시작전지휘권조차 미국에게 계속 행사하도록 맡긴 형편이어서 외교, 군사적 자주권 행사를 통한 한반도 당사자다운 홀로서기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자체 보유 핵무기가 아니면 중동의 이라크나 리비아 꼴이 될 것이라면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멈추지 않고 있고 이를 지속할 기세다.
북한의 법적 위상은 유엔 회원국과 같이 국제법상으로는 국가인데 반해, 국가보안법과 같은 한국 국내법으로 보면 상종하면 신세 조지는 반국가 단체일 뿐이다. 이런 2중적인 북한의 법적 위상은 국내에서 평화통일 운동이 친북 운동으로 처벌 또는 탄압 받는 빌미가 되고 있다. 수구보수 정권은 간첩단 사건 조작 등을 통한 공안정국 조성을 통해 민중을 탄압하는 일을 반복했었다. 향후 보수정권이 들어설 경우, 공안정국에 앞장섰던 정부 기관들이 또다시 국보법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탄압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미국은 6·25전쟁 당시부터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집중 검토했고 정전이후에도 북에 대한 핵 위협을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한반도를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전략 주요 지역으로 삼아 90년대 초까지 매년 팀 스피리트 훈련을 통해 핵무기 및 재래식 무기를 동원해 북한을 압박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런 상황에 큰 위협을 느낀 북한은 핵무기 자체 개발을 시작해 결국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탑재할만한 소형 핵무기를 개발해 미 본토까지 위협하게 된 것으로 미국 안보 전문가들도 언급하고 있다. 핵무기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대치와 상호위협의 모습을 볼 때 한반도 평화협정이 진즉 체결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한편 중국이 주도한 6자회담은 관련국들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로드맵까지 만드는 성과를 거뒀지만 실행단계에서 미국의 돌발적 행동 등으로 백지화되었다. 6자회담은 지난 2005년 9·19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국제원자력기구(IAEA)로 복귀하며 한반도 평화협정, 북미 간의 신뢰구축 등을 골자로 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미국이 그 해 10월 북한의 달러 위폐 사건을 터뜨리면서 그 이행이 중단되었다. 외국의 화폐를 위조하는 것은 전쟁 선포와 같은 중대한 도전으로 인식되는 중차대한 범죄행위다. 그러나 미국은 지금까지도 북한이 가짜 달러를 만든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 2005년 9월19일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 한반도 비핵화 원칙 등 6개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회담을 성공리에 마친 6개국 대표들이 회담 직후 손을 맞잡고 이를 축하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왼쪽부터)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 송민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 실장 (당시 외교통상부 차관보),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알렉산드로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무부 차관. ⓒ 연합뉴스
한반도 평화협정이나 비핵화를 거론할 때 북한이 핵무기를 감추거나 비밀리에 제조할 가능성을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을 미국이나 한국 일각에서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한반도의 정전협정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속셈으로 내세우는 비현실적인 주장이라는 비판을 자초한다. 그것은 현대 과학의 발달로 미국과 러시아가 상호 검증 속에 전략 핵무기 감축 협상을 수십 년 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미국과 러시아는 위성과 항공기, 감시 검증 전문 요원 등을 통해 서로 상대방의 핵무기 감축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검증 기술을 한반도에도 적용하면 되지만 미국은 ‘북한을 믿을 수 없다’는 태도로 현상 유지를 고집하고 한국도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전협정 유지는 미국의 동북아 군사전략 수행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 여부가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은 중국의 목을 겨누는 칼로 비유되고 있다. 미국은 정전협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현재와 같은 전략적 이익을 동북아에서 유지, 증대하고 있다. 미국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점을 이용해 전작권을 한국군에게 넘긴 뒤에도 유엔사를 통한 남한에 대한 군사적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한국은 이에 끌려가는 형국이다.
미국이 1958년 핵무기를 한국에 처음 들여온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서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은 원하는 모든 무기를 한국에 반입할 수 있고 한국은 이를 승인해야 한다. 미국의 무기 반입 의사에 한국은 반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즉 사드의 한국 반입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이 조약에 따르면 사드 문제는 미국이 맘만 먹으면 언제든 주한미군에 배치할 수 있고 단지 한국이 한미행정협정, 즉 SOFA에 의해 그 비용을 얼마나 대느냐 하는 것만이 협의사항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도 국내 정치권이나 대부분의 언론은 한국이 마치 반대할 권한이나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 정보만을 양산할 뿐 군사주권이 원천적으로 전무한 한국의 실상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향후 미중패권 경쟁이 심화되고 한국이 미국의 대중전략에 동원될 경우 중국이 반발해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 등을 취할 가능성이 크고 미국이 주도하는 정전협정 구도는 더욱 강화되면서 평화협정 전환 가능성은 더욱 멀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미중패권 경쟁 심화 이전에 한국 한반도 조정자 위상 확보해야
오늘날 미국과 중국은 경제, 외교, 국방 등 전 방위에 걸쳐 대치와 갈등의 수위를 높이는 패권경쟁을 벌이면서 동북아에 신냉전 시대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 비핵화는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정전협정 상태가 계속 유지될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미국이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면서 동맹을 강조할 경우 최근 수년간의 한미관계처럼 한국이 전 방위적으로 미국에 심각하게 예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동북아 정세는 한미일 공조에 대항해 중국, 러시아, 중국의 관계 긴밀화가 강화되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미중 두 나라의 패권 경쟁은 중국의 경제력과 군비증강이 미국의 동북아 군사구도에 균열이 생길 수준에 다다르면서 심화되는 양상이다. 미중간 군비상태나 국방예산 규모로 보면 미국이 월등하다는 측면에서 전체적인 군사력 비교를 할 경우 중국은 미국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2020년 국방예산의 경우 미국은 7780억 달러, 중국은 2520억 달러이고 재래식 무기의 상징인 항공모함은 미국이 20척, 중국은 2척을 각각 가동 중이다(https://armedforces.eu/compare/country_USA_vs_China).
그러나 중국은 자국과 그 주변의 군사적 방위태세로 국한할 경우 미국의 군사적 압박에 대처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과 중국 주변에서 미중이 재래식 무기체계로 충돌할 경우 미국이 낙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략 핵무기의 경우 중국은 미국의 20~30분의 1 수준에 그치지만 미국에 상당한 정도의 핵 보복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오늘날 동북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중국보다 미국이 매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처한 국내외 정세로 볼 때 군사적 충돌이나 제한전쟁과 같은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미국이 중국 포위 전략에 동원하고 있는 인도, 호주, 일본, 한국 등이 중국과 긴밀한 경제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공세가 강화돼도 이들 국가의 미국에 대한 협조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도 대만에 대해 무력공격 가능성을 위협하고 있으나 양안 경제협력 관계 등으로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군사력 증강이나 경제력이 중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 또는 그 보다 10년을 전후해 미국을 능가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으로 보고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미중패권 경쟁이 더 심화되기 전에 한국은 국방부문에서의 자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한국의 미국 대한 군사적 예속 상태가 방치될 경우 미국에 대한 편입이 더욱 강화될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늦어도 향후 5~10년 안에 군사적 자주권 확보 조취를 취해 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미동맹의 핵심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정상화를 통해 그 교두보가 확보될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평화협정 추진도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가 정전협정 체제 속에서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 전략이 보장되는 등 전쟁 발발의 위험을 안고 있는 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은 달성될 수 없다. 한반도 당사자의 하나인 한국 정부는 한반도의 전쟁 발생위기 지수가 높다는 구조적인 원인의 하나가 정전체제라는 것을 인정하고 전쟁 위기 해소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남한이 향후 자주국가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외교,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국가가 될 것인지 여부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등에 달려 있다. 전쟁의 위협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면서 평화와 안정, 번영을 정착, 증대시킬 안전장치의 하나로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
미국, 왜 한국전쟁에 '마침표' 찍지 않을까?
- 워싱턴=CBS노컷뉴스 권민철 특파원 메일보내기
- 2021-07-27 10:22
휴전협정 평화협정 대체 머뭇거리는 이유
미국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속내
바이든 휴전협정 68년주년 선언문서 평화협정의 'ㅍ'자도 안 꺼내. 미국정부 1954년 제네바 협정 때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원치 않아. 현재까지 평화협정 체결 노력 전무. 북핵 해결의 조건 또는 지렛대로 인식. 그러나 북한에 핵이 없었을 때도 평화협정 대체 노력 안해. 평화협정 체결시 주한미군 주둔 명분 사라지는 때문. 주한미군은 남침저지용 아닌 중국 견제용. 미국 행정부 뿐 아니라 의회에서도 평화협정 체결 필요성 인식 못해.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미국 W.K. 해리슨(좌) 장군과 북한 남 일(우) 장군이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청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에 거주중인 동포들이 백악관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68년간 지속돼 온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 달라고 요구했다.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기념일을 사흘 앞두고서다.
이들 뿐 아니다.
'7.27 한반도 종전 평화 국제행동' 등은 이달부터 국내외에서 평화협정 체결 촉구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한국전쟁, 쉼포에서 마침표로!'라는 간명한 구호를 내걸고 많은 사람들의 동참을 유도중이다.
24일(현지시간) 오후 3시 백악관 앞에서 열린 평화협정 체결 촉구대회. 현수막에 '휴전에서 평화로'가 적혀있다.
하이유에스코리아
이들의 요구는 미국 백악관에 맞춰져 있다. 더욱이 올해는 백악관 주인도 바뀐 상태다.
그러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 같은 국내외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휴전협정 체결 기념일을 하루 앞둔 26일 그는 공허한 선언문만 내는데 그쳤다. 선언문에는 평화협정의 'ㅍ'자도 안 보인다.
그는 "1953년 3년간의 격렬한 전투와 수백만 명의 사상자 발생 끝에 미국과 중국, 북한의 대표들이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휴전협정은 전쟁포로 교환과 평화적 해결(peaceful settlement)을 위한 협상 기회를 가능케 했다. 거의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평화적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한반도는 38선을 따라 분단돼 있다"고 썼다.
평화적 해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표현에서는 휴전협정 체결 당사자보다는 제3자의 입장마저 읽힌다.
그가 말한 '평화적 해결'이란 사실 휴전협정에 언급돼 있는 말이다.
휴전협정은 최종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 까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등에서 무장행동을 중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을 담고있다
그러나 68년이 지나도록 '평화적 해결', 즉 '평화협정'은 체결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전쟁 당사국들은 그 동안 어떤 노력을 했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2018년 4월 27일 남한과 북한의 군 통수권자들은 판문점선언을 통해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국제법적으로 휴전협정의 우리측 체결 당사자인 미국이 움직이지 않은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그 이전에라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과연 무엇을 했을까?
한국전쟁과 전쟁 전후의 한미관계 역사에 정통한 미국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전 시카고대 교수는 지난달 30일 민주평통 워싱턴 협의회가 주관한 '한반도 종전 캠페인 평화포럼'에 참석해 미국의 입장을 소개했다.
그는 한국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해 마련된 1954년의 제네바 협정의 미국측 협상대표로 참여한 알렉스 존슨 전 주일대사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미국은 평화협정에 서명할 의사가 없었다"며 "미국은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났어야했을 때 그 전쟁을 끝낼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부르스 커밍스 전 시카고대 교수. 사진=유튜브
미국의 입장은 워싱턴에서 활동중인 우리 외교 당국자들을 통해서도 교차 확인된다.
한 외교 당국자는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미국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외교 당국자는 아예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할 이유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했다.
북한이 그 동안 과거 수차례 도발을 벌여왔고, 지금은 핵무기까지 개발중인 준전시 상황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외교가의 분석을 종합하면 미국은 현재 평화협정 체결을 북핵 해결의 조건 또는 지렛대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원광대 이재봉 명예교수는 "남한에 핵무기가 있고, 북한에 핵무기가 없었을 때에도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에 반대했다"며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지금의 주한미군은 북한의 남침 저지용이라기보다는 중국 견제용 성격이 짙다"며 "따라서 평화협정 체결은 중국을 견제하는데 큰 구멍을 내는 셈인 만큼 미국으로서는 반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았다.
실제로 평화협정 체결시 폐기돼야 하는 휴전협정의 마지막 조문은 앞서 바이든 대통령도 언급한 '평화적 해결'을 위한 방안이 제시돼 있다. '3개월 내에 고위급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 모든 외국군대 철수 등을 협의할 것을 상부에 건의한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날 발표한 휴전협정 68주년 선언문도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하다.
그는 "한국군과 함께 훈련하고 있는 주한미군들은 그들에 앞서 복무한 군인들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지키면서 감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파트너십은 오늘날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세계의 중요한 지역에서 경제 성장을 확대하는 데 있어 여전히 중요하다"고 밝혔다.
평화협정에 대한 입장은 미국 행정부 뿐 아니라 미국 의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미국 의회에는 한국전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도록 국무부의 역할 등을 규정한 '한반도 평화법안'이 제출돼 있다. 그러나 지난 5월 20일 발의된 이 법안에 서명한 하원 의원은 전체 435명 가운데 이 날 현재 11명밖에는 되지 않는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 제주4·3평화상 수상
김영헌 입력 2017. 03. 14. 16:39 수정 2017. 03. 14. 18:35
한국과 4ㆍ3사건 전 세계 알려… 내달 1일 제주서 시상식 가져
미국 내 한반도 최고 전문가이자 세계적인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74)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제2회 제주4ㆍ3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커밍스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과 ‘한국 현대사’ 등을 통해 한국과 제주4ㆍ3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 대학교 석좌교수가 제2회 제주 4ㆍ3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진은 지난해 제주에서 열린 제주4ㆍ3평화포럼에 참석한 부르스 커밍스 교수. 제주4ㆍ3평화재단 제공.
14일 제주4ㆍ3평화상위원회에 따르면 커밍스 교수는 4ㆍ3해결에 공헌하거나 세계평화 인권운동에 헌신한 유공자 45명 가운데 위원회의 검증을 통해 이번 수상자로 선정됐다.
커밍스 교수는 1967년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 후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한국현대사 연구에 몰두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 스윗브라이어 대학 총장 내정자인 한국인 정치학자 우정은 박사와 결혼해 두 자녀를 두고 있을 만큼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그의 한국현대사 연구 가운데 한국전쟁 발발 원인을 다각적으로 규명한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지침서가 되면서 1980년대 국내 대학가의 필독서로 꼽혔다.
그는 이 책에서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서술하며 4ㆍ3사건의 배경과 원인에서 지역의 역사 문화적 공동체성이 차지한 부분을 강조했다. 또 ‘한국현대사’에서는 4ㆍ3사건의 원인과 전개 과정, 결과를 자세히 다뤘다.
그는 최근에도 2015년 제주4ㆍ3평화공원을 방문해 위령제단에 참배하고, 지난해 10월 제6회 제주4ㆍ3평화포럼에 참석해 ‘미국의 책임과 제주의 학살’을 주제로 기조강연에 나서는 등 4ㆍ3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시상식은 다음달 1일 제주 한화리조트에서 열리며, 상패와 상금 5만 달러(약 5,700만원)가 주어진다. 2년마다 시상하는 제주4ㆍ3평화상의 제1회 수상자는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이다. 김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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