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서울 경복궁)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입니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습니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고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경복궁
2010. 5. 20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였고 재건 후 고종은 경복궁의 뒤편에 건청궁을 세워 생활하였습니다.
근정전
경복궁 전각(殿閣)의 이름에 담긴 뜻은? |
조선이 건국되고 3년이 지난 1395년(태조 4) 9월 29일. 한양의 북악산 아래 넓은 터에는 390여 칸 규모의 새 궁궐이 들어섰다. 이 궁궐이 바로 200년 가까이 조선 왕조에서 법궁(法宮)의 지위를 유지한 경복궁(景福宮)이다. 새 궁궐의 영건을 축하하며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술이 한껏 거나해진 태조는 참모 정도전에게 궁궐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였다. 과연 정도전은 무엇에 근거해서 궁궐의 이름을 지었을까? 『태조실록』 1395년 10월 7일의 기록에는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각 건물의 이름을 짓게 된 동기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命判三司事鄭道傳, 名新宮諸殿。 道傳撰名, 幷書所撰之義以進。 新宮曰景福, 燕寢曰康寧殿, 東小寢曰延生殿, 西小寢曰慶成殿, 燕寢之南曰思政殿, 又其南曰勤政殿, 東樓曰隆文, 西樓曰隆武, 殿門曰勤政, 午門曰正門 |
경복궁 흥례문 [慶福宮興禮門]
창건된 것은 1395년(조선 태조 4)으로, 원래 이름은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흥례문(弘禮門)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중건하면서 청(淸)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주변이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흥례문을 비롯한 주변 행각(行閣)이 모두 파괴되었다. 1990년 정부가 경복궁 복원사업을 시작하면서 역사바로잡기 차원의 일환으로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뒤, 2009년까지 마무리되는 경복궁 복원사업의 5개 권역 가운데 침전(寢殿)·동궁(東宮)에 이어 3번째로 2001년 10월 26일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면서 철거된 지 85년 만이다.
광화문(光化門)과 근정문(勤政門) 사이에 있는 경복궁의 중문(中門)으로, 2층 목조건물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주변 행각과 유화문(維和門)·기별청(奇別廳)·영제교(永濟橋)·어도(御道:임금이 드나들던 길)·금천(禁川:궁궐 안의 개천으로 御溝로 부른다) 등과 함께 복원되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원래의 지반보다 1.5m 높게 지었기 때문에 복원 때는 경복궁의 본래 모습대로 1.5m의 땅을 파내고 근정문과 같은 높이로 하였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근정문 뒷편의 사정전과 강령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다만 경복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은 2006년 12월까지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철거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하면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이다. 현재 구 광화문은 철거되었고, 한일 병합 조약 100년인 2010년 8월 15일에, 기울어졌던 3.75도를 바로잡고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입니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 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 이었습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습니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습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습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경복궁 홈페이지 : http://www.royalpalace.go.kr/html/main/main.jsp
경복궁 근정전
조선이 건국되고 3년이 지난 1395년(태조 4) 9월 29일 경복궁이 창건되었다.
인왕산과 북악산을 병풍 삼아 우뚝 솟아있는, 경복궁에서도 제일 웅장한 건물이 근정전(勤政殿)이다.
근정전은 국가의 중대한 의식을 거행한 건물로, 경복궁의 중심이었다.
*근정전, 조선 왕실의 상징적인 공간
근정전의 이름에 얽힌 사연도 흥미롭다.
근정전의 이름을 처음 지은 인물은 경복궁 건설의 주역 정도전이었다.
‘근정(勤政)’이란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나라를 통솔하는 자에게는 부지런함이 요구되었다.
이는 [서경(書經)]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하고, 문왕(文王)이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하며,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하였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정도전 역시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기 때문에, 왕은 무릇 부지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도전이 모든 일에 부지런해야 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할 바’를 알아서 부지런히 정치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왕이 부지런히 해야 할 것으로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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