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미

왜 미국 민주주의는 트럼프를 막지 못하는가

by 무궁화9719 2026. 4. 7.

마가·복음주의·강경 시온주의, 선민의식의 3각 동맹

 
  • 국제
  • 입력 2026.04.28 15:30
  • 수정 2026.04.28 15:41

[무엇이 미국 민주주의를 흔드는가 ②]
박해받고 있다는 '피해자 정체성 정치'공유
강한 지도자·비상조치·국경봉쇄를 정당화
'특권적 존재이자 피해자' 이중의식에 갇혀
피해의 기억 동원해 권력 강화하는 기술로
냉철한 지성, 민주주의 발전의 비전 실종

미국 정치를 움직이는 힘은 돈이라고들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거액 후원자와 슈퍼팩(Super PAC), 로비 조직과 외곽 네트워크는 후보를 키우고 의제를 만들며 선거의 지형을 설계합니다. 칼럼 1에서 살펴보았듯, 오늘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깊은 균열 가운데 하나는 정치가 시민의 언어보다 자본의 언어에 더 민감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오늘의 미국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돈은 광고를 살 수는 있어도 신념까지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고, 패배한 선거 결과를 부정하게 만들며, 자신에게 불리한 제도와 규범을 적으로 여기게 만드는 힘은 다른 곳에서 나옵니다. 돈이 판을 만든다면, 군중을 움직이는 것은 믿음과 감정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감각, 곧 정체성과 선민의식(選民意識, Chosenness)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많은 권력은 단순한 이해관계만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특별한 공동체라는 믿음,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확신, 문명을 이끌 사명을 가졌다는 자의식은 언제나 강력한 정치 에너지였습니다. 때로 그것은 공동체의 결속과 책임윤리로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순간, 그 믿음은 타인에 대한 배제와 지배,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했습니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믿는 집단은 타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보기보다 교화의 대상, 통제의 대상, 제거의 대상으로 보기 쉽습니다.오늘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부에서는 이 오래된 정치 문법이 다시 강하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서로 다른 세 흐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는 그것들이 점점 하나의 권력 블록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3일 대선 결과에 불복해 소송전을 이어가는 가운데 지지자들이 14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인근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벌인 뒤 마가(MAGA) 행진을 벌이고 있다. 2020.11.15. [UPI= 연합뉴스]
 

첫째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입니다. 이 흐름은 트럼프 1기에서 백인 중하층의 상실감, 반이민 정서, 반엘리트 분노를 결집시킨 대중 포퓰리즘으로 등장했습니다. “빼앗긴 미국을 되찾자”는 구호는 단순한 선거 문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화 이후 제조업 공동화, 지역 공동체 해체, 문화적 불안, 사회적 지위 하락에 대한 집단 감정을 정치적으로 조직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2기에 접어들며 MAGA는 선거 캠페인을 넘어 국가 재구성 프로젝트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강한 국경, 행정권력 집중, 반다원주의 문화전쟁, 동맹 재편, 대외 강경주의가 동시에 추진되고 있습니다(Reuters, 2026.3.18 / The New York Times, 2026.3.22).

 

둘째는 정치화된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입니다. 미국 보수 개신교의 일부는 오래전부터 미국을 신이 특별한 사명을 부여한 나라로 이해해 왔습니다. 청교도 전통,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종말론적 역사관이 결합된 흐름입니다. 이들에게 미국의 위기는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라 도덕 질서의 붕괴입니다. 낙태 반대, 성소수자 권리 반대, 공교육 장악, 사법부 보수화 전략은 단순한 가치 논쟁이 아니라 국가의 영혼을 되찾는 전쟁으로 제시됩니다(The Washington Post, 2025.11.7).

 

셋째는 강경 시온주의(Hardline Zionism) 세력입니다. 역사적 시온주의가 유대인의 안전한 국가 건설이라는 근대 민족주의 운동에서 출발했다면, 오늘의 강경 시온주의는 다른 성격을 띱니다. 홀로코스트의 기억, 영구적 안보 위협 담론, 성서적 영토 서사가 결합하여 군사적 우위와 예외적 국가권력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가자지구와 레바논, 이란을 둘러싼 최근 군사 충돌은 이러한 흐름이 어디까지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BBC, 2026.4.11 / Financial Times, 2026.4.14).

 

이 세 흐름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하나는 미국 대중정치의 산물이고, 하나는 종교를 기반으로 성장한 정치세력이며, 하나는 중동의 국가주의 전략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실 정치에서는 놀랄 만큼 자주 같은 편에 섭니다. 트럼프 진영은 친이스라엘 강경노선을 적극 지지하고,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이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며, 공화당 강경파와 신흥 빅테크 권력은 이 결합을 새로운 지배연합으로 활용합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예루살렘 수도 인정과 미국 대사관 이전은 그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Reuters, 2017.12.6 / The New York Times, 2017.12.6). 왜, 어떻게 이런 결합이 가능한가. 이번 글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MAGA, 정치화된 복음주의, 강경 시온주의는 왜 서로 손을 잡는가. 이들의 연합은 미국 민주주의와 세계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리고 왜 오늘날 돈의 정치 위에 다시 신념의 정치가 세워지고 있는가.

 

■ 세 흐름을 묶는 세 가지 의식 구조

 

막대한 선거자금이 드는 미국 정치제도가 이 결합의 물질적 기반이라면, 더 깊은 곳에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된 정신 구조가 존재합니다. 저는 그것을 세 가지로 봅니다.

 

첫째, 우리는 특별한 공동체라는 선민의식(選民意識, Chosenness)입니다. 여기서 선민의식은 특정 종교의 교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들만이 국가의 진정한 주인이며, 역사의 방향을 결정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정치적 자의식까지 포함합니다. 미국은 세계를 이끌 사명을 가진 나라이고, 참된 신앙인은 자신들이며, 선택된 민족은 자신들이라는 믿음입니다. 이런 의식은 늘 스스로를 보편의 대표자로 상상합니다.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는 정치신학에서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예외의 주체로 여기는 순간, 공동체는 법 위에 서려 합니다.

 

가자지구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피난민 장면. “피해의 기억이 또 다른 피해를 낳는 역설”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둘째, 우리는 공격받고 있다는 피해자 정체성 정치(victimhood politics)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피해의 절대 규모가 아니라, 피해 감정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조직되고 정치화되느냐입니다. ‘피해자 정체성 정치’란 자신이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스스로를 박해받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그 피해 경험과 상처의식을 정치적 정당성, 집단 결집, 권력 획득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 성소수자 권리운동, 장애인 권리운동 등 차별받아 온 집단의 권리 회복 요구와 함께 등장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후 미국 사회학자 브래들리 캠벨과 제이슨 매닝은 The Rise of Victimhood Culture에서 현대 사회에서 상처의 호소와 피해 주장 자체가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의 자원이 되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분석했습니다(Quillette, 2018.4.3 / Psychology Today, 2019.6.18). 쉽게 말해, 누가 더 억울한가를 둘러싼 경쟁이 공론장을 지배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피해자 정체성 정치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식민지 피해자들의 독립운동, 인종차별 피해자들의 시민권 운동, 학살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운동, 성폭력 피해자들의 제도 개혁 요구처럼 피해의 기억을 보편적 권리와 민주주의로 확장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반대로 집단적 굴욕감과 피해의식을 증오, 배제, 응징의 정치로 조직할 때 그것은 권위주의와 파시즘의 연료가 됩니다.

 

MAGA의 언어에서 미국 경제 엘리트의 실패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중국이 빼앗아 갔고, 이민자가 침범했으며, 자유주의 엘리트가 전통을 파괴했다는 서사가 강조됩니다. 복음주의 강경파는 다수 종교임에도 박해받는 소수처럼 말하고, 군사강국의 시민들조차 늘 포위된 공동체처럼 행동합니다(Reuters, 2024.10.31 / The Atlantic, 2024.9.12). 사람들은 우월감보다 억울함에 더 빠르게 반응합니다.

 

셋째, 그러므로 강한 조치와 예외적 권력이 정당하다는 결론입니다. 공동체가 특별하고 동시에 위협받고 있다면, 평시의 법과 절차는 느리고 무능한 것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강한 지도자, 행정권력 집중, 비상조치, 국경 봉쇄, 사법 견제 무력화입니다. 외부로는 전쟁의 상시화, 내부로는 통제의 일상화가 뒤따릅니다(Reuters, 2026.3.18 / The New York Times, 2026.3.22).

 

이 세 요소가 결합하면 민주주의는 빠르게 흔들립니다. 특별하다는 믿음은 평등의 원리를 약화시키고, 피해자 의식은 타협보다 적대를 강화하며, 예외주의는 법과 제도의 견제를 우회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선거 패배는 쉽게 부정선거 음모론이 되고, 국제규범은 생존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취급되며, 소수자 권리는 공동체 파괴의 상징으로 공격받습니다(Reuters, 2021.1.7 / BBC, 2021.1.7).

 

돈이 판을 만든다면, 선민의식은 군중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둘이 만날 때 권력은 시민의 권력이 아니라 시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됩니다.

 

■ 정체성 정치는 어떻게 해방의 언어에서 지배의 언어가 되는가

 

오늘 세계정치에서 가장 자주 호출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주 피상적으로 소비됩니다. 누군가는 사회 분열의 원인으로만 말하고, 또 누군가는 정의로운 저항의 언어로만 찬양합니다. 둘 다 절반의 진실입니다. 정체성 정치의 출발은 민주주의의 미완성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근대 국가는 법 앞의 평등을 선언했지만, 현실의 시민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흑인은 제도적 차별을 겪었고, 여성은 정치적 권리에서 배제되었으며, 성소수자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습니다.

 

노동자 계급은 경제적 약자로 주변화되었고, 식민지 경험을 가진 민족들은 보편적 인권의 이름 아래 타자의 지배를 견뎌야 했습니다. 추상적 시민이라는 말만으로는 구체적 고통이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성소수자로서, 식민지 피해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보이지 않던 고통을 공적 의제로 만든 것, 그것이 정체성 정치의 역사적 의미였습니다.

 

1977년 콤바히 리버 콜렉티브(Combahee River Collective)는 인종, 성별, 계급의 억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선언하며 해방정치의 새로운 언어를 제시했습니다(The Guardian, 2020.10.9). 이후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집단의 대표성과 권리 회복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 되었습니다.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은 차이의 정치와 정의에서 동일한 법적 권리만으로는 구조적 억압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형식적 평등만으로는 실질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으며, 억압받는 집단의 경험이 민주주의 안에서 대표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합니다(Foreign Policy, 2021.7.14).

 

문제는 모든 해방의 언어가 그렇듯, 정체성 정치 역시 다른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억압의 경험을 말하던 언어가 어느 순간 특권의 언어가 되고, 연대의 언어가 배제의 언어가 되며, 정의의 요구가 면책의 요구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차별의 시정을 요구하던 정치가 어느 순간 자기 집단의 특수한 권리만을 절대화하는 정치로 변할 때, 해방의 언어는 쉽게 지배의 언어로 뒤집힙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 피해자 정체성 정치(victimhood politics)입니다. 이는 단순히 피해 경험을 말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과거의 상처를 현재 권력의 근거로 사용하는 정치입니다. 우리는 피해자였으므로 특별히 보호받아야 하고, 우리는 상처 입었으므로 강하게 행동할 권리가 있으며, 우리를 비판하는 것은 다시 우리를 공격하는 일이라는 논리가 여기서 만들어집니다.

 

최근 유럽 정치학계에서는 이를 ‘피해의 경쟁’(competitive victimhood), ‘피해의 위계’(hierarchy of victimhood)라는 개념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큰 피해자인가를 겨루는 순간, 정치는 문제 해결보다 도덕적 우위 경쟁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실제 불평등을 줄이는 정책보다 상처의 서사를 독점하는 일이 더 큰 힘을 갖게 됩니다(Financial Times, 2024.11.18). 그러나 다시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피해의 기억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식민지 피해자들의 독립운동, 인종차별 피해자들의 시민권 운동, 학살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운동, 성폭력 피해자들의 제도 개혁 요구, 일본 제국주의의 성착취 범죄를 기억하기 위한 소녀상 운동 등은 피해의 기억을 보편적 정의와 인권의 언어로 승화시킨 사례들입니다. 이러한 운동은 과거의 상처를 복수의 논리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간 존엄의 확장으로 연결시켰습니다.

 

반대로 집단적 굴욕감과 피해의식을 적대적 공격성으로 전환하여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 배제, 응징의 정치로 조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피해의식은 더 이상 치유와 정의의 언어가 아니라 권위주의와 폭력의 연료가 됩니다. 한나 아렌트,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움베르토 에코등은 상처받은 대중심리가 권위주의 정치세력에 의해 조직될 때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붕괴할 수 있는지를 거듭 경고했습니다(The Atlantic, 2024.8.2 / The Guardian, 2025.2.6). 이 방식은 현대 정치에서 놀랄 만큼 강력합니다. 사람들은 강자의 언어보다 피해자의 언어에 더 쉽게 마음을 엽니다. 그래서 많은 권력집단은 스스로를 지배자가 아니라 피해자로 묘사합니다. 세계 최강국 시민에게도 “당신은 빼앗겼다”고 말하고, 다수 종교 신자에게도 “당신은 박해받고 있다”고 말하며, 군사강국 시민에게도 “당신은 포위당했다”고 말합니다. 이때 정체성 정치는 더 이상 해방의 정치가 아닙니다. 현실의 불평등 구조를 바꾸는 대신 집단 감정을 동원해 타자를 적으로 만드는 정치가 됩니다. 경제적 불안을 이민자의 탓으로 돌리고, 사회 변화의 불편함을 소수자의 탓으로 돌리며, 국제정치의 갈등을 절대적 선과 악의 대결로 단순화합니다. 복잡한 현실은 사라지고 오직 우리와 그들만 남습니다. 선민의식은 이 과정에서 자주 결합합니다. 우리는 특별한 공동체이며 동시에 위협받는 공동체라는 이중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하다는 믿음은 우월감을 만들고, 피해자라는 감정은 공격성을 정당화합니다. 이 둘이 결합하면 민주주의는 빠르게 흔들립니다. 평등은 공동체의 순수성으로 대체되고, 법치는 생존 논리 앞에서 밀려나며, 타협은 배신으로 규정됩니다.

 

오늘 미국에서 MAGA, 정치화된 복음주의, 강경 시온주의가 보여주는 장면은 바로 이 구조와 맞닿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역사에서 출발했지만, 자신들이 특별한 공동체이며 동시에 위협받는 공동체라는 감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오늘 극우 정치는 바로 이 감정을 가장 정교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미국 공항 터미널 내부에서 제복을 입은 ICE 또는 연방 요원들이 배치된 장면. 여행객들이 이동하는 일상적 공간 한가운데, 무장한 국가권력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 피해자는 어떻게 지배자가 되는가

— 현대 극우 정치의 가장 강력한 기술

 

피해자 정체성 정치는 이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 정치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유럽, 중동에서 우리는 같은 구조가 서로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한 권력과 자원을 가진 집단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고, 그 상처의 서사를 통해 더 큰 권력을 요구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빼앗겼다”, “우리는 박해받고 있다”, “우리는 포위당했다”는 말은 사실보다 먼저 감정을 움직이고, 현실보다 더 큰 정치적 힘을 발휘합니다.

 

가장 선명한 사례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입니다. 이 흐름의 핵심 서사는 단순합니다. 미국은 누군가에게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일자리를 빼앗았고, 이민자가 국경을 무너뜨렸으며, 자유주의 엘리트가 전통문화를 파괴했고, 선거제도가 승리를 도둑맞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보다 상실감의 조직입니다. 러스트벨트의 쇠퇴, 지역 공동체 해체, 문화적 불안을 하나의 피해 서사로 묶는 순간 분노는 정치 동원이 됩니다(Reuters, 2024.10.31 / AP, 2024.11.2). 2021년 1월 6일 미국 연방의회 난입 사태는 선거 패배가 어떻게 “도둑맞은 승리”라는 피해 서사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BBC, 2021.1.7 / Reuters, 2021.1.7).

 

정치화된 복음주의도 비슷한 구조를 보입니다. 미국 보수 개신교의 일부는 오랫동안 사회·문화적 다수의 영향력을 누려왔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을 박해받는 공동체로 묘사합니다. 성소수자 권리 확대, 낙태권 논쟁, 종교와 국가의 분리 원칙, 공교육의 세속화는 곧바로 “기독교 탄압”으로 번역됩니다. 실제 박해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지위 변화에 대한 감정입니다. 오랫동안 우위를 누려온 집단이 경쟁 사회의 변화를 곧 박해로 해석하는 순간, 민주주의의 타협 질서는 적으로 규정됩니다(The Washington Post, 2024.6.25 / The Atlantic, 2024.9.12).

 

미국 내부에서 이 논리가 민족주의와 종교정치의 형태로 나타난다면, 국제정치에서는 안보와 역사 기억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강경 시온주의는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유대 민족이 겪은 홀로코스트는 인류사가 기억해야 할 절대적 비극입니다. 그 기억은 다시는 어떤 민족도 학살당해서는 안 된다는 보편 윤리의 토대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극우 정치의 일부는 그 기억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과거의 피해를 현재 국가권력의 면책 근거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안보 위협은 언제나 예외조치를 정당화하고, 군사행동 비판은 반유대주의로 몰리며, 국제법적 비판은 현실을 모르는 도덕주의로 치부됩니다. 피해의 기억이 현재 권력의 방패가 되는 구조입니다(Financial Times, 2025.11.18 / The Guardian, 2026.2.9).

 

최근 가자지구와 레바논, 이란을 둘러싼 군사 충돌 속에서 유럽 사회 내부에서도 이러한 면책 구조에 대한 피로와 비판이 커지고 있습니다. 민간인 피해가 누적되고 전쟁의 비례성이 무너졌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면서, 과거의 연민과 오늘의 정치적 지지가 더 이상 자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BBC, 2026.4.16 / Financial Times, 2026.4.14). 역사는 이와 비슷한 교훈을 오래전에 남겼습니다. 13세기 알폰소 10세 시기 스페인은 종교 공존과 개방 속에서 번영했습니다. 그러나 1492년 이후 순수 가톨릭 국가를 추구하며 유대인을 추방했고, 펠리페 2세 시대에는 네덜란드까지 탄압했습니다. 결과는 역설적이었습니다. 배타적 제국 스페인은 쇠락했고, 관용과 상업을 택한 네덜란드는 부상했습니다. 배타성은 결집을 만들었지만 번영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The Economist, 2023.8.19).

 

이 모든 사례는 하나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피해자 정체성 정치는 약자의 정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처의 기억을 동원해 현재의 권력을 강화하는 정치 기술입니다. “우리는 피해자다”라는 말이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가장 위험한 문턱에 들어섭니다. 피해의 기억은 공동체를 지키는 윤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타인을 지배할 면허로 바뀌는 순간, 피해자는 새로운 지배자가 됩니다.

 

■ 독일은 왜 침묵하는가

— 기억의 윤리와 현재의 역설

 

독일이 이스라엘 문제에 특별히 민감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홀로코스트는 독일 현대사가 짊어진 가장 무거운 죄였습니다. 전후 독일 민주주의는 그 책임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 위에서 다시 세워졌습니다. 197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봉기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장면은 그 상징이었습니다.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강렬한 참회의 장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BBC, 2020.12.7). 그 이후 독일 정치권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안전을 독일이 특별히 책임져야 할 역사적 책무로 여겨 왔습니다. 이러한 태도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역사적 책임이 오늘의 현실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느냐입니다.

 

197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바르샤바 게토 봉기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장면. 
 

가자 전쟁 이후 독일 정부와 지방 당국은 친팔레스타인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했고, 경찰의 강경 대응도 국제적 논란이 되었습니다. 베를린 등 일부 도시의 공공 공간과 건물에는 이스라엘 연대 메시지와 국기 조명이 등장했습니다. 정부가 먼저 도덕적 정답을 선언하고 사회 분위기를 이끄는 듯한 장면이었습니다(Reuters, 2024.4.26 / The Guardian, 2024.5.3).

 

이에 대한 비판은 독일 내부에서도 제기됐습니다. 일부 법학자와 시민단체는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문화예술계에서는 행사 취소와 자기검열 논란이 이어졌고, 친팔레스타인 입장을 밝힌 예술가와 학자들이 배제되거나 초청이 취소되는 사례도 잇따랐습니다. 독일 언론 내부에서도 국가가 특정한 도덕적 입장을 앞세우며 공론장의 다양성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우려가 이어졌습니다(Financial Times, 2025.12.9 / Deutsche Welle, 2026.4.15). 독일 밖에서도 비판은 거셌습니다. 국제 인권단체와 해외 언론은 독일이 역사적 책임을 이유로 현재의 인권 원칙과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유엔 관계자들의 행사나 발언이 제약받는 일도 논란이 됐습니다(Reuters, 2024.4.12 / Amnesty International, 2024.6.7).

 

더 깊은 문제는 지식인 사회의 위축이었습니다. 독일 내부에서도 일부 학자와 예술가들은, 이스라엘 정부 비판과 반유대주의를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있다고 공개 비판했습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민간인 피해와 인도주의 위기를 우려하면서도 공개 발언을 주저했습니다. 이 침묵은 단순한 개인의 비겁함만으로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그 배경에는 홀로코스트 가해국이라는 역사적 원죄의식, 반유대주의 낙인에 대한 두려움, 이스라엘 비판이 자칫 독일 극우세력의 배외주의와 결합될 수 있다는 우려, 공공기관과 문화재단의 지원 구조, 사회적 고립에 대한 부담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결과가 정당하다는 평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The Guardian, 2025.11.9 / Financial Times, 2025.12.9).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현재의 민간인 학살과 인권유린을 말하지 못한다면, 지식인의 공적 책임 역시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의 책임이 현재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순간, 기억은 윤리가 아니라 침묵의 장치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침묵과 달리,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분노가 보다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2026년 4월 14일 폴란드하원에서 의원 콘라트 베르코비치는 이스라엘 국기의 다윗별을 나치 문양으로 바꾼 깃발을 들어 보이며 이스라엘을 “새로운 제3제국”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 방식은 과격했고, 나치 비유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비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이 보여준 정치적 감정은 분명했습니다. 가자 전쟁 이후 유럽 곳곳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폭력에 대한 분노와 피로감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Notes from Poland, 2026.4.14). 독일의 역사적 참회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참회를 이유로 오늘 피해자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저지르는 인권유린과 학살 행위에 침묵한다면, 그것은 보다 본질적인 인권 책임을 방기하는 태도로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특정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면책이 아니라, 누구의 생명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보편적 기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과거 유대인의 고통을 기억한다면, 오늘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 앞에서도 같은 기준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살아 있는 윤리로 만드는 길입니다.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라고만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도 함께 묻습니다. 독일 역시 이제 원죄의식에 머무는 나라가 아니라, 국제적 인권 연대의 언어로 다시 말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최근 유럽 각국에서 확산되는 비판적 여론은 독일에도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현재를 말하는 것은 과연 양립할 수 없는가. 오히려 지금 독일이 해야 할 일은, 과거 책임을 이유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보편 인권의 언어로 확장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기억은 과거를 위한 의식이 아니라, 현재를 위한 책임이어야 합니다.

 

2026년 4월 14일 폴란드 하원 본회의장에서 콘라트 베르코비치 의원이 다윗별 대신 나치 문양이 삽입된 이스라엘 국기 팻말을 들고 연설하는 장면. 가자 전쟁 이후 유럽 내부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군사행동에 대한 분노와 상징정치가 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으로 국내외 언론이 비중 있게 보도했다.
 

■ 피해의 기억을 미래의 자산으로 만들 수 있는가

 

그렇다면 피해의 기억은 반드시 침묵과 면책으로 귀결되는가. 한국 현대사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수많은 고통의 장면 위에 서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참혹한 진압, 일제강점기의 만행, 제주 4·3의 국가폭력, 민혁당 재건위 사건과 사법살인, 5·18민주화운동당시 자행된 학살,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한겨레, 2024.4.3 / 경향신문, 2024.4.16). 대한민국 현대사 자체가 피해의 기억으로 가득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억을 단지 피해자의 권리 회복과 보상 요구에만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5·18민주화운동은 지역의 비극을 넘어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으로 성장했습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보여주듯, 현재가 과거를 구하고 과거가 현재를 구하는 일은 기억이 연대의 언어가 될 때 가능합니다. 과거의 희생을 단순한 비극으로 남겨두지 않고, 오늘의 우리가 그 의미를 다시 발견하고 이어받을 때 비로소 역사는 살아 움직입니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 또한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특정 지역과 특정 시대의 비극에 가두지 않고, 인간 존엄과 폭력, 기억과 치유라는 인류 보편의 언어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Reuters, 2025.10.10 / BBC, 2025.10.10). 다시 말해, 보편적 인권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의 의미를 더욱 깊고 선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피해의 기억은 자신만의 상처에 갇힐 때 원한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편적 인권의 가치로 확장할 때 민주주의의 자산이 됩니다. 여기서 한 사회의 품격이 갈립니다. 과거의 고통을 자기 집단만의 면책 근거로 삼는 사회는 폐쇄와 배제로 기울고, 그 기억을 타인의 고통까지 이해하는 윤리로 넓히는 사회는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갑니다.

 

오늘 미국의 문제는 자기 상처를 직시할 용기도, 냉정하게 판단할 지성도,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비전도 약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MAGA, 정치화된 복음주의, 극단적 시온주의는 피해자 정체성을 공동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권력 자산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적 정당성을 얻기 어렵습니다. 피해의 기억이 연대가 아니라 지배의 언어가 될 때, 국가는 강해 보일 수는 있어도 존경받기는 어렵습니다(Financial Times, 2026.4.14 / The Guardian, 2026.4.16).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은 분명합니다. 과거의 고통과 현재의 고통을 함께 응시하고, 피해의 기억을 보편적 인권의식으로 승화시키며, 그것을 인류 공동의 의제로 만들 수 있는 시민 역량을 키우는 것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외침, 식민지 저항의 기억,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촛불집회와 광장의 경험은 우리에게 그 가능성이 결코 추상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진정한 문화강국은 경제 규모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공감 능력, 과거의 상처를 미래의 윤리로 바꾸는 시민의식, 힘보다 인간의 존엄을 먼저 말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강한 민주공화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사력이나 GDP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억을 증오가 아니라 책임으로 바꾸는 나라만이 오래갑니다.

 

기억은 과거를 붙드는 일이 아닙니다. 미래의 인간을 지키는 힘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처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한 사회는 파시즘으로 기울 수도 있고 민주주의로 성숙할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관련기사

미 '오만한 힘 과시' 베트남·이란 전쟁은 이란성 쌍둥이

이길주 뉴욕통신원kiljyi@gmail.com다른 기사 보기
 

'적은 악마, 미국은 구원자' 성전으로 미화 똑같아
폭격을 역사의 한 수단으로 설정한 두 전쟁
"석기시대" 발언은 히틀러의 인종 청소 닮아
삶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극한 교만
'힘의 오만'이 불러온 베트남 패전 교훈 새겨야

 

도널드 트림프 미국 대통령과 각료들이 지난해 3월 26일(현지시간) 제2기 첫 백악관 각료 회의를 시작하기 전 기도를 올리고 있다. 그는 최근 이란과의 전쟁을 시작하고 자신을 구원자로 제시하는 이미지를 SNS에 올리기도 했다. 이 전쟁을 성전화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2025.3.26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란 전쟁이 며칠 후면 두 달이 된다. 지금은 잠정 휴전 합의에 따라 미국, 이스라엘의 폭격과 이란의 드론, 미사일 반격이 공식적으로는 중단된 상태다. 언제 또 군사 행동이 재개될지 모른다. 양측 모두 전쟁으로 지치고 중단의 필요를 느끼고 있지만 호르무즈 해협의 통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이란이 날선 공방을 주고받고 있으며, 휴전 협상 의제인 이란의 핵 정책에 대해서도 진전이 없어 보인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무장세력 헤즈볼라와의 휴전 합의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이란 전쟁의 피해와 비용은 엄청나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4월 중순 현재 이란인 약 3500명이 사망했다. 이중 383명의 어린이가 생명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의 공격과 침공을 당한 레바논에서는 약 2500명이 사망했고 12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어린이 희생자 수는 약 200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전쟁에서 미국 피해는 13~15명, 이스라엘은 약 30명의 민간인과 군인이 사망하는 피해를 보았다.

 

전쟁의 경제적 비용은 정확한 계산이 어렵다. 가디언에 따르면 미국은 현재까지 전쟁을 위해 300억~500억 달러를 군사비용으로 지출한 것으로 추산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전쟁 비용이 1조 달러로 치솟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번 전쟁이 끝난다 해도 세계 경제는 오랫동안 진통을 겪을 전망이다. 물가 상승은 이미 당면한 문제이고, 앞으로 장기 불황이 덮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경제 성장률을 지난 1월 3.3%에서 4월 중순 3.1%로 하향 조정했다. 만약 이란 사태가 지속된다면 성장률은 2~2.5%로 더 내려앉을 가능성이 있다. 불안한 경제 상황의 피해는 저소득층에 집중된다. 전쟁이 나면 가난한 가정의 자식이 전장에서 싸우고 부모는 뒤에 남아 가계부와 싸운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형국이다.

 

돌아보면 이란 사태가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이란은 미국에 분명 불편한(uncomfortable) 상대였다. 하지만 고통을 주는(painful) 나라는 아니었다. 이 둘은 다르다. 외교에서 불편한 상황은 두 국가가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고 갈등의 소지가 있지만 서로에게 존재적 위협은 아니다. 소화가 잘 안돼 몸이 불편하다고 할 일을 못하지는 않는다. 고통은 다르다. 통증은 일상의 기능을 저해한다.

 

이란은 미국에 그냥 불편한 상대였다. 핵무기 개발, 석유 수출을 통한 중국과의 밀착, 반이스라엘 무장단체 지원 등은 불안 요소였지만 미국의 헤게모니를 막고 저해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협상과 설득의 공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줄다리기가 팽팽했지만, 협상으로도 해결할 수 있었던 미국과 이란의 핵을 둘러싼 마찰이 왜 전쟁까지 불러왔나? 갑자기 이란이 미국에 불편함을 넘어 통증을 안기는 존재로 변했다. 따라서 치유책도 압력과 봉쇄에서 폭격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의 근저에는 ‘힘의 오만'(Arrogance of Power)이 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던 1966년, 아칸소주 출신 제이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외교위원장)이 베트남 전쟁의 원인을 분석하는 책을 발간했다. 책 제목이 바로 ‘힘의 오만’이다.

 

 '힘의 오만'의 저자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의 생전 모습 (IMDB.com)
 

“’힘의 오만’이란 국가들이 다른 국가보다 더 크고, 더 낫고,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심리적 욕구를 말한다. 이러한 욕구에는…무력이 우월성의 궁극적인 증거라는 가정이 내포되어 있다. 즉, 한 국가가 더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더 나은 국민, 더 나은 제도, 더 나은 원칙, 그리고 일반적으로 더 나은 문명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생각이다.”

 

풀브라이트는 “미국이 전례 없는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과 다른 국가 간 힘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기 때문”에 힘의 오만에 빠져든다고 보았다. 이때 오만한 힘에서 비롯된 군사 행동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책임과 사명으로 미화된다.

 

트럼프를 지배한 힘의 오만은 단순한 군사력에 있지 않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에 대한 군사 행동을 통해 신성함을 보았다. 풀브라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 역사에 반복해서 나타난 의식 구조이고 행동 양식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다량의 네이팜탄(소이탄)을 투하했다. 태워서 없애고 죽이는 네이팜탄 공격은 마을과 사람들을 광범위하고 강한 불길에 휩싸이게 한다. 미국의 한 공군 지휘관은 이런 공격으로 베트남을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고 공언했다. (Public Domain)
 

“우리 (미국) 역사를 통틀어 두 가지 흐름이 불안정한 공존 관계를 이어왔다. 하나는 지배적인 흐름인 ‘민주적 인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그 비중은 작으나 끈질기게 지속되어 온 ‘배타적 청교도주의’이다.” 미국이 “민주적 인본주의”를 견지했을 때는 “상황이 그럭저럭 순조롭게 돌아가거나 당면한 문제가 명확하고, 한정적이며,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일 때”였다. 이 경우 “이성과 절제가 우위를 점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나 여론 주도자가 대중을 격앙된 감정 상태로 몰아넣을 때면, 우리의 청교도적 정신이 불쑥 튀어나와 (미국이) 가혹하고 분노에 찬 도덕주의라는 왜곡된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란과 싸우는 미국과 트럼프의 생각과 행동이 바로 이렇다. 

 

가혹하고 분노에 찬 ”청교도적 도덕주의"는 마녀사냥 같은 극단적인 내부 통제와 원주민 학살이란 팽창주의로 나타났다. 마녀는 신성한 신앙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이고, 토지를 생산수단, 부의 척도로 간주하지 않는 원주민은 청교도 공동체의 번영과 발전을 저해하는 방해 요소가 되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무력은 성전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1630년대 청교도 정착민들이 지금의 코네티컷주에서 피쿼트 원주민을 상대로 벌인 전쟁을 묘사한 19세기 판화. 청교도들의 압도적인 힘과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은 이런 역사와 사고가 '힘의 오만'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Public Domain)

청교도들이 마녀를 사냥하고 원주민과 전쟁하며 그랬듯이 트럼프는 이란 전쟁에서 절대적 선과 압도적 힘의 우위를 믿었다. 그는 미국의 군사행동에 힘입어 이란인들이 압제의 상징으로 채색된 이란의 신정 체계에 반기를 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빗나갔다.

 

또한 이란의 비대칭 군사력을 “활과 창”으로 무장한 원주민 수준으로 깔봤다. 체계적인 분업과도 같았던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격으로 이란을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란은 부서졌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의 지적대로 진정한 이란의 능력과 위협은 핵탄두가 아니라 지리적 위치(geography)에서 나온다. 호르무즈 해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외부 압박과 공격에 대한 이란의 투쟁성과 능력 또한 없어지지 않는다.

 

공격 첫 날인 2월 28일, 폭격을 당한 이란의 도시들이다. 트럼프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합동 폭격으로 이란을 무릎 꿇릴 것을 자신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이란을 "석기 시대로 돌리겠다"고 극언에 가까운 경고를 날렸지만 이란은 아직 전쟁을 포기할 태세가 아니다. (알자지라)
 

그래서 나온 답이 트럼프의 “석기시대” 발언이다. 그는 이란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석기 시대로 되돌려 보낼 것”이라며 문명의 종말을 경고했다. 단순화하면 인류 지도에서 없애주겠다는 뜻이다.

 

한 민족을 완전히 파괴해 문명사와 결별시키겠다고 위협한 인물은 아돌프 히틀러 이후 처음이다. 히틀러 사고 체계의 핵심인 우수 민족(지배자 민족) 독일에 꼭 필요한 “생존 공간(lebensraum)”도 같은 맥락이다.

 

독일이 침략해 차지할 땅을 역사의 실수 때문에 열등 민족이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공간을 비워야 한다. 잘못 형성된 민족 공간을 원점으로 돌리고 그곳에서 게르만 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펼친다는 논리였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시작으로 러시아에 이르는 땅을 독일화하기 위해 극도로 파괴적인 전쟁을 벌였다. 인종 청소 전쟁이라고도 한다.

 

트럼프의 석기시대  발언도 이란의 민족성이 사라진 공간에 미국 문명을 옮겨 심겠다는 사고를 반영했다. 그는 대규모 공습을 앞두고 “오늘 밤, 하나의 문명 전체가 소멸할 것이며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기존 통치 체제가 무너졌으니 "이전과는 다르고, 더 현명하며, 덜 급진적인 사고를 지닌 이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으니, 어쩌면 혁명적일 만큼 놀라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트럼프도 히틀러처럼 문명의 소멸을 역사의 전환이며 진보로 보았다.

 

트럼프는 이란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날 것을 자신하면서 전쟁 후에 이란은 물론 세계 공동체가 새로운 역사를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아돌프 히틀러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우수 민족 독일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을 불러올 것이라고 장담했다. (Publid Domain) 
 

문명의 소멸과 부활은 절대자 창조주의 권능을 떠올리게 하는 언어이다. 히틀러가 이 언어에 능했다. 유대인 차별과 학살 정책에 대해서 “오늘 나는 전능하신 창조주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유대인들을 배척함으로써, 나는 주님의 대업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까지 했다. 이 대업을 예수가 시작했으나 끝내지 못했다며, 그러나 “나 아돌프 히틀러가 완성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39년 9월 3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틀 후 히틀러는 세계대전의 불가피성을 호소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도 신이 등장한다. “자신을 돕기로 굳게 다짐한 사람(민족)에게 언제나 자비를 베풀어 오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 땅을 우수 민족 독일의 "생활 공간"으로 만들어 그곳의 열등 민족을 다스리면 인류 역사가 새롭게 쓰일 것이라는 히틀러의 망상으로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은 사람들을 살육하고 집을 불태웠다. (Publid Domain) 
 

트럼프는 이란과의 전쟁 초기부터 신앙을 끌어들였다. 전쟁의 성전화를 위해서였다. 이란 폭격 개시 일주일 뒤인 3월 초 백악관에 모인 종교 지도자들은 트럼프를 둘러싸고 합심해 기도했다.

 

이란에 대한 폭격이 시작된 일주일 뒤 백악관에 모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를 위해 안수 기도를 하고 있다. 백악관 제공
 

고통과 파괴,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를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간구하는 부활절을 앞두고 트럼프는 또 기독교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이들도 트럼프와 미국, 전쟁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로 힘을 얻었는지 그는 부활절을 맞아 이란에 위협을 날렸다. 곧 “발전소의 날이자 다리의 날 -- 이 모든 ([공격 목표가) 하나로 어우러진 특별한 날”을 맞이할 것이라며 민간의 고통을 극대화할 폭격 대상을 콕 집어 경고했다.

 

최근에는 트럼프의 이란 전쟁 신성화 캠페인에 성직자들을 넘어 예수가 직접 등장했다. 그는 예수와 연계된 두 개의 이미지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

 

도널드 트럼프 트루스소셜 갈무리
 

예수가 왼팔을 트럼프의 왼쪽 어깨에, 오른손은 오른쪽 가슴에 대고 그를 축복하는 모습이다. 뒷배경에 빛을 발하는 성조기가 있다. 구약 이사야서 41장 10, 11절을 떠올리게 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다음 이미지는 앞엣것보다 먼저 트루스소셜에 올린 것이다. 한 발짝 더 나갔다. 예수 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수준을 넘어 트럼프는 예수가 되었다. 얼굴만 다를 뿐 예수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의 트럼프는 왕권을 상징하는 보주(십자가가 달린 구슬)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을 병자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치유의 기도를 하고 있다. 평범한 미국인들을 상징하는 이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다. 뒤에는 성조기, 미국의 상징 독수리, 자유의 여신상과 전투기, 참전 병사들의 모습이 형상화됐다. 그가 구세주로 격상했다. 논란이 일자 두 사진 모두 SNS에서 내려졌다. 

 

트럼프는 최근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이미지를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란과의 전쟁을 성전으로 포장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도널드 트럼프 트루스소셜 갈무리
 

전쟁을 성전, 또 자신을 구원자로 채색하려는 트럼프는 교황 레오 14세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레오 14세가 힘의 오만과 같은 맥락인 “전능의 망상” 때문에 미국이 이란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지적하자 트럼프는 신앙 지도자로서 교황의 능력을 문제 삼았다. 이란이 핵무기를 가져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교황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트럼프는 “좋은 교황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쏘아붙였다.

 

베트남 전쟁 때도 미국을 신성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65년 5월 미 해병대 3500명이 남베트남 다낭에 상륙했다. 베트남이 미국의 전쟁이 되는 순간이었다.

 

한 달 전 린든 존슨 대통령은 워싱턴 D.C. 인근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을 찾아 베트남 전쟁에 대해 연설했다. 연설의 결론 부분에서 존슨은 구약 성서 신명기 30장 19절을 인용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사백 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지도자 모세는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여호와를 믿고 따라 생명과 복을 얻을 것인가 그의 뜻을 어겨 사망과 저주의 길을 갈 것인가? 하늘과 땅을, 증인을 선 절체절명의 선택이었다. 모세는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복되게 사는 길을 택하라 했다. 존슨에게 베트남 전쟁은 “파괴할 것인가, 건설할 것인가. 죽일 것인가, 도울 것인가. 미워할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의 선택일 따름이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이 어떤 쪽을 택하든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규모”의 파괴 또는 건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했다. 존슨에게 미국의 선택은 "선한, 생명의 길"이었다. 그렇게 해서 전장에서의 적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적, 그리고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적들을 싸워 물리칠 것이라고 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은 존슨이 권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국은 베트남을 마치 석기 시대로 돌리려는 듯 맹폭을 가했다. 그는 “평화의 수호자들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굳건히 견뎌낼 것이며…기필코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성경에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했다. 이렇게 베트남 비극도 미국은 신성한 전쟁으로 포장했다.

 

1975년 4월 베트남 패망 당시 헬리콥터를 바다에 내버리는 미군. 미국은 자유 독립 국가 남베트남을 지킨다는 신성한 전쟁 목표를 내세웠지만 전쟁은 큰 아픔과 치욕을 안겨주었다. (Public Domain)
 

결과는 참담했다. 연인원 약 300만 명을 베트남에 보냈고 이 중 거의 6만 명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부상자는 30만이다. 요즘 가치로 약 1조 달러를 베트남에 뿌렸다. 1975년 4월 베트남은 패망했다. 전혀 성스럽지 못한 결과였다.

 

그리고 반 세기가 흘렀는데도 미국은 그 교훈으로부터 배우지 못해 이란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미국 이후' 무너지는 세계 질서를 누가 세울 것인가

 
  • 국제
  • 입력 2026.04.21 15:50
  • 수정 2026.04.21 16:01

[미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⑤]
'국제 질서 설계자' 미국,이젠 파괴자로 변해
강대국으로 버티게 했던 내부 균형 허물어져
작년 9700억 달러 규모 이자 지출 재정 압박
공포 주는 나라 아닌 신뢰 받는 나라가 강대국
한국이 강대국 되는 길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경제·민주주의·기술·국방·국제 신뢰 조화 이뤄야
'AI 국제 거점' 한국 감당할 수 있나 시험과 기대

 

미국 의사당은 오랫동안 민주주의와 제도정치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그 상징은 미국 내부의 정치적 교착, 극우화, 민주주의 쇠퇴를 비추는 역설적 풍경이 되고 있다. 이 칼럼은 바로 그 내부 균열에서 출발한다. ‘미 의회 폭동 사태’발생 1년인 6일(현지시간) 워싱턴DC 연방 의사당 앞에서 열린 추념식에서 상하원 의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2022.1.7. [AP=연합뉴스]
 

이란 상공에 떨어진 불길은 도시 하나의 평온만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이제 무엇으로 세계를 설득할 수 있는가를 정면으로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세계는 그 장면 앞에서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과연 아직도 세계를 이끌 자격이 있는 나라인가. 그리고 이 물음은 곧바로 다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강한 나라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번 사태가 남긴 파장은 한 차례 군사행동의 후폭풍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쌓여 온 불신, 곧 미국이 여전히 국제질서를 떠받칠 중심국가로 기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를 다시 드러내 놓았습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설계자이자 수호자를 자임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미국은 규범을 세우고 지키는 나라라기보다, 스스로 만든 규범을 가장 먼저 흔드는 나라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대이란 군사행동을 두고 국제법과 전후 질서의 핵심 원칙이 약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Chatham House, 2026.3.1; Chatham House, 2026.3.4).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는 도덕적 위선 자체보다, 미국을 강대국답게 버티게 했던 내부의 균형이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깊어졌고, 정치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거나 공동의 해법을 마련하는 기능을 눈에 띄게 잃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 정치는 갈등을 다스리는 체계라기보다, 갈등을 더 거칠고 더 깊게 밀어 올리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법제도 역시 이 구조적 병목을 교정하기보다 방관하거나 정당화하는 모습을 반복해 왔고, 헌법개정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의 교착 속에 갇혀 있습니다. 미국은 이제 내부의 문제를 고칠 힘만 잃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고칠 절차와 의지마저 함께 약해지고 있습니다. 언론 또한 자본과 플랫폼 권력, 극우 이념 동원의 압박 속에서 비판 기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외형은 남아 있지만, 위기를 다루는 실질적 능력은 눈에 띄게 쇠락하고 있습니다.

 

이 불균형은 재정구조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2025년 순이자 지출이 9700억 달러 수준에 이르렀고, 2026년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로이터가 전한 CBO 전망에 따르면 미국의 이자비용은 장기적으로 더 빠르게 증가하면서 재정의 핵심 압박요인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CBO, 2026.2.11; Reuters, 2026.2.11). 국가예산의 14% 안팎을 해마다 국가부채 이자 상환에 써야 하는 구조에서는, 신규 투자와 사회적 재건은 물론 장기적으로 복지와 공공서비스까지 압박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빚의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는 경제를 두고 지속가능한 강대국의 기반이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지금의 미국은 전체의 체력은 약해지는데, 일부 수단만 과도하게 비대해지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바로 그 불균형이 오늘 미국의 가장 위험한 징후입니다.

 

■ 강대국은 하나의 힘으로 서지 않는다

— 균형의 꼭지점이라는 관점

 

저는 강대국의 조건을 하나의 힘으로 설명하기보다, 여러 힘이 맞물려 버티는 ‘균형의 꼭지점’이라는 관점에서 보고자 합니다. 군사력은 그중 하나일 뿐입니다. 경제력, 정치구조, 민주주의, 시민적 신뢰, 문화적 설득력, 기술 역량이 함께 받쳐주지 못한다면, 군사력이 아무리 커도 그 위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주변국에게 공포를 주는 나라와, 주변국으로부터 일정한 신뢰와 협력의 가능성을 인정받는 나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진정한 강대국은 대개 후자였습니다.

 

이 점은 여러 이론가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오래전부터 설명해 왔습니다. 폴 케네디(Paul Kennedy, 1945– )는 강대국의 쇠퇴가 군사력의 부족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팽창과 경제적 기반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때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말한 ‘제국의 과잉팽창’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킵니다. 마이클 만(Michael Mann, 1942– ) 역시 국가의 힘을 군사력 하나로 환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제적 권력, 정치적 권력, 군사적 권력, 이데올로기적 권력이 서로 맞물리며 국가의 힘을 형성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국제정치 연구에서도 국력은 단일 지표로 환산되지 않습니다. 경제, 정치, 군사, 동맹, 리더십 같은 복합 요소들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Forbes India, 2025.9.3).

 

인류 역사에는 짧은 정복전쟁으로 강국의 지위에 오른 나라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수백 년 동안 지켜낸 국가는 많지 않았습니다. 차이는 폭력의 규모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래 버틴 나라들은 대체로 내부의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로마도, 대영제국도, 수많은 제국도 결국은 그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안쪽에서 먼저 허물어졌습니다. 오늘 미국의 위기 역시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미국의 문제는 단순한 힘의 약화가 아닙니다. 강대국을 떠받치던 각 꼭지점의 연결이 하나씩 끊어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폭격 이후 폐허가 된 도시는 단지 전쟁의 결과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부의 균형을 잃은 강대국이 외부 세계의 어떤 파괴를 남기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강대국의 길은 무엇인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역시 완성된 국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경제적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고, 정치적 갈등은 거칠며, 사법과 검찰, 언론과 교육은 여전히 개혁의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애초에 단일한 힘 하나에 기대어 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힘의 축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나라에 가깝습니다.

 

2025년 포브스 인디아가 소개한 세계 강대국 지표에서도 대한민국은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에 이어 6위로 제시되었습니다. 해당 기사는 미국의 US News 파워 서브랭킹 방법론을 바탕으로, 리더십, 경제적 영향력, 정치적 영향력, 강한 국제동맹, 강한 군사력의 다섯 요소를 동등 가중 평균해 순위를 산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순위는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 한국, 프랑스, 일본 순이었습니다(Forbes India, 2025.9.3). 물론 이 순위를 절대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지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한국은 이제 단일한 힘의 크기로만 평가되는 나라가 아니라, 여러 요소의 결합 속에서 주목받는 국가가 되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의 가능성은 “얼마나 센가”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균형 있게 버틸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강대국은 힘의 크기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균형을 버티는 능력으로 유지됩니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것도 바로 그 균형입니다.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강대국의 길도 여기에서 또렷해집니다. 그것은 군사력의 과시나 패권 경쟁의 흉내가 아닙니다. 지속가능한 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시민의 참여와 통제를 통해 민주공화국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문화도, 국방도, 기술도 이런 제도적 토대 위에서 비로소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한국이 추구해야 할 국가는 더 거칠고 더 공격적인 국가가 아닙니다. 더 깊은 균형을 가진 국가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강대국은 군사력 하나만 비대하게 키운 국가가 아닙니다. 경제와 민주주의, 기술과 문화, 국방과 시민적 신뢰가 서로를 떠받치는 국가여야 합니다. 한 축이 다른 축을 갉아먹는 나라가 아니라, 각 축이 서로를 북돋우며 함께 진화하는 나라여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가능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은 ‘작은 미국’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문화력, 기술과 국제적 신뢰를 함께 결합할 수 있는 균형 잡힌 민주공화국형 강국의 모델을 보여줄 수 있는 나라입니다.

 

■ 미래 질서의 중심은 어디로 이동하는가

— AI 시대의 국제 규범과 한국의 역할

 

이 가능성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국제사회는 이미 한국을 기술과 규범, 협력의 문제를 함께 다룰 수 있는 국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2026년 3월, 한국 정부는 6개 유엔 기구와 함께 한국 내 글로벌 AI 허브 출범을 위한 협력 의향서를 체결했습니다. 참여한 기구는 국제노동기구(ILO), 국제이주기구(IOM),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세계보건기구(WHO), 세계식량계획(WFP), 유엔개발계획(UNDP)이었습니다. 정부는 이를 유엔 기구와 한국의 공공·민간 부문이 함께 참여해 AI를 바탕으로 글로벌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플랫폼이라고 설명했습니다(The Korea Times, 2026.3.18; Korea JoongAng Daily, 2026.3.18).

이 움직임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물론 미국이 국제협력 예산을 줄이면서 국제기구들의 거점 재편을 촉발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나라나 그 대체 거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제사회가 한국을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이 기술 인프라만 갖춘 나라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회복력, 국방력, 문화콘텐츠의 확장성, 경제력, 국제협력 역량을 함께 가진 국가로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강대국이 항공모함과 군사기지로 질서를 주도했다면, 앞으로의 강대국은 기술 규범과 국제협력의 중심을 어디에 세우느냐로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AI와 국제규범을 둘러싼 경쟁은 이제 군사력만큼 중요한 국제질서의 축이 되고 있다. 한국이 이 논의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은, 21세기 강대국의 조건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더 주목할 대목은 한국이 단지 국제협력의 수용자에 머무르지 않고, 규범의 설계자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국회는 2024년 12월 26일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을 통과시켰고, 이 법은 2025년 1월 21일 공포되어 2026년 1월 22일부터 시행에 들어갔습니다(법제처, 2025.1.21;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026.1.22). 이 법은 단순한 산업 진흥법 수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국가 차원의 인공지능 전략 수립, 고영향 인공지능에 대한 별도 규율, 생성형 인공지능의 투명성과 책임 의무를 하나의 틀 안에 담은 포괄적 AI 법체계에 가깝습니다.

 

현재 논의의 핵심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무엇을 ‘고영향 AI’로 볼 것인가, 생성형 AI와 딥페이크에 어디까지 표시와 책임 의무를 부과할 것인가, 공공행정과 교육, 채용, 신용평가 같은 핵심 영역에서 인공지능을 어떤 민주적 통제 아래 둘 것인가가 쟁점입니다. 시행령 단계에서는 고성능 AI의 기준 가운데 하나로 누적 연산량 10²⁶ FLOPs 수준이 제시되었고, 고영향 AI에 대해서는 위험관리 체계, 설명 가능성, 사용자 보호 조치 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김앤장 법률사무소, 2025.10; 전자신문, 2026.2.3). AI 규범 논의의 핵심은 기술의 속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기술이 시민 위에 군림할 것인가, 시민의 통제 아래 놓일 것인가를 가르는 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논의는 산업 정책을 넘어,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른 인공지능을 민주주의와 기본권의 틀 안에 어떻게 묶어둘 것인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국의 의미는 더욱 또렷해집니다. 오늘날 AI 국제질서의 핵심은 누가 더 빠른 기술을 갖고 있느냐에만 있지 않습니다. 위험한 AI를 누가 어떻게 분류하고, 어떤 책임과 통제의 원칙 아래 둘 것인가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시장과 기업 중심의 속도를 앞세우고, 유럽이 권리와 규제 중심의 체계를 강화하는 가운데, 한국은 산업 진흥과 민주적 통제, 공공 책임을 함께 묶는 중간 모델을 제도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책 선택이 아닙니다. 중견 민주국가가 AI 시대에 어떤 사회적 계약을 구성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입니다.

 

따라서 2026년 유엔 기구들과의 협력 역시 단순한 국제기구 유치 정도로 볼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동, 보건, 이주, 식량, 개발, 통신처럼 인류의 핵심 공공 문제를 AI와 결합해 다루는 국제적 거점을 한국이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이자 기대입니다. AI는 더 이상 산업계 내부의 기술 문제가 아닙니다. 국제공공재와 글로벌 거버넌스의 문제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AI 기본법 논의와 국제기구 협력은, 대한민국이 단지 기술을 빠르게 도입하는 나라를 넘어 기술과 민주주의, 산업과 공공성, 효율과 책임을 함께 설계하는 규범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복원해야 할 것은 힘이 아니라 균형이다

— 민주공화국의 진화와 국가의 재구성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새로운 질서의 한 축이 되려면, 먼저 우리 내부의 균형부터 바로 세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률 수치 몇 개나 군사력 우위의 과시가 아닙니다. 국가를 국가답게 만드는 기본 축을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경제는 지속가능해야 하고, 정치는 민주적 정당성을 회복해야 하며, 사법과 검찰은 신뢰를 되찾아야 합니다. 선거제도와 언론, 교육과 시민문화도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다시 다지는 방향으로 정비되어야 합니다. 문화적 자존감과 시민적 책임 역시 함께 복원되어야 합니다.

 

강한 나라는 외부에만 강한 나라가 아닙니다. 내부에서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지속가능한 강국은 결국 진화하는 민주공화국의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 역시 위험한 유혹 앞에 서 있습니다. 세계의 전쟁과 패권 경쟁을 지켜보며, 어떤 사람들은 결국 강한 국가만이 살아남는다는 결론으로 쉽게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게 흐르지 않았습니다. 시민의 자유를 압박하고, 사회적 신뢰를 허물고, 내부의 민주주의를 희생하면서 군사력과 국가주의만 비대하게 키운 나라는 잠시 위압적일 수는 있어도, 오래 버티는 강대국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내부적으로는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더 성숙하게 발전시키고, 외부적으로는 비호전적이면서도 건실한 경제력과 국방력, 기술력과 문화력, 국제적 신뢰를 통해 새로운 국제협력의 축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균형의 복원입니다. 경쟁의 과열이 아니라 신뢰 가능한 공존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거창한 외교 구호가 아니라, 우리 내부 제도의 재구성과 시민적 역량의 회복에 있습니다.

■ 무너지는 제국의 시대, 우리가 세워야 할 것

 

지금 세계는 분명 하나의 전환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미국이 더 이상 세계를 설득하는 힘이 아니라, 세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힘으로 보이기 시작한 순간, 국제질서는 이미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위기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무너지는 제국의 시대란 단지 공포의 시대를 뜻하지 않습니다. 낡은 힘의 개념이 더 이상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시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은 누가 더 많은 무기와 더 강한 AI를 갖고 있느냐만이 아닙니다. 누가 더 깊은 균형을 갖고 있는가, 누가 더 신뢰 가능한 민주주의와 기술 통제, 더 건실한 경제와 더 책임 있는 국제협력을 구축할 수 있는가가 갈수록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그 점에서 대한민국은 결코 주변부의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이제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 가능성을 스스로 믿고, 준비하고, 제도화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너지는 제국의 시대에 살아남는 것은 가장 강한 나라가 아닙니다. 끝까지 균형을 지켜내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균형을 다시 세우는 일은 이제 우리 세대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습니다.

 

<주요 참고문헌>

1. 강대국의 흥망과 국가 권력의 구조

케네디(Paul Kennedy),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한국경제신문, 1990.

만(Michael Mann), 《사회적 권력의 원천(The Sources of Social Power)》, 나남, 각 권.

나이(Joseph S. Nye Jr.), 《소프트 파워(Soft Power)》, 세종서적, 2004.

2. 미국의 구조적 불균형과 국제질서의 흔들림

Budget Office (CBO), The Budget and Economic Outlook: 2026 to 2036, 2026.

“U.S. budget deficit to grow, CBO says”, 2026.2.11.

Weller, “With Iran attacks, President Trump is making the use of force the new normal – and casting aside international law”, Chatham House, 2026.3.1(2026.3.4. 수정).

House, “The contest of will between Trump and Iran”, 2026.3.2.

3. 대한민국의 가능성과 AI 규범 질서

India, “Top 10 Powerful Countries in the World”, 2025.9.3.

국가법령정보센터,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 2025.1.21. 제정, 2026.1.22. 시행.

국가법령정보센터,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 시행령」, 2026.1.21. 제정, 2026.1.22. 시행.

Korea Times, “Korea wins cooperation of 6 U.N. agencies for global AI hub”, 2026.3.18.

, “S. Korea wins cooperation of 6 U.N. agencies for global AI hub”, 2026.3.18.

왜 미국 민주주의는 트럼프를 막지 못하는가

 
  • 외교국방
  • 입력 2026.04.06 16:00
  • 수정 2026.04.06 16:27

[미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②]
무너진 하부 구조, 고장 난 상부 구조
구조화된 무력감, 무능한 민주당 겹쳐
시민저항 정치적으로 전환시키지 못해
트럼프는 위기 원인 아닌 드러난 증상
종신제 연방대법원은 고착된 권력기관
최종적 결정 내리지만 교정할 수단 없어

 

3월 28일 미국 시카고에서 벌어진 반 트럼프 시위. 게티이미지 AFP 연합뉴스 
 

오늘의 미국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왜 아무도 이 상황을 막지 못하는가. 법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의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언론은 왜 이토록 무력합니까. 그리고 미국 민주당은 왜 늘 원칙과 절차를 말하면서도, 정작 눈앞의 권력 폭주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이 질문은 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의 미국을 이해하려면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개인이 너무 강해서가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를 제어해야 할 구조가 이미 오래전부터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위기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증상입니다.

 

오늘의 미국은 여전히 헌법을 가지고 있고, 선거를 치르며, 의회와 법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민주주의의 형식은 멀쩡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도가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 제도가 실제로 민주주의를 방어할 수 있느냐입니다. 오늘의 미국은 바로 그 지점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미국 자본주의의 하부구조가 먼저 침식되었고, 그 위에 세워진 정치제도와 시민의 감정 구조가 함께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먼저 무너진 것은 미국의 경제적 하부구조

 

오늘의 미국 위기를 트럼프 개인의 언행이나 정당 간 양극화만으로 설명하면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더 깊은 곳을 봐야 합니다. 미국 민주주의를 떠받쳐야 할 경제적 하부구조 자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침식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이후 미국 자본주의의 선택은 분명했습니다. 자국 산업의 재건이 아니라, 금융수익과 주주가치의 극대화였습니다. 미국 기업과 자본은 ‘세계화(Globalization)’와 ‘글로벌 경영(Global Management)’이라는 이름 아래, 미국 내 제조업의 경쟁력을 혁신과 생산성 개혁으로 끌어올리기보다 더 싼 임금과 더 느슨한 규제를 찾아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금융의 중심을 유지했지만, 정작 자기 사회를 떠받칠 생산의 토대는 스스로 허물어 왔습니다. 미국 노동통계국 자료가 보여주듯, 미국 제조업 고용은 장기적으로 구조적 감소세를 보여 왔고, 특히 2000년대 이후 그 하락은 훨씬 더 가팔라졌습니다(미국 노동통계국, 2018; 미국 노동통계국, 2025.9.19).

 

이것은 단지 산업구조 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자기 사회를 재건하는 방향이 아니라, 자기 사회를 비워가며 수익을 챙기는 방향으로 재편되었다는 뜻입니다. 공장이 사라졌고, 마을이 쇠락했으며, 노동의 자부심이 무너졌습니다. 러스트벨트(Rust Belt)의 몰락은 단순한 지역경제의 후퇴가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대가 허물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이 문제를 생산 재건이나 산업 민주화의 방향으로 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국 경제는 쌍둥이 적자를 안은 채 군비를 계속 키우고, 제조업은 해외로 내보내며, 금융자본(financial capital)을 중심축으로 유지하는 구조를 더 깊게 굳혀 왔습니다.

 

이 점에서 미국의 재정 상태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체제의 병리입니다. 미국 재무부 집계상 국가부채는 이미 38조 달러대 후반에 접근했고, 의회예산국(CBO)은 2026 회계연도 재정적자를 1조 9천억 달러로 전망했습니다. 같은 전망에서 2026년 순이자 지출은 1조 달러를 넘고, 총지출은 7조 달러를 웃돌 것으로 제시됩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의 일반정부 총부채를 GDP 대비 120%대 후반으로 제시하고 있어, 미국은 이미 주요 선진국 가운데서도 매우 높은 부채 부담 구조에 들어와 있습니다(미국 재무부 Fiscal Data, 2026; 미국 의회예산국, 2026.2.11; 국제통화기금 IMF, 2026.2.25). 한마디로 말해, 오늘의 미국은 더 이상 생산국가라기보다, 부채를 굴리며 군사비를 키우는 금융패권국가의 말기 증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국의 2024년 군사비는 9,970억 달러로 다시 늘어났습니다(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 2025.4.28).

 

이 구조는 단지 경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대를 갉아먹는 정치 문제입니다. 민주주의는 결국 “이 사회가 나를 먹여 살리고 지켜줄 수 있다”는 최소한의 집단적 신뢰 위에서만 작동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정치·경제 엘리트는 그 신뢰를 스스로 파괴해 왔습니다.

 

더구나 미국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비교적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아이러니하게 중국의 성장과 중국 제조업에 대한 의존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자국의 생산 기반을 비워가면서도 값싼 중국산 상품과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소비와 금융 팽창을 유지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은 한동안 중국의 제조업 역량 위에서 자국 금융질서의 연명을 이어온 셈입니다. 패권국가로서는 기이하고, 장기적으로는 지속 불가능한 구조였습니다.

 

■ 월가의 시대 뒤에 빅테크 올리가르히가 올라탔다

 

그러나 미국의 문제는 단지 제조업 붕괴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의 미국은 금융자본의 나라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미국을 움직이는 핵심 권력은 점점 더 빅테크(Big Tech)–AI–방산 자본의 올리가르히(oligarchy)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 미국 자본주의의 중심축은 월가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에서는 금융자본 위에 다시 플랫폼 권력, 데이터 권력, 감시 권력, 군사기술 권력이 결합한 새로운 지배블록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안두릴(Anduril), 팔란티어(Palantir), 스페이스X(SpaceX) 같은 기업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기술혁신이 아닙니다. 이 기업들은 국가안보, 감시, AI 전장, 우주 인프라, 미사일 방어체계와 결합하며 국가의 군사·정치 기능 자체를 민간 독점자본과 접합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안두릴과 팔란티어는 미국의 차세대 미사일 방어체계 소프트웨어 개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고, 트럼프 2기 들어 AI·과학기술 국가전략 자문 구조에도 주요 빅테크 수장들이 직접 포진하고 있습니다(Reuters, 2026.3.24; Reuters, 2026.3.25). 즉, 오늘의 미국은 더 이상 단지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이제는 금융–빅테크–방산–AI 자본이 국가를 공동 경영하는 체제로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100일 연설을 듣기 위해 미국 미시간주 머콤 카운티 현장을 찾은 지지자들이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트럼프의 선거 구호)라는 문구가 새겨진 전광판 아래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2025.4.30 연합뉴스
 

이러한 변화는 미국 민주주의에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지배세력은 단지 시장을 독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보, 전쟁, 감시, 여론, 플랫폼, 국가계약, 안보담론까지 함께 틀어쥐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이제 선거의 차원에서만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경제구조의 차원에서, 정보구조의 차원에서, 국가권력의 차원에서 동시에 포획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이 구조의 바깥에서 난입한 파괴자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이 구조가 낳은 가장 공격적이고 가장 노골적인 정치적 형상입니다.

 

■ 미국 민주당은 노동과 서민의 정당에서 체제관리 정당으로 이동했다

 

그렇다면 미국 민주당은 왜 이 위기를 막아내지 못했을까요.흔히 나오는 답은 미국 민주당이 무능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면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미국 민주당의 더 큰 문제는 미국 사회를 지배해 온 구조 자체와 충분히 결별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미국 민주당은 오랫동안 러스트벨트(Rust Belt)로 상징되는 공업지대의 노동조합과 도시 산업노동계층에 강한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조업이 붕괴하고 금융화가 심화되면서, 그 재정적·정치적 기반은 점차 노동조합 중심 구조에서 금융자본, 전문직 엘리트, 실리콘밸리 후원 네트워크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후원금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 민주당이 더 이상 “노동의 언어”로 사회를 읽기보다, 시장과 기술과 제도를 관리하는 언어로 사회를 읽기 시작했다는 뜻이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미국 민주당은 빌 클린턴(Bill Clinton),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조 바이든(Joe Biden)으로 이어지는 상당한 집권 경험을 가졌지만, 그 시간 동안 미국 시민 다수는 “미국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감각을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멈추지 않았고, 군비는 줄지 않았으며, 적자는 누적되었고, 제조업의 쇠퇴도 되돌려지지 않았습니다(미국 의회예산국, 2026.2.11). 특히 2008년 금융위기는 결정적이었습니다. 그 위기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질서의 실패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그것을 체제 전환의 계기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많은 시민이 체감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월가는 구제되었지만, 시민의 삶은 그대로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 민주당의 친금융자본적 성격은 대중에게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금융개혁의 단호한 전환보다 국가재정과 유동성을 동원한 체제 봉합이 앞섰고, 그 선택은 장기적으로 미국 대중의 분노를 미국 민주당으로부터 떼어놓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후 미국 민주당은 한동안 실리콘밸리의 대규모 후원과 기술낙관주의의 수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피터 틸(Peter Thiel)을 비롯한 테크 우파와 다수의 빅테크·벤처 자본가들은 점점 더 공화당과 트럼프 진영으로 이동하거나, 최소한 거래 가능한 권력으로서 트럼프를 선택하는 길로 돌아섰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보수화가 아니라, 규제보다 독점, 민주주의보다 기술귀족정, 공공성보다 올리가르히를 선택한 이동이었습니다(Reuters, 2025.10.9; Reuters, 2026.3.25). 즉, 미국 민주당은 노동의 정당에서 금융과 기술 엘리트에 더 가까운 정당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중의 상실감과 굴욕감, 분노와 불안을 정치적으로 번역하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정치는 사실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치는 사람들이 무엇을 체감하느냐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런데 미국 민주당은 오랫동안 이 감정의 층위를 읽는 데 실패해 왔습니다. 그래서 미국 민주당은 옳은 말을 하면서도, 많은 시민에게는 점점 더 멀고 느리고 차가운 정치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단순한 선거기술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민주당은 트럼프를 비판했지만, 트럼프를 낳은 구조와는 끝내 결별하지 못했습니다.

 

■ 미국 연방대법원은 견제장치가 아니라 고착장치가 되었다

 

이제 상부구조를 봐야 합니다. 오늘의 미국 민주주의가 더 심각한 이유는 단지 제도가 느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고장 난 제도를 고치는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것이 미국 연방대법원입니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와 연방판사는 사실상 종신직입니다. 미국 헌법과 의회 해설에 따르면, 이들은 중대한 위법이 없는 한 정해진 임기 없이 자리를 유지합니다. 다시 말해, 잘못된 인선의 정치적 효과가 짧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누적됩니다. 한 번 기울어진 사법지형은 선거 한두 번으로는 거의 되돌릴 수 없습니다(미국 의회 헌법해설, 2026).

 

미국 연방대법원은 헌정질서의 최후 보루로 여겨져 왔지만, 오늘날에는 민주주의의 자기교정을 가로막는 고착 장치로 비판받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최후의 기관이, 오히려 권력구조의 장기 고착을 떠받치는 장치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미국 연방대법원은 단지 보수화된 기관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치적 편향이 장기 고착된 권력기관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이 종신제가 더 이상 안정 장치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미국에서는 그것이 민주적 책임성의 부재와 정치적 면책의 제도화로 기울고 있습니다. 판사들은 선출되지 않지만 사회 전체의 방향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시민이 그 판단을 직접 교정할 수단은 거의 없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9년의 루초 대 커먼코즈(Rucho v. Common Cause) 판결입니다. 연방대법원은 노골적인 정당형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문제에 대해, 그것이 부당할 수는 있으나 연방 법원이 개입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민주주의의 대표성 자체를 훼손하는 구조적 왜곡을 보고도 법원이 한 발 물러선 것입니다(미국 연방대법원, 2019.6.27). 이 흐름은 2024년 트럼프 대 미국(Trump v. United States) 판결에서 더 노골화되었습니다. 대법원은 전직 대통령의 공적 행위에 대해 광범한 형사상 면책을 인정했고, 그 결과 “권력자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헌정질서의 핵심 원칙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미국 연방대법원, 2024.7.1).

 

이것은 단지 판결 몇 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점점 더 민주주의 방어 장치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교정이 거의 불가능한 권력의 상층 보호막처럼 기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탄핵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대통령이나 연방 고위공직자에 대한 탄핵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극도로 어려운 제도입니다. 하원에서 탄핵소추는 가능해도, 상원에서 유죄와 파면을 위해서는 3분의 2라는 높은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미국 상원, 2026). 헌법개정은 더 어렵습니다. 양원 3분의 2, 그리고 주(州) 4분의 3의 동의를 요구하는 구조 아래에서는, 선거인단 개혁이든 대법관 임기제든 구조개혁은 거의 봉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2025).

 

이 점에서 미국은 한국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한국은 두 차례 대통령 탄핵을 통해, 큰 비용을 치르면서도 최소한 헌정질서의 자기교정 능력을 보여준 경험이 있습니다. 반면 미국 시민사회와 미국 민주당이 느끼는 무력감의 더 깊은 바닥에는, “우리가 분노하고, 투표하고, 거리로 나와도, 구조 자체는 잘 안 바뀐다”는 현실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오늘의 미국 민주주의를 더 무력하게 만듭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제 권력을 견제하는 기관이 아니라, 한 번 기울어진 권력구조를 세대 단위로 고착시키는 장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 민주주의는 느리고, 권력은 빠르다

 

오늘의 위기를 더 깊이 이해하려면 정보환경과 시민의 감정 구조까지 봐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느린 체제입니다. 사실을 확인해야 하고, 토론해야 하며, 심의하고, 표결하고, 판결해야 합니다. 원래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폭주를 막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권력은 완전히 다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플랫폼은 숙고보다 반응을, 설명보다 자극을, 맥락보다 분노를, 사실보다 속도를 보상합니다. 최근 연구는 소셜미디어 알고리즘 구조가 정치적 적대감과 양극화를 증폭시키고, 자극적·적대적 콘텐츠 노출을 통해 정서적 분열을 심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Science, 2026).

 

바로 여기서 트럼프식 정치는 강해집니다. 그는 늘 설명보다 자극을 선택하고, 논증보다 적을 설정하며, 복잡한 현실보다 음모론적 단순화를 택합니다.

 

이 방식은 민주주의에는 해롭지만 오늘의 정보환경에는 매우 잘 맞습니다. 그래서 시민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도, 실제로는 더 적은 현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정보는 넘치지만 맥락은 사라지고, 뉴스는 많지만 공적 판단 능력은 약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의 전제 조건인 공유 가능한 현실 자체가 무너집니다. 그리고 시민은 점점 더 강하게 체감합니다. 민주주의는 왜 이렇게 느린가. 왜 저쪽은 당장 움직이는데, 이쪽은 늘 절차만 말하는가. 이 순간 민주주의는 가장 위험해집니다. 시민이 민주주의의 느림을 신중함이 아니라 무능으로 체감하기 시작할 때, 권위주의는 이미 절반쯤 성공한 것입니다.

 

■ 그럼에도 미국 사회는 아직 굴복하지 않았다

 

미국 전역에서 열린 ‘No Kings’ 시위는, 고장 난 제도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민사회의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제도의 무력화에서 드러나지만, 동시에 그것은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저항 속에서도 확인된다.3월 28일 벌어진 미국의 반 트럼프 시위. AFP 연합뉴스
 

그러나 여기서 글을 멈추면, 우리는 오늘의 미국을 절반만 보게 됩니다. 미국의 하부구조는 침식되었고, 정치제도는 고장 났으며, 미국 민주당은 체제를 바꾸지 못했고, 정보환경은 독성화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사회 전체가 이미 굴복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 시간으로 3월 29일, 미국 현지 3월 28일에는 미국 전역에서 트럼프에 반대하는 대규모 ‘노 킹스(No Kings)’ 시위가 열렸습니다.

주요 보도에 따르면 이 시위는 미국 50개 주 전역 3,200건이 넘는 장소에서 진행되었고,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규모급 항의 행동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히 8백만 명 이상 참여라는 수치는 현재로서는 주최 측 추산으로 보아야 하지만, 이번 행동이 미국 사회의 깊은 저항 에너지를 보여준 것은 분명합니다(Reuters, 2026.3.28).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미국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시민의 저항 능력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로 나옵니다. 여전히 분노합니다. 여전히 저항합니다. 여전히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에서 더 심각한 것은, 그 저항을 정치적·제도적 전환으로 번역하는 능력이 약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거리의 분노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의회 개혁과 정당 재편, 사법 통제와 정보환경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시민의 힘은 존재하지만, 그 힘을 제도 변화로 연결해줄 매개 장치가 낡고 약해져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보여주는 비극은 저항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저항이 아직 충분히 번역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 결론: 오늘의 미국은 이중 붕괴 속에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 민주주의 위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부구조는 무너졌고, 상부구조는 고장 났으며, 시민은 그 사이에서 구조화된 무력감을 학습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풀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미국은 제조업을 버리고 금융을 택했습니다. 쌍둥이 적자를 누적하면서도 군비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금융자본 위에 빅테크–AI–방산 올리가르히가 올라탔습니다. 그 위에 놓인 정치제도는 종신직 연방대법원과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탄핵, 거의 봉쇄된 헌법개정 구조, MAGA화된 의회와 체제관리 정치에 머문 미국 민주당 때문에 스스로를 고치기조차 어려운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미국의 연방재정 전망과 국가부채, 군사비 증가, 그리고 연방대법원의 장기 고착 구조는 바로 그 현실을 보여줍니다(미국 의회예산국, 2026.2.11; 미국 재무부 Fiscal Data, 2026;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 2025.4.28).

 

그리고 그 결과 시민은 민주주의의 느림을 문명의 신중함이 아니라 무능과 패배의 감각으로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비대칭이 오늘의 위기입니다. 민주주의는 느리기 때문에 무능해 보이고, 권위주의는 빠르기 때문에 유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느림은 본래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폭주를 막기 위한 문명의 장치였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다시 시민에게 “실제로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감각이 사라질 때, 민주주의는 헌법책 속에서는 살아 있어도 현실에서는 패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미국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무거운 경고는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대개는 먼저, 사람들이 그것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는 방식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다음 질문이 생깁니다. 이처럼 하부구조는 무너지고, 상부구조는 고장 나며, 시민의 신뢰까지 침식된 미국은 이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위기는 일시적인 정치 혼란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은 민주주의의 외피를 남긴 채, 더 노골적인 권위주의와 과두적 지배, 그리고 대외적 폭력에 의존하는 체제로 더 깊이 기울어 갈 것인가. 이제 문제는 왜 미국 민주주의가 트럼프를 막지 못하는가를 넘어서, 이런 미국이 앞으로 어떤 국가로 변해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 질문을,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문헌>

1. 경제구조·제조업 붕괴·금융화

노동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

「Forty Years of Falling Manufacturing Employment」, 2020.

노동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

「Employment Situation News Release」, 2025.9.5.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of St. Louis), FRED.

「All Employees, Manufacturing (MANEMP)」, 2026.

2. 미국 재정위기·국가부채·군비증강

미국 의회예산국(Congressional Budget Office).

『The Budget and Economic Outlook: 2026 to 2036』, 2026.2.11.

미국 재무부(U.S. Department of the Treasury), Fiscal Data.

「Debt to the Penny」, 2026.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World Economic Outlook Database: United States」, 2025/2026.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SIPRI).

「Trends in World Military Expenditure, 2024」, 2025.4.28.

3. 미국 사법·정치제도·교정불능성

미국 의회 헌법해설(Constitution Annotated, Congress.gov).

「Judicial Tenure and Good Behaviour」, 2026.

미국 연방대법원(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

『Rucho v. Common Cause』, 2019.6.27.

미국 연방대법원(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

『Trump v. United States』, 2024.7.1.

미국 상원(U.S. Senate).

「Impeachment」, 2026.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Process」, 2025.

4. 정보환경·알고리즘 정치·시민저항

Science.

「소셜미디어 알고리즘과 정치적 양극화 관련 연구」, 2026.

Reuters.

「Anti-Trump ‘No Kings’ rallies pop up in thousands of U.S. cities」, 2026.3.28.

The Washington Post.

「No Kings protests fill streets at over 3,300 rallies in all 50 states」, 2026.3.28.

The Guardian.

「Third No Kings protest draws millions from across U.S. to push back on Trump administration」, 2026.3.28.

'민주주의 미국' 전쟁국가 감시국가로 추락

이병권 인문연구가 시민기자lbkwon21@naver.com다른 기사 보기
 
  • 국제
  • 입력 2026.04.04 18:40
  • 수정 2026.04.06 15:56

[미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①]
ICE는 행정기관 아닌 공포정치의 상징
행정문서와 데이터, 효율성 내세운 독재
국가강제력이 시민들 일상감각을 바꿔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 칼럼은 총 5부로 구성됩니다. 한국의 극우와 미국의 극우 문제를 그 구조와 실체까지를 심도 있게 추적해온 인문연구가 이병권이 이번에는 ‘미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큰 주제를 독자들에게 제시합니다. 작가는 연재를 통해 오늘의 미국을 단순한 한 국가의 위기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국제질서 전반의 균열을 드러내는 구조적 징후로 읽어냅니다.

 

이번 연재는 미국 내부의 정치·사법·경제 구조의 불균형, 극우의 제도 장악, 대외적 전쟁과 내부 통제의 결합, 그리고 인공지능과 빅테크가 결합한 새로운 군산복합체의 위험까지를 단계적으로 짚어갑니다. 동시에 미국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강대국의 조건’을 다시 묻습니다. 필자는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경제, 민주주의, 문화, 기술, 국방, 국제적 신뢰의 균형 속에서 바라보며, 마지막에는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강대국의 방향까지 제시합니다.

 

미국을 통해 세계를 읽고, 세계를 통해 한국의 길을 묻는 이 연재가 오늘의 독자들에게 하나의 깊은 문제의식과 사유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지금 세계에서 전쟁과 통제를 가장 집요하고도 일상적인 방식으로 정상화하고 있는 나라는, 역설적이게도 오랫동안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해 온 미국입니다. 오늘의 미국은 바깥으로는 폭격과 제재, 일방적 군사행동을 정당화하고, 안으로는 감시와 추방, 통제와 배제를 일상의 풍경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강경한 정부 하나가 들어섰다는 뜻이 아닙니다.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전쟁하는 국가”이자 “감시하는 국가”의 성격을 강화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민낯은 이미 올해 1월, 미국의 한 주택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 주택가에서 드러난 오늘의 미국

 

2026년 1월 7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미국 시민 르네 굿(Renée Good)이 연방 이민단속 작전 도중 사살되었습니다. 이어 1월 24일에는 역시 같은 도시에서 미국 시민이자 중환자실 간호사였던 알렉스 프레티(Alex Pretti)가 또다시 연방 이민집행 요원들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두 사람 모두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불법이민자 색출”과 “이민 단속 강화”라는 트럼프 2기식 국가동원 분위기 속에서 벌어졌습니다(Reuters, 2026.3.24; AP, 2026.3.24). 이 두 장면은 오늘의 미국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국가가 이민 단속을 명분으로 자국민을 대낮 주택가에서 사살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따라온 것은 철저한 책임 규명과 공권력 통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진상 규명은 지연되었고, 미네소타주는 연방 법무부와 국토안보부가 증거 제공을 거부하고 있다며 직접 소송까지 제기해야 했습니다. Reuters와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주정부는 연방 당국이 사건 관련 자료와 요원 신원, 증거 접근을 조직적으로 차단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Reuters, 2026.3.24; Washington Post, 2026.3.24). 이 장면의 진짜 공포는 단지 총성이 울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집 앞 골목에서, 또 한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던 도시의 일상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무장한 외국인도, 전쟁터의 적군도 아니었다는 점이 더 섬뜩합니다. 그들은 미국 시민이었고, 미국의 거리에서, 미국 정부의 이름으로, 미국 요원들의 총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국은 늘 멀리서만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순간 자기 집 앞 거리에서 본색을 드러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음입니다.

 

오늘의 미국 극우는 이 사건들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폭력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영웅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국가폭력의 책임을 묻기보다, 그것을 “질서 회복”으로 미화하고, 가해 권력을 “나라를 지키는 힘”으로 포장하는 문화가 미국 정치의 중심부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폭력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정치적 감각이 사회 안에 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죽음을 보고도 누군가가 안도감을 느끼고, 후련함을 느끼며, 그것을 국가의 결단력으로 읽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 순간 민주주의는 이미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폭력이 체제의 일탈이 아니라 체제의 언어가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제도보다 먼저 양심에서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사회는 더 이상 단지 위험한 사회가 아니라, 스스로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회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ICE가 이제는 공항에 등장했습니다.

 

■ 공항으로 들어온 국가권력

 

2026년 3월,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으로 교통안전청(Transportation Security Administration, 교통안전청, 이하 TSA) 인력 공백이 심각해지자,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세관단속국(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 이민·관세 집행국, 이하 ICE) 요원들이 14개 안팎의 주요 공항에 배치되었습니다. 정부는 이를 “공항 질서 유지와 보안 검색 보조”라고 설명했지만, 트럼프는 이들이 공항에서도 이민 관련 체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습니다(Reuters, 2026.3.23).

 

미국 공항 터미널 내부에서 제복을 입은 ICE 또는 연방 요원들이 배치된 장면. 여행객들이 이동하는 일상적 공간 한가운데, 무장한 국가권력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같은 시기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는 한 여성이 어린아이 앞에서 연방 요원들에게 강제로 체포되는 장면이 공개돼 미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AP는 이 장면이 공항 보조 배치와는 별개의 이민 집행 작전이라고 설명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본질적인 문제가 드러납니다. 이미 시민 사살 논란으로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바로 그 국가권력이, 이제는 “공항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의 가장 일상적인 이동 공간에까지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AP, 2026.3.24). 이 장면은 단지 행정적 대체 인력 투입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폭력이 더 이상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시민의 시야 안에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풍경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때는 국경지대의 먼 이야기로 여겨졌던 이민 단속과 추방, 체포와 강제력은 이제 사람들의 눈앞, 아이들의 시선 앞, 여행객의 동선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권력은 늘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일상 속에 익숙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익숙해진 권력은 가장 나중에야 비로소 위험하게 보입니다. 그때는 대개 이미 늦습니다.

 

독재는 언제나 탱크를 앞세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단지 “보조 인력”의 얼굴로, “안전”의 이름으로, “불편하지만 필요한 조치”라는 설명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스스로의 자유가 줄어드는 데 익숙해집니다. 자유는 어느 날 갑자기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편의와 안전의 이름으로 조용히 양도됩니다.

 

■ 공항은 왜 권위주의의 무대가 되는가

 

공항은 그 상징적 공간입니다. 공항은 단순한 이동 공간이 아닙니다. 공항은 국가가 예외를 가장 쉽게 정당화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국경, 안보, 신분 확인, 출입국 관리, 위험 인물 선별 같은 명분이 한꺼번에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공항은 평상시의 권리보다 비상시의 통제가 더 쉽게 허용되는 공간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항은 권위주의가 자신을 시험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됩니다. 시민과 비시민, 안전한 자와 위험한 자, 통과할 수 있는 자와 멈춰 세워질 자를 국가가 한눈에 분류하고 시각적으로 연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경계는 의회보다 먼저 이런 공간에서 흐려집니다. 공항에서 시민은 더 이상 단순한 승객이 아닙니다.

 

공항에서 여행객이 연방 요원에 의해 제지되거나 체포되는 장면. 주변의 일반 승객들이 이를 지켜보는 구도가 중요하다.
 

그는 통과를 허가받아야 하는 몸이 되고, 확인되어야 하는 신분이 되며, 언제든 멈춰 세워질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 순간 국경은 더 이상 바깥에만 있지 않게 됩니다. 국경은 사회 안으로 들어옵니다. 국경은 시민의 몸 안으로 들어옵니다. 국가는 이제 영토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상적 동선과 감정, 그리고 두려움까지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공항은 단순한 출발과 도착의 장소가 아니라, 현대 국가가 시민에게 자신을 어떻게 각인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정치적 무대가 됩니다. 한 사회의 자유 수준은 그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공간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오늘의 미국은 공항이라는 공간에서, 자유보다 통제를 더 편안한 질서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단지 보안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감수성의 문제입니다.

 

■ ICE는 단순한 기관이 아니라 공포의 장치다

 

이 점에서 오늘의 ICE는 단순한 행정기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가 누구를 안쪽의 시민으로, 누구를 바깥의 위협으로 규정하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특히 공항과 국경, 거리와 이민법원 주변, 학교와 일터 근처에까지 이 기관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순간, 시민은 국가를 보호자보다 감시자와 추방자로 먼저 체감하게 됩니다. 권위주의 체제는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을 설득하기보다, 먼저 위축시키고 길들이는 방식입니다. 누군가를 체포하고 추방하는 장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장면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게 만드는 권력의 연출입니다. 권력은 언제나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만들고, 두려움이 순응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가장 원하는 것은 복종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복종입니다. 사람들이 “혹시 나도 멈춰 세워질 수 있다”고 느끼는 순간, 국가는 굳이 모든 사람을 체포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려움은 스스로를 통치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권력은 가장 값싸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ICE는 오늘의 미국에서 단지 이민을 관리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가 보호받을 시민이고, 누가 의심받을 대상이며, 누가 언제든 배제 가능한 존재인지를 국가가 다시 정하는 체제의 얼굴입니다.

 

즉, 오늘의 ICE는 행정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통치 방식이며, 공포정치의 상징입니다.

 

■ 파시즘은 생활세계의 질감을 바꾸는 방식으로 온다

 

물론 오늘의 미국을 곧바로 나치 독일과 동일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단순한 접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교가 필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메커니즘입니다.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Gestapo, 국가비밀경찰)와 친위대(SS), 이탈리아 파시즘의 검은 셔츠단이 사람들을 먼저 굴복시킨 것은 단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연설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제복, 질문, 검문, 임의성의 공포,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국가가 당신을 멈춰 세울 수 있다는 감각이 사람들의 생활세계 안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시민을 법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의 시선 아래 놓인 관리 대상으로 바꾸는 과정이었습니다. 파시즘은 늘 거대한 구호보다 먼저, 생활세계의 질감을 바꾸는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공항과 국경, 일상의 공간에서 ICE가 시각적으로 연출되는 장면은 바로 그 메커니즘의 현대적 변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곧 나치 독일이다”라는 식의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민주주의가 언제나 법률 조문에서보다 먼저 생활세계에서 후퇴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유는 법전 안보다 먼저 마음속에서 후퇴합니다. 국가가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멈춰 세우고, 의심하고, 분류하고, 배제할 수 있다는 감각이 사람들의 일상 속에 스며들기 시작할 때 민주주의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도는 나중에 무너집니다. 감각이 먼저 무너집니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종종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정도는 괜찮다”고 스스로 허용한 작은 양보들입니다. 파시즘은 대개 법률의 이름으로 오고, 질서의 얼굴로 오며, 위기 대응이라는 명분으로 옵니다. 그리고 가장 늦게야 비로소 그 본색이 드러납니다.

 

■ 민주주의는 왜 생활세계에서 먼저 무너지는가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의회 쿠데타나 헌법 개정, 계엄령 같은 극단적 장면에서만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민주주의는 그보다 훨씬 먼저, 사람들이 매일 지나가는 공간에서 무너집니다. 공항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직장에서, 디지털 플랫폼 안에서 국가와 기업이 사람을 추적하고 분류하며 잠재적 위협으로 처리하는 일이 점점 익숙해질 때 민주주의는 서서히 후퇴합니다. 한 번 공포가 일상이 되면, 자유는 어느새 비현실적인 이상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통제는 현실적이고 필요한 것으로 정당화됩니다. 민주주의는 법률 이전에 감각의 문제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훨씬 더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단지 선거로 유지되는 체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가 나를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시민적 확신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그 확신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는 아직 형식적으로 살아 있어도 이미 내적으로는 병들기 시작합니다.

 

■ 왜 사람들은 통제를 보호로 오해하는가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흔들립니다. 혼란한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복잡한 자유보다 단순한 질서를 원합니다. 전쟁과 테러, 경제 불안과 이민, 치안과 국경 문제 같은 복합적 위기 앞에서 자유는 종종 사치처럼 느껴지고, 통제는 현실처럼 보입니다. 권위주의는 언제나 “안정”과 “효율”의 얼굴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시와 통제를 폭력이 아니라 보호로, 공포를 질서로, 배제를 안심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는 가장 취약해집니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노골적인 폭력만이 아니라, 폭력을 필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심리적 토양이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그 자체만으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것을 필요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생겨날 때 비로소 오래갑니다.

 

권위주의는 시민을 먼저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민의 불안을 먼저 조직합니다. 그리고 그 불안 위에 “강한 국가”, “단호한 통제”, “예외적 조치”의 필요성을 차곡차곡 쌓아 올립니다. 그래서 독재는 종종 자유의 반대말이 아니라, 불안의 반대말처럼 보입니다.

바로 그것이 가장 위험한 착시입니다. 불안정한 시대에 사람들은 자유를 먼저 포기한다기보다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힘”을 갈망합니다. 권위주의는 바로 그 심리를 파고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자유를 빼앗기는 순간에도,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 오늘의 괴물은 행정 문서와 데이터의 얼굴을 하고 온다

 

오늘의 미국에서 그 공포정치를 설계하는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가 스티븐 밀러(Stephen Miller)입니다. 그는 단순한 강경 이민정책 참모가 아닙니다. 이민과 국경, 내부 위협과 질서 회복의 언어를 통해 국가 강제력을 생활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정치 설계자에 가깝습니다. 그가 위험한 이유는 과격한 말을 해서가 아니라, 배제와 혐오, 의심과 단속을 법률과 행정의 언어로 번역해낸다는 데 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가 선동가의 언어만으로 굴러갔다면, 오늘의 권위주의는 행정명령과 기관 운영, 예산과 데이터 시스템을 통해 훨씬 더 조용하고 정교하게 일상 속으로 스며듭니다. 오늘의 괴물은 때로 연설가의 얼굴보다, 정책 메모와 행정 문서, 기관 재편과 예산 항목의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이 점이 오늘의 권위주의를 더 위험하게 만듭니다. 과거의 독재는 대개 스스로를 과장되게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권위주의는 훨씬 더 차갑고 전문적인 얼굴을 하고 옵니다. 그것은 효율, 관리, 기술, 보안, 리스크 대응 같은 현대적 언어를 입고 등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체제인지를 한참 뒤에야 깨닫게 됩니다.

 

■ 감시와 추방, 그리고 데이터 권력의 결합

 

그 권력은 이제 단지 총과 수갑만으로 작동하지도 않습니다. 오늘의 미국에서 이민 단속과 추방, 국경 통제는 더 이상 주변적 행정 기능이 아닙니다. FBI(연방수사국,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의 2026 회계연도 예산 요청이 약 101억 달러인 데 비해 국토안보부(DHS) 전체는 약 1천억 달러 안팎의 거대한 예산 구조를 가진 초대형 안보기구로 기능하고 있습니다(FBI, 2025.5.8; CRS, 2026.2.28). 이 안에는 ICE뿐 아니라 세관국경보호국(Customs and Border Protection, 세관·국경 보호국, 이하 CBP), 국토안보수사국(Homeland Security Investigations, 국토안보 수사국, 이하 HSI), TSA 등 시민의 이동과 체류, 신분과 국경을 통제하는 기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조직의 팽창이 아닙니다. 미국 국가가 무엇을 가장 우선적인 위협으로 상상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의 통치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정치적 지표입니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러한 통제가 점점 더 데이터와 알고리즘, 통합 감시 시스템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피터 틸(Peter Thiel) 계열의 팔란티어(Palantir)는 최근 국토안보부와 최대 10억 달러 규모의 전 부처 구매협정을 맺었고, 이는 ICE와 CBP를 포함한 국토안보부 전반에 자사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시스템을 더 깊이 침투시키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WIRED, 2026.3.5; WIRED, 2026.2.19). 별도로 팔란티어는 미 육군과도 최대 100억 달러 규모의 장기 계약을 확보했습니다(Washington Post, 2025.7.31). 즉, 감시와 추방, 그리고 전쟁과 표적화는 더 이상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데이터 권력 아래 점점 더 결합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국경 관리라고 불리던 것이 오늘은 위험 예측이라 불리고, 내일은 인공지능 기반 위협 선별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이 달라져도 본질은 같습니다. 권력이 인간을 하나의 데이터 점으로 환원하고, 그 데이터를 근거로 통제와 배제를 자동화하는 것입니다.

 

데이터 화면, 얼굴 인식, 네트워크 추적 등 디지털 감시를 상징하는 이미지.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오늘의 미국은 더 어두운 문턱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단지 감시되는 존재가 아니라, 계산되는 존재가 되고 있습니다. 누가 위험한가, 누가 배제되어야 하는가, 누가 제거 가능한가를 점점 더 기계적 판단과 데이터 연산이 떠맡기 시작할 때, 정치의 문제는 곧 인간성의 문제로 바뀝니다. 인간이 도덕적 존재로서 결정을 내리는 시대에서, 시스템이 효율의 이름으로 결정을 대행하는 시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폭력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문명은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도덕의 붕괴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문턱을 넘는 사회는, 더 이상 무엇을 위해 기술을 사용하는 사회가 아니라, 기술이 허용하는 만큼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가 됩니다.

 

■ 공항에 선 ICE는 내일의 알고리즘 통치 예고편이다

 

이 점은 오늘의 공항 풍경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공항에 선 ICE는 단지 어제의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일의 알고리즘 통치가 이미 오늘의 생활세계 안으로 들어와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제복과 체포, 국경과 추방의 정치는 이제 서버와 데이터베이스, 인공지능과 위험 예측의 정치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통제와 감시를 여전히 구식의 국가폭력 이미지로 상상하지만, 실제로 오늘의 권위주의는 훨씬 더 매끈하고 조용하며, 동시에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그것은 과거처럼 요란하게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효율이라는 말로, 때로는 기술이라는 말로, 때로는 보안이라는 말로 시민의 삶 안으로 스며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항에 선 ICE는 단지 현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미래의 정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시민 앞에 나타날지를 미리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늘은 검문과 신분 확인의 형태로, 내일은 데이터 점수와 위험 예측의 형태로, 모레는 인간이 아닌 시스템의 판단이라는 형태로 권력이 사람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인간의 양심과 책임, 죄의식은 더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기계는 후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민주주의는 시민의 몸과 감각 안에서 먼저 패배한다

 

따라서 지금 미국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단순한 이민 단속 강화가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은 국가 강제력이 생활세계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의 일상적 감각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누가 안전한가, 누가 의심스러운가, 누가 보호받을 시민이며 누가 배제될 대상인가를 국가가 시각적으로, 반복적으로, 공개적으로 재규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 순간 민주주의는 법적 권리의 체계이기 이전에 정서적 체계로서 흔들립니다. 시민은 더 이상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언제든 심문되고 선별될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체감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국가는 제도 바깥이 아니라, 시민의 몸과 감각 안에서 먼저 승리합니다. 민주주의의 진짜 전장은 의회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항 검색대 앞에도 있고, 거리의 검문 장면에도 있으며, 데이터베이스와 알고리즘 안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전장에서 시민이 패배하기 시작할 때, 헌법은 아직 살아 있어도 공화국은 이미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미국 공항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단지 미국의 이민 정책 문제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어디서부터 무너지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입니다. 민주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매일 지나가는 공간에서 권력이 익숙해질 때 무너집니다. 공포가 질서처럼 보이고, 통제가 안전처럼 보이며, 강한 국가가 유능함처럼 보이는 순간, 민주주의는 이미 후퇴하고 있습니다. 오늘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미국만의 예외적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의 민주주의가 어디에서부터,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조용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미국의 뉴스가 아니라, 민주공화국 전체를 향한 경고문으로 읽혀야 합니다.

 

문제는 단지 ICE가 공항에 섰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권력이 왜 오늘의 미국에서 제도적으로 가능해졌고, 정치적으로 정당화되며, 시민적으로 용인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바로 그 구조, 곧 왜 미국 민주주의는 지금 트럼프와 그 체제의 변형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문헌>

2026.3.23. 미국 주요 공항에 ICE 요원 배치 관련 보도.

2026.3.24.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강제 체포 장면 및 공항 내 이민 집행 관련 보도.

2026.3.24. 미네소타주, 르네 굿(Renée Good)·알렉스 프레티(Alex Pretti) 사살 사건 관련 증거 확보를 위한 연방기관 제소 보도.

Post, 2026.3.24. 미네소타 시민 사살 사건 관련 연방기관 자료 비공개 및 조사 쟁점 보도.

2025.5.8. 2026 회계연도 연방수사국(FBI) 예산 요청 자료.

Research Service (CRS), 2026.2.28. 미국 국토안보부(DHS) 예산 구조 및 규모 관련 보고서.

2026.2.19. 팔란티어(Palantir)의 국토안보부 계약 및 감시 인프라 관련 보도.

2026.3.5. 빅테크와 트럼프식 이민 단속 체계 관련 보도.

Post, 2025.7.31. 팔란티어의 미 육군 장기 계약 관련 보도.

, 2026.3.24. 카카오스토리. ICE, DHS, 팔란티어, 미국 극우 통치구조 관련 분석 글.

(Gestapo), 친위대(SS), 이탈리아 파시즘의 검은 셔츠단 관련 일반 역사서 및 파시즘 연구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