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사진첩] 끝내 사죄 없이 떠난 전두환
등록 :2021-11-27 09:37수정 :2021-11-27 10:10
김혜윤 기자
발인식,유족들과 5공 인사 등 참석한 가운데 열려
이순자 5·18 언급 없이 “고통받은 분들께 대신 사죄”

전두환씨의 운구차량과 영정이 2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끝내 반성하지 않고 세상을 뜬 5·18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의 책임자 전두환씨의 발인식이 27일 아침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발인식에는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와 장남 전재국씨, 차남 전재용씨, 삼남 전재만씨, 딸 전효선씨와 며느리 박상아씨 등 유족들과 5공인사 등이 참석했다.
영결식은 약 40분간 진행됐다. 이순자씨가 이날 열린 전두환씨의 발인식에서 유족대표로 “남편의 재임 중 고통을 받고 상처를 받으신 분들께 남편을 대신해 특히 사죄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으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다.
운구가 장례식장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역사 앞에 사죄하지 않고 떠난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와 추모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편안히 영면하세요”라는 지지자들의 외침과 울부지는 소리 뒤로 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발인을 마친 전 씨의 시신은 서울추모공원으로 옮겨져 화장한 뒤 서울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할 예정이라고 유족은 전했다. 장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21023.html#csidx46aa6a1a9c3a02a840404454ed58bf5
학살자 전두환, 반성 없이 죽다
등록 :2021-11-23 10:54수정 :2021-11-23 20:34
김미나 기자
23일 오전 연희동 자택서 사망

지난 8월9일 광주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연희동 자택을 나서는 전두환씨. 연합뉴스
육사 11기, 하나회 결성해 박정희 친위대 활동
12·12로 정권 찬탈, 5·18로 유혈 진압
‘신군부’에 밀려 최규하 대통령이 직에서 물러나자, 전두환은 그해 8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취임 뒤 정당을 해산하고 10월27일 ‘7년 단임 대통령제’가 담긴 새 헌법을 공포했다. 1981년 민주정의당에 입당했고, 새 헌법에 따라 간접선거 방식으로 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 시절 한국은 저금리·저유가·저달러 상황에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지만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한층 거세졌다. 1985년 12대 총선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터져 나왔고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드러났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럼에도 그해 4월,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체육관 선거’를 유지하겠다고 버텼다. 이에 반발하는 국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벌였고 결국 6월29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후계자로 세우고 퇴임 뒤에도 민정당 총재로 남아 막후 권력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노태우 집권 뒤 ‘여소야대’ 국회에서 5공 비리와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를 위한 목소리가 들끓었다. 권력을 넘겨받은 친구이자 육사 동기 노태우도 그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1988년 11월23일, 전두환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내설악 백담사로 들어갔다. 이 정도로 정치적 책임을 갈음하려는 ‘자기 유폐’였다.
퇴임과 구속, 전 재산 29만원

피고인 전두환씨(오른쪽부터)가 노태우씨,유학성 전 중앙정보부장과 1996년 8월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12·12. 및 5·18사건 선고공판에서 기립해 있다. 연합뉴스
전두환은 이에 반발하며 연희동 자택 앞에서 “(12·12와 5·18)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정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특별법까지 제정해 재조사한다니 응할 이유가 없다. 법을 존중하기 위해 사법부의 조처만 수용할 것”이라는 ‘골목 성명’을 발표한 뒤 고향으로 내려갔다. 검찰 수사팀은 경남 합천으로 내려가 그를 압송했고 법정에 세웠다.

1995년 12월 2일 자택 앞 골목에서 전씨가 검찰 소환 방침을 정면 반박하는 2쪽 분량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전씨는 이후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버티다가 체포돼 구속되었다. 연합뉴스
전두환은 1심에서 반란수괴와 부패 혐의로 거액의 추징금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검찰은 처벌이 약하다며 상고했지만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1997년 15대 대선 유세에서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이회창(한나라당)·이인제(국민신당) 후보 모두 ‘전두환 사면복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대선 이틀 뒤인 그해 12월20일 김영삼 대통령이 그를 사면 복권했지만 추징금은 전부 내야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추징금 완납을 거부했고 전 재산이 29만1000원이라고 항변하며 공분을 샀다. 전두환은 2003년 4월28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추징금 환수를 위한 재산 명시 관련 재판에서 “기업한테서 뇌물을 받은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게 받은 돈을 민정당 관리 등 정치 활동에 다 써서 남은 게 없다”며 해당 금액이 적힌 예금과 채권 증서를 제출했다. 그가 제출한 재산 목록에는 진돗개, 피아노, 그림, 병풍, 응접세트, 카펫, 에어컨, 텔레비전, 냉장고, 시계, 도자기, 컴퓨터, 식탁세트 등도 적혀 있었다. 출소 뒤에도 그는 연희동에 살면서 경호를 받고, 골프를 치러 다니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미납한 추징금은 956억원이다.
‘사자명예훼손’ 단죄 못 받고 떠나
말년에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2017년 전두환은 3권짜리 회고록을 내놨다. 법원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내용이 담겨 있는 1권 판매를 금지했다. 이 회고록에서 그는 ‘1980년 5월 광주 상공의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거짓이라며 “가면을 쓴 사탄”,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조 신부의 유족은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결국 전두환은 2019년 3월11일 경찰 경호팀의 호위를 받으며 피고인 신분으로 광주지방법원 법정에 섰다. 1999년 “광주에서 책임 있는 분들이 중심이 돼 초청하면 광주도 방문 못 할 이유가 없다”고 호기를 부렸던 그는 광주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당시에 헬기에서 사격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검찰과 전두환 쪽 모두 판결에 불복하면서 항소심 재판이 이어졌고, 전두환은 올해 8월 항소심에 출석했지만 인적 사항을 확인하는 판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어지럼증을 느낀다며 재판 시작 20여분 만에 퇴정하기도 했다. 그 직후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더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그였지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발언(지난 10월19일)으로 다시 한번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죽음에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등은 공동성명을 내어 “전두환이 죽더라도 5·18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오월학살 주범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만고의 대역죄인 전두환의 범죄 행위를 명명백백히 밝혀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학살자는 죽음으로도 진실을 묻을 수 없다는 것이다.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5·18단체들 “전두환이 죽어도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등록 :2021-11-23 11:55수정 :2021-11-23 13:37
김용희 기자
전두환 사망에 공동 기자회견 열어

23일 광주 5·18유족회 등 5·18단체가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전두환씨 사망과 관련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전두환(90)씨와 40여년간 투쟁을 벌였던 광주 5·18단체는 전씨 사망 소식에 “전씨의 죄를 낱낱이 밝히고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 5·18기념재단은 23일 오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전두환은 죽더라도 5·18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이처럼 밝혔다.
이들은 “국가전복과 5·18학살 주범, 민간인 대학살 책임자 전두환이 사과없이 23일 사망했다. 전두환은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하여 군사반란을 일으켜 집권하고, 5·18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뒤 1980년부터 88년 초까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며 “계속되는 거짓말과 왜곡으로 국민과 대한민국 사법부를 기만한 전두환은 반성과 사죄는커녕 자신의 회고록으로 5·18 영령들을 모독하고 폄훼하면서 역겨운 삶을 살았던 학살자 전두환은 지연된 재판으로 결국 생전에 역사적 심판을 받지 못하고 죄인으로 죽었다”고 밝혔다.
5·18단체는 “학살자 전두환은 그동안 자신이 5·18과 무관하다며 구차한 변명과 책임회피로 일관해 왔다. 우리는 전두환의 고백과 참회, 사법부의 엄벌을 강력히 촉구해왔다.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묻는 ‘역사적 심판’이 되기를 기대해 왔지만 그의 죽음으로 이마저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며 “오월학살 주범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대역죄인 전두환의 범죄행위를 명명백백히 밝혀 역사정의를 바로 세워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영훈 5·18유족회장은 “전씨는 사망했지만 발포명령자와 암매장은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5·18 학살 최고 책임자로서의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전씨가 저지른 죄를 낱낱이 밝혀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국민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아래는 기자회견 전문.
국가전복과 5·18 학살 주범 , 민간인 대학살 책임자 전두환이 사과 없이 23 일 사망했다 . 전두환은 군 내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하여 군사반란을 일으켜 집권하고 ,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뒤 1980 년부터 88 년 초까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
계속되는 거짓말과 왜곡으로 국민과 대한민국 사법부를 기망한 전두환은 반성과 사죄는 커녕 자신의 회고록으로 5·18 영령들을 모독하고 폄훼하면서 역겨운 삶을 살았던 학살자 전두환은 지연된 재판으로 결국 생전에 역사적 심판받지 못하고 죄인으로 죽었다 .
학살자 전두환은 자신이 5·18 과 무관하다며 구차한 변명과 책임회피로 일관해 왔다 .
우리는 시민 대학살자 전두환의 고백과 참회 , 사법부의 엄벌을 강력히 촉구해왔다 . 그동안의 재판이 대한민국 헌정사를 유린하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책임자에게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묻는 ‘ 역사적 심판 ’ 이 되기를 기대해 왔지만 그의 죽음으로 이마저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
우리는 오월학살 주범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 만고의 대역죄인 전두환의 범죄행위를 명명백백히 밝혀 역사정의를 바로 세워나갈 것이다 !
˝학살자가 어딜˝ 끝까지 심판한다..지역민 결사반대 전두환 파주 안장 무산
파주 주민과 지역단체 "학살자 잠들게 할 곳 없다"..땅주인 "앞으로도 안 팔아"
500만 돌풍 '서울의 봄' 전두광과 맞물렸나..분노의 '심박수 챌린지' 열풍
정현숙 | 기사입력 2023/12/07 [00:03]


지난 11월 30일 전두환씨의 파주 장산리 매장을 반대하는 시민단체 기자회견. 연합뉴스
전두환씨의 유해를 경기 파주시에 안장하려던 계획이 무산됐다. 공교롭게도 전씨가 주도한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 관객이 500만 명을 돌파하는 파죽지세 흥행몰이와의 연관성도 점쳐진다. 전씨는 1979년 12.12쿠데타 주동자로 이듬해 광주 민주화운동을 촉발한 장본인이다.
6일 파주시 등에 따르면 파주 주민들과 지역 단체의 반발이 들끓은 가운데 전씨가 안치될 것으로 알려진 사유지의 땅 주인 A씨가 매각 중단을 통보했다. 전씨 측의 유해 안장 추진에 지역사회가 반발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 가계약 기간이 종료되자 곧바로 매매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이날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가계약 기간이 이미 끝났는데 본계약이 이뤄지지 않았다"라며 "매물을 거둬들였으며 앞으로도 팔 생각이 전혀 없다"라고 밝혔다.
전씨는 사망전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녘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통일의 날을 맞고 싶다'고 적었고, 이에 유족은 파주 장산리 안장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계획이 알려지자 파주 지역사회에서는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겨레하나 파주지회' 등 11개 시민단체는 지난 11월 30일 전두환씨 파주 매장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장산리 뿐 아니라) 파주 그 어디에도 학살자 전두환을 편히 잠들게 할 곳은 없다"라며 매장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김경일 파주시장도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내놨다. 그는 지난 2일 자신의 SNS를 통해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로 대한민국 민주화의 봄을 철저히 짓밟은 전두환의 유해를 파주에 안장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라며 "개인적으로, 또 정치인으로서 전두환 유해 파주 안장을 결사 반대한다"라고 밝혔다.
박정(파주시 을)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보도자료를 통해 "대한민국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죽을 때까지 사과 한마디 없었던 폭군이 무슨 자격으로 파주에 오느냐"라고 직격했다.
화제의 영화 서울의 봄은 우리 현대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손꼽히는 12.12 군사반란 당시 권력을 강탈하고자 하는 신군부 세력과 이에 맞서는 강직한 군인들 사이의 9시간 사투를 실감 나게 그려냈다. 특히 보안사령관 전두광을 연기한 배우 황정민씨는 전두환씨의 무자비했던 모습 그 자체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소셜 미디어에서 '분노의 심박수 챌린지'라는 독특한 현상을 낳고 있다. '심박수 챌린지'는 영화를 관람하는 도중 자신의 스마트워치를 사용해 심박수를 검사한 뒤 이를 사진 찍어 SNS에 인증하는 것이다. 심박수가 높을수록 영화 속 상황에 화가 많이 났다는 뜻으로, 상영 도중 측정한 자신의 심박수를 SNS에 올리며 영화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한 네티즌이 영화 시사회가 열린 지난달 14일 SNS에 "서울의 봄 후기: 엔딩 직후 심박수 178bpm"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서 유행으로 번졌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정상 심박수는 60~100bpm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가 팩트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후련해하는 권선징악으로 마무리 짓지 못해 스트레스 지수를 오히려 키우면서 일종의 게임처럼 심박수 도전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된다.
전두환씨의 유해를 경기 파주시에 안장하려던 계획이 무산됐다. 공교롭게도 전씨가 주도한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 관객이 500만 명을 돌파하는 파죽지세 흥행몰이와의 연관성도 점쳐진다. 전씨는 1979년 12.12쿠데타 주동자로 이듬해 광주 민주화운동을 촉발한 장본인이다.
6일 파주시 등에 따르면 파주 주민들과 지역 단체의 반발이 들끓은 가운데 전씨가 안치될 것으로 알려진 사유지의 땅 주인 A씨가 매각 중단을 통보했다. 전씨 측의 유해 안장 추진에 지역사회가 반발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 가계약 기간이 종료되자 곧바로 매매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이날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가계약 기간이 이미 끝났는데 본계약이 이뤄지지 않았다"라며 "매물을 거둬들였으며 앞으로도 팔 생각이 전혀 없다"라고 밝혔다.
전씨는 사망전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녘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통일의 날을 맞고 싶다'고 적었고, 이에 유족은 파주 장산리 안장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계획이 알려지자 파주 지역사회에서는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겨레하나 파주지회' 등 11개 시민단체는 지난 11월 30일 전두환씨 파주 매장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장산리 뿐 아니라) 파주 그 어디에도 학살자 전두환을 편히 잠들게 할 곳은 없다"라며 매장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김경일 파주시장도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내놨다. 그는 지난 2일 자신의 SNS를 통해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로 대한민국 민주화의 봄을 철저히 짓밟은 전두환의 유해를 파주에 안장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라며 "개인적으로, 또 정치인으로서 전두환 유해 파주 안장을 결사 반대한다"라고 밝혔다.
박정(파주시 을)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보도자료를 통해 "대한민국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죽을 때까지 사과 한마디 없었던 폭군이 무슨 자격으로 파주에 오느냐"라고 직격했다.
화제의 영화 서울의 봄은 우리 현대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손꼽히는 12.12 군사반란 당시 권력을 강탈하고자 하는 신군부 세력과 이에 맞서는 강직한 군인들 사이의 9시간 사투를 실감 나게 그려냈다. 특히 보안사령관 전두광을 연기한 배우 황정민씨는 전두환씨의 무자비했던 모습 그 자체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소셜 미디어에서 '분노의 심박수 챌린지'라는 독특한 현상을 낳고 있다. '심박수 챌린지'는 영화를 관람하는 도중 자신의 스마트워치를 사용해 심박수를 검사한 뒤 이를 사진 찍어 SNS에 인증하는 것이다. 심박수가 높을수록 영화 속 상황에 화가 많이 났다는 뜻으로, 상영 도중 측정한 자신의 심박수를 SNS에 올리며 영화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한 네티즌이 영화 시사회가 열린 지난달 14일 SNS에 "서울의 봄 후기: 엔딩 직후 심박수 178bpm"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서 유행으로 번졌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정상 심박수는 60~100bpm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가 팩트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후련해하는 권선징악으로 마무리 짓지 못해 스트레스 지수를 오히려 키우면서 일종의 게임처럼 심박수 도전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된다.
'5.18.6.10.4.19(민주화운동)외 형제복지원.실미도 등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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