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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 조언 구한 DJ, 세계가 놀란 초고속인터넷 깔다

by 무궁화9719 2024. 9. 18.

빌 게이츠 조언 구한 DJ, 세계가 놀란 초고속인터넷 깔다

기자박찬수
  • 수정 2024-01-03 14:04
  • 등록 2024-01-03 13:30

박찬수의 DJ 국정노트 ①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4월6일 서울 양천구의 주부 인터넷 교실을 방문해, 주부들이 인터넷을 배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김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 주부뿐 아니라 청소년, 장애인, 농어민, 노인, 저소득층 등 정보화 소외 계층에 대한 교육 기회를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김대중도서관 제공
 
곧 개봉하는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은 1950년대 김 대통령의 정치 입문 시절부터 1987년 대통령선거 출마 때까지를 다룬다. 지금 다시 김대중을 돌아보는 건 그의 고난에 찬 민주화 역정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1998~2003년 5년간 대통령으로서 국정운영을 했던 기간이 더 의미 있다. ‘5년 단임의 소수파 대통령’이었음에도 수많은 정책 성과를 이룬 김 대통령의 국정운영 태도와 방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대한민국을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 강국으로 끌어올리고,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해서 ‘K-콘텐츠’의 세계적 경쟁력의 기반을 마련한 건 김 대통령 공이다. 또 기초생활보장제를 도입해 사회 안전망 구축의 토대를 놓았다. 경제개발을 이룬 박정희의 업적이 18년에 걸쳐 축적한 것이란 점을 생각하면, 5년이란 짧은 기간에 김대중이 이룬 성과는 놀랍다. 요즘 대통령의 5년 임기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보면 더욱 그렇다.
 
디제이(DJ)는 재임 5년간 거의 매일 ‘국정노트’를 썼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으로서의 고민과 노력, 통찰력이 여기 담겨 있다. 21년만에 공개되는 국정노트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대통령의 모습’을 찾아나가는 연재를 시작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전자정부특별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참여했던 송희준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2001년 12월24일 대통령과 함께 했던 회의를 또렷이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날 송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김 대통령은 다이어리처럼 생긴 노트를 펼치고선 그걸 보면서 특위 위원들에게 당부를 하기 시작했다. 힐끗 노트를 쳐다보니, 흘려 쓴 한자로 발언 요지가 키워드별로 빼곡히 정리돼 있었다. 송 교수는 “핵심을 딱 짚어서 정리하고, 그걸 풀어서 죽 얘기하시는 걸 들었다. 대통령이 회의를 앞두고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성실함이 노트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정부기관 회의에 여러번 참석했지만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송 교수가 본 다이어리는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 시절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썼던 ‘국정 노트’다. 디제이(DJ·김 대통령 애칭)는 국무회의나 주요 정책 회의를 앞두고는 회의에서 할 얘기를 이렇게 노트에 정리했다. 청와대 통치사료비서관실 행정관을 지낸 박한수씨(현 김대중평화센터 기획실장)는 “정부 부처와 청와대 담당비서관실에서 올라온 준비자료를 토대로 대통령이 쟁점과 발언 내용을 직접 노트에 적었다. 주요 회의나 장관 보고를 받을 때는 항상 깨알같이 정리된 국정노트를 옆에다 두고 대화했다. 퇴임하시고 노트 사본이 김대중평화센터로 넘어오기 전까지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쓴 노트가 집권 5년간 27권이나 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 5년간 쓴 국정노트. 모두 27권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5년간 매일 쓴 국정노트 27권 ‘21년 만에 공개’

송 교수를 비롯한 전자정부특위 위원들은 김 대통령과 세차례 직접 만났다. 첫번째는 전자정부특위 첫 회의 두달 만인 2001년 5월17일의 보고회의였고, 두번째는 그해 성탄 전야에 열린 종합점검회의였다. 세번째는 2002년 11월13일 ‘전자정부 기반 완성 보고회의’다. 그 세차례 회의 내용이 담긴 김 대통령의 국정노트를 들춰봤다. 2003년 2월25일 퇴임 이후 21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내용은 이랬다. 한자로 흘려 쓴 단어 일부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5월17일 전자정부특위 위원들과의 첫번째 회의를 앞두고 작성한 국정노트 첫 페이지. 전자정부의 목표와 효과, 디지털 디바이드 대책 마련 등을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 대통령은 정부 부처와 청와대 비서관실에서 올린 준비자료를 토대로, 직접 핵심 내용을 정리해서 국정노트에 담았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5월17일 작성한 국정노트의 ‘전자정부특위 회의’ 두번째 페이지.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5월17일 작성한 국정노트의 ‘전자정부특위 회의’ 세번째 페이지.
 
 

『전자정부특위 보고 2001.05.17.

 

머리말

① 활동기간 2개월

② 매주 회의, 완성도 높은 전자정부 구현방안 보고

③ 민간위원들, 다망(多忙) 중 특위 참석 감사

 

1. 전자정부 구현의 필요성

① 21세기 지식기반 교육시대

② 우리 민족에 절호의 기회 – 지성 문화 모험심

③ 초고속통신망 144개 구축, 세계 최초.

2005년까지 산간벽지, 도서까지

④ 인터넷 인구수, 웹페이지 검색 등 활용도도 미·일 등 경쟁국에 크게 앞서

( 세계 21개국 중 월평균 검색량 – 한국 2164쪽, 미 678쪽, 일 788쪽, 세계 평균 774쪽)

⑤ 민간 부문의 이(e)-비즈니스도 활성화 단계

⑥ 전자정부 구현 – 효율성과 생산성의 획기적 제고로 부패 일소와 세계 일류 실현

⑦ 교통량도 크게 줄어 – 유류 절감, 환경 정화

⑧ 손정의씨의 권고 – 전자정부 하면 일류국가

 

2. 전자정부 추진과정의 문제점 및 애로사항

① 전자정부 가로막는 법이나 규제 조기 개선(종이 서류 제출, 본인의 출석, 현금납부 의무화 규정 등)

② 부처 간 정보공유 위한 체제 마련

③ 개인정보 보호대책 수립, 국민 우려 제거

 

3. 각 부처 장·차관 – 선도역할 잘해야

① 장·차관 등 지도자의 소명의식 있어야 성공

② 장·차관이 솔선해서 기존의 관행의 획기적 개선

- 패러다임의 변화 수반돼야

- 민간기업의 정보화 최고책임자(CIO)도 부사장급

③ 오늘 보고사항 – 차관들이 책임지고 실행

④ 전자정부특위는 각 부처 추진상황을 항시 조정, 점검해주기를

 

4. 계층 정보격차 해소 노력

①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 문제 중요. 학교, 군, 교도소 등.

② 인터넷 사용자와 못하는 자 - 전자정부 이용에 큰 벽, 정부의 적극적 노력 있어야

 

맺음말

① 21세기의 소명 – 지식기반 강국, 남북

② IT, BT, NT, ET 선진국, 개인주의와 접목

③ 5천년 만의 민족적 기획, 소명의식을

④ 전자정부가 핵심적 견인차

⑤ 다시 격려』

 

맨 앞에 적힌 ‘활동기간 2개월’은 특위 활동을 시작한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노력을 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을 키워드로 적은 것이다. 세번째 항목(각 부처 장·차관 선도역할 잘해야)에서 ‘민간기업의 정보화 최고책임자(CIO)도 부사장급’이란 말은, 대통령이 국가 최고경영자(CEO)니까 장차관은 부사장이란 생각으로 정보화 최고책임자 역할을 잘해달라는 당부다.

전자정부 첫발 뗀 20년 전 ‘정보 격차’ 경고

노트 내용을 보면, 전자정부 사업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김 대통령 자신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 정보 격차)에 대한 우려와 대책 마련을 촉구한 대목이다. 김 대통령은 ‘계층 정보격차 해소 노력’이란 항목을 별도로 정리해서 ‘디지털 디바이드 문제가 중요하니 학교·군·교도소 등의 컴퓨터 교육을 강화하고,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는 계층과 주민들을 위한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 무렵은 디지털 디바이드에 대한 관심이 아직 낮던 시절이었다. 송희준 명예교수는 “김 대통령은 여러 차례 디지털 디바이드 대책을 강조했다. 초고속 인터넷망이 전국에 깔리지만 가정주부나 노인, 저소득층은 아무래도 접근성이 떨어지니까 조금 지나면 큰 격차가 발생할 것 같다고 얘기하셨다. 이런 인식은 당시로선 굉장히 앞선 것이다. 김 대통령이 진보적인 분이라 이 문제에 관심이 많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은 “디지털 디바이드 이슈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건 스마트폰이 일상화한 2010년 이후다. 디지털 디바이드는 크게 피시(PC) 및 인터넷 접근성의 문제와 리터러시(literacy, 활용 능력) 문제로 나눌 수 있는데, 2001년은 접근성의 문제가 더 큰 시기였다. 김 대통령의 이런 인식이 학교와 우체국 등에 공공 피시를 적극 보급하는 정책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감옥서 ‘제3의 물결’ 탐독…“산업화 뒤져도 정보화 앞설 수 있다”

디제이는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에, 정보화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내다봤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신군부의 쿠데타로 얼어붙고 디제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탐독했다.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김 대통령의 정보화·전자정부 사업을 실행했던 김성재 한신대 석좌교수의 얘기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앞으로 다가올 정보화 사회에 관해 디제이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걸 기억하시고는 사형수로 육군교도소에서 복역할 때 앨빈 토플러 책 ‘제3의 물결’에 굉장한 관심을 표명하셨다. 그 책을 넣어달라고 해서 1981년 5월쯤에 내가 구입해서 이희호 여사를 통해 감옥 안으로 전달했다.” 디제이는 큰 감명을 받았다. 1981년 5월22일과 12월16일 청주교도소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을 보면, ‘제3의 물결’을 꼭 읽어보라고 권유하는 내용이 나온다. “산업화 시대에는 뒤처졌지만, 정보화 시대에는 앞서갈 수 있다. 만약 감옥에 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진리를 깨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사후에 출간된 ‘김대중 자서전’(2010년)에 썼다.
 
2002년 11월6일 서울 세종로 정보통신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1000만 돌파 기념행사’에서 김대중 대통령 부부와 참석자들이 레이저가 나가는 모형 마우스를 누르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은 미국과 네배의 격차로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에 올랐다. 한겨레 자료사진
 
디제이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 장면은, 1981년 1월 중앙정보부에서 촬영한 영상이다. 김대중평화센터가 입수해 보관해온 영상을 보면, 김대중은 남산 중앙정보부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조사를 받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수사관 최○○씨에게 정보화와 인터넷에 관해 설명한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컴퓨터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1986년 피시통신 천리안이 문을 열면서 비로소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81년 중앙정보부 촬영 영상을 보면, 사형수 김대중은 ‘세계가 정보화 시대로 갈 것이고 우리나라도 여기에 뒤처져선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영상)
 
선견지명은 19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정책으로 구체화했다. 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21세기 첨단산업 시대에 기술 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 정책을 과감히 추진해 나가겠다. …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겠다”고 말했다. 외환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한 1999년부터 김대중 정부는 초고속 통신망에 본격 투자하기 시작했다. 재일동포 기업인 손정의씨(소프트뱅크 회장)와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의 조언이 도움을 줬다고 김 대통령은 국정노트에 적었다.

“브로드밴드가 뭔가요?” 묻던 DJ, 정보고속도로 개통

집권 초기인 1998년 6월18일 청와대에서 빌 게이츠와 손정의씨를 만났다. 김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그날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한국 경제가 살아나갈 길이 무엇인지 물었다. 손 사장이 대뜸 말했다. ‘첫째도 브로드밴드, 둘째도 브로드밴드, 셋째도 브로드밴드입니다. 한국은 브로드밴드에서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빌 게이츠 회장도 동의했다. 나는 정보통신부에 초고속 통신망을 빠른 시일 안에 구축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손정의 회장의 기억도 비슷하지만 좀 더 구체적이다. 손 회장이 몇년 뒤에 기자들에게 설명한 내용은 이랬다. “김 대통령이 한국이 망할 거 같다면서 직설적으로 조언을 구했다. 나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첫째 브로드밴드, 둘째 브로드밴드, 셋째 브로드밴드.’ 빌 게이츠도 동감한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두 사람이 모두 그렇게 말하면 한번 그렇게 해보겠다’고 말하더니 ‘그런데 브로드밴드가 뭔가요?’라고 물었다.” 손 회장은 “일주일쯤 뒤 한국 정부가 초고속 인터넷 정책을 발표하는 걸 보고 한국이 인터넷에서 세계 최고가 될 것임을 알아챘다”고 덧붙였다.
 
강력한 대통령 의지를 담은 정보화 정책은 단기간에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2000년 12월, 전국 144개 주요 지역을 광케이블 초고속 통신망으로 연결하는 정보고속도로를 개통했다. 1999년 37만가구에 불과했던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는 2002년 10월 1천만가구를 넘었다. 2001년 말 기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은 100명당 17.1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로 올라섰다. 송희준 교수는 “초고속 통신망은 일종의 고속도로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깐다고 해서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건 아니다. 자동차가 달리도록 해야 한다. 김 대통령은 그걸 성공적으로 했다. 굉장히 싼 가격으로 국민이 초고속 인터넷을 쓸 수 있게 하고 학생과 군인, 주부, 노인을 대상으로 무상 정보화 교육을 하는 등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 투자했다. 세계가 놀란 인터넷 사용자 폭발은 그렇게 나왔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박선숙씨는 이것이 김대중 정부만의 공은 아니라고 말했다. 박 전 수석은 “김영삼 정부 때 정보통신부를 발족하고 정보화추진 기본계획을 세웠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전두환 정부 때 전자교환장치(TDX)를 도입해 피시통신이 가능해졌다. 그 씨앗을 활짝 피운 게 김대중 정부”라고 말했다. 디제이의 공은 국가 경쟁의 성패가 정보화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이 사안을 대통령의 어젠다로 끌어올려 직접 챙기고 집중 투자를 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4월20일 서울 청운동 경기상고에서 열린 ‘전국 초·중등학교 정보인프라 구축 및 인터넷 연결’ 기념식에 참석해, 인터넷을 배우는 학생과 대화하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제공
 
디제이는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했다. 군사독재의 오랜 감시 아래서 중요한 메모는 꼭 손으로 쓰는 습관을 들였다. 국정노트에 꼬박꼬박 손글씨로 정책을 정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바꿀 세상을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감옥에서의 많은 독서와 전문가 조언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긴요한 자질을 키웠다.
 
2002년 11월13일 청와대에서 ‘전자정부 기반 완성 보고대회’가 열렸다. 민원서류를 집에서 컴퓨터로 발급받을 수 있는 ‘G4C’(Government for Citizen, 지금의 ‘민원24’) 서비스가 시작됐다. 그날 김 대통령 국정노트엔 이렇게 적혀 있다.
 

『전자정부 기반완성 보고회 02.11.13

 

1. 인사말씀 - 오늘은 뜻깊은 날, 21세기형 정부 구현

① 연말까지 완성 약속 조기달성

② 국민의 정부의 핵심과제. 일류국가의 선결조건

③ 전자정부특위(안문석) 위원, 행자부, 정통부, 전 부처(이근식, 이상철, ○○○) 치하

 

2. 전자정부의 기대효과

① 국민과 기업의 인터넷 고취로 시간절감 가속화

시간과 ○○의 대폭 절감, 생활의 질, 기업 경쟁력

② 행정의 투명성과 부패 제거에 획기적

③ 정부의 생산성의 향상 - 종이와 수작업 마감

전자화된 행정정보의 공동활용 - 일하는 방식의 근본적 변화

④ 정부와 국민의 관계변화 - 정부가 보존한 정보는 정부가 확인 - 서비스하는 정부의 모습

⑤ 국민의 정부 신뢰와 만족 향상

⑥ 기업 하기 좋은 나라

⑦ 세계의 정부들과 경쟁에서 우위 - 21세기 일류국가

 

3. 우리나라 전자정부에 대한 국제평가

1. UN과 미 행정기관 - 한국의 전자정부 서비스 제공

2. 미 브라운 대학 - 정부○○ 웹사이트에서 한국을 세계 2위로 평가 - 미·일보다 앞서. ○○ 1위.

3. 서울시의 민간입찰 시스템 - 반부패 국제회의서 개혁 우수사례로 소개. 유엔과 공동으로 민간입찰 시스템 보급사업 추진 중.

 

4. 월드컵, 부산 아시안게임 - IT 강국

 

5. 해외시장 진출(인니 e-gov, 4만불) 캄보디아(행정전산망사업 24만불)

 

4. 맺음말

1. 오늘의 성과는 기반 완성. 전자정부의 완성이 아님. 세계 최고 수준 전자정부 실현 위해서도.

① 기술, 법제상의 미비점 계속 보완발전

② 국민에게 홍보 - 사용의욕 고취

③ 새로운 기술에 친숙하도록 공무원들 교육

④ Digital divide 없게 인터넷 사용교육 강화

2. 오늘 - 21세기 세계 일류국가 ○○ 강화

- 이 자리의 여러분, 전자정부 성공의 선도자.』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11월17일 ‘전자정부 기반 완성 보고대회’를 앞두고 작성한 국정노트. 김 대통령은 이 행사에서 “정치가로서 내 일생에 좋은 날이 별로 없었지만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라며 기뻐했다고 안문석 당시 전자정부특위 위원장은 밝혔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민원24’ 서비스 시작에 “오늘은 정말 좋은 날”

정부 내에선 이 행사 명칭을 ‘전자정부 완성 보고대회’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민원 서비스와 정부 전자조달 시스템의 문을 연 거니까 정치적으론 ‘완성’이라 홍보할 수 있을 텐데, 김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디제이는 ‘오늘의 성과는 기반을 만든 것이지 전자정부의 완성은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정부를 위해선 앞으로 계속 보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국정노트에 적었다. 전자정부특위 위원장을 맡았던 안문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보고대회에서 김 대통령이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디제이는 ‘정치가로서 내 일생에 좋은 날이 별로 없었지만 오늘은 정말 좋은 날입니다’라며 기뻐했다. 박정희 대통령부터 역대 정부가 정보화를 쭉 추진해 왔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대통령을 꼽으라면 단연 디제이를 꼽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화를 산업으로 본 첫 대통령…DJ, ‘한류’ 기반을 놓다

박찬수 기자2024. 1. 17. 13:35

박찬수의 DJ 국정노트 ③
“일본 문화 막아 국내 1등 해봐야 세계 1등 못하면 소용없다”
게임지원센터·콘텐츠진흥원 설립, 문화산업 ‘인재 결집’ 계기
“21세기는 한국의 세기…문화가 한국인에 가장 적합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1998년 10월8일 도쿄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악수하고 있다. 두 사람은 회담 뒤 일본 대중문화 개방 등을 담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20세기엔 공업과 노동력이 국력이었다면, 21세기엔 지식과 문화가 중요하다. 문화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이 되어야 한다. 21세기는 한국의 세기다. 왜냐하면 문화는 한국인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1999년 3월22일 문화관광부의 대통령 보고회의를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은 국정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내다본 김 대통령 인식이 묻어난다.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는 지적 활동을 넘어선 ‘콘텐츠 산업’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김 대통령이 가장 많이 한 얘기 중 하나가 “영화 ‘쥬라기공원’ 한 편의 흥행수입이 8억5천만 달러다. 자동차 150만대를 수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 문화관광부 문화산업국장을 지낸 유진룡씨(박근혜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냈다)의 얘기다.
 
“1994년에 문화체육부(문화관광부의 전신)에 문화산업국이 처음 생겼다. 그런데 이 부서에서 다루는 ‘문화산업’이란 게 가장 아날로그적인 출판 말고는 별로 없었다. 그 내용을 성공적으로 채운 게 김대중 정부 때다. 2000년 무렵은 세계적으로 문화콘텐츠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시기였다. 디지털 콘텐츠의 세상이 오는데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정책적으로는 굉장히 망연자실한 상황이었다. 1999년에 게임종합지원센터(한국게임산업진흥원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2009년 한국콘텐츠진흥원으로 통합된다)를, 2001년에 문화콘텐츠진흥원(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전신)을 만든 게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정부가 콘텐츠 산업에 굉장히 관심이 많고 지원을 적극적으로 한다는 걸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두 번째는, 이들 기관을 통한 지원이 당시로선 공평하고 공정하게 이뤄졌다. 그걸 보면서 젊은이들이 문화산업에 관심을 갖고, 많은 매니아층 인재들이 몰리면서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기반이 됐다. 그 전까지 문화는 정부의 중요한 정책 과제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 들어 문화는 비로소 정책의 주변부를 벗어났다.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문화 산업’을 강조하고 또 아주 많은 지원을 한 결과다.”
 
1998년 2월 취임과 함께 정부 조직개편을 하면서 문화체육부를 문화관광부로 이름 바꾼 것도 김 대통령이었다. 유진룡 전 장관은 “그때 공무원들은 ‘문화부’라는 명칭을 선호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직접 문화관광부로 정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왜 그랬는지 알 순 없지만, 아마도 문화와 관광 같은 소프트 산업을 육성하는 게 앞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청와대에서 정책기획수석을 지낸 김성재씨(나중에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는 “디제이(DJ)가 직접 문화관광부라는 작명을 한 건 맞다. 관광산업이 커져야 하는데, 그 중심이 자연이 아니라 문화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말했다.
 
1999년 3월22일 문화관광부 보고회의에 관한 국정노트 내용은, 대통령이 회의를 어떻게 이끌고 어떤 얘기를 하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1999년 3월22일 문화관광부 보고회의를 앞두고 작성한 국정노트 첫 장.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을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을 묻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99년 3월27일 국정노트 두번째 장. ‘21세기는 한국의 세기, 문화는 한국인에 가장 적합’하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1999년 3월22일 국정노트 세 번째 장.
 
문화관광부 99.3.22(토의)1. 문화관광 통한 한국 이미지 개선 위해 어떠한 종목을 택하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성과는? 세계인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해외문화홍보원장)2. 밀레니엄 사업의 00과 추진상황은? 2000년 1월1일 평화 메시지는 세계 각국의 TV 수요가 폭주할 것인데 성과를 낼 수 있는가? (차관) 2000년 1월1일까지 285일. 99년 국정 5대 지표를 기억하는가?3. 문화관광 관련사업 확장과 일자리 확대 위해 금년에 969억 계상. 이의 효과적 사용 위한 대책은? (기획관리실장) 문화예술 44억원, 문화산업 500억, 관광 425억.4. 영상산업 활성화 위한 정부 예산과 민간자본 유치해야 하는데, 이의 전망은? ( 문화산업국장) 애니메이션을 OEM 중심에서 자체 제작으로 구조 발전시킬 방안은? - 98년 9,500만 불 중 OEM 8,000만 불 - 세계 3,500편 중 1,000여편(28.6%). 3위5. 지난해 12.10 고시한 인간문화재 00시의 방침은 어느 정도 진척돼 있는가? 00에 대한 00 지원보다는 경쟁력 있는 당국의 유통, 홍보 지원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대책은? 한국의 먹거리, 볼거리, 살거리, 놀거리의 거리 홍보는?6. 금강산 관광에서 5월부터 외국인 관광객 가능하게 된 것 차질 없는가? 지난해 7월2일 업무보고시 말한 설악산, 경주, 부여, 청주 등 관광 개발의 추진상황은? (관광국장) (대통령 지시)1. 20세기는 공업과 노동력이 국력. 21세기는 지식과 문화가. 앨빈 토플러 ‘노동력보다 사고와 지식의 힘이 시장을 지배하는 New Economy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2. 문화산업은 국가기간산업이 되어야 한다 구분 영화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 음반 출판 국내 2600억 3200억 3000억 5500억 4000억 2.5조 세계 79조 88조 43조 99조 45조 72조3. 문화 관광 실업대책에도 중요한 역할 5월 내 90만 일자리.4. 21세기는 한국의 세기. 문화는 한국인에 가장 적합.5. 관광객 수. 98년 425만, 37억 불 흑자(58 : 21)6. 98년 기준 관광객 유치 (세계 30위), 관광수입 (세계 20위)7. 외화 가득율 87.2%(평상시의 2.47배), 98년 58억 불 수입은 평균 000 165억 불 해당. - 관광객 1명 유치는 21인치 tv 9대 수출 해당. - 5명 유치는 1500cc 자동차 1대 수출 해당 8. 중국 관광객 유치에 치중해야. 일본인 관광객 48%, 중국인 6.4%. 관광인구 5~8천만 최대 시장. 대통령의 노력. 9. 금강산 관광의 중요성. 1. 인적 접촉 2. 북한의 개방 촉진 3. 통일 의식 4. 아시아관광 중심지화 10. 문화관광부의 사명 1. 세계 속의 한국 2. 국가기간산업이자 국위 선양의 중요 전선 3. 민간 평가 22개 부처 중 4위. 소속공무원 평가 11위. 부처 생산성 평가 15위.
 
‘토의’라는 항목은 김 대통령이 회의에서 문화관광부 차관과 관광국장, 문화산업국장, 해외문화홍보원장 등에게 직접 묻고 싶은 질문을 정리해 놓았다. 해외문화홍보원장에겐 ‘문화관광 통한 한국 이미지 개선 성과와 대책’을, 기획관리실장에겐 ‘문화관광은 일자리와 직결되는데 관련 예산을 어떻게 쓸 계획인지’ 묻고 있다. 애니메이션 상품을 주문자 상표부착(OEM)에서 자체 제작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을 묻는 말도 눈에 띈다.
 
‘대통령 지시’라는 항목은 회의를 마무리하면서 김 대통령이 문화관광부 간부들에게 당부할 내용을 담고 있다. 눈여겨볼 건 문화를 보는 디제이의 시각이다. 문화를 지적 활동을 넘어 국가 기간산업으로 보면서, 문화산업이 한국에 매우 적합한 분야라는 점을 강조한다. 디제이는 ‘노동력보다 사고와 지식의 힘이 시장을 지배하는 뉴 이코노미 시대가 도래했다’는 앨빈 토플러의 언급을 인용했다. 이어 영화·애니메이션·비디오·게임·음반·출판 등 분야별로 한국과 세계 시장 규모를 비교하면서 우리 문화산업이 확장할 여지가 매우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유진룡 전 장관은 “문화가 21세기 핵심 산업이라는 인식은 그 당시 문화판에선 조금 있었지만 다른 분야 특히 정치권에선 찾기 힘들 때였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인식,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콘텐츠산업 투자가 오늘날의 한류를 일으킨 기반이라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이유다.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인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결심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김 대통령은 “문화는 흘러야 한다. 그래야 발전한다”고 말했다. 1998년 10월 일본을 국빈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서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겠다는 뜻을 공식화했다.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로 그 날, 김 대통령은 엔에이치케이(NHK)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키시 토시로 서울지국장과 쿠니야 히로코 아나운서 등은 김 대통령에게 조금 걱정스러운 투로 이렇게 물었다. ‘대통령이 결단하신 일본 문화개방에 한국 여론은 반드시 찬성하고 있지 않은 거 같다. 중앙일보 여론조사를 보면 김 대통령의 대일 정책에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문제로 47%가 종군위안부 등 과거사 정리를 들었고, 문화 개방은 6%만이 지지했다. 국민 여론이 지지하지 않는 방향을 지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 정권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 왜 김대중 정권에선 가능한 것인가?’
 
김 대통령 대답은 이랬다. “정부는 국민 여론을 존중해서 따라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국민을 설득도 해야 한다. 이는 일본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한국만을 위한 일도 아니다. 문화 개방은 양쪽을 위해서 필요하며, 문화 쇄국주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에 한국이 문화 쇄국주의를 취해서 중국에서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날 우리나라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거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인 문화를 내 것으로 재창조할 수 있느냐이다. 우리는 중국 문화라는 압도적인 것을 받아들여 재창조한 저력이 있다. 일본 문화가 들어와서 자극을 받으면 결국 우리 문화가 더욱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점에 관해 소신을 갖고 국민에게 이야기하겠다.”
 
쿠니야 아나운서는 곧이어 ‘일본 문화에 폐쇄적인 건 한국 문화산업을 보호한다는 측면이 있었다. 앞으로 한국 문화산업의 보호·육성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물었다. 그 무렵 대중문화 개방이 일본에 훨씬 유리하리라는 건 한·일 언론과 문화계의 공통된 예상이었다. 한국 출판만화 시장은 일본 만화를 베껴 내는 경우가 많았고, 애니메이션 제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일본 영화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비디오로 암암리에 돌아다녔고, 제이 팝(J-pop)은 국내에 매니아층을 형성할 정도였다.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면 한국 문화시장이 일본 문화에 점령되고 문화산업은 큰 타격을 입으리라 여기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쿠니야 아나운서 질문에 김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과거에는 그런 것을 명분으로 개방을 반대했다. 과연 그렇게 해서 얼마나 성공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막아서 국내 1등 해봤자 세계에서 1등 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우리가 문화산업에서 발전하고 이기기 위해서도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 것도, 유럽 것도 받아들이는데 왜 일본 것만 받아들이면 안 되는가. 이런 자세를 가지고 당당하게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낙균 문화관광부 장관이 1998년 10월20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본 대중문화 1차 개방을 발표하고 있다. 이후 4차에 걸쳐 일본 대중문화는 완전히 개방됐다. 윤운식 선임기자
 
디제이가 예견했듯이, 일본 문화가 한국을 휩쓸 것이란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1998년 10월부터 단계적으로 이뤄진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오히려 일본 시장에서 한국 대중문화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한국의 대일 문화콘텐츠 수출액은 2005년 4900억원에서 2017년 1조9000억원, 2021년 2조4600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반면에 일본 문화콘텐츠의 대한국 수출액은 2005년 1050억원 규모에서 2017년 2300억원 정도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한국콘텐츠진흥원 통계)
 
2022년 1월4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한류 엔터테인먼트 수출액 확대 … 2021년 1.3조엔, 5년 만에 두배로 증가’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엔 20년 전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과 역할을 재조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국의 전 세계 콘텐츠 수출액은 2021년 115억 달러(약 15조1700억원)로 5년 전보다 두배 늘었고 일본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 한국정부의 엔테테인먼트 산업 육성책이 성공을 거뒀다. 한국에서는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문화는 21세기의 기간산업이 된다’며 각 대학에 관련 학과를 정비하는 등 콘텐츠 산업 육성에 나섰다. 이런 장기적 관점에서의 인재 육성이 한류의 약진을 지탱하고 있다.”
 
영화배우 김명곤씨(노무현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는 “지금 한류가 김대중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문화산업 육성책 덕분임을 부인할 순 없다. 그때 진보적 문화예술인들도 일본 문화 개방에 거센 반대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디제이가 옳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언제부터, 어떤 생각으로 일본 대중문화를 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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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의 DJ 국정노트
 

박찬수 대기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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