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이들이 죽어간다…‘미국의 침묵’으로 향하는 분노
등록 2023-11-08 07:22수정 2023-11-08 11:06
“러 비판 때와 달라…위선” 꼬집어


미국의 이 같은 태도는 지난해 2월 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 때 러시아에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웠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 때문에 일부 아랍 지도자들은 지난달 21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평화회의 때 “러시아는 인도주의 위반으로 비난받았는데, 이스라엘이 그렇지 않은 것은 (서방 국가들의) 위선”이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미국 국무부 등 실무 부서에서도 미국의 위선을 지적하는 내부 비판이 잇따르는 중이다. 그러자 에후드 바라크 전 이스라엘 총리는 7일 미국 ‘폴리티코’와 한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이 계속되며 “동정적인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잦아들었다”며 “앞으로 2~3주 혹은 그보다 빨리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맹폭에 가자지구 ‘의료 붕괴’… 병원마저 전쟁터 됐다
이스라엘 ‘하마스 근거지’ 지목하며
국제협약으로 보호받는 병원 폭격
극한 상황 내몰린 가자의 의료시설
개전 후 35개 병원 중 16곳 폐쇄돼

지난달 31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집을 떠난 팔레스타인 피란민들이 알쿠즈 병원에 모여 있다. 가자지구=EPA 연합뉴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전쟁은 한 달 만에 가자지구의 의료기관마저 치열한 전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병원을 군사시설로 쓰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팔레스타인은 민간인 대상 무차별 공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궤변이라고 맞선다.
이스라엘방위군(IDF)은 국제인도법의 대원칙인 제네바협약에서 금지한 ‘병원 공격’마저도 불사하고 있다. 이로 인한 고통은 가뜩이나 힘든 생사의 기로에서 사투를 하고 있는 병원 의료진과 환자의 몫이다. 가자지구에 인도주의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단 한 곳도 없는 셈이다.
이미 제 기능 못하는 가자 병원들

3일 가자지구 알시파 병원 인근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괴된 구급차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자지구=AFP 연합뉴스
‘상처에 들끓는 구더기와 소독제로 쓰이는 식초, 휴대폰 손전등을 켠 채로 마취제도 없이 이뤄지는 수술···.’
개전 32일째인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 모든 장면이 오늘날 가자지구 병원의 현실이라며 참상을 전했다.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와 더뉴아랍 등에 따르면 230만 명이 살던 가자지구의 병원 35곳 중 절반가량인 16곳이 현재 문을 닫은 상태다. 지난달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 직후 가자지구의 연료 공급을 중단한 이스라엘이 의료시설은 물론, 구급차마저 폭격하는 등 보복 공습을 벌인 결과다. 이날 알쿠즈 병원과 알아우다 병원도 연료 부족으로 48시간 이내에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고 밝혔다.
아직은 운영 중인 병원도 제 기능을 못 한 채 최소한의 치료만 제공한다. 전기와 식수, 의약품 등이 바닥나면서 마취제는 물론, 깨끗한 물조차 없는데 환자는 매일 밀려드는 아비규환 속에서 의료진은 매 순간 누구를 죽이고 살릴지를 결정한다.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 나세르 병원의 의사 모하메드 칸딜은 “생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환자를 고른다”며 “쉬운 결정은 아니기에 죄책감이 크다”고 NYT에 말했다. 병원은 가자지구 북부에 남은 이들에겐 ‘최후의 피란처’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왜 병원을 노리나

임시로 만든 백기를 든 팔레스타인 소년이 6일 어머니와 함께 가자시티 알시파 병원 인근에 도착하고 있다. 가자시티=AFP 연합뉴스
“하마스는 병원에 숨은 ‘전염병’이다.”
IDF는 기자회견뿐 아니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가자지구의 의료 붕괴를 노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가자지구 최대 병원인 알시파뿐 아니라, 카타르와 인도네시아가 각각 지원하는 병원들도 하마스의 지휘본부 또는 보급소로 지목했다. ‘이스라엘 군인 권리를 위한 의사회’조차 전날 성명에서 “알시파 병원 폭격은 합법적 권리”라며 “테러 집단 근거지는 전쟁에서 보호받는 병원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여론전 목적은 뚜렷하다. 의료기관이 ‘유해한 행위’에 쓰인다면 제네바협약의 보호 의무 대상에서 제외되는 만큼, 사망자 급증과 함께 커진 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마하려는 시도라고 더뉴아랍은 짚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주장을 ‘거짓’이라고 반박하는 곳은 하마스만이 아니다. 가자지구의 각 병원 관계자, 인도주의 단체 등도 “사실이 아닌 주장”이라고 해명했다. 하마스 대변인 오사마 함단은 “(IDF가 공개한) 병원 인근 구멍은 지하 터널이 아니라 연료 공급용”이라며 “가자지구 병원을 방문해 진실을 확인해 달라”고 유엔에 요청했다. 가자지구 인도네시아 병원을 운영하는 인도네시아 의료긴급구조위원회(MER-C)도 “병원의 유일한 목적은 환자를 돌보는 것으로, 어떤 조직과도 연계돼 있지 않다”고 항변했다.
특히 전쟁에서 의료시설 공격을 용인하는 선례가 생기는 건 위험하다는 지적이 많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가자지구 담당 윌리엄 숌버그는 “의료시설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면 의료시설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인류가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 국무부 내 "바이든, 이스라엘 공개 비판하라" 연판장
중동 근무경험자가 주도, 이스라엘 편애 비판
"팔' 민간인 학살 이스라엘에 면죄부 줘선 안돼"
"미국이 편향되고 부정직하다는 인식 확산 우려"
워싱턴주 항구에선 이스라엘 무기 선적 저지 시위
유엔 총장 "가자, 아이들 무덤"…즉각 휴전 촉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이스라엘 편애 정책이 '내우외환'에 처했다. 아랍‧중동 국가들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날로 거세지는 와중에, 정작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해야 할 국무부 내 외교관들의 반발도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지난달 18일 정치군사국에서 대외 무기 이전 담당으로 11년 일했던 핵심 간부가 전격 사직했고, 한 외교관이 2일 "가자 주민 대량 학살 공범"이라고 바이든을 직접 비난한 데 이어 국무부 중간 간부 이하 다수의 외교관이 연대 서명한 '반대 메모'를 통해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 직후부터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며 '팔레스타인 민간인 집단 학살' 행위에는 눈을 감아온 바이든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미 외교관들, 휴전지지와 이스라엘 공개 비판 요구
민간인 폭격‧정착민 범죄‧과도한 무력 사용 적시
미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가 6일 '미국 외교관들이 유출 메모에서 이스라엘 정책을 질타하다'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자사가 입수한 '반대 메모'를 보면, 국무부 안에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비롯해 바이든의 중동 정책에 대한 "내부 분노"를 알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 메모에 따르면 서명 외교관들이 내건 핵심 요구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이 '휴전'을 지지하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군사 전술과 팔레스타인인 대우와 관련해 지금처럼 물밑으로만 거론하지 말고 "공개적인 비판"을 하라는 주문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공개 메시지와 물밑 메시지 간의 틈이 "미국이 편향되고 부정직한 행위자라는 지역 대중의 인식에 이바지해 최악의 경우 전 세계에 걸친 미국의 이익에 해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정당한 군사 목표물로 공격 작전을 제한하는 데 실패한 것과 같은 이스라엘의 국제 규범 위반행위를 공개적으로 비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외교관들은 "이스라엘이 (유대인) 정착민의 폭력과 토지 불법 강탈을 지원하거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과도한 무력을 사용할 때, 우리는 그것이 미국의 가치에 위배된다고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이스라엘이 면죄부를 지닌 듯이 행동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국무부 내서 바이든 정책 '반대 메모' 다수 회람
"바이든 중동 접근법, 외교관 신뢰 붕괴 보여줘"
폴리티코에 따르면, 이 메모에는 '민감하나 기밀은 아님'이란 마크가 있었으며 국무부 안에서는 이와 비슷한 종류의 메모 여러 개가 서명받기 위해 회람됐다. 이는 미국 외교관들 사이에서 바이든의 중동 위기 접근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앞으로 내부 이견이 심화되면 바이든의 중동 정책 입안이 더 어려워질 것으로 폴리티코는 내다봤다. 문제의 메모는 중동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두 명의 중간 간부가 주도해 작성했다.
외교관들은 또한 이 메모에서 하마스 공격에 대한 공정성을 실현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정당한 권리와 의무"(자위권)를 인정하지만,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으로 "지금까지의 인명 피해 규모는 용납할 수 없다"고 적었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이-팔 전쟁 한 달째인 6일 현재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망자는 어린이 4104명을 포함해 최소 1만22명로 집계됐다. 하마스 공격에 따른 이스라엘 사망자 1440명의 약 7배에 달한다. 같은 기간 점령지역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도 최소 152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숨졌다. 이들은 그런 막대한 규모의 민간인 사망자에 대한 미국의 "관용"은 "우리가 오랫동안 대변했던 규칙 기반 국제질서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면서 그런 행동들과 관련해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쪽 모두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최근 들어 바이든 팀은 민간인 보호의 중요성과 국제법 준수를 강조하는 공개적 메시지를 내기 시작했지만, 대체로 이스라엘의 행동에 대한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비판은 여전히 피하고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베단트 파텔 국무부 부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마스가 테러 공격을 할 수 없도록 스스로 방어하고 안보를 지킬 권리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라면서 "동시에 우리는 이스라엘에 테러리스트와 팔레스타인 주민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도 직접 제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팔' 1만 명 사망에도 3.2억 달러 무기 제공 승인
워싱턴주 항구서 이스라엘 무기 선적 저지 시위
맨 먼저 불을 댕긴 사람은 국무부 정치군사국의 의회·대외 담당 과장이던 조시 폴이다. 폴 전 과장은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가 뻔히 예상되는데도 정밀유도탄 등 대규모 살상무기를 이스라엘에 제공하면서도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바이든 행정부의 '이율배반적' 정책과 문제 제기를 그대로 묵살하는 상부의 강압적 태도에 '좌절'해 국무부를 떠났다. 그는 국무부에 보낸 사직 편지에서 이-팔 사태에 대한 바이든 행정부와 의회의 대응과 관련해 "확증편향과 정치적 편의, 지적 파산, 관료적 타성에 기반한 충동적 반작용"이라며 "한쪽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장기적으론 양쪽 주민 모두의 이익에 파과적이며 나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저지른 같은 실수들을 반복하고 있는 게 두려웠다"고 썼다. 폴은 바이든 행정부는 인권 침해나 대규모 민간인 희생 '가능성'이 예상될 때 무기 이전 불허란 손수 만든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이스라엘에 살상 무기를 제공했다고 비판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은 6일 국무부가 3억2000만 달러(약 4000억 원) 상당의 비유도 폭탄을 보다 정밀한 GPS 유도 무기로 바꾸는 키트용 장비의 판매를 승인하고 그 내용을 담은 서한을 최근 미 상·하원 외교위원회에 보냈다. 이와 관련해 이날 미국 워싱턴주의 항구도시 터코마에서는 100명이 넘는 시위대가 항구에 모여 이스라엘 지원용 무기 등 군수물자 선적을 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폴 전 과장에 이어, 국무부의 중동 담당 실비아 야쿱은 2일 'X'(옛 트위터) 글에서 바이든을 향해 "당신은 무고한 가자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에 상당한 추가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며 "당신은 대량 학살 공범"이라고 주장했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유엔 총장 "가자, 아이들 무덤"…즉각 휴전 촉구
바이든, 네타냐후와 통화…일시적 교전 중지 요구
한편,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매일 수백 명의 아이들이 죽거나 다치고 있다. 가자지구가 아이들의 무덤이 되고 있다"며 즉각적인 휴전을 호소했다고 알자리라 방송이 전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이스라엘군은 "병원과 난민캠프, 이슬람사원, 교회, 그리고 대피소를 포함한 유엔 시설들을 공격하고 있다"며 "벌어지고 있는 파국적 상황을 감안할 때 한시바삐 인도주의적 휴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마스에 대해서도 민간인의 인간 방패 사용을 중단하고 모든 인질의 즉각적이고 조건 없는 석방을 촉구했다.
'내우외환'에 처한 바이든 대통령은 급기야 이날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통화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이스라엘에 급파해 네타냐후를 설득하려 했지만, 별 성과가 없자 직접 나선 것이다. 백악관에 따르면, 바이든은 이스라엘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재확인 한 뒤 △인도적 차원의 교전 일시 중지 △팔' 민간인 피해 최소화 △가자 반입 구호 물품 확대 △서안지구 유대 정착민의 폭력행위 처벌 등을 촉구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아랍권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전면적 휴전 반대를 재확인했다. 네타냐후는 이날 미국 ABC 뉴스 인터뷰에서 인질 석방이나 구호품 전달 등을 위해 "전술적 잠깐의 중지"를 검토할 것이지만 "일반적 휴전은 없다"고 못 박고 전쟁 이후 가자지구에서 "무기한 전반적 안보를 책임질 것"이라고 말해 국제사회의 반발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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