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수괴'가 쓴 육사 호국비, 이건 어쩔 셈인가
육사 교정 호국비도 박정희 친필 휘호...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케케묵은 이념 논쟁 벗어나야
23.08.29 09:48l최종 업데이트 23.08.29 11:14l
▲ 이종섭?국방장관이 21일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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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에 공산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느냐에서 (흉상 철거 논란이) 시작됐다."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독립운동가 5인의 흉상 철거 논란에 대한 이종섭 국방부 장관의 답변이다. 이 장관은 홍범도 장군의 1920년대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 때문에 철거와 이전 논란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이 장관의 논리대로라면 박정희의 기념물도 모두 철거해야 한다. 28일 국방부 브리핑에서도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 전력이 지적됐다.
기자 : "홍범도 장군의 경우 1920년대 소련 볼셰비키당 가입한 게 좀 문제가 되는 것 같은데요. 육사 내 보면 1920년대도 아니고 심지어 남북한이 무척 치열한 이데올로기 전쟁을 하고 있을 때 해방정국에서 남로당 국내, 심지어 총책을 맡아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사법적으로 사형 판결까지 받았던 분의 기념물도 다수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이 부분도 기념물 재정비 사업을 하면서 한꺼번에 정리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 부분도 진행 중인가요?"
국방부 대변인 : "그 부분은 제가 좀 확인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그건 아직 확인을, 파악을 못했는데 그 부분은 좀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기자 : "아니, 이게 1920년대에도 문제가 되는데 해방정국에서 심지어 국내 조직 수괴로 사형 선고받은 사람의 기념물이 엄청나게 많은데, 다 아시잖아요, 어떤 건지, 누구의 것인지. 그런데 이 부분을 검토 안 한다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국방부 대변인 : "제가 말씀드렸지만 공산당 입당 이후에 관련된 활동, 또 코민테른과의 연계성, 또 여러 가지 제가 지금 역사적으로 논란이 되는 것들을 다 언급하기는 그렇지만 그런 부분에 대한 따져봐야 될 부분이 있다는 것이고요. 지금 어떤 분을 의미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유민주주의 수호... 가치를 수호하고 조국 발전에 기여하셨던 분들과는 또 다르게 좀 봐야 될 부분이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로당 수괴였던 박정희 친필 휘호로 만든 육사 '호국비'
▲ 육사 교정에 세워진 호국비. 1977년 박정희가 직접 쓴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는 글씨로 만든 화강암 비석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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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화랑대 캠퍼스에는 거대한 화강암 비석으로 만든 '호국비'가 있다. 1977년 3월 29일 제33기 졸업식에 앞서 박정희가 제막한 탑이다. 비석 앞면에는 박정희의 친필 휘호인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정승화 중장의 건립문이 있는데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정권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이름을 놔둘 수 없어 지웠다가 후에 다시 썼다.
호국비의 글씨를 쓴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 해방 후에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를 나와 국군으로 복무했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 특무대에 체포됐다. 당시 군은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군대 내 좌익 전력자 숙군(군부 숙청) 작업을 진행했는데, 남로당에 가입했던 박정희 당시 소령도 적발됐다.
1949년 군사법정에 선 박정희는 1심 재판에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심 재판에서는 구체적으로 박정희의 범죄 사실이 나온다. 박정희의 죄명은 '반란기도죄'이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남로당에 가입해 군 내부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반란을 기도했다고 나와 있다. 당시 판결문 첫째 장에 박정희의 이름이 나올 만큼 그는 반란군 수괴로 꼽혔던 인물이다.
이 판결로 박정희는 현역 육군 소령에서 파면됐다가 백선엽을 주축으로 한 만주군관학교 출신 선배들의 도움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겨우 현역 군인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남로당이 군인 박정희를 몰락시켰다면 김일성의 6.25 남침이 정치군인이자 독재자 박정희를 탄생시킨 1등 공신이라 할 수 있겠다.
박정희 좌익 전력 때문에 생긴 혁명 공약 1호 '반공을 국시로'
박정희의 좌익전력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김종필 전 자민당 총재는 5.16 쿠데타 이후 혁명 공약 제1항이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였던 이유는 박정희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김 전 총재는 2015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혁명공약을 쓸 때 내 머릿속에는 혁명의 지도자인 박정희 장군의 제일 아픈 데가 뭐냐. 빨갱이라고 생각하는 주위 사람들 아니냐. 이것들을 불식하려면 한마디 해야겠다. 그래가지고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라는 내용을 6개 공약 가운데 첫 번째로 집어넣었다"고 밝혔다.
▲ 1963년 10월 13일 동아일보 호외, '박정희 무기언도'가 크게 나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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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좌익전력은 선거 때마다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이 호외로 나오기도 했다. 박정희가 정권 내내 반공을 앞세운 것은 그에게 칠해진 공산당 전력을 감추기 위한 생존 전략의 일부였다.
역대 정권은 역사를 자기나름대로 해석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건국절을 주장했고, 박근혜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했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이런 자의적인 역사 해석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전 정부 탓'을 넘어 그 흔적과 정당성마저 죽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공산당을 내세울수록 박정희의 좌익 전력만 더 드러나는 동시에 국민만 케케묵은 이념 논쟁의 수렁에 빠져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덧붙이는 글 | 독립언론 '아이엠피터뉴스'에도 게재됐습니다.
"홍범도 장군, 동포 도우려고 소련공산당 입당"
[이 사람, 10만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신흥무관학교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 ①
23.08.31 05:49l최종 업데이트 23.08.31 09:01l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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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둘째 치고 역사 자체를 과거로 회귀시키려는 대단히 반역사적이고 단세포적인 사고입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80.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 최근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추진하는 윤석열 정부를 향해 일갈한 말이다. 김 전 관장은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을 문제 삼아 흉상 이전을 추진하는 역사인식의 저변에는 "파시즘"이 도사리고 있다고도 분석했다.
지난 28일 경기도 남양주시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회원인 김 전 관장을 만났다. 그는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등에서 반독재 언론운동을 해왔으며 대한매일 주필을 지낸 언론인이다. 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친일문제 연구가이자 독립운동가 등 50여명의 삶을 고찰한 평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봉오동 전투는 민족의 통렬한 승리... 이를 육사에서 걷어내겠다?"
▲ 김삼웅 선생이 집필을 할 때 사용하는 돋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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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평전을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조망해온 김 전 관장, 1980년 군부독재에 의해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데도 3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선전포고를 한 '역사전쟁'에 대해 할 말을 하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과거로의 회귀, 즉 '반동'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역사에서 탈선한 "궤도이탈 정부"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최근 논란이 되는 홍범도 장군 흉상이전 문제. 지난 2019년에 펴 낸 '홍범도 평전'(레드우드)을 카자흐스탄에 있던 장군의 묘소에 헌정했고,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승전일을 국가 기념일로 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던 그였기에 이 논란을 바라보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김 전 관장은 "임진왜란과 동학혁명 때, 또 국치의 과정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제의 만행과 이로 인한 희생을 두고 볼 때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거의 유일하게 거둔 통렬한 승리였다"면서 "이런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걷어내겠다는 무지한 자들이 국무위원이고 장관인 게 참 개탄스럽고 통탄스럽다"고 성토했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였다.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크고 빛나는 승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청산리 대첩도 그해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의 만주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만주 지린 성 청산리 일대에서 대파한 전투였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동포 요청으로 동포 보호하려고"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자택에는 장서 3만7천여권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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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관장은 흉상 이전의 빌미로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이력을 문제 삼은 정부여당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1920년 청산리대첩 이후 일본 정규군에 쫓겨서 소련과 만주의 국경지대에 홍범도 장군을 따랐던 병사들, 현지에 계신 동포들이 황무지를 개간해서 논이나 밭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추수를 할 때쯤이면 소련의 관리들이 나타나서 '불법 경작한 것'이라면서 약탈했습니다. 그 때 동포들이 장군에게 소련 공산당에 가입해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니까 공산당 힘이 막강했죠. 결국 농민을 보호하려고 공산당에 가입한 겁니다."
김 전 관장은 "그 뒤 스탈린이 소련을 지배했고, 17만 명의 조선족과 고려족들이 중앙아시아로 쫓겨났는데, 홍범도 장군도 공산당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며 카자흐스탄 쪽으로 가서 극장 수위로 지냈을 정도였다"면서 "공산당 가입이라는 한 줄기 사실만으로 장군의 삶을 통째로 부정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 전 관장은 또 "홍범도 장군의 민족주의 성향은 만주나 러시아에서 활동할 때 단군기록과 우리 고대사 기록 등을 모은 자료를 편찬하는 데 돈을 지원하는 데에서도 드러났다"면서 "민족에 대한 장군의 막중한 기여를 무시하고 육사에서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를 넘어서, 이런 자들이 국토방위 중책을 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정율성 역사공원'에 대한 파상공세... "무지의 소치"
최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필두로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인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에 대한 정부여당의 파상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김 전 관장은 "그의 행적에서 우리가 다 납득할 수는 없다"면서도 "형제들과 더불어서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중국 망명시에도 의열단 활동을 하면서 항일투쟁에 나섰던 분"이라고 평가했다.
김 전 관장은 이어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지금 중국의 군가는 중국 국경 수립일에 7억~8억 명의 중국인민이 함께 부르는, 세계에서 같은 시각에 가장 많은 사람이 부른다는 노래를 정율성 선생이 만들었다는 점"이라며 "단지 북한 쪽의 편을 들었다는 단세포적인 사례를 가지고 역사에 큰 기여를 훼손시킨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라고 일축했다.
김 전 관장은 노무현 정부 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백선엽 장군의 친일 행적을 낱낱이 살펴보기도 했다. 따라서 최근 국가보훈부가 백선엽 장군의 현충원 안장기록에서 친일 행적 문구를 지운 데 이어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 자리에 백선엽 흉상을 설치하려는 육사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김 전 관장은 특히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서도 백선엽의 친일 행적 자료가 기록돼 있다"면서 "백선엽이 일본어로 낸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만주군 시절에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러 다니면서 탄압한 사실을 인정했지만 한 번도 반성한 적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김 전 관장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시기에도 조선독립군들은 중국의 해발 3000미터가 넘는 태항산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면서 "현 정부가 이런 식으로 친일을 옹호하고 독립운동을 폄훼한다면 지하에 계신 애국지사들이 통곡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의 이중 잣대, "박정희 남로당 경력엔 왜 침묵하나"
▲ 김삼웅 선생이 서재에서 책을 꺼내들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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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현재 진행되는 윤석열 정부의 '역사전쟁' '이념전쟁'의 주요 흐름은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 흔적을 지우고, 그 자리에 '친일 행적'을 말끔하게 세탁한 친일부역자들을 세우는 작업이라는 우려다.
김 전 관장은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는 좌파냐, 우파냐,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 입만 열면 이야기하는 헌법적 가치"라면서 "독립운동을 대한민국 출발의 근원으로 여기는 헌법에도 명시돼 있고, 대통령 선서를 할 때에도 평화통일 등을 언급했는데, 이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친일 행적 문제에 골몰하는 그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김 전 관장은 윤석열 정부의 이중잣대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가령 독립운동 역사에서의 사회주의를 배격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남로당 경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태도를 꼬집은 것이다.
"윤 대통령이 그렇게 반공주의에 철저하고 공산당에 대해서는 용납할 수가 없다면 왜 전직 대통령인 박정희가 남로당 조직책을 맡은 사실에는 눈을 감습니까? 조직책은 막중한 역할이었지요. 그래서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기념관을 짓겠다고 하고 남로당 행적에 비교할 수 없이 약소한 이력을 가진 사람을 뿌리째 거부하는 이중적 태도, 선택적인 선호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독립운동을 대한민국 출발의 근원으로 여기는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반동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일제치하의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의 큰 조류"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가 부정하고 있는 일제치하에서의 사회주의는 어떤 역사적 맥락으로 해석하고 평가해야할까? 김 전 관장은 "일제 치하에서 사회주의는 어찌 보면 그 시대의 산물"이라면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17년 10월에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중국을 포함해서 동북아시아, 일본까지도 사회주의 공산주의세력이 많이 뻗쳤어요. 1919년 4월 11일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도 의정원 의원 39명 중 사회주의 방향으로 국체(國體)를 정해야 한다는 토론도 있었죠. 러시아의 수반 레닌이 독립기금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김 전 관장은 "사회주의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하나의 부품, 조류라고 볼 수 있고 독립운동, 항일운동의 일맥이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1949년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 기여한 분들도 아닌데, 윤석열 정부는 마치 이분들이 현역 공산주의분자들인 것처럼 매도하면서 우리 독립운동의 일각을 허물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전 관장은 윤석열 정부의 역사전쟁 배경을 묻는 질문에 대해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면서 독일 나치시대에 저항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한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인용했다.
"파시즘을 겪었던 사람들이 파시즘 체제에 편입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졌다."
김 전 관장은 "윤석열 대통령이나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법조인들, 검찰 출신들이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비리와 국정농단 등을 수사하면서 파시즘에 동화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있다"면서 "지금 보여주는 윤석열 정부의 행태와 현상은 본인들이 부정할지는 몰라도 파시즘 초기에 들어선 것 같아 국가적으로 대단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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