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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고엽제 매립, 한국 증언대 기꺼이 서겠다”

by 무궁화9719 2022. 9. 29.

“고엽제 매립, 한국 증언대 기꺼이 서겠다”

2011. 5. 22.

» 스티브 하우스가 지난 13일(현지시각)

미 현지언론에 고엽제 매립을 증언하고 있는 모습.

미 <케이피에이치오 티브이> 화면 갈무리

 

“고엽제 매립, 한국 증언대 기꺼이 서겠다”
전 주한미군 하우스 인터뷰

 

등록 :2011-05-22 20:36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녹슨 드럼통 250개 묻어
이후 30~40개씩 추가 매립‘

’간기능 이상 등 평생 병마
“후유증 갈수록 심각해져
긴박한 위험 알리게 됐다”

 

1978년 어느 봄날, 경북 왜관의 미군기지 캠프 캐럴에서 중장비 기사로 일했던 미 육군 상병 스티브 하우스는 상관의 명령을 받고 굴착기로 땅을 팠다. 이어 그는 동료들과 함께 손수레로 창고에 있던 드럼통을 그 구덩이에 묻었다. 55갤런(208ℓ)들이 250개였다. 드럼통 겉면에는 ‘화학물질, 에이전트 오렌지. 1967 베트남 공화국’이라고 쓰여 있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독극성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들은 옮기면서 드럼통에 고엽제가 들어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심각성은 미처 몰랐다.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그들은 작업했다.   

 

그날 이후, 하우스의 인생은 휘어졌다. <한겨레>는 20일(현지시각)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캠프 캐럴에 고엽제를 묻었다고 증언한 퇴역 주한미군 하우스(54)로부터 그의 호소를 직접 전해들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증언대에 기꺼이 설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하우스가 기억하는 기지 뒤쪽 헬기장 근처인 매립지는 한쪽 길이가 축구장 한쪽 라인에 해당할 정도의 엄청난 크기였다. 구덩이는 8m 안팎 깊이로 팠다. 그는 “이곳에 처음 2주일간 55갤런들이 드럼통 250개를 파묻었고, 이후에도 30~40개씩의 드럼통을 가을까지 계속 매립했다”고 말했다. 중장비 기사 4명, 트럭 운전사 2명 등 모두 6명의 병사가 그 일을 했다고 밝혔다. 

 

얼마 뒤, 작업에 참가했던 동료 리처드 크차드 크레이머의 다리 감각이 마비돼, 서울의 미군병원으로 후송됐다. 또다른 병사인 로버트 트래비스는 온몸에 피부발진이 퍼졌다. 그리고 하우스는 마른기침이 끊이지 않고, 간기능이 약화돼 금세 피로를 느꼈다. 그때 그는 21살이었다. “군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수도 없이 찍었지만, 의사들은 문제가 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또 “처음엔 매립지의 구덩이를 완전히 덮어버리지 않았는데, 한국을 떠나기(79년 2월) 직전 구덩이 빈칸에 새들이 죽어있는 걸 보고 상관에 보고하자 구덩이를 덮어버리라고 명령했다”고도 말했다.

 

1979년 12월 제대한 그는 고향 미시간으로 돌아가 직장을 잡고, 결혼도 했다. 그러나 잦은 기침과 간 비대증은 계속 따라다녔고, 여기에 당뇨, 신경장애, 각종 합병증이 더해졌다. 그는 평생 원인모를 병마와 싸워야 했다. 크레이머는 다리, 등, 목 관절염과 눈병이 낫지 않고, 트래비스의 피부발진도 아직 계속되고 있다.

 

하우스는 제대 이후에도 계속 보훈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2008년 무렵, 건강악화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됐고, 해고됐다. 그는 따뜻한 곳을 찾아 애리조나로 이사했다. 어느 의사도 정확한 병의 원인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보훈처에 ‘고엽제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보훈처는 “미군 고엽제 피해자는 1968년 이후에는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이를 부인했다. 그러던 중, 그는 올해 보훈병원의 한 의사로부터 자신의 증상이 “고엽제 때문인 것 같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었다.  

 

하우스는 자신이 이 문제를 지금 밝히는 이유에 대해 자신의 후유증이 점점 심각해져 한국인들에게 긴박한 위험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의한 것이라며, “5년 전부터 계속 이야기했으나,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파묻은 드럼통이 녹슬고 삭아, 안에 있던 고엽제가 흘러나와 지하수로 스며들 수 있다. 지금이 1978년 그때보다 더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명령에 의한 것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길은 늦었지만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내가 죽기 전에 이 문제를 분명히 확인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우스는 한국 국회 등이 진상조사를 원할 경우, “기꺼이 가서 증언대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구글 지도로 색칠까지 해가며 매립지점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는 “한국에 근무하면서 아름다운 나라인 한국과 한국인들을 사랑하게 됐다. 그런데 이런 일에 내가 관여된 것에 대해 한국인들에게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거듭 사과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스티브 하우스 “고엽제 묻은 직후 간기능 이상 생겨”

등록 :2011-05-21 16:30수정 :2011-05-22 14:53

 
대구에 250드럼 매몰 증언한 당시 주한미군 인터뷰
“구덩이에서 새들 죽어…한국인 위해 기꺼이 증언할 것”

 

33년 전인 1978년, 경북 왜관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 캐럴에 고엽제를 묻었다고 증언한 퇴역 주한미군 스티브 하우스(54)는 자신이 이 문제를 지금 밝히는 이유에 대해 자신의 고엽제 후유증이 점점 심각해짐에 따라 한국인들에게 긴박한 위험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의한 것이라고 20일(현지시각) 밝혔다.

 

현재 애리조나주에 살고 있는 하우스는 이날 <한겨레>와의 전화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밝히고, “(미국) 보훈처는 한국에 고엽제를 묻었다는 사실을 계속 부인했다”며 “명령에 의한 것이지만, 한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길은 늦었지만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이 문제를 밝히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내 병이 고엽제 때문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올해 병원에서 내 증상이 고엽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기독교인으로서 양심의 문제”라고 말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33년이 지난 일을 이제와서 폭로하는 이유가 뭔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매립된 고엽제의 위험성을 누군가는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이다. (고엽제로 인한) 나의 후유증이 점점 심각한 단계에 이르면서 사람들에게 위험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당신의 증상이 어떤가?

“간이 심각할 정도로 부었고, 간 기능이 약해졌다. 이로 인해 면역력이 크게 떨어졌다. 나는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하는 단계에 왔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합병증을 갖고 있다.”

 

-간 기능 이상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고엽제 매립 얼마 뒤부터, 체중이 늘고, 피로를 빨리 느끼고, 마른 기침이 계속됐다. 그때 나는 21살이었다. 엑스레이를 여러 번 찍었지만, 의사들은 내게 어디가 잘못됐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미 보훈처는 ‘고엽제 매몰’ 부인

 

-당신의 증상이 고엽제 때문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나는 올해 보훈병원의 한 의사로부터 당뇨병과 신경장애가 아마도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에 노출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이전에 미 국방부나 보훈처에 당신의 후유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은 없나?

“5년 전에 보훈처에 내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보훈처 당국은 내 질환이 ‘에이전트 오렌지’ 때문이라는 점을 지금도 부인하고 있다.”

 

-군에서는 언제 제대했나?

“1978년 2월부터 1979년 2월까지 1년간 캠프 캐럴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1979년 2월 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미시간에서 직장에 다니고 결혼도 했다.”

 

-33년 전 고엽제 매립이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꿨나?

“나는 오래전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내 간 기능은 지금 매우 약해져 있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이 문제를 분명하게 확인하기를 바란다.”

 

-당신 외에 다른 사람들도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나?

“당시 나와 함께 고엽제 매립작업을 했던 리차드 크래머는 다리 감각이 마비돼 걷지 못하게 됐다. 그는 당시 서울로 이송됐지만, 미군 당국은 우리들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로버트 트래비스는 나처럼 잦은 기침과 피부 발진으로 고통받고 있다.”

 

 

다른 병사들도 다리 마비, 잔 기침 등 이상증상

 

-당시 매립 작업에는 몇 명의 군인 동원됐나?

“4명의 중장비 기사, 그리고 2명의 트럭 운전사 등 모두 6명이었다.”

 

-매립 작업이 비밀리에 진행됐나?

“우린 단지 폐기물을 처리할 구덩이를 파라는 명령만 받았다. 우리는 그 구덩이에 들어가는 게 뭔지 전혀 듣지 못했다.”

 

-매립 당시에도 그것이 고엽제라고 생각했나?

드럼통들이 작업장으로 운반되고서야 파묻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았다.”

 

-분량은 어느 정도인가?

“매립지 면적이 축구장 크기만 했다. (4~5월께) 처음 2주일간 55갤런(208ℓ)들이 드럼통 약 250개를 파묻었고, 그 후 이따금 약 30~40개씩의 드럼통을 가을까지 계속 매립했다.”

 

-매립지의 정확한 위치를 지금도 기억하나?

“기지 뒤쪽 헬기장 근처다. 구글 어스로 그 지점을 보면 헬기장 부근에 병원이 2개 있다.”

 

-매립 이듬해에 매립지에서 흘러나온 물질이 빗물에 쓸려 내려가면서 인근의 물고기와 새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매립지의 구덩이를 완전히 파묻지 않았다. 구덩이 빈칸에 새들이 죽어있는 걸 봤다. 내가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자, 구덩이를 파묻으라고 명령했다.”

 

-한국에 와서 국회 등에서 증언할 용의가 있나?

“나는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아름다운 나라인 한국과 한국인들을 사랑하게 됐다. 그런데 이런 일에 내가 관여된 것에 대해 한국인들에게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가서 증언대에 서겠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하우스 씨 "고엽제 증언자 계속 나오고 있다"

김찬 입력 2011.05.25. 09:32 수정 2011.05.25. 09:32    

  

첫 폭로 하우스, 매립 관련 사진 공개… “다이옥신 폐기 명령 있었다”

 

주한 미군 기지 캠프 캐럴에 고엽제가 든 드럼통을 파묻었다고 처음 폭로했던 전 주한 미군 병사 스티브 하우스는 24일(현지시간) “고엽제 파장이 확산되면서 고엽제 매립 사실을 증언하는 미군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하우스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1978년 당시 캠프 캐럴 내 매립 작업에 동원된 중장비 사진 등 일부 옛날 자료를 공개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미군 당국의 조사가 진행되는 만큼 추가로 증언하겠다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그들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고엽제 매립 의혹을 제기했던 로버트 트래비스(웨스트버지니아 거주)와 리처드 크레이머(일리노이 거주)에 대한 미군 당국의 면접 조사도 곧 이뤄질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날 고엽제 의혹과 관련해 은행에 보관해 왔던 옛날 사진 2장을 공개하면서 “작업 현장 사진 등 중요한 것은 확인 작업을 위해 어제 면담 때 미군 당국에 건네줬다.”고 밝혔다. 한편 1977년부터 1978년까지 미 육군 2사단 사령부에서 복무한 래리 앤더슨은 2009년 8월 전직 주한 미군 인터넷 사이트인 ‘한국전 프로젝트’에 올린 글을 통해 상부로부터 다이옥신 제초제 매립 지시를 하달받았다고 주장한 것으로 24일 드러나는 등 새로운 의혹들이 속속 알려지고 있다. 앤더슨은 “그 무렵 2사단 전체 창고에 저장돼 있던 모든 다이옥신을 없애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며 “우리 부대만이 아니라 전 부대에 내려진 명령이었다.”고 주장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고엽제 묻었다는 미군 4명 더 찾았다”

[중앙일보] 입력 2011.05.24 01:20 / 수정 2011.05.24 07:07

 

첫 폭로 전 주한미군 하우스

22일 본지와 전화 인터뷰한 스티브 하우스.

 

경북 칠곡군 왜관에 위치한 미군 기지(캠프 캐럴) 내 고엽제 매립 의혹은 스티브 하우스(Steve House·54) 등 전 주한미군 병사 3명으로부터 비롯됐다. 이들의 주장이 16일(현지시간) 미 애리조나주 피닉스 소재 한 민영방송에 소개되면서다. 그는 “1978년 캠프 캐럴 근무 당시 동료들과 함께 기지 뒤편에 구덩이를 판 뒤 고엽제가 담긴 55갤런(208L)들이 노란색 드럼통 수백 개를 묻었다”고 말했다. 그는 78년 2월~79년 2월 1년간 캠프 캐럴에서 근무했다.


 애리조나주 피닉스 근처에 살고 있는 하우스는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보도 이후 당시 고엽제 매립 사실을 증언하는 미군 장교 1명과 사병 3명을 추가로 찾아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 정부의 조사에 적극 협력할 것이며, 한국 방문 용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78년 4~5월께 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해 축구장 크기의 거대한 구덩이를 파라는 명령을 받았다. 드럼통 겉면에 ‘베트남 지역’과 고엽제(콤파운드 오렌지)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처음 2주간 드럼통 약 250개를 파묻었다. 이후 가끔씩 30~40개씩의 드럼통을 가을까지 계속 묻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78년 이전에도 고엽제가 매립됐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한국과 미국 정부가 협의를 통해 조사 시기를 더욱 넓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우스는 “고엽제 매립을 주장하게 된 건 기독교인으로서 죽기 전에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고 했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이날 오전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마산리에 도착한 스튜어드는 옛 마을 이름인 '방고지'를 이내 기억해냈다. "우리가 나무다리를 설치해줬던 곳이에요. 저 산에는 지금처럼 풀이 없었어요. 저쪽으로 하천이 흘러 임진강으로 이어졌죠."

그는 이곳과 캠프 피터슨에서 한 달에 한 번꼴로 고엽제를 살포했다고 밝혔다. 그는 "담장에서 100m 정도 길을 따라서 고엽제를 뿌렸다"며 "손 분무기나 차량용 트레일러에 달린 펌프를 이용했고 매번 살포가 끝나면 샛강에서 분사장비를 씻고 잔량은 흘려보냈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에는 평생 방고지 마을에서 산 주민 김남영(76)씨도 찾아왔다. 그는 "돌이 지난 아들이 소아마비를 앓다가 18살 때 심장마비로 숨졌다"며 "당시 미군들이 고엽제를 뿌린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스튜어드는 "고엽제에 노출된 마을사람들이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며 "고엽제의 맹독성을 알았다면 살포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그동안 미군은 '식물통제계획 1968'에 따라 68~69년 비무장지대에서만 고엽제가 살포됐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마산리는 비무장지대에서 약 8㎞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스튜어드는 "당시 미 육군 공병 제2대대 소속인 내가 살포 명령을 내렸다"며 "지금 미군이 착각한 게 아니라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임진강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비무장지대에서 부산까지, 용산에서 인천까지, 한반도 전역의 미군기지에서 고엽제가 저장·운반·살포됐다"고 주장했다. 서울의 미군기지 보급창고에서도 고엽제가 하역·저장됐고, 의정부 캠프 레드클라우드에도 고엽제가 뿌려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퇴역 주한미군 웹사이트를 통한 제보로 약 300명의 진술서를 확보했다"며 "미국 의회에 내기 위한 용도로 쓰기로 약속해 지금 공개할 수 없지만, 미국에 돌아가 각각 연락을 취한 뒤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스튜어드와 함께 방한한 전직 주한미군 스티브 하우스는 27일 경북 왜관의 미군기지 캠프 캐럴을 방문해 고엽제 매립 지점을 지목할 예정이다. 하지만 주한미군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며, 기존 관례와 달리 사진·카메라 기자 3명의 방문만 허용하고 취재기자들의 취재는 불허했다. 파주/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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