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압박 고수하다 ‘한반도 100년’ 놓쳤다
2011. 6. 15.
여권, 대북제재-북한인권법 '집착' … 북한의 '중국 예속화'엔 뒷짐
북한과 중국이 지난 8일 '황금평 공동개발', 9일 '나선특구 합작개발' 착공식을 열면서 '북한의 중국 예속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경제지원이 절실한 북한이 이명박정부 대신 중국을 선택했다는 것이전문가들의 우려다. 지하자원과 동해진출로가 필요했던 중국도 북핵폐기 대신 북한 정권의 안정화로 한반도 정책을 선회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북중 국경에 위치한 황금평과 나진항 개발을 '북한 중국화'의 신호탄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의 끊임없는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두만강 하구와 나진항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를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나진항은 80여년 전 일제가 눈독을 들인 이후 러시아와 중국이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낸 '동북아 전략거점'으로 꼽힌다.
당초 인구 100여명에 불과했던 나진은 1932년 조선총독부가 중국 지린-회령과 동해를 잇는 길회선(吉會線)의 종단항(철도종착역과 연결된 항구)으로 선정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인구 40만명의 신도시 계획을 수립해 일제의 대륙진출 거점으로 활용하기로 했지만 태평양전쟁 등의 영향으로 여의치 않았다.
해방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나진항은 러시아의 군사항으로 이용됐다. 동해로 진출할 수 있는 항만을 원했던 중국도 개항 요구를 그치지 않았다. 나진항을 선점하는 국가가 동해를 둘러싼 남북중일러 사이의 물류와 군사적 우위를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한반도 주변국의 경쟁이 80여년 전부터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이명박정부의 대북강경기조는 주변국의 치열한 경쟁과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제재와 압박이 북한체제의 붕괴를 앞당길 것이라는 판단 아래 봉쇄정책을 고집하는 한편 물밑에선 정상회담을 요구하는 '이중행동'으로 상황만 악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효성에 대한 의문과 국내정치용이라는 의심을 동시에 받는 '북한인권법'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진항은 제재와 압박이라는 명분 때문에 '실리'를 버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오히려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달 27일 "중국 중앙정부의 북한(나진)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고 평가절하하는 태도를 보였다.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도 9일 "북중 경협은 '북한 체제변화'의 신호탄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이 크다"며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다.
통일부 전직 고위관리는 15일 내일신문과의 통화에서 "일제가 80년전에 눈독을 들인 나진항은 한반도 100년의 먹거리를 좌우할 물류거점"이라며 "압박에만 집착하다 미래를 놓친 꼴"이라고 비판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도 "중국에 나진항에 입항하는 자국 선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함을 파견할 경우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긴장은 더 높아질 수 있다"며 "실효성 없는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의 중국화를 가속시켰다"고 성토했다.
허신열 기자 syheo@naeil.com
“15년 쌓아올린 대북사업… 교류제한 1년 만에 빚더미”
등록 : 20110615 21:17 | 수정 : 20110615 22:12
이대식(73) 대동무역 전 회장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연매출 40억~50억원 하던 대북사업을 정부의 강경 대북정책 때문에 접어야 했기 때문이다. “북한에 투자할 때만 해도 남북교류촉진법이 있으니까, 대북사업을 중단시키는 일이 올 줄은 꿈도 못 꿨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승인하고 일관성 있게 지속해왔던 사업을 이제 와서 못하게 하니….”
6·15 공동선언 11돌을 하루 앞둔 14일 저녁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씨는 가슴에 사무친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씨는 정부의 대북교역 제한 조처의 영향으로 파산한 대북사업자 가운데 한 명이다. 대북사업 업체들이 지난 1~2월 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설문에 응한 104개 업체가 남북교역을 제한한 5·24 조처로 입은 손실액은 평균 38억7500만원이었다.
이씨는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4년부터 대북교역을 해온 1세대 대북사업자이다. 애초 부산에서 신발공장을 하던 그는 중국과 동남아의 값싼 노동력에 밀려 고전하자 사업 전환을 모색하던 끝에 대북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고사리, 도라지, 송이버섯 등 농산물과 평양소주를 들여왔다. 그는 “2000년 6·15 정상회담 이후에는 북쪽 사람들 태도가 유연해져 상대하기가 더 수월해졌다”고 회고했다.
꾸준히 사업 영역을 확장해온 이씨는 2005년 평양의 ‘강서약수’ 사업에 뛰어들었다. “강서약수는 칼슘, 철분 등 광물질이 함유된 천연탄산수로 북한 국가보물 56호입니다.” 북한 당국으로부터 독점판매권을 따낸 이씨는 30억원을 투자해 이듬해 생산공장을 준공했다. 계약 조건은 이씨가 물값과 페트병 원자재, 병마개, 라벨 등을 보내주면 북한이 공장을 가동해 생산한 약수를 보내주는 것이었다. “강서청산수라는 상표로 남쪽에 들여왔는데, 처음에는 월 10만~20만병 하던 판매량이 월 30만~40만병까지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2008년 정권교체 이후 먹구름이 몰려왔다. 특히 그해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과 이듬해 4월 북한 미사일 발사, 5월 북한 핵실험 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정부가 민간인의 대북접촉을 제한했다고 한다. “대북접촉 신청을 하면 정부는 ‘자제해 달라’고 합니다. 말은 ‘자제’지만 누가 정부 요청을 거부할 수 있습니까? 사실상 하지 말라는 것이죠.”
이씨는 결국 북쪽에 약속했던 물값과 페트병 원자재를 보내지 못하고 북에서 강서약수를 받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북으로부터 팩스 한 장이 날아왔다. 물값과 원자재도 보내지 않고 생산된 강서약수도 인수해 가지 않으니 계약 무효라는 통고였다. 이씨는 “10여명 되던 직원들도 다 뿔뿔이 흩어지고 15년 대북사업 끝에 남은 것은 이제 빚더미뿐”이라며 한숨지었다.
이씨는 “북한은 내가 투자한 설비로 생산한 약수를 중국에 내다팔겠다고 했다”며 “그래도 북에서 ‘다시 예전처럼 일할 수 있게 되면 내 권리를 회복시켜주겠다’고 하니 이제라도 남북교류 제한 조처가 풀려 자유롭게 사업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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