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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냉전 렌즈’ 낀 미국…4·3 시작과 끝 낱낱이 알고 있었다

by 무궁화9719 2022. 9. 14.

‘냉전 렌즈’ 낀 미국…4·3 시작과 끝 낱낱이 알고 있었다

등록 :2018-03-26 05:02수정 :2018-03-26 07:28

 

[제주4·3 70주년 기획] 동백에 묻다

① 올레길에서 만난 4·3
② 4·3으로 섬을 떠난 사람들
③ 4·3, 또 하나의 냉전
④ 백비의 침묵
⑤ 4·3, 70년을 넘어

 
제123통신사진파견대가 1948년 5월15일 촬영한 이 사진은 제주도 주둔 9연대 고문관 리치 대위가 경비대 중대 장교와 공산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는 마을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설명이 돼 있다. 리치는 훗날 “제주도가 합법적인 군사작전지역이었다”고 주장했다.
 

24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관람을 끝낸 방문객들이 미국과 유엔의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용지에 서명하고 있었다. 제주4·3유족회,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와 제주위원회 등이 추진하는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10만인 서명운동’에는 지난해 10월부터 지금까지 5만여명 가까이 참여했다. 이들은 왜 미국의 사과를 촉구하고 있을까.

 

■ 냉전의 그림자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습니다.” 지난 2003년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해 제주4·3에 대해 사과하며 ‘냉전’을 언급했다.

 

1947년 3월12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리스 내전을 계기로 촉발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같은 날, 서울에서는 미군정 경무부 차장 최경진이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한민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도 제주도를 ‘좌익 거점’이라고 언급하며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해 나갔다. 같은 해 11월에는 유엔에서 미-소가 ‘미국의 제주도 군사기지화설’을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4·3이 본격화되자 외신은 “제주도 상황 전개를 (트루먼 독트린을 촉발시켰던) 그리스 내전 양상과 비슷하다. 주한미군사령부도 놀라고 있다”고 전했다. 2003년 나온 정부의 <제주4·3사건상조사보고서>는 “미-소 냉전이 제주4·3의 참혹함을 불러왔다는 것은 당시 언론의 공통된 인식이었다”고 소개했다.

 

국내외를 통틀어 처음으로 1975년 4·3논문 <제주도 반란>을 쓴 존 메릴 전 미국무부 동북아실장은 기자와 인터뷰와 이메일 교환을 통해 “미국이 냉전의 렌즈로 제주도 사건을 보았고, 현지 환경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제주4·3은 아시아에서의 폭넓은 의미에서 냉전의 맥락에 닿아있는 사건이다”고 말했다.

 

■ 미군 고문관들의 4·3 경험  

 

제주4·3 시기 제주에 주둔했던 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 연대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있었다. 이들은 훈련과 작전, 군수지원 등 모든 면을 자문했다. 기자는 4·3이 본격화한 1948년 5~12월 제주도와 서울에 근무했던 6명의 미군 고문관 출신 예비역 장교들을 만나거나 이메일, 편지 등을 통해 인터뷰한 바 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됐지만, 이들은 과거 기자와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근무 기간 대량학살을 모른다고 했다.

 

1948년 5~8월의 연대 고문관은 “제주도는 합법적 정부를 위협하는 합법적 군사작전지역이었다”며 “박진경 연대장과 함께 11연대를 중산간 지역으로 보내 작전하도록 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경비대는 폭도들을 보면 그들 가운데 일부를 즉결 처분했다”고 말했다. 이해 7~8월 대대 및 연대 고문관은 “나의 임무는 반란을 진압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제주섬을 관통해 소탕작전을 벌였다”고 말했다.

 

유족회·제주위원회·범국민위, 미국 책임 촉구 서명운동 전개
제주도 주둔 고문관들 “작전현장에 나간적 있지만, 학살 몰라”
미군 정보보고서와 주한미대사관 문서 등엔 직간접 개입 넘쳐
존 메릴 “미국은 냉전의 렌즈로 제주도 사건을 보았다”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교수 ‘미 책임론’ 제기

 

심지어 초토화 시기인 48년 9~12월 제주도에 주둔했던 고문관도 “섬의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했고,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소개됐다”며 “경비대의 회의에 참석하면 항상 노획한 무기수 보다 사살자 숫자가 많았다. 나는 무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언어소통이 어려워 말 그대로 ‘고문관’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들 고문관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싸움이었다”며 미국 책임론을 강하게 반박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브라운 대령(오른쪽)과 악수하고 있다. 브라운 대령은 1948년 5월 하순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돼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 미국의 직간접 개입

 

제주도 주둔 경비대 고문관들의 기억과는 달리 미군정 수뇌부, 군사고문단과 미대사관 등은 깊숙하게 제주도 사건에 개입했다. 주한미군사령부와 방첩대, 군사고문단의 보고서, 미대사관의 문서, 극동사령부의 보고서 등은 미국이 4·3의 시작과 전개, 결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은 제주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주한미군사령부 작전 참모의 제주도 시찰 및 지도(4.27~28), 군정장관 딘 소장과 미 제6사단장의 동시 시찰(4.29), 딘 소장의 제주도 재방문과 한국인 군정수뇌부의 현지 비상대책회의(5.5) 등을 잇따라 열고, 진압을 독려했다. 

 

그러나 5·10 총선거에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지역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무산되자 미군정은 직접 개입에 나섰다. 선거 이틀 뒤인 5월12일, 미 극동사령부는 제주도에 미 구축함 크레이그호를 급파했다. 이어 같은 달 19일을 전후해 미 6사단 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6?23 재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고문관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그가 제주도의 경비대와 경찰을 모두 책임졌다”고 말했다.

 

작전을 진두지휘한 브라운 대령은 6월 초 기자들과 회견에서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선거가 무기한 연기됐다. 브라운 대령은 그 뒤 6사단장에게 서한을 보내 “제주도가 공산기지로 조직됐다”고 주장했다. 4·3연구자들은 “이런 인식이 제주도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경비대원 3명이 1948년 8월3일 오후 제주시의 한 근교에서 내란죄와 탈영죄 등을 이유로 총살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옆에는 미군 장교 2명이 보인다. 이 현장에 있었던 연대 고문관은 당시 총살 집행이 미군의 입회 아래 이뤄지게 돼 있었다고 말했다.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이후에도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과 주한미대사관으로 대표되는 미사절단은 4·3에 깊게 개입했다. 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초토화가 절정이던 12월18일 이범석 총리에게 송용찬 연대장의 작전 능력을 높게 평가하며 작전 결과를 널리 홍보해야 한다고 추천했다. 미군 정찰기 조종사는 무장대의 집결지와 전투상황을 9연대에 제공해 작전에 도움을 줬다. 

 

이런 와중에 1949년 1월에는 소련 잠수함과 선박의 제주 연안 출현설이 외신들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1월9일자 ‘소련 잠수함, 제주도 공격신호’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소련 잠수함 3척이 제주도 연안에 나타나 공격 신호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이는 미국은 물론 동남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언론에까지 대대적으로 보도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1949년 1월 각종 외신에 보도된 소련 잠수함의 제주 연안 출현설은 모두 가짜로 판명됐다.

 

무초 대사는 같은 해 4월9일 국무부에 “제주도가 남한에 테러를 가하기 위한 소련의 주무대로 선택됐다. 소련의 에이전트들이 어려움 없이 제주도에 침투하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연구자들은 “이런 보도와 인식이 냉전 초기 제주도를 미-소 직접 대결의 장으로 인식하도록 세계 여론을 형성하려 한 것이다”고 분석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21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미국의 원조가 적극화하기 위해서는 “제주도와 전남지역의 도당들을 발근색원하고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1월28일 국무회의에서는 “제주도사태는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고 발언했다.

 

이승만의 이런 발언을 뒷받침하는 최근 문서가 발견됐다. 기자가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발굴한 미군 문서에는 이승만의 발언 직후 미 해군이 제주도를 방문한 사실이 밝혀졌다. 

 

미 극동해군사령부 지원단이 작성한 문서(49년 2월2일)에는 미해군 함정 3척이 인천을 방문해 1월24일 함정에서 연 연회에 이승만 대통령, 무초 대사, 로버츠 장군 등이 참석했다고 돼 있다. 문서는 또 “무초 대사가 한국정부가 (미해군 함정의) 제주도 방문을 간절히 바란다며 제주 방문 방안을 상의했고, 이에 따라 계획을 수정했다”고 돼 있다. 이들은 1월25일 3시간 남짓 제주에 기항해 미군 고문관 등을 만났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의 교감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그 뒤에도 미군과 미대사관 관리들의 제주도 사태 진압에 대한 관심과 의견 표명은 계속 이뤄졌다.

 

미군과 제주도 여성들의 모습.

 

■ 미국 책임론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는 ‘집단 인명피해’와 관련해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지난해 6월 제주4·3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해 기자들과 만나 “미군정은 1945년부터 3년간 남한을 법적으로 통제했고, 그 뒤에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군사와 경찰을 통제했다”며 미국 책임론을 제기했다.

 

존 메릴은 “4·3은 미군정 시기 소련과의 협력관계가 파국을 맞고 냉전이 자리잡아가던 시기에 일어났다. 미군 고문관들은 제주4·3 전 기간에 걸쳐 제주도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는 고문관들이 직접적인 지휘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가 펼쳤던 정책 역시 한 원인이다”며 정부 수립 이전 미국의 책임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제주4·3범국민위 등 단체들은 “제주4·3은 미군정이 통치하던 시기에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사건이다. 미국은 4·3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 사과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해야 한다. 유엔도 조사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명운동은 제주와 서울, 온라인을 통해 국내외에서 이뤄지고 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7633.html?_fr=st1#csidx3d9abd56117825a94086078ca7d42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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