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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905년 7월 29일 - 대한제국을 망국의 길로 이끈,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지다

by 무궁화9719 2022. 9. 14.

2008. 11. 10.

<7월 29일> 1905년 7월 29일 - 대한제국을 망국의 길로 이끈,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지다

오늘을 살아가는 역사지기 2019.07.28 17:39

 

 

<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인 '가쓰라 다로'와 미국 육군 장관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사진>

 

- '가쓰라-태프트 밀약(桂・タフト協定은)' '러일전쟁(日露戦争)' 중이던 1905년 7월 29일에 당시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 겸 임시 외교 대신(장관)이었던 '가쓰라 다로(桂太郎, 1848~1913)'와 필리핀을 방문하고, 다음으로 일본을 찾아온 미국 특사였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 육군 장관 사이에서 오간 협정이다. 참고로 태프트는 이후 1909년 제2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일본 측에서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명시하는 편이며, 간혹 '가쓰라-태프트 각서(桂・タフト覚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협정 당시, 일본 러시아 전쟁 중이었지만 러시아에 사실상 승리를 거둔 후였다. 그래서 당시 러시아 제국 군대도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Teddy"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의 강화 권고를 받아들였다. 또한 미국은 주한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을 해임하였으며, 알렌은 1905년 6월에 대한제국을 떠났다. 이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필리핀 정책을 의회에 지지를 받기 위해서, 태프트 육군 장관을 단장으로 의원 30명(상원 7명, 하원 23명)을 포함한 총 83명의 대형 외교단을 파견키로 했다.

 

1905년 7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태프트 외교단은 호놀룰루를 경유, 7월 24일에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했다. 러일전쟁 중이던 일본을 방문한 목적은 러시아와 일본에 대한 평화협상 역할을 자처한 미국이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요구사항 직접 확인하는 것과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Alice Lee Roosevelt Longworth, 1884~1980)'를 외교단에 포함함으로써 작년의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伏見宮貞愛親王, 1858~1923)' 황실 외교에 대한 답례 및 일본이 필리핀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협정에서 미국은 당시 대한제국(이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확인했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확인했다. 열강이 세력을 모색하는 시대 속에서 미국과 일본의 수뇌가 상대국의 권리를 서로 인정한 협정이라고 미·일 양국은 말하지만, 당사자이자 피지배국 입장인 한국과 필리핀의 의사 따위 없이 자신들 멋대로 정한 엉터리 같은 밀약이었다. 또,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해서 1902년에 체결한 영일(영국과 일본) 동맹을 고려한 것으로 미국, 영국, 일본의 삼국을 통한 동아시아의 안보에 대한 의견이 교환됐다(라고 쓰고 원활한 지배라고 읽는다).

 

 

<당시 일본과의 밀약을 지시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협정은 호혜적으로 서명된 문서와 비밀 조약이 아니라 합의를 담은 회의 양해 각서(메모)이며, 이 합의 각서는 1924년에 미국 외교관이었던 테일러 데넷 미국 의회 도서관에 보존되고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인 사료'라는 이름의 라벨이 붙은 박스 안에서 이를 발견하였고, 이것을 'Current History'라는 이름의 잡지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과 맺은 비밀 협정'이라는 제목으로, 태프트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엘리후 루트(Elihu Root, 1845~1937)'에게 보낸 전문을 게재할 때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협정은 도쿄에서 일본의 가쓰라 총리와 윌리엄 태프트 특사가 1905년 7월 27일 아침부터 외무 차관 '진다 스테미(珍田 捨巳, 1857~1929)'의 통역이 배석한 모임의 기록에서 기밀이었던 대화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다. 각서에는 날짜가 기재되어 있어서 정확한 밀약의 시기를 알 수 있었다. 한편 일본 측의 원본은 소실되어서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나 엘리후 루트 국무장관은 가쓰라 총리와의 협정을 의회에 보고하지 않았고, 사적 문서로 처리했다. 루스벨트 정권 내부의 고위 관리 가운데 이 밀약의 내용을 알고 있던 것은 6명 정도였다. 이렇게 일부 사람만 알게 된 것은 당시 미국에서 협정을 조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원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으나, 필리핀 합병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고 조약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적었다. 게다가 앞으로 시작될 포츠머스에서 가질 러시아-일본 교섭의 중개역을 하는 미국이 영일 동맹의 비밀스러운 파트너임을 공식화할 수도 없어서 이 협정을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풍자화,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끝나면서 서양 열강들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대한제국의 지배권 사실상 용인한다>

 

회동에서는 주로 3가지 주요 의제가 논의되었다. 

- 대일본제국은 미국의 식민지로 되어 있던 필리핀에 대해서 야심이 없음을 표명한다.

- 극동의 평화는 일본, 미국, 영국 3국의 사실상의 동맹으로 지켜져야 한다.

- 미국은 대일본제국의 조선에 대한 지도적인 지위를 인정한다.

 

밀약중,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면서 '한반도에서 문제의 광범위한 해결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결과이며 만약 대한제국 정부가 단독으로 방치되는 일이 된다면, 다시금 타국과 조약을 맺어서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일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가 또 다른 외국과의 전쟁을 일본으로 강제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가쓰라의 주장을 들은 태프트 특사는 대한제국이 대일본제국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성 직접 공헌하는 것임을 동의했다. 태프트는 또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 점에 동의할 것이라는 그의 확신을 보여주었다.

 

태프트는 이 회담에서 합의를 미국 정부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문을 읽은 루스벨트는 7월 31일 '가쓰라와 태프트 간 회담은 모든 점에서 옳은 일, 태프트가 말한 모든 것을 자신이 확인함'을 가쓰라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한 내용의 전문을 태프트에게 전달했다.

 

전문을 받은 태프트는 8월 7일 마닐라에서 '루스벨트가 자신들의 회담의 발언을 모든 부분에서 확인했다'라는 내용의 전문을 가쓰라에게 보냈다. 가쓰라는 다음날 일-러 강화회의의 일본측 전권대리로서 미국 포츠머스에 체제하고 있던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 1855~1911)'에게 이것을 알림으로써, 미-일간의 합의를 둘러싼 일련의 행위는 사실상 완료되는 형태가 되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열린 러시아-일본의 포츠머스 조약 당시 사진>

 

가쓰라-태프트 협정  제2차 영일 동맹,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강화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으로 사실상 열강의 모든 나라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승인한 결과가 되었다. 이것은 이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 일본이 접수 하면서, 사실상 보호국이 된다.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은 이 을사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리던 '제2회 만국평화회의' 특사를 파견하지만, 신통치 않았고 결국 이로 인해서 강제로 퇴위당한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출처: https://history1988.tistory.com/151 [역사지기는 오늘을 살아간다]

 

 

테프트 - 카쓰라 밀약의 실체

 

2012.02.22. 15:08

태프트 - 가쯔라 밀약
 
 태프트-가쯔라 밀약 당시의 디오도 루즈벨트(President  Theodore Roosevelt 14 Sep 1901~3 Mar 1909) 미국대통령의 의식상태를 다루어본다. 
 
1905년7월27일 미국 육군장관(United States Secretary of War)과 일본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 가쯔라 다로오(桂 太郞) 사이의 Taft-Katsura 밀약(密約)<합의각서(agreed memorandum)라고도 함>>은 대한제국이 앞으로는 더 이상 러시아와 친선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봉쇄하기로 한 밀약이다. 
 
反日ワクチン: 知ってはならない歷史15 - [ 이 페이지 번역하기 ]1909(明治四十二)年、ハリマンは急逝しました。そして小村壽太郞も、この仮條約に盡力した伊藤博文も前後して率然と急死します。・・・ ここでは小村壽太郞外相たち、つまり日本の犯した誤ちの省察を記しましょう。 アメリカの排日移民問題の惡化 ...
vaccine.sblo.jp/article/14969390.html - 30k - 저장된 페이지 - 유사한 페이지
 
 二つ目はアメリカの隣國は日本となったことです。バシー海峽を挾んで、アメリカと日本
は隣國同士になりました。

 フィリピン總督であったタフト陸軍長官は、ポーツマス講和會議が進行中の7月27日
來日して桂首相と會談し、「桂・タフト覺書」として知られる協定を結びました。會談の席
でタフトは、「アメリカ國內ではロシアに好意的な人々がいて、フィリピンはこの次は日本
の目標だと言う」と發言しました。桂首相は、「日本はフィリピンに野心をもつようなこと
はない」と当然にも明確に答えています。するとタフトは、「朝鮮は現狀のままでは左右に
搖れて、日露戰爭の原因になったが、ここは日本が斷固とした措置を取る必要がある」と述
べました。さらに、「朝鮮が日本の同意なしに他國と條約を結ばないように、日本が軍隊を
駐留させ保護國にすることが極東の平和に貢獻すると考える。大統領も私と同じ考えだ」と
付け足しました。

 ポーツマス講和會議の席でルーズベルトは小村壽太郞全權に、「朝鮮の外交的不道德が日
露戰爭の最大の原因だ」と言い、「朝鮮を日本の保護領にすることを要請する」と明言して
います。
「外交的不道德」とは、大韓帝國とロシアとの秘密同盟など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朝鮮が
まさにロシアの手に落ちようとした直前に日露戰爭となりました。・・・・・
 
 日淸戰爭の日本の勝利の後に、朝鮮は大韓帝國として獨立しました。とたんにロシアが南
下して、國王はロシア公使館に監禁され、露韓密約が結ばれロシアは朝鮮各地に軍事基地を
構築するに及び、日露は開戰したのです。こうした向背常なき朝鮮の外交を「不道德」と米
英は言ったのです。
 アメリカは、自國がフィリピンを保護國化したことについての追認・保証を、日本に要求
してきました。そして朝鮮の保護國化をアメリカは要請し、同意・保証を与えたのです。
 日本はこうした過程で、日露戰爭後の米英の中國・滿洲政策の方向を解析することに大き
な錯誤を犯したのです。そのはしりが桂・ハリマン協定の破棄です。ルーズベルトは朝鮮の
外交を「不道德」と非難しましたが、日本の協定破棄こそ「不道德」ではなかったでしょう
か。
 日本必死の戰時國債を引き受け、のみならずロシア國債の暴落に協力してくれた世界のユ
ダヤ人社會・メディア社會・米英の各界の支援を、勝ち逃げで一方的に破棄するというのは
、あまりに「不道德」だと思われるのは当然です。底冷えのするような日本不信が確實にユ
ダヤ人世界に廣がりました。・・・・
 勝利した時こそ大局を見なければなりません。日露戰爭勝利という過度の安心の中で、日
本は桂・ハリマン協定の破棄という錯誤の第一步を踏み出しました。第二步は何か。滿洲か
ら日本はロシアと結んで米英を排除したことです。反米親露というこの轉舵に反對していた
伊藤博文が死んだのです。野に淚あれ、です。
引用終わり
posted by 小楠 at 07:04| Comment(0) | TrackBack(0) | 書棚から眞實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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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외교권, 뺏긴 것이 아니라, 외교권 행사가 군사적으로 봉쇄됐을 뿐이다.  

 윌리암 H. 태프트 ( William Howard TAFT ) 미 육군장관(Secretary of War, 1 Feb 1904 ~ 30 Jun 1908)이 필리핀 방문 및 태평양지역 순방 길에 1905년7월27일 일본에 기항 7월28일 가쯔라 다로오(桂 太郞, 계 태랑) 일본 총리대신(수상) (제1차 가쯔라 내각 1901년6월2일~1906년1월7일) 겸 외무대신(외상)을 예방했다.  이 때 가쯔라는 고무라 쥬다로오(小村壽太郎) 외무대신(외상)이 러시아와의 강화회담을 위해 미국 포츠머스에 가있는 동안 외상을 겸임하고 있었다. 
 
예방했을 때 대화내용은 일본 쪽 자료처럼 보인다, 
 
가쯔라 수상 겸 외상은 이때  ‘ 한국은 일-러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전쟁의 논리적 귀결로서 한반도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필요하다. ’   ‘ 일본은 한국이 종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가 일본이 또다시 전쟁으로 돌입할 상황에 처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확고한 조치를 취해야한다 ’ 고 하였다.   한국에 대한 모종의 조치에 대해 미국이 양해하여달라는 뜻이었다.  
 
태프트 육군장관 겸 순회대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라면서  ‘ 일본의 동의 없이는 어떤 대외조약도 체결하지 말라고 한국에 요구할 정도의 Protect (위험배제)를 일본군을 이용하여 확립하는 것이 전쟁의 논리적 귀결이자 동아의 항구적 평화에 기여하는 것 ’ 이라 답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 행사를 군사적으로 봉쇄하라는 것이다. 
 
1905년7월29일 태프트는 가쯔라와의 대화내용을 엘리후 루트 ( Elihu Root ) 신임 미 국무장관(July 19, 1905 - January 27, 1909)에게 보고하였다.  휴가 중이던 시어도 루즈벨트 ( Theodore Roosevelt ) 대통령에게는 7월31일부로 전달되었다.   루즈벨트는 ‘ 귀하의 가쯔라와의 회담은 모든 점에서 전적을 옳다.  나는 그대가 한 모든 말을 확인했다는 것을 가쯔라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 고 회답하였다.   마닐라에 도착한 태프트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 같은 승인 사실을 8월7일 부로 일본의 가쯔라 수상에게 전했다.  
 
1905년7월31일 미국대통령 Theodore Roosevelt 는 태프트-가쯔라 비밀각서에 대찬성이라는 회신전문을 보냄으로서 이 각서는 미국대통령이 비준한 조약에 가까운 무게를 갖게 됐다. 
 
이보다 앞서 일본군은 대한제국에 1905년4월1일「일한 통산업무합동조약」을 강제해 대한제국의 통신주권 봉쇄 즉 만국우편연합에서의 활동과 독자적 우편교류의 길을 봉쇄하고 별도로 화폐의 국제적 송수신도 봉쇄하고 있었다. 1904년2월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한 일러전쟁(日露戰爭)에서 승기(勝機)를 잡은 일본군 지휘부는 1905년4월1일 대한제국의 통신주권을 봉쇄한지 4개월 만인 1905년7월28일 미국과 태프트-가쯔라 양해각서(agreed memorandum)를 만들고 뒤이어 4개월 만인 1905년11월17일에는 일본 군사력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행사를 봉쇄하는 을사변란(乙巳変亂) 일으켰다.  그러나 독자적 국제통신 기능과 해외에서의 활동비 송금길이 막혀있던 대한제국은 속수무책 상태에 빠져 있었다.  선박이나 열차에 의란 한국 사람의 국제적 이동과 활동은 전신전보를 활용해 선수를 치는 일본 공사관의 선수에 부닥쳐 좌절되기 일수였다. 
 
1897년 건국된 대한제국은 1874년 만국우편협정에 따라 1875년7월에 창설된 Universal Postal Union(만국우편연합) 에 건국즉시 가입해 (1899년1월1일 가입 설도 있음) 일본이나 청국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제 간 우편교류를 실시해왔으나 1905년4월1일 일본에 통신주권이 봉쇄된 후에는 모든 대외통신이 일본에 의한 감시와 차단이 가능한 체재 속에서 운용됐다. 
 
태프트-가쯔라 대화『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 태프트는 모종의 확실한 조치가 보호조약 체결을 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논리적 정당성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면서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하게 요구하는 범위에서 일본 군대로써 한국에 대해 종주권(suzerainty)을 확립하는 것은 전쟁의 필연적 결과이며, 극동의 항구적 평화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2005년11월일자 신동아 통권 554 호 (p322 ~ 327) [이슈 추적]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 (金基正 글) 》
 
1905년4월21일 일본 덴노오(天皇)가 참석한 어전각의(御前閣議)에서 결정된 일․러 전쟁 강화조건 13개조의 첫째 항은『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에 두는 것을 승낙할 것』(1.ロシアは、日本が韓國を保護下におくことを承諾すること。)이라는 내용이다.  
 
《《 吉村 昭 著 『「ポーツマスの旗」-外相 小村壽太郞-』
新潮文庫 昭和58年5月刊、親本:新潮社昭和54年12月刊
mickeysa.hp.infoseek.co.jp/nagai/nagaipa/nagaipa11/nagaipa11.html - 25k - 저장된 페이지 - 유사한 페이지 ( google 검색 )
 
다음 검색어가 강조표시되었습니다:  ポーツマス  ロシア  セルゲイ  ウィッテ  》》
이 강화조건을 휴대한 일본측 전권대표 외무대신 고무라 쥬다로오(小村 壽太郞, 소촌 수태랑)가 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미네소타호로 요꼬하마(橫浜, 횡빈)항을 출발한 날자가 1905년7월8일이다. 
 
이 강화조건 결정을 주관한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 대리인 가쯔라 다로오는 고무라 전권대표를 환송한지 20일 만에 태프트 육군장관과 대화를 나누고 밀약을 맺었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註 : 1905년7월31일자)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 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태프트-가쯔라 밀약 3개월 반 후인 1905년11월17일-18일 대한제국은 일본군대에 의해 궁궐을 점령당하고 성립되지도 않은 제2차 일한협약(日韓協約)<통칭 을사허약(乙巳虛約)>안(案) 제2조를 내세우는 일본군에 의해 외교권이 봉쇄됐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이 틀어 막힌 것이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군사력으로 봉쇄한지 5년도 채 안된 1910년8월22일 외교권이 봉쇄된 대한제국 명의로『日韓合邦(일한합방)』이란 사이비 외교문서가 날조됐다. 
 
1910년8월22일 수도인 한성(漢城)은 일본군 1개 사단(사단장 마쯔모도 松本), 2연대, 29연대, 32연대에 점령되고 조선통감부(統監府)가 있는 남산의 왜성대(倭城臺)에 포진한 포병대의 대포가 황궁(皇宮)에 조준을 맞추고 있었다.  이처럼 살벌한 가운데 사이비 외교문서가 날조된 곳이 일본군 1개 연대에 점령된 황궁 안에서인지 혹은 통감부인지는 명확치 않다.   대한제국 황실 제압에 자신감이 붙자 1주일 후인 8월29일자로 대한제국 병탄(倂呑)을 공식화했다.
 

태프트 - 가쯔라 밀약과 대한제국의 외교권 봉쇄

 1905년7월27일 미국 육군장관(United States Secretary of War)과 일본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 가쯔라 다로오(桂 太郞) 사이의 Taft-Katsuran 밀약(密約)<합의각서(agreed memorandum)라고도 함>>은 대한제국이 앞으로는 더 이상 러시아와 친선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봉쇄하기로 한 밀약이다. 
 
태프트-가쯔라 대화『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 태프트는 모종의 확실한 조치가 보호조약 체결을 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논리적 정당성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면서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하게 요구하는 범위에서 일본 군대로써 한국에 대해 종주권(suzerainty)을 확립하는 것은 전쟁의 필연적 결과이며, 극동의 항구적 평화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2005년11월일자 신동아 통권 554 호 (p322 ~ 327) [이슈 추적]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 (金基正 글) 》
 
1905/01/02   旅順陷落
1905/03/10   日本軍、奉天占領
1905/04/21   對露講和條件を閣議決定
1905/05/27   日本海海戰 (~05/28/連合艦隊司令長官:東鄕平八郞)
1905/06/01   高平駐米公使、T․ルーズベルト(米)大統領に講和斡旋を要望
1905/06/09   T․ルーズベルト(米)大統領、日露兩國に公式に講和を勸告
1905/07/03   小村壽太郞、高平小五郞を日露講和會議全權に任命 
1905/07/08   小村壽太郞全權、橫濱から「ミネソタ號」でアメリカに向かう。  
1905/07/29   桂․タフト協定
1905/08/10  日露講和會議開催(アメリカ․ポーツマス/首席全權:小村壽太郞)
1905/08/12  日英同盟②調印
1905/08/22  T․ルーズベルト(米)大統領、金子特使に金錢的要求の放棄を勸告
1905/08/28  御前會議、日露講和成立方針を決定
1905/09/05 51才 ポーツマス條約調印(首席全權:小村壽太郞/日露戰爭終結)
 
1905년4월21일 일본 덴노오(天皇)가 참석한 어전각의(御前閣議)에서 결정된 일․러 전쟁 강화조건 13개조의 첫째 항은『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에 두는 것을 승낙할 것』(1.ロシアは、日本が韓國を保護下におくことを承諾すること。)이라는 내용이다.  
 
《《 吉村 昭 著 『「ポーツマスの旗」-外相 小村壽太郞-』
 
新潮文庫 昭和58年5月刊、親本:新潮社昭和54年12月刊
 
mickeysa.hp.infoseek.co.jp/nagai/nagaipa/nagaipa11/nagaipa11.html - 25k - 저장된 페이지 - 유사한 페이지 ( google 검색 )
 
다음 검색어가 강조표시되었습니다:  ポーツマス  ロシア  セルゲイ  ウィッテ  》》
 
이 강화조건을 휴대한 일본측 전권대표 외무대신 고무라 쥬다로오(小村 壽太郞, 소촌 수태랑)가 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미네소타호로 요꼬하마(橫浜, 횡빈)항을 출발한 날자가 1905년7월8일이다. 


이 강화조건 결정을 주관한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 대리인 가쯔라 다로오가 고무라 전권대표를 환송한지 20일 만에 태프트 육군장관과 대화를 나누고 밀약을 맺었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註 : 1905년7월31일자)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 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이 밀약의 3개월 반 후인 1905년11월17일-18일 대한제국은 일본군대에 의해 궁궐을 점령당하고 성립되지도 않은 제2차 일한협약(日韓協約)<통칭 을사허약(乙巳虛約)>안(案) 제2조를 내세우는 일본군에 의해 외교권이 봉쇄됐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이 틀어 막힌 것이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군사력으로 봉쇄한지 5년도 채 안된 1910년8월22일 외교권이 봉쇄된 대한제국 명의로『日韓合邦(일한합방)』이란 사이비 외교문서가 날조됐다.  
 
1910년8월22일 수도인 한성(漢城)은 일본군 1개 사단(사단장 마쯔모도 松本), 2연대, 29연대, 32연대에 점령되고 조선통감부(統監府)가 있는 남산의 왜성대(倭城臺)에 포진한 포병대의 대포가 황궁(皇宮)에 조준을 맞추고 있었다.  이처럼 살벌한 가운데 사이비 외교문서가 날조된 곳이 일본군 1개 연대에 점령된 황궁 안에서인지 혹은 통감부인지는 명확치 않다.   대한제국 황실 제압에 자신감이 붙자 1주일 후인 8월29일자로 대한제국 병탄(倂呑)을 공식화했다. 
 

비밀각서 합의자의 1905년7월29일 현재 직위 및 출생 사망일

 William Howard. TAFT(Secretary of War, 1 Feb 1904 ~ 30 Jun 1908, 출생 사망 September 15, 1857, Cincinnati, Ohio ~ March 8, 1930, Washington, D.C. ) 
 
가쯔라 다로오(桂 太郞, 계 태랑, 제1차 가쯔라 내각 수상 1901년6월2일~1906년1월7일, 출생 사망 1847년11`월28일~1913년10월10일(大正2년))
 

러시아의 태평양 및 극동을 향한 남하행동이 영국․미국의 이익과 충돌 

 태프트 - 가쯔라 밀약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적극 지지하며 조장하려는 디오도 루즈벨트(President  Theodore Roosevelt 14 Sep 19013 Mar 1909) 미국대통령의 독단 외교의 산물이었다. 
 
1905년7월31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프트 육군장관에게 보낸 찬성전문은『당신이 카츠라(桂) 백작에게 한 말은 전적으로 옳다. 내가 당신의 말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라』로 되어 있다.
 

미국은 왜 러시아를 견제하려했을까.

 러시아는 청(淸)아(俄)《베이징 조약(北京條約)》(1860년(咸豐十年)11월14일)으로 朝鮮(조선) 동북쪽 온대(溫帶)에서 한 대(寒帶)에 걸치는 광대한 빈해(濱海, 沿海)지역(연해주) 땅을 할양 받았다.  (俄羅斯, 아라사 = 러시아)
 
러시아는 이 땅을 차지한지 7년만인 1867년3월30일 그 넓은 땅 중에서 한대(寒帶)지방 바다 건너 얼래스커는 불과 721 만 달러( 1 평방 킬로미터 당 5 달러)로 미합중국에 매각하는 계약에 조인하고 1867년10월18일 정식 양도했다.
 
그 후 러시아가 시베리아 동부 온대(溫帶)지역에서 나타낸 태평양을 향한 남하정책 강화 예컨대 연해주에서 울라지오스똑(블라디보스톡) 부동항 개발 착수, 극동에서의 조선(朝鮮)과 滿洲(만주)로의 활발한 남진 행동은 영국과 미국을 극도로 긴장시켰다. 
 
미국은 淸(청)국이라는 거대시장 유지 및 淸(청)국 남쪽 필리핀에 대한 식민통치를 위해 장거리 태평양 항로 중간에 러시아가 돌출해 항로의 안전과 자유를 위협하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은 미국과 淸(청) 사이의 해운 항로를 위협할 수 있고 영국의 태평양 지배력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淸(청)이라는 거대시장에 대한 러시아의 육로 남진과 태평양 진출을 차단해줄 강력한 현지 용병(傭兵)정부 일본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었다.  
 
필리핀은 미국 스페인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탈취한 후 필리핀 선주인들의 식민통치 거부전쟁을 진압하고 간신히 미국인 총독을 임명하는 상태였다.
  
미국은 1898년4월25일 스페인에 선전포고해 1898년12월10일 빠리 조약(Treaty of Paris)으로 미국 스페인 전쟁(Spanish-American War)을 종결짓고 스페인으로부터 꾸바(Cuba, 쿠바), 뿌에르또리꼬(Puerto Rico,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제도(the Philippine islands), 괌(Guam) 기타 많은 섬들을 뺏어냈다.
 
필리핀의 독립은 스페인이 미국과 전쟁 중인 1898년 6월 12일 에밀리오 아귀날도의 집 발코니에서 선언되었다.
출처: http://mission.swim.org/philippines/history.html
 
빠리 조약 두 달 후인 1899년2월4일에는 필리핀 선주인(先住人)의 독립투쟁을 진압하는 미국 필리핀 전쟁(Philippine American War (formerly called the Philippine Insurrection, 1899-1902)을 개시해 1902년7월4일 미국대통령 씨어도어 루즈벨트의 필리핀전쟁 종결선언으로 전쟁이 공식 종료됐다( fficial End of the Philippine-American War. On July 4, 1902, President Theodore Roosevelt declared that the Philippine-American War, which Americans called the Philippine Insurrection, was over.)  
 
이 필리핀에 있는 스페인의 항복거부부대 소탕(2 June 1900, Spanish forces at Baler, Philippine Islands, surrender to U.S.) 및 필리핀 독립전쟁 진압 중인 1900년3월16일 William Howard TAFT가 필리핀 행정관(Commissioner)으로 임명되어 6월3일 필리핀에 착임(着任)했다가 1901년6월5일 필리핀 총독으로 승진됐다.  Taft는 1904년1월 육군장관(United States Secretary of War)으로 임명되어 1904년2월1일부터 1 Feb 1904 ~ 30 Jun 1908 까지 육군장관으로 재임했다.   1905년 전임 지인 필리핀과 서 태평양지역  순방 중 7월말에 일본에 기항했었다.  
 

태프트 가쯔라 밀약과 미․일 간의 세력권 상호인정

 日淸戰爭(일청전쟁, 1894년7월25~1895)강화를 위해
1895년4월17일 조인된 日淸 講和條約(下關條約, 일청 강화조약, 하관조약)으로 일본은 필리핀 바로 북쪽의 타이완[臺灣] ․펑후제도[澎湖諸島]를 할양 받고 필리핀 근해에 일본 해군력이 대폭 증강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필리핀 독립전쟁을 간신히 제압했으나 일본군이 개입하면 방어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필리핀에서의 미국 권익을 유지하려면 일본의 관심을 북쪽 대한제국과 만주 쪽으로 돌리도록 세력권을 분할 조정할 필요가 컸다. 
 

일․러 전쟁 개전(開戰)

 일본은 일영동맹과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의 전비(戰費)지원에 힘입어
1904년2월8일 일본군 선견대가 대한제국 인천에 무단상륙, 인천 앞 바다에서 러시아 함대 공격, 러시아 함대가 있는 淸(청)나라 요동반도의 旅順(여순)항도 공격하고 2월10일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본․러시아 전쟁을 일으켰다. 

 

태프트 - 가쯔라 밀약의 동인(動因) 

 디오도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이 외교를 독단하여
1904년 ~ 1905년 일본․러시아 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을 적극 지원하고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적극 지지한 루즈벨트의 개인적 이익과 미국의 국익 판단자료 중에 두드러진 것으로 두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하나는 루즈벨트에게 러시아의 태평양진출과 남진(南進)이 미국의 국익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는 의식과 러시아의 남진 저지에 일본을 이용하는 것이 최량의 방책이라는 의식을 주입한 사람들의 주장이다.  
 
ロシアの中國への進出を恐れたイギリスはモリスンらの主張を取り入れて
1902年(明治35年)1月30日 日英同盟を結ぶ。
 
영국이 1902년1월30일 일본과 영․일 동맹을 맺고 극동에서의 러시아 남진을 저지하려한 이유가 미국과 상통했다. 

루스벨트는 일․러 전쟁에서 러시아가 고전하던 시기인『1905년
 2월5일 만약 극동에서 당장 평화가 온다면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가져야 할 것이다 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루즈벨트는 일본의 진출을 지원함으로써 러시아의 남진을 억제하고, 따라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시인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신뢰와 함께 한국에 대한 엄청난 경멸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1905년 1월에 그가 국무장관 헤이(John Hay : September 30, 1898 ~ July 1, 1905)에게 보낸 글에서 나타난다.
 
루스벨트의 러시아 경계, 친일과 대한제국 멸시 성향은

① 런던 타임즈 기자 죠지 모리슨 의 기사로『1900년8월 청(淸)국 의화단 사건 때 일본군대의 용감성』을 전해들었고, 淸(청)나라로의 러시아의 남진이 영국의 이익에 반함으로 일본과 영국이 동맹해 러시아의 남진에 대처해야한다는 글들 


②『하버드대 동창인 일본인 가네꼬(Kaneko Kentaro(金子堅太郞) 남작의 친일회유 활동』,

③『미국의 아웃룩(The Outlook)신문의 케난(George F. Kennan)기자의
한국에 대한 나쁜 기사내용』, 그리고 루즈벨트의
④『외교적 조언을 해준 영국 외교관 스프링 라이스(Cecil Spring-Rice)의 영향』등에 기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George Ernest Morrison (4 February 1862 ․ 30 May 1920), British traveller and journalist, Peking correspondent of The Times from 1897 until 1912, 
 
交民巷に立て籠もった連合國の人間は兵らと協力して淸の大軍の進行を防いでいた。
ここで柴中佐を含めて日本側は奮鬪する。
G.E.モリソンは柴の事を譽めている。
モリソンはイギリス人であり、ロシアの南侵に危機感を抱いており
日本とロシアを對峙させる事を提案していた。
ロシアの旅順租借をタイムズの中ですっぱ拔いたのもタイムズの記者である彼であった。
日英同盟(1902秊)もこのような流れの中で生まれた。
この同盟の威力はその後の日露戰爭で遺憾なく發揮される事になる。
 
日本は北京籠城している人々を救うべく 立ち上がり
淸國臨時派遣隊を編成させるように動いた。
 
6月15日の閣議において淸國臨時派遣隊を編成し
參謀本部第2部長 福島安正少將を指揮官を含む約1300名の陸軍派遣を決定した。
福島はアジア通でもあり日本のアジアに展開している諜報部隊とも氣心が通じていた。
 
1898秊1月17日 ロンドンタイムズ 北京特派員 ジョージ․モリスン 日露戰爭前の話です。あまり狀況は變わっていない氣がするw ...
 
義和團の事件(北淸事變)でロンドンのタイムズ社のモリスンは日本の柴や福島を見て日本軍の力をイギリスで宣傳した。モリスンはロシアに日本が對抗できる力を持つことをあの籠城で見拔いていた。また タイムズの記事を見て イギリスも東洋における日本の力に注目した。
ロシアの中國への進出を恐れたイギリスはモリスンらの主張を取り入れて 1902年(明治35年)1月30日日英同盟を結ぶ。 モリスンの攷えはその後、正しかった事が證明される。
タイムズのモリスンも北淸事變の頃より 日本とロシアの戰爭を豫感し またそうなるように日英同盟を結ばせるように努力していた。
軍部も政府もこの日英同盟に喜び戰爭へと突入していくのだった。
 
② 가네꼬 겐따로오(金子堅太郞, かねこ けんたろう、1853年3月13日(嘉永6年2月4日) - 1942年(昭和17年)5月16日)는
1876年(明治9年)2月、ハーバード大學ロースクール入學準備に入り、
同年10月、ハーバード大學ロースクール入學 
同じハーバード大學ロースクールに入學した小村壽太郞と同宿し勉學に勵む
1878年(明治11年)6月、ハーバード大學ロースクール卒業。法學士(Bachelor of Laws)
1904年(明治37年)2月、アメリカに派遣され、日露戰爭についてセオドア․ルーズベルト大統領(ハーバード大學時代の學友)と交涉する窓口を開いた。小村壽太郞と金子堅太郞がともにルーズベルトと同じハーバード出身であったことが、アメリカで行われた外交交涉を円滑に進めることに役立った。 (翌年9月 포츠머스 條約締結後 10月 歸國)。
アメリカに派遣され金子堅太郞マスコミに對する働きかけを始め親日的な世論を形成するとともに記者にロシアの膨張主義に對抗するために戰爭に踏みきったものと强調した。そして、世論は日本寄りに傾いた。この根回しが功を奏し、講和條件を新聞各紙は穩當な條件であると評價した。
ルーズベルト大統領の親友として、ニューヨークで對日世論工作にあたっていた金子堅太郞の次の聲明が大きく揭載された。
日本政府が戰勝國として當然の理由をもつ償金支拂い要求を潔く撤回したのは、日本人が金錢よりはむしろ人道を重んじ、文明を尊び、世界の平和を愛する人種であるから        にほかならない。私事であれ國事であれ、われら日本人は金錢よりも名譽を重んじる。
 
 George Kennan (1845년2월16일 미국 오하이오주 노워크(Norwalk)에서 태어났다. ~1924년5월10일 뉴욕 메디나(Medina)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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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넌은 『1898년 미국, 스페인전쟁 중에는 쿠바에서 [Outlook]紙의 특파원을 지냈다. 1904년 러일전쟁기간 중에는 [Outlook]紙의 일본특파원을 지냈다. 케넌은 친일, 반러적 입장에서 글을 썼던 신문기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특히 루즈벨트의 동아시아정책에 관한 한 루스벨트의 측근 인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1905년에 일본이 한국에 대해 보호령화하는 결정적 조취를 취하기 직전 미국내의 잡지 [Outlook]紙에 2개월에 걸쳐 한일문제에 관한 글을 시리즈로 연재하였다. 그런데 이 [Outlook]紙는 루즈벨트가 정기적으로 구입하는 유일한 잡지였다고 한다. 


조지 케난은 일본 정부에 매수되어 시종 친일행위로 일관했으며, 루즈벨트대통령의 공보담당 개인비서로 활약하는 동안 일본을 수차 왕래하면서 1905년 7월 일본수상 桂太郞과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 사이의 이른바 태프트-桂 覺書의 체결을 배후에서 알선하는 등 한국에 대한 루즈벨트의 방침을 형성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후에도 케난은 미국내 여러 신문의 자유 기고가로 활동하면서 일본을 옹호하고 한국인은 자치능력이 없다는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 1924년 5월 10일 뉴욕 메디나(Medina)에서 사망하였다.
 
Autograph Letter Signed - PBA Galleries, Auctions & Appraisers
... George Kennan, (1845-1924), was a journalist for The Outlook in Cuba 1898, and in Japan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Condition: Fine. Sale Number, 248. Lot Number,173. Sale Name, Autographs & Manuscripts. Sale Date, 09/19/2002. Price realized ... www.pbagalleries.com/search/item120057.php - 25k - 추가 결과 - 저장된 페이지 - 비슷한 페이지
 Sir Cecil Arthur Spring-Rice
 
Born: February 27, 1859, St. Georges, Hanover Square, Middlesex, England.
Died: February 14, 1918, Ottawa, Canada.
 
He was educated at Eton and Balliol College, Oxford, and entered the Foreign Office in 1882, becoming private secretary to Lord Granville in 1884 and précis writer to Lord Rosebery in 1885.
He went to Washington as third secretary in 1886, and after various brief appointments went in 1895 to Berlin. In 1898 he became secretary at Teheran, and from there went in 1901 to Cairo as British commissioner on the Caisse de la Dette. 
He held a series of diplomatic posts including: Secretary of Legation in Brussels, Washington, Tokyo, Berlin and Constantinople [Istanbul]; Charge d'Affaires Tehran (1900); British Commissioner of the Public Debt in Cairo (1901); 1st Secretary St Petersburg (1903); Minister and Consul General Persia [Iran](1906); Minister in Sweden (1908-1913); and British Ambassador in Washington (1912-1917). Spring-Rice was also a poet and the author of "I vow to thee my country", the famous hymn. He died on 14 February 1918. 
In 1903 he went to St. Petersburg, first as secretary and later as councillor of embassy, remaining in Russia during the war with Japan of 1904-5 and the revolution of 1905.
In 1908 he was created G.C.V.O. and went to Sweden as minister, and in 1912 was appointed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The US found him obstructive and his description of saint martin marigot Woodrow Wilson as a "mysterious personage" doesn't suggest a particularly close relationship. In private life he had been a good friend of noble method President reshaped much Theodore Roosevelt about whom he memorably remarked "You must remember that the president is about six". However he seems to have been unable to turn these earlier close links to the administration to a relationship of use to his government.
 
Janus: The Papers of Sir Cecil Spring-Rice-
janus.lib.cam.ac.uk/db/node.xsp?id=EAD%2FGBR%2F0014%2FCASR - 14k
 
Index Terms
Rice, Sir Cecil Arthur, Spring - (1859-1918) Knight, diplomat
 
4 Russian Embassy Papers. Carbon copies of letters from Spring-Rice from Russia
to correspondents including: [?St Loe] Strachey, Louis Mallet, [G W?] Balfour, A J
Spender, [5th] Lord Lansdowne, Mrs [?Edith] Roosevelt, [1st] Lord Knollys, Sir
Charles Hardinge, Sir Frank Lascelles, Lord Sanderson, Sir Edward Grey.
2 files. 1905–1906
5 United States Embassy Papers.
9 American Correspondence. Includes correspondence with Theodore Roosevelt and
Edith Roosevelt.
 
스프링 라이스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유리함으로 미국은 일본을 지원하여야 할 것이라고 루스벨트에게 자문하였다.
작곡가이며 영국 외교관이기도 한 Cecil Spring-Rice 는 루즈벨트에게 접근해 외교자문역할도 했다.   
 
다른 하나는 1900년 필라델피아에서 영문으로 간행된 일본인 니도베 이나조의 "BUSHIDO: The Soul of Japan(Jan 1900), The Leeds and Biddle Company " 「武士道」라는 책이 루즈벨트에게 준 감명과 일본에 대한 신뢰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新渡戶 稻造(にとべ いなぞう、1862年(文久2年)8月8日(양력9月1日) - 1933年(昭和8年)10月15日)は、農學者、敎育者。國際連盟事務次長も務めた國際人、
著書で 1900年(明治3年)1月, 米國フィラデルフィアのリーズ․アンド․ビドル社より刊行された "BUSHIDO: The Soul of Japan(1900年), The Leeds and Biddle Company " 「武士道(初版本)』」の寫眞 1900(明治33)年1月, 필라델피아에서 출판, 150쪽 분량) "
www.city.morioka.iwate.jp/14kyoiku/senjin/senjin/nitobe/siryou.html - 10k - 저장된 페이지 - 유사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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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渡戶稻造とは - はてなダイアリー
d.hatena.ne.jp/keyword/%BF%B7%C5%CF%B8%CD%B0%F0%C2%A4 - 34k -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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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年~
療養地で書き上げた英文「武士道」、「BUSHIDO THE SOUL of JAPAN」發刊。出版
と同時に新興國家日本の眞の姿を紹介する本として世界中で大きな反響をおこす。
アメリカ大統領、セオドア․ルーズベルトを感激させ、日露戰爭講和にアメリカが協力す
る一因となった話は有名である。
 
傳統的な日本精神を紹介し他國に共感を得た「武士道」などがあ
 
37歲の新渡戶稻造が書いた英文「武士道――日本の魂」(1899)は世界的なベストセラーとなった。この名著の影響は、日本人の出版物としては史上最大ではないだろうか。セオドア․ルーズベルト大統領が日露戰爭の仲介を決心したきっかけになったのをはじめ ...
plaza.rakuten.co.jp/hisatune/diary/200505090000/ - 37k - 저장된 페이지
 
この名著『武士道』(弱小藩でありながら南部藩の橋頭堡として隣接する强敵․伊達藩と對峙した花卷武士の辛酸が下地となっている)は、その後にドイツ語、フランス語、ロシア語など實に17カ國語にも飜譯されたため、一躍、新渡戶稻造の名は世界中の知識人に知れ渡ることとなります。
 
루즈벨트의 친일 행위
 
1905년9월5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조인된 일본․러시아 사이의 강화조약은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이 仲裁(중재)했으며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홈 > 자료실 > 사진/영상자료  루즈벨트 미 대통령 특사로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장관 일행 2006.03.02
 2371 -  1 (19).jpg
 
동아일보 매거진 : 신동아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프트에게 미리 알려줬다. ...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도 뒷날까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
 
 
United States Secretary of War Tenure in Office
Russell A. Alger 18971899 William McKinley
Elihu Root  189931 Jan 1904 McKinley, Theodore Roosevelt
William Howard Taft  1 Feb 190430 Jun 1908 Theodore Roosevelt
 
United States Secretary of State Tenure in Office
John Hay September 30, 1898July 1, 1905 William McKinley,
                                              Theodore Roosevelt
Elihu Root July 19, 1905January 27, 1909 Theodore Roosevelt
 
한글 띄어쓰기, 외래어, 맞춤법 활용 :: [자료] 제26차 정부․언론 외래어심의 위원회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1999. 3. 3.) 참고 자료 2007/04/22
1912.엘리휴 (일라이휴) 루트, Elihu Root (미국 1845~1937), 법률가, 정치가, 외교관, 국무장관.
 

이 비밀협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쟁점을 던졌다.

  첫째 이 협상 내용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quid pro quo)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 그것이 단순히 양국 고위관료간 의견교환 수준인지, 아니면 양국 간 장래의 행동을 상호 약속하는협정(agreement)의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그 비밀협상이 한국-필리핀의 맞교환 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약소국 문제를 외교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전문의 내용상으로는 A 대신 B라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더욱이 필리핀에 있어 미국의 입지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권 승인 요구는 외교적 흥정 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미국의 인식은 그러했다.
 
 일본은 한국 지배권 독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반면, 미국은 1898년  이래 이미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반군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있던 점이 달랐다. 루스벨트 자신도 회담 3개월 후 태프트의 방일(訪日)이 외교적 흥정이었다는 소문이 일본 신문에 실리자 상당히 불쾌해하면서 미국은 영토보전을 위해 누구의 지원이나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가. 그것은 몇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루스벨트의 인종주의적 문명관과 친일론적 인식도 중요한 원인이었고, 그것이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당시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중국시장이었다. 이미 1899년,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은 중국 문호개방 원칙을 천명해놓은 터였다. 즉 군사적 개입이라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중국시장에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문호개방 정책에 대해 일본은 외교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은 문호개방 원칙에 대한 도전이라 인식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일본의 대(對)러시아 전쟁을 미국의 게임을 일본이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미국의 그러한 기대감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고 러시아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적대감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미일 충돌의 원인(遠因)이 됐다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협정인가, 각서인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양국간 법적 의무를 가진 협정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의견교환, 즉 각서로 볼 것인지는 다소 복잡한 문제다. 태프트 장관이 회담 직후 루스벨트에게 보낸 전문에는 이 회담의 성격을 합의각서(agreed memorandum)로 밝히고 있다.
 
만약 그것이 단순히 각서라면 미국은 아무런 법적 의무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해왔다. 법적 의무란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명기한, 우호적 중재(good office)와 관련한 체약국 의무를 의미한다. 게다가 태프트는 특히 한국 문제에 관한 그의 의견 표명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서 어떠한 지시도 받은 바 없으며, (외교문제에 관한 한) 태프트 자신이 어떤 직권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그의 의견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동의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 자신이 육군성 장관이라 외교 문제에 관한 그의 발언이 국무성 업무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우려도 이 전문에 드러나 있다.
 
이 비밀협상을 단순히 각서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 회담 내용상의 표현, 그리고 구체적인 외교적 거래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논리의 근거로 내세운다.
 

루스벨트는 밀약에 동의했다

 반면 이것이 실제로 협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드러난 형식보다는 국제정치적 중대성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이 비밀협상의 실질적 의미, 즉 일본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그 회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협상 이후 미국의 한국 정책이 어떻게 수행됐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스벨트 자신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국제정치적 중요성과 미국의 외교정책적 영역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 문제에 대한 태프트의 발언에 대해 루스벨트는 우리의 입장이 더는 그처럼 정확하게 언급될 수 없다 고 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갖는 시기적 적절성과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외교정책 결정과정의 핵심이었다. 1903년 여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은 사실상 그가 주도했다. 그를 일컬어 일인(一人) 국무성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1)

 태프트는 회담에서 대통령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프트에게 미리 알려줬다. 그는 1905년 4월20일 태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조항이 포함되는 한 나는 강화조약의 일본측 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확인해준 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 밀약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루스벨트 자신이 어떻게 인식했느냐 하는 문제다. 1905년 11월, 그의 친구이자 영국 외교관인 스프링 라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의 지시에 의해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와의 회담에서 재차 강조한 것은, 구체적으로 영일동맹에서 명기하고 있고, 또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에서 인정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우리가 전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에게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관한 국제적 승인이라는 점에서 제2차 영일동맹이나 포츠머스 조약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협정이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조약을 통해 그렇게 했듯, 루스벨트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 것이다. 적어도 미국의 핵심적 외교정책 결정자의 인식구도에는 그러한 등식이 성립돼 있었다.
 
아울러 루스벨트 외교방식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공적인 외교 채널보다 사적 채널을 중시한 이른바 개인 외교(personal diplomacy) 방식을 선호했던 인물이다. 1905년 미국의 한국 외교에도 그 방식이 채택됐다. 태프트의 협상 임무에 있어 국무성 관료들은 사실상 철저히 배제됐다. 어쩌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 문제와 관련된 대일외교를 추진하는 데 교묘하게 국무성을 배제했을 것이다. 국무성 관료들 일부가 가지고 있던 친(親)러적 정서를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도 뒷날까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국익 실현을 위해 전쟁으로 할 일을 평화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외교다.  육군장관이 외교담당 국무장관이 된다.  그 때의 업적으로 191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한미 양국관계에, 그리고 한국의 운명에 큰 충격을 줬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전기작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올리버의 표현에 따르면 그 밀약은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 s death warrant)하는 행위였다. 한국의 국제정치상 위상과 존립에 관해 미국과 일본의 고위층 사이에 합의된 의견이 교환되고 상호 확인됐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에 명시된 우호적 중재라는 체약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1903년 친일 구도를 골격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한 이후 일본의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해 보여준 행동 가운데 가장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는 행위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그런 사실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마자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최초의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외교적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지난 9월30일 주미대사관에 대한 국회 외교통상위 국정감사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실재 여부가 쟁점화하자 신동아 11월호는 이와 관련한 연세대 김기정 교수(국제정치학)의 글을 실었다.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적극적으로 승인했으며, 다만 밀약의 성격이 협정이냐 각서냐 하는 형식상 논란만 남아 있다는 게 그 요지였다. 이 글을 읽은 고려대 대학원 석사과정(사학)의 만학도 하정인씨가 또 다른 시각의 기고문을 보내왔다.
 
 1924년 미국의 외교사학자 테일러 데넷(Taylor Dennett)은 미 국회도서관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1901~09 집권)에 관한 사적(私的) 비망록과 외교서류 등을 조사하던 중, 1905년 7월27일 당시 미 육군성 장관이던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 사이의 비공식 회담에 관한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um)을 우연히 발견했다.
 
데넷은 당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급의 중요 비밀사실을 알아냈다고 확신하고, 국무장관인 찰스 휴스에게 그 공문서를 공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휴스는 즉시 태프트에게 의견을 물었고, 태프트는 공개를 반대하지 않았다.
 
데넷은 같은해 8월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타운에서 열린 미국 정치학회에서 이 문서 내용을 발표했고, 이는 미 현대사(Current History)지(誌)에 루스벨트 대통령과 일본 간 비밀협약(President Roosevelt s Secret Pact with Japan) 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실렸다.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 역사기록은 물론 한국의 관련 정치․외교․역사 서적과 교과서에서 통례적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근거이자 연원의 전부다.
 

에스더스의 반론

 일본은 데넷이 발표한 당시에는 이 사실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한 병합소사(日韓 倂合小史, 岩波書店, 216쪽)에 데넷의 논문을 그대로 수록했다. 그리고 1968년, 일본 외무성이 공식 간행한 일본외교연표 병 주요문서(日本外交年表 竝 主要文書, 1840~1945) 편에서는 본 각서 관계 서류는 소실되어 참고로 미 국무성 문서를 수록한다는 주(註)를 달고 데넷의 논문에 실린 주요 3개 항을 실었을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의 국제정세, 그리고 루스벨트 개인의 사회적 다위니즘 (다윈이 제창한 진화의 학설)적인 제국주의 문명관에 근거를 둔, 조선에 대한 그의 선입관으로 미뤄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과연 일본의 조선 병합의 주요 근거가 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추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진실일까.
 
1959년 미국 역사학자 레이먼드 에스더스(Raymond A. Esthus)는 현대사 저널(The journal of modern history)에 가쓰라-태프트 협약, 진실인가 신화인가 라는 논문을 발표해 가쓰라와 태프트 간의 메모는 루스벨트가 펼친 극동정책의 핵심부분이 아니었고 태프트는 외교적 흥정(quid pro quo)을 관철할 목적으로 파견된 밀사도 아니었다 고 데넷 이래 정설로 받아들여져 온 이 밀약에 최초의 반론을 제기했다.
 
우선 에스더스는 데넷이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um)이라는 글귀에서 agreed 라는 어휘를 협정(agreement)으로 확대해석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태프트의 일본 방문은 전임 필리핀 총독으로서, 그리고 육군성 장관으로서 마닐라를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른 것일 뿐, 일본과 구체적 외교협약을 맺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어떤 기록에도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일본을 방문해 극동문제를 토론하거나 타결하라고 한 훈령은 발견되지 않는다.
 
태프트와 가쓰라 두 사람의 만남은 러일전쟁 이후의 극동정세와 관련해 벌어질 수 있는 일말의 사태에 대한 예방 차원이었고, 가쓰라는 조선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고 태프트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또한 태프트는 그의 관심사이던 필리핀 통치 및 방위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가쓰라와 견해를 교환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어떤 구체적 정책을 실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에스더스는 미일 쌍방의 그 누구도 서명하지 않았고 양 당사국의 의무적 구속조항도 없는 이 비망록이 단순한 대화(conversation)의 기록이었다고 주장한다. 태프트는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엘리후 루트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를 대화의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om of conversation)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이 사실이 협정(agreement)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비망록 본문에도 다음과 같은 시각이 교환됐다(the following views were exchanged)라고 씌어 있다.
 
루스벨트는 이날의 만남과 대화에 대한 태프트의 전문 보고를 즉시 추인했는데, 이는 1년 전인 1904년 6월 뉴욕주 오이스터만의 자택에서 열린 다카히라 주미 일본공사와의 오찬에서 러일전쟁 종결시 일본의 편을 들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가쓰라는 회동 말미에 이 비밀협약의 내용이 주일 미국대사인 그리스콤에게 전해지는 것을 삼가라고 태프트에게 부탁했다. 당시 조선에 호의적이던 그리스콤이 조선 당국에 이 사실을 알리면 일본이 이미 예정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특약 조인(1905년 11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2)

밀약은 단순한 대화 기록… 조선 병합 승인한 협약은 없었다 

 루스벨트의 우열 민족관
태프트가 방일한 지 3개월 후 일본의 친정부 언론기관인 고쿠민(國民)은 가쓰라와 태프트의 흥정 밀약을 보도했고, 주일대사 그리스콤은 10월4일 워싱턴으로 전문을 보내 비밀협정의 루머가 일본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를 접한 루스벨트는 나는 미국의 영토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에 대한 대가로 어떠한 이에게도 무엇을 요구하거나 들어주는 일이 없다고 확인한다. 우리는 그러한 간섭을 막을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영토보전과 관련한 지원에 대해 어떠한 보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명하고, 이 문제를 일본공사 다카히라에게 추궁했다.
 

며칠 후 가쓰라는 다카히라를 통해 루스벨트에게 공식 견해를 표명했다.

 고쿠민은 일본 정부 기관이 아니며 그 기사는 정부가 지시하거나 정보를 제공한 것도 아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 직면한 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호의적인 태도를 인식하고 이에 감사한다. 이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떠한 제안이 있었다는 사실은 없다.
 
이는 일본 정부의 대(對)언론 발설에 대한 일반적 부정이 아니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대한 루스벨트의 해석(조선과 필리핀에 관한 흥정의 부인)에 동의하는 일본 수상의 절대적인 설명이었다.
 
고쿠민은 일본 지도부와 가까운 친정부 기관이었다. 따라서 당시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실패했다는 국내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의 큰 외교적 성공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정보를 일본 지도부가 흘렸을 가능성이 있다.
 
1905년 2월, 일본이 하와이나 필리핀을 공격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언론인의 질문에 루스벨트가 무력에는 무력으로 싸워 이겨야 하며, 일본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국의 군비는 항시 강력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고 답변한 사실은 고쿠민에서 비롯된 미일간 입장 차이에 대한 루스벨트의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볼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러일전쟁에 따른 일본의 조선 병합을 양해한 것은 그의 언급대로 일본과의 비밀협정이나 협약에 기초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가 개인적으로 빠져든 우열 민족관에 입각해 일본의 조선 병합 그 자체가 세계 평화는 물론 열등하고 자치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한국민의 장래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데 그 동기가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보기 필요한 밀약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면서 부딪치는 어려움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과 그 진행과정이 모두 지나가버렸고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란 기록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들, 그리고 후대인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새로 편집, 정리, 해석한 것일 뿐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모두 과거에 관해 파악된 것, 이해된 것일 뿐이지 역사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역사 연구의 지향은 과거 인간의 사상과 행위를 인식하고, 그 역사를 일어난 대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 근거가 되는 모든 자료, 즉 사료가 없으면 역사를 재구성해볼 수 없다. 물론 이 사료는 엄격히 비판되고 해석돼야 한다.
 
에스더스는 루스벨트와 미일관계에 관한 몇 권의 저서를 간행했고, 1924년 데넷의 논문 발표 이후 자신이 반론을 제기한 1959년까지 수많은 사료와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을 검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흥정하지 않고 국력에 의한 외교정책을 집행한 루스벨트의 정통성과 러일전쟁 및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강력하고 확고했던 미국의 태도를 추정하는 데 주력했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의 중재에 대한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일본은 어쩌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가쓰라와 태프트의 대화를 이용하고 확대해석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에스더스 같은 학자가 의문을 제기했는 데도 아무런 저항 없이 교과서에 밀약 부분을 실은 우리의 역사 인식은 무엇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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