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0















이곳 순천은 동편재를 부르는 곳


대장금 드라마 세트 - 드라마 세트장
* 낙안읍성의 체험관 - 체험마당

서당이 나오니 반갑고 하늘천 따지 하는 천자문을 읽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군요

길쌈체험관 으로 물레돌리기, 베틀짜기등
길쌈이란 옛날에 누에고치·삼·모시·목화 등의 섬유를 가공하여
명주·삼베·모시·무명 등의 피륙을 짜던 일을 말한다..
동예·마한 등에서 시작된 길쌈은 삼국시대 때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물레돌리기를 하는 물레 입니다


멍석말이를 하던 멍석도 있고 통나무 의자도 있네요




사또가 계신 동헌
당당하게 지키고 있는 우리에 멋진 포졸
위풍당당하다












400년된 은행나무
'낙안읍성 민속마을' 정보
주소/문의 : 전남 순천시 낙안면 061-749-3347
이용시간 : [12월~1월] 09:00 ~ 17:00, [2~4월,11월] 09:00 ~ 18:00,
이용시간 : [12월~1월] 09:00 ~ 17:00, [2~4월,11월] 09:00 ~ 18:00,
1594(선조27)∼1646(인조24) 충청도 충주 달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고송(孤松)자는 영백(英伯)이요 본관은 평택으로 판서 정(整)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전쟁놀이를 할 때도 스스로 대장이 되어 다른 아이들을 지휘하였으며, 그가 글을 배울 때는 고대 중국의 항우 장수가 문(文)보다는 무(武)를 배우라는 데 큰 영향을 받았으며 끼니가 어려워도 좋은 화살이나 활이라면 모두 사 모았고 심지어는 입었던 옷을 벗어 주고 무기를 바꾸기도 하였다고 전해 온다. 1618년(광해10년) 23세에 무과에 급제 2년 뒤에 소농 본관이 되었으며, 1622년 첨지중추 부사를 지내고 31세 때 정충신의 휘하에 있으면서 이괄 난에 출전하여 무악재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워 진무언 중 공신이 되어 우림장이 된 뒤 여수 돌산도 방답진 첨 절제사를 거쳐 1626년 5월 낙안 군수로 부임하여 1628년 3월까지, 군수로 계시는 동안 군민을 위해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자청하여 참전 좌장이 되어 전라 병사(全羅兵使) 신경인과 함께 병력 3만을 이끌고 남한 산성 에서 분투하고 있는 인조 대왕을 도와 청군을 물리치고자 강화도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왕이 이미 화친을 한 뒤였다. 낙안에 돌아온 임군수는 나에게 정병 4만 명 만 있다면 오랑캐를 무찌르고 압록강에서 칼을 씻고 오겠다는 비장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가 낙안에 와서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고읍 제1보를 쌓았으며, 그가 성역(城役)을 할 때 군사와 백성들을 위해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친히 잔을 권하니 백성들이 성 쌓기에 더욱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전라도 감사가 행하기 어려운 송사는 낙안 군수인 임경업에게 맡겨 처리할 정도로 명관이였으며, 인조6년(1628년) 2월 28일 김류가 신의 종사관 김반(金槃)을 충청우도와 전라도를 순검하여 고하도록 하였는데, 낙안군수 임경업은 매사에 청렴하고 백성들을 위해 맡은바 소임을 다 하고 있다고 아뢰자 왕은 임경업에게 표리(表裏)한 벌을 하사하였으며, 그 해 체찰부 별장으로 전임되어 낙안군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낙안을 떠날 때는 고을 주민 남녀 노소가 나와 10여리 길을 메워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고 한다. 공은 이렇듯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그곳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서민풍의 장군이기도 했다. 그러나 임경업 군수는 여느 장수와는 달리 능력이 출중함에도 당시 내외 정세 및 당쟁의 정치적 혼란으로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 불운한 명장이기도 하였다. 1630년 평양 중군이 되어 검산산성 용골성을 수축하였으며 1631년 충주 목사를 지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연변 부사에 기용되어 백마 산성과 의주 산성을 수축하는 등 성곽을 쌓는데 전문가이기도 하였다. 명나라 반도 공유덕을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총병의 벼슬을 받았으며 이듬해 의주 부윤이 되고 청북 방어사를 겸하였으나 포로로 잡은 오랑캐를 석방하였다는 모함을 받고 파면되었다가 1636년 혐의가 풀려 의주 부윤에 복직이 되고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 산성에서 적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그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조선의 병력 동원을 요청하고 수군 장에 발탁되었으나 친명배청파인 임장군은 명나라에 이를 알려 주었다. 명나라와의 싸움에서 화살촉을 빼고 탄환을 장전하지 않은 채 쏘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였으며 1638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안주 목사가 되고 1640년 청나라 요청으로 단 사장이 되어 명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이때에도 명나라에 기밀을 알려주다 체포되어 청나라에 압송 도중 탈출하여 양주 회암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643년 명나라에 망명하여 명군의 총병으로 청나라 공격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어 18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청이 중국을 통일한 다음 대 사면령이 내려 풀려나게 된다. 이때 조선에서는 심기원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 그의 관련 설이 대두되어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송환되어 친국을 받던 중 친 청파인 김자점의 사주를 받은 형리에 의해 장살 당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왕도 아까운 인재를 잃음에 슬퍼하였으며 많은 백성 또한 슬퍼하였다고 한다. 또한 임경업 군수가 타고 다니던 말도 주인이 죽었다는 소식에 따라 죽었으며 그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1667년(숙종 23년)에 신원이 이루어져 복관이 되고 충주에 있는 충렬사에 배향이 되었으며 호는 충민(忠民)이다. 낙안군에서도 향교 바로 옆에 낙안 유림들에의 충민사를 짓고 영정을 모신 후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낙안읍성내에 임경업 군수 선정 비각이 있다. (문화재 자료 47호) - 임경업 장군에 대한 기록은 임 충민공 실기 정조15년(1791) 이윤석, 임경업전 연구 정음사(1985)등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 |
자료:낙안읍성 민속마을 홈페이지 http://www.nagan.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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