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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6.10.인혁당사건.4.19(민주화운동)등 등...

80년 5월, 광주로 향했던 기자 “5·18 민중항쟁으로 헌법 넣어야”

by 무궁화9719 2025. 5. 18.

"닥치는 대로 살상" 피로 물든 광주…분노한 시민들, 금남로 뒤덮다[뉴스속오늘]

김소영 기자
2025. 5. 18. 06:00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80년 5·18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 주변 모습. /사진제공=5·18기념재단
"닥치는 대로 살상" 피로 물든 광주…분노한 시민들, 금남로 뒤덮다[뉴스속오늘]© MoneyToday
 
한국전쟁 이후 민족 최대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5·18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지 올해로 45주년을 맞았다.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광주를 피로 물들였던 민중항쟁은 '폭동'과 '사태'로 불리던 왜곡의 시기를 지나 '민주화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5·18 민주화 운동은 이후 전개된 시민항쟁의 밑거름이 됐을 뿐 아니라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비상계엄 확대→계엄군 광주로…최초 희생자 이세종 열사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직후 내려진 비상계엄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1980년 5월18일 새벽 0시 전국으로 확대됐다. 신군부는 즉시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하고 국회·교도소·언론사 등 109곳엔 계엄군과 전차 4대, 장갑차 60대를 배치했다. 또 비상계엄 해제를 위한 임시국회를 막기 위해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앞세워 국회 정문을 봉쇄했다.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도 발령했다. 모든 정치활동 중지, 집회 및 시위 금지, 대학 휴교, 언론·출판·보도·방송 사전 검열, 파업 및 유언비어 유포 금지 등이 골자다. 보안사령부는 전두환 지시에 따라 소요 배후 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검거하라고 전국 보안부대에 지시했다. 이에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들과 전남대 복학생 등이 연행돼 합동수사단에 끌려갔다.
 
비상계엄 확대는 전국 대상이었지만 신군부의 실제 목표는 광주였다. 계엄사령부는 시위 진압에 특화된 공수부대를 광주에 배치했다. 전남대·조선대 학생 수십명은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공수부대에 모두 연행됐다. 전북대에선 첫 희생자가 나왔다. 계엄 철폐를 외치며 밤샘 농성을 벌이던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열사(당시 20세)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수사기관은 단순 추락사로 처리했지만 이후 집단폭행 의혹이 제기됐다. 44년이 흐른 지난해 이 열사는 5·18 민주화운동 최초 희생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5·18 민주화 운동의 최초 희생자 고(故) 이세종 열사의 의복과 수험표. /사진제공=전북대
                           
"닥치는 대로 살상" 피로 물든 광주…분노한 시민들, 금남로 뒤덮다[뉴스속오늘]© MoneyToday
광주 시내까지 장악한 공수부대…청각장애인 김경철씨 희생
18일 아침이 되자 학생 100여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들었다. '휴교령이 내리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이자'는 행동 지침을 지킨 것이다. 교문을 지키던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에게 진압봉을 휘둘렀다. 이들은 군홧발에 쫓기며 광주 동구 금남로로 진출했고, 시위대는 500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러자 군은 이른바 '화려한 휴가'라고 불리는 진압 작전을 개시한다.
 
곧이어 광주 시내에도 공수부대가 들이닥쳤다. 이들은 시위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도로 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 불문 쫓아가 진압봉과 대검으로 폭행한 뒤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두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다. 공수부대원들은 김씨가 장애인증을 내미는데도 무차별 폭행했다. 온몸을 구타당한 김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당시 그는 백일이 갓 지난 딸을 둔 28살 아빠였다.
 
당시 계엄 상황 일지에 따르면 18일 하루 동안 광주에서 연행된 사람은 모두 405명이다. 대학생 1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시민 184명 등이다. 이 가운데 68명이 두부 외상, 타박상, 자상(대검 사용에 의한 부상)을 입었고, 12명은 중태라고 기록돼 있다.
 
계엄군이 길거리에서 시민을 폭행하고, 버스에 탄 시민들을 끌어내기 위해 올라타고 있다. /사진=뉴스1

"닥치는 대로 살상" 피로 물든 광주…분노한 시민들, 금남로 뒤덮다[뉴스속오늘]© MoneyToday
광주 진압 나선 2만 병력…분노한 10만명 금남로 뒤덮어
신군부 지휘부는 공수부대를 하루에 1개 부대씩, 18일부터 사흘간 2800여명을 광주에 내려보냈다. 21, 22일엔 보병 병력도 4100명 가까이 보냈다. 공수부대와 보병을 합쳐 모두 7000명에 달하는 추가 병력이 서울 등 외부로부터 광주에 투입된 것이다. 여기에 광주 주둔 병력과 계엄군까지 더하면 총 2만 병력이 민주화 운동에 나선 광주시민을 대상으로 진압 작전을 자행했다.
 
19일 일반 시민들이 금남로에 합세하면서 시위대 규모가 천 단위로 커졌다. 밤중에 추가 투입된 공수부대는 본격적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엔 부상자들이 줄지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동구 계림동에선 한 고등학생이 계엄군 총에 맞아 크게 다치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 당국의 철저한 통제 탓에 광주 상황에 대한 보도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20일 새벽 노동자 김안부씨(당시 35세)가 머리 총상을 입고 집 주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계엄군 총격 첫 사망자다. 이후 10만명 넘는 인파가 금남로로 몰려들었다. 택시 200여대도 헤드라이트를 켠 채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공수부대는 최루탄으로 맞섰지만 열세에 몰렸다. 군경 저지선은 금남로 3가에서 1가 전일빌딩 앞까지 밀렸다. 이날 차량 시위는 평범했던 시위가 '대중 봉기'로 진화한 계기로 평가된다.
 
계엄군 앞에 부서진 택시가 방치돼 있다. /사진제공=5·18민주화운동기록관

"닥치는 대로 살상" 피로 물든 광주…분노한 시민들, 금남로 뒤덮다[뉴스속오늘]© MoneyToday
애국가 나오자 집단 발포…10일 만에 유혈 진압된 시민군
분노한 시민들이 광주 MBC·KBS 방송국과 광주세무서에 불을 지르는 등 심야 시위를 벌이자 군은 21일 오전 대규모 보병 병력을 광주로 투입하고 가스 살포용 헬리콥터까지 동원했다. 이어 오후 1시쯤 도청에서 흘러나온 애국가를 신호로 군은 금남로의 군중을 향해 집단 발포했다. 저격병들은 주변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비무장 상태 시민들을 조준 사격했다.
 
이날 이곳에서만 최소 54명 이상이 총격으로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항쟁은 광주 시내를 벗어나 전남지역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격분한 시민들은 광주와 화순, 나주, 함평 등지 경찰서나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공수해 무장했다. '시민군'으로 불린 이 무장 시위대는 22일 도청 장악에도 성공한다.
 
이후 항쟁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정부의 협상, 시민 궐기대회, 도청 사수작전의 양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27일 오전 2만여명의 군인, 탱크, 헬기가 동원된 대규모 군사작전에 의해 10일 만에 유혈 진압됐다. 5·18 기간 피해자는 총 5517명으로 밝혀졌다. 18~27일 사이 사망자는 155명, 부상 후 숨진 시민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구금부상자 1145명, 연행·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
 
공수부대 집단 발포가 이뤄진 금남로 모습. /사진=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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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발판된 5·18…전두환 '무기징역'·노태우 '17년'→사면
5·18 민주화 운동은 10일 만에 막을 내렸지만 훗날 민주화 운동을 이끈 세력에 방향성을 제시했다. 자식, 친구, 부모를 잃은 광주시민의 한(恨)은 민주화 운동 세력에 동기와 용기, 구심점이 됐고, 광주 학살을 이끈 신군부에 대한 반감은 지식인과 재야인사, 학생 등에 한정됐던 민주화 세력을 모든 국민으로 확산시켰다. 잠재했던 공동체의 힘은 1987년 6월 항쟁에서 폭발한다.
 
1988년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한 뒤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5공 청문회 등을 통해 5·18의 진실이 상당 부분 드러났다. 이후 5.18 특별법,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면서 유혈진압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이뤄졌다.
 
전두환, 노태우 등 12·12군사반란과 5·18내란 주동자 15명은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형을 확정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8개월 뒤 김영삼 정부 특별사면으로 모두 석방됐다. 이후 5·18에 대한 사과의 뜻을 종종 비춘 노태우는 2021년 10월26일 먼저 눈을 감았다. 반면 전두환은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다가 한 달 뒤인 11월23일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숨졌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12·12군사반란과 5·18내란 관련 재판에 선 모습. /사진=뉴스1

"닥치는 대로 살상" 피로 물든 광주…분노한 시민들, 금남로 뒤덮다[뉴스속오늘]© MoneyToday

김소영 기자 ksy@mt.co.kr

80년 5월, 광주로 향했던 기자 “5·18 민중항쟁으로 헌법 넣어야”

[인터뷰] 광주 취재 후 TBC 강제 해직된 김준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운영위원
5월24일~25일 광주 잠입, 8월1일 해직…“군인들이 처녀들 가슴을 잘랐다”

  • 입력   2025.05.18 07:30
▲ 지난 2018년 9월6일 열린 ‘기획 세미나, 80 해직을 말한다’ 에서 김준범 당시 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가 ‘1980년 검열과 제작 거부 투쟁’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김준범 TBC(동양방송) 기자는 12·12 군사쿠데타 당시 총소리 나는 한남동 현장에 가지 못했다. 퇴근길에 부장이 ‘절대 현장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 이제 막 기자생활 시작했는데, 총 맞으면 죽는 거야’라는 말에 수습기자였던 그는 선배 말을 거스르지 못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서울의 봄’이 끝났고 방송사에 상주하던 군인들은 전방에서 온 군인들로 교체됐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편제부(편집제작부) 소속이었던 그는 광주 현장에서 기자들이 전화로 전해오는 소식을 받아적으면서 피가 끓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기에 수화기 너머의 상황, 광주시민들의 정서가 그려졌다. 전두환 신군부가 5월17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지 일주일만인 5월24일, 당시 사수인 한종범 TBC 기자(현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상임대표)에게 ‘광주에 가겠다’고 보고한 뒤 현장으로 향했다. 

 

그는 5월27일까지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을 목격하고 왔다. 26일 밤, 잠들지 못했고 27일 새벽 3시50분 전남도청으로 모여달라는 마지막 방송을 들었다. 현장에 다녀오고 약 2개월 뒤, 그의 이름은 해직자 명단에 포함됐다. 신군부는 언론인 1000여명 강제해직을 시작으로 언론통폐합과 언론기본법 제정으로 언론을 장악했다. 해직된 언론인들 상당수는 취업이 제한됐다. 

 

신입 기자 김준범은 어떻게, 왜 광주에 갔을까. 다녀온 뒤로 그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미디어오늘은 ‘5·18 광주민중항쟁’ 45주년을 맞아 지난 1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김준범 기자(현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운영위원)를 만났다.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재구성했다.

 

▲ .18 광주 민중항쟁을 취재한 이후 1980년 8월1일 강제해직된 김준범 전 TBC(동양방송) 기자가 지난 13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장슬기 기자
 

-당시 신군부가 광주를 봉쇄했는데 어떻게 들어갔나.

“5월24일 서울에서 광주로 바로 가는 차가 없어 일단 정읍(전북)까지 갔다. 정읍에 가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날 광주로 갈 수 없어서 정읍에서 하루 자고 이튿날 겨우 장성(전남)으로 갔다. 거기서 채소 장사하는 사람이 광주를 드나드는 것 같아 보였다. 검문소에서 들키면 책임 못 진다고 펄펄 뛰어서 사정사정했다. 광주 시내로 못 가고 송정리(1988년에 광주시로 편입)까지 가기로 했다. 서로 말을 맞추고 차에 탔다. 짐 덮는 호로(천막) 안에 숨어서 갔는데 검문소에서는 군인들이랑 운전사가 얘기하는 게 다 들렸다.”

 

-말 그대로 목숨 걸고 광주로 갔는데, 검문소에선 꽤 무서웠을 것 같다. 

“각오가 돼 있었다. 난 이미 12·12 때 한남동에 가려다 담당 부장이 절대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해서 (취재를) 포기했었다. 광주 현장에는 먼저 간 성창기·오홍근 선배와 그 팀이 취재를 하고 있었고, (서울에서) 난 이 팀이 취재한 것을 전화로 불러주면 메모해서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다 (광주에) 갔으니 이미 독이 올라 있었다. 나는 광주에서 정보 보고하고 기사는 오홍근 선배가 썼는데 계속 묵살됐다.” 

 

-광주에 가서 끔찍한 학살 현장을 봤는데, 트라우마가 남지 않았나.

“광주에 가기 전에 나는 맥주만 조금 먹고 소주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녀오고 나서는 눈을 감으면 장면이 훤히 파노라마처럼, 환영이 뜨니까 소주를 한병씩 마시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거의 1년을 그러다 ‘이렇게 알코올 중독이 되는구나’ 싶었다. 나는 6·25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6·25와 광주를 경험한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전쟁 때도 이러진 않았다’고 한다.”

 

-광주에서 무엇을 봤나?

“시신들을 정말 많이 봤다. 너무 처참한 일이 벌어지니까 보안사에서 이걸 역으로 이용했다. 광주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 알려지면 보안사에서 그게 ‘거짓말이다, 유언비어 퍼트린다’고 선동했다. 군인들이 처녀들 가슴을 잘랐다. 사실이다. 여러 곳에서 봤고 목격담도 많다. 그런데 현장에 없었던 사람이 들으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보안사에서 유언비어라고 하는 걸 믿는 거다. 현장 취재한 외신들은 보도하니까 외국에선 다 아는데 광주를 고립시키고 접촉을 차단하니까 한국에서만 몰랐다.” 

 

-미디어오늘을 통해 공개한 1980년 당시 일기를 보면 1980년 7월30일 동양방송·중앙일보 전체 구성원들이 사표를 썼고 8월1일 김준범·한종범 두 기자가 강제 해직 명단에 포함됐다. 이후 7년 정도 취업이 제한됐는데 어디서 일했나.

“5선·국회부의장까지 한 김덕규 의원 초선 때(1981~1985년) 연설 원고 쓰는 비서관을 했다. 의원에게 상임위를 국방위원회로 가달라고 요청했고 난 의정활동을 열심히 뒷받침했다. 내가 80년에 군인들에게 해직을 당했으니 신군부가 대체 뭘 하는지 알아내려고 국방위에서 자료 요청해서 공부를 많이 했다. 보통 2년하고 상임위를 바꾸는데 김덕규 의원은 4년 내내 국방위에 있었다.” 

 

-‘취업제한’이면 언론사만 못 가는 건가, 아니면 다른 기업에도 못 가는 건가.

“다른 직장도 못 간다. ‘7년 취업제한’ 사실은 아주 최근에 자료가 나와서 알았다. 그래서 의문이 풀렸다. 김덕규 의원실에 비서관으로 일했지만 정직원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일을 시작했는데 월급날 보니 다른 비서관처럼 국가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고 의원이 개인적으로 하얀봉투에 돈을 담아서 주더라. 당시 의원회관이 국회 울타리 밖에 있었다. KBS 직원들 쓰는 아파트를 의원회관으로 썼는데 거기서 국회 본회의장에 가려면 출입 패찰이 필요했다. 나는 임시패찰을 받아서 다녀야 했다. 의원한테 물어보니 보안사 국회 담당자가 (의원에게) ‘아직 (내 취업) 시기가 아니다’라고 제동을 걸어 정식 비서관으로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고 했다. 당시엔 보안사·경찰 이런 곳에서 국회나 언론사 등을 출입했다.”

 

-당시에는 언제까지 취업이 제한될 것인지도 몰랐던 건가. 

“1년 참고, 2년 참았는데도 (취업제한이) 풀리지 않아 의원에게 말하고 3년째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일을 했다. 석사학위를 받고 국회의원 임기도 끝나 이듬해부터 대학강의를 나갔다. 보따리 장사(시간강사)하는데 시간당 6000원이었다. 강의 하던 중에 중앙일보에 있던 선배가 제일기획 사장으로 갔는데 그분이 나한테 ‘밥벌이가 되겠냐. 이력서 하나 써서 출근하라’고 했다. 사장 자격으로 채용을 시켜준 거다. PR부에서 일했다. 해직되고 처음 정식 월급을 받았다.” 

 

-중앙일보로는 언제 복직해서 얼마나 다녔나? 

“1988년 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면서 각 언론사에 해직언론인 복직 얘기를 했다. 처음에는 월간중앙으로 복직했다가 중앙일보로 갔다. 국방부 출입기자 5년 했다. 국방위 하면서 기본이 돼 있었고 인맥도 많았다. 5월 광주에 대해 취재를 많이 했다. 2001년 7월 국방홍보원장으로 갈 때까지 중앙일보에서 근무했다.”

 

김 기자가 일하던 TBC는 삼성이 1964년 만든 방송사다. 이듬해 삼성은 1965년 중앙일보도 만들었다. 신군부는 중앙매스컴(중앙일보·TBC)을 분리해 TBC를 KBS에 흡수시켰다. 그가 월간중앙으로 복직한 배경이다. 1980년 해직된 언론인들은 1984년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를 만들었다. 지난 2021년 5월에서야 ‘5·18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과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해직언론인들도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 1980년 11월30일 TBC 고별방송. 사진=유튜브 'Vintage Archive' 갈무리
 

-80년 해직언론인들은 1974~75년 유신정권에 저항한 동아투위·조선투위에 비해 조명받지 못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동아일보 편집국에 깡패들이 난입해 기자들을 끌어내고 무릎을 꿇렸다. 동아일보가 백지광고를 내면서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줘 언론자유 투쟁을 했다. 박정희 억압통치 속에서 선명하게 투쟁하니 국민들이 박수쳤고 이를 근간으로 오랜 세월 투쟁을 끌어올 수 있었다. 반면 80년 해직은 조폭이 와서 폭력을 쓴 게 아니라 어느 날 ‘자체 정화’라는 형식으로 전체 언론인들이 자기 손으로 사표를 써서 냈기 때문에 형식상 하자가 없었다. 또한 5공 초기에는 이런 문제가 이슈화될 틈을 주지 않았다. 여러 이벤트를 생산해내 사건으로 사건을 덮었다. 국풍81 한다고 시끄럽고 이산가족 찾기 하느라 여의도 광장이 가득하고 정신이 없었다.”

 

▲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을 나타내는 이용호 화백의 2005년 미디어오늘 만평
 

-교묘한 방법으로 언론을 길들인 것인가.

“언론사가 통폐합됐다. KBS로 흡수되고 통신사도 연합통신 하나로 만들었다. 그래 놓고 남은 언론인에게는 사탕을 듬뿍 줬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를 만들어 방송사 광고의 통행세를 받아 그 돈으로 언론인들 해외연수도 보내고 복지기금으로 썼다. 언론인들이 규합해 단체행동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고 먹고 살기 바쁜 상황이 됐다. 나중에 80년 해직 과정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국방부 정훈국장을 했던 신군부 핵심 인사를 만났는데 ‘80년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 전에 언론사 사주들이 신군부에 당당하게 맞섰다면 군인들이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하더라. 칼을 빼기도 전에 무릎 꿇고 살려달라니까 보안사에서는 작전을 펼 필요 없던 거다. 언론인들에게 정말 뼈아픈 얘기다.”

 

-새 정부의 과제 중에 5·18을 헌법에 명기하는 문제도 있다. 

“5·18을 지금 ‘5·18민주화운동’이라고 노태우 정부때 왜곡된 용어로 만들어놨다. 두루뭉술하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정확하게는 ‘5·18 광주민중항쟁’이다. 1979년 10월 당시 ‘부마사태’라고 하던 것도 이제 ‘부마민중항쟁’이라고 하지 않나. 광주에서 엄청난 살육전이 벌어졌고 세계가 증언했는데 항쟁이라고 하지 못하나.”

 

-민중항쟁에는 시민들의 저항성이 잘 반영됐다는 주장인가.

“그렇다. 광주민중항쟁의 도화선은 공수부대가 광주라는 지점을 찍어서 무자비한 살육전을 벌인 것이다. 이번 12·3 내란도 윤석열이 국회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광주는 80년 5월16일에 평화시위를 했고 경찰이 이들을 보호했다. 끝나고 참여한 시민들이 성금을 거둬 경찰한테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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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 상황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면 어울릴까.

“맞다. 만약 광주가 아니라 대전이나 부산, 대구나 인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폭력을 썼다면 그 지역 시민들은 가만히 있을까? 광주사람만 독해서 저항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내 자식, 내 이웃이 죽어가는데 그럴 수 없다. 정치적으로 목표를 정하고 시작한 일이고 민중이 저항했다.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헌법에 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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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16 15:49
▲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관계자들이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맞아 16일 낮12시에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은 모습. 사진=80년해언협 제공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앞두고 22대 국회가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고, 5·18 언론보도 백서 발간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80년해언협)는 16일 <22대 국회는 5·18정신의 헌법전문 명기를 완수하라>는 성명을 내고 “그동안 5·18 관련법들은 최소한의 이행기 정의를 실천하는 과제에 충실했다”며 “이제 그 바탕 위에서 5·18의 참 의미를 살려 국가공동체의 기본가치로 삼고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명기해 그 역사적 의미에 부응하는 한편 미래세대에게 전수해 지속가능한 국가공동체 발전의 밑돌을 견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0년해언협은 1980년 5월 당시 군부에 맞서 검열 철폐를 주장하며 제작거부하다 해직됐고 제8차 5·18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언론인들의 모임이다.

 

80년해언협은 “현행 헌법전문에 명기된 3·1운동은 강탈당한 국민주권을 되찾기 위한 항일 독립투쟁이었으며 헌법전문에 또 하나 수록된 4·19혁명은 이승만 장기독재와 3·15부정선거에 항거한 민주화 투쟁”이라며 “5·18민주화항쟁은 이같은 3·1운동과 4·19혁명을 기둥으로 삼고 있는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국권을 찬탈하려는 내란집단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은 채 목숨을 걸고 항거한 실천행동”이라고 했다. 

 

80년해언협은 “22대 국회가 5·18민주화항쟁 정신을 헌법전문에 명기하기를 엄숙히 요구한다”며 “국민의 뜻에 따라 국회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한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윤석열 대통령도 후보 때 공언한 5·18정신의 헌법전문 명기를 완수하는 사명에 주도적으로 나서기 촉구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80년해언협은 “우리는 부당한 권력과 그 앞잡이 언론에 역사적 교훈과 함께 경종을 울리기 위해 민주항쟁 시위대를 폭도라고 매도했던 당시의 언론보도 실태에 대한 백서 발간에 나설 것”이라며 “국회는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5·18 언론보도 백서 발간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거나 그 지원에 관한 결의안을 의결하기 바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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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해 지난 15일 국회에서 민주당 전국청년위원회 경제정책위원회(위원장 이지현)가 개최한 ‘5·18민주화운동 헌법전문 수록과 민주주의의 길’이란 토론회에서 이지현 위원장(고려대 정부학연구소 연구원)은 “5·18은 지금까지 이념화, 정쟁화로 얼룩져 청년세대로 대물림되면서 혐오와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면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서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으며 오직 민주주의 전진만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책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을 쓴 정아은 작가는 “법은 권력자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시작돼 결국엔 노예와 소수인종과 여성 같은 약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통로로 자리잡았다”며 “법이 가진 시공간을 뛰어넘는 폭넓은 영향력을 생각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헌법전문 수록의 의의를 예측해 볼 수 있다”고 의미를 짚은 뒤 “5·18민주화운동 헌법 전문 수록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역사적 사건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유인하는 강력한 닻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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