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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1923년 9월 1일을 다시 기억한다!

by 무궁화9719 2024. 9. 2.

광복회, “‘간토대학살 101주기’에 정부는 성명 하나 안내나”

  • 기자명 이광길 기자 
  •  입력 2024.09.03 07:55
  •  수정 2024.09.03 08:50

「간토대학살 101주기」를 맞아 광복회(회장 이종찬)가 2일 ‘입장문’을 통해 “정부는 흔한 성명 하나 내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한다”고 비판했다. 

 

후쿠다 야스오 전 일본 총리가 도쿄 한국문화원을 찾아 고인들을 기리며 “한일 모두 그걸 제대로 생각하고 협력하라”고 제언하고, 일본 언론도 사설에서 “일본 정부가 역사를 직시하지 않고 있다”면서 “사실을 인정하고 실태를 밝히라”고 촉구한 것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광복회는 정부에 묻는다”면서 “이 역사를 눈감아주며 여전히 반성 없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를 따라 자민당과 같은 입장에 설 것인가, 아니면 “사실을 인정, 실태를 조사하고 역사를 직시하라”는 일본의 양심 있는 소리에 힘을 합할 것인가”라고 다그쳤다. 

 

광복회는 “한일 양국의 화해를 진정으로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러자면 가해자 쪽인 일본 정부의 진정한 반성의 마음이 선결조건이다. 일본은 역사와 인류에 대한 진정한 평화애의 정신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지난달 29일 김동연 경기지사를 만난 이종찬 회장. [사진-광복회]
 

이에 앞서, 지난달 29일 이종찬 회장은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만나 ‘수도권 독립기념관 추진’ 문제를 논의했다. 

 

김 지사는 “광복절을 전후해 올바르지 않은 역사인식에 대해 어른으로서 중심을 잡고 올바른 역사관과 소신 있는 말씀을 전해주셔서 존경하고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다”면서 “지방정부지만 1,410만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경기도에 독립기념관을 설립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종찬 회장은 “17개 광역단체장 중 가장 존경하는 한 분이며 여러 일로 고민이 많은 데 우리 광복회로서 큰 용기를 주는 일”이라면서 “경기도에 독립기념관을 설립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며,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입지선정 등 경기도와 함께 논의하겠다”고 화답했다.

 

광복회 간부들도 “천안의 독립기념관이 수도권에서는 너무 멀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만큼 수도권에 최초로 독립기념관이 만들어진다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독립기념관으로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환영했다.

 

한 간부는 “천안의 독립기념관에는 역사를 왜곡해온 독립관장이 들어왔기 때문에 새로운 독립기념관이 더욱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고 광복회가 전했다.

 

한편, 조국혁신당 김준형 외교특별위원장은 2일 “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태어난 지 145주년이 되는 날”이라고 상기시켰다.

올해 1월 일본 당국은 “안중근은 우리나라의 초대 총리를 살해하고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했는데, “현재 김문수, 이진숙, 김형석 등 친일매국 뉴라이트 인사들이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테러리스트로 매도하고 있다”면서 “이런 인물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 역시 테러리스트로 간주되는 것인가”라고 꼬집었다. 

1923년 9월 1일을 다시 기억한다!

[기고] 이규수 강덕상자료센터장

  • 기자명 이규수 
  •  입력 2024.09.01 00:00
  •  수정 2024.09.01 00:02

101년 전,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6천여 명의 조선인이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왜 이렇게 많은 생명이 빼앗겼는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모른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인 희생자는 얼추 6천여 명이라고 말하지만, 이 사건으로 살인범으로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상대가 조선인이었기에 살인도 허용되는 광란의 시대였다. 왜였을까. 국가 권력이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사건을 은폐하려고 사실을 왜곡 전파하여 진실을 호도한 것, 그리고 엄격한 언론 통제를 통해 위반자를 처벌한 것 등 기만과 협박의 결과일 것이다.

 

반면 진상을 조사한 일본 민중의 의식에도 의구심을 감출 수 없다. 민중이 남긴 방대한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학살 사건은 지진 일반론 속에 함몰되어 초점이 흐려졌다. 지진 상황에서 최대의 충격은 대지의 흔들림이나 화재가 아니라 '조선인 사냥'이었을 터인데 이를 그대로 솔직히 기록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몇몇 조선인이 목숨을 걸고 사건을 조사하여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이나 자신의 체험을 주변에 알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6천여 명으로 추정하는 희생자 수도 다름 아닌 조선인의 조사 결과였다.

 

역사 속의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고 있다. 조선인 학살 문제의 역사적 진실은 해결되지 못한 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는 망언은 우리에게 지금도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은폐된 학살의 기억을 정당하게 되살려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학살당한 조선인의 외침에 대해 이제 한국 사회가 응답할 차례다. 조선인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할 때다.

 

조인승 할아버지의 '외침'

 

(9월 1일은 지진으로) 집이 위험하다고 해서 아라카와(荒川) 둑으로 가니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1일 저녁에는 불이 타들어오기에 요츠키(四ツ木) 다리를 건너 동포 14명과 함께 있었다. 그곳에 소방단원 4명이 와서 밧줄로 우리를 염주알 꿰듯이 묶고는 말했다. "우리는 이 자리를 뜨지만 밧줄을 끊으면 죽이겠다!" 가만히 있으니 밤 8시경 건너편의 아라카와 역 방면의 둑이 소란스러웠다. 조선인을 죽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다음날 5시경, 소방단원 4명이 다시 와서 데라시마(寺島) 경찰서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넜다. 그곳에 3명이 끌려와 일반인들에게 뭇매를 맞고 살해당하는 것을 우리는 옆 눈으로 보면서 다리를 건넜다. 그때 내 발에도 쇠갈고리가 와서 박혔다. 다리는 시체로 가득했다. 둑에도 장작더미가 쌓여 있듯이 여기저기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 (関東大震災時に虐殺された朝鮮人の遺骨を発掘し追悼する会, 『風よ 鳳仙花の歌をはこべ』, 教育史料出版会, 1992)

 

이 증언은 1923년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고(故) 조인승(曺仁承) 할아버지의 눈물어린 이야기다. 1923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가 반년 정도에 지나지 않은 21세 청년이 체험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증언이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버거운 학살 상황,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꼈을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까? 학살당한 자를 향한 살아남은 자의 회한은 어느 정도였을까? 왜 이런 학살이 일어났는가? 도대체 누가 학살을 주도했을까? 학살 책임 문제는 밝혀졌는가?

 

조선인 학살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이 일어난 지 101년을 맞았다. 100년+1년을 되새기는 일은 단지 숫자를 기억하자는 이벤트가 아니다. 일본에 정치적 논란을 일으켜 배상을 요구하거나 국제사회에서 궁지로 내몰려는 것도 아니다. 학살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직시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야만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기억함으로써 한 사건으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가슴에 새기고, 학살의 진상과 책임 소재를 재인식하기 위함이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일본 사회에서 체험한 극단적 차별과 배외주의를 뛰어넘어 역사를 복원하는 과정이었다. 숨겨진 사료의 발굴, 학살의 실태 조사와 유골 발굴, 추모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기록을 영상으로 남기려는 눈물겨운 노력도 이루어졌다.

 

조인승 할아버지의 증언도 학살을 기억하려는 연대 운동의 성과였다. 체험자의 증언의 '힘'은 강렬하다. 연구서와 논문이 전하지 못하는 역사적 진실을 생생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정파적 입장에 따라 진실 수용 여부는 왜곡될 여지도 있지만, 연구와 증언 등은 학살의 정황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엄연한 사실로 존재한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을 바라보는 최근의 상황은 크게 우려스럽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로 조선인 학살 자체를 부정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역사수정주의의 대두와 함께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망각하려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대응과 인식도 문제다. 미디어 보도 등을 통해 몇 장의 조선인 학살 사진 등이 알려져 있고, 자경단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인 학살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일본에 조선인 학살을 둘러싼 진상과 책임 규명을 제대로 요구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정부에서도 언급을 금기시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는 군대 위안부와 강제 동원 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하지 않았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조선인 학살을 다루는 연구자가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를 잘 말해준다. 

 

조선인 학살 문제는 제국과 식민지라는 부조리한 과거사의 모순을 드러낸다.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한일 양국이 역사적 진실을 공유하고 부조리한 과거를 거울삼아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이런 의미에서 조인승 할아버지의 '외침'은 여전히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문제에 좀 더 천착해야 한다는 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이제라도 할아버지의 외침에 대해 한국 사회가 응답해야 한다.

 

1923년 9월 1일의 기억 방식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관동지방 남부에서 발생했다. 규모는 M 7.9, 진원은 사가미만(相模灣) 서북부(동경 139.3도, 북위 35.2도)로 계측되었다. 지진은 오다하라(小田原)와 네부카와(根府川) 방면이 가장 격렬했지만, 도쿄와 요코하마는 지진에 의한 화재가 겹쳐 피해가 컸다. 도쿄는 3일 아침까지 화재가 계속되었다. 지진에 의한 피해는 사망자 99,331명, 부상자 103,733명, 행방불명 43,746명, 가옥 전파 128,266호, 가옥 반파 126,233호, 소실 가옥 447, 128호, 유실 가옥 868호이며 이재민은 약 340만에 달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지정했다. 이날이 가까워지면 언론계와 행정기관이 각 가정에 피난 용구, 긴급 식량의 준비와 점검을 홍보하고, 재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날을 자연재해의 공포를 상기하는 날로만 지낼 수 없다. 이날은 지진과 화재의 공포보다 벌건 대낮에 공공연한 살인으로 충격을 준 날이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어디선가 흘러나와 계엄령이 내려졌다. 자경단을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조선인 학살이 자행된 인재의 날이었다.

 

1923년 9월 1일은 그동안 어떻게 기억되었을까? 지금까지 조선인 학살 연구는 학살의 실태와 그 배경을 밝히는 데 초점을 맞췄다. 기존 연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재일조선인 연구자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과 '관동대지진 ○○년'처럼 기념할 만할 시점마다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조선인 학살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40주년을 맞이한 1963년 무렵이었다.

 

재일 역사학자 고 강덕상 선생 [사진-이규수 제공]
 

그 중심에는 재일 사학자 강덕상(姜德相)의 헌신이 있었다. 일련의 논문과 저서, 자료집을 통해 유언비어의 진원지와 학살의 진상을 밝혀냈다. 논의가 진전되면서 유언비어의 발생 원인을 둘러싼 논쟁도 이루어졌다. 논쟁은 유언비어의 '자연 발생설'과 '의도적 날조설'로 구별된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체화한 일반 대중이 유언비어에 편승했다는 점과 그 배후인 관헌의 존재가 드러났다. 조선인의 체험담과 목격자의 증언을 기록하는 활동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학살을 목격한 일본인들의 증언과 자경단의 실상 등이 밝혀졌다.

 

연구의 진전과 더불어 조선인 학살을 이른바 '3대 테러 사건'의 하나로 바라보려는 시각을 둘러싼 논쟁도 촉발되었다. 이 논쟁은 조선인 학살을 가메이도(亀戸) 사건, 아마카스(甘粕) 사건과 동일한 위치에 놓는 것에 대한 강덕상의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이 논쟁은 조선인 학살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강덕상은 "조선인 사건을 다른 사건과 병립시키는 것은 역사적 의의와 사실을 왜곡하고 관헌의 은폐 공작과 한 축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오스기 사건, 가메이도 사건은 관헌에 의한 권력 범죄, 밀실 범죄, 일본 민족 내부의 계급 문제다. 이에 반해 조선인 사건은 관민과 일반 민중이 가담한 민족 범죄다. 일본의 배외 내셔널리즘의 희생이 된 사건이었다"고 강조했다.

 

또 강덕상은 "당시 왜 계엄령이 공포되고 군대가 출동했는지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며 계엄 행위를 조선의 민족해방투쟁사와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조선인 학살은 계엄령 아래 자행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시각을 제시한 것이다.

 

조선인 학살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문제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동시에 조선의 해방 투쟁과 분리해서는 그 역사적 자리매김이 어렵다. 학살과 식민지 지배, 민족 해방 투쟁의 고양은 인과 관계로 얽혀 있다. 조선인 학살은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이를 지탱한 일본 민중이 강력한 적인 조선 민중을 두려워한 것에서 발생한 집단 살인이자 민족 범죄였다. 한일 간의 부조리한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돌출한 또 하나의 잔혹한 사건이었다.

 

강덕상은 무엇보다 계엄령에 주목했다. 계엄령이란 내란 또는 전쟁 때 발령된다. 강덕상은 "왜 지진이라는 자연재해에 계엄령이 발령되었고, 내란을 일으킨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강덕상은 '계엄령은 조선인에 대한 선전 포고'라며 조선인 학살 문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동대지진 당시 왜 계엄령이 내려졌는지를 생각할 때, 학살 사건의 전제로서 30년에 걸친 전사, 즉 갑오 농민군과의 전쟁 그리고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강점에 반대하여 전국을 선혈로 물들였던 7년에 걸친 의병 전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이런 전쟁을 체험하면서 조선에 대한 '적시(敵視)' 사상을 형성했다.……관동대지진 당시의 학살은 우연히 일어난 조선 민족의 비극이 아니다. 조선 민족 해방 투쟁의 국제화를 배경으로 침략과 저항이 만들어낸 민족 대결이다. 이것이 '위법'적인 계엄령 발포의 진상이다. 계엄령은 조선인에 대한 몰살 선언과도 같다. 조선인 학살 문제를 1923년에 일어난 사건으로만 한정하면 안 된다. 그 이전부터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벌인 일본의 선전 포고 없는 전쟁이다, 갑오농민전쟁과 의병 전쟁의 연속 과정에서 이루어진 학살이다."

 

강덕상의 조선인 학살 연구는 관련 연구의 방향성을 명료화한 기념비적 업적이다. 하지만 많은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학살 문제는 해명해야 할 영역이 여전히 많다. 무엇보다 희생자에 대한 조사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정확한 희생자 통계도 불분명하다. 안타깝게도 일본 정부가 조선인 희생자를 조사한 비밀 자료의 일부만이 확인된다.

 

작년 100년을 맞이해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을 대상으로 한 심포지엄 등이 자주 열렸다. 관동대지진이라는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한 학살에 대해 중국인을 포함한 연구 시야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는 환영할 일이다.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의 공통점과 차이점 등을 규명하면 학살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구 방향은 강덕상이 강조한 '사건의 본질'을 충분히 인식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조선인 학살 문제는 일본인과 중국인 학살 문제와 달리 식민지 지배의 문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학살의 망각, 그리고 다시 기억하기

 

지금 일본 사회에는 역사 부정론이 급격히 힘을 얻고 있다. 1990년대 이후의 사회경제적 위기감이 팽배해진 상황을 틈타 일본에서는 역사수정주의가 전면에 대두되었다. 이들은 교과서가 근현대사 부분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지배, 전쟁 책임 문제 등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전체적으로 일본의 '어두운' 면만을 드러낸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국가에 대한 일본식 '애국심'을 강요하며,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국민 만들기'로 지지 계층을 확대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기존 우익 인사들만이 아니라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 세대의 역사 인식에 직접 영향을 미쳐 혐한⋅배외주의를 유포하고 있다. 혐한과 배외주의 운동은 일부 계층의 일탈 행위로만 간주할 수 없다. 넷우익의 선전에 따라 역사 부정론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시민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 6천여 명이라는 조선인 희생자는 과장된 것이고, 설령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당 방어였다고 강변한다.

 

역사 부정론을 표방하는 세력이 최근에는 제국 일본이 자행한 부조리를 지적하는 위안부 연구자를 비롯한 양심 세력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 역사 부정론은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도 작동한다. 대표적인 예는 헤이트스피치(혐오 발언)와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의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추도사 송부 거부 사태다. 그동안 추도식은 한일 양국의 시민들에 의한 학살에 대한 반성과 추모의 상징으로, 조선인 학살의 역사를 교훈 삼아 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하자는 의미에서 보수적인 도지사들도 추도사를 보내왔다. 그러나 고이케 도지사는 2017년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에 추도사 송부를 거부했다.

 

역사 부정론자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진실'은 자경단 등에 의해 6천여 명이 살해됐다는 추모비는 잘못된 것이고 일본인 또한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우익 단체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을 방해할 목적으로 추도식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위령제를 개최했다. 집회에는 "6천여 명이라는 거짓말에 우호는 없고 사과는 필요없다"는 선전 간판도 세웠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의 '불령 행위'에 자경단이 정당하게 방어한 것이라고 외친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했다.

 

일본의 혐한과 배외주의 운동은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주변국과의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주변 국가에 대한 적의를 발동시켜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으로 전화시키려는 것이 그들이 노리는 프레임이다.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부정도, 추모에 대한 거부감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역사 부정론이 팽배한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 학살의 기억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조선인 학살 100년+1년을 맞이하여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연구의 심화와 함께 다양한 활동이 요청된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일 간의 역사 문제를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조선인 학살이라는 야만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게 전승할 것인가?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거나 일본 정부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급을 저지했다. 학살당한 6천여 조선인의 죽음을 그냥 묻어두는 것은 역사가 저지르는 또 다른 범죄 행위다.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외롭지만 꾸준하고 힘 있게 문제를 제기해 온 재일조선인과 양심적인 일본인의 운동을 거울삼아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한국 그리고 더 나아가 북한도 연대하여 일본 정부에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23년 9월 1일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자세가 남⋅북한과 일본의 양심 세력이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이다. 조선인 학살의 실태와 기억을 사회화시키고 전승하는 일이 관동대지진 100년+1년을 맞이하는 출발점이다. 남⋅북한과 재일조선인 사회, 그리고 일본 시민 사회의 새로운 연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규수 (강덕상자료센터장)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전공은 동아시아 속의 한일 관계사며,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등을 역임했다.

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장으로 역사 문헌을 바탕으로 근대 일본과 일본인의 한국 인식과 상호 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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