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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6.10.4.19(민주화운동)외 형제복지원.실미도 등 등..

[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⑥]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거리 위 언론인의 노래

by 무궁화9719 2024. 5. 1.

[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⑦] 이근안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2024년 05월 03일 18시 00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일곱번째 글은 박종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이 썼습니다. - 편집자주 
 
 
 
 
1978년 가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제도 언론이 철저히 외면하는 민주화운동 관련 소식을 ‘동아투위 소식’에 한두 건씩이라도 싣기로 했다. 비록 몇 백 부 안 되는 유인물이지만 역사의 기록을 남긴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비록 펜과 마이크는 빼앗겼지만 우리는 변함없는 언론인이며, 언론인으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 해 10월 24일은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동아투위는 명동에 있는 음식점 한일관에서 조촐한 기념식을 갖고 ‘동아투위 소식’을 배포했다. 평소보다 다소 두툼해진 유인물에는 제도 언론이 철저히 외면하고 묵살한 125건의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가 게재돼 있었다. 음식점 주변엔 대여섯 기관에서 나온 정보 및 수사기관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기념식이 끝난 뒤, 경찰은 귀가하던 홍종민 총무를 연행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0월 26일 안종필 위원장, 안성열 선배, 나 세 사람을 연행했다. 나는 유인물의 작성자였으므로 당연히 연행될 걸로 미리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동아투위는 잇달아 성명을 발표했다. '연행하고 연행하라! 존재하는 진실과 정당한 논리는 수갑으로 얽어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 언론이 꽃 필 때까지 싸울 것이다'.
 
△ 10.24 자유언론 선언 후, 별관 신동아편집실에서. 왼쪽부터 고 김성균, 박종만, 김언호, 양한수, 김동현.
 
장윤환, 김종철, 정연주 등 투위 동지들이 줄줄이 연행되었다.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지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어두운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의연한 표정들이었다. 내 집과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압수해 간 것 외에는 더 이상 무슨 증거를 찾아낼 일도 없고, 사실 관계를 놓고 ‘그렇다’, ‘아니다’ 다툴 일도 없으니 엮여 간 사람은 많아도 조사는 빨리 끝났다.
 
그런데도 상급기관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구속영장은 아주 늦게 떨어졌다. 첫 연행이 시작된 지 18일 만에 연행된 열 명 가운데 안종필, 안성열, 장윤환, 홍종민, 김종철, 나 여섯 명이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그리고 여섯 동지가 구속된 뒤에도 다음 해 1월 초까지 정연주, 윤활식, 성유보, 이기중 네 명이 더 구속되어 동아투위에선 모두 열 명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피고가 더 당당한 이상한 재판

동아투위는 최대한 강력한 법정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이돈명, 황인철, 홍성우, 이세중, 홍남순 등 당대의 저명한 인권 변호사 22명이 참여하는 막강한 변호인단을 구성해 재판에 임했다. 변호인단은 변호사 선임료를 사양했을 뿐 아니라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면서 열성으로 변론했다. ‘유신 법정’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사도 검사도 피고인도 모두 ‘양심의 법정’에선 무죄라는 걸 알고 하는 재판이니 그건 재판이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재판받는 피고들이 오히려 더 당당하고 판사나 검사가 되레 수세적인 그런 이상한 재판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재판도 그랬다. 열 명의 동아투위 동료들은 하나같이 당당하게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하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폐지를 주장했다. 나도 거침없이 내 생각을 밝혔다.
 
 
△ 1975년 4월1일 동아투위가 동아일보 창간 55주년 기념식을 별도로 가졌다. 오른쪽부터 박종만, 권영자 위원장, 고 배동순, 고 김창수.
 
내가 구속된 이후, 아내는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KNCC 인권위원회 간사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구속되자 KNCC 측이 배려해 준 것이었다. 아내는 따분한 출판사 교정 일에서 벗어나 구속자 가족들과 연대하고 각종 인권 관련 모임에도 동참하는 사뭇 역동적인 일을 하면서 전보다 훨씬 활기차고 씩씩해졌다. 아내는 인권 탄압의 현장들을 지켜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투사가 되어 갔다. 어머니는 당시의 일을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상하셨다.
나는 이상하게도 항상 줄에 앉은 새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아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10월 하순 어느 날이었다. 무슨 일인지 2~3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던 아들이, 웬 낯모를 사람 둘을 데리고 집에 와서, 잠시 제 방에 들어가 무언지 뒤적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나갔다. 그러고는 또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며느리에게 물어봐도 신통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는 며느리도 데모를 한다고 밤늦게 들어왔다. 참으로 마음을 잡을 수가 없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들이 결국 서대문 구치소에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안절부절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남들처럼 억세고 강한 기골도 못 되는 터수에 철창생활이라니.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머릿속이 뒤숭숭하고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잡고, 하나님께 위안을 받고자 기도했다. 너무도 기막힌 일이지만, 의(義)를 위해 싸우다 받는 형벌은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정의를 외치다 죄 없이 받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고 값진 희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돌리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박종만 위원 어머니의 회고록 '나의 한 평생' 중
 
1979년 10월 27일 아침, 아내는 평소보다 일찍 면회를 왔다. 아내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 오! 노! 기억하시지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엔 무언가 섬광처럼 스쳐갔다. ‘오~노? 그게 어딘데? 멀리야, 가까이야?’ 다그치는 내 질문에 아내는 대답했다. ‘아주 가까이요.’ 아내의 대답을 듣자 다리 힘이 쭉 빠지며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 때 입회 교도관이 아내의 말을 제지했다. 그때까지도 재소자들에겐 박정희 사망 소식을 알려주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거였다. 면회를 마치고 감방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허공을 걷듯 걷잡을 수 없이 휘청거렸다. 나는 방문을 열자마자, 영등포 교도소로 이감된 뒤 한 방에 기거하던 안성열, 장윤환, 두 선배를 향해 소리쳤다. ‘박정희가 죽었대요! 박정희가 죽었대요!’ 나는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짧았던 서울의 봄

10‧26사태가 발생하고 3주도 더 지난 11월 21일, 나는 영등포교도소에서 풀려나왔다. 다른 동료들도 열흘, 보름 간격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경찰서에 연행될 때부터 풀려날 때까지 13개월. 나와 내 가족에겐 짧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고생에 비하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기도 했다.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었지만 그 며칠 뒤인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로 정국은 심상치 않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1980년 1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신군부 세력은 잠시 유화 국면을 조성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제적됐던 학생들을 복학시키고, 이어서 해직교수들도 복직시켰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무언가 희미한 빛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동아투위는 잇달아 성명서를 발표하고 우리의 명예로운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자유언론 회복운동에 나선 각 신문사의 기자들도 동아‧조선투위 해직기자들의 복직을 촉구하고 나섰다. 특히 기자협회는 동아‧조선투위 해직기자들의 복직투쟁을 결의하고 해직기자 복직의 당위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꺼져가는 언론자유의 불씨를 안고 그들은 감옥에 끌려들어 가기도 하고 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그 불씨를 끝내 지켜왔다. 이제 그들이 간직했던 언론자유의 불씨는 한국 언론의 심장에 옮겨 놓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복직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새삼스럽게 전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말을 더한다면, 한국 언론이 양심을 회복했다는 징표를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도 우리는 그들을 하루 빨리 복직시킬 것을 요구한다.
기자협회보 1980.4.25
 
1980년 ‘서울의 봄’은 짧았다. 5월 15일의 대규모 학생시위로 절정에 이르렀던 민주화 투쟁의 열기는 5월 17일 새벽 0시를 기해 내려진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무참히 좌절되었다.
 
△ 1981년 5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1년만에 석방된 한빛교회 이해동 목사 환영예배를 마치고. 맨 왼편 박종만, 그 다음 윤수경(아내), 한 사람 건너 이해동 목사, 그 다음 이 목사 부인 이종옥 여사.
 
그 시간 동아투위 동지들은 수유리에 있는 명상의 집에서 ‘새 시대 새 언론’을 주제로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동아투위의 진로 모색을 위한 철야 토론을 하다가 긴박해진 상황을 전해 들은 우리 동지들은 서둘러 토론을 중단하고 산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홍종민 동지와 함께 산길을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홍종민은 내 뒤를 이어 동아투위 총무를 맡았고, <민권일지> 사건으로 감옥살이도 함께 한 동지이다. 그날 우리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야구 구경도 하고 부근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 늦게 헤어지면서 나는 그에게 '당분간은 집에 들어가지 말자'라고 강력히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그동안 '별로 한 일이 없으니 괜찮을 것'이라면서 내 권고를 뿌리치고 부득부득 자기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그는 집 앞에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그리고 구타, 물 먹이기 등 온갖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23일 만에 체중이 10kg이나 빠진 상태로 풀려났다. 그는 이때 얻은 심장병 때문에 심장박동기를 달고 살다가 결국 그 병 때문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는 그날 밤 집으로 가려는 그를 한사코 막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고 가슴 아파했다.

남영동 대공분실, 영혼을 파는 모멸감

나는 그날 이후 두 달 가량 이리저리 숨어 다녔다. 그러다가 식구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 숨어 다니는 게 지겹기도 하여 7월 중순 어느 날 통금이 임박한 늦은 시간에 집 주변을 한참 살펴보다가 재빨리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집에 들어선 지 2~3분이나 지났을까? 어머니와 아내랑 막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나더니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문을 여는 순간 건장한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나는 곧 차에 태워져 어딘가로 연행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나를 태우고 내 눈을 가린 채 머리를 숙이도록 해서 도대체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20~30분쯤 걸렸을까? 그들은 나를 어느 건물로 데려갔다. 사방 벽이 빨간 어느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내 눈을 가렸던 헝겊을 풀어줬다. 그러고는 나에게 종이와 볼펜을 주며 다짜고짜 그동안의 내 행적을 쓰라고 했다. 내가 교도소에서 석방된 뒤 최근 수개월간의 행적을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쓰라고 윽박질렀다.
 
그들은 밤새 나한테 똑같은 일을 두세 번 반복해 시켰다. 다음날 아침 수사관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작은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봤다. 무슨 전철역 같은 것이 보여 자세히 보니 남영역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그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걸 알았다. 내가 집에서 연행될 때, 잠깐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더니 총을 꺼내들던 그 우악스럽게 생긴 수사관은 고문으로 악명을 날린 이근안이라는 자였다.
 
내가 남영동에 끌려간 주된 이유는 ‘서울의 봄’이 절정에 달했던 5월 15일에 발표된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서명한 것 때문이었다. 이 성명서는 학계, 종교계, 법조계, 문단, 언론계의 민주화를 갈망하는 인사들 1백34명이 서명한 것이었는데, 동아투위에선 나를 포함해 7명이 동참했다. 이 시국선언에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 여러 명이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변호사 한, 두 명은 한동안 변호사 일을 못 하게 되고, 일부 교수들은 강제해직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 1979년 11월 박종만 출감 직후. 맨 우측부터 이종옥(이해동 목사 부인), 박영숙(전 평민당 국회의원, 안병무 박사 부인), 김옥실(KNCC 총무 김관석 목사 부인), 박종만, 이우정(교수, 전 민주당 국회의원), 윤수경(아내), 박종만 바로 옆 뒷쪽 안계희(한빛교회 장로), 맨앞줄 앉아 있는 분 조정하(박형규 목사 부인).
 
내가 남영동에 끌려갔을 때는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직후의 살벌했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들어서 그랬는지 혹독한 고문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벽 색깔이 다른 이 방 저 방으로 나를 끌고 다니며 금방이라도 고문할 듯한 자세로 온갖 협박을 다했다. 밤낮으로 비슷비슷한 질문을 되풀이하고, 똑같은 자술서를 반복해서 쓰게 했다.
 
나는 8일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나는 수사기관에 끌려간 다른 어느 때보다도 심한 굴욕감과 참담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들은 나를 풀어주기 전에 각서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 게 일종의 반성문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 같은 데서도 몇 차례 각서를 썼지만 그때는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밖에 나가서 말하지 않는다'라는 일종의 요식절차 같은 것이어서 큰 부담감이 없었다.
 
그러나 남영동에선 내 영혼을 파는 것 같은 모멸감을 느끼며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 각서를 써줬다. 나는 어쩌면 내가 잡혀간 곳이 남영동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고문에 대한 공포 때문에 내 중심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대공분실 정문을 나서서 남영역까지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단단하다고 자부하던 내 의지의 허약함을 깨닫는 순간 내 삶 전체가 허물어지는 것 같은 허탈감을 느꼈다.  

불의의 시대, 살아간다는 어색함

그 한 해가 끝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동아투위 사무실마저 폐쇄되어 마땅히 갈만한 곳도 없고 신군부의 살인적인 폭압에 모두가 움츠러들어 있어서 함께 울분을 토로할 동료들을 만나 어울리기도 어려웠다.
 
나는 그 불의의 시대에 침묵하는 하느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역사는 뒷걸음질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하느님의 섭리 가운데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나의 믿음과 소망은 회의의 구름으로 뒤덮여 갔다.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강한 자를 바르게 하시는 하느님,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어디서나 정의를 살리시고 해방을 주시는 그런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확고한 것 같던 내 믿음은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게 포장되어 있었지 진짜 속 알맹이는 그렇게 허약했다. 나는 그렇게 때론 절망하고 때론 누군가를 원망했다.
 
△ 필자 박종만과 부인 윤수경 여사. 
 
먹고사는 문제도 점점 더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아내가 살림을 겨우겨우 꾸려나갔지만,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에 집 한 칸 변변히 없고 장래에 대한 전망도 절벽처럼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나는 감시 대상인데다 나이도 어중간해서 좀처럼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내 딱한 사정을 눈치챈 신문사 동기생 이종욱이 자신이 편집 책임자로 있던 출판사에 자리를 마련해 줬다.
 
1981년 1월부터 나는 출판사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6년 만에 정시 출퇴근하는 샐러리맨으로 돌아가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뭔가 좀 어색하기도 하고, 공연히 남의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준비위원회 후원
NH농협 301-0240-3680-71 재단법인 자유언론실천재단
 
제작진
원고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
디자인 이도현
출판 허현재

[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⑥]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거리 위 언론인의 노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2024년 04월 26일 18시 00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여섯번째 글은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이 썼습니다. - 편집자주 
 
1974년 봄부터 1975년 봄까지,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차고 격정적인 한 해를 보냈다.
 
특히,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 선언이 발표된 이후 1975년 3월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날 때까지 5개월 남짓, 나와 내 동지들은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 언론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젊음을 불태웠다. 우리는 그 싸움에 우리의 젊음을 걸었고, 우리의 인생을 걸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기자들은 지면 개선을 위해 끈질긴 노력을 했다. 여전히 권력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한 경영진과 간부진에 맞서 자유 언론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동아일보 지면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정권의 부도덕성과 야만성을 폭로하기 시작하면서 초라하던 몰골이 원래 그래야 할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자유 언론 투쟁의 물결을 잠재우기 위해 광고탄압이라는 전대미문의 악랄한 수단을 동원했다. 동아일보의 광고 면은 백지상태가 되었다. 광고 무더기 해약사태는 국민적 분노를 촉발했다.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민중의 함성이었다. 40여 년 뒤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낸 촛불 혁명의 씨앗이 이들 격려광고 속에 배태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몇 달을 못 버티고 결국 권력의 압력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동아일보사의 배신으로 나와 내 동지들의 투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 초기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고 홍종민 위원(오른쪽)과 함께.
 
동아일보사는 1975년 3월 8일, 이른바 경영합리화를 위한 기구 축소 해임이라는 명분으로 기자 18명을 해임함으로써 배신의 첫 신호탄을 올렸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은 권력과의 야합이 분명해진 회사 측에 항의하기 위해 3월 12일부터 전면적인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나는 제작거부에 들어간 첫날, 동지 16명과 함께 또다시(1974년 3월 노조 사태 때 한 번)  전격 해고되었다. 내 나이 33세, 입사한 지 7년 반, 결혼한 지 만 4년 되던 때의 일이었다. 이로써 나는 내 젊음과 정열을 모두 바쳐 일했던 첫 직장 동아일보사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고 오랜 세월 '거리의 언론인'이 되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들은 경영진의 배신에 항의하며 닷새 동안 농성을 벌이다가 1975년 3월 17일 미명(未明), 회사 측이 동원한 폭도들에게 떠밀려 강제로 쫓겨났다. 나는 22명의 동지들과 함께 2층 공무국에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통금도 해제되기 전인 새벽 3시에 끌려 나가 강제로 우석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우리는 병원 측의 치료 제의를 거부하고, 단식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기독교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날 낮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한 동지들의 권유로 130시간에 이르는 단식투쟁을 마쳤다. 그날 이해동(동아투위 명예위원) 목사의 부인 이종옥 여사와 안병무 박사의 부인 박영숙(전 평민당 국회의원) 여사 등이 쑤어 가지고 와 나누어 주던 녹두죽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긴급조치와 권력의 탄압

1975년의 봄과 여름은 길고도 암울했다. 4월 말에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정부는 모든 언론을 동원해 위기감을 극대화하더니 5월 13일엔 긴급조치 9호를 발표, 온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귀를 막았다. 갑자기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냉각되고 온 나라가 정적에 휩싸인 것 같았다.
 
그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동아투위 동지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회사에서 쫓겨나온 뒤 꼬박 여섯 달 동안 아침마다 동아일보사 앞에서 침묵시위를 하고 유인물을 돌렸다.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서울 거리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동아투위 동지들은 참고 견뎠다. 당장 맞아줄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성급하게 구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또 당국의 온갖 훼방 때문에 재취업의 문도 거의 막혀 있었다. 우리는 밤낮 수사기관의 감시를 받을 뿐 아니라, 일종의 ‘공민권 제한 대상자’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 동지들은 권력의 탄압에 굽히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우리가 굽히는 것이 우리의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동아투위 동지들은 누구나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찬송가 460장을 즐겨 불렀다.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찬송가 460장
 
나는 어머니, 아내, 세 살 난 아들과 함께 화곡동에 있는 13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회사에서 쫓겨난 지 두세 달 동안은 동아투위에 대한 각계각층의 도움이 있어서 그런대로 버틸 만했다. 그러나 실직 상태가 장기화하면서 점점 막막해졌다. 아내가 서둘러 조그만 출판사 일자리를 구했지만 먹고사는 일에 대한 불안감이 언제나 우리를 짓눌렀다. 게다가 회사에서 쫓겨난 이후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이른바 ‘담당’ 형사들이 늘 주변을 맴돌았고, 걸핏하면 수사기관에서 나와 내 동지들을 연행해 조사했다.
 
△ 1978년 서울근교서 동아투위 야유회 모임. 오른쪽로부터 고 안성열, 박종만 , 이영록, 양한수, 김동현, 임부섭, 조은주(김동현 부인), 이종욱.
 
그런 가운데 나는 해직 두 달 만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동아투위 두 동지와 함께 집단폭행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사건 전말은 이런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제작거부 농성에 동참하다가 회사로 복귀한 한 기자가 동아투위 임시 사무실로 쓰던 세종여관에 만취한 상태로 찾아와 온갖 주정을 다 부렸다. 그때 방 안에선 동료 여섯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 한 기자와 방문객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래서 다른 동료들이 이를 말리느라 밀고 당기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종로경찰서에서 여섯 명을 모두 연행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세 명을 조직폭력 혐의로 구속했다. 사건은 짜 맞춰진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듯했다. 알고 보니 단순한 형사고발 사건이 아니었다. 이른바 ‘윗선’의 지시에 따른 일종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나는 20일 만에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났다. 워낙 말도 안 되는 사건인지라 검찰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동아일보사에서 강제 축출된 지 석 달째가 되는 6월로 접어들면서 여러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동아투위 대변인으로 동분서주하던 이부영 동지가 6월 11일 수사기관에 연행되었다. 학생들에게 유인물울 배포한 혐의로 이미 두어 달 전에도 한차례 1주일 동안 구류처분을 받은 일이 있었으므로 처음엔 걱정만 했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동지가 2주가 지나도록 풀려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6월 25일엔 성유보 동지가 신문회관 앞에서 정보부로 연행되었다. 정보부가 일을 꾸며도 크게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부가 어떤 조직인가. 이부영과 성유보, 두 동지가 동아투위의 핵심 중 핵심임을 모를 리 없었고, 따라서 그들을 잡아넣으면 동아투위 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정보부가 동아투위 와해 공작 일환으로 그들을 체포했다면 그건 그들의 오산이었다. 두 동지를 감옥에 둔 채 그리 쉽게 와해될 투위라면 당초에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동지는 두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8월 중순에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후일 재심에서 무죄 판결).

생업 대신 동아투위 초대 총무를 맡다

길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나니 우리가 회사에서 쫓겨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실직 상태로 무작정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9월 17일 투위는 매일 아침 회사 앞에 도열하여 벌이던 침묵시위를 끝내고, 장기전에 돌입하기 위해 각기 생업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 여름의 끝자락에 나는 화곡동의 작은 아파트를 팔고 수유리 시장 근처에 있는 누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형의 권유로 그 집 차고에다 사과 가게를 차리고, 몇 주 동안 추석 대목을 겨냥한 사과 장사를 해보았다. 그러나 장사는 애당초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여섯 달 동안의 동아일보사 앞 시위를 끝내고, 각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장기 투쟁에 들어가기로 하였지만, 나는 그 후에도 1년 반 넘게 동아투위 상근 총무로 사무실을 지켰다. 함께 투쟁의지를 다지던 동료 두 명이 감옥살이를 하는데, 나만 내 살길을 찾아 나서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나는 투위 사무실을 지키는 상근 총무를 맡기로 했다.
 
그 가을과 겨울을 넘기면서 투위 사무실은 점점 썰렁해져 갔다. 세종여관을 떠나 내자동 쪽으로 옮긴 투위 사무실은 매일 권영자 위원장과 안성열 선배, 나, 세 사람이 지켰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동지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리고 작은 일자리라도 찾은 동지들은 쥐꼬리만 한 수입이나마 그 일부를 동아투위에 기부했다.
 
1975년 그 치열했던 여름, 나는 그 때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새로운 예수, 고난받는 예수를 만났다. 그 해 초여름부터 나와 내 아내는 해직교수들이 주축이 된 갈릴리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갈릴리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일어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이 살던 땅. 교회 이름은 바로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안병무,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이문영, 김찬국 등 해직교수 6~7명이 돌아가며 설교를 했다.
 
사실 나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이후 그때까지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생활에 파묻히면서 학창 시절 간절히 소원했던 성직의 꿈을 완전히 접고,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일마저 게을리하고 있었다. 믿음은 회의의 구름에 휩싸이고, 겉똑똑이의 지적 오만은 하늘을 찔러 순진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우습게 여기고 기독교의 여러 교리나 제도를 백안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교회 건물도 없이, 틀에 박힌 형식도 없이 참석자들이 빙 둘러앉아 예배드리는 갈릴리교회에서 나는 기독교의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민중의 벗 예수를 알았고, 착취와 굶주림의 현장에 계시는 예수를 알았으며, 모든 억압에서 풀어주시는 해방자 예수를 알았다. 내 믿음은 되살아났고 나는 이 땅의 해방과 평화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 2004년 10월28일 종합청사 앞에서 민주화법제정촉구 연좌농성(좌로부터 박종만, 고 조양진, 문영희, 김동현).
 
실업 3년째가 되어가면서 살아가는 일이 더욱 팍팍해졌다. 아내가 임시직 일자리마저 잃고 쉴 때는 더 그랬다. 결혼반지며 돌 반지며 집안의 금붙이는 모두 팔아 썼지만 정말로 견뎌내기가 힘겨운 상황도 가끔 닥쳐왔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해진 아내는 장사를 해보겠다고 했다. 남대문시장 근처에 새로 생긴 새로나 백화점이라는 곳에 두 평짜리 스낵 가게를 내고 우동과 부침개 등을 팔았다.
 
그러나 대학을 나온 뒤 직장 생활을 하다가 결혼한 아내가 백화점 한 모퉁이에서 장사를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을까? 힘만 들고 장사는 잘 안되니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조그만 구멍가게에까지 정보기관의 이른바 ‘담당’이라는 자가 뻔질나게 찾아와 '지금 남편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아느냐? 잘못하면 패가망신하니 하지 못하게 설득해라'라고 때때로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니 그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결국 아내는 몇 달 만에 그 일을 접고 말았다. 당시 남대문시장에선 홍선주 선배, 김명걸 선배, 김두식 동지 세 분이 옷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도 오래 못 견디고 문을 닫았다.
 
나는 2년 가까이 투위 상근 총무를 맡으면서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각계각층의 연대투쟁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그래서 기독교 중심의 인권운동협의회에도 관여하고, 목요기도회 같은 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도 직간접적으로 동참했다. 나는 신문사에서 쫓겨나올 때까지 언론자유만 보장된다면 박정희 독재체제가 아무리 강고하더라도 머지않아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독재 정권만 무너지면 우리 사회가 훨씬 살기 좋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거리의 언론인이 되어 동일방직을 비롯한 노동 현장의 아픔을 알게 되고, 그들의 한 서린 생존권 투쟁을, 그들의 외침을,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으로 공감하게 되면서 단순한 정치적 억압 체제의 붕괴만으로는 사회 전체의 근본적 변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게 되었다.  

자유언론 투쟁을 넘어 반독재 투쟁으로

당시 나는 수유리에 있는 누님 집에서 살았는데, 내 자형과 고향이 같다는 담당 형사가 그걸 핑계로 걸핏하면 찾아와서 내 동향을 물어가곤 했다. 또 3‧1 민주구국선언 발표 이후, 해마다 3‧1절이나 광복절 같은 국가기념일만 되면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연금이 되풀이되었는데 나도 5~6일씩 두 차례 연금되는 경험도 했다. 4~5명의 경찰관과 방범대원 등이  집 앞에 차 한 대를 세워놓고 아무 법적 근거도 없이 나를 집안에 가둔 채 동네 목욕탕조차 가지 못하게 24시간 감시했다. 실로 법은 있으되 법이 소용없는 무법천지의 세월이었다.
 
긴급조치 9호 발효 이후 잠시 냉각됐던 민주화운동은 76년 후반기 들어 다시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인권문제를 앞세운 카터의 당선이 유력해지기 시작하면서 더욱 고조돼 갔다. 동아투위 사무실도 무언가 모를 희망으로 부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의 움직임에 일희일비하면서 때로는 의기소침해지고 때로는 큰 기대를 걸어보곤 하던 일이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그때까지는 그랬던 게 사실이다.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다시 고조되기 시작한 1977년 4월 ‘민주구국헌장 서명사건’이 발생했다. 민주구국헌장이란 그해 3월에 함석헌 선생 등 재야인사 10명이 발표한 문건으로, 1976년 3월에 있었던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의 최종 판결에 앞서 시국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철폐를 촉구한 것이었다.
 
헌장이 발표되자 이를 지지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동아투위 위원들도 서명에 동참했다. 이 사건으로 동아투위 위원 50여 명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하루 정도씩 조사를 받았다. 나는 서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엿새 동안 조사를 받았다.
 
△ 2017년 11월 동아10기 입사50주년 모임.
 
이 사건이 있은 뒤 동아투위에선 투쟁노선을 둘러싼 약간의 설왕설래가 있었다. 일부 투위 위원들은 투쟁의 대상을 동아일보사로 한정시키고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에 대한 원론적 주장만 펼쳐나가는 것이 옳다는 입장인 반면에 다른 투위 위원들은 각계각층의 민주화운동 세력과 폭넓게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독재 투쟁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동아투위는 여러 논의를 거쳐 적극적인 반독재 투쟁 쪽으로 노선의 가닥을 잡았다.
 
그 무렵 여성의 몸으로 2년 동안이나 온갖 신변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힘들게 동아투위를 이끌어 온 권영자 위원장이 새 위원장 선출을 요청했다. 동아투위는 권 위원장의 고충을 이해하고, 안종필 선배를 2대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에 따라 나도 자연스럽게 상근 총무 짐을 내려놨다. 새 총무는 자유언론실천선언 당시 기협 분회 총무를 맡았던 홍종민 동지가 맡았다.  
 
나는 상근 총무 짐을 내려놓은 뒤에도 거의 매일 동아투위 사무실을 드나들면서 투위 동지 여럿이 함께 하던 <주간시민>이나 다른 기관지 같은 데서 파트 타임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1978년 초여름부터는 KNCC 인권위원회에서 매주 한 번씩 내는 ‘인권소식’을 만드는 일을 했다.

역사는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는 믿음

살아가기는 여전히 힘들었지만, 나도 아내도 그걸 크게 불편하게 생각하거나 한탄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젊어서 그랬을까? 되돌아보면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나 싶을 만큼 살아가기가 팍팍하고 어려웠는데, 어디서 그런 활기와 여유가 생겼던 것일까? 그때가 언제이던가? 투기 광풍이 몰아치던 70년대 중후반 아니었던가? 자고 나면 달라질 만큼 집값은 다락같이 오르는데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집 한 칸 없이 살면서도 기죽지 않고 씽씽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나도 아내도 철이 덜 들었던 탓일까?
 
아니다. 그때 우리에겐 믿음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강하고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셨다’라는 믿음이 있었다. 박정희 독재만 무너지면 자유롭고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역사는 뒷걸음질 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웃음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살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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