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피해자 또 승소 확정…대법, '소멸시효 완성' 일본 주장 배척
- CBS노컷뉴스 송영훈 기자 메일보내기
- 2024-01-11 11:27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또 승소 확정
대법원 최근 연이어 피해자 승소 판결
일본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 배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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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또 승소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최근 계속해 유사한 강제동원 손해배상 사건에서 '소멸시효가 완성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일본 측의 주장을 배척하고 있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11일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등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제철의 상고를 기각하며 피해자 일부 승소로 확정 판결했다. 재판부는 일본제철이 망인 정모씨의 유족에겐 4285만 원을, 피해자 김모씨 등 2명에겐 각각 2857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앞서 이들은 1943년 3월 일본 큐슈 소재 일본제철 야하타 제철소에 강제로 끌려가 노동했다. 이후 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번 재판에서 일본제철은 그동안 일본 전범기업들의 재판 전략과 동일하게 '소멸시효가 완성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일본 전범기업에게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재판은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과 이를 확정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 판결'이 있는데 일본은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소멸시효 계산 시점으로 봐야 한다고 계속해 주장하고 있다. 2012년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 측의 주장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최근 일본의 이러한 주장을 계속 배척하고 있다. 파기환송 판결이 확정된 것은 2018년 판결이고, 해당 확정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피해자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사유가 존재했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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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재판부도 "2012년 판결은 파기환송 취지의 판결인데 그로써 해당 사건 당사자들의 권리가 확정적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었고, 환송 후 재판에서 새로 제출되는 주장과 증거에 따라 환송판결의 기속력이 미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이나 그 상속인들로서는 2012년 판결 선고 이후에도 개별적으로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을 통해 실질적인 피해 구제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의구심을 가질 수 있었다"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2018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 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법적 견해를 최종적으로 명확하게 밝혔다"라고 설명했다.
이를 근거로 재판부는 "이러한 사정을 모두 고려하면 강제동원 피해자의 상속인인 원고들에게는 2018년 전원합의체 판결이 선고될 때까지는 피고(일본제철)를 상대로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라고 판결했다.
이날 재판부는 개인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도 명확히 밝혔다.
강제동원 배상 판결 줄 잇나...수백억 배상에 '3자 변제' 시험대
日시민단체들의 분노…"日기업, 韓강제동원 피해자에 배상·사죄하라"
4개 시민단체 성명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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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g@heraldcorp.com
‘위안부’ 손배소 이겼다, 이제 일본 정부에 직접 묻는다
등록 2023-11-23 17:49수정 2023-11-23 22:17
서울고법, 1심 각하 뒤집고 2심 원고 승소 판결
피해자 쪽 “그간 승소·각하 엇갈려 진상규명 어려워
이제 장애 해소됐으니 일본 책임 있는 사과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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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기자 ph@hani.co.kr
일본 정부 격렬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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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성은 23일 저녁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 명의로 “극히 유감”이라는 담화를 내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외무성은 담화문에서 “이 판결은 2021년 1월8일 (1차) 판결과 같이 국제법 및 일·한 양국 간의 합의에 명백히 반하는 것으로 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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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일본 정부에 ‘위안부’ 배상 책임” 재확인한 역사적 판결
등록 2023-11-23 18:03수정 2023-11-24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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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만 믿었는데…‘위안부’ 판결에 일본 정부 당혹
담화문 발표한 일본 외무성의 충격과 불안
한국 ‘좌파’와 화해하지 않는 한 문제는 늘 원점
민주화 이전과 이후의 한국 차이를 모르는 일본
일본 정부 주장의 근거, 한일 기본조약 제2조 1항
'위안부'문제는 한국의 문제 아닌 일본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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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의 1심 판결을 뒤집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불법행위에 대해 일본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위자료(배상)를 지급해야 한다는 23일 서울고등법원 판결에 일본 정부가 몹시 당혹스러워 하는 듯하다.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라 선언(3·1절 기념사) 한 윤석열 정권의 등장에 크게 고무돼 한일 간 ‘과거사’ 문제가 일단락된 것으로 믿고 싶어하는 일본 보수우파 주류세력의 반응을 보면 그들이 느꼈을 충격과 ‘분노’, 그리고 불안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향은 한정적”일 것이라는 그들의 바람대로 될까.
담화문 발표한 일본 외무성의 충격과 불안
일본 외무성은 25일 서울에 올 것으로 알려진 가미카와 요코 외상 명의로 된 담화문에서 “이번 판결은 국제법 및 한일 양국간 합의에 명백히 위반하는 것으로 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한국 정부가 “스스로의 책임으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다시 한번 강하게 요구한다”고 밝혔다.
윤덕민 주일 한국대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항의하기도 했다. 외무성은 그 자리에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해 일-한 간 재산·청구권 문제는 1965년 일한청구권·경제협력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이 끝났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2015년 일-한 합의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을 일·한 양국 정부 사이에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윤 정부 등장 이후 잘 들을 수 없게 된 판에 박은 듯한 일본 정부 쪽의 이런 반응이 다시 요란하게 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과 불안의 강도가 컸다는 걸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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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주장의 근거, 한일 기본조약 제2조 1항
일본 정부가 한국의 ‘국제법 및 한일 양국간 합의 위반’의 증거물로 제시하는 ‘일한청구권·경제협력 협정’의 해당 조문은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서명되고 그해 12월 18일 발효된 ‘한일 청구권협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이 협정과 동시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을 묶어 ‘한일협정’이라고 통칭) 제2조 1항이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이 청구권협정 제2조 1항이 얘기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는 다음과 같다.
“이 조항의 (b)의 규정에 따라, 일본의 부동산 및 제2항에 언급된 지역의 일본 국민들의 자산 처분 문제와 현재 그 지역들을 통치하고 있는 당국자들과 그곳의 (법인을 비롯한) 주민들에 대한 (채무를 비롯해서) 그들의 청구권들, 그리고 그러한 당국자들과 주민들의 부동산 처분과 일본과 그 국민들에 대한 그러한 당국자들과 주민들의 채무를 비롯한 청구권들의 처분은 일본과 그 당국자들 간에 특별한 협의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그 당국이나 거류민의 재산 처분과, 일본과 일본 국민을 상대로 하는 그 당국과 거류민의 청구권(부채를 포함한)의 처분은 일본과 그 당국 간의 별도 협정의 주제가 될 것이다. 제2조에서 언급된 지역에서의 어떤 연합국이나 그 국민의 재산은, 현재까지 반화되지 않았다면 현존하는 그 상태로 행정당국에 의해 반환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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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
청구권협정 제2조 1항에 명기돼 있듯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조약 체약국 쌍방의 국민이나 법인 간의 재산, 권리 및 이익에 관한 것이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a)가 규정하고 있는 것도 체약국 쌍방 국민(주민)이나 법인 간의 부동산 처분 등을 비롯한 재산상의 채권 채무 관계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것은 강제동원당한 징병 징용자나 일본군 위안부 등이 입은 피해, 즉 비인도적 처우나 전쟁범죄로 인한 피해 배상이 아니다. 여기서 해결됐다는 것은 점령이나 식민지배로 원래 하나의 나라나 지역이었던 상태가 일본의 패전으로 분리되면서 거기에 따르는 채권 채무관계를 처리하는 문제를 가리킨다.
해결되지 않은 것
침략이나 식민지배 때의 강제동원 등으로 피지배 주민들 개개인이 입은 인도나 전쟁범죄와 관련된 피해에 대해서는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아예 다루지도 않았다. 따라서 강제동원 피해자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배상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기는커녕 아예 문제로 다뤄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일 청구권협정 제2조 1이 마치 모법이요 그 근거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피해 당사국인 한국과 북한 중국 등은 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에 당사자로 초청받지도 못했고, 서명할 자격도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재대로 묻지도 않았다. 미군과 연합국 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 등은 따졌지만, 일제의 식민지배나 침략을 당한 조선, 중국 등의 주요 피해국과 그 국민들에 대한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도 않았고, 배상도 하지 않았다.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 연합국이란 이름의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배를 받았다가 일제가 패망하기 전 일시적으로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 대해서는 최소한도의 범위 내에서 배상을 했지만 남북한과 중국에 대해서는 전쟁범죄 책임을 묻지도 배상도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서방 ‘연합국’들의 피해에 대해서만 그나마 좀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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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 위반이라는 것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이런 한일청구권협정이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근거로 강제동원 피해자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면서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자들에개 배상하라는 2012년 한국 대법원 판결과 2018년 10월의 대법원 최종판결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이미 다 해결한 문제를 다시 끄집어냈다며 국제법 위반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그 대법원 판결을 취소시키거나 법 자체를 바꿔 다시는 그 문제를 일본의 책임과 관련지어 거론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하지 않고 방치한다며 한국 정부를 비난하고 그 또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진짜 국제법을 위반한 건 누구인가
더 근원적으로, 애초에 누가 국제법을 위반했는지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일본이 얼마나 적반하장식 주장을 하고 있는지 자명해진다.
일본 외무성 담화문이 “국제법 및 한일 양국간 합의에 명백히 위반하는 것으로 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한국정부가 “스스로의 책임으로 국제법 위반상태를 시정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다시한번 강하게 요구한다”는 문구는 정반대로 읽혀야 한다.
곧 “국제법 및 한일 양국간 합의에 명백히 위반하는 것으로 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야 할 주체는 일본 정부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돼야 하며, “스스로의 책임으로 국제법 위반상태를 시정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다시 한번 강하게 요구한다”고 말해야 할 주체도 일본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 정부가 돼야 한다.
왜냐하면 과거사와 관련한 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내고 지금까지 아무런 사죄도 배상도 재발 방지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이지 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 문제는 애초에 일본의 문제이지 한국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를 제3자 변제 등의 편법으로 해소하려 하면서 한일 간 과거사 문제를 왜곡하고, 한국 대법원 판결과 피해자들의 대일 배상 요구에 오히려 문제가 있는 듯 호도함으로써 그것을 '한국의 문제'로 바꿔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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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무효’의 해석을 둘러싼 약육강식 논리
이는 한일 청구권협정과 동시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의 제2조가 안고 있는 문제와 연결돼 있다.
한일 기본조약 제2조는 이렇게 돼 있다.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조약은 ‘한일합방조약’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체결된 한일 간의 모든 조약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 1905년에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 을사늑약)을 들 수 있다.
한일 기본조약 제2조는 예컨대 이 한일합방조약과 을사늑약 등이 “이미 무효”임을 규정한 조항이다. 이 ‘이미 무효’라는 구절이 문제다. 그냥 ‘무효’라고만 했다면 일본이 패전하고 한국이 그 치하에서 벗어났을 때까지, 그 이전에 체결된 한일 간의 모든 조약과 협정들은 무효였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 쪽이 여기에 ‘이미’(already)를 끼워 넣자고 고집했고, 이 제2조를 일본이 망하기 전까지, 즉 한국이 해방(또는 정부 수립)되기 전까지 한일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과 협정은 당시로서는 국제법 규정대로 한 것이니 합법이었으나, 한국이 해방(정부 수립)된 뒤에는 ‘이미’ 무효가 됐다고 해석(미국이 종용한 한일협정은 조문이 영어로 돼 있다)했다.
한국쪽은 당연히 그런 조약과 협정들은 체결 당시부터 ‘이미’ 무효였다고 주장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 쪽 주장이 옳지만, 미국은 일본 쪽 주장을 받아들여 그 구절을 한국과 일본 양쪽이 각각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게 했다. 미국에겐 일본이 훨씬 더 이용가치가 큰 나라고, 당시에는 더욱 그랬다.
일본은 지금까지 미국이 눈감아 준 이 해석에 근거해서 한국의 정부 수립 이전 과거에 체결한 한일합방과 늘사늑약, 식민지배 시절의 강제동원령 등이 모두 당시로서는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다며, 그로 인한 한반도의 그 주민들이 입은 심적, 물적 피해를 배상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신에 침략과 식민지배,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모든 조약과 협정은 불법이었으므로 당연히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쪽 주장을 오히려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라 주장하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한일협정은 미국과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뒤처리를 마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된 1951년 9월 한 달 뒤인 그해 10월부터 미국이 사실상 단독으로 지배하던 도쿄의 점령군사령부(GHQ)에서 미국의 압박 아래 시작됐다. 그때 한국은 그 전 해 6월에 발발한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고, 전쟁 수행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생계를 거의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아무 힘도 없는 나라였다. 협상력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일본은 그 전쟁 발발로 엄청난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급속히 패전 이전의 국력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미국은 극빈 상태였던 한국의 재건 재원을 그 전쟁으로 다시 일어선 일본이 대도록 기획했다. 한일협정은 그것을 위해 체결됐다. 한국전쟁으로 동서냉전이 본격화하면서 미국은 일본과 한국을 하나로 엮어 자국의 동아시아 냉전전략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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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건이 된 과거사 처리
그러기 위해 두 나라를 하나로 엮어야 했는데, 과거사가 발목을 잡았다. 1951년 10월에 시작된 한일협정을 위한 협상이 1965년에야 성사된 데에는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한일 간의 반목과 불화, 불신이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이미 무효’를 양국이 각자 자국에 유리하도록 해석하게 한 조치에서도 보듯 과거사 문제를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땜질해서 한일 유착을 유도하는 쪽으로 줄곧 정책을 펴 왔다.
그런 문제는 두 나라가 알아서 하라는 얘기는 절대 약자인 한국이 무릎 꿇고 들어가라는 얘기나 같다. 돈이 급했던 박정희 등 군부세력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 등 과거사의 제대로 된 청산을 포기했다. 그들의 주력이 일제 괴뢰국 만주국에서 일본제국 유지와 확장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이른바 ‘친일파’로서의 전력도, 패전 뒤에도 청산되지 않고 전후의 새 체제 지배자로 재등장했던 일본 우파 주류세력과 의기투합하게 만든 면이 있었다.
일본 패전 이전의 모든 조약과 협정이 위력에 의한 강요, 즉 불법이었다는 것은 세계의 모든 식민 지배 및 침략의 역사를 보더라도 자명했다. 어느 부족이나 민족이 타민족이나 부족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침략하고 식민 지배했을까. 그야말로 형용모순에 가까운 그런 유치한 주장을 일본 보수우파 주류세력은 아직도 읊조리는 자기 기만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일제 지배는 미일 합작품
1904년 2월 8일, 일본제국 해군은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제국 극동함대를 공격했다.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이틀 뒤인 10일이었다. 한반도를 무력으로 장악한 일제는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고,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권을 박탈했다. 나라는 이때 이미 일제 손아귀에 들어갔다.
다음해인 1905년 7월 27일 일제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해 이를 묵인받았다. 8월 12일에는 제2차 영일동맹을 채결해 영국으로부터도 이를 승인받았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자가 된 데에는 러시아의 확장을 막으려던 미국의 재정 지원과 영국의 군사정보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제의 조선지배는 미국과 일제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합작관계는 두 나라가 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가 패망한 뒤 미국이 한반도를 분단하고 남쪽 절반을 지배하는 과정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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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9월 5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조약을 체결한 일제는 이렇게 조선 지배를 위한 열강들의 지지를 확보한 뒤 11월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로 서울에 파견했다. 이토는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사실상 식민지로 만든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 을사늑약)안을 들이대며 고종을 협박하고 무장부대를 동원해 대신들이 도장을 찍도록 강요했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 5적’이 그들의 협박에 굴복했다.
이를 토대로 1906년 2월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사실상 대한제국의 전권을 장악했다. 고종은 도장을 찍지 않았고, 황실고문 헐버트를 통해 조약 체결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한일합방조약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대조전의 흥복헌에서 ‘한일합방조약’ 체결을 위한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가 불법적으로 열렸다. 그날 일제는 소요 사태가 발생할 것에 대비해 나남과 청진, 함흥, 대구 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밤새 서울로 이동시켰다. 이들과 용산에 주둔한 제2사단이 경비를 선 가운데,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약에 반대한 학부대신 이용직을 쫓아내고 이완용 등 8명의 친일파 대신들을 앞세워 조약 체결을 강행했다.
일제의 불법무도한 침략과 식민지배의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단면이 1895년 10월 명성황후(민비) 시해 사건이다. 도쿄 정부의 지시 아래 미우라 고로 당시 주한 일본공사 등 최고위급 관공리들과 대륙낭인 등 극우민족주의자들, 폭력배들이 저지른 그 만행의 주역들을 일제는 본국으로 송환해 국제적인 시선을 피한 뒤 모두 무죄로 풀어주었다. 일본에서 그 사건 자체에 대해 알고 있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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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좌파’와 화해하지 않는 한 문제는 늘 원점
일본이 자신들이 저지른 이런 처참한 과거사를 사실대로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하고, 동일한 죄업이 반복되지 않게 뒷세대에 알리고 교육하는 과거사 처리의 기본원칙을 실천하지 않는 한, 한일 관계는 일본 보수우파 주류가 바라는대로 흘러갈 수 없다. 일본이야말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일 간 과거사 문제는 늘 원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베 신조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뒤 그 열기를 업고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여론에 밀려 ‘불가역적’이라 못박은 2015년의 한일 위안부합의(12·28 합의)를 형해화하고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을 명한 대법원의 확정판결 취소 요구를 수용하지 않자 반도체 소재장비 수출 규제까지 들고 나와 아예 대화를 끊어 버렸다. 그때부터 아베 정권의 한국 정책은 ‘좌파’정부가 물러나고 ‘우파’정부가 등장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냥 기다린 게 아니라 한국의 ‘좌파’정부 재집권을 막기 위한 온갖 방해공작들을 동원했다. 아베의 소원대로 우파로의 정권 교체 뒤 한국의 대일정책은 하루아침에 ‘반문재인 정부’ 쪽으로 뒤집어졌고 자민당 우파정부는 소원을 성취했다.
하지만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가 지적했듯이, 일본은 한국 ‘좌파’(진보)정부나 진보세력과 ‘화해’하지 못하는 한 제대로 된, 온전한 한일관계를 수립할 수 없다. 그들 구미에 맞는 ‘우파’와의 손잡기에만 기댈 경우 한일관계는 늘 반쪽짜리 정상화일 수밖에 없고 과거사 문제 해결도 불가능하다. 정권이 바뀌면 과거사 문제는 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민주화 이전과 이후의 한국 차이를 모르는 일본
일당 장기집권이 거의 굳어져 버린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는 언제 정권 교체가 이뤄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정치적 역동성이 있다. 담화문까지 낸 일본 자민당 우파 정권이 느끼는 충격과 불안의 원천도 한국의 이런 이질성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일본 우파 주류세력은 민주화 이전의 한국과 민주화 이후의 한국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절대강자였을 때는 그래도 상관없었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사설] 강제동원 또 승소, 이래도 ‘3자 변제안’ 고집할 텐가
등록 2023-12-21 18:26수정 2023-12-22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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